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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희망
    최근에 터진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충돌을 포함해서 도처에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들과,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는 환경적 재앙들, 빈발하는 범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와 만연하는 우울증과 불안증세 그리고 늘어만 가는 과잉행동결핍장애와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병리적 현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관적 시각을 가진 이들은 지금 우리가 절망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최근 등장한 “절망사”(絶望死, Deaths of Despair)는 ‘절망사회’의 인상적인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Stewart Deaton)이 제기한 개념인데, 경제를 넘어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양극화와 이로 인한 박탈감과 자괴감과 소외감으로 말미암아 자살이나 약물 및 알콜 중독에 따른 사망이 급증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국가 차원의 절망사 연구가 있었습니다(2022년 6월,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보고서). 이런 지경이라면 우리에게 아니 인류에게 희망이란 존재하는 걸까요? 절망은 현대에 비로소 등장한 신조어가 아닙니다. 고비마다 사람들은 절망을 외쳤습니다. 중세의 흑사병은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절망이라는 더욱 치명적인 질병을 안겼습니다. 151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로마를 방문했던 루터는 당시 실상을 목격하고 얼마나 절망했던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란 말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인적·물적피해와 함께 끔찍한 참호전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을 혹자는 “절망의 전쟁”이라 불렀습니다(존 엘리스, 자크 타르디, 반철진). 75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많은 이들을 그야말로 절대 절망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를 ‘희망’이라 불렀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아서 더 절망적인 상황이 무수한 성경에는 절망 대신 소망이란 단어가 들꽃처럼 피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자 한병철은 희망이란 세계내부 사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정신의 상태 혹은 영혼의 차원이라 정의합니다(『생각의 음조』(2024), 142). “무엇보다 이 희망은 비록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이 외적 조건이 절망적일지라도 살아갈 힘을 주고 항상 새로이 시도할 힘을 주는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이 감옥에 있을 때 쓴 서신(Briefe an Olga)에 나오는 말인데, 역시 감금상태에 있던 바울이 남겼던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빌 1:20)라는 표현과 내용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하면 희망을 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림이라는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희망을 역설적이라고 보았습니다. “희망은 아무런 활동 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이뤄내려는 비현실적인 갈망도 아니다. 희망은 도약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를 위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와 같다.”(『희망의 혁명』(1968)) 희망하면 흔히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와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희망의 철학자요 기독교적 실존주의자인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 일컬었는데 ‘걷는 인간, 길 위의 인간, 여행하는 인간’이란 의미로서 희망의 여정을 걸어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희망하다’는 “현실에 신용을 부여하는,” 즉 “현실에 믿음을 거는, 그럼으로써 현실이 미래의 약속이 되게 하는” 행위입니다(한병철, 139). 그렇지만 현실에 기대를 걸 수 없는 상황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희망의 신학자’라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1926-2024)이 그랬지요. 17세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나갔다가 전쟁포로가 되어 3년을 수용소에서 지냈습니다. 신용을 줄래야 줄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누군가 그를 찾아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찾은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찾았습니다.” 그를 찾은 존재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이 희망과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를 믿습니까? 부활을 믿습니까? 영생의 약속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안심하세요. 당신에게는 절대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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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소강석 칼럼]평화에 이르는 새 길
