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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좌파 공산주의자가 된 이재복 목사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 중인 민주노총 조직국장이 북한 공작금 수수혐의 등으로 재판받는 모 목사와 10여 차례 통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 모 목사는 북한공작원 리광진과 접촉했는데, 2015년 4월 쿠알라룸프르에서 미화 1만8900달러의 공작금을 받았고, 또 다른 B목사와 함께 북한 공작원과 회합, 통신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선전한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문제는 목사들 가운데서도 3대 세습 독재정권을 찬양하고 공작금을 수수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B목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5년 12월 기소되어 2017년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앞의 모 목사는 북한 공작금 관련 기소가 늦어져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조선일보」 2023. 1. 25). 이와 같은 기독교계의 공산주의자는 일제하에서부터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 난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도 적지 않았다. 남로당을 지지하거나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경우가 그것이다. 해방 이후 남로당의 파괴 공작은 엄청났다. 1946년의 대구 철도의 10월 항쟁, 1947년 3월 제주도4.3사건, 1948년 8월의 여수14연대 반란사건 등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박헌영은 신변위협 때문에 황해도 해주로 가서 은거하였고, 지령으로 이런 사건을 조종했다. 이 조종을 받아 남한에서 이 사건을 수행한 이가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李載馥, 1903-1949)이었다. 그런데 그는, 민경배 교수에 의하면,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출신의 목사였다. 그는 이재봉(李再鳳)이라는 이름으로 평양신학교를 34회로 졸업한 목사였다.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마산 재건교회 지도자 주상수, 반공목사 박병훈과 동기였다. 박윤식에 의하면, 이재복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 597번지에서 이유업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하던 중 도일하여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공부했다. 도시샤라는 교명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만든 결사체’라는 뜻인데, 이 학교의 교훈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였다. 정대위 윤성범 김태묵 서남동 등 많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했고, 시인 윤동주나 정지용도 이 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재복의 수학 기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비슷한 시기 공부한 한국인들과 교우했을 것이다. 1943년에는 평양 출신 공지길을 만나 혼인했다. 공지길은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가 교토에서 산파 공부를 하던 중 이재복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체류하던 이재복은 해방을 앞두고 귀국하여 영천읍내의 영천교회(지금의 영천제일교회)에서 8개월 간(1945. 2.15-10.14)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후 좌익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인민당에 입당하였고, 경북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군사부장에 오르게 된다. 박헌영(1900~1956)의 신임을 받은 것이다. 대구 10.1폭동 이후에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지하로 잠적했고, 이후 제주4.3 사건, 여수 14연대(반란)사건까지 주도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49년 12월 18일 새벽 3시경 김창룡 대위 이하 3명에 의해 서울 성동구 신당동 377번지에서 체포되었다. 이곳은 그의 세 번째 부인 집이었다. 당시 남로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은신처 확보를 위해 본 부인 외에도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재복은 박영근(朴永根), 오일서(吳一緖), 이근민(李根民), 이일도(李一道) 등과 같은 가명을 사용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런 가명이나 은폐가 이재복의 굴절된 삶의 방식을 반영한다. 여기서도 좌파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을 보여준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거짓, 기만, 은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가정을 파괴하거나 가족관계까지 정략적으로 이용한다. 김창룡은 그에게 전향할 것을 요구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을 이렇게 많이 죽였는데, 살아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겠느냐”며 끝내 전향을 거부하였고, 1949년 5월 26일 서울 인근 수색에서 총살당했다. 김창룡은 이재복이 전직 목사인 점을 감안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라. 남한의 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당신이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는 것이다”라고 설득하자 일주일간 버티던 그는 500여 명의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의 명단 제공에 의해 군 내부의 공산당원 제거로 6.25 전쟁 초기에 군부 내의 봉기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남침한 김일성의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삼일동안 서울에 체류한 것은 봉기를 기대한 것이었으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삼일이 남한과 유엔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호기가 된 것이다. 봉기의 불발로 격분한 김일성은 결국 박헌영을 언더우드와 접선한 미제 간첩으로 몰아 총살한 것이다. 이때가 1956년 7월 19일이었다. 이때 감리교의 현순(玄楯) 목사 딸 현 엘리스는 박헌영의 애인으로 북한 외무성에 근무했으나 박헌영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재복이 좌익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그의 내면에 기독교와 공산주의, 양자의 충돌이 없었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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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01-10
