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1(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시사칼럼]2015 센서스(census)
    2015년은 10년마다 국가(통계청)가 주관하여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Population and Housing Census)’가 열리는 해입니다. 특히 우리가 이번 센서스(census)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난 번 2005년 조사에서 나타난 종교 관련 통계의 충격적인 결과 때문입니다. 당시 총 인구 4,455만 명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은 2,497만 명(53.1%)으로, 불교도가 1,072만 명(22.8%), 개신교인 861만 명(18.3%), 천주교인이 514만 명(10.9%)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첫 번째 센서스였던 1995년에 비해 불교는 40만 명(3.9%) 증가, 천주교는 295만 명 증가(74%)한 데 반해 개신교만 14만 명 감소(-1.6%)한 결과였습니다. 물론 통계방법 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천주교)’ 항목이 먼저 나오고 ‘기독교(개신교)’ 항목이 한참 뒤에 있어서 일부 개신교인이 앞의 항목에 가표를 해버렸을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입니다. 비슷한 시기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조사(2004)에 의하면 종교를 가진 사람(전체 인구의 53.5%) 중 불교 24.4%, 개신교가 21.4%인데 비해 천주교는 6.7%에 불과했다는 근거를 함께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번 2015 센서스를 특히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2005 천주교 부흥’은 사실인가 신기루인가? 작년에 한국 사회를 강타한 교황 신드롬은 천주교의 약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개신교의 쇠락은 어느 정도 사실인가? 2014년 4월 실시한 개혁신학회의 보고에 따르면 이단 및 사이비 기독교인이 100만 명을 상회한다는데, 이들을 제외한 순수 개신교인은 과연 얼마인가? 그런데 최근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5 센서스는 종전과 같이 전수조사 원칙이 아니라, 행정자료 중심의 등록센서스를 위주로 하되 10% 표본만 현장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라 합니다. 맞벌이 가정 증가 및 사생활 보호,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2005년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습니다. 현장조사가 확실히 응답률이 더 좋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주민등록표 등 행정자료에 기재된 답변의 신빙성이 더 높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한국 교회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권면이자 기회가 아닌가 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센서스 포로(Census Captivity)’나 진배없었습니다. 숫자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또 그렇게 이번 센서스를 저마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기다려 왔을 뿐, 정작 뼈를 깎는 자성(自醒)과 개혁(改革)의 몸부림은 없었습니다. 이번 통계방식의 변화는, 교회의 본질이 통계에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수치(數値)를 우상으로 삼지 말고, 진정한 성찰과 회개에 이르라고 하는 주님의 마지막 경고입니다. 오늘날 센서스 개념을 확립한 이들은 로마인이었습니다. 로마는 공화정일 때부터 조세와 징발을 목적으로 주기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특히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통치하던 시절(주전 27-주후 14) 제국 전역에 걸쳐 시행했던 ‘켄수스(census)’는 성경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눅 2:1; 행 5:37). 하지만 성경은 그 정확한 실시 연대나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만 그 일로 인해 한 부부가 어쩌면 시도할 생각조차 못했을 베들레헴 여행을 감행했고, 그 결과 예언대로 한 아들이 나심으로(사 9:6; 7:14) 모든 것이 달라진 사실만을 증언할 뿐입니다. 올 해 있을 센서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시행될지 또 무슨 결과가 나타날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금번 센서스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반드시 새로운 변화와 그로 인한 회복의 역사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간 주님께서 여러 경로를 통해 촉구하시고 경고하신 음성을 분별해서 그 명령에 순종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일탈(逸脫)했던 경로에서 벗어나 다시 주의 협로(狹路)를 따라 걷는 성도와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대망(待望)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01-01
  • [성공칼럼]종에서 주인으로
    많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의존하며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을, 어떤 사람은 사람을,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어떤 사람은 부적이나 돌과 나무 등을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 속에 두려움이 생길 때나 두려움을 넘어서서 욕심이 생길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의존하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으며, 약한 상태이며, 이용하려는 마음이 숨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하지만 결국은 의존일 경우가 많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고 대상만 달라졌을 뿐이다. 삶이 어려워지면 여지없이 나는 본래의 당당한 나를 잃게 되면서 의존하게 된다. 나는 순식간에 약한 종이 되어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 오랜 시간동안 몸부림친다. 