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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교단 탈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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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교회 백신종 목사측 성도들은 현 임시당회장이 공동의회를 열어주지 않는다며 법원에 임시당회장 선임과 공동의회를 열어달라는 소송을 3월초 준비중이다. 현재 성도 1/3이상 서명을 받아 놓았고, 변호사 선임도 마무리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 목사측 모 성도는 “3월 초 소송에 들어가면 판결 및 교회 공동의회 등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면 대략 5-6월 경에 백신종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실 수 있을 것 같다”며 (교단탈퇴는)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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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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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누구를,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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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목회자로서 걱정과 함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왜 교계와 교회 공동체에는 비난과 정죄와 다툼과 분열이 많은지? 한동안 우리는 이념과 정치에 대한 개인적 나침반을 가지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편을 가르고, 아주 어설픈 백정의 칼날로 서로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고 정죄했다. 지금도 그 마녀사냥과 같은 정죄와 비난은 멈추지 않고 있다. 교회 밖에서 그리고 불신자들이 가하는 비난과 박해와 비판도 감당하기 힘이 드는데, 힘을 합쳐서 함께 대응하여도 현실의 상황을 타개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비전을 이루기가 버거운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난과 정죄와 분열은 우리에게 더 큰 아픔과 좌절을 가져다준다. 한국 교계와 교단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부산 교계를 둘러보아도, 정죄와 분열과 싸움의 도는 멈출 생각이 없이 오히려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있다. 모두가 다 의인이고, 정의의 심판자다.
옛말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는데 오늘 우리 교계와 교회의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정죄와 비난의 목소리는 더 높아지고, 부흥과 성숙을 위한 흥정은 사라져 간다. 기독 언론들과 미디어에 실리는 뉴스와 교계의 소식 그리고 유튜브에 하루가 멀다 않고 업로드되는 각종의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은 교회와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데 거의, 아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회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 교회와 기독교는 결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사상이나 공동체로 인식되게 했다. 외부에서 볼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비난과 다툼으로 인해 기독교는 이미 존재하지 말아야 할 사회의 악이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과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존재하는, 일어난, 존재하지 않는, 일어나지도 않는 일들을 추측과 상상으로 혹은 사실에 완벽함을 더하여 더욱 적나라하게 교회의 문제와 고통을 기사화했다.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교회나 교계에 다툼과 분규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거의 불문율처럼 ‘교사모’(교회를 사랑하는 모임)와 ‘교개위’(교회개혁위원회)가 만들어진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의 재물 되기까지 투쟁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로를 악마화한다. 기도와 성경 말씀까지도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도구화한다. 서로의 비난으로 말미암아 한쪽은 사탄의 자식이 되고, 한쪽은 마귀의 노예가 된다.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헌신짝처럼 버린다. 악마를 잡기 위해서는 더 큰 악마가 되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괴물이라고 정의한 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들 자신은 더 큰 괴물이 되어 간다.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신들은 모른다. 정말 그들이 가진 생각과 행동의 중심이 하나님일까?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감당하는 것일까? 정죄와 비난과 투쟁의 산물로, 믿음이 연약한 어떤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아직 영글지 않은 믿음을 가진 어떤 이들은 아예 예수를 떠난다. 이들의 영혼에 대해 책임지는 투쟁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혼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아버지는 아직도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교회는 만물 위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지체들이라고.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으나 너희 맘대로 뽑지 말고 알곡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 참으라고, 한 가지만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접근하고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타종교에는 문제나 비리나 가라지가 없을까? 왜 그들은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노출하지 않고 힘들고 어렵지만, 자정의 노력과 개혁의 일들을 이루어갈까? 왜 그들은 노출된 공간에서 서로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을까? 