  • [목회자칼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시골에 땅을 샀습니다. 한 평에 150만원을 주고 사서 조그마한 공장을 짓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너무 기대하고 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땅이 한 평에 100만원도 안 하는 땅인데 나는 150만원이나 주고 땅을 샀던 것입니다. 옆집에서 저에게 하는 말이 “아이고 도시 양반. 속아서 땅을 샀구먼?” 그때 저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작은 회사이지만 이 땅이 저희 회사에 정말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정말 저는 잘 샀다고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땅을 살 때 사용가치로 보았지, 교환가치로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땅에서 회사의 일이 너무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와 글을 읽는 여러분은 교환가치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서 이 땅을 교환가치로만 볼 때는 비싼 땅이지만, 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필요한 땅, 사용하기에 너무 좋은 땅인 것이죠. 아니, 한 평에 200만원을 달라고 해도 저였다면 오케이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환가치로 나의 인생을 보면 나이가 들었을 때 ‘열심히 살았는데 집 한 채밖에, 아니 집 한 채도 없는 인생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남는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무릎뼈가 닳고 허리가 아플 지경까지 열심히 살아온 나의 인생은 과연 몇 점일까?’하고 허무함을 느끼며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용가치로 인생을 볼 때는 ‘얼마나 멋지고 최선을 다한 인생인가? 얼마나 열심히 사용했으면 더 쓰이지 못할 만큼 사용한, 멋진 노인의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을, 교회 어르신들을 나는 어떤 가치관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요? 저희 교회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근면성이 얼마나 사용가치 있는가?’, 지금도 창조적인 생각으로 ‘놀면 뭐하나’, ‘쉬엄쉬엄 일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가’, ‘일거리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가’,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해주니 고맙지’. 이와 같은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반면 저희 교회 청년들에게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내 값어치가 한 달 200만원 밖에 안되나요?’,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250만원이라니? 회사 다닐 맛이 안 나요’. 젊은이들에게는 이 부분에서 갈등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교환가치의 관점으로만 인생을 볼 때,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되는지요. 나의 갈등은 인생을 사용가치로 볼 때 나오는가요? 교환가치로 볼 때 나오는가요? 여기에는 객관적인 생각과 주관적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치관도 객관적 가치관, 주관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꼭 가치 평가를 일반적인 평가로, 일반적인 잣대로,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요? 몇 년 전에 기억에 남는 폐업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배를 드려달라고 요청을 하신 장로님, 권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목사님, 이제까지 많은 개업 예배를 드려 오셨지만 폐업 예배를 드리러 오신 적은 없으시죠? 저희가 35년간 세탁업을 했는데 이제 힘도 없고 해서 폐업을 하고자 합니다. 오셔서 예배 인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가고 말고요.”라고 답하고 기쁨으로 달려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바깥에 손님이 옷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잠깐 인사를 주고받으시는데, “이제 폐업하신다면서요?” “네. 그동안 저희 가게를 이용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네. 이제 저희들이 불편해서 어떡하죠?”라며 대화를 나누는 정다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말 이 노부부는 건강하게, 재미있게 사용가치를 잘 사용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저 기억이 제게 오랫동안 남아있습니다. 우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가치관 때문에 불행합니까? 아니면 사용가치 때문에 행복합니까? 누구나 하나님이 부르시면 “네” 하고 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사용가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 아닐까요? 늦게 선교에 눈을 떴다며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선교에 열정을 쏟고 계신 집사님, 맡은 교회 식당 봉사를 그 연약한 중에도 웃으면서 감당하시는 권사님, 말없이 뒤에서 기도하면서 격려해주시는 여전도회 집사님. 너무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2025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올 한 해는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의 자녀에게 너무 고맙고, 나의 가족에게 너무 사랑하고, 우리 교인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절 지금까지 사용가치로 봐주시고 사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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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교회법 특강] 교회법(法)은 세상 법(法)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정치’ ‘교회질서’라는 말은 흔히 ‘교회법’으로도 불린다. 한국교회 초창기는 ‘규칙’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용어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 법이라는 말이 권위와 순종을 전제하기에 민주주의 시대에는 맞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교회는 법과 질서보다 은혜와 사랑이 지배되어야 하지 않을까?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의 권위를 변호하기 위할 뿐, 세상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이런 용어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를 구시대 유물이라며 이 시대에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의 법은 역사나 문화의 요청에 따라 개념이 변천하지만, 교회의 법은 시대 변천에 상관없이 성경에 일치해야 한다. ‘교회법’이란 무엇일까? ‘교회’와 ‘법’이라는 말의 합성어다. 많은 사람이 이 합성을 모순이라고 여겼다. 