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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사모곡(思母曲)
    2005년 12월 21일 밤, 남도의 들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밤, 어머니는 나의 곁을 떠나셨다. 그렇게도 수많은 사경을 헤매시더니, 이제는 정녕 지상의 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 영원한 본향이 있는 곳 천국으로 떠나가셨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다시 살아나셔서 나의 손목을 붙잡고 “막내야, 미안하다. 다시 살아브렀다.” 눈물지으시던 어머니… 이제는 다시 그 야윈 음성조차 들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셨다. 어린 시절 술에 취한 아버지께서 몽둥이로 뒷마당의 장독 항아리들을 두드려 깰 때면 “아따 잘 한다, 잘해, 다 깨 버려라, 다 깨 버려!” 삿대질을 하시며 맞고함을 치실 정도로 도도하고 굽힐 줄 모르던 자존심을 가지셨던 어머니, 우리 막내아들 절대로 2등은 안 된다며 일등만을 고집스럽게 요구하시던 어머니… 그 욕심 많은 사랑을 지상에 남겨 둔 채 함박눈 펑펑 쏟아지던 밤 끝내 떠나시고 말았다. 어린 시절 마을의 상여가 나갈 때 마다 막내 아들이 공포를 들어 용돈으로 100원을 받고 공포에 달린 삼베조각을 떼어다가 드리면 어머니는 정월 대보름처럼 환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막내가 살림꾼이구나…” 그때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워 이 밤, 가슴이 미어지는데, 어머니는 끝내 흰 꽃잎 같은 눈송이들 하얀 수건처럼 머리에 얹고 이별이라 손짓하며 영원한 본향으로 떠나가셨다. 막내아들이 예수 믿는다고 그 모진 회초리로 매질을 하시며 예수 믿으려면 차라리 집을 나가버리라고 온갖 핍박을 하시더니 이제는 그렇게 대적하던 예수님 믿고 하늘의 꽃가마 타고 천국으로 가셨다. 그런데 오늘 이 밤, 예수 믿는다고 회초리로 저를 때리시던 어머니가 너무도 그립다. 차라리 종아리에서 피가 터져 나와도 좋으니 다시 한 번 어머니가 일어나셔서 회초리를 들고 나를 때리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도 매를 맞다가 홀로 울며 집을 나오던 그 해 겨울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그때 어머니는 집을 나오던 나를 향해 “썩을 놈아, 이렇게 키워 놓으니까 부모는 안중에도 없냐? 이놈아, 그렇게 하나님이 좋고 예수가 좋으냐? 부모 말을 안 듣는 놈은 자식도 아니니 어서 나가버려 이놈아!” 얼마나 속이 상하고 마음이 찢어졌으면 이런 말을 하셨을까. 원래 어릴 적부터 효자가 되어 부모님을 잘 모시고 싶은 꿈이 있었다. 가난하게 사시던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효자의 꿈 말이다. 그런 순수한 효자의 꿈을 꾸던 나는 어느 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불효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을 하다 보니 결국 부모님께는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 때문에 부모님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시게 되었으니 영적으로 말하자면 효자 중의 효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동안 육신적으로 볼 때는 못 된 불효자였다. 어머니가 마지막 떠나가시는 길, 따뜻하게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한 불효자의 가슴이 저리지 않을까. 5월이 되면 어머니가 더 사무치게 그립니다. 천국에 계실 어머니께서 주님 앞에 더 큰 천국 상급을 받고 크게 칭찬받으시리라 믿으며 불효자는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한 몸 으스러질 때까지 일사각오의 신념으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리라 다짐한다. “어머니, 천국에서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목양일념의 한 길 잘 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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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 [성서연구] 물꼬를 트는 사람은 누구인가(사무엘상 17장 31-40장)
    다윗은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돋보이는 자리를 점하고 있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복음서의 문을 여는 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도 다윗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기의 한 복판에도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고, 나치 치하에서 유태인을 드러내는 표지는 가슴에 붙어 있는 다윗의 별이었습니다. 더구나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표현함으로써 메시아를 다윗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명실상부한 성경의 중심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떤 인물일까요? 본문에서 다윗은 <꽉 막힌 물꼬를 트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보냄을 받아 형님들의 위문을 갔을 때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블레셋에서는 골리앗이 나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독하면서 싸움을 돋우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중에는 사울 왕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골리앗과 싸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숨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답답한 상황이었고, 정말 위기였습니다. 이 때 다윗이 그 어려운 상황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우선 그에게는 큰 용기가 생겼습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 왕에게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사울 왕이 백성들에게 했어야 할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소년 다윗이 왕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관을 쓴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면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실 때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다락방에 임한 후에도 사도들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그들이 더 이상 숨어있지 않고. 