아마도 서로가 그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인식하거나, 그들이 가진 종교의 아름다움과 이미지를 훼손하고 싶지 않거나, 이미 타락한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사욕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묵인하거나,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위한 그 무엇이 처음부터 없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행하고 있는 비난과 정죄와 다툼과 분열은 정말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자신이 하나님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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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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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아우구스티누스와 국가 권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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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경 출애굽기 32:26-28절에서 이교도나 비신앙적 집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경찰력 사용이 가능하다는 암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하는 레위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해한 내용인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본문을 세속 행정관(magistrate)인 모세에 의해 지시된 학살행위로 해석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경찰력 행사를 지지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입장은 후세에 위험한 유산이 되었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에 근거한 경우에’라고 한정하였으나, 후일 이단박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국가권력의 폭력행사의 전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사상은 4세기 카르타고와 그 주변 도시에서 분리주의자들이었던 도나티스트와의 대결에서 형성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향인 누미디아(Numidia)는 도나티스트들의 거점이 되었고, 이곳에서는 도나티스트들이 주도적인 집단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는 히포(Hippo)는 기존의 교회인 가톨릭이 도리어 소수 집단이었을 만큼 도나티스트들의 세력이 우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들과 대립하였고, 논쟁하게 된다. 도나티스트들은 탄압을 받았고, 탄압받던 자기들이야 말로 의로운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도나티스트들은 박해하는 자가 아니라 박해받는 자라는 점에서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를 계승하는 의로운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난(박해 받음)이 기독교적 의의 표식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과정에서 배태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이 ‘강제권 이론’(Compelle intrare), 곧 이단척력에서의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한 것이다. 물론 5세기 당시는 교회와 국가가 완전히 분리된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황제는 신앙의 문제에 대한 사법권을 행사하고 무엇이 정통신앙인가를 선포하고 이단을 불법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또 이단들에 대한 벌금, 재산몰수, 고문, 사형 등의 형벌 부과가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비 가톨릭(non-Catholics)에 대한 국가권력의 강제력을 인정한 첫 신학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예수를 대적하던 바울이 예수에 의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듯이(행9:1-9), 이단들에게 매를 아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또 예수를 부인했던 바울이 육체적 징벌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앞을 보게 되었듯이, 이단들도 이런 징벌을 통해 회심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단 징벌에 있어서 경찰력의 동원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한 것은 교회의 대적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들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국가권력의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바르지 못한 신앙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 영원한 형벌을 받기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다. 실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이 실제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요구하였다.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이미 411년에 행한 설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단자들을 산 울타리에서 끌어오고, 가시덤불에서 멀리하게 하라. 그들은 산울타리에 박힌 채 강요당하기를(cogi) 원치 않고, “우리가 원할 때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 아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들어오라고 강요하라”고 말씀하셨다. 밖에서는 강제를 사용하라. 그들이 한번 안에 들어오면 자유가 나타날 것이다(게리 윌스, 187).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강제권이란 마치 억지로라도 학교에 가도록 하는 법은 결국 학교에서 자유롭게 배우게 되어 아동에게 유익을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바른 신앙을 향해 나아가도록 강제될 수(compellerenter)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런 선의에 근거한 주장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단징벌에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후일 가톨릭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강제권 사상은 후일 교회사에서 거듭 대두되었고, 이단 척결의 정당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얀 후스를 비롯한 중세교회의 탄압, 16세기 제세례파에 대한 탄압의 근거였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강제권 이론은 불행한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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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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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장로교회 는 어디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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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장로교회의 교회정치는 어디서 왔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부터 약 500년 전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을 통해 완성되었다. 개신교회의 교회정치는 중세시대 교회(로마천주교회)의 교회정치, 특히 직분론을 배경으로 나왔다.
로마천주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직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감독(주교), 장로(사제), 집사. 주교(감독)는 한 군데 지역에 매이지 않고 지역을 초월한 영적 지도자이다. ‘장로’ 혹은 사제는 원칙적으로 특정 지역에 매인 개신교의 목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신부로 임직한 성직자는 목사처럼 모든 성례를 시행할 수 있으나 해당 교구의 돌봄에는 책임이 없다. 집사는 주교를 보조하는 직분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신부가 되기 위해 거치는 직분이다.
