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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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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생각나는 것이 ‘따뜻함’이다. 이 따뜻함은 남녀노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이 따뜻함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 노인, 한부모가정, 외국인, 노숙인 등등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또 하나, 미혼인 사람들도 약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고,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이들은 중심에서부터 밀려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애인 당사자이면서 미혼인 나도 이들과 같다.
이들에게는 어떤 따뜻함이 필요할까?
‘따뜻함’이라고 했을 때에 대부분 ‘물질의 따뜻함’을 떠올렸을 것이다. 비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돈)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물질은 필요하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12월이 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고 그것을 사랑의 온도로 표현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따뜻하게 만든다.
교회는 어떤가? 교회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12월 25일 성탄예배를 드릴 때에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모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교회 주변 또는 교회 내에서 찾아서 지원하거나, 단체의 기부를 하는 형식으로 돕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형식적이든 비형식적이든,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시선의 따뜻함’에 대해서는 어떤가? ‘따뜻함’이라고 했을 때에 단 한 번이라도 ‘시선의 따뜻함’을 떠올려 본 기억이 있는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선의 따뜻함이 중요하다. 아니 필요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따뜻한 시선을 기다리고 있고 필요로 하고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약자들이나 미혼인들에게는 사회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교회 중심에서도 벗어나 있기에 더더욱 필요하다.
이들이 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을 전통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서의 시선, 전통적으로 관습되어 내려온 시선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하나님의 시선, 사회적 약자들과 동행하셨던 예수님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들을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그들(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대접 받고 유명한 이들만 따뜻하게 품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고 연약한 자일수록 교회는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한 우리의, 그리고 교회의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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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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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교회, 전광훈 측에 성명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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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교회(손현보 목사)가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와 관련해 예배를 방해한 전광훈 측에 성명을 발표했다. 세계로교회는 연합예배 다음날인 28일 성명서를 통해 “집회 및 시위법 상 같은 장소에 두 단체 이상이 집회를 신청할 경우, 먼저 사용하던 단체에 우선권을 주게 돼 있다. 그래서 광화문 지역 중간에 위치한 동화면세점 앞은 이미 전광훈 측이 사용하고 있어 여러 차례 찾아가고 연락해 전광훈 측은 주일 오후에는 그 장소를 사용하지 않는다며,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집회를 열고 이후 우리 연합예배가 가능하도록 약속했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약속과 달리 전광훈 측은 한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진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 도중, 예배가 끝날 때까지 한 시간 넘게 본인의 정치 집회 영상으로 화면을 변경하고, 음향을 110데시벨 이상으로 더 높여, 더 멀리까지 들리도록 큰 소음으로 예배를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세계로교회 당회는 ‘오늘(11월 28일) 이후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전광훈 측 정치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은 정관에 따라 당회 결의로 출교 및 제명에 조치한다’, ‘이 단체에 정치 자금이나 헌금 명목으로 기부하는 사람 역시 동일하게 출교 및 제명 조치한다’, ‘고신총회 이단대책위원회에 전광훈에 대한 이단성 조사를 재개할 것을 요구하며, 그동안 중단되었던 이단성 조사가 신속히 진행되도록 촉구한다’는 결의문까지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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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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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떠날지 모를 내 삶, 떠날 때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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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젊었을 때는 미래를 모르고 하루하루 그날만을 위해 살아 왔다. 그야말로 형편과 처지에 따라 그날 그날 만을 위해 살아 온 셈이다. 인생에 목표가 있고 꿈과 비전을 위해 달려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냥 되는대로 방향과 비전도 없이 환경에 주어진대로 살아 온 지난 날이 몹시도 후회스럽다. 30대 결혼하고 40대 생활의 기반을 잡아야 하는데 될대로 되어라 하고 하루 살이 인생으로 살아 온 것이 한번 뿐인 인생 실패작으로 세월과 나이만 먹어 허송세월로 지나 온 것이 너무 가소롭고 허망하기 그지없다. 왜 내가 그 때에 마음먹고 정신차리고 목표를 향하여 열심을 다하지 못했을까 생각하니 너무 창피하고 후회스럽다.