독일의 법학자이자 교회법학자인 루돌프 쇰(1841-1917)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이 어울리지 않는 합성을 비판한 이유는 교회의 본질은 영적이나, 법의 본질은 세상적이기에 법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본질과 상충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영적으로 부패하면서 교회 안에 법과 질서가 서서히 들어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의 법과 질서는 성경적이지 않고 교회가 부패함으로 나중에 도입된 것이며 현시대에 뒤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법’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온 오해이다. ‘교회법’이라고 할 때 ‘법’은 법 이전에 ‘권리’를 가리킨다. 신자는 누구나 교회에서 법적 관계, 법적 질서에서 권리를 보장받는다. 이 ‘법’(권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義)라는 ‘특별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의 모든 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義)의 은혜를 받은 의인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 은혜로 회복된 의와 화평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로마서 5장 1절이 이 권리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신칭의의 은혜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 이웃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신자의 권리는 그의 범죄에 의해서도 박탈당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질서를 통해 화평을 이루시는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이 점에서 세상 법과 교회법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세상의 법과 질서도 ‘의’(정의)를 말하지만 정죄와 형벌을 목표로 한다. 반면 교회의 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화평을 누리게 하는 목표를 가진다. 교회법은 법이나 규정, 시벌(施罰)을 넘어 회개와 용서, 화평이 그 목표다. 교회법의 목적은 목사가 설교하는 화평의 복음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당회는 결코 이혼을 권할 수 없다. 도리어 화평과 희생과 자기부인을 권해야 한다. 모든 교회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최종 목적은 화평이다. 시벌의 목적도 회개하여 용서받고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화평할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범죄한 자를 고소(고발)할 때에 먼저 '권고'에서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목적 때문이다. 교회에 있는 모든 직분의 봉사 역시 바로 이 목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를 입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목사의 설교와 성례 시행, 나아가 장로의 다스림과 심방, 집사의 구제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있으며, 노회의 시찰(視察) 역시 회중이 누려야 할 화평의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선사받은 화평의 권리를 보장하는 목적을 위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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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변종문 목사] 칼빈주의 오대 강령: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의 선언
    칼빈주의 오대 강령(TULIP)은 1618-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아르미니안주의에 반박하며 확립된 교리로서, 이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며, 인간이 타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구원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첫째,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은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구원을 받을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완전한 무능력에 놓여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선함을 선택할 자유조차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임을 깨닫게 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로마서 3:10-11). 둘째,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신의 주권적 뜻에 따라 구원받을 자들을 조건 없이 선택하셨음을 강조한다. 이 선택은 인간의 공로나 선행과 무관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뜻에 근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에베소서 1:4). 셋째,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인류를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을 위한 실제적이고 확실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선택받은 자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에게만 효과적으로 적용된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5). 넷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받은 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회개와 믿음으로 반드시 끌어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은 인간의 저항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도록 역사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절대성을 드러낸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6:37). 다섯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택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영원히 구원을 보장받는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각 항목이 논리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완전한 구원 교리로 작동한다. 전적 타락은 인간의 무능력을 강조하며,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 속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주권성과 확실성을 보여준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성취됨을 선언하고, 성도의 견인은 구원의 영원한 안전성을 보장한다. 이 다섯 강령은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선언한다. 이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확신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높이는 교리로 작용한다.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단순히 신학적 논리를 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핵심으로서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준다.
    • 오피니언
    • 정론
    2025-01-10
  • 교회가 희망이 되고 있나?
