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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칼럼] 새순이 나르샤
    “새에덴의 꽃, 생명 / 순장들이 모인 은혜 넘치는 / 이 좋은 시간과 공간에 / 나를 택하여 주사 더 큰 사명으로 날아오 / 르게 하시니 더욱 주님 높이 섬기며 / 샤론의 꽃을 피우겠습니다.” 이건 지난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있었던 ‘새순이 나르샤’ 시간에 어느 순장이 저에게 보낸 ‘새순이 나르샤’로 지은 6행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장은 ‘맨발의 소명자’로 6행시를 썼습니다. “맨 처음 교회를 간 건 그저 예쁜 여학생 때문이었습니다. / 발치에 앉아 멀리 떨어져서 들은 제자 베드로의 배신 이야기에 / 의로운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나라면 그렇게 배신 안 한다. 사내 대장부가 3년이나 따라 다녔으면서 배신을 하냐?’ / 소리치듯 내뱉은 마음의 소리에 / 명령이 내려오듯 제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 자녀로 삼아주시고 주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순이 나르샤’라는 프로그램은 코로나 이후 소그룹과 생명순(구역)을 살리기 위한 중간 그룹의 모임이었습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00명에서 150명 단위로 교회 카페에서 교회 오빠인 담임목사와 교회 언니인 순장들과의 영적인 따뜻한 대화와 소통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는 겨우 교회를 유지하고 회복을 하였지만, 이제 코로나의 검은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새로운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야 할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순(구역)이 살아야 되고 생명순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순장(구역장)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관계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제가 먼저 격려의 메시지를 하고 성도들이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을 엽서에 적어서 주면 그걸 일일이 다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어느 한 장도 가볍게 취급하지 않고 진솔하고 성심성의껏 일일이 다 대답을 해주니까, 그곳에 모인 성도들이 감동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가까이에서 단둘이 이야기하듯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교구마다 직접 만든 선물을 저에게 전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교구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케이크, 김밥, 저의 캐리커쳐와 제 시를 캘리그라피로 쓴 액자 등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떤 교구에서는 저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고 메달을 만들어서 목에 걸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구에서는 콩나물 꽃다발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순이 콩나물처럼 막 자라라고 말입니다. 그런 후에 순장들과 함께 가수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를 개사해서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 그렇게 대단한 기대까지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 그대 하나 떠나간 우리 교회 이제 그대 아님 채울 수 없소 /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성도로 만나 / 꿈을 꾸듯 새에덴을 이루고 / 주님의 은혜로 벅찼던 우리가 예배로 만나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 모든 건 은혜이었음을….” 그리고 제가 마무리 축복기도를 하고 일일이 한 분 한 분 다 악수를 하였습니다. 천 명이 넘는 순장들이 한꺼번에 모이면 그냥 하나의 집회로 끝났을텐데, 교회 카페에서 100명, 150명 단위로 모이니까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역시 작은 공간이 주는 분위기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서로 작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악수를 하며 아이컨택을 하니까 정말 가까이에서 단둘이 데이트(?)한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겠죠. 이러기를 어떤 날은 하루에 몇 번씩 하니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끝나고 잠시 누우면 진짜 순장들이 새순이 되어 날아오르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정말 콩나물 꽃다발처럼 생명순들이 쑥쑥 자라 오르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교회 오빠인 담임목사를 응원하고 추앙하고 지지해준 교회 언니인 순장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교회는 ‘새순이 나르샤’할 뿐만 아니라 ‘생명이 나르샤’하고 ‘부흥이 나르샤’하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에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쓰고 불멸의 성장 신화를 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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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성서연구] 순리를 따라서
    시편 19편은 다윗의 시로서 몇 단락으로 나눠집니다. 1~6절은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7~11절은 여호와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언뜻 이 두 단락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단락을 연결하는 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순리>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삶의 순리>입니다. 1절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2절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어제는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은 내일로 이어집니다. 어젯밤은 오늘 밤으로, 오늘 밤은 내일 밤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날들이 흐르면서 세월이 갑니다. 3절의 말씀처럼 거기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4절의 말씀처럼 듣는 귀가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이 전해 주는 소리가 온 땅에 통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연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자연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양을 몰고 들판을 누볐습니다.