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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칼럼]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잘 아는 목사님은 나이 서른에 야간 대학을 다녔고, 서른다섯에 신학을 시작하고 불혹의 나이 사십이 되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방에서 대형교회로 성장시키고 목회가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할 즈음에 그 목사님은 그 사역의 폭을 더 넓히고 싶어 일찍 은퇴를 선언하고 전국 방방곡곡 미자립교회를 찾아 자비량집회를 시작했다. 모두가 바보라고 할 때 그는 바보 사도 바울의 흉내라도 내고 싶어 그 고난의 길을 자초했다. 대부분의 동역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긍정적 삶의 교훈을 이야기한다. 시편 18편 1절의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를 들려주고, 고린도전서 15:10절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한다. 하나님이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오직 주님으로 달음질했다. 청년의 때에 먹지 못하고 병들어 쓰러질 때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懷疑)를 느꼈다.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 앞에 통곡을 해야 했던 아픔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절박한 상황에서 어둠을 밀어내는 빛의 말씀이 들려오면서 그는 다시 자기자신의 존재에 대한 기쁨에 몸을 떨면서 감격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43:1)”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된 것,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사실 앞에 그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면서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든 몸은 건강으로 바꾸어졌고 가난한 생활은 마음의 부요에서 삶의 부요로 나아가게 되었다. 행복한 목회를 마무리했고 은퇴 후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한 주일도 쉼 없이 말씀사경회를 인도한다. 그 목사님은 종종 ‘노만 빈센트 필’목사님의 독수리와 닭 이야기를 들려준다. 양계장에서 부화되어 양계장에서 자란 독수리가 자기가 닭이 아니고 독수리임을 깨닫고 날개에 힘을 주어 하늘 높이 날아오른 것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확신할 때 엄청난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내 자신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가치를 깨닫게 되었을 때, 세상 그 무어도 부러울 것 없는 오직 주님으로 삶은 희망과 행복감으로 출렁이게 되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처럼 인간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가능성을 계발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증거되는 것인데 독일의 뇌학자 ‘에코노모'박사는 인간의 대뇌는 무게가 약 1,500g 이며 이는 핑크색 제지와 같은 고체인데 두께가 평균 3mm이고 그 세포 수는 136억 5,300만개가 되며 그 한 개의 세포는 소형 트랜지스터 1개의 성능과 같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노이만‘ 박사는 이 세포와 트랜지스터의 비교 논문에서 뇌세포는 트랜지스터보다 속도가 1만~10만배 빠르다고 발표한바 있다. 이와 같은 뇌를 인간이 평생 얼마나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누구도 1%의 머리를 개발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결론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능성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한다. 꿀벌이 1파운드의 꿀을 채취하기 위하여 5만6천 송이의 꽃을 찾아다닌다. 가령 클로버 꽃인 경우는 한 송이 안에 60개의 튜브(flower tube)가 있으므로 벌은 336만회의 작업을 거쳐 1파운드의 꿀을 얻는 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과정의 면접 시험 시간에 시험관은 까만 점 하나를 찍은 백지 한 장을 벽에 붙이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응시자는 까만 점이 보인다고 답을 하는 가운데 몇 사람만 백지가 보인다고 답을 하였다. 면접관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왜 이 작은 점 하나만 보는가? 이 큰 백지는 보이지 않는가?”라고 교훈하였다. 실망을 잘 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속을 본다. 인생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과거를 본다. 줄곧 남만 따라 다니는 사람은 흔히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무슨 일을 하다가 중도 하차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눈 한치 앞만 본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흔히 모든 사물을 대강 본다. 