따라서 로마천주교회 교회 조직의 첫째 특징은 아주 ‘계급적’이다. 감독, 사제, 집사 이 세 직분에 근거해서 서열제도(hierarchy)가 발전했다. 주교(감독)는 자기 지역에 있는 모든 사제에게 권한을 행사하고, 대주교는 여러 교구를 관할하며, 교황은 세계교회의 머리가 된다. 둘째 특징은 ‘성직자 중심’이다. 직분자는 모두 성직자다. 따라서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 ‘평신도’는 전적으로 이들 성직자에게 매여 있다. 성직자들은 모두 전임 사역자다. 여기서는 평신도 직분자, 일반 교인 중에서 선출된 교회적인 직분을 가진 이가 없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중세교회(로마천주교회)의 성직자 중심, 서열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생긴 개신교회의 지역교회에서는 세 직분자 중에 우선 복음을 설교하는 말씀의 사역자, 설교자, 목사라 불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개신교회의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1526년부터 최초 개신교회의 교회정치가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는데 특히 독일과 스위스에서 그러했다. 당시 수십 개의 자세한 내용을 갖춘 교회정치가 있었다. 이것들은 종교개혁 이후 첫 10년 기간 교회 생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일과 스위스 대부분 교회는 종교개혁가 루터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았다. 이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군주와 시의회가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역교회들의 교회 생활은 ‘교회위원회’의 손에 있었다. 이 기관은 그 지역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운영위원회 격이었다. ‘교회위원회’는 신학자 소수와 법률가 소수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군주를 대신하여 군주가 관할하는 지역에 있는 교회를 운영하고 법과 규정을 제정하고, 또 항소 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목사 중에 탁월한 목사가 그 지역의 ‘감독’(슈퍼인텐던트)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교회위원회와 지역성직자 사이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 슈퍼인텐던트는 보조하는 이들과 함께 모든 교회를 시찰하여 어려운 문제에 답을 주고 또 목사들에게 질서를 요구하는 일을 했다. 또 1-2년마다 그 지역의 성직자, 법률가와 함께 모이는 회의를 주관하였다.
그런데 이들, 독일과 스위스 지역 대부분 개신교회의 교회정치에는 한계가 있었다. 목사 외에는 다른 직분이 세워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1540년까지 독일 지역의 교회정치들을 보면 몇몇 교회에 장로와 집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 루터의 영향이 미친 지역에서는 1540년 이후엔 이마저 다 사라진다. 루타는 장로의 명예는 회복했으나 정작 장로를 교회에 세우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들 교회에는 ‘교회위원회’ ‘슈퍼인텐던트’ ‘목사’ ‘집사’(몇몇 지역에만)만 있게 되었다. 교회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장로나 당회가 아니라 슈퍼인텐던트와 접촉하였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생긴 교회라 할지라도 스위스 일부와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독일 북부 지역의 교회들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교회들과는 전혀 달랐다. 다음에서 이를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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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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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문 목사]십자가의 도 — 본질을 잃은 시대에 던지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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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1 Corinthians)
우리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치의 혼란과 영적 공허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정보는 차고 넘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확신은 옅어졌고, 관계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공동체의 깊이는 얕아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를 향한 질문은 피할 수 없다. 교회는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왜 존재하는가.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외형적 성장에 있지 않고, 오직 성경이 증언하는 십자가 복음에 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 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 도구로, 수치와 패배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 선포했다. 세상이 강함과 성공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 하나님은 약함과 낮아짐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이 역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이다.
초기 교회는 혹독한 박해를 견디며 이 복음을 지켜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가 전쟁을 앞두고 십자가의 표징을 보았다는 전승과 함께,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 발표되면서 기독교는 공인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제도적 승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박해의 시기에도 성도들의 심령 속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살아 있었다. 환경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이 교회를 지탱했다.