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그가 본 하늘과 땅, 낮과 밤, 자연은 다윗의 귀를 열어 주었고, 거기서 하나님의 소리 없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자연에서 키워야 합니다. 요즘처럼 방에서만 크는 아이들은 심각한 인격적 결함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방 밖의 자연을 경험하도록 돕는 게 중요합니다. 7~11절은 <여호와의 율법이 가르치는 인생의 순리>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증거, 교훈, 계명, 도, 법 등 다양하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며,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진실하여 다 의롭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가 꿀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이것을 통해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연과 율법을 통하여 인생의 순리를 가르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그 순리를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선 자연이 가르치는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봄날이 오면 파종합니다. 여름날에는 가꿉니다. 그리고 가을날에 추수합니다. 이게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전한 진리를 터득한 삶의 순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을에 파종하거나, 봄에 거두려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욕망을 따라 무리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순리를 따라 평온한 삶을 삽니다. 또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이 가르치는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자연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죄인을 구원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영생의 복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어떤 평안과 행복과 기쁨과 형통이 주어지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연의 순리를 무시하고, 말씀의 가르침을 거역합니다. 그게 허물이요, 죄입니다. 다윗은 12~13절에서 그러한 허물과 죄에 빠지지 않길 기도합니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우리도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봄에 파종하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이 순리이듯이, 인생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나이에 따라 올바르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리를 따르는 삶은 마치 물처럼 흐르는 삶입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우리도 자연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욕망은 순리를 거스르게 하고, 하나님의 원리에 도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도는 삶을 관조하듯 삽니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거기 참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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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시사칼럼] 지구의 날
    지난 4월 22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일이기도 했던 이 날은 오십 세 번째 맞이하는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전국 소등 행사’였습니다. “저녁 8시부터 불을 끄고 지구를 밝혀주세요”라는 문구로 환경부가 주관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 채 관심 있는 소수들만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하기야 역사상 명멸했던 수많은 운동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기는 권리 즉 인종, 계층, 재산에 관계없이 일정 연령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보통선거권 역시 초창기에는 극소수 사람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실망하는 대신, 이제 몇 걸음 못 왔다가 아니라 벌써 이만큼 걸어왔다 생각하고 힘을 내야 할 일입니다. <지구의 날>을 알게 되었다면, 이번 기회에 환경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환경’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던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라는 여성이 인류 역사를 바꾸는 책을 한권 출간했는데 그게 바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었습니다. 삼백 페이지 분량이지만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이 책에 한 번 도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당시 신제품으로 개발되면서 각종 병충해를 제거하고 농사나 위생에 혁혁한 성과를 자랑하던 디디티(DDT) 같은 제품의 위험성을 고발한 작품입니다. 이 책이 발표되고 난 지 10년 만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유엔 주관 인류환경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20년 뒤 브라질의 리우에서 국제연합환경개발회의가 열렸고, 이후 각종 환경 관련 회의와 선언과 기구와 단체들이 발족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학술지는 조금 부담스럽다면, 고전으로 평가받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은행나무, 2011)을 추천합니다.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김한민 씨가 쓴『아무튼, 비건』(위고, 2018),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8)을 추천해 드립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다들 정신없는 틈을 타서, 일찍이 유래가 없을 만큼 엄청난 분량의 일회용 쓰레기가 배출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인류 전체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리라고 봅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심해 바닥에서 탐사단의 시야에 처음으로 들어온 물체가 플라스틱 쓰레기였다는 기사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다면 『플라스틱 바다』(미지북스, 2019)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책을 보시던, 신선한 충격을 받으실 테고 환경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지시리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독서와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실천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합니다. 