    명지대학교 정성철 교수께서 쓰신 ‘국가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해서 로버트 저비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국가는 왜 싸우는가, 사회평론 아카데미) 로버트 저비스에 의하면 나선형 모델(Spiral 모델)과 억제 모델(Deterrence 모델)이 있습니다. 나선형 모델은 안보 딜레마에 기초하여 충돌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두 국가가 모두 자국의 안보를 위해 방어적 행동을 취하지만 이는 상대의 안보 불안을 야기 시킨다고 합니다. 결국 두 국가는 위기의 고조를 막지 못한 채 충돌에 이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모델은 유화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북한 모두 평화를 희망하더라도 오해와 불신으로 상대의 방어적 행위를 공격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경우 남북한은 번갈아 가며 그러한 오해에 따른 대응을 취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충돌로 치닫게 되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비극은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갈 때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억제 모델의 관점에서 평화는 상대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상대의 도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결국 양측은 대규모 분쟁에 휩싸이고 맙니다. 상대방이 군사적 수단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봉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결의에 찬 국가들 사이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죠. 상대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 6.25 전쟁의 발발도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 따른결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한의 공격이 엄청난 피해를 불러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였을 때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왔다는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한반도 평화를 지향해 왔습니다. 하지만 상반된 가정에서 기초한 두 입장의 정책제안은 상이하다고 합니다. 나선형 모델에서 국가는 현상 유지를 희망하는 불안한 행위자이지만, 억제 모델에서 상대국은 불만족으로 현상 변경을 노리는 도전적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정성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북한은 오랜 경제 실패와 외교 고립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국가인가? 이라크 전쟁과 후세인 처형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실패 국가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면서 체제 안정이 위협받을 경우 모험적 도발도 감행할 준비가 된 도전 국가인가? 그것도 아니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외부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며 정권 안보에 사활을 건 공격적 행위자로 볼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의 대북 통일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북한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 안보를 추구하는 불만족 국가인가?” 이에 대한 우리 안에서 열린 토론이 합의에 이를 때 저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대북 통일 정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 다. 다소 전문가적이고 어려운 글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던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6.25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의 번영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6.25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안보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새 길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 교회는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9년째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사들이 거룩한 낙수 효과를 이루며 나비효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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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성서연구]구색만으로는 안 됩니다
    몇 해 전 어려서 자라난 동네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넓게 여겨졌던 길이 지금은 좁은 뒷골목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창 축구가 유행하고 있었고, 주 상대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재 한국 축구는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축구 열기는 꼬마인 우리에게도 퍼져서 뒷골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을 찼습니다. 6학년 동호 형이 중심이었고, 나머지는 5학년과 6학년이 섞여 있었습니다. 한번은 뒷골목 축구에 만족할 수 없어서 한참 떨어진 구로초등학교에 갔습니다. 한쪽에서 공을 차고 있노라니까 유니폼을 멋지게 입은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구로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부러운 눈으로 정식 선수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수들은 운동장 가운데서, 우리는 구석의 남은 운동장에서 공을 찼습니다. 그런데 축구팀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더니, 연습 경기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뒷골목에서 공을 찬 우리가 정식 선수들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축구팀 선생님이 어이가 없었는지, 또 오라고 했고, 그 다음 주 토요일에는 다른 학교 축구팀들까지 와서 토너먼트 경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동호 형에게 축구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정도입니다. 구로초등학교 축구팀은 왜 동네 아이들에게 졌을까요? 유니폼에, 축구화를 멋지게 신고, 코치 선생님도 계시고, 포지션별로 선수도 다 있는데, 왜 졌을까요? 