결혼 하기 전 20대에 폐결핵으로 몸이 무너져 내린 것이 주요 원인으로 모든 것이 허망하고 이렇게 되고 나서부터는 죽는 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무슨 희망과 꿈이 있었겠는가. 그저 세월아 네월아 그때 그 순간 세월만 흐르고 인생 낙오자처럼 살았으니 무슨 꿈이 있고 앞날에 희망을 품고 살았겠는가? 첫 단추가 건강을 잃고 살아가니까 매사에 용기와비전 없이 살아지고 만 것이었다. 겨우 닥치는대로 뱀탕이며 몸에 좋은 것은 다 먹고 나니 그 몹쓸 결핵도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는 결혼을 30대 초반에 하고 생활에 매달려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바빴다. 직장도 없이 월급 한번 받아 온 적이 없는 하루 살이 인생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처가집 생활 아니었다면 벌써 거지나 방랑자로 인생 폐품으로 남아서 인생 종지부로 갔을 것이었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못하고 살았으니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재미교포였던 김영봉 목사가 쓴 책에서 ‘죽음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가기 위한 통로’라고 했다. 인생의 시작과 끝이 모두가 주님께 속한 질서로 받아들여지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여든이 되고 보니 불과 10년 전후로 밖에 살지는 못할 것인데 다가 올 죽음을 어떻게 잘 준비해야 될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날마다 참되게 살기는 살아야 되는데, 말과 같이 잘 되면 오죽 좋으련만 그렇게 되기 어렵지않을까 싶은 기우다. 항공기 사고가 나면 골든타임 90초 룰이 있다. 사고 발생 직후 90초 안에 비행기로부터 벗어나야 생존율이 높아진다. 순식간에 비행기 안은 지옥을 방불케 된다. 평상시 훈련 받은대로 메뉴얼 대로 행동하여 비상구 위치 탈출 요령을 설명할 사이 없이 비행기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우리 인간이 살아 가는데 우선 순위가 무얼까? 생각하니 첫째가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고 그 다음이 잠언 4:1~9에서 지혜이다고 했다. 옛 어른들은 지식은 부족해도 지혜는 배운 공부와 상관이 없다고 했다.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가 있을까? 바로 어릴 때부터 부모 공경으로부터 얻는다. 부모는 우리에게 돈이 재산이 아니라 지혜 곧 효를 통해 생명을 물려 주는 것이다. 인생 선배로서의 가치가 가장 지혜로운 가치가 아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쉰 살이 넘으면 철학자가 된다고 한다. 어느 시골 농부가 어머니를 지개에 얹고 깊은 산골짜기를 가고 있는데 어머니는 자식이 집에 못 돌아갈까봐 가는 길마다 나뭇잎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아들은 지개를 내려 놓고는 “어머니 잘못했습니다”라고 하고 후회한 이후로 고려장이 없었졌다고 한다.
잠언 4:1~10에 있는 것 같이 “너는 내 말을 잘 들어라 내 말을 잊어 버리지 말라 소중히 여기라. 그리고 사랑하라 지혜를 사랑하라”고 했다. 영어에 philosophy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필로는 사랑한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말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말이고 지혜를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고. 곧 부모의 교훈을 소중히 여겨 지혜가 너를 지키고 너를 높이고 너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절대로 인생 낙오자가 되지도 않고 자살하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문제아가 되는 법이 없다. 바로 효자가 효자를 낳는 이치이다. 하나님은 지혜와 장수와 능력을 약속해 주고 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이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지혜가 해답이다’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옛말에 ‘보약을 잡수려 하지 말고 효도하십시오’라고 했다.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기쁘게 하면 바로 행복해지고 지혜의 길이 열린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자식들아 내 말이 아니고 성경에서 당부하는 하나님의 첫째 약속이라는 것을 잊지를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너무도 감사했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하늘 나라로 떠나고 싶다. 우리 모두가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순종하면 이런 좋은 선물을 안겨 준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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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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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시종여일하고 신시경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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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서 연합사역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말로 감당할 수 없는 복이며 은혜다. 괜찮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기준은 처음 함께 했을 때의 마음이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그 처음의 마음은 당연히 공동체의 가치와 목적에 합하고, 순리적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우리 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깊게 살펴보면 시작하는 일의 내용과 자세가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악하고 나쁜 일도 시작만 하면 이미 반은 진행되었기에, 시작하는 일이 선하고 아름다워야 함은 명약관화하다. 또 시작이 반이라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시작과 함께 이미 반을 이루었기에, 그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위해서도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신시경종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당나라 충신 위징이 당 태종에게 올린 글에 나온다. 그 의미는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나태하고 게을러질까하는 두려움이 찾아올 때는 신중하게 일을 시작하고 일의 끝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라고 진언하였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한명회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사위였던 성종에게 유언처럼 당부한 말이 바로 신시경종이다. 군주가 조금만 마음을 게을리 하면 간신배들의 아첨에 넘어가기 때문에 항상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간언했다. 대국을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신시경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충신이 자신의 주군에게 목숨과 마음을 담은 글을 올린 것이다.