용기 있는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이의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앞장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그는 다윗은 소년이요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라고 말하면서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물론 사울 왕의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분석은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상황 판단과 분석으로 전문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도자란 분석과 설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타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물꼬를 트기 위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왕관을 쓴 사울보다 다윗이 실질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러했기에 사람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환호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다윗은 맹수와 맞서 양떼를 구원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생명을 거는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그에게 맡기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는 맹수와 같은 주변 나라에 맞서서 이스라엘을 지킬 선한 목자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물꼬를 터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답답한 대한민국 상황,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물꼬를 터 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골리앗을 쓰러뜨려 물꼬를 트는 이 시대의 다윗 역할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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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 故 김광일 장로님이 그립습니다…(5주기를 추모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하라고 분부하셨다. 벌써 김광일 장로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5년째 되는 날인 5월 24일(주일) 오후, 그가 섬겼던 부산중앙교회당에서 5주기 추모예배를 드린다. 매우 그리운 김광일 장로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김 장로는 가정과 그가 섬겼던 교회(부산중앙교회)에 헌신했으며, 변호사로서 약자들,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에게 한 없이 베풀었고, 나누었고, 배려했고, 불의와 싸웠다. 그의 생애가 너무 짧았던 것 같아 아쉬움이 앞선다. 필자가 1980년대 교계언론의 현실에서 견디며 살아왔던 것은 김 장로의 사랑과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변호사로, 야인으로 살았던 삶은 늘 한결 같았고, 차별 없이 남을 배려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었다. 김 장로는 이 땅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 한 몸을 바친 거룩한 십자가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남이 억울함을 당했을 때 무료로 변론을 담당했다. 특히 억눌린 약자의 편에 서서 변론하고 헌신해온 삶은 그리스도의 사랑 그 자체였다. 불의와 맞섰다. 고통당하는 국민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민주인사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부마항쟁의 불씨를 제공한 주역이었다. 이 땅의 양심적인 젊은이들에게는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늘 다정하게 보듬었고, 지원했고, 용기를 준 훌륭한 스승이었다. 필자가 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한국교회 특히, 부산교계 특정교단의 불의 앞에 교계언론을 통해 교계정화운동을 펴 교계 정치꾼들에게 경종을 울린 사건들로, 그 때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대표적으로 국제신문 ‘국제춘추’란에 ‘가룟유다예찬론’을 기고해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나의 자극제로 신선한 충격을 준 사건이 있다. 교계 정치판도를 바꿀 만큼 썩어가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역설적인 필체로 가룟유다를 예찬하는 글을 썼다. 그 바람에 김 장로(글을 썼던 당시에는 집사였다)가 장로 피택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교회까지 압력을 넣어 징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일로 결국 故 노진현 목사를 지지하는 일부 인사와 반대쪽이 갈라서게 됐고, 새중앙교회(지금의 호산나교회)를 개척하게 된 계기가 됐다. 지금의 부산중앙교회가 전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진리로 쾌거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산중앙교회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중구 대청동에서 지금의 넓은 터전인 수영구 남천동으로 옮겼다. 한국교회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교회가 잘 되기만 기도해 왔고 한국 교계가 바르게 서나가기를 염원한 故 김광일 장로는 볼품없는 필자를 도와 교계신문을 한때 운영, 관여하면서 부산지사장을 맡았었다. 이것도 지금 생각하니 하나님의 섭리이지 않았을까. 사도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던 김광일 장로의 고백처럼 그를 추모하고 싶다. 이 땅의 민주화와 한국교회, 특히 섬겼던 부산중앙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있을 줄 알고 있다. 故 김광일 장로가 영원한 진리 앞에, 작은 일에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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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현장
