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4(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리교 김창준 목사의 변질
    김창준 목사(1890-1959)는 3.1 운동 당시 33인 중 한사람이었고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유망한 인물이었으나 변절자가 되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고 공산 인민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을 때 김창준은 서울에 나타나 김일성 환영대회를 개최하는 등 침략자들을 지원하였고, 서울 태평로에 사무실을 내고 ‘기독교민주동맹’을 다시 결성했다. 사무장은 전북 삼례 출신으로 경동교회에 출석하던 김욱이라는 자였다. 이 조직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체되었던 친북조직이었다.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가풍리의 평민 집안에서 1890년 5월 3일 출생한 김창준은 18세 때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Z. Moore)에게 세례를 받았고, 숭실대학과 일본 아오야마에서 1년간 수학하고 감리교의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7년 3월 졸업했다. 만주에서 일한 손정도와 동기생이었다. 그 후 서울 인사동의 중앙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중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참가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참가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에 처해졌다. 1921년 12월 22일, 한용운 등과 함께 가출옥(가석방) 된 그는 서울 감리회 중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922년 9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4년 5월부터 1926년까지 미국 게렛신학교(신학사)와 같은 켐퍼스의 노스웨스턴 대학교(문학사)에서 공부하고 1926년 12월 27일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는 한편 글도 쓰고 중국과 만주선교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고, 이때부터 좌익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사실 그는 1930년대부터 기독교사회운동을 제창한 바 있는데, 기독교사회주의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해방 이후에는 인민민주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는 경제적 평등을 위해서는 김일성이 주창했던 인민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인식하고, 1947년에는 ‘남조선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김일성을 지지하는 좌파 조직이었다. 그래서 신탁통치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또 좌파 인사들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선) 확대 중앙위원회에 참가하여 김기전, 김원봉, 박헌영, 여운형, 허헌 등과 같이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예수의 정신과 기독교적 양심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은총의 개념은 사라졌다. 그런데, 김창준은 1948년 봄 김일성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1948년 4월 18일 월북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평양에 체재하며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후에는 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협의회 부서기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국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부터는 파리, 프라하, 비엔나 등지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로 참석했다. 김일성 정권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는 미제국주의를 비난하고 기독교회를 파괴하고 기독신자들을 살상한 것은 미제국주의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중에 1950년 6월 북한이 남침하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에 나타나 김일성장군 환영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런 반미 반한 행각을 벌이다가 북한으로 돌아갔고, 1950년 6월의 홍남표 장의위원에 이어 1951년 2월에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에는 허헌 장의위원, 그리고 1953년 4월에는 김정주 장의위원을 지내는 등 북한의 일인 독제정권의 지도자 반열에서 활동했다. 1953년 7월 29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김창준은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말년까지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관여하다가 1959년 5월 7일, 오후 2시 30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부고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사회주의 건설 사업을 위하여 계속하여 투쟁하여 왔다. ... 고 김창준 동지가 전체 조선 인민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데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라고 기록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가 어떻게 월북하여 교회를 탄압하고 반 기독교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을까? 장병일은, “쓸데없는 명예욕과 생활에서의 불만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자기를 위하여 더 유익했을 것”이라고 썼다(장병일, 『한국교회유사』, 192쪽).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03-04
  • [목회자칼럼] 변하는 세상, 변해버린 세상 (젊은이와 소통하기 위하여)