한명회가 남긴 말 중에 신시경종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말은 “시근종태는 인지상정이지만 종신여시 하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지만 끝날 때에는 태만해 진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할지라도 군자는 처음과 끝이 동일하게 근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신여시와 비슷한 말은 시종여일이다. 시작과 마침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한명회가 노년에 유배를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후회와 회한 그리고 성종이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언한 것이다.
처음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미를 지닌 초지일관도 있다. 이것 또한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일이관지’ 즉 처음의 뜻을 끝까지 꿰뚫는다와 모든 것은 하나로 꿴다와 같은데, 처음의 마음이 마침의 시간까지 뜻을 잃지 아니하고,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시종여일, 신시경종, 종신여시, 초지일관 등은 거의 다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곧 성공한 삶이며 승리한 인생이다. 역사 이래로 충신들은 한결같이 자신들도, 그리고 자신의 주군도 그렇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초심을 지켜 성공한 사람은 더 강력하게, 초심을 잃어버려 실패한 사람은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솔하고 담대하게 진언한다. 나도 시종여일 신시경종 하는 사람들이 참 좋다. 참 괜찮은 사람들이다. 내 곁에 이들이 있기를,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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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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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부열 선교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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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내한하여 강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감부열 선교사는 1940년 6월 세 번째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다시 내한하지 못했다. 이때 감부열은 뉴저지의 플레인필드제일장로교회와 엘리자벳제3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게 되자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며 미국에서 목회를 정리하고 1947년 4월 4일 다시 내한했다. 해방된 한국교회의 재건이 시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속히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한국어도 능통했고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는 다시 북한의 강계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대구지부로 배속되었다.
대구 정착과 교회 재건으로 분주하게 지냈는데 1950년 6월에는 전쟁이 발발했다. 대구로 피난해 온 피난민들을 돕고 교인들을 보살폈다. 그의 대구 주택은 피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피난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 위험하다고 본 그는 안의와 선교사와 같이 안동으로 가서 안동선교부의 기물과 주요 문서를 대구로 옮겼다. 안동이 점령당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에서 수복감사예배를 드릴 때 그는 미군 군목 자격으로 킨슬러와 힐, 아담스, 보켈, 마펫 등과 같이 평양으로 가서 예배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로 돌아왔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이 후퇴하는 긴박한 현실에서도 한국에서의 군목제도 도입을 위해 노력했다. 미국 군목병과의 교범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군목제도를 도입하는 일에도 기여하였다고 한다.
전쟁 중에서도 한국교회는 신학교 문제로 혼란하였고, 총회가 두 학교, 곧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제3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1951년 9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설립할 때 대구의 감부열을 초대 교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인돈(William Linton), 권세열(Francis Kinsler), 조하파(Joseph Hopper) 선교사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명신홍 한경직 등은 초대 교수로 추대되었다. 이 학교가 오늘 총신대학교로 발전했다.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일할 때 그 가까이에서 일한 한국인이 서정환(徐廷煥, 1906-1952) 전도사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고산진(高山鎭) 출신인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고,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구로 와 그와 함께 일했다.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 부부를 부모처럼 여기고 함께 일하기도 했다.