걱정하고 울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간구하고 위로받고 안도하고 기뻐하고 또 두려워하고 간구하고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편안해지기는 하나 변화는 없고 두려워하고 기도하고 울고 원망하고 등등 이러기를 오랫동안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내 삶이 땅 속 깊은 어둠속에서 나오기 위해 벌레와 싸우고 흙과 싸우고 있는 씨앗과 같다. 폐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기침 한 번하면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런 기침은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다. 결국은 가래가 나오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 사람들은 이 아이를 죄인 보듯 한다. 그래서 아무도 곁에 오는 사람이 없어 외롭기 그지없다. 죽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다. 혈기 왕성했던 아이가 기가 죽어서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하며 몇 달 몇 년을 속으로 외쳤다. 두려움과 답답함 속에 화가 나고 우울하며 하나님께 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말씀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아이는 자신이 의존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살기 시작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구나. 이제 부터는 내가 살 것이다.’ 하며 잘 먹고 활동도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약도 잘 먹고... 그러는 중에 드디어 병에서 회복되게 되었다. 그 후 상담을 배우게 되고, 본래의 나를 알게 되고, 마라톤을 하면서 지금 70대의 활력이 넘치는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이 버린 것은 하나님이란 이름의 자신 속에 있던 의존의 대상 즉 자신의 의존성이었다. 의존성을 버리자 이 아이는 자유로워졌으며 힘이 생겼으며 자유로워지고 독립하게 된 것이다. 삶이란 처음에는 종으로 살다가 주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얼마동안은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다가 때가 되면 독립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학생도 잠시 선생님이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을 따르다가 때가 되면 자신의 길을 가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영적인 상황에서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다가 때가 되면 의존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 변하는 것은 내가 종에서 아들로, 주인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아들로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로 산다는 것은 종으로 살지 않고 주인으로, 나로 산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일을 만나든 내 속에 하나님의 본성을 잃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성경이 사실이냐, 아니야는 논쟁이나 사람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한 사건과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나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 것 때문에,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억울해하고 논쟁하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어둡게 만든다. 그러나 주인은 성경이 사실인 것과 이야기인 것에, 또 예상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성경 속에 더 많은 진리를 발견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자신의 삶을 잘 만들어간다. 하나님은 삶으로 다가오시기에 매 순간 누군가를 의존하는 종으로 살지 말고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1-01
  • [목회자 칼럼] “감사드립니다”
    지난 12월 11일(목) 오전 11시에 ‘(사)경남기독교총연합회 제16차 정기총회’가 대표회장 직을 맡게 될 문수석 목사가 시무하는 창원벧엘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지역 교계의 어른들과 경남 18개 시/군 기독교연합회(2천5백여 교회, 3십여만 성도)의 백여 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모든 총회절차가 잘 진행되고 대표회장을 비롯하여 새로운 임원진들이 구성이 되었다.개인적인 능력과 교회와 교단적 형편으로 본다면 벅찬 자리요 직무임에도 지난 1년 동안 별다른 하자 없이 제15대 대표회장 직(2013년 12월~2014년 12월)을 감당해 나올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린다. 그 하나님의 은혜! 지난 1년을 회고해 보면서 몇 가지로 축약시켜 본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마산재건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성전건축(2012년 11월~2014년 5월)이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서도 교회는 기도와 물심양면으로 담임목사의 연합사역을 적극 뒷받침해 주었다. 그와 같은 은혜는 평소에 쌓아 나온 담임목사와 성도간의 신뢰, 개교회 중심이 아닌 보편적 교회론, 재건교단의 위상 회복을 위해 힘써 나옴에서 주어진 열매가 아닌가 생각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실무임원진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경남지역에선 가장 큰 기독교연합체이기에 임역원 규모만 할지라도 무려 팔십여 명에 가깝다. 그래서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 8명으로 구성된 실무임 원단 중심으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간다. 교파와 교단과 개인적 영성이 다름에도 섭섭했던 일이 전혀 기억에 없을 정도로 실무임원들은 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즐겁게 동역해 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교단의 형제교회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영남노회 산하의 교회들은 대부분 농촌교회들이고 미자립교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 행사 때마다 십시일반으로 기도와 물질로 동참해 나왔다. 