325년 열린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중대한 논쟁의 장이었다.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대립은 단순한 신학적 차이를 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참 하나님이신가라는 근본 문제를 다뤘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십자가의 구원도 설 자리를 잃는다. 교회는 시대의 압력보다 복음의 진리를 택했고, 그 선택 위에 서 있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다. 죄는 가볍게 다뤄지지 않았고, 동시에 죄인은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모두가 죄인이며 동시에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교만을 꺾고 겸손을 세운다.
오늘 교회의 위기는 외부 환경의 변화보다 중심의 약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성장과 영향력이라는 언어에 익숙해진 사이, 낮아짐과 섬김이라는 십자가의 길은 희미해지지 않았는가. 십자가는 더 높이 오르기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더 많이 내어주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회복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또한 은혜의 복음이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구원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 이 확신 위에 설 때 교회는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움직일 수 있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이후에 주어졌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고, 죽음 없는 생명은 없다. 십자가 없는 부활 신앙은 공허하다. 교회가 다시 십자가의 도 위에 굳게 설 때, 세상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변함없는 중심, 곧 십자가로 돌아가는 일이다. 교회의 능력은 규모에 있지 않고 복음에 있으며, 숫자에 있지 않고 진리 위에 있다. 십자가의 도를 붙드는 교회만이 시대를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공동체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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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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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절대적 안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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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 그래서 남을 탓하거나, 밖에서 답을 찾거나, 돌려막기를 해서는 노답이다. 변화무쌍하고 돌발변수가 많고 모든 것이 급변하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다.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도무지 요동치지 않는 안정감이 있는 사람이다.
교통사고가 날 때는 전방주시 태만, 안전거리 미확보, 휴대폰을 본다거나 무엇인가 엉뚱한 데에 혼이 빠져 있을 때 사고가 난다. 애정결핍, 정서불안, 주의산만 할 때는 외로운 늑대가 되고 사회 부적응 환자가 되고 고독사에 이르고 만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 청년처럼 덤볐다가는 다치기가 쉽다. 인생은 천천히 평온하게, 서서평해야 된다.
안정감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가? 아기로 태어날 때부터 울지도 않는 천하장사 같은 사람은 없다. 어린아이들은 철이 없고 미숙하나 산전수전 겪어가면서 산수를 배운다. 예수님처럼 키와 지혜가 자라나매 하나님과 사람에게 점점 사랑스러워져 가시더라. 건강한 사람은 편식하지 않고 균형 잡힌 건강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 식탐이 없으니 과식하지 않고, 일 욕심이 없으니 과로하지 않고, 성공 욕심을 부리며 과속하지 않는다. 서두르면 사고가 나고, 성급하면 후회하게 되고, 조급하면 실수하기 쉽다. 밸런스, 균형이 건강이고 지혜이고 아름다움이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반듯한 사람이 잘생긴 사람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자기를 돌아보면서 이웃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라.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미덕이 있고,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다.
아굴의 기도에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매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 사도바울은 가난한 데나 부한 데나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회복탄력성이 남다른 요셉은 허리가 잘 돌아갔다. 적응능력이 뛰어났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지만, 머슴살이를 할 때나 감옥살이를 할 때나 총리로서 대국을 다스릴 때도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형통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이후에 대권을 이어받았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 하신 말씀대로 행하였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 주 말씀이 선포되고 지금은 모세의 때와 같이 언약이 성취되고 지금은 다윗의 때와 같이 예배가 회복되네”라는 찬양의 가사가 있다.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 바로 그 사람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평안을 주신다.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잔잔하게 하시고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기이한 복을 주시니 그를 찬송할지로다.