감부열 선교사는 1952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 주 젱킨스타운의 비버대학(Beaver college)과 일리노이주 휘튼의 휘튼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얻고 1953년 대구로 돌아왔다. 1954년 4월에는 대구에 계명기독대학이 설립되는데, 초대학장으로 추대되었다. 처음 120명으로 출발했으나 1958년 3월에는 첫 졸업생 49명을 배출했다. 도서를 확보하고 도서관을 건축하고 또 음악당을 건축하는 등 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1958년 7월에는 학장직을 안두화 선교사에게 넘겨주고 8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0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한국선교 경험을 담은 The Christ of the Korean Heart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1958년 김윤국에 의해 ‘한인 중심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었다. 길지 않는 145쪽에 지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전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5-6명의 선교사 외에도 고난과 시련 가운데 믿음을 지켰던 한국인 17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김익두, 서정환, 손양원, 안의숙, 이대영, 이승만, 이영식, 임한성, 주기철, 한경직, 한병혁 등이다. 그가 남긴 또 한 가지 저서는 강계에서 함께 사역한 바 있는 노혜리, 곧 로즈(H. A. Rhhodes)와 1935년 이후의 북장로교의 한국선교사를 정리한 500여 쪽에 달하는 역사책(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35-1959)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는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그가 북한에 있을 때 사냥도 즐겼는데 동료들과 곰사냥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어려움 중에서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고, 곰으로부터 큰 화를 당한 일도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나는 살겠으나 곰은 살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위기를 벗어난 일도 있다고 한다. 그가 대구에서 일할 때 정일영 목사가 그를 힘들게 하고 괴
롭혔다고 한다. 정일영(鄭一永, 1901-?) 목사는 평양신학교 31회 졸업생(1936)으로 대구 대봉동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부열 선교사는 참고 지내다가 한 말이, “정 목사, 예수 사면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1972년 1월에는 부인 안혜리(헬렌) 여사가 사망했다. 미국펜실베니아주 빌라 신위드의 웨스트민스터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에 감부열은 루시 링컨(Lucy E. Lincoln, 1905-?) 여사와 재혼했다. 루시 여사는 남편과 사별하고 10년째 혼자 지내던 여성이었다. 5년을 같이 살고 1977년 1월 감부열 선교사는 86세로 사망하여 첫 부인 헬렌 옆에 안장되었다. 감부열은 헬렌과 사이에 1남(Archibold) 3녀(Helen, Frances, Ann)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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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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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종 교수] 그리스도인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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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생어무위(福生於無爲) 이환생어다욕(而患生於多慾)’이라는 말이 있다. ‘전한(前漢)’시대(BC 200-8)의 학자 ‘한영(韓嬰)’의 저술인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표현으로 ‘복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고, 염려는 욕심이 많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정말 인간이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것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대부분 행복하기를 갈망한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유엔산하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에서는 매년 140여 국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기초로 행복지수를 산출하여 순위를 발표한다. 2024년에는 10점 만점에 7.741점을 받은 핀란드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 발표되었다. 우리나라는 6.058점으로 52위에 랭크되었다. 2021년에는 5.845점으로 62위, 2022년에는 5.935점으로 59위, 2023년에는 57위였다. 전체적으로 행복 지수가 나아지고 있지만, OECD 국가들 가운데서는 거의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행복’이란 매우 주관적인 감정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대 심리학에서 행복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의미한다. 이 ‘쾌락’은 개인의 만족감이나 긍정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만족스러우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을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라고 질문해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얻었을 때’라고 답할 가능성이 높다. 행복학을 연구하는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내가 즐거움을 느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의 기준이 개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진 대표적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이성을 통해 인간의 탁월함을 나타냄으로써 인간다움을 추구하고 최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면서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 행복을 올바른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을 성경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행복에 대한 언급보다 평화에 대한 가르침이 압도적이다. 성경은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욕심에서 벗어나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개인의 행복보다는 함께 누리는 평화에 주목한다.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신구약 성경은 ‘평화’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나아가 성경은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peacemaker)’이 되라고 가르친다. 