좌절하고 절망을 잘 하는 사람을 흔히 보려고 하지 않는다. 보는 것도 훈련이다. 영어 속담에 ‘The parade passes and dogs bark'(행렬은 지나가고 개들은 짓는다.)는 말이 있다. 일하는 사람과 비평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도 되고, 몇몇 말꾼이 시끄럽게 해도 역사의 행진은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 담긴 속담이다. 역사의 키를 잡고 이끌어 가는 사람은 떠버리가 아니라 자기의 길을 조용히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여학생 둘이 소감을 말했다. 한 여학생은 “어쩌면 산이 그렇게 더러워요. 쓰레기는 여기저기 쌓여있고 파리는 왜 그렇게 극성이예요.” 다른 여학생이 말했다. “산에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들국화를 보았어요. 새소리는 마음을 행복하게 했어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어떤 사고(思考)로 보고 느끼는가의 차이다. ‘버클러’ 박사가 신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헬라어 최고점을 받은 학생이 시각 장애자였다고 했다. 그에게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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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24
  • [은혜의말씀]인생을 연주하라
    다윗의 시편을 보면, 대적이 그물을 치고 웅덩이를 파고 함정을 만들어서 억울하게 공격할 때에도 다윗은 곡소리를 내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불렀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 얼굴이 일그러지기 쉬운데 어떤 이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징징거리기 마련인 그 때에 오히려 노래를 흥얼거린다. 다윗은 계속 공격을 당하면서도 마음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확정하고 확정하였다. 마음에서부터 병을 만들지 않고 마음의 쓴 뿌리를 제거하고 마음의 강퍅함을 면하고 마음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마음의 풍금을 연주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하지 말고 네 마음을 튜닝하라.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어라. 주님께 맞춘 채널을 고정하라. 데시벨을 높여라. 파장을 보내라. 무반응, 무대책,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져있지 말고 네 마음을 표현하라. 무엇인가 소리를 내라. 차든지 뜨겁든지 반응하라. 묻든지 따지든지 대화하라. 비전, 도전, 응전하라. 죽네 사네 하지 말고 추임새라도 넣어라. 마음의 풍악을 울려라. 나팔을 불어라. 주님은 우리가 찬송을 하도록 만드셨다. 절대 음감을 깨워라. 나만의 음색처럼, 내 정체성을 찾아서 내 속에 장착된 하나님의 영광을 깨워라. 비파와 수금을 연주함으로 주변에 있는 악기들을 소리 나게 하라. 불협화음을 내지 말고 옆에 있는 가족, 성도들과 동역하며 아름다운 동행을 하라.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타파하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다. 야엘은 마치 아침 해가 힘 있게 솟아오름과 같았다. 어둠의 자식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거지를 하지 마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노래와 연주는 사람의 눈을 열어 선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청음이 능력이다. 득음이 음악의 시작이다. 듣는 귀가 음악적인 재능이다. 경청이 지도자의 조건이다. 사람의 말은 들으면 시험에 들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은혜를 받는다. 세상의 잡다한 소리에 귀를 닫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말씀으로 온다. 사랑하면 들린다. 지치고 상한 엘리야는 하늘의 세미한 소리를 듣고 회복이 되었다. 예배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징징거리지 말고 노래를 불러라. 찬송 한 곡을 잘 부르면 가슴에 쓰나미가 밀려오듯이 심금이 울린다. 다윗은 수금을 연주함으로 사울왕의 정신병을 치료한 뮤직 테라피를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였다. 아들 중 막내였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는 대서사시를 만들었다. 솔로가 듀엣이 되고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되고 뮤지컬이 되고 오페라를 연주하게 된다. 손경민 목사님처럼 인생을 작사, 작곡, 노래하라. 네 인생의 지정의를 터치해서 노래하라. 연주하라. 연출하라. 네 인생을 최고의 악기로 만들어라. 별일이 다 있는 인생을 살아가며 우울감에 찌그러져 있지 말고, 자신만의 음색으로 고백하고 온몸으로 연주하라. 그것이 찬양의 멜로디가 되고 인생의 주제가가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찔림과 울림과 설렘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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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그래서, 엄마가 도와줄게!”