    다사다난했던 2024년이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예수님께서 오신 성탄을 기뻐하고 나면 이제 2024년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금년 한 해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는지 마무리 하는 이때 한국교회 현주소에 대해 한번쯤 고민하고 돌아봐야 한다. 대통령의 탄핵과 혼란스런 국내정치 상황,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와와 우크라이나, 중동전쟁 상황 등 국민들이 불안해 하는 이때 교회는 과연 세상의 희망이 되고 있는지, 아님 세상의 걱정꺼리가 되고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국내 3대 종교 중 유독 교회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목회자의 도덕성 문제를 비롯한 교회 내부의 문제, 상식적이지 못한 이런 모습이 점점 교회를 향한 거리를 두는 모양세다. 대다수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지만, 몇몇 대형교회 중심으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는 교회의 신뢰도를 더욱 추락시키고 있다. 비록 일부 교회들의 문제이지만, 교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난은 감소하고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듣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왜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비춰졌는지 고민하고 돌아봐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비춰지고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라면 내가 조금 더 피해를 보더라도 남을 위해 살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2025년도에는 삶의 한 부분이라도 그분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보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나보다 더 어렵고 소외된 이웃에게 한발 더 다가가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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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12-25
  • 지금은 기도할 때
    대통령이 국회에 의해 탄핵되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탄핵의 이유가 되었지만, 매번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은 거대야당의 횡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 언론이 여론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협되는 문제는 정치권의 극단 대립’이라는 응답이 35%로 가장 높았다.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의 삶에 위협이 된다는 것은 우리 정치가 정도를 가지 않고 있다는 증명이다. 우리 국민들도 정치의 혐오와 증오가 활활 불타는 화염 속으로 같이 들어가지 말고,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은 마치 전설 속의 불가사리와 같다. 쇠붙이를 먹어야 힘을 얻는 존재라고 한다. 국민들이 마치 쇠붙이를 공급하는 것처럼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정치권도 극한 상황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특정 정파의 주장에 휩쓸리지 말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며, 하늘의 능력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이 나라에 안정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국민들을 위하여 정치인들에게 권세와 권력을 더 주셨고, 또 그에 따른 심판도 엄하게 하실 것이다. 지금 격동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모든 국민들은 격견(格見-품위와 격에 맞는 의사 표현)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격랑 가운데에는 기독 의원들도 상당수 있다. 그들이 국회에서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기 바란다. 한국교회도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국가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앞장 서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4-12-25
  • [성서연구]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기까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일은 즉흥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가장 오래 준비하시고, 가장 큰 사랑이 담은 최고의 선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한 최적의 때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때가 최적기였던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우선 세계 언어인 헬라어가 있어서 언어의 장벽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발달된 육상, 해상 교통로를 이용하여 전도자들이 빨리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이룩한 평화, 소위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인해 복음 전도자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회당을 세우고 살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이방인들이 쉽게 복음을 이해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적절할 때 탄생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 정말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미가서 5장 2절은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스가랴 9장 9절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이사야 53장 5절은 예수님의 수난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을 조금의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복음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프로젝트를 추진하시는 가운데 사람들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소위 예수님의 족보를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로 시작한 족보는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에 이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탄생까지 이어오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역할은 <낳고>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아서 다음 세대로 이어갔습니다. 더구나 자녀를 낳아 키우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낳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1장 12절은 이렇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했는데, 주전 597년에 바벨론의 2차 침략이 있었고, 그때 불과 십팔 세이던 여호야긴 왕이 폐위되어 끌려가고, 숙부인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이 12절의 <여고냐>입니다. 그는 왕위를 잃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스알디엘을 낳았습니다. 요즘도 여러 어려움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나라가 멸망하는 와중에, 포로가 된 사람이 자녀를 낳아 다음 세대로 이어갔다는 것은 정말 끈질긴 집념을 보여줍니다. 그 <낳고>가 없었다면,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는데, 스룹바벨은 바사의 고레스 왕이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을 때, 백성의 인솔자인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낳은 <집념어린 이어감>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싸움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매우 어려운 신앙 환경을 맞고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이 점점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와 세계가 온통 혼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낙망하지 말고, 오늘 낳아야 할 것을 낳아야 합니다. 자녀를 낳고, 믿음의 열매를 낳아야 합니다. 우리 대에서 끊어지면 안 됩니다. <낳고, 또 낳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싸움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우리 시대의 몫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우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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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3