    현대에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잘 통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도 너무 변해버린 생각과 가치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식당, 은행 등 공공장소에서 3가지 ‘척’, ‘3척’을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잘난 척. 둘째, 있는 척. 셋째, 아닌 척을 잘해야 현 사회에서 대우를 받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겸손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미덕이었는데… 그때는(나때라고 말하기 쉬워서) 잘 나가도 잘나지 않은 척하고, 알아도 잘 모르는 척. 있어도 있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덕이었고 겸손의 진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상하게도 자기과시를 하는 사회가 되어 나를 알려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자기과시욕구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이 종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자신을 굉장히 도덕적이고 깨끗하며 남과 다르다고 말하고 인식시키면서 자기확증편향으로 굳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갖는 욕구이지만 특히 이러한 욕구는 교회를 다닌 지 오래된 성도에게 매우 강하게, 자주 발견됩니다. ‘무엇이 행복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서 경건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경건 욕구와 욕망, 그리고 돈, 물질에 관한 욕구, 욕망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특히 경건에는 기도가 빠질 수 없고, 물질에는 구제가 빠질 수 없습니다. 과시용 경건을 목적으로 기도를 시작하는 이가 있을까요? 과시용 경건을 목적으로 구제를 시작하는 이가 있을까요?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다 보면 습관화 되어버리고 처음의 순수한 동기가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구제의 동기가 과연 하나님 사랑의 실천인지, 나도 모르는 우월의식에서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구제의 보상으로 죄에 대한 용서를 받기 위함인지 한번 되돌아볼 여유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비하여 우리는 얼마나 풍족해지고 편리하게 된 줄 모릅니다. 감사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비하하며 불평과 우울 사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마음의 첫 동기가 중요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독일 교회가 히틀러에게 속아 교회의 참 역할을 잃어버린 때의 이유를 값싼 은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정품 아닌 짝퉁, 참 값어치 아닌 싸구려 은혜, 회개가 없는 죄 용서입니다. 죄를 용서받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막상 그 죄에 대해서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축복 받기만 원하지, 헌신의 고백, 죄의 고백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하려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그저 청소와 식당 봉사 몇 번 하고 자기 일을 다한 듯이 하거나, 일이 많아서 짜증나고 힘들다고 합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안하느냐고 불만과 불평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 싸구려 은혜가 아닌가요? 예수님의 피는 싸구려가 아닙니다. 구약의 황소와 염소의 피가 효력이 있었으니, 신약의 예수님의 피는 얼마나 효력이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2000년이 지나도록 식지 않고 뜨겁게 흐르고 있는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복음의 값어치를 가지고 오늘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해버린 세상이지만 변하지 않는 복음을 들고 살아내야 할 우리의 기독교 용사들. 다시 힘을 내어 달려가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5-03-04
  • 총회결의는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예장고신은 2020년 70회 총회에서 전광훈씨와 한기총에 대한 이단청원이 상정된 바 있다. 이때 한기총은 ‘이단 옹호단체’로 규정하면서, 전광훈씨에 대해서는 소속총회의 자체 조사결과가 나올때까지 1년간 유보하기로 가결한 바 있다. 이후 고신총회 이대위는 전광훈씨가 소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복원)에 4차례에 걸쳐 (조사결과에 대한)답변을 요구했지만, 대신복원측은 전혀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전광훈씨가 옥중서신(2020년 11월, 유튜브 너알아 TV방영)이라는 이름으로 고신총회를 향해 ‘사탄적 이단’이라며 고신측 목회자들을 비난하는 서신을 발표했다. 당시 전광훈씨는 “다시 율법주의와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주님의 책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고신 측 목회자와 외식주의 목사들을 보면 창조 후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발언과 “시작할 때의 본질을 버리고 형태를 본질 보다 앞세워 오히려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자들을 핍박하고 탄압했듯이 고신 측 목사들이 오늘날 똑같은 길을 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는 등 고신교단이 마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존재로 취급한 내용 등을 담고 있다. 결국 고신 71회 총회(2021년)는 이단대책위원회의 보고(보고서 137-145쪽)대로 그의 행적과 언행에 근거하여 ‘이단성이 있음’으로 규정하고 ‘참여와 교류 금지’를 결의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총회결의를 무색하게 2024년 손현보 목사는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10.27집회)’를 준비하면서 전광훈 목사를 수차례 접촉한 사실이 있다. 작년 8월 25일 주일예배에서 “전광훈 목사께도 전화를 드렸고, 오라고 해서 만났다. 대승적으로 양보해서 광화문을 다 내주고 광화문 애국 성도들을 참여시키도록 해서 하나가 되자고 했고, 전광훈 목사가 이에 동의했다”고 발언한 바 있다. 또 10월 경에도 전광훈씨를 다시 찾아가 반동성애 집회에 동참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 확인됐다. 전광훈 씨가 작년 10월 19일 유튜브 방송에서 “손현보 목사가 어제도 우리 교회에 찾아왔다. (손 목사가)반동성애 집회에 참여해달라고 했지만, 11월 열리는 자신들의 태극기 집회에 대형교회들이 나와 준다면 10월 27일 집회에 함께 할 수 있다”고 사실상 거부의사를 전했다고 말했다. 총회는 장로회의의 최고 치리회이며, 최고 의결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회결의는 교단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진다. 때론 몰라서 총회결의를 지키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아예 총회결의를 무시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면 용서하는게 바람직하지만, 후자의 경우 총회차원의 강력한 치리가 필요해 보인다. 손현보 목사의 경우 후자쪽에 가까운 것도 사실이다. 손 목사는 2021년 전광훈씨 이단성 총회 결의 당시 “아니요”라고 뛰쳐 나가 “어떤 것을 강조하다보면 그럴 수 있는 건데, 그런 걸 가지고 우리가 다 이단으로 규정한다면 우리가 설교를 전부 그런식으로 한다면 이단 안 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얼마 전에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고 했던 어느 한 KBS 이사도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감정이 격하면 우리가 그 사람을 이단옹호자라고 할 수 있는 거고, 그 사람이 우리를 보고 바리새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건데...”