무슨 말을 들어도 상처받지 않고 무슨 일을 당해도 시험 들지 않는 절대 안정감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성경의 구원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오랜 시간 다듬고 만들어 가신다. 그 와중에 별일을 다 겪지만 늘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면 절대로 안 망하고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요동하지 않는 절대 안정감을 누릴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속 실력, 내공은 주님이 다듬으시는 중에 쌓인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며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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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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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그들 중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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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매일 <말씀산책>이란 제목으로 5분 남짓한 영상을 찍습니다. 영락교회 홈페이지에도 있고, 유투브에도 있습니다. 제가 짧은 영상을 찍게 된 것은 코로나19로 교회 문이 닫혀 성도들이 대면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어 느끼는 영적 공허함을 메우는 차원에서 2020년 3월 1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119대작전>, <한친구운동> <오이코스 말씀묵상> 등 제목을 바꿔가면서 계속했습니다. 작년부터는 <말씀산책>이란 이름으로 하루에 성경 한 장씩 진행합니다. 한 장에서 한 구절을 택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차례로 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찍고 있는데, 현재는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시편 중 제4권의 말씀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시편 99편에 왔을 때였습니다. 6절 말씀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전에도 이 말씀을 많이 읽었습니다만,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제사장 중에 있고, 사무엘이 하나님을 부르는 자 중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 말씀이 제 가슴을 강하게 때렸습니다. 이 말씀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목사들 중에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저는 목사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의 목사입니다. 서울노회 소속 목사입니다. 영락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서울노회 회의록에 제 이름이 있습니다. 영락교회 주보와 요람 등에도 제 이름이 있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열람하면 거기도 제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저를 목사라 부릅니다. 저는 목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목사들,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목사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사들 중에 있는지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1982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 해 말부터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고, 전임전도사, 부목사, 담임목사로 오늘까지 살고 있으니, 사십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긴 세월이었습니다. 머지않아 사역에서 은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사역한 것을 성역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온 세월을 성역이라 부른다면, 저는 사양할 것 같습니다. 아니 사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성역이라 하려면 하나님을 위한 일을 했어야 하는데, 저는 그동안 저를 위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십 년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위해 일한 시간보다 저를 위해 산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도 성공한 목사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저를 위한 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목사가 되도록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뒷바라지 하셨습니다.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영락교회는 신학대학원 3년 동안 장학금과 책값과 기숙사비와 용돈까지 주셨습니다. 많은 성도가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기숙사에서 춥지 않도록 포근한 담요를 사 주신 분도 계십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부족한 저를 많은 성도들이 돕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실 것 같아 두렵습니다. <난 네가 이런 목사가 되길 바란 게 아니다. 넌 내가 기대한 사역을 하지도 않았고, 네 됨됨이도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 넌 내가 사랑하는 목사들 명단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하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목사들 중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참 두렵고 민망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 중에> 계십니까? <그들 중에> 있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하겠습니다. 우리 생애가 끝날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들 중에 있길 원합니다. 그들 중에 있기 위해 남은 삶을 더 깊은 믿음으로 바르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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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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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엄마의 젖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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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에 늦게 신학을 시작해 시골교회를 담임하게 된 어느 날,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문안했다. 평소에는 당일로 다녀오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어머니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늦가을의 으스스한 한기 속에 잠이 오지 않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괜스레 어머니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야야, 노인 냄새 난다.” 뒤돌아 눕는 어머니를 다시 돌려 눕히면서 “엄마, 젖 먹고 싶다.”고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이고 망측해라, 니가 어린애가?” 하며 웃으셨다. 나는 어머니의 저고리 섶을 살며시 헤치고, 앙상한 몸에 말라붙은 젖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젖을 떼고 37년 만에 만져보는 엄마의 젖이었다. “아이구 야야, 애미 젖 안 나온다. 왜 이러노?” 하며 만류하시는 어머니.... 그러나 나는 “엄마… 젖 먹자”라고 말하며 젖꼭지를 입에 넣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며 헉 하고 울음이 터졌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내 머리를 아기 머리 쓰다듬듯 어루만지셨다. 어머니도 울고 계심을 느낀 나는 한참을 울었다. “이 젖꼭지를 통해 우리 5남매가 살았구나.” 그날 이후 내 목회의 기본 철학은 ‘모심목회(母心牧會)’가 되었다.