그 이유는 진짜 선수다운 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막아낼 수비 선수가 없고, 골을 넣을 선수가 없습니다. 열한 명이 뛰고 있는데, 모두 있으나 마나입니다. 구색은 갖추었지만, 실력은 없었습니다. 흔히 폼만 잡는다고 하지요.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가르쳤고, 지혜로운 자들은 책략을 베풀었고, 선지자들은 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다 갖추었기에, 더 이상의 선지자는 필요 없다고 여기면서,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18절이 이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당시 유다 백성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타락하여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고, 지혜로운 자들의 책략은 제 눈에 안경이었고, 선지자들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양 포장했습니다. 예레미야만이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시대에 여호사밧과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치는 전쟁을 하러 가기 전에 선지자들에게 묻던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백여 명의 선지자가 승리를 예언했습니다. 그때 <미가야>만 패배와 왕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가야의 예언처럼 아합왕은 부상했고, 결국 죽었습니다. 수가 많아도 소용없습니다. 진리가 중요합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면 어리석은 군중은 눈이 어두워서 진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목회자 중에는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분위기와 성도들이 좋아하는 분위기에 맞추어야 하는지, 목회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 해야 하는지를 갈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신앙 양심을 따라 행하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홀로 있더라도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투브 등의 조회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씀이 진리인지가 중요합니다. 조회수에 속지 말고, 진리를 분별하는 <영들 분별하는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진리 위에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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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김철봉 목사]한 사람의 선견지명(先見之明)
    훌륭하신 교장 선생님 한 분 때문에 ‘한 사람의 중요성’을 어릴 적부터 나름대로 기억하면서 성장하고 살아온 것은 큰 축복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관례 중 하나가 매주 월요일 아침 전교생 조례가 운동장에서 열리는데 교장 선생님의 훈시(訓示)가 늘 있었다. 6년 동안 방학을 빼면 거의 240여 회 훈시를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면서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 선생님의 훈시는 딱 한 가지 ‘한 사람의 중요성’이다. 프랑스 농촌지역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임기를 마치고 전근을 가시는데 그동안 정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이 재배하여 만든 포도주를 ‘송별선물’로 선생님께 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감사인사를 하면서 포도주병들을 마차에 싣고 마을을 떠났다. 새 임지에 도착하여 짐을 풀어 정리를 한 후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선물로 받아온 포도주병 한 개를 열었는데 뜻밖에도 그냥 맑은 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농사일로 바쁘다보니 실수로 빚어진 일이겠거니 여기고 다른 병을 따보니 역시 맹물이었다. 의아해하면서 선물 받은 나머지 병들을 다 열어보았다. 이런 것을 기적이라 할까? 우연이라 할까? 실제 포도주병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맑은 물 병들이었다. 그 순간 교장 선생님과 가족들의 심경이 어떠하였을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우리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한 사람쯤 적당히 하거나 속여도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잘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 한 사람이 나쁜 생각을 가지는 순간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 시절이 근 65년 전이지만 초등학교 때 그 날 들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시는 지금까지 내 평생의 교훈으로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실로 초등학교 6년 과정에서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라고 늘 감사하고 있다. 6.25 제75주년(1950.6.25.-2025.6.25.)을 맞으면서 나는 특별한 두 인물을 묵상한다. 한사람은 김종오 장군(1921-1966)이다. 역사책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50년 6.25전쟁 초기, 국군은 기습남침한 북괴군에 연전연패 하면서 38선을 버리고 한강까지 후퇴하고 있을 때 유일한 승전보가 들려왔다. 춘천지구를 지키던 김종오 대령의 6사단이 9,300명의 병력으로 4배나 많은 3만 7천명 되는 북한2군단(3개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 쾌속연대)의 압도적인 대규모 침공을 막아내고 승리하였다. 북한 2군단은 춘천을 점령한 후 그 기세를 몰아 서울을 포위 공략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북한군 최정예 부대였다. 압도적 병력차이, 무기 열세, 짧은 방어선이라는 치명적 단점에도 6사단은 김종오 사단장(당시 대령)의 전투지휘 아래 결국 승리하였다” 무질서하게 맥없이 패퇴하던 다른 사단과 달리 질서, 사명감, 치밀한 전략, 애국심으로 훈련된 6사단은 풍전등화의 우리 조국을 구해낸 일등공신이었다. 역사가는 다시 강조한다. “이 사람마저 졌더라면 미국이 참전하기 전 이미 대한민국은 패망하고 끝났으리라” 훗날 6.25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메튜 리지웨이 장군도 이런 회고를 남긴다. “다른 한국군 부대들도 6사단장 김종오 대령처럼 준비했더라면 적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 한 사람은 손원일 해군 제독이다. 1948.8.15.