라며 당시 현장에서 전광훈씨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결국 총회가 격론 끝에 ‘이단성이 있음’으로 규정하고, ‘참여와 교류 금지’를 결의했다. 이 사실을 손현보 목사가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년 10.27 행사를 마치고 손현보 목사와 전광훈씨가 갈등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 세계로 교회 당회는 “오늘(10월 28일) 이후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전광훈 측 정치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은 정관에 따라 당회 결의로 출교 및 제명 조치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자신이 속한 총회 결의는 무시하면서, 자신의 교회 성도들에게 ‘출교’, ‘제명’까지 언급한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이제라도 자신의 과거 언행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기를 간곡히 호소한다. 그리고 총회도 최고 치리회답게 합당한 치리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총회의 권위는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5-03-04
  • [황대우 교수]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
    자랑은 인간의 본성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랑하고 자랑하고 싶어한다. 자랑 자체가 악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도 자랑 자체를 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7)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경문자주의적 경향 때문에 그 말씀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랑하라’로 간주한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포장하여 자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명령인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우리의 오해와 상당히 다른 내용을 의미한다. 사실상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인용구절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장 31절은 “기록된 바”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4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하라”의 인용이다. 바울은 “이것으로”를 “주 안에서”로 바꾸어 인용한다. 문제는 “주 안에서”라는 번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는 번역은 “주를 자랑하라!”로 번역되어야 하는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만일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번역이 옳다면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 자랑하지 말라!”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로 번역하지 않고 “사람을”로 번역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의 금지명령을 보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여기서도 모두 ‘지혜 안에서’, ‘용맹 안에서’, ‘부함 안에서’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지혜를”, “용맹을”, “부함을”은 모두 ‘안에서’를 의미하는 헬라어 전치사 ‘엔’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동사의 목적어로 번역한다. 성경의 헬라어 구조를 살펴보면 동사 ‘자랑하다’와 전치사 ‘엔’ 구절의 문장은 일관성 있게 ‘~을 자랑하다’로 이해하고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그것을 “주 안에서”라고 번역했을까? 아마도 ‘안에서’를 의미하는 전치사 ‘인’을 가진 서구 언어의 번역 영향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폐일언하고 잘 알려진 고린도전후서의 말씀,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번역은 이제부터라도 “주를 자랑하라!”라고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이고도 최고의 자랑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 당시 자랑거리는커녕 최악의 비난거리였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거리끼는 것”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이고, “미련한 것”이란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책 제목 <우신예찬>에 사용한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 칭송>을 <우신예찬>이라 멋지게 번역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자랑거리와 질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자랑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결과중심적이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가시적 성공과 이에 따르는 부귀영화가 일반적인 자랑거리로 채워진다. 세상의 자랑거리로 보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대상일뿐이다. 최악의 형벌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떠벌리는 일은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랑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성공과 부귀영화인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뿐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5-03-04
  • [교회법 특강] 교회법(法)과 여러 용어