우리 시대의 행복은 개인적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관계적이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를 살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함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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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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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그림자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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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에 교회에서 연로하신 담임 전도사님과 장로님과 예배당 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장로님이 말없이 내 몸을 옆으로 밀어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내고 전도사님이 사택으로 들어가신 후 장로님이 제 손을 잡고 조용히 건네주시는 말씀을 하셨다. “서 선생,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돼. 따라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내가 전도사님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것을 보신 장로님이 일깨워 주신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른 공경에 대한 마음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그림자를 따르는 것은 좋지만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되는 교훈은 목회 사역에서는 물론 내 실존의 의미와 삶에도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오래전 프랑스 작가 ‘아델베르트 폰 사미소’(Chamisso Adelbert von)의 ‘피터 술래밀의 놀라운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최문규 옮김;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었다. 슐레밀은 가난한 청년으로서 하루는 어두컴컴한 부둣가를 거닐다가 이상한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무슨 물건이든지 다 끄집어낼 수 있는 신비한 주머니를 슐레밀에게 내밀면서 슐레밀의 그림자와 바꾸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가난하게 생활하던 슐레밀은 별생각도 없이 자신의 그림자를 그 신비한 주머니와 바꾸게 된다. 순간 그 사나이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그 주머니를 건네주고 슐레밀의 그림자를 아주 익숙한 솜씨로 돌돌 말아 자루에 넣고 사라져 버렸다. 그 사나이는 악마였다.
그림자를 주머니와 바꾼 슐레밀은 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의 의혹을 받게 되고 놀림을 당하고 곤욕을 치르게 되면서 점점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자기 방에 들어앉아 혼자가 된다. 밤에는 사십 자루의 초를 방 전체에 켜놓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 불안하고 초조함으로 밤을 지새우게 된다. 사랑하던 여인과도 그림자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고 실연의 쓰라림을 경험해야 했다. 주머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낼지라도 이미 그 주머니는 삶의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었다.
슐레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으려 하지만 악마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이번에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슐레밀의 영혼을 요구한다.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와 바꾼 신비한 주머니를 던져버리고 광산으로 들어가 고된 일을 하면서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가 결국 말년에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친구 사밋소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죽는다.
“친구, 사람들 틈에서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사랑해야 하네.”
그림자란 직접 접촉할 수 없지만, 인간 본연의 소유물임을 교훈한다. 있을 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을 하찮게 여기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은 국가, 가족일 수 있고 신앙이며 양심이며 명분일 수도 있다. 비록 그림자는 팔았지만 자신의 근본인 영혼은 팔지않고 자유로운 삶을 택했던 주인공을 통해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슐레밀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당장 눈앞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그림자를 팔아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어쩌면 에서에게 있어서 장자라는 명분쯤은 지금 당장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고 그래서 눈앞의 팥죽 한 그릇이 더욱 소중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렸다.
눈앞의 팥죽보다는 명분과 가치를 존중했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겨 팥죽 한 그릇을 기꺼이 에서에게 건네 줄 수 있었으며 그것은 야곱의 일생을 결정하는 축복의 계기가 되었다.
삼손이 ‘나실인’의 명분을 들릴라의 무릎보다 간과하였고, 발람이 모압왕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삯’을 예언자의 명분보다 귀히 여겼고, 고라의 권력욕이 역할의 명분을 패역으로 몰락시켰고, 가룟 유다는 지고한 예수 제자의 명분을 은 30과 바꾸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준엄하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얼마나 소름 돋는 말씀인가. 그림자의 소중한 이치를 모르는 열매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 같은 삶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교훈이다.
여의도 1번지의 선량(選良)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림자의 교훈을 생각한다. 국회의원이라는 존귀한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과 당리적인 이해타산에 팔아버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지고한 정치철학을 짓밟고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국민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오늘의 모습이다.