그런 협력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는 실무임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고 감사했던지... 교단이 작아서인지 모르나 재건교회는 가족 같은 사귐을 누리고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지역 내 많은 교회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본 연합회의 무게와 사역의 규모로 본다면 큰 교단, 큰 교회의 지도자가 대표회장직을 맡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조건에 해당되지 못한 나에게 그 무거운 직무가 주어졌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무거운 직책에 대한 두려움, 어찌할꼬? 다른 하나는, 감사제목, 작은 교단, 작은 교회도?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협력해 줌으로 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지역 교계 지도자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어떤 사역이든 절대 필요로 하는 것은 선배들의 경륜과 지도와 도움이다. 마산에서 이십여 년 목회해 나오면서 확인되는 것 중의 하나는 교계 지도자들 간의 친밀함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부족이 많은 나는 특히 본 연합회의 대표회장 직을 거쳐 가신 10분의 명예회장, 그 분들의 한결같은 도움을 많이 받았다.여섯 번째, 하나님께서는 지역의 ‘기독방송+언론사+기업체’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의 사역에도 사방에 알림이 필요하고 물질적 후원이 필요하다. 교회들, 연합단체들이 해마다 경험하는 감사제목이겠으나 금번에도 그분들로부터 많은 편리와 지원과 도움을 받았다. 교회와 연합회에서도 저들의 선교사역과 성도의 기업들이 형통하도록 지속적인 기도와 관심을 보여야할 것이다. 피곤할 때 생기는 입가의 물집! 며칠 전에 나의 입가에 마치 훈장처럼 물집이 생겼다. 대표회장직이 나에겐 무거운 짐이었나 보다. 어제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별다른 하자가 없었기에 다시 한 번 연합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와 그 직책을 나름대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1-01
  • [서임중 칼럼]이름보다 삶이 중요하다
    전국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갔을 때 들은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3박 4일 일정의 강사가 광고되었는데 서임중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왔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임중 목사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아도 그 사람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삶인가를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의 소유자인가를 알 수 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작명소가 있어서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가히 몸부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도 작명소가 호황을 누린다고 한다. 이름 짓는데 수십, 수만 원까지 들여가면서 이름을 짓는 경향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성경에서도 이름을 짓는 일에는 아주 신중했다. 모든 성경의 위인들이 이름대로 살다가 이름대로 죽은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 생활환경, 기타에서 취한 것이 여러 가지로 보여진다.동·식물에서 이름들을 취하여 명명했는데 다말은 종려나무, 데라는 염소, 레아는 들소, 라헬은 양, 갈렙은 개, 드보라는 벌, 요나는 비둘기 등이다.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성질에 따라 지은 것도 있다. 에서는 털 많은 자, 십보라는 아름다움 등이다. 그리고 부모의 경건성, 감사 등에 의해 지어진 이름도 있는데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등이다. 사건과의 관련해서 지어진 것은 야곱이 그 막내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으로 바꾼 것은 흉조(凶兆)에서 길조의 이름으로 바꾸는 데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해산하여 낳은 아이를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이라고 한 것이 그 예다. 특별한 일로 이름이 바뀐 것도 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요셉이 사브넷바네아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된 일들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예언적, 상징적으로 명명된 경우도 있고, 하나님에 관계된 이름도 많으며, 가나안의 신 바알과 관계된 이름도 나타난다. 신약시대에는, 여러 나라의 국어가 사용되어 그리스명, 라틴명, 히브리명 등의 이름, 혹은 한 사람이 둘이나 세 가지 이름을 가진 경우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름을 잘 지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이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이름을 빛내는 것이 더욱 유명인(有名人)이 되는 것이다.예수라는 이름은 참으로 존귀한 이름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는 존귀한 이름들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삶이 이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유다’라는 이름은 ‘그를 찬미하자’, ‘그를 기억하자’라는 아주 좋은 의미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가장 실패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중요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약점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지도자의 지도력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지배자로서의 자기모순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며 그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소위 유명(有名)한 사람들의 이름이 다음 세대에까지 아름답게 우러러 존경받지 못하고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름이 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기의 이름이 되게 하여야 하지만 자기 스스로 유명인(有名人)에 도취해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삶이 이름 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의 삶이 이름 되게 하여야 한다. 