    세 명의 남자 아이와 한 명의 여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는 둘째인 여자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육아의 한 파트가 시작되었다. 중3인 첫째 남자 아이는 사춘기라고 할 것도 없이 약간씩 혼란을 겪더라도 곧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통과하고 있는 반면, 초6인 둘째 여자 아이는 ‘혼란+예민+감정의 기복+괴리’ 등 질풍노도의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 첫째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급격하게 짜증이 늘어날 때, 이런 말들을 자주 했었다. “은성아, 사춘기는 생각의 변화, 가치관의 정립 등을 하는 시기이지 무작정 엄마한테 짜증내는 시기가 아니야. 물론 호르몬의 변화로 그럴 수 있지만, 무례함이 사춘기의 표현방식은 아니라는 것을 잘 기억해.” 첫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확실히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가만히 앉아 듣는 척이라도 했는데, 최근에 둘째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하니 반응이 완전 다르다. “아, 몰라. 그냥 짜증이 난단 말이야. 몰라.” 감정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둘째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무엇보다 자녀의 이런 반응을 처음 겪는 나 또한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안되겠다 싶어,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참 읽었던 ‘감정’에 관한 책들을 다시 꺼내들었다. 덧붙여 이제는 감정을 담당하는 뇌에 대해서도 공부해야겠다 싶어 뇌과학에 관련된 책들도 구매해서 읽었다. 여러 책을 훑어보는데, 공감이 되고 설득력이 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청소년기에는 편도체가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온갖 부정적 정서와 충동성을 유발하는 데 반해 전전두피질은 아직 미성숙해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러한 간극이 가장 크게 벌어지는 것이 중학교 2학년 때쯤이다. 전전두피질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편도체만 날뛰는 이 시기의 아이들은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감정적으로는 만취 상태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내면소통]의 일부 / 김주환 지음 우리 아이가 겪고 있는 감정의 변화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단락이었다. 뇌속에 편도체가 강하게 활성화되고 있어 감정은 폭발하는데 깊은 사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은 아직 없기에 본인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평소에 아이를 많이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한발 떨어져서 타인이 진단하는 나의 아이의 객관적인 모습을 보니 엄마인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깨달아졌다. “그래서, 엄마가 도와줄게!” 아이가 어릴 때는 이 말을 많이 했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뭐든 스스로 한다는 아이를 대견하게 바라볼 뿐, 도와준다는 말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이 말을 자주 해주려고 한다. “엄마가 도와줄게!” 아이를 키우면서 나무에 마디가 생기듯 짙은 흔적이 남겨지는 시기가 있는 듯하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요즘에는 조금 알 것 같다.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아이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엄마가 도와줄게!”라는 이 마음을 계속 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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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5-07-06
  • IYF 월드캠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해마다 7월이면 부산에서 이단 구원파 IYF(국제청소년연합) 월드캠프가 부산벡스코에서 개최된다. 벌써 28회째인데, 부산에서는 13회(2010년) 이후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다. 참석자 숫자도 점차 늘어 현재 50개국 5천여 명이 참석하고 있다. 여기에 자원봉사자들과 IYF 관계자들, 그리고 그라시아스 합창단과 기쁜소식선교회 등 박옥수 관련 단체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상상 이상이다. 또 2011년부터 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과 2013년부터 세계대학총장포럼 등을 개최하고 있기 때문에 각 나라 장차관들과 세계 대학 총장들이 참석하고 있어, 국내 정치권 인사들과 대학 총장들의 많은 관심도 받고 있다. 박옥수 라는 인물의 인지도만 높아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행히 늦게나마 위기감을 느낀 지역교계가 작년부터 1인 시위 및 구원파 박옥수와 IYF 월드캠프 실체를 지역교계와 부산시민에게 알리고 있다. 현재로서는 물리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이 최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월드캠프에 대해 더 경각심을 갖고, 함께 대응하기 위해서는 특히 개최장소인 벡스코측에 강력한 항의를 해 나가야 한다. 5천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는 월드캠프가 부산에서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벡스코라는 장소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부산의 대표적인 연합기관들과 김천시기독교총연합회측이 벡스코 측에 대관재고를 요청하는 협조공문을 발송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고, 최근 ‘여고생 학대 치사 사건’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기쁜소식선교회와 IYF 월드캠프에 대해 벡스코 측에 계속해서 부담을 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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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5-06-30