어디 그뿐이랴. 은퇴 이후 한주도 쉼 없이 전국 방방곡곡 세계 여러 나라 초청을 받고 말씀 사역을 하는 동안 보이고 들리고 경험하는 일상에서 유다서에 기록된 경고메시지를 간과하고 명분보다는 실리(實利)에 낭패스러운 삶을 연주하는 지도자들의 행태는 주님의 아픔이기 전에 공동체의 슬픔이 되기도 한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사명이며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다. 그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에 더럽히고 그 명분을 이해타산에 팔아버리면서 주님의 교회를 카오스 현상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이 유다서에 경고한 주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나의 열매가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비록 그림자일지라도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장로님의 가르침이 새삼 생각난다. 아프고 벅찬 삶의 여정에서도 ‘목사’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가히 몸부림하면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그를 실증하는 삶을 엮어내는 삶을 살아가면서 오늘도 그림자의 교훈을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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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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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그들이 모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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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께서 위기에 몰리시면 그 엄청난 능력으로 적들을 이기고 나오실 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모진 수욕과 고통을 참으셨고, 가야바 법정에서 있었던 산헤드린공회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정죄를 받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그 과정을 본 가룟 유다는 절망했습니다. 예상을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면서 자신이 무죄한 피를 범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유다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그 은을 성도에 던져 넣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인 반응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던진 은 삼십을 핏값이라 부정하게 생각하여 성전고에 두는 게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에서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성전이 거룩한 것은 성전 건물이나, 드나드는 사람이나,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이 거룩하거나, 드려지는 예물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전이 성전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깨끗한 예물만 성전고에 두기 때문에, 다시 말해 거룩한 자신들이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기는커녕 그들이야말로 가장 악한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찾아온 유다를 외면하면서 책임지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물론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큰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판을 깐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던 차에 유다가 어리석게 걸려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린 자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유다의 은 삼십을 핏값이라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보다 더 악한 자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 착각은 결국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도 나그네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들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들은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자신들은 죄인도, 나그네도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나그네이지만, 자신들은 예루살렘의 주인으로서, 언제까지라도 부귀영화를 누릴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무서운 착각입니다. 그들 역시 나그네입니다.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떠날 자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에 머무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당시 유대 사회, 특히 예루살렘에서 기득권층이요,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오늘로 비유한다면 기성 교회의 지도자들에 해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칫 우리도 이들처럼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죄인이지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나그네지만, 자신은 나그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는 추하지만, 자신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역시 나그네입니다. 우리 역시 무수한 상처를 내고, 마음의 피를 흘리게 하면서 삽니다. 예수님 앞에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찾을 때 시작됩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나그네요, 피 흘리는 자임을 알 때, 예수님의 복음이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한국교회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처럼 굳어졌습니다. 상대를 향한 유다라고 비방합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볼 때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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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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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 봉준호와 비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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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스웨덴 아카데미는 한국의 한강 작가를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비할 바 없는 영예겠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성으로서도 최초요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 기록을 갈아치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모습에서 무척 닮아 있습니다.
첫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진리를 재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자로서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명장 마틴 스콜세지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에게서 배웠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대단한 환호가 쏟아졌고 평단의 찬사가 이어졌지만 정작 스콜세지 감독은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다지요? 대신 로랑 티라르가 쓴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에는 “영화의 관점이 명확하고 개인적일수록 그 영화의 예술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는 스콜세지의 말이 실렸다고는 합니다(조준형, 연합뉴스, 2020. 2. 11).