    2015-05-14
  • 무혐의 처분에 항소한 부산장신대
    부산장신대학교 이사회(이사장 민영란 목사)가 18일 개최하여 학교 현안인 도서관 종합 건축관을 6월 중에 시도하는 안건을 다룰 전망이다. 민영란 이사장의 이사 임기가 겨우 2017년 11월까지이기 때문에 이사장 임기는 이사직 잔여기간까지 한다는 정관 때문에 17개월 밖에 안남은 민 이사장으로서는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낼 수밖에 없다. 이사장은 학교 숙원인 도서관 건축을 꼭 성취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도서관 착공을 시도할 것이라는 게 이사 다수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일부이사와 원로 동문들은 이 도서관 건립을 다음 이사장이 맡아 해야 한다는 주장도 공존하고 있다. 한편 지난 3월 전 이사장 정봉기 목사가 김해중부경찰서에 학교 일부 평의회 인사들을 대상으로 학교 명예를 훼손했다는 형사적 책임을 묻기 위해 고발을 한 바 있다. 약2개월간에 걸쳐 관계자들의 소환 진술을 들었다. 명백히 누구를 향한 피고발인이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검찰로부터 회신 받았다. 따라서 학교 이사회는 서류 보안을 해서 다시 고법에 항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고발은 전 이사장이 대표로 고발인이 되어도 학교 이사회가 고발하도록 이사회 결의를 했기 때문에 고발인이 자연인 전 이사장이 아니라 학교법인 이사회가 안고 가야 되는 연고로 현 이사장 민영란 목사가 법적 승계를 할 수 밖에 없다고 법률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민영란 목사는 끝까지 갈 데까지 간다는 뜻을 표시한 이상, 법적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결국 중간에서 김용관 총장만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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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5-14
  • 취임사에 대한 엇갈린 반응
    강영안 이사장은 취임사에서 앞으로 임기 2년 동안 ‘정체성’과 ‘지속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대학과 병원, 신대원, 교단에게도 당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에 개혁적이고, 앞으로 기관과 교단이 나아갈 방향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부탁한 메시지라는 반응과 반면, 기관장들에게는 일종에 협박으로 들릴 수 있다는 두 가지 반응이 공존했다. 총장에게 “(대학이)재제를 받거나 대학의 존립이 흔들릴 경우, 총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과 병원에 “차기 병원장은 1. 자신의 분야에 탁월성이 증명된 의사이면서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이며 3. 동시에 구조개편을 포함하여 조직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분이여야 한다”는 지침을 내린 것, 그리고 가장 예민한 신대원 이전문제를 꺼낸 것과 총회에 대해 “이사나 감사를 추천할 때 제발 계파나 정실을 떠나, 고신교회에서 가장 탁월한 분을 찾아 적절한 인물을 세워 달라”고 말해, 해당 기관장과 총회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평가다. 강 이사장의 취임사 내용이 대부분 긍정적이고 개혁적이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다만 2년이란 짧은 시간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기득권 세력과 맞서 가장 예민한 부분들을 어떻게 바꿔나갈지 여부가 앞으로의 관심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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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5-14
  • 첫 이사회부터 불안한 행보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가 이사장 취임 후 첫 이사회부터 불안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11일 이사장 취임식에는 이례적으로 이번에 취임하는 이사들이 행사 진행을 맡는 등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1부 예배에 최한주 목사가 사회를, 2부 이취임식에는 황만선 목사가 사회를 보았다. 기존 이사였던 석대중, 양재한, 박윤배, 최종원 이사가 이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 취임식 이후 첫 이사회에서도 과반수인 6명의 이사가 확보되지 않아 개회가 불안했지만, 뒤늦게 최종원 이사가 참석하여 개회가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영안 이사장과 이번에 취임한 변성규, 황만선, 최한주, 옥재부 이사는 서로 힘을 보탤 수 있겠지만, 나머지 4명의 이사를 강 이사장이 어떻게 포용할지가 앞으로 이사회 행보에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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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5-14
  • 수많은 창구 통해 도움의 손길 내밀자
