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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법특강]요한 칼빈(1509-1564)과 교회법(2)
    다가오는 10월 31일은 종교개혁 기념일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법을 수단으로 교회를 개혁했다. 개혁가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교회에서 목회하며 교회법을 작성했고, 이를 도구로 교회를 개혁했다. 제네바교회법령(1561년)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호는 제네바교회법령 전체(173 조항)를 개관했다. 이번 호는 제네바교회법령의 특성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제네바교회법령은 성경(복음)에서 비롯된 교회법령이다. 제네바교회법령 서문은 교회법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도시와 영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비롯된 다음과 같은 교회법령을 따르고 지킬 것을 제정하고 명령하였다.” 교회법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교회법령 상당 부분(4-68조)은 네 직분, 목사, 교사, 장로, 집사에 관해 할애하고 있다. 이 점에서 교회법령은 직분의 법이다. 눈에 띄는 것 하나는 장로직에 관한 조항이다. 장로는 모든 교인의 생활을 감독하며, 넘어지는 자들과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이들을 권면하는 직무를 맡았다. 필요한 때 형제 사랑에서 나오는 책망과 징계를 위해서는 회(會)에 보고하여 다른 장로들과 함께 이 일을 했다. 개혁가 루터는 장로직의 명예는 회복했으나 정작 장로직은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칼빈은 교회에서 장로를 세워서 권징(勸懲)의 일을 맡김으로 교회를 개혁했다. 목사와 함께 시행하는 권징은 교회적인 성격을 가져야 했고, 교회 법정은 세상의 법정과는 다르게 기능을 해야 했다. 권징은 목사만의 직무가 아니라 장로의 회에 속한 일이었다. 장로는 시의회의 의원이자 모범적인 교인 중에서 선출했다. 소의회에서 2명, 60인회에서 4명, 200인회에서 6명 등 12명을 선출했다. 임기는 원칙적으로 1년이다. 일 년 후 시의회 선거가 마친 후 직무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교체할지를 결정했다. 신실하게 직무에 전념했다면 이유 없이 자주 교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셋째, 22조에서 30조는 목사의 권징을 엄중하게 다룬다. 목사에게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범죄 17개와 형제 사랑의 권면만으로는 그칠 수 없는 범죄 17개를 각각 열거하고 있다. 첫째 부류에 속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단, 분리, 교회질서에 대한 거역, 민사 처벌에 합당한 명백한 신성모독, 성물 매매 및 모든 부패한 선물들, 다른 목회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술책, 합법적인 휴가가 아님에도 교회를 방임하는 것, 사기, 위 증, 음란, 절도, 음주벽,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싸움, 고리대금, 법에 금지되고 추문을 일으킬 만 한 놀이, 춤과 그 유사한 풍기문란, 국가 비방죄, 다른 이로 하여금 교회를 분리하게 하도록 하는 범죄. 둘째 부류에 속한 것은 다음과 같다: 성경을 이상하게 다루어 소동을 일으키는 태도, 쓸데없는 문제들을 추구하는 호기심, 어떤 다른 교리를 꺼내 놓거나 교회에서 인정되지 않는 교리를 만들어내는 태도, 성경 연구와 성경읽기에 태만한 것, 아첨에 가까운 악덕들을 책망하는 일에 게으른 것, 직무에 요구되는 일을 하지 않는 태만, 천박한 농담, 거짓말, 중상모략, 음담패설, 욕설, 경솔함, 나쁜 간책, 인색함과 지나치게 검소함, 상식을 벗어난 분노, 소란과 싸움, 의복이나 몸짓 및 행동에서 목회자에게 합당치 않는 문란함. 30조는 이러한 권징을 위해 3개월마다 한 번씩 돌아보며 서로 간에 권면할 것이 있는지를 결정하여 적절하게 고칠 것을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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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남택정 장로]다수가 정의인가?