  •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먼저 제21대 이재명 대통령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그런데 축하의 말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선거가 어느때보다 분열된 모습을 보여왔고, 이로 인해 새 대통령은 국민통합이라는 큰 과제를 감당해야 한다는 걱정이 앞선다. 우리나라는 지난 6개월간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으로 정치 리더십이 가져온 국정 불안정과 사회적 분열을 겪어 왔다. 대외적으로 안보 위협과 국제질서 재편,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국가 신뢰가 흔들리고, 대내적으로는 리더십 부재와 불필요한 소모적 갈등으로 민생의 어려움이 누적되었다.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국정 안정은 물론, 국민통합이라는 큰 과제를 안고, 국민의 삶과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책무를 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지난 시대의 잘못을 거울삼아 지지해 준 국민뿐 아니라, 지지하지 않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이념적 간극을 좁히고, 민생과 경제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국민의 삶이 보다 나아지도록 하는데 국정의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감사한 것은 대통령도 취임사를 통해 국민을 주인으로 여기고 ‘국민 주권 정부’라는 별칭을 세울 만큼, 새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를 대통합하는 머슴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이 잘 지켜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국제정세도 요동치고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지역 전쟁 상황도 심각한 수준이다. 국가간 전쟁과 갈등은 계속될 예정이며, 어느때보다 자주국방의 기반 위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외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내 상황도 쉽지 않다. 저출산 문제를 비롯해 기후 재난 대응, 교육과 의료, 문화 등 다양한 현안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 이런 문제 등은 한국교회와 시민사회가 함께 극복해 가야 할 요소들이 많다. 종교와 시민단체들도 국정 동반자로 인식하면서 함께 우리 사회의 치유와 회복, 통합을 위해 협력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대통령 후보시절 우리사회 약하고 소외되고 갇힌 자들을 돌아보기 위해 품었던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이제 지도자의 자리에서, 약속했던 바와 같이 초심을 지키며 재임 기간 내내 열어가 주기를 기대한다. 다시 한 번 제21대 대통령 취임을 축하드린다. 임기를 마칠 때 온 국민의 이해와 지지 속에 전례 없는 감동을 남길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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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5-06-30
  • 전광훈, “부산이 제일 멍청한 지역”
    전광훈 씨가 지난 23일 ‘부산/경남 자유마을대회’에서 부산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전 씨는 “대한민국은 반드시 북한 연방제로 넘어가게 돼 있다. 이걸 제일 모르는 사람이 부산 여러분”이라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부산은 6·25를 안 겪어봐서 그렇다. 부산 사람들은 당해봐야 한다”며 “이번에 연방제로 넘어가 김정은한테 시달려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말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역 모 교계 인사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발언”이라며 “누가 멍청한지 모르겠다”고 일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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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6-30
  • 부적절한 영상 송출 사고 잇따라
    최근 새벽시간 교회 유튜브 방송 중 부적절한 영상이 송출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지난 18일 온누리교회(이재훈 목사)는 새벽예배 유튜브 방송 중 북한 인공기 영상이 송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교회측은 당일 홈페이지에 “인공기 영상은 28분 56초부터 배경음악과 함께 흘러나왔다. 이 영상은 약 22초간 송출되다가 정상화면으로 전환됐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내수동교회(박지웅 목사)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교회측은 “새벽예배 시작 직전 교회 유튜브 방송이 외부 해킹으로 인해 약 50초간 부적절한 영상이 노출되는 사고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현재 두 교회는 유튜브 방송을 중지하면서 사고 원인에 대해 조사 중에 있으며, 재발방지를 위해 대응책 마련을 준비중이다. 한편, 이번 사건이 북한 해킹조직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 인공기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북한 해킹조직이 의심을 받고 있다. 만약 북한의 소행이 사실이라면, 한국교회의 보안 시스템 점검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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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6-30
  • [교회법특강 8] 주일학교는 왜 있을까?