어제 했던 <전국 소등 행사>도 그런 흐름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개인적인 작은 실천 하나 하나가 모여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항상 거론되는 이야기지만 많은 음료를 소비하는 추세에 맞추어 실제로 개인용 물병이나 음료용기를 모두 다 들고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플라스틱 방앗간>이나 <제로웨이스트카페> 같은 환경지향성 가게나 기업들을 돌아보는 일도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인용 혹은 단체로 세상을 향해 작지만 큰 목소리를 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결국 기업이나 정부를 움직이는 힘은 환경 여론이기 때문입니다. 내년 이맘때면 잊지 말고 10분간 불끄기에 동참해 봅시다. 물통을 들고 다니는 환경 운동가가 되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더 그래야 합니다. 왜일까요? 최근 요하임 라트카우(Joachim Radkau)가 『생태의 시대』(열린책들, 2022)라는 환경역사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그는 환경운동의 역사가 일천하다고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일찍부터 환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인간은 물론 동식물까지 배려하는 책이 존재했습니다. 성경입니다(출 22:30, 23:5, 19; 레 22:27, 28, 신 22:6 등). 하기야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인데 어련하겠습니까? 예수께서도 하늘의 새와 땅의 풀과 양과 소까지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마 6:26-30; 12:11; 눅 13:15). 신약성경에는 더 분명한 환경 보호 선언들이 존재합니다(롬 8:21-22; 엡 1:23; 골 1:20 등). 리용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엡 1:10)을 근거로 <총괄갱신(Recapitulation)>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개발과 이윤을 이유로 환경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만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피조 세계를 존중하고 아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중대한 책무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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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은혜의 말씀] 생명을 구하는 것(막 3:1-6)
    오늘 본문을 보면, 생명을 살리려고 하시는 우리 주님과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안식일날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주시하고는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다 아시면서도,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고는 “네 손을 내밀어라” 하시면서, 그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 살자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노하셨다고 합니다. '완악하다'란 단어의 뜻은 ‘자기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기만의 생각으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경건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런, 이런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면서” 자기 행위와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깔보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열심을 다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살기가 등등합니까? 복음이 없고, 율법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 죽이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자기 혼자 의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형제의 잘못을 보거든 정죄하기보다 먼저 우십시오. 새벽에 그 영혼 생각하면서, 눈물을 쏟으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죄인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그래서 교회가 죄인의 무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살려내는 클리닉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시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모의할 것을 아시면서도, 불쌍한 한 영혼을 위해,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말할 수 없이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심정과 자비를 가지고 손 마른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 포도주를 담았다면, 우리의 생활양식, 우리의 의식구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가?’ 여기서부터 우리의 복음적 삶의 모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입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복과 치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이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일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살리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사랑으로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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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4