    오늘의 한국 사회는 ‘크기’와 ‘숫자’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 정치에서는 의석의 수가 곧 힘의 근거가 되고, 교회에서는 교인의 수가 힘의 잣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숫자가 곧 옳음의 증거는 아니다. 최근 국회에서도 절대 다수의 힘으로 법안을 밀어붙이거나, 다른 의견을 불편한 존재로 치부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겉으로는 ‘국민의 뜻’이라 말하지만, 그 안에 진정한 공론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독주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대형화되고 조직화된 교회의 흐름 속에서 “많이 모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사업이나 목회적 결정이 성경적 원칙에 부합하는가를 검토하기보다는, “다들 그렇게 하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앞선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다수의 관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있다. 다수가 찬성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으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다수의 불평에 휩쓸려 모세를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민수기 14장). 바알 선지자 450명과 맞섰던 엘리야는 외로웠으나 진리의 편에 섰기에 하늘의 불을 경험했다(열왕기상 18장). 미가야 선지자는 왕과 400명의 예언자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 곧 그것을 말하리라”(열왕기상 22:14)고 선언했다. 이처럼 성경의 역사는 다수의 여론이 언제나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경고를 깊이 새겨야 한다. 교단은 종종 정치화되고, 언론은 침묵하며, 성도들은 혼란 속에 방황한다. 교회의 성장이나 재정의 풍요가 곧 신앙의 성공으로 오해되고, 진리를 지키려는 소수의 외침은 ‘비판’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3) 하셨고,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요한 복음 18:37)를 귀히 여기셨다. 교회의 본질은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서 진리가 얼마나 살아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의 교회 위기는 외형의 축소가 아니라 비판과 검증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성숙한 공동체 일수록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성경으로 검증하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는 법이다. 바울사도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데살로니가전서 5:21)고 교훈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면역력을 지키는 길이다.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검증 없는 순종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성찰이다.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 편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진리의 길은 아니다. 때로는 소수의 자리에서 외롭게 서야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태복음 5:13-14) 하셨다. 빛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소금은 적을수록 그 맛이 깊다. 교회가 다시금 빛과 소금의 사명 을 회복할 때, 사회도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함성이 아니라 양심의 고백, 힘의 논리보다 진리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많은 자가 아니라 충성된 자”(디모데후서 2:2)이다. 다수의 찬성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한 사람의 헌신이 교회를 살린다. 다수가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진리는 말씀 안에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이 단순한 진리를 붙잡는 날, 우리는 외형의 크기보다 내면의 깊이로, 세상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공동체로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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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목회자칼럼]하나님이 마침표를 찍기 전, 마침표를 찍지 말라!
    미국의 대공황 시절, 권투 선수인 짐 브래독의 실화를 다룬 영화 ‘신데렐라 맨’이 있다. 그는 한때 라이트 헤비급의 유망주로 촉망받던 선수였다. 그러나 경기 중 부상으로 오른손이 부러지고, 그는 더 이상 링 위에 설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삶은 순식간에 추락했다. 권투 선수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그는 부두 노동자가 되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일조차 버거웠다. 대공황의 혹독한 겨울, 불을 피울 연료조차 구할 수 없어 아이들은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감기와 폐렴으로 기침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는 “이제 정말 끝인가?”라는 절망 속에 놓였다.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정부의 구호소를 찾아갔다. 실업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던 그곳에서, 그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서류를 내밀었다. 그날 그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바닥이 새로운 출발선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포기했던 그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어!”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쳤다. 나이는 많았고, 몸은 망가졌으며, 오른손은 여전히 완치되지 않았다. 