    주일학교(교회학교)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조직되었다. 교회 성장과 신앙 전수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저출산 등으로 인해 주일학교가 쇠퇴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교단과 교회마다 여러 방식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일학교에 대해 교회법은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주일학교는 조선예수교장로교회 헌법(1934년)에 언급된다. <예배모범>(7장 주일학교)에 실려 있다. 주일학교는 어떤 순서(절차)로 모이며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교장과 교사의 할 일이 무엇인지 나온다. 우선, 주일학교에서 적용하는 절차는 기도, 찬송, 신경, 교회의 요리(要理)와 헌법 등을 공부하고 전도사업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다. 둘째, 주일학교로 인해 주일 공예배에 출석하는 것과 또한 부모가 직접 자녀 교훈하는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셋째, 항상 당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넷째, 주일학교 교장은 교사 선발, 학생들의 공부와 경건한 자세에 전체 책임을 맡는다. 다섯째, 주일학교교사는 자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준비해야 하며, 아직 믿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권면하고 심방하며, 특별히 아프거나 사고가 있을 때 심방해서 하나님의 복을 빌어야 한다. 근데 이렇게 주일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신경과 요리, 헌법을 공부하며, 전도사업을 위해 헌금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특별히 입교(入敎, 공적 신앙고백)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역시 1934년 헌법 <예배모범>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교회 교우에게서 출생한 자녀로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는 교회의 권고와 치리 하에 있고 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요리문답을 독습하게 하며, 기도하는 것과 죄를 미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며, 성년이 된 다음에는 출생하면서부터 교회의 교우 된 것을 알게 하고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 참여를 청원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와 특권임을 기억케 할지니라”(예배모범. 10장: 입교(入敎)예식) 이로 볼 때 주일학교(교회학교)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즉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가 주일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 성년이 된 다음 입교를 통해 “교회의 교우 된 것을 알게 하고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에 참여하도록”하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포함한 팔츠 영지에 속한 교회들은 <교회법>을 작성했다(1563년). 그런데 그 <교회법> 목차를 보면 주목할 점이 있다: 설교가 제일 먼저 나오고, 둘째로 세례, 셋째 요리문답(要理問答), 넷째 성찬, 다섯째 권징, 여섯째로 구제/기도 등의 순서가 나온다. 이 순서를 잘 보면 <교회법>의 목적은 말씀이 온 회중에게 전해지고 가르쳐지기 위함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설교가 나온다. 그런데 설교가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언약의 표인 세례가 나온다. 이를 위해 주일학교에서 요리문답으로 교육한다. 그리고 입교를 통해 성찬에 참여하게 한다. 여기서도 주일학교(교회학교) 교육의 목적이 분명히 나온다. 즉, 주일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것을 배우고, 또 성경과 신경과 요리문답, 헌법을 공부해서 마침내 입교를 통해 자신이 교회의 교인된 것을 알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교회법>은 직분과 치리회의 질서를 넘어, 신앙교육을 위한 질서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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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법특강
    2025-06-29
  • [목회자칼럼]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이제 곧 여름사역이 시작된다. 성경학교와 수련회와 단기선교와 아웃리치의 현장들이다. 성경학교와 수련회는 신앙훈련과 체험이 중심이고, 단기선교와 아웃리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대상들에게 접근해서 지원하는 활동이 중심이다. 예외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름사역의 봉사자들 대부분은 삶의 여유와 은혜의 고백과 은사의 달란트를 가진 자들이 감사와 사명과 의무라는 신앙의 관점에서 자원하고 헌신한다. 이러한 연고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봉사자들은 동행자가 아니라 시혜자의 관점에서 대상자들에게 접근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도적 사역과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 시혜자적 위치와 능력, 헌신자적 마음과 신체를 가진 자들이 봉사자가 되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지나친 자신감과 자기중심적 행동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현지의 상황과 일체화 되지 못하는 문제를 파생할 뿐만 아니라 차라리 지원, 봉사하지 아니하는 것보다 못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풀러신학교 총장이었던 리차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 진리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타 종교와 일반사회공동체에 자행한 기독교의 비예의적인 일들을 비판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라면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시대와 지역과 공동체를 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이란,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면서도 무례하게 행하지 않고, 다른 신앙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충돌하지 말고, 정중하고 친절한 관용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반인들이 가지지 아니한 ‘비일상적인 정중함’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양과 예절을 말하는 것이다. 타 종교와 사회공동체에 기독교적 교양과 예의를 가지라는 것이 성경의 진리를 포기하거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구원의 역사에 선하다고 말하는 다원주의적 성향이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수준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적 진리에 대한 용인이 아니다. 주객이 전도된 십자군 전쟁의 당위성과 우월의식, 종교암흑기였던 중세시대의 진리독점과 권력탐욕이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포위하고 박해하였을 때 자행된 잔인함과 거만함의 치욕스런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 지역과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 개인과 개인의 혐오 그 기저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종교적 지배성, 우월성, 배타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가 시행하는 여름사역의 현장에도 십자군 전쟁의 교만함과 중세시대의 잔인함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단기선교 현장에서 믿음과 신앙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실천하는 땅 밟기-타종교의 전당에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건물에 십자가를 그리고, 봉헌함에 전도지를 삽입하는 행위-는 타종교와 타종교인에 대한 무례와 교만이다. 교회 마당에서 타종교인들이 함께 주문을 외우고, 교회 건물에 부적을 그리고, 헌금함에 탱화나 코란을 넣는다고 생각해보라. 