  • [소강석칼럼]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
    지난 주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탈진을 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동안 갑자기 박순애 전도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박순애 전도사님과 친한 윤동현 목사님에게 올해 안에 집회가 가능할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내년까지 집회 일정이 다 차 있지만 어느 한 교회를 잘 설득해서 다음으로 연기하면 12월 첫 주에 우리 교회에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일찍 11월 중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날짜가 그렇게밖에 안 된다고 하니 저도 잠시 고민을 하였습니다. 12월부터는 저의 일정이 비상사태나 마찬가지거든요. 교회와 교회 밖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교역자정책수련회와 성탄절 행사를 하고 나면 곧바로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부흥집회를 가진다는 것은 쉽게 결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다가오는 확고한 감동과 거룩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집회를 한다고 했더니 제 측근에 있는 몇몇 동역자들이 “또 해요? 같은 간증일 텐데요.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면 순종해야지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견을 들었지만 제가 다시 기도하는데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아니야, 간증이 반복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 프레임으로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하실 거야. 더 깊은 간증과 새로운 영적 언어로 말씀을 전해주실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부터 은혜 받아야 돼. 많은 신도시 교회들은 트렌드를 따라가지만, 우리 교회는 시대 흐름보다 중요한 게 은혜야.” 그리고는 제가 담임목사의 권한으로 이 집회를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항상 하고 다니는 간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간증이었고 말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분은 시대에 편승하고 조류를 타는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시대를 역행하고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도전적인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한순간, 한순간의 간증과 말씀이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찔러대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속 시원하게 다 전해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주일예배에는 담임목사로서 그런 극한적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심령부흥회를 열어서 담임목사는 하지 못하는 회개의 말씀, 헌신과 사명의 말씀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개척 초창기에 심령부흥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 부흥 보다는 심령 부작용이 나타나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직접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는 우리 교회의 두 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제 자신이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마침내 성회를 열게 되었는데, 새로운 깊이의 간증과 말씀을 저에게만 들으라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무학으로 자라난 산골 소녀가 어떻게 그러한 영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영혼의 문장을 이어가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피곤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목이 상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분은 집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저와 함께 식사하는 것도 양해를 구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 보면 말씀의 초점이 흐려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집회 기간 동안에 전화 한통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발 뒤꿈치에 화상을 입었는데도 엎드려서 저도 무릎 꿇고 기도하느라 가시는 길도 배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꼭 짜놓고 치는 것처럼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 가서도 최선을 다하셨겠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윤동현 목사님에 의하면 셋째 날은 얼마나 기도를 쏟아 부었는지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오셔서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전도사님, 살살 하세요. 목도 아끼셔야지요.” “예, 그러겠습니다.” 해놓고 또 올라가서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적당하게 기도하고 끝내고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최선을 다하여 베스트 원, 넘버 원이 되는 게 아니라 온리 원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간증 앞에 누가 고개를 저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아니라고 손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유레카의 감탄을 할 뿐이죠. 우리가 그런 삶을 못 산 것이 부끄러울 뿐이죠. 다만 아쉬운 것은 유튜브로 방송을 못 보내서 더 많은 분이 듣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부터 도전을 받아 온리 원의 신년축복성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의 성회가 온리 원이었다면, 제가 하는 신년축복성회는 온리 원 중의 온리 원의 집회가 될 것입니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려서 누구도 받지 못하는 최고도의 축복, 아니, 온리 원의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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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3
  • [시사칼럼] 성탄의 광장
    한 겨울 새벽시장은 너무 추웠습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러 방학 때면 이따금 새벽에 자갈치시장에 갈 때가 있었습니다. 지나간 겨울들은 왜 그다지 추웠을까요? 발끝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지고 귓불이 떨어져나간 건 아닌지 쓰윽 만져볼 때쯤이면 시장 상인들은 커다란 드럼통에 모닥불을 지폈습니다. 따로 부를 필요도 없이, 어느 샌가 하나둘씩 불앞에 모여듭니다. 사위(四圍)를 온통 다 삼켜버릴 기세의 어둠을 하나둘씩 갈라져 나오는 빛들이 살라버리고 ‘따닥따다닥’ 나무 타들어가는 소리가 어둠을 가로지르는 노랫소리처럼 들리면 동태같이 얼어붙은 몸이 녹아들면서 마음도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어둠이 지피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언 손과 발을 녹일 수 있는 모닥불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 우리 마음과 영혼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모닥불은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요? 본래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인 ‘탄’이 요즘같이 많이 언급되기도 처음입니다. 