누구도 그의 복귀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섰다. 그순간 그의 곁에는 뜻밖의 사람들이 있었다. 친구는 재산을 팔아 장비를 마련해 주었고, 부두에서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당을 모아 그를 응원했다. 절망의 시대, 남의 성공을 시기하기보다 함께 울고, 함께 밀어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사랑과 헌신이 짐 브래독의 두 번째 인생을 지탱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초강타자 맥스 베어를 상대로 15라운드까지 버텨 끝내 판정승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신데렐라 맨’이라 불렀고, 그의 승리는 대공황 속에서 희망을 잃었던 이들에게 “아직 끝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되었다. 이 이야기가 던지는 여운은 단순한 스포츠의 감동을 넘어선다. 인생의 진짜 실패는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좌절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이제 다 끝났다”고 스스로 문장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쉼표를 찍으신다. 그 쉼표는 멈춤이 아니라, 숨 고르기와 새로운 방향 전환의 시간이다. 인생의 문장이 멈춘 듯 보일 때, 사실은 하나님이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계신 것이다. 성경 속 인물들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모세는 40년간의 이집트 왕궁에서의 화려한 시간을 보낸 뒤, 또 다른 40년을 광야의 목자로 살았다. 인간의 눈에는 실패로 보였던 그 시간이 하나님께는 사명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집에서의 종살이와 특히 누명으로 감옥에 가야만 했던 철저히 잊힌 존재가 되었지만, 바로 그곳에서 애굽의 총리가 될 토대를 다졌다. 다윗은 쫓기는 도망자였으나, 그 절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왕의 심장을 갖췄다. 인간의 눈에 마침표로 보이던 그 순간이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지금 가정이 흔들리고, 자녀의 길이 보이지 않으며, 일의 열매가 없어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고 있기에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분은 쉼표 뒤에 또 다른 문장을 준비하신다. 우리가 생각하는 실패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을 때 그것은 새로운 문장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의 멈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의 쉼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침표를 찍을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인생을 써 내려가고 계신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그 문장을 다시 읽게 될 때 깨닫게 될 것이다. “아, 그 쉼표가 멈춤이 아니라, 은혜의 쉼표였구나.”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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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예수님은 누구 위해 죽으셨나요?"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나요?”라는 묻는 세례문답 목사에게 “우리 며느리 위해 죽으셨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부흥 집회를 인도하는 설교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회자되었다. 그런데 그 일화의 진원지가 경남 진주의 진주교회였다는 점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정대리 유원영(柳遠榮)의 딸로 출생하여 진주에서 성장한 유수점(柳壽点, 1893.10.20-1997.3.2)씨는 23세가 되던 1916년 3월 3일 안영호(安英鎬, 1897.3.30-1966.8.30)와 혼인하여 진주군 봉래동 38번지에서 살고 있었다. 진주교회당 인접한 곳에서 살게 된 유수점은 자연스럽게 진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게 된다. 이때는 커를 선교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알렌 목사, 곧 안란애 선교사가 담임하고 있을 때였다.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된 유수점은 1917년경 세례를 받았고 진주교회 세례교인이 되었다. 1918년 11월에는 한국인 박성애 목사가 안란애 선교사와 더불어 위임동사목사로 일하게 된다. 점차 신앙의 도리를 깨닫게 된 그는 그때부터 주변 가족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시급하게 여긴 전도 대상은 시모(媤母) 윤성순(尹聖順)이었다. 당시 시어머니는 50살이 넘은 나이로 그 당시로는 할머니였다. 평소에도 며느리의 예를 다했지만 전도할 마음으로 더욱 시모를 공경했고,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도 차츰차츰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며느리의 청에 못 이겨 진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에 대해 무심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종교라고 무시했던 시어머니가 진주교회에 출석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변화였다. 그렇게 하여 약 6개월이 지나고, 윤성순 할머니는 어렵게 학습 문답을 받았다. ‘학습’이라고 하지만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다시 6개월이 지난 후 세례를 받게 되었다. 본인의 자원이라기보다는 며느리 유수점의 강권에 못 이겨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수세일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지만 1919년에서 1920년 어간이었다. 이때 며느리 유수점 집사는 박성애 목사의 세례문답에 대비하여 시어머니에게 세례문답을 준비하면서 이런 저런 예상질문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도와주었다. “어머니, 목사님이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라고 물으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세요.” 그리고 ‘누구 죄 때문에 죽으셨느냐’고 물으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라고 대답하면 된다고 일러 주었다. 