또 아웃리치 현장에서 시행되는 도시교회 프로그램의 강제적 주입, 맘몬주의와 번영신학의 자랑, 지역의식과 토속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는 정복주의적 우월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무례함과 거만함이다. 종교를 포괄적 의미로 정의하면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통해 학습되고 축척되어진 문화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가 문화보다 우위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종교가 문화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오히려 하위개념을 가지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면 종교는 단지 한 부류의 집단들이 그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문화현상일 뿐이다. 또 문화에는 하급문화, 상급문화가 없다. 다름의 문화가 있을 뿐이다. 일반인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불친절하고, 거만하고 차별하고, 폄하하고, 혐오하는 자들을 향해 무례한 자들이라고 낙인찍는데, 하물며 절대적 사랑과 주도적 희생과 순교적 용서를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비성경적 무례함을 가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모든 사역자들이 다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가짐으로 이번 여름사역의 현장에는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기독교적 예절과 교양을 가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과 삶을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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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 전쟁의 기적: 기적으로 살아남은 대한민국
    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3년1개월 2일, 곧 1,129일 간의 전쟁은 민족적 시련이자 국가적 재난이었다. 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건물, 도로, 철도, 교량, 항만 시설 등 국가 기간산업은 파괴되었다. 주택, 교육·의료시설, 종교시설, 문화재도 파괴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인명 피해였다. 한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등 군인 270만여 명과 민간인 250만여 명(남한 99만968명, 북한 150만)이 죽거나 다쳤고, 남편을 잃은 과부는 30만 명, 이들에게 딸린 자녀들은 약 51만7천 명에 달했다. 10만 명의 고아가 생겨났고, 이산가족은 1천만 명에 달했다.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를 복구하는 데 최소한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한국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대국으로 우뚝섰다. 기적이었다. 6.25는 처음부터 불리한 전쟁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비안정적인 상태였다. 해방 후 좌우익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20일에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게릴라전을 포함한 정치적 대립으로 약 10만 명이 희생자가 생겨났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나고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전체 의석 210석 중에서 이승만의 집권 세력은 겨우 30여 석을 얻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126명이 당선되었다. 정치적 불안정의 반영이었다. 군사적으로 남한은 열세였다. 북한군 병력은 201,050명이었으나 남한은 그 절반인 103,827명에 불과했고, 북한의 항공기는 226대였으나 우리는 22대, 북한의 함정은 110척이었으나 우리는 겨우 36척에 불과했다. 북한의 화포는 2,492문에 달했으나 우리는 절반인 1,051문뿐이었다. 북한은 242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전쟁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였다. 6.25 직전 전방 지휘관들은 대거 교체되어 지휘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2사단장 유준홍 준장이 의정부 7사단장으로, 1연대장 김종오 대령이 원주 6사단장으로, 16연대장 이성가 대령이 강릉 8사단장으로, 국방부 1국장 이종찬 대령이 서울수도사단장으로, 8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대전 2사단장으로, 7사단장 이준식 소장이 육사교장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도사단 소속이었던 2연대가 춘천 6사단으로 예속되어 병력이 서울에서 홍천으로 이동하던 중 전쟁을 맞았다. 의정부 7사단의 예비연대인 25연대도 부대이동명령을 받고 온양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의정부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전쟁 준비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 먼 후방에서 게릴라소탕전을 벌이고 있어서 남침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더 심각한 현실은 농활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장병들은 주말에 대대적인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국외적으로 볼 때, 남한은 무방비 상태였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군을 시작하여 1949년 6월 말에는 군사고문단 495명 외에는 완전히 철수했다. 그해 8월에는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그해 10월에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김일성 정권에 힘을 부여하였고, 한반도에서 패권을 노리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다. 국제적으로나 국외 사정으로 볼 때도 불리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25는 패배가 예견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일곱가지만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 미국의 신속한 참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조리 주에 있는 사저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런데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고 이틀 후인 6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참전과 파병을 결정했다. 그때에는 애치슨 라인이 유효했고, 한미 간에 방위조약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참전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참전 결정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 공군의 한국전에 대한 작전 명령을 허락했고, 이틀 후 미육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도록 허락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1주일도 않되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공군과 육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고, 전쟁기간 중 파견된 미군은 40만 명이 넘었다. 트루먼의 신속히 결정 배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간절한 호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면 5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찬들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호소가 트루먼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 지도부의 김두봉과 홍명희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이 소련 문서에서 드러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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