강산이 네 번 바뀐 오늘까지도 그날의 감정은 잊히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농어촌의 작은 교회에서부터 도시의 대형교회,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다니며 ‘엄마 젖꼭지 목회철학’으로 말씀 사경회를 인도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젖꼭지다. 성도는 목사를 통해 신령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목사는 성도에게 풍성한 젖을 먹이기 위해 온갖 영적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일마다 성도는 하나님의 젖꼭지인 목사를 통해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는다. 영적으로 배가 부르면 그 목회 현장은 푸른 초장이 된다. 엄마의 마음이 아기의 환경이 되듯, 담임목사의 마음은 교회의 환경이 된다.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교회든,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교회든 그 중심에는 목사의 마음이 있다. 그래서 다시 ‘엄마의 젖꼭지’를 묵상하게 된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엄마는 젖꼭지를 깨물릴 때가 있다. 첫째,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 아기는 젖꼭지를 문다. 둘째, 이가 날 무렵 잇몸이 근질거릴 때도 젖꼭지를 문다. 엄마의 반응도 두 가지다. 하나는 순간적으로 아기의 엉덩이를 때리며 “왜 깨무노” 하고 화를 내는 것. 그러면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다른 하나는 젖이 안 나와 아기가 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기와 눈을 맞추며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기는 스르르 잠이 든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젖꼭지를 깨물리지 않으려면 젖이 풍성해야 한다. 그래서 엄마는 젖이 잘 돌도록 음식을 챙겨 먹는다. 또 하나, 이가 날 무렵의 아기는 배가 고플 때는 젖을 깨물지 않는다. 그러나 배가 어느 정도 부르고 엄마가 자신을 보지 않고 다른 데 시선을 두면, 관심을 받고 싶어 젖꼭지를 문다.
그래서 이 시기의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는 엄마가 눈을 맞추고 관심을 주면 젖꼭지를 깨물지 않는다.
목회 현장도 이와 같다. 목사의 마음이 편안하고 생활이 안정된 교회는 은혜와 감사가 넘친다. 반대로 목사의 마음이 불안하고 지친 교회는 영적 기갈과 갈등이 반복된다. 젖이 나오지 않아 젖꼭지를 깨무는 교인, 관심을 받고 싶어 젖꼭지를 깨무는 교인…오늘의 교회 현실이다. “좋은 엄마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지치면 쉬고, 힘들면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엄마다.”라는 말처럼 교회도 완벽한 목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젖을 풍성히 준비하고, 젖꼭지를 물리는 순간마다 아기와 눈을 맞추듯 성도의 상황을 살피고 공감하는 목사를 원한다. 목사도 사람이기에 지칠 때는 쉼이 필요하다. 그럴 때 교회의 도움을 겸손히 요청할 수 있어야 하고, 교회는 그 마음을 헤아릴 때 푸른 초장이 된다.