이런 준비를 거쳐 실제로 세례문답을 받게 되었다. 윤성순 할머니를 비롯한 세례지원자들은 교회당에 모였고, 문답위원은 안란애 선교사와 박성애 목사, 그리고 박영숙 장로였다. 예상했던 바대로 박성애 목사는 윤성순 할머니에게 물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지요?”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이때 윤성순 할머니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저의 며느리 죄 때문에 죽었지요.” 며느리가 ‘내 죄 때문에 죽었다’ 라고 대답하라 했기에 윤선순 할머니는 그것을 ‘며느리 죄 때문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세례문답 위원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으나 윤성순 할머니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때의 세례문답 이야기는 재미있는 일화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부흥사들의 입을 통해 진주에서 경상도 지방으로, 그리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문답 이야기는 바로 진주교회 세례문답식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윤성순 할머니는 여러가지로 부족했지만 세례 신자가 되었고, 며느리 유수점 집사는 그 후에도 열심히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유수점 집사는 4남 3녀 곧 7남매를 두었는데, 이들은 다 믿음으로 성장했고, 교회 장로 혹은 권사, 그리고 집사가 되어 충성스럽게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유수점 집사의 장남 안성제(安聖濟, 1922.7.25-1981. 3.20) 집사는 진주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1943년 1월 5일 하동 고전 출신인 정상채(鄭尙采, 1925-2003)와 혼인했다. 성장한 후에는 배영초등학교 교사로, 그리고 교무주임으로 일하면서 진주교회 성가대장으로 혹은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했다. 1959년에는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이주하여 범천교회에 출석했다. 그의 부인 정상채는 범천교회 초대 권사가 되었다. 안성제 집사의 아들이 안동상(安東相, 1947- ) 장로(울산동부교회), 안봉상장로(울산미포교회), 딸이 안행숙 사모(부산제3영도교회 정우진 원로목사 부인)이다. 진주교회에 출석하던 유수점 집사는 후에 막내딸이 살고있는 경남 사전시 곤양읍의 곤양교회로 이명하여 1979년 1월 2일 곤양교회 초대권사가 되었다. 후에는 딸 안정애가 살고 있는 울산으로 옮겨가 울산남부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중 1997년 3월 2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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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10-24
  • [교회건축칼럼]교회건축의 기회요소와 위험요소의 분석
    교회건축을 해야되는 상황은 여러요인이있다. 재개발, 재건축, 도시재생사업등은 교회의지와 상관 없이 건축을 해야되는 이유이다. 또, 공간이 부족하거나 건축수명이 다해서 기능이 현저히 떨어질때도 건축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이와같은 여러상황으로 건축이 필요할때에 교회건축의 기회요소와 리스크요소가 복합적으로 발생된다. 기회요소는 더욱 발전시켜야하며 리스크요소를 없애는 건축의 전략적 분석이 필요하다. 지역의 상황이나 환경과 도시계획적 내용들은 건축과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교회 주변환경이 낙후되고 도시인프라 시설도 잘 안 되어있는 곳들은 대부분 어린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다. 부모님들은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기때문이다. 교회건축시 이런 장소와 지역이라면, 방과후 교실 키즈도서관, 키즈카페와 같은 공간은 오히려 교회성장의 핵심요소로 작용한다 리스크요소가 기회요소가 되는 경우이다. 재개발 재건축의 경우 세대구성을 분석해보면 40~50대 핵가족이 대부분이다. 이런 가족형태가 가장 필요한 공간은 아이들의 케어에 관련한 공간이다. 키즈도서관, 키즈방은 재개발 지역의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이 된다. 또, 도심지의 경우 지가가높고 상업시설 중심지역 이기 때문에 어르신의 공간이 부족해지게된다. 서울 강남은 노인실버 시설은 거의 없다. 현실적으로 설치할 수 없다. 이 경우 교회공간에 실버커뮤니티센터나 휴게공간은 노년층을 교회로 집중하게 만든다. 이처럼 주변의 환경과 여건을 세심히 분석하면 교회의 지속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 교회주변에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등의 교육시설이 있다면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교회로 이끌 수 있는 전략이 수립되어야한다. 교육공간을 평일에 스터디카페로 변형할 수 있는 공간구조가 필요하다. 인터넷 설비, 탕비실, 개수대. 작은휴게실의 준비는 교육공간을 청소년의 공간으로 만든다. 몇 년전 미국교회 탐방때에 어느교회의 유치부실현관 앞에 게임부스가 설치되어있었다. 내용은 성경의 컨텐츠였다. 그런데 많은 아이들의 가장인기있는 곳이였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더 윈윈 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들은 교회를 역동적이게 만든다. 교회의 소그룹실은 지역의 상담실이나 청년취업센터, 소회의실로 지역사회가 사용할 수 있게 일부를 개방한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건축은 크게 네가지의 전략의 틀을 가지고 진행 수 있다. 첫째, 건축을 앞두고 있는 우리교회의 강점은 무엇인가. 그것을 더욱 극대하하기위한 방안을 수립하는 것은 교회를 차별화시킨다. 둘째, 약점이다 우리교회가 건축시에 불리한 점은 무엇인가. 그것을 도출해내고 개선시키는전략은 교회축의 리스크를 방지할 수 있다. 셋째, 기회요소이다. 교회건축을 통해 우리 교회가 어떤 기회를 창출해낼 수 있는가? 이다. 전도와 선교와 성장의 열매를 구체화하는 단계이다. 넷째, 위협요소이다. 건축의 진행을 가로막거나 방해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를 분석해보는것이다. 건축비, 전문적 지식의 부족, 부지 여건의 상황등을 파악하면 그것을 해소시키는 대안이 수립되기 때문에 위협요소들은 오히려 리스크방지에 주요 해결 내용이 될 수 있다. 이상의 네가지 분석의틀은 교회건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전략의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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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건축칼럼