    교회법이라는 말 외에 교회가 사용해온 용어들이 더 있다. 교회질서(Church Order), 교회헌법(Church Constitution), 교회정치(Church Government, Church Polity), 교회권징서(Church Discipline), 교회법령(Church Ordinances). 한국장로교회는 초창기 ‘규칙’으로 이름을 붙였다(‘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 1907). 그런데 위 용어들을 가만히 읽다 보면 왠지 불편하다. 성경이 교회에서도 질서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말들은 차이는 있지만 모두 어쨌든 권위와 순종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지금 21세기 민주주의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당회나 노회, 총회라는 치리회의 권위를 변명하는 말이 아닐까? 치리, 통치, 정치 이런 말은 세상에 더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이 말들을 구(舊)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면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사실 세상 법은 시대마다 역사나 문화의 요청에 따라 개념이 변천한다. 심지어 법적 해석과 법적 판결조차도 변할 수 있다. 그런데 용어 문제에서 우리는 시대 변천에 상관없이 영원한 진리의 책인 성경을 따라야 한다. 성경의 잣대를 가지고 이 용어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비추어 볼 때 각 용어가 강조하고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교회법’이다. ‘교회법’은 법 이전에 ‘권리’를 가리킨다. 교회의 ‘법’(권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획득하신 ‘의’(義)라는 ‘특별 은혜’에서 나온 ‘법’(권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법은 은혜로 회복된 의, 화평을 선사받은 신자와 교회의 권리를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법은 기본적으로 교인의 권리를 강조한다. 둘째, ‘교회정치’(통치/치리)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를 치리(통치)하신다는 사상이 이 용어의 바탕에 있다. 교회정치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왕(王)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왕이시다(마태 28:18). 교회의 치리 또한 그리스도의 손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자기 통치를 이뤄가신다. 따라서 교회법 조항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치리를 드러내는 도구다. 셋째, ‘교회 질서’다. 성경은 로마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제와 신자 사이를 구별하는 질서를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와 달리 ‘화평’을 주는 질서를 말한다. 이 화평은 구원의 질서를 말한다. 하나님은 전하는 자를 보내시며 그를 통해 말씀을 듣게 하시며, 이 들음에서 믿음이 나오게 하신다(롬 10:14 이하). 또 이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입으로 ‘시인’(고백)할 때 구원을 주신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구원의 질서에 대해 말한다. 이것이 교회 생활에 토대가 된다. 교회에서 질서를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는 로마천주교처럼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대신 교인의 권리, 직분의 선택과 임직, 성례와 예배, 치리회와 관련하여 질서를 강조한다. 특별히 직분이 교회에서 구원을 전달하는 기능을 하도록 한다. 권징은 교회의 거룩과 관련하여 시행되는 질서다. 넷째, ‘교회 헌법’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 등을 모두 묶어서 이렇게 부른다. 이는 미국교회의 영향이다. 본래 개혁주의전통은 신앙고백서와 교회정치를 하나로 묶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구 교회도 점점 이를 따르고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법특강
    2025-03-04
  • [성서연구] 사랑을 위해 오셨습니다
    지난 주일 찬양예배 시간에 성만찬 예식이 있었습니다. 부목사님의 설교가 끝나면 제가 성만찬 예식을 집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갑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와서 몇 십 년 동안 살다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3부 예배가 끝난 후 한 가족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제가 목회하던 부산 땅끝교회 성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신앙 생활하던 목사가 옮겨서 목회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저를 한 번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곧바로 다음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반가운 인사만 나누었을 뿐입니다. 제가 그분들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통해 말씀을 받았습니다. 제가 집례하는 자리에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인생에 그 정도의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들이 그 의미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늘나라에 가신 부모님께는 웃음을 드리고, 의지가 되는 아들이었겠지요. 혹은 우리 아들이 목사라며 자랑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또 저는 아내의 인생에 수십 년을 동행하는 중입니다. 아내는 부모님과 산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을 저와 살고 있습니다. 아내 역시 제게 그런 의미로 다가와 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남은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힘들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저는 자녀들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의 의미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저도 옆에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고, 좀 도왔습니다. 아직도 제게 용돈을 받는 자녀도 있지요. 제 자녀들이 제게서 태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녀로 태어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제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가는 의미는 이렇게 보면 남의 인생에 미친 영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영향은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인생의 의미는 <사랑>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역시 사랑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돈 벌려고, 권세를 누리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려고 태어났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랑에서만 그 의미가 확보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매우 관심이 있고,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노력하는 이들 중에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매정하고, 끊어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가 이방인인 로마 사람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한 일에 충격을 받고 베드로를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오순절 다락방에서 자신들에게 임하신 것과 똑같이 임한 것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는 분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사랑하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의 비극은 연결을 끊어내는 데서 발생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향해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릅니다. 