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은 한국의 작은 일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한국 고유의 풍자와 해학을 가미했는데도 세계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한강이 다루는 글들도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많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다수인데도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개인적이지만 예술성이 높을 수 있고, 한국적이지만 보편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던지는 시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막과 번역의 한계를 유월(踰越)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역시 봉준호가 남긴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1인치 자막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미국인)은 훨씬 더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2020. 1. 5,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국 영화를 선호하면서 외국 영화를 보려면 감수해야 하는 자막을 그는 “1인치 장벽”이라 불렀는데, 봉 감독이 이룩한 작지만 위대한 성취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장벽의 일부를 허무는 데 일조했다는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번역 타령을 해댔습니까? 유독 탁월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민족의 문학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 하나를 받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을 번역 문제로 치부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 이상 번역도 또 하나의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하게 증명되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내용이 얼마나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 봉준호와 한강은 바로 이러한 면이 문학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일종의 도전(challenge)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면서 각자의 반응(response)을 촉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셋째, 가부장제(paternalism)의 혁신적 파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뉴욕타임스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지 하루만에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의 최고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기념됐지만, 한강 작가와 다른 여성 작가들이 대표하는 것은 여전히 뿌리 깊게 가부장적이고 종종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는 논평을 내놓았습니다. 여기서는 남성중심주의나 권위주의를 가리키지만,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더 확장 적용이 가능합니다. 한강과 봉준호는 이전에 소위 ‘블랙리스트’에 나란히 이름이 올랐습니다. 2016년 당시 특검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 백서”를 통해 그런 사실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을 마치 부모처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가부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단지 픽션일 뿐인데, 여전히 소재를 문제 삼고 방향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 일상에도 그런 잔재들이 많습니다. ‘한 발자국 가까이’나 ‘휴지는 휴지통에’라는 문구들을 생각해 보세요. 전 국민이 모두 이런 지시를 하나하나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노벨상위원회가 어째서 고은이나 황석영이 아니라 한강에게 상을 안겨주었는지를 우리 모두 다 같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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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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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플랜B (창세기 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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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울 때는 A안이 있고, 그대로 안 될 경우를 대비한 대응책이나 또 다른 계획을 플랜B라고 한다. 잠언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드라마틱하다. 하나님의 스카웃은 길거리 캐스팅이 많다. 주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B급 인생도 가망이 있다.
결핍, 부족, 연약한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B급 인생이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낙망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고아, 과부, 소자, 약한 자, 병든 자, 세리, 창기를 멸시치 않으신다. 성경에서 장자를 중요시 하지만 의외로 차자가 쓰임 받은 경우가 많다. 다윗은 여덟째요, 모세는 셋째요, 아벨은 둘째요, 야곱도 둘째다.
하나님의 뜻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다. 장자인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고 털이 많은 상남자 스타일이다. 거기에 비해 야곱은 조용한 자요, 거의 계집아이 같은 분위기였다. 에서는 따놓은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다가 뺏겼지만 야곱은 일생을 통하여 장자권을 쟁취해 나아갔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웠고(뼛속까지 장자), 형님 발을 붙잡고서라도 지기 싫어했고(이기는 습관),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장자권을 샀고, 얍복 강에서 씨름을 할 때는 포기하지 않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했다(이긴 자). 그래서 이름도 바뀌고, 사기꾼이 사랑꾼이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오지랖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복잡한 집안 구조인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가 되어 야곱의 축복을 이루었다.
대중가요에서 싸이는 B급 감성이라고 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강남스타일’을 불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규격화된 딱딱한 모습이 아니라 먼저 망가져서 무겁지 않고 가볍고 재밌는 모습이 편하고 좋다. 세례 요한의 주제는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하는 것이다.
주께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실 때도 베들레헴 들판의 다윗, 바벨론 포로수용소의 다니엘, 미디안 광야의 모세, 애굽 감옥의 요셉, 갈릴리 바닷가의 베드로를 부르셨다. 모두 중심이 아니라 주변 언저리였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예루살렘 다운타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사마리아에서 선한 사람이 나온다. 당시 최고 양반이라고 자처한 바리새인, 고관대작을 차지한 사두개인, 성경박사인 서기관들이 아니라 역사의 아웃사이더들, 외인부대, OB팀, B급 인생들을 들어 쓰셨다.
하나님께는 외모,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질, 중심을 보신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적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 소박한 데서 대박이 터지고, 평범한 데서 비범함이 나온다. 병든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은 나라에서 데려가고, 돈 많은 자식은 장모가 데려가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이 사역을 잘한다. 고물가 시대에 "못난이"상품, "B급"상품, "못생긴 농산물",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 "못난이 감자", "못난이 수산물"이 인기가 있다. 때깔이 좋은 과일은 농약을 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고, 색깔도 꾀죄죄하고 크기도 모양도 볼품없는 과일이 무농약에 진짜배기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셨다.
B는 Best의 약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A급이 아니라, B급 인생이라도 들어 쓰신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누구에게도 소망이 있다. 지치고 상한 채 무기력에 빠지지 말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들어 써주시옵소서 하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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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