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으나 손 제독에게 맡겨진 한국해군에는 전투함이 전무하였다.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던 손 제독은 전투함 한 대 만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1949, ‘해군전투함 구입 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해군 간부들부터 모금 운동을 펼쳤다. 부인 홍은혜 여사는 장교부인들과 삯바느질까지 하면서 기금마련에 동참하였다. 눈물겨운 우여곡절 과정 끝에 미 해군이 폐기해체하려던 함정 한 척을 깎아서(2만불 요구) 1만 8천불에 구입, 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을 생각하여 손제독이 직접 ‘백두산함’이라 이름 지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 해군에서 이미 그 함정 이름을 ‘Whitehead’로 부르고 있었다니 신기하다. 우리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은 북한은 6.25 남침 전에 미리 북한 「해군육전대 600명」을 무장 수송선에 태워 부산항을 기습침투, 부산을 장악하기 위해 6.25 밤 9시경 부산 앞바다에 도달하였다. 북의 이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우리나라는 어찌 됐을까? 미약한 육군은 모두 38선을 중심으로 배치돼 수도 서울을 방어하고 있었으니 북의 특공대가 남쪽에서 부산·경남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대혼란을 일으켰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비극으로 끝나버릴 수 있었다. 손 제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눈물겹게 장만한 백두산함은 마침 그 시간 남해안을 순찰하던 중 괴상한 정체불명의 선박이 부산항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급거 부산항 쪽으로 항해, 마침내 북의 괴선박을 발견하였고 용감하게 백병전까지 전개하여 마침내 괴선박과 북한해군육전대 600명을 수장시켰다. 손 제독의 혜안으로 마련된 백두산함을 이끌고 부산항을 지켜낸 그 당시 해군 전투지휘관은 최용남 함장과 최영섭 대령(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선친)이다. 최영섭 당시 갑판사관의 전투무용담은 혁혁하였다. 한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사실은 나라를 구한 6.25의 그 영웅 손원일 해군 제독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손정도 목사의 장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이토록 아름다운 대한민국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낸 눈물겨운 역사의 뒷면에는 <한 사람의 위대한 헌신과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깊이 주목해야 할 것이다(요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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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6
  • [은혜의 말씀]신망애
    성도의 삶은 믿음, 소망, 사랑 3가지 면에서 진단해 볼 수 있다. A. 믿음이 없이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주를 기쁘시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가 없다. ②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믿음이 없으면 진격을 할 수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쁜 것이다. ③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 동행, 연합, 닮음이 불가능하다. ④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찾을 수 없다. 믿음이 있을 때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사모하고 부르짖는다. ⑤ 믿음이 없이는 상을 받을 수가 없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주님을 믿을 때에 목숨을 다하여 충성할 수 있다. 결국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에 믿음이 크도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라고 하셨다. 믿음만큼, 믿음대로, 꿈 꾼 대로, 소원대로, 말한 대로, 심은 대로 되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대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다. 믿음도 자란다. 믿음에도 알통이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근육을 길러서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된다. B. 소망이 없으면 소망이 없으면 인내할 수가 없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루살이 같이 막가파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 부활소망이 없으면 성도의 노력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천국 소망을 가지고 나그네 세월에 인내하고, 참고, 견디어 낼 수가 있다. 현재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장차 받을 하늘의 상급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다.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기다리며 견디어 낸다. 성도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천국 계단을 묵묵히 올라가야 한다. C. 사랑이 없으면 ①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②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③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④ 사랑의 동기가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충고도 득이 안 되고 독이 될 뿐이다. 믿음이 역사하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이 수고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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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25-06-18
  • 특정인 임기를 연장시키려는 꼼수라고....?