    지난달 25일 7.9 강진이 네팔을 강타했다. 영국 BBC 방송을 보면 마치 황무지처럼 보인다. 마을이 사라지고, 건물이 다 무너져 내려 마치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지진으로 다쳐 울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얼굴에, 팔에, 다리에 상처를 입고 고통당하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저 아이들이 평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다. 이미 사망자 8천명이 넘었는데, 지난 12일 추가 지진이 또 발생했다. 다시 최소 50명의 사망자를 낸 추가 지진으로 실낱같았던 희망마저 짓밟아 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서 끝이면 좋겠지만, 세계 지질학자들은 또 다시 추가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네팔의 안타까운 소식에 세계 각국에서 구호팀이 파견됐다. 네팔을 돕기 위해 수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수도 카트만두를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네팔 정부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와주러 오는 이들이 고맙지만 수도에 넘쳐나는 이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구호팀들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그래서 한국에 귀화한 네팔인 수베디 목사는 현지와의 네트워크가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지인들 혹은 현지 선교사들과 네트워크해 실제적인 도움을 줘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들고 가는 구호품들이 현지에서는 무용지물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현지인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어디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조사해야 한다. 수베디 목사는 한 교회, 한 마을 돕기 운동을 제안했다. 한 교회가 한 마을을 정해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지원이 치중되는 것을 방지하고 네팔 전역에 걸쳐 효과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수베디 목사는 현재 네팔에 지부를 둔 모 단체가 가장 효과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면서 그만큼 현지와의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네팔을 돕느라 분주하다. 교회에서, 교단에서, 학교에서, NGO단체 등에서 쉴 새 없이 네팔을 돕고 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창구가 열려 있다. 각자의 환경에 따라 여러 창구를 이용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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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 고려학원 강영안 이사장에게 바란다
    최근 이시원 장로를 비롯한 석대중, 양재한, 최종원 이사가 공동으로 국가권익위원회 신문고에 ‘이시원 이사가 임기가 유효한지 여부’에 대한 질의를 하였다. 권익위원회는 해당 관청인 교육부에 이첩했고, 최근 교육부는 여기에 대한 답변을 보내왔다. 이시원 장로에 따르면 “확약서가 자의에 의한 확약서일 경우 사표로 간주할 수 있지만, 타의에 의한 확약서일 경우 사표로 간주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해왔다. 결국 교육부 답변서는 사법부 판단에 맡겨라는 늬앙스로 해석된다. 또 일부 이사들은 “불의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고 강경한 발언을 하고 있다. 강영안 이사장 체제가 공식 출범했지만, 이 매듭을 풀지 않고는 강 이사장 체제가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강 이사장이 당사자들을 만나 대화와 화해를 통해 풀어가야 한다. 이사장에 취임했다고 강공 드라이브를 한다면 과거 강규찬 이사장 당시처럼 이사회가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교육부가 임시이사를 파송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임시이사가 파송되는 것은 사실상 고신대학교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 이사장의 결단과 포용력이 가장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법원 가처분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이사장이 된 상황에 대한 사과도 있어야 한다. 취임사 내용에 이 부분이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최근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고려학원 이사회를 현 상황으로 만든 핵심적 인물은 법인 내 모 교단 인사로, 그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이번 상황을 기획했다는 말들이 교단 안에서 돌고 있다. 강 이사장을 세워놓고 차기 이사장에 특정 인물을 이미 내정해 두었으며, 차기 교단 사무총장 선거에 나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사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뒤에서 자신이 모든 상황을 지휘한다는 소문이다. 물론 이 소문이 근거없는 소문으로 끝나길 바란다. 이사장 취임사 내용처럼 정의와 긍휼이 실현되고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이사회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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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5-1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버이 주일 유감(有感)
    어버이 주일, 원래는 어머니 주일 어버이 주일로 바뀐 것은 아쉬워 오늘의 어버이 주일은 처음부터 어버이 주일이 아니고 어머니 주일로 시작되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는 ‘안나’라는 소녀가 자기 어머니 추모예배에 참석한 손님의 가슴마다 카네이션 꽃을 달아 드렸다. 안나양은 해마다 그 날이 돌아오면 추모예배를 드렸고 참석하는 이들의 가슴에 꽃을 달아 드렸다. 그렇게 하던 중 대실업가 와나메이커에게 “한 날을 정하여 모든 어머니의 은덕을 기리는 날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같이 제의했다. 와나메이커가 5월 둘째주일을 그렇게 하는 날로 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어머니의 은덕을 기리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소문이 전국에 두루 퍼졌고 1914년엔 미국 국회에서 이 날을 ‘어머니 날’로 정하고 지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재직 시에 ‘어머니 날’을 정했는데 그 해 5월 둘째주일이 8일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주일과는 상관없이 해마다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지키도록 하였고 교회에서는 날짜와 상관없이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시초에는 ‘어버이 주일’이 아니고 ‘어머니 주일’이었는데 1973년에 ‘어머니 주일’이 ‘어버이 주일’로 변경되었다. 