목사와 장로답게 살아 목사, 장로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어야 한다.새해가 밝았다. 365일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높여졌으면 좋겠다. 이 땅의 온 교회가 그렇게 아름다움을 연주했으면 좋겠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15-01-01
  • [이상규 교수]오늘의 한국교회 어찌할꼬?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해있다. 한국교회 역사상 교회가 오늘처럼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은 일이 없었다. 초기 한국교회는 국민적 신뢰를 받았고, 민족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교회를 향하여 도움의 손길을 애절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1890년대 초 우리나라가 시련의 와중에 있을 때 <코리안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는 “이 가련한 조선인들이 두 손을 뻗쳐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썼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백성의 체면이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이 드러났을 때, 교회는 나라사랑의 노래를 지어 민족의 아픔을 평풍처럼 막고 일어섰다. 민족에 대한 충애(忠愛)로 교회는 신뢰를 받았고, <독립신문>은 기독교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종교로 인식할 정도였다. 삼일운동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한국사회의 선한 이웃이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는 전체인구의 1%에 불과했으나 독립만세운동의 준비 및 거사 단계에서 25-30%의 역할을 감당했다. 중국 공산당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천두슈(陣獨秀, 1879-1942)는 3.1운동에 참여한 한국기독교의 역할을 알게 된 후 종교를 미신이라고 보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우리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을 볼 때 기독교를 경시하던 사상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교회는 민족과 함께하는 고난 받는 교회였고, 따라서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이런 전통은 해방당시까지 계속되었다. 교회는 근대학교와 서구식 병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고, 육신의 아픔을 안고 고통당하던 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금주단연운동을 전개하고 여권 신장에 기여하였고, 민주의식을 고취하고, 미신을 타파했다. 참된 효행과 바른 가정생활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의 근간을 제공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계몽과 계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신앙의 자유는 주어졌으나 해방정국의 교회는 대립하였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친일적 기회주의자들을 해방 후에도 득세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드렸고, 교회는 이들을 잠재우지 못함으로써 신앙적 정기(正氣)를 바로 잡지 못했다.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에서는 한국기독교역사상 최초로 경찰이 투입되었다. 치안(治安)을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6.25가 발발했다. 당시 손양원을 비롯한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대립과 분열이 전쟁의 내적인 원인이라고 인식했다. 1950년대 교회분열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단들이 출현하고 창궐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국가주도형의 성장주의에 영향으로 교회는 수적 혹은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여 극심한 개교회주의에 빠졌다. 섬김과 봉사, 사랑과 배려, 절재와 검약, 겸손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혹은 거룩한 삶에 대한 이상은 권장되지 못했다. 현세적 풍요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천박한 기독교로 변질되었다. 무인가 미자격 신학교의 범람, 선교라는 이름의 상업주의, 사려깊지 못한 노상전도행위 또한 기독교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혹자는 무례한 기독교라고 혹평한다. 교회성장이 멈춘지 오래고 기독교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있고 교회구성원의 노령화는 심화되고 있다. 이런 판국이니 이단이 활개치고 있다. 신천지가 도래했다며 전국교회를 들쑤시고 있다. 한국교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기로의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의 비윤리적 행태이다. 도덕의식의 상실과 함께, 성직자의 성적 타락은 심각한 수준이다. 교회의 계도적 권고는 능멸당하고 있다. 한국교회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무자격 신학교의 난립, 무자격 그리고 훈련되지 못한 목회자의 양산은 한국교회 근원적인 문제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에게는 교회의 자정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한해는 가고 새해가 되었는데, 한국교회 어찌할꼬?