    2025-10-24
  • [다음세대칼럼]스마트폰 중독에서 청소년을 자유하게 하자
    청소년 집회와 일반 초중고 강의를 가면 무려 스마트폰 중독이 무려 97%가 넘는다. 충격이다. 3% 중독이 아니고 스마트폰 관리를 잘하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대안학교를 다녔다. 쉽게 말해 학교규칙과 학교에서 부모에게 요구한 규칙으로 같이 지도해서 폰 중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목사의 자녀마저도 대략 90%는 중독이었다. 스마트폰은 연령이 낮아질수록 더 높은 중독 경향성과 더 심한 피해를 준다. 뇌가 덜 성장했기 때문이다. 어린이·청소년은 두개골이 얇고, 뇌 조직의 전기적 성질이 달라 동일한 기기 사용 시 흡수되는 RF 에너지(SAR)가 성인보다 크기 때문이다. 자기 관리력이 더 자라야 할 때 유혹에 노출되어 노예가 되고 만다. 1) 스마트폰의 피해 중에 전자파의 피해를 대부분 모르고 있다. 스마트폰은 주로 수백 MHz ~ 수 GHz 대역의 무선전파(랜·셀룰러 신호: RF-EMF)를 발생한다. 2) 스마트폰 지도에 다음 여섯 가지는 꼭 지키자. 첫째, 청소년이 전자파로 인한 피해를 충분히 이해하여 그에 맞은 협의를 하여 스마트폰의 사용 규칙을 정하자. ① 통화 시 스피커폰/이어폰(유선) 사용으로 귀와 휴대폰 머리 간 거리 늘리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노출이 감소한다. ② 통화 시간과 사용 시간을 줄이기 — 개인pc로 유튜브, 게임, 강의 듣기를 하게 하자. ③ 밤에 기기를 침대에서 멀리 두기- 수면 질 개선 및 불필요한 상시 송수신(백그라운드) 노출을 감소한다. ④ 어린 자녀에게는 스마트폰을 아예 주지 않거나 사용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여야 발달·수면. 중독 문제를 예방한다. ⑤ 기기 보관 방법을: 몸에 붙여 보관(특히 허리·가슴 주머니)하는 것을 피하자. 몸에서 사용하지 않을 때 2m 이상 두자. 이런 권고는 전자파 차단하는 조치도 되지만 노출을 현실적으로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WHO와 여러 공중보건기관도 권고하는 내용이다. 둘째, 부모와 교회 지도자도 스마폰 바른 사용을 실천하면서 해야 한다. 셋째, 스마트폰의 중독의 3요소를 잘 이해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지도해야 한다. ① 조절실패이다. 스마트폰을 없이 생활하는 것이 안 되는 것이다. ② 현저성이다. 개인 삶에서 폰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집착과 관심이 두드러지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③ 문제적 결과이다. 지나친 폰 사용이나 잘못된 폰 사용으로 인해 신체, 심리, 경제, 대인 관계, 사회, 영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경험하는데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넷째, 부모와 학교 교사 그리고, 교회와 나라가 같이 동참하고 협력해야 한다. 부모 혼자 잘 지도해도 실패하는 확률이 훨씬 더 높다. 다섯째, 청소년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제거하거나 해결하는 능력을 높여야 한다. 스트레스와 불안이 스마트폰 중독과 다른 모든 중독의 원인 전체에 무려 70%이다. 청소년이 불안하지 않는 환경이 되고 실컷 놀고 다양한 체험을 하며 자란다면 스마트폰 중독과 다른 모든 중독에서 자유한다. 지금까지 청소년 상담만 거의 4,000명 정도 진행한 나의 사례에서 청소년 우울증, 청소년 ADHD, 청소년 품행장애, 자기조절력 결핍, 분노조절장애, 학교 부적응, 대인관계 문제에 스마트폰 중독이 없는 청소년은 한 명도 없었다. 여섯째, 스마트폰 중독해결과 예방은 청소년에게 예배 회복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교회가 알고 시급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중독해결이 되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안 된다. 스마트폰 중독 청소년이 설교를 이해하고 듣는 능력이 무려 10%만 알아들었다. 내가 집회와 설교를 하면서 직접 조사한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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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아이들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세요
    다음세대 교육을 할 때 우리가 부딪히는 많은 부분이 감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다 다른데, 이 감정들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아이는 기분이 계속 좋아요. 그런데 어떤 아이는 기분이 훅 나빠져요. 왜 그럴까요? 아이들마다 그 부분이 건드려지면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그 아이만의 히스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아이들은 다 괜찮은데 나만 감정이 상하고 힘들다면, 우리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감정의 이름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가 만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단순히 아이들이 말하는 “개 짜증”, “기분 나빠.”가 아니라 그 일이 왜 나에게 기분 나쁘게 다가왔는지를 파악하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려고 합니다. 첫 번째, ‘불안’입니다. “불안하네. 이거 잘 될까? 불안해!” 이 ‘불안’은 사실 뭐냐 하면 우리 삶의 거품을 제거해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불안하구나 싶으면 뭘 해야 하냐면 “이 불안은 왜 찾아오는 걸까?” 돌아봐야 합니다. 흔들리고 불안하다면 이건 정말 필요한 것 이외의 것들을 제거하라는 사인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나, 내 속에 있는 진짜 나를 붙잡고 껍데기를 버리게 하는 과정이 바로 불안인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건드려질까 봐 불안한 거죠. 그렇다면 내가 그것만을 남겨놓고 나머지를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불안한 순간에 우리는 정말 중요한 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두려움’입니다. “나 저거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은 뭐냐 하면 사실 우리 용기의 출발점이 됩니다. 