필자는 ‘어머니 주일’이 ‘어버이 주일’로 변경된 것만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물론 부성애도 갸륵하지만 모성애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숭고한가. 어머니의 사랑은 한없이 숭고하고 희생적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주고 받는 법칙으로 되어 있다. 받기 위해 주고 주고는 받기를 원한다. 친구간의 우정도, 남녀간의 사랑도, 심지어 부부간의 애정도 주고 받는 사랑이다. 받은 것 만큼 줘야하고 준만큼 받아야 한다. 준만큼 받지 못할 때 불만이 생긴다. 애정의 비극은 한 쪽이 준만큼 받지 못하고 받은 것 만큼 주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이러한 주고 받는 사랑의 차원을 훨씬 초월한 사랑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주고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준다. 어머니의 사랑은 주기만하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뿐만아니라 어머니는 강하다. 빅토르위고가 한 말처럼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의 강한 정신력은 모성애에서 표현된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 고생은 고생으로 여기지도 않고 자식을 위한 희생은 희생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자신의 고생과 희생으로 자식만 잘 되면 그 이상 바라지 않는다. 얼마나 강하면 그렇겠는가. 어머니의 은덕은 마땅히 누구나 다 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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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05-14
  • [시내산] 무임승차
    가끔 나라를 향해 공정하고 또 정의가 흐르고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국회와 사법부와 정당들이 중심인 정치계는 사회가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정의를 생명처럼 여기는가? 이들과 함께 경제계, 법조계, 교육계, 언론계, 의료계, 문화예술계, 체육계, 사회복지단체 등 각종 단체와 무슨 연대들까지 또 종교계 그 지도자들에게 시민사회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가? 에 대한 물음이다. 그 지도자들 거의가 스스로 출사표 던지고 어려운 경쟁을 통하여 선출되었다. 그 과정에는 불미스러운 일도 자행했다는 보도도 심심찮다. 그렇게라도 뽑혔다면 내세운 공약대로 성실하게 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은 무능하거나 사기꾼 심보를 가졌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감언이설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당선된 것을 성공한 인생이라 할지 모르나 분명 정의는 아니다. 봄은 결혼철이다. 거기에는 신랑신부라는 결혼 상대자가 있고 나름대로 서로를 향하여 일생을 맡긴다면서 약속과 요구사항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며 다투고 종국에는 결별을 선언한다. 그 것도 날로 증가한다고 보도된다. 이처럼 우리사회는 오른 소득과 달리 약속과 정의가 강수같이 흐르지 못하고 점점 역행하는 것 같은 세상이 되었다. 마치 신랑과 신부가 삶의 방향이 맞지 않으면 불화가 잦고 파경을 맞듯 대통령을 포함하여 선출된 지도자나 종교계와 각 단체의 장들, 심지어 대학이나 각 급 기관을 대표하는 대단한 공직에 앉은 분들을 신랑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바라보는 이해관계자들은 신부의 입장인 것이다. 만약 서로가 신뢰를 잃으면 가정파탄처럼 분쟁에 휘말리는 것이다. 이때에 <살후 1-3장>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특히 3장 7절-13절, 요약하면 규모 있게 행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이며, 오직 스스로 본을 주어 본받게 함이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도무지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다. 우리 정치사회나 교계에서 외치는 자, 그들 중에 더러는 공금인 나랏돈이나 단체나 교회의 재정을 제 것처럼 사용하고, 착복하고, 깊이 숨기고, 유용하다 덜미가 잡히면 둘러대다 재판받고 수감되는 꼴이 수 없었다. 자신만 망신하거나 죽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뽑고 바라보는 시민의 자긍심과 국격은 어찌 되는가? 사회를 통해 일깨워야 할 자녀들의 교육도 어려워진다. 특히 지도력을 내세워야 할 자리에는 걸맞은 능력과 지식과 경험을 갖추어야하는데 더러는 준비도 없이, 또 성실한 자세도 없이, 봉사하려는 사명감도 없이 단지 돈과 완장만 필요했던 것이 목표가 아니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수고하지 않고 먹을 것만 챙기는 규모도 없는 자들이라 비난을 받는데 이들을 값없이 공짜로 남의 차를 타는 무임승차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무너진 기본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목사 장로 등, 직분 자들도 성실하게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지적되면 잘못을 수용하여야지 구차하게 변명하고 그것도 안 되면 상대에게 덮어 쉬우는데 그런 방법으로는 도리어 더 크게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무엘은 자신에게 더욱 엄격한 사사요, 선지자이다. 삼상 12장 전반부에 온 백성들에게 자신의 투명성과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했는지를 물었다. 지도자는, 특히 종교지도자는 사무엘처럼 은퇴 할 때에는 해당 성도들에게 성적표를 물어 볼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간 흠이 있어도 은혜롭게 라는 거룩한 말로 덮어 버리는데 이는 비 성경적이다. 진실로 깨끗하게 살아 명예를 지키고 존경을 받아야 교회도 성장한다. 이것은 성도들도 갖추어야 할 덕목이며 행복을 지켜주는 수단이다. 사회정의의 초석인 사무엘은 무임승차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의 삶 속에 무임승차를 없애자. 최소한의 삯은 감당하는 것이 의무이다.
    • 오피니언
    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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