    • 오피니언
    • 정론
    2015-01-01
  • 기독병원에 원목은 인권 사각지대
    일신기독병원 원목 정인규 목사가 60대 초반 가장 어정쩡한 나이에 지난 12월30일 원목직에서 은퇴했다. 병원 원목 6년 3개월 만에 퇴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처구니없는 병원 정관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상임이사 임현모 장로는 “이사장 인명진 목사의 지론에 의해 병원정관 규정을 3년에 국한하고 한 번 더 연임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인 목사의 지론은 “병원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병원 운영 정신과 주인이 노동자가 아닌, 예수가 되어야 하고 새로운 정기를 마련해야 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병원내에서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평생 활동한 인 목사의 주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도 존재한다. 한편, 이 병원에 부임하여 집행부를 위해 헌신하고 큰 문제없이 원목활동을 해 온 정 목사는 “들어온 이후 갑자기 원목규정을 만들어 퇴사 통보를 준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고 그냥 순순히 병원 발전을 위해 수용할 수밖에 없다”며 평소 온순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퇴임에 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산노회장 이종윤 목사는 “인권과 민주화의 최선봉자로 자처하고 파도타기를 잘하시는 인명진 목사가 그런 인권사각지대를 만들어 영적 지도자(원목)를 노동자와 같이 천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직언을 날렸다. 부산노회를 비롯한 부산동노회 그리고 부산남노회가 일신기독병원 정관변경을 놓고 노회와 하등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정관 졸속에 이사선임을 하는데 대해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해놓고 추이를 보는 상황에 놓여 있다. 어느 병원의 한 원목은 “인 목사 자신이 교단지에 기고한 글에서 ‘조기은퇴유감’이라고 쓴 내용을 보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병원 원목을 6년 3개월 만에 퇴거시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다”고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5-01-01
  • 박옥수 영장 기각에 A의원 배후 거론
    검찰이 청구한 기쁜소식선교회와 IYF(국제청소년연합) 설립자 박옥수 목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지난 12월 2일 전주지방법원 영장담당 홍승구 부장판사는 “피의자(박옥수)가 주식 거래로 실제로 금전적 이득을 얻었는지 여부와 문제가 된 주식회사의 출자금의 출처, 주식의 실질적인 소유자 등의 부분에서 다툼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런 가운데 구원파피해자모임측은 이번 구속영장 기각에 대해 배후에 A국회의원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구원파피해자모임 대표인 전해동 집사는 A 의원은 박옥수 목사의 친 조카와 친분이 돈독하고 자신의 88년 생 친아들을 IYF의 봉사에 보내겠다고 하는 등 구원파 신도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박옥수와 함께 해외도 다니며 활동했다”고 강조했다. 전해동 대표는 “박옥수 구원파의 교세 확장에 얼굴 마담 역할을 한다는 비난을 사면서까지 박옥수 목사와 10여년 유착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를 K 의원은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덧 붙였다. 한편, A 의원은 본지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박옥수 씨와 IYF측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해명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5-01-01
  • 종교계 거짓 기부금 영수증 발급
    국세청이 불성실기부금수령단체 102곳을 발표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불성실기부금수령단체 102곳 중 불교사찰과 암자나 단체가 88곳으로 나타나 압도적인 수를 차지했다. 기독교계도 교회와 선교회 등 4곳이, 대순진리회도 1곳이 적발당했다. 기독교계 4곳은 거짓영수증을 발급한 3곳인 성남 C교회(149건, 6억원), 군산 D교회(14건, 5천여만원), 일산 E선교회(21건, 1억여원)과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의무위반으로 증여세 1억여원이 추징된 부평 F교회 1곳인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천주교는 아무런 위반 단체가 없어 불교, 기독교와 대조를 보였다. 국민 신뢰도 1위 답다라는 여론이 인터넷 네티즌들을 통해 퍼지고 있어, 교계의 신뢰도와 더 큰 격차를 벌릴 듯하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5-01-01