그 타당성을 이해는 하지만, 아쉬움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국익, 민족 이익, 집단 이익,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이익 앞에서 사랑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임영수 목사님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비로소 행복을 알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관점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그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디 사랑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5-02-07
  • [소강석칼럼] 이 발로 다시 뛰게 하소서
    주님,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숨이 가쁠 때마다 심장이 수고하고 폐장이 더 강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지만, 두 발이 이토록 수고했고 소중한 줄을 몰랐습니다. 두 발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짱짱한 두 다리가 있었기에 매 주일이면 강단에 서서 5번, 6번을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회와 각종 집회를 다닐 때에도 원고에 매이지 않고 강단을 뛰면서 뜨거운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저는 두 발 가운데도 발뒤꿈치가 이토록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이따금씩 발뒤꿈치에 각질 같은 것이 벗겨지면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두꺼운 발뒤꿈치에 저온 화상을 입고 저는 그 딱딱한 가죽이 얼마나 예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입니다. 이 낙타 무릎 같은 발꿈치 가죽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우리나라가 너무나 좁아서 세계 각지로 집회를 다녔습니다. 이 무감각하고 딱딱한 발뒤꿈치 가죽이 얼마나 제게 소중한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입니다. 뒤꿈치 가죽이 있었기에 산행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마음껏 걸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산꼭대기까지 다시 내려가기가 싫어 더 걷고 또 걷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요 몇 주 걷지 못하는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발뒤꿈치의 선물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는지요. 저는 재생 치료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집사람의 집요하고도 시니컬한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전에는 집사람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그것마저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소마취로 허벅지 살갗을 도려내었을 때 마취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고통을 생각해 봤습니다. 봄꽃처럼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속살을 강제로 뜯어 피가 나게 하고, 그 쓰린 속살에 허벅지 살을 붙일 때의 쓰림과 아픔이 저로 하여금 저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마취가 풀릴 때 발뒤꿈치와 허벅지의 아픔과 쓰라림은 영혼의 아림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작은 화상에도 고통을 느낀다면 암 환자들은 어떻게 투병을 하고 있을까요? 또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괴로워했던 욥은 어떻게 인내했을까요? 아니, 저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그 고통, 영혼의 아림은 얼마나 크셨을까요? 저는 원하지 않았지만, 당신께서 저로 하여금 로뎀나무 아래 눕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제 인생에 있어 겨울 끝자락을 맞을 때는 아니지만 믿음으로는 혹독한 겨울의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황홀한 시련도 다 끝나갑니다. 이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이식을 한 부위가 잘 생착이 되어 새살이 차오르고 굳은살로 변해간다면 저는 다시 한 번 주님이 주신 힘으로 사명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숨 쉴 수 없는 고난의 뜨거운 바람 내 영혼을 찢으며 불어올 때 광야에 홀로 남겨진 지독한 외로움 속에 깊은 밤 뜨거운 눈물 흘려도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가시밭길 맨발로라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생명이기에, 사명이 눈물이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사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은혜이기에 사명이 축복이기에 외롭고 고독해도 사명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의 심장과 폐장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모든 체중과 모든 무게를 떠받들고 받쳐줄 수 있는 이 두 다리 그리고 발바닥에 주신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다시 한번 소생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저와 같은 화상을 입지 않도록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부족하지만 저의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고난을 대신하게 하시고 성도들이 맞을 환란의 방어막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걷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뛰게 하옵소서. 다시 한번 달려가게 하옵소서.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5-02-07
  • [시사칼럼] 호모 피델리스