언제나 돌아오기 마련인 ‘성탄(聖誕)’의 계절에 ‘탄핵(彈劾)’이라는 정치적 사건 때문에 곳곳에서 ‘탄성(歎聲)’이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탄(感歎)’하는 소리들이 있는가 하면 ‘탄식(歎息)’하는 소리들도 적잖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결의가 이루어진 12월 14일을 전후하여 전자는 주로 여의도 일대에서, 후자는 주로 광화문 일대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헌법 제1조 제1항) 모든 국민에게는 양심의 자유(헌법 제19조)와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헌법 제21조 제1항)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의도든 광화문이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을 따라 최선을 다하면 그만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고 나아가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들을 자제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가 평가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상호간에 존중하고 관용하며 이해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모두가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습니까? 함께 아름답고 성숙하며 발전하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탄절을 전후해서 광장마다 사람들로 넘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인파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금번 성탄의 광장들은 탄핵을 둘러싸고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가득 채우리라 예상합니다. 진리가 항상 다수의 편에 서 있다는 역사의 필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의연하게 일어서는 소수가 언제나 진리라는 가설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통계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드러낼 뿐 가치와 평가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전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성탄전야의 대한민국을 잠간 묘사해 보겠습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 의뢰로 조사해 발표한 ‘대통령 탄핵 찬성 여부’ 여론조사 결과 찬성은 76.1%, 반대는 21.9%였습니다(중앙일보 12월 11일). 데일리안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한 조사 결과는 찬성이 73.6%, 반대가 22.2% 나왔습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결과는 찬성이 73.6%, 반대가 24%였다고 합니다(매일경제). 물론 표본조사에 불과합니다만, 이런 통계들은 대체로 70% 넘는 국민이 탄핵을 찬성하고 30% 가까운 국민이 탄핵을 반대한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런 자료들이 탄핵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정당한 판단은 신과 역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광장에서는 탄성만 울리지 않았습니다. 광장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했는데, 광장마다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도 달랐습니다. 여의도 일대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빅뱅의 ‘삐딱하게’ 같은 K-팝이 울려 퍼진 반면, 광화문 일대에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노래들이 울려 퍼졌습니다. 광장에서 들어 올린 기물도 달랐는데, 알록달록한 아이돌 응원봉이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반면 알록달록한 태극기와 성조기가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여의도 일대는 갑자기 광장의 주축 세력으로 등장한 20대와 30대 여성들을 포함해서 엠지(MZ)세대가 주력이라면, 광화문 일대는 최근 ‘노노(NoNo)족’이라고도 하고 새로운 ‘우파(右派)유튜브족’이라 부를 수도 있는 60대와 70대가 주력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여의도 광장에서는 풍자용 캐럴이 불렸다면 광화문 광장에서는 원래 캐럴이 불렸다는 차이도 있네요.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탄핵에 대한 ‘전국담임목사 대상 긴급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67.2%가 찬성이고 28.8%가 반대였습니다(국민일보 12월 12일). 하지만 60대와 70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제 교회 현장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자, 그렇다면, 여의도로 상징되는 새로운 광장세대는 향후 교회로 찾아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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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3
  • [은혜의말씀] 마음을 지키라 (잠언 4: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켜야 된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마음이 병 들면 다 무너지고, 모든 관계도 마음에서 부터 시작된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고, 힘줄이 있고, 성경말씀에서처럼 마음의 밭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잘 가꾸고 잘 지킬 것인가, 6가지로 살펴보려 한다. 1. 초심: 시작할 때 마음은 대체적으로 순수하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 된다. 동안을 가지려면 동심을 회복하면 된다. 마태복음 28:16 실패한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 첫사랑을 회복하였다.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된다. 처음처럼 초지일관하며 한결 같을 때에 변질되지 않고 괴물이 되지 않는다. 2. 진심: 아굴의 기도는 헛된 마음과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한다. 사람은 진심이 통하면 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진정성이 느껴지면 된다. 진심이면 된다. 에서는 장자권을 만홀히 여기고 진지함이 없이 가볍게 여겼다가 망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사위들은 심판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가 망했다. 매사에 진지하라. 3. 중심: SFC강령에는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 있다. 쓰리센터링이다. 사람이 중심을 잡아야 요동치 않는다. 인간관계의 중심은 하나님 중심이다. 성경 중심으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추어야 된다. 교회가 소망이다. 4. 열심: 사역을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열정의 소유자들이다. 엘리야는 열심이 특심이었다. 성령은 불이다. 열정은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힘이다. 사역에는 이열치열, 마태효과가 있다. 열심의 반대, 게으른 것이 죄악이다. 5. 전심: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도둑질을 하는데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좋은 일인가? 그렇지 않다.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 속에는 인간적인 욕심과 야망이 묻어날 수가 있다. 단순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가져야 된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 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쉐마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다윗은 시편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한 100% 전심을 원하신다. 최고의 기도는 이심전심이다. 6. 일심: 건강한 교회는 고린도전서 1:10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된다. 마음이 콩밭에 가있으면 안 된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심장, 성령님의 탄식을 공감하는 것이 믿음이다. 다음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성경말씀을 잘 가르치고 전해야 된다. 한마음으로 힘써 마귀와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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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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