두려움이란, 내가 이걸 넘어서서라도 꼭 얻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대학 입학을 놓고 두려워하는 우리 학생들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 대학을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내게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없다면 두려움도 없겠지요. 두려움이란 나의 목표를 알려주는 감정입니다. 세 번째, ‘질투’입니다. “질투는 나쁜 거 아니야?” 하는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아니요. 질투는 나의 욕망을 보여주는 감정입니다. 누가 사랑받는데 보니까 질투가 난다. 내 안에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에이!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이렇게 넘어가려고 해요. 그런데 알고 보면 내 안에 그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단 말이죠. 그동안 숨겨왔던 것. 그동안 거부했던 것. “아니에요. 난 안 그래요! 안 그래요!” 했었는데 진짜 내가 누구인지, 진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장치가 뭐냐? 그게 질투라고 하는 거예요. 네 번째, ‘외로움’입니다.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연결에 대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 괜찮아! 괜찮아! 나 안 만나도 괜찮아! 나 괜찮아! 나중에 봐!”라고 하지만 괜찮지 않거든요. 여러분은 늘 괜찮으세요? 아니요. 우리 모두 괜찮지 않아요. 외로움이라는 이 감정은 연결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일깨워주는 감정입니다. 다섯 번째, ‘실망’입니다. 실망은 나쁜 감정이 아닙니다. 실망은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에요. 내가 그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해 얼마나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감정입니다. 많이 기대한 만큼 실망하니까요. 추락하는 것은 항상 날개가 있는 것이잖아요. 나한테 별로 관심 없었던 것 같은데 돌아보니까 내가 되게 실망했어요. 그 때, 나는 “내가 기대했었구나. 내가 그걸 원했었고, 내가 바라고 있었구나. 내가 그것을 진짜 원했네!”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여섯 번째, ‘초조함’입니다. 초조해요. 손이 떨려요. 초조함은 더 나은 나를 향한 채찍질입니다.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떨지도 않아요. 정말 잘하고 싶으니까 초조한 거예요. 떨리는 거예요. 잘하려고 하지 않으면 초조할 일도 없는 거에요. 면접 보기 전에 왜 초조해요? 대학 입시 보기 전에 왜 초조해요? 잘하고 싶으니까요. 그래요. 이 초조함이라는 감정은 잘 하고 싶어서 생기는 참으로 소중한 감정인 겁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분노’입니다. 분노는 나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감정입니다. 내안에 분노가 일어났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화가 났다는 건 적어도 내가 그 사람에게 진심이었다는 거예요. 진심이 아니면 화가 날 일도 없어요. “그놈의 인생! 그렇게 살라고 해!” 지나가 버리면 화날 일이 없어요. 그런데 왜 분노하는가? 정말 사랑했으니까!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적어도 그 사람에게 난 뜨거웠으니까! 그 마음이 짓밟히고, 그 마음이 무시당할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또한 우리 아이들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줄 때 우리는 이 감정을 통해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감정을 바르게 읽어내고 이를 바르게 이끌어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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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은혜의말씀]열린 사람, 열린 교회
    사람을 볼 때 열린 사람이 있고 닫힌 사람이 있다. 하늘 문이 열려서 위로부터 각양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이웃을 향해서 마음 문이 활짝 열려서 소통, 공감, 나눔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반면에, 죄악으로 인하여 하늘 문이 닫히고 저주가 임한 사람이 있다. 이웃을 향해서도 과민한 의심과 지나친 경쟁심으로 까칠하다. 열린 사람이 안 되면 닫힌 사람이 된다. 다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면에 상처가 많고 마음이 우울한 사람은 속을 다친 상태기 때문에 건드리면 더 아프게 된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물리치고 우리를 밝게 해 준다. 가정이 오픈되어 대화와 웃음꽃이 피어나고, 교회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며 구제, 장학, 봉사하며 전도와 선교를 하고, 나라가 세계 속에 당당하게 설 수 있어야 된다. 주님은 지금도 문밖에 서서 내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께서 들어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강제로 내 마음 문을 열어젖히시지 않는다.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도록 기다리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듣는 게 제사보다 낫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연합되고,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에게는 하늘의 아름다운 보물창고를 열어주신다. 동서남북, 전후좌우가 막혀있어도 성도가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린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사역을 시작하실 때처럼 하늘이 열리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과 은혜 충만함을 입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는 음성을 듣는 것이 인생의 필요, 충분, 완전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신통, 인통, 물통, 사통, 밥통이다. 예수님께서는 눈물과 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셨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온몸이 강건해진다. 