    인간은 무엇입니까?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라는 말 이래로 비슷한 표현이 많았지만 요즘도 신조어들이 등장합니다. ‘호모 엠파티쿠스’(제레미 리프킨, 공감하는 인간)나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하찮은)를 비롯해서 ‘호모 큐라스’(고미숙, 돌보는 사람), ‘호모 디스컨텐트’(선봉란, 불만의), ‘호모 데지그난스’(지상현, 디자인하는), ‘호모 듀비탄스’(박규철, 의심하는), ‘호모 비아토르’(문요한, 여행하는)가 그러합니다. 최근에는 “호모 피델리스”(한민, 저녁달, 2024)가 나타났습니다. 저자는 그 의미를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풀었습니다. 원래 의미의 ‘숭배’는 신(神)을 전제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도 서문을 제목부터 “종교는 인생의 화두였다”로 정하고 “종교는 헤아릴 수 없는 옛날부터 인간과 함께 해 왔다”라는 문장으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저작물의 탄생 배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최근의 상황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지금 인류는 무엇을 숭배하고 있을까요? 첫째, ‘유사영웅’(pseudo-hero)을 숭배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나요, 하지만 최근에는 여기저기서 유사영웅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추종자들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전광훈이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쪽 지방에서도 다른 목사 하나가 뜨면서 이런 흐름에 편승했는데, 마찬가지로 담임하는 교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최근에는 역사를 가르쳐서 유명해진 일타강사가 정치판에 혜성처럼 합류하여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중입니다. 이들을 유사영웅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이들의 존재감이 객관적인 업적 평가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주관적이면서 신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돌발적인 추앙(推仰)에 터를 잡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신문의 사진에 주로 나타나는 유형 역시 중요한 면일수록 역사의 주인공 같아 보이는 사람이 차지하는데 이 논문의 저자들도 이를 일종의 ‘신화’로 간주하고 ‘유사영웅’이라 불렀습니다(임영호·김보영·최수정, “신문사진에 나타난 신화의 유형”). ‘유사영웅’이라도 그들을 둘러싼 지지자들의 열광을 어떻게든 해석하려다 보니 “호모 피델리스”라는 말까지 등장했던 것입니다. 둘째, 운명을 숭배합니다. 현재 가장 급증하는 종교는 ‘무종교’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미국도 지난 50년 간 무종교인 비율이 5%에서 30%로 증가했다지요?(Pew Research Center, 2024). 한국도 201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56.1%였고 나이가 어릴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추세를 보입니다. 반면에 무속인은 늘어나고 점집이나 인터넷으로 운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들은 사람이나 귀신보다는 운명을 숭배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당이나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자기 운명이 궁금한 자들입니다. 현대는 바야흐로 ‘탈종교시대’ 내지 ‘후종교시대’라고 해야 하지만 동시에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넘쳐납니다. 새로운 사업이 잘 될지,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될지, 언제쯤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지 등 운명을 향한 수요는 다양합니다. 대중들을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운명을 원망하지 말라’ 했고, 니체는 한술 더해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르 파티)를 남길 정도였으니 운명에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었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운명은 무(無)다’(불안의 개념, 임춘갑 역)를 외쳤습니다. 운명은 무언가 실제(實際)인듯 말하지만 실재(實在)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라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허상입니다. 셋째, 자신을 숭배합니다. 운명론자의 반대편에 현대판 나르시스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자율성을 강조하며 자유의지를 절대시하면서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자들입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였습니다.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일찍 간파했듯이, ‘공관복음’이나 ‘제4복음’이 아니라 ‘내가복음’을 선호하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수년 전 바이올라 대학의 윌리엄스 교수(조직신학)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빨리 번지는 종교는 ‘자기숭배’(Self-Worship)고 미국인 84%가 ‘자신을 즐기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목표’라면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번은 이제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기를 즐거워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는 자조 섞인 분석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TGC 칼럼). 상기한 첫째와 둘째 역시 자기숭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중요하니 자기 운명을 알고 싶어 하고, 자기가 중요하니 자타가 신격화를 즐깁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숭배를 부추긴다.”(키르케고르) 우리는 다른 무엇을 숭배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신자들이여, 부디 그리스도만을 숭배하는 인간인 ‘호모 피델리스 크리스티’(Homo Fidelis Christi)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5-02-07
  • [은혜의말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 (창세기 41:37~40)