    오래전 미국에서 한 집사님께서 노래를 잘해보고자 레슨을 청하여서 가르친 적이 있다. 한두 번 정도 한 것 같은데 뭔가 표정이 이상하다. 이유인즉 레슨 두 번을 받았으니 자신이 기대한 놀라운 변화를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충족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성악이라는 예술에 대한 무지로 인한 해프닝이기는 했으나 나로서는 씁쓸했던 기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빠른 것을 좋아한다. 나 역시 처음 미국 갔을 때를 생각하면 그들의 여유로움이 무척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신앙생활 속에서도 급한 마음으로 인한 우리의 부족을 종종 보게 된다. 삶을 통하여 인내함으로 받은 주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였어도 늘 조급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재밌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서양에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다. 어린 시절이긴 하겠으나 이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번쯤 상상을 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말이라면 소원을 이루는데 참으로 좋은 도구들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서양 것 보다 우리 것이 사용하기에 훨씬 좋은 것 같다. 요술램프는 몇 가지 과정을 거치지만 도깨비 방망이는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소원이 이뤄지니 말이다. 한국 사람들의 심리가 그대로 반영된 이야기다. 혹 우리가 신앙(기도)생활을 하면서 자주 겪는 일은 아닐까? 빠른 응답이 없을 때의 실망감이나 상실감으로 고민가운데 헤맬 때가 있었던 거 같다. 절박하였는데 무심하심에 분노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요술램프의 지니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시다. 당연히 우리의 명령(기도)에 즉각 반응하시는 종은 더더욱 아니시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착각을 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다. 부활절이 지났다. 착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묵상해 보자. 오래 참음과 기다림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주님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공로 없이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또 생각하기를 싫어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쉽지 않다면 생각하는 연습을 해서라도 날마다 생각하는, 기억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작금의 시대를 돌아보라. 말도 안 되게 간악한 무리들이 세상을 현옥하며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때에 진실한 믿음의 강력한 부활의 예배(찬양)는 우리 자신을 날마다 돌아보며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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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 부흥의 열쇠는 질문입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저희 부산 성민교회와 분홍목사 사역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를 만나는 분들마다 재촉하는 게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해 보라는 것입니다. 성민교회는 뭘하길래 아이들이 몰려드냐? 한마디로 해봐라. 그런데 참 답이 애매합니다. 저희가 무슨 프로그램을 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으면 참 대답이 쉬울 겁니다. 이거 하시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다음세대 사역은 단답형으로 대답하기가 좀 복잡합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성민 교회의 다음 세대의 사역은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질문. 바로 아이들에게 직접 묻는 것입니다. “얘들아, 뭘 해주면 좋겠니? 얘들아, 우리가 너희한테 뭘 해주면 너희가 행복하겠어?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여러분, 아이들에게 질문할 때 교회학교는 어마어마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가 요즘 여러 교회에 초청을 많이 받습니다. 교사 헌신 예배, 교사 세미나, 교사 수련회, 교회 학교 부흥을 위한 자리에 불려 가면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겁니다. 잘못 불렀다고. 저를 부르지 말고 이 자리에 서야 할 오늘의 강사가 있다고. 그러면 모두 그게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강사가 누구냐면 ‘여러분 교회 부서의 아이들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여러분 교회 부서의 아이 중에서 특별히 교회에 나오기를 싫어하고 예배에 집중을 못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불러 놓고 마이크를 주고 “네가 원하는 걸 말해봐. 어떻게 해주면 너희 부서의 애들이 많아지고, 행복하고,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겠니?”라고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여러분이 그대로만 하시면 여러분의 교회는 부흥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 아이들을 부르지 않고 저를 부를까요? 왜 소위 전문가를 부를까요? 어른인 우리가 애들한테 물어보기 창피해서 그렇습니다. 먼저 애들에게 물어본 분홍목사, 저를 부르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뭐냐면 먼저 물어본 사람이 전문가입니다. 먼저 물어봐서 아이들의 마음을 아는 제가 전문가라고 강의를 하고 다니지만 결국 중요한 키는 아이들이 쥐고 있습니다. 질문이란 건 뭐냐면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왜 질문이 그렇게 중요한 화두일까요? 이미 교회학교에서 10년, 20년 교사근속하신 분들이 많을 텐데 왜 질문이 핵심이라고 하는 걸까요? 질문이라고 하는 것. 질문을 할 수 있다, 질문을 받아 준다, 질문에 답한다, 말이 오고 간다. 여러분, 이것 자체가 소통입니다. 제가 다음 세대 사역을 20년 이상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소통과 부흥에 대한 정의입니다. 많은 분이 어떻게 알고 있냐면 ‘소통하면 부흥한다.’라고 알고 계세요. 맞습니까? 소통하면 부흥합니까? 소통하면 부흥이 됩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해보니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은 ‘소통이 부흥이다.’입니다. 소통하는 자체가 부흥입니다. 이미 아이들과 교사가, 어른과 아이가 서로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그것이 부흥인 것입니다. 제가 저희 교회에 와서 처음 한 것은 아이들의 교회 학교 예배시간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25년 동안 저희 교회는 아이들은 9시에 오고, 어른들은 11시에 오는 예배였습니다. 25년을 하면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들이 다 9시에 오는데 항상 제시간에 못 오고, 9시 10분, 20분, 30분, 40분, 50분에 오고 10시가 되어야 아이들이 오는데 어른들은 그것을 하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 25년을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제가 와서 아이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애들아, 뭘 해주면 좋겠니?” “목사님, 시간이 너무 일러요. 9시에 못 나오겠어요. 