요즘 AI로 설교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젊은이들은 ‘라떼’라며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묻고 싶다. 거기서 영양가 있는 젖이 생성될 수 있을까? 설교는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다. 말씀 선포의 본질을 고민해야 한다. AI는 생명이 없다. 감정이 없다. 사랑이 없다. 영적 경험이 없다. 문장을 나열하는 능력은 AI가 더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떨리는 마음, 성도를 향한 사랑, 골방에서 기도하며 씨름하는 시간,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 자료 정리, 배경 분석, 예화 적용, 표현 다듬기 등은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 전체를 AI에 의존한다면 생명력 있는 메시지는 나올 수 없다. 말씀은 살아 있어야 하고,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지고한 수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삶과 기도, 그리고 경험된 영적 체험이 담겨 있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젖꼭지다. 풍성한 젖을 위해 자기 자신과의 영적 씨름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교인은 젖꼭지를 깨물어서는 안 된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깨물리지 않는 젖꼭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설교자는 언어라는 붓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그림처럼 그려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거룩한 화가이다. 성도는 그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되고, 깨닫고 회개하며 결단하게 된다. 설교의 교과서는 성경이다. 다양한 색채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다양한 내용과 예화, 경험은 참고 도서일 뿐이다. AI도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한 설교의 도구일 뿐이다. 주체와 객체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시 엄마의 젖꼭지를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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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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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교회폐쇄법’ 논란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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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부 국회의원들이 민법일부개정안을 발의하자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 내용을 조금 들여다보자면, 현행 민법 제38조의 “법인이 목적 이외의 사업을 하거나, 설립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기타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한 때에는 주무관청은 그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기존의 조항에 “법인이 대한민국헌법 제20조 제2항에서 정한 정교분리의 원칙 또는 공직선거법 등 관계 법령을 위반하여 선거, 정당 또는 후보자와 관련하여 조직적·체계적으로 정치 활동에 조직적·반복적으로 개입하여 공익을 현저히 해한 때”라는 조항을 덧붙였습니다. 또한 제38조의 2 조항을 신설해서 “➀ 주무관청은 법인이 제38조 1항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해당 법인에 대하여 업무 및 재산 상황에 대한 보고를 명하거나 필요한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➁ 주무관청은 제1항에 따른 확인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소속 공무원으로 하여금 법인의 사무소, 사업장 또는 그밖의 장소에 출입하여 장부, 서류, 그밖의 물건을 검사하게 하거나 관계인에게 질문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이에 대한 교계의 일반적인 반응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1월 26일 논평을 통해 “해당 법안을 일명 ‘교회폐쇄법’으로 간주하고 반대한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날 ‘악법대응본부’도 “위험한 발상이 담긴 이 법안은 가히 ‘종교법인 강제해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유튜브의 언어는 더욱 직설적입니다. “결국 교회폐쇄법이 발의되었습니다”(czchurch). “사탄의 칼끝 교회폐쇄법안”(bzCmk70). “민주당이 교회폐쇄법을 만들었다”(54KQwc). 법학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비슷한 논평도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물론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해산시킬 수도, 해산되지도 않는다”(cupnew, 1. 28). “교회 SNS 떠도는 ‘교회해산법’ 발의, 진실은?”(logosian, 1. 26). 하지만 앞선 입장들과 비교하면 소수설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선의 목회자들 입을 통해서도 ‘교회폐쇄법’이나 ‘교회해산법’이라는 말들이 더 널리 회자되지 않겠습니까? 벌써부터 교회로 성도들의 다음과 같은 문의들이 빗발친다고 합니다. ‘교회폐쇄법이 만들어졌다는데 사실인가요?’ ‘강제적인 교회해산법이 추진된다는데 목사님들 가만히 계시면 되겠습니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또한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일반 법안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찬반의 입장을 피력하는 것 또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표현의 자유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선전이나 선동까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 사실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발의된 법안의 이름은 ‘교회폐쇄법’이나 ‘교회해산법’이 아니라 ‘민법부분개정법률안’입니다. 그 내용이 교회를 탄압하고 강제로 해산시킬 수 있는 독소조항을 품고 있으니 교회폐쇄법이나 교회해산법과 다름없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존재하지 않는 법안을 존재한다고 우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또한 해당 법안의 발의자 중에 민주당 소속 의원도 들어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표발의자는 무소속 국회의원이며 기타 다른 정당 소속 의원도 포함되어 있으니, ‘민주당이 교회폐쇄법을 만들었다’는 말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어떤 위험성이 있을지에 관한 논의는 당연히 가능하고 또 충분하고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폐쇄법’ 혹은 ‘교회해산법’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자제해야 합니다. 정확히 ‘민법개정안 반대’라고 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허구가 아니라 진리에서 기인함을(요 8:32) 안다면 더욱 사실에 입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오랫동안 말도 안되는 선전·선동으로 시달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 때문에 식인집단이라는 공격을 받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까?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에 특히 한국교회 초창기에 얼마나 끔찍한 핍박을 감내해야 했습니까? 서로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호칭 때문에 근친상간집단으로 몰려서 숱한 수모와 핍박을 견뎌야 하지 않았던가요?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종교는 아편’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져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고하게 목숨까지 잃었습니까? 이처럼 교회는 그릇된 선전과 선동의 피해를 누구보다 많이 입으며 생존해 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웬만한 거짓말은 이제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교회를 향한 근거 없는 억측과 악의에 찬 선전과 선동이 존재합니다. 그래도 교회만은 진리의 수호자로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만은 사실의 보루(堡壘)로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먼저 교회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가짜뉴스가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고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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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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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교회건축의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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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외관은 교회의 대외적 이미지를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과거 중세 교회와 성당은 높은 첨탑과 과대한 형태, 벽돌재료, 스테인그래스의 장미창등이 교회당을 알리는 주요 모티브였다. 이런 양식은 교회의 상징성을 힘의 압도적 스케일로 교회를 표현해 왔다.