    창세기에 보면 위기의 때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는 요셉이 나온다. 살아서 석방되기 힘들다는 왕실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요셉이 30세에 전격적으로 석방이 되어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는데 그날 총리가 되고, 이방 제국 애굽의 모든 신하들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에 치우친 반쪽 지도자가 아니라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온전한 지도자로서 데뷔한 것이다. 이방 황제인 바로의 한 줄 평가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이다. 그는 꿈꾸는 자요, 용모가 아담하고 준수한 자요, 샘 곁에 심기 운 나무요, 범사에 형통케 된 자이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는 열 받고 분노의 화신이 되고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살아가는 자이다. 다윗처럼 성령에 감화감동을 받은 자이다. 비둘기같이 성령이 임하심을 받은 후에 예수님도 공생애사역을 시작하셨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위로부터 난 지혜와 명철이 있어서 신의 한수를 두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한 베드로가 "내 양을 치라"고 사명을 받았듯이 요셉도 마침내 "내 집을 다스리라"는 어명을 받았다. 왕의 인장 반지를 받으며 하루아침에 죄수에서 대국의 총리로 등극하였다. 온 무리가 무릎을 꿇으니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 증거이다. 그길로 요셉은 바로 나가서 온 땅을 순찰했다. 달란트 비유에서 칭찬받은 종들처럼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남기는 모습이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잠27:23). 현장에 답이 있다. 탁상공론만 하고 있지 말고, 일어나 가서 현장을 사수하라. 평안하여 안정이 될 때 그곳에 머물지 마라. 야성을 잃지 마라.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라. 가서 제자 삼으라. 요셉은 총리가 되고 한풀이를 하거나 권력의 맛에 취하여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서 애굽 온 땅을 순찰하였다. 그리하여 칠년 대풍년에 흥청망청하지 않고, 각 성에 곡식을 착실하게 저장하여 칠년 대기근을 여유 있게 준비했다. 요셉이 어려서 엄마를 잃고 형들에 의해 팔려 끌려가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지만 비로소 때가 차매, 30세에 애굽 왕 바로 앞에 섰다. 요셉은 위기의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찾아올 때도 결코 속단하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대하며 꿈꾸며 기다렸다. 마침내 꿈 꾼 대로 된 것이다. 요셉에게 지난 세월은 끔찍한 시간들이었지만 뒤돌아보면 잘 준비된 골든타임이었다. 버릴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형통한 때였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원(망)불(평)교(만)하지 말고 용(서)감(사)사(랑)하라. 사람이 판단하기에 불운의 연속일지라도 어떤 놀라운 역사에 밑천으로 쓰일지 모르는 일이다. 요셉을 보면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이 기다리는 최고의 지도자이다. 하나님 손에 붙잡힌 자, 예수로 충만한 자, 성령에 감동된 자, 혈기와 분노가 없이 평화의 왕, 지혜와 명철이 충만한 자, 나라의 위기, 대풍년, 대기근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인재, 온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자! 요셉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자다.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시절을 탓하고,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그저 주어지는 현실마다 감당하며, 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길을 인도하시는 대로 뚜벅뚜벅 걸어가면 멋지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5-02-07
  • [위드애]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
    오래 전, 신학교를 다닐 때에 겪은 일이다. 지금의 나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여 보행을 하지만, 당시(2009년)에는 지팡이를 이용하여 보행을 할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있는데 한 분이 교실로 오셔서 나를 보시더니 “전도사님,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봤어요?” 라고 물으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분위기를 고려하여 “당연히 기도했죠” 라고 미소로 답한 적이 있다. 나처럼 장애로 인하여 불편함을 겪거나, 질병으로 아픈 사람치고 그 상태가 호전되거나 사라지기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에게 질문을 던진 분처럼 말하는 분들이 실제로 교회 안에 많이 있다. 물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 줄은 알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심정을 한 번쯤은 헤아려 보았는지 묻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에는 듣는 사람에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여 어울리는 말을 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만약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거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건 그저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이거나,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비수(匕首)가 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상황과 환경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말'과 관련된 속담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이다. 이 속담은 우리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 영향력이 큼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도 '말'과 관련된 구절들이 많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언 12:18),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로새서 4:6). 모두 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늘 사람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 말이 때로는 누군가를 살리거나 힘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 말로 인하여 사람이 죽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힘이 되는 말, 사랑이 담긴 말을 듣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상대방도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지 않을런지. 아직은 추운 겨울이지만 며칠 전에 따뜻하고 생명이 싹트는 계절인 봄으로 접어든다는 입춘(立春)이 지났다. 사람들은 외롭고 아프고 힘들다. 춥다. 그런 사람들에게 환경과 상황에 맞는 말을 함으로써 온기(溫氣)를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언 25:11)
    • 오피니언
    • 칼럼
    • 위드애(with 愛)
    2025-02-0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