  • 조용히 물러난 정종성 원로 장로 은퇴 스토리
    정종성 장로는 정대성 장로의 친 아우로 형제간의 우애는 남이 부러워 할 만큼 남다르다. 동생 정종성 장로는 통합 교단 총회 첫 장로 부총회장을 역임하고 전국장로회연합회가 총회에 건의해서 장로부총회장 제도를 만든 후 첫 번째 장로부총회장이다. 정 장로 덕에 장로들의 표상과 위상이 높아졌다. 동생은 지난 12월 둘째주일이었던 14일, 오후예배시간에 자신이 개척하다시피 한 가나안교회의 설립 32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후 원로 장로 은퇴식으로 조용히 마무리했다. 그것도 그 자리에서 교회를 설립할 당시와 지금까지의 신앙 간증을 전하면서 교인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호적상으로는 1945생이나 본래 나이는 1944년 2월 생으로 만 70세에 은퇴한 셈이다. 자신은 금년 2014년부터 일체의 노회 총대도 나가지 않고 조용한 은퇴를 하기로 마음먹고 실현했다.의좋은 형제 둘은 동생은 총회 장로부총회장에, 형은 전국장로회연합회와 전국남선교회연합회에 회장을 역임한 교회적으로 성공한 형제들이다. 백제의 후예 호남 출생으로 영남지역인 부산에 근 40년을 살면서 거의 부산사람이 되다시피 한 두 형제에게는 지역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순수한 부산사나이들이다.동생은 부산장신대학교를 교육부로부터 정규 대학인가를 받고 첫 법적 이사장이 되어 영예로운 선지동산을 세운 공로는 과히 기념비적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성만 장로와 함께 명예 이사장이다. 이 학교를 김해에 땅을 물색하여 지금의 학교에서 토지를 매입할 당시 별의별 구설수에 올랐다. 그래서 학교 동문들이 땅 매입에 의혹을 제기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북부경찰서에 M목사를 걸어 명예훼손죄로 고발했다. 결과는 북부서의 경목이라는 명분도 작용해서 ‘명예훼손에 해당되지만은 동문회 회장을 역임한 연고로 학교를 사랑하는 뜻에서 한 소행으로 처벌을 할 수 없다’고 혐의 없음으로 결정났다. 그 당시 M목사에게 허위로 사실과 다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이 학교의 몇몇 교수요, 이를 받아 유인물과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이 학교 개방이사를 추천한 평의회 인사로 밝혀졌다. 단지 공소권 없는 이유로 무고죄가 성립되지 않는 까닭에 그냥 넘어갔지만 이 일로 인해 M목사는 그들과 정반대로 다른 사람을 명예 훼손하도록 거짓 정보를 준 그들과 결별하는 한편, 그들 편에 선 인사들은 척결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정·반원리를 실감하고 있다.한때 정종성 장로는 학교를 사랑하는 뜻에서 무심코 던진 말이 최무열 총장은 액면그대로 받아 부산동노회 개회시에 그대로 설명하는 바람에 임원선거개입을 했다는 누명을 신문에 광고하면서 정종성 장로 이름을 걸고 들어가는 엄청난 데미지를 입힌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정종성 장로는 교단적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렸고 부산동노회 장로 노회장으로, CBS부산방송 운영이사장으로 형, 동생이 역임하였다. 또한 부산장신대 이사장으로 세상안의 영광을 모두 누렸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하나도 자랑스런일이 못되니 은퇴는 조용히 물려나기로 마음먹고 이번 장로은퇴는 외부일체 광고 없이 교회 안에서만 공로패 하나 받고 물러났다. “이렇게 물러나니 마음이 가볍고 이제 하나님 앞에 가서 상급 받는 것이지 세상 모든 영예는 전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다.형 정대성 장로와 함께 해외선교를 위해 남은 재산을 선교 법인으로 만들고 해외 개척하는데 힘쓰는데 사용하면서 남은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겸손한 그 아름다움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믿고 무한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가 있겠는가? 그 겸손함이 천사들의 나팔소리로 찬양받을 수 있지 않을까?신이건 장로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15-01-01
  • [시내산]순환하는 교회