미치겠습니다. 팔짝 뛰겠어요.” 그래서 제가 “그럼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했더니 아이들은 “어른들은 11시에 나오잖아요. 우리도 11시에 나오면 좋겠어요.” “그래? 11시에 나오면 너희들 잘 나올 수 있겠어?” “그럼요! 저 누구도 데려오고, 누구도 데려오고, 다 데려올 수 있어요! 11시에 오면 안 돼요? 왜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당회에 건의했습니다. 우리 교사들이 9시 예배드리고, 애들은 11시에 예배하자. 그랬더니 웅성웅성 그러세요. 왜? 25년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요. 애들은 9시에 교회에 데려다주고, 또 집에 갔다가, 애들 데리고 와서 데려다 놓고, 11시에 예배드리는 게 그동안 누구도 아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내내 그렇게 해 왔으니까요. 아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애들한테 물어보는 순간 애들은 하나같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9시에 못 오겠다고. 자, 그래서 저희는 2017년부터 교회학교 예배시간을 오전 11시로 전부서 다 바꿨습니다. 바꾸는 순간 어떻게 됐을까요? 모두 부서가 부흥했습니다. 잃은 양 다 찾았습니다. 그동안 저희가 학교앞 전도하면서 수요일마다 간식 주고 말씀 나누고 했던 아이들 주일에는 한 명도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았거든요. 수요 교인이었어요. 그런데 11시로 바꾼 후 다 나왔어요. 왜? 아이들이 자기가 올 수 있는 시간, 오고 싶은 시간대로 어른들이 물어봐 주었고, 아이들은 말을 해 주었고, 그 질문과 대답 속에서 답을 찾은 것이죠. 그러면서 저희 교회가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질문이 부흥의 키입니다. 오늘, 바로 아이들을 만나 질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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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4-28
  • [다음세대칼럼] 믿음의 유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가페의 사랑과 비슷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보면 아무런 조건이 없고 무한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물려줘야 할까요?’ 우리가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자녀들을 위하는 것인지에 대해 창세기 26장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절에서 11절 말씀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10절에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있을 때 흉년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런데 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흉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브람 때에 일어난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해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던 그랄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아브람 때에 흉년이 들었을 때는 아브람과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갈려고 할 때에 창세기 26장 2절에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은 이삭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흉년이 들어서 살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축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 지역에 머무르게 됩니다. 여기서 가나안 땅은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신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아야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때로는 우리 인생에 흉년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부모의 입장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줘야 될 중요한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어느 종교든지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참 진리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세의 때에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 밖에도 세상에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심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만이 우리가 믿고 따라에 될 유일한 삶의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물려줘야 할것인가?’ 자녀들이 우리를 통해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도록 힘쓰는 것은 우리가 평생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힘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언제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인생의 흉년에 관계 없이 언제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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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신앙교육나침반] 친구가 가득한 교회로 자녀세대가 몰려온다!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열두 살, 아홉 살이 된 아이들과 우비만 입고 밖으로 나간다. 음악을 틀지 않아도, 온 세상 가득한 레인 비트는 온 가족을 춤추게 만든다. 함께 첨벙첨벙 뛰며 물을 튀기고, 나뭇잎 배를 만들어 물웅덩이에 띄운다. 그 순간, 남편과 나는 열두 살, 아홉 살로 돌아간 것과 같이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어, 어느새 아이들과 몸과 마음의 온전한 일체감을 경험한다. 심각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 대부분은 병리학적인 목적으로 놀이치료를 처방받는다. 정서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정서적 공급을 충분히 받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로인하여, 아이들은 일상에서 어려움과 도전을 만날 때에, 적절히 반응하는 자기만의 전략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로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놀이는 놀이하는 대상과 순수한 정서적 교감을 느낄 수 있으며, 아픈 아이들이 세상에 반응하는 자신만의 전략을 하나씩 만들어갈 수 있는 보석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자녀세대들의 마음이 다치고 상하여 있다. 