현재에도 아직 이런 양태의 교회 외관이 종종 눈에 띄고 있으며 도시내에 차별화된 장소성을 제공하고 있다. 과도한 스케일의 건축형태는 유지관리비와 운영에 많은 비용이 지출되곤 한다. 교회다움의 건축표현이 크기와 높이 특정한 재료로 표현되는 것은 결국 획일화의 주된 요인이 되곤한다. 과거 교회가 전국이 거의 비슷한 형태로 인식되어 지는 것은 이런 상징성 때문이다. 그러나 미학적측면에서 교회라는 상징적 언어가 리얼리티에서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성스러움의 표현은 보다 더 사실적이면서도 인상적인것이 된다. 반드시 교회 다움의 외적 양식은 교회가 추구해야할 더 많은 가치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눈에 보이는 상징체계는 기호적 표현에서 체험적 상징으로의 전환이될 때에만 획일화를 극복할 수 있다. 체험적 내용들은 외부에 수공간이 도입부에 설치된다면 그 공간은 성도가 예배당으로 진입하는데 예배의 준비공간적 기능을 제공한다. 우리가 물을 보면 감성적으로 순화되어지고 마음속의 복잡한 것들이 다 사라지고 순화되어진다. 예배자가 예배드리기 전에 자기 마음을 정돈하고 정화시키는 전이공간과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이런 유형의 공간이 체험적 공간이며 이런 유형은 강한 장소성의 상징을 부여한다.
건축에서 상징은 참여 기능을 가능케한다. 물이 가진 성경적 의미는 풍요와 재생, 순화, 정결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공간을 바라보면서 그런 의미로 참여하게 된다. 수공간의 풍요를 내 마음에 투영시키고 정결을 의식적으로 다짐하게 된다.
교회건축의 상징을 보여지는 체계에서 참여되어 지는 것으로 바뀔 때 그 공간은 가장 의미있는 공간이 된다. 또 하나의 상징성이라면 교회건축이 지역사회에 열려있는 것이 최고의 상징이다. 열려있는 것의 이미는 참여이며 동일화이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열린근린센터가 되고 지역 문화공간이 될 때에 지역사회는 본질적으로 교회와 유지적 연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은 상징이 지향하고 있는 참여의 의미를 잘 반영하게 되는 것이며 그 교회는 가장 장소성이 강한 랜드마크가 된다. 랜드마크는 원시시대 부족이 자기 땅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구분해 놓은 경계석이다. 이 랜드마크가 자기소유를 구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주변과의 연계와 소통을 의마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어느지역에 건축되어 지던지 그 주변과 끊임없는 소통과 공유를 통해 존재를 규정해야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삼으라는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대적인 건축의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즈음 신도시 재개발지역의 교회모습은 건축의 상징성을 어떻게 구현해 내는 것이 랜드마크적일까 하는 과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이끌게하는 직접적 모티브이기때문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열려있는 교회공간의 체험이 역동적으로 발흥되는 공간의 내용들을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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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