    ▲송시섭 교수(동아대 법대) 자본주의는 역사상 오랫동안 존재하였던 ‘교환’이라는 개념을 ‘화폐’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교환’으로 대체하였다.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사적소유와 그에 기한 배타적인 향유,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민법상의 ‘소유권’, 그에 기한 헌법상의 ‘기본권’등을 그 바탕으로 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한편, 성경, 특히 구약성경은 오랜 기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위계질서’에 기초한 선형적인 구조를 이루면서 선택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에 반하는 인간의 우상숭배, 그에 따른 심판과 회개 그리고 돌이킴 등을 주제로 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이다. 위 둘을 결합한 이른바 ‘위계적 교환’은 베버의 말대로 ‘프로테스탄트’라는 독특한 공동체를 통하여 결합되었고,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되는 서유럽의 국가들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의 성장을 보면서 ‘소명의식’을 통한 ‘부의 축적’이 근대자본주의의 맹아였음을 베버는 간파하였다. 이는 개신교의 ‘합리성’, ‘청빈주의’가 자본주의와 친숙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연구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개신교는 자본주의와 친숙한 종교로서 인식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연결된 자유주의, 나아가 최근 전 세계를 휩쓰는 세계화, 그에 이은 신자유주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화된 개신교와 친숙할지는 몰라도, 성경적인 가치와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괴리감의 원천은, 자본주의가 돈을 매개로 한 ‘교환’이라는 가치를 지향하는데 반하여, 성경은 공유와 협력을 통한 ‘순환’을 그 기본사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성경은 ‘교환’이 대세인 사회보다는 ‘순환’이 주된 흐름인 사회,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사회의 변천과정을 ‘위계질서적 사회’나 ‘동심원적 사회’에서 ‘리좀적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은 원래 그 아이디어를 ‘스스로 뿌리이자 줄기를 이루는 식물의 덩이줄기모습’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는 중심과 주변이 구별 없는 무한증식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 리좀적 사회란, 초점을 ‘소수자’에 맞춘 것으로, 이들은 ‘평균적인 정상’을 기준으로 삼는 다수자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모색을 통해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수자들이 근대적인 ‘다수자’ 중심의 위계적 이분법을 깨고 수많은 다양한 중심들을 생성하며 접속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리좀적 체계를 형성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현대교회에까지 확대적용해보면, 미래교회는 종전 성속을 엄격히 구분하고, 강단과 청중을 교환적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설교와 선포, 즉 위계적 이분법의 강단에서 벗어나서 종전 설교의 청중이었고, 때로는 교회내 다수의 결정에서 다소 소외되었던 소수자들(여성, 청소년, 새신자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이를 경청하는 나눔의 교회, 즉 리좀적 교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교회내에서만 주고 받는 교환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 전체인 몸을 도는 순환을, 수목형(tree)구조가 아니라 리좀형 구조를, 다수자가 아니라 소수자를 지향하는 방향으로의 시선의 전환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초대교회가 꿈꾸던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재해석하여 우릴 낮은 곳으로, 소수자의 세계로, 쌍방의 교환을 넘어 온몸의 순환으로 초대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교회 내 온 지체가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상합하며, 교회 안팎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미래형 공유교회가 더 많이 등장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 오피니언
    2015-01-0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