마음이 다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 아이들의 마음이 다쳤을까? 아이들을 순수한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끊임없이 가르치고 채우려는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이 아이들의 마음을 점점 시들게 만들고 있다.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지식이 가득한 바리새인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기며 가까이 와서 쓰다듬어 치료하는 친구였다. 지금 우리 자녀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이다. 친구라면, 무엇을 할까? 친구라면, 함께 노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 좋은 친구는 함께 노는 친구이다. 교회의 모든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큐티는 잘 했는지, 예배태도는 정숙한지, 밑줄은 잘 채우고, 공과 만들기는 잘 하는지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교사들만 가득한 교회는, 아이들이 가기 싫은 교회이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함께 웃어주고, 함께 뛰고, 잡으러 가고, 잡히고, 재미있게 놀아주는 어른친구,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 삼촌 친구, 이모 친구, 또래 친구가 가득한 교회는, 아이들이 날마다 가고 싶은 교회이다. 온 교회의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서 매 주일 신나게 놀이하면 참 좋겠다. 영유아, 어린 아동들이나 모여서 하는 놀이를 왜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다시 한 번 대답하고 싶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마음이 아픕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목사님, 선생님들이 모두 친구로 변신해야합니다! 아이들에게 친구는 ‘같이 노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같이 놀아야 합니다.” 온 교회가 진지하고 신중하게 철저히 준비하여 함께 놀이하는 시간을 준비했으면 좋겠다. 단순히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녀세대들의 마음을 돌보고 치료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전략적으로 마련하면 좋겠다. 이 일을 위해서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은 복음놀이 전문가 양성과정을 5월 중 진행한다. 향기나무 성경놀이는 복음으로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의 친구가 되어 즐겁게 하나 되는 놀이이다. 또한 복음으로 가정을 하나 되게 하는 놀이이며, 복음으로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 신앙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놀이이다. 10가지 성경놀이를 배우는 자리가 아니라 1000가지 성경놀이를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문의| 향기나무 교육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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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서울시 퀴어축제 허락할까?
    서울 퀴어축제가 7월1일 예고된 가운데 퀴어축제 주최측은 서울시청 광장을 사용하기 위해 신청서를 서울시에 제출한 상태다. 오는 5월 초 광장 사용허락 여부를 결정하는 심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지난 17일 서울시청 광장 앞에서는 ‘동성애 퀴어축제 서울광장 사용승인 반대’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석자들은 “작년 퀴어행사의 서울광장 사용 신청에 대해 서울시는 유해 음란물 판매·전시 등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사용을 조건부 허락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며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이상 국민을 실망시키며 머뭇거리지 말고, 2023 퀴어행사의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하지 말라며 사용불허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면서 만약 오 시장이 2023년 퀴어행사의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한다면 그동안 고통받아왔던 서울시민들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꼴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또 2022년에 오 시장 스스로가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하면서 내건 조건은 물론 서울시민과의 약속을 또다시 저버리지 말길 엄중히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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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4-28
  • 조용기 목사 생가 보존 놓고 갈등
    고 조용기 목사가 태어난 생가가 KTX 울산역 역세권 개발사업에 포함되면서 보존 여부를 놓고 갈등이 일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생가가 소재하고 있는 울주군 삼남읍 신화리 일대는 2019년 KTX울산역 역세권 복합특화단지 조성을 위한 개발구역에 해당한다. 한화솔루션과 울주군, 울산도시공사가 특수목적법인을 만들어 민관 공동 투자로 시행하고 있다. 울산시가 일자리 창출과 도심 균형발전을 위해 상당히 공들여 온 사업이다. 이 사업이 예정대로 추진되면 조용기 목사의 생가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나 준주거 시설 등이 들어선다. 사업부지 안에는 은혜와진리교회, 그리고 조용기 목사의 동생 조용목 목사의 땅이 총 3만 2000㎡가량 포함돼 있다. 은혜와진리교회측과 지역교계 등은 당연히 이 사업을 반대하면서 조용기 목사 생가 보존을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시행사측은 “이미 4년 전부터 시작한 사업이고, 조 목사의 생가를 보존하고 싶어도 이미 사업이 인허가 신청 단계까지 다다랐고, 서울산 중심의 도심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사업이어서 생가를 보존하면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난색을 표하는 중이다. 다행이 최근 정치인과 종교인, 법조인 등이 ‘조용기 목사 생가보존회’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생가보존회측은 “세계적인 영적지도자의 생가를 철거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며 “역세권 개발사업에서 생가는 제외하고 원형 보존해 기념사업에 활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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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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