부모가 기도할 때 태의 문을 열어주신다. 부모가 기도할 때 자녀의 앞길을 열어주신다. 성도가 기도할 때 전도의 문을 열어주신다. 사람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거침돌이 되지 말고 미래를 열어가는 디딤돌이 되라. 올해 포도원교회는 부흥회와 기도회, 주일 저녁예배시간을 통해서 주님께 심령이 활짝 열려있는 귀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북한 동족을 위해 힘쓰시는 임창호 목사님은 시종 일관 웃으시고 모든 대화를 은혜롭게 이끌어 가시는 데에 진심이셨다. 그리고 최주열 원장님은 개척교회,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고 재미없는 시절을 보냈지만 기이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의사가 되고, 심심해서 불던 색소폰을 가지고 연주를 하는데 그 소리가 단아하고 꾸밈이 없어 더욱 큰 울림을 주었다. 또 올네이션스 경배와 찬양 설립자 하스데반 선교사님은 컨디션이 굉장히 불편하신데도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 얼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도착하면서부터 떠날 때까지 시종일관 기도하셨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되는가를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무대에 악기 하나 없이, 찬양대원 한 사람 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였다. 그저 조용히 성도들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찬양을 퍼 올렸다. 다시금 첫사랑을 회복하자.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죄를 버리고 하늘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고 두 손을 들어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 하늘 문이 열린다. 하나님이 지으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 선교하는 열린 교회, 열린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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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시사칼럼]광야1.0에서 광야4.0까지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먼저 ‘나비스’가 에스파를 소개하는 거예요. 그러면 ‘블랙 맘바’가 ‘광야’로 설정된 무대를 휘감고, 에스파가 등장하는 거죠.”(매일경제, 2022. 10. 7) 아시아 뮤직 어워드(MAMA)에서 걸그룹 에스파가 등장하던 장면을 소개하는 요즘 세대(Z~α)의 설명입니다(광야4.0). 이들에게 “광야”란 어떤 의미일까요? 놀랍게도 일종의 ‘세계관’을 가리킵니다. “무규칙, 무정형의 영역이자 무한의 에너지가 흐르는 곳”입니다. 이런 세계관 위에서 사회의 갈등과 화합이나 심지어 인간과 인공지능 등과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지만, 과감하고 위험부담이 가득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수용과 거부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까요. 아무튼 사뭇 놀라운 “광야”의 새로운 지적 소비입니다. “광야”를 두고 몇 개의 세대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광야1.0세대’가 있습니다. 이 세대는 “광야”라 하면 먼저 ‘이육사’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시작해서 “내 여기 다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로 끝나는 시(詩) 말입니다. 본명은 이원록이고 이육사는 수인(囚人)번호로 경북 예안 출생(1904)의 독립운동지사였던 지은이는 베이징 소재 일본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1944). 그가 노래하던 “광야”가 가지는 상징성은 오랜 세월 동안 세대를 관통해 왔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대에게는 조금은 낯선 모습입니다. 그래도 역사적 광야로 길이 남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광야2.0세대’를 생각합니다. 이들은 “광야”라 하면 먼저 이런 노랫말을 떠올립니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으로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가사는 동해와 서해 그리고 남도와 만주를 넘나들며 “우리 어찌 가난하리요 우리 어찌 주저하리요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1980년대에 치솟은 민주화의 시대적 열망을 가득 품었던 많은 젊은이들의 심장을 미친 듯이 울려대는 절규와 함성의 이미지가 바로 “광야”였습니다. 안치환과 고(故)김광석이 불렀던 노래는 이제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한 듯합니다. 어디에서도 희미하게 서린 모습이나 어렴풋이 들리는 흔적을 보고 보고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민주와 자유와 정의의 깃발이 나부끼는 한 그와 함께 울려퍼지던 광야의 노래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광야3.0세대’는 뜻밖에도 한 찬양(CCM)을 통해 등장합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히즈윌, 2013). 주지하다시피 “광야”는 성경에서 ‘말씀과 함께’(미·드바르)라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누구 하나 곁에 없고 오직 고독과 위험과 불안만 가득한 곳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말씀이신 분이 함께 하는 공간이라니, 그러나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던 이 광야의 개념을 이처럼 서정적이고 압도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청년들을 넘어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나아가 세상 사람들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 광야의 노래입니다. 개인적으로 다시 광야에 섰습니다. 광야는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외롭고 쓸쓸하며, 굶주림과 날선 추위와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간 불러왔던 광야들(1.0-3.0)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습니다. 광야란 요즘 세대(광야4.0)가 잘 표현한대로 ‘나의 본질적인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까? 신약성경은 “광야”(마 4:1, 요 1:23 등)를 “한적한 곳”(막 1:35, 6:31, 요 11:54)이나 “빈 들”(마 14:15, 눅 9:12)이라고 번역할 때가 많습니다. 전자는 기도와 안식이 필요한 곳을, 후자는 침묵과 기적이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그곳을 불현듯 방문하시고 도와주시며 인도하시는 광야의 주인을 만나는 현장입니다. 다시 그 광야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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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성서연구]비움의 축복
    얼마 전부터 왼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30, 40대에 걷기를 많이 했습니다. 쉬는 날에는 등산도 많이 했습니다. 여름휴가 때는 경상도에서 강원도까지 80리터 배낭을 메고 무작정 걷기도 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두 번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조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다리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왼쪽 다리가 조금 시원치 않다고 여겼었는데, 이번에 탈이 났습니다. 디디기 힘들었고, 왼쪽 무릎이 많이 아팠습니다. 병원에서 퇴행성관절염의 시작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빌려 표현하면 식탐이 잉태하여 과체중을 낳고, 과체중이 장성하여 무릎 통증을 낳은 것입니다. 해결 방법은 근육 운동과 체중 감량뿐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께서는 의사이신데, 똑같은 경우를 당하셨다면서, 체중 감량 후 아픔이 사라졌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특정 주사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고 합니다. 장로님께 여쭈었더니 주사의 효능은 식욕을 감퇴시켜 음식 섭취를 줄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용도 들지만, 약간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의지로 감량에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소식을 했고, 탄수화물 섭취를 줄였습니다. 간식도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체중이 조금씩 줄었습니다. 그러던 중 놀랍게도 체중이 어느 지점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서서히 사라진 게 아니라, 거의 완전하게 사라졌습니다. 이 일을 통해 줄임, 비움의 효능을 체험했습니다. 이 평범한 일이 그동안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심을 굳게 하자, 가능해졌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십자가는 예수님의 비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나 영광의 보좌를 떠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고, 보통 사람도 달리지 않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죄인을 구원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도 역시 비울 때입니다. 다윗의 생애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언제일까요? 골리앗을 이긴 순간일까요?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때일까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다윗이 늙어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을 때, 신하들은 어여쁜 동녀 아비삭을 데려와 왕의 침상에 누워 체온으로 왕이 춥지 않도록 하게 했습니다. 다윗이 아비삭을 취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다윗은 오히려 아비삭을 멀리했습니다. 저는 다윗의 생애에서 이 장면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과거에 많은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참지 못해 밧세바를 품에 안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 장군까지 죽게 하는 연쇄적 범죄를 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는 진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다윗은 아비삭을 밀어냄으로써 밧세바에게 했던 것과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과거의 다윗이 움켜쥐는 자였다면, 이때의 다윗은 비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비움은 말년에 돋보입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야반도주하던 그 와중에서도 그렇습니다. 제사장 사독이 언약궤를 메어와서 다윗을 따르고자 했을 때, 그는 사독과 하나님의 궤를 본래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궤가 함께하면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하는 데 결정적으로 유리할 텐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는 다윗의 비움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25~26절입니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다윗의 이러한 비움은 우리의 귀감입니다. 목회에서 은퇴할 무렵에 손에 잡은 것을 놓지 못하는 목회자들, 이룬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많은 이들,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우리도 다윗처럼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아비삭을 밀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비워야 합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인생의 절정이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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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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