    최근 고신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이사장 정태진 목사)가 고신언론사 사장 정년을 65세에서 68세로 연장하는 안을 금년 75회 고신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총회 일부에서는 현 최정기 사장의 임기를 연장시키려는 꼼수 아니냐는 지적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총회 규정을 살펴보면 최 사장은 나이연장에도 불구하고 자격이 되지 않는다. 총회규칙 제23조(직원임명) 3항에는 ‘고신 언론사 사장과 고신총회세계선교회 본부장은 임기가 3년이며 1차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단 고신언론사 사장의 정년은 65세로 하고 고신총회세계선교회 본부장은 68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 사장의 경우 이미 한차례 연임을 했기 때문에 후보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왜 이 시점에 언론사 사장 정년을 늘리는 것이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유지재단 이사장인 정태진 총회장은 “최 사장과 전혀 상관없고, 다른 기관과 연령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회세계선교회 본부장의 임기가 68세이기 때문에 여기와 맞추기 위해 정년을 연장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당사자인 최 사장도 “그런 소문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자격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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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5-06-16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우리 아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몇 달 전에 읽은 책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다시 꺼내 들었다. ‘다시, 공부 다시, 학교’ 주입형 학습에서 활동형 학습으로 바뀐 교육 현장을 추적하면서 ‘지식 습득 과정’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의 핵심은 단순히 현재 교육의 문제점을 의문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대안 및 해법을 밝히고 있다. 한국은 현재 여러 교육 선진국의 영향으로 주입형 학습에서 활동형 학습으로 정책을 바꾸었지만, 실행되는 학교 교육 현장에서 교육 수준의 하향, 교육 불평등 등의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는 시점이다. 이 책은 핀란드, 영국 등의 실제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 교육이 어디로 가야 할지 공격적으로 제시한다. 교육 불평등을 줄이면서 ‘지식’과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강의형 지식 교육(학생들의 피드백 혹은 여러 활동을 포함한)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마지막에 교육의 소명, 교사의 소명을 거론하며 다시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과 우리 아이들 생각이 났다. 나는 애쓴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느날 우리 아이들의 신앙을 점검해보면 아닌 것 같고, 주일학교를 빠지지 않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복음이 심겨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화를 나눠보면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경우가 있어 항상 고민 속에 있다. 그래도 이 책은 위에 언급한 대안을 소개하며 공교육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교사가 변하면 아이들이 변하고, 결국 다시 학교가 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적용시키면, 주일학교 교사의 변화가 아이들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과 부모가 변하면 자녀는 달라진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국에는 ‘다시, 복음 다시, 교회’이며 더 나아가 ‘다시 부모’이다. 여름의 출발점이다. 여름성경학교 등 교회에서 마련한 여름 신앙 프로그램과 더불어 우리 가정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즐겁고도 뜨거운 신앙을 키워나갈 수 있는 일들을 계획해야겠다. 다시 복음 앞에 마음을 굳게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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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5-06-02
  • “지켜보고 있다”
    대선이 임박하면서 목회자들에 대한 선거법 위반 신고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김용민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평화나무는 선거철에 공명선거감시단을 운영, 목회자들의 설교를 모니터링 하면서 선거법 위반 사례가 있을 경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를 하고 있다.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공직선거법 준수는 분명 중요하고, 지켜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설교를 모니터링 하면서까지 중앙선관위에 신고를 남발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최근 경찰에 압수수색을 당한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했다. 그런데 평화나무가 최근 3차례나 더 손 목사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중앙선관위에 신고를 했고, 중앙선관위도 부산광역시 경찰청에 고발 조치했다. 세계로교회와 손현보 목사가 추가 압수수색을 당할 가능성도 커진 상황이다. 그런데 김용민씨의 이런 행동 자체도 정치편향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과거 김 씨는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적 있고,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낸 인물이다. 또 한국교회를 위하는 척 하면서 교회를 조롱하는 모습에 많은 교계 인사들은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막말은 신앙인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다는 수준이다. 평화나무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는 측면에서 ‘정치편향적 논란’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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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2
  • 이단 피해자들 함께 연대
    세계복음화전도협회(류광수, 이하 다락방)에서 탈퇴한 인물들과 피해자들이 모여 결성한 코람데오연대가 이단사이비 피해자를 돕겠다는 설립 취지에 따라 기독교복음선교회(JMS) 탈퇴자와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보호와 지원 활동에 나섰다. 코람데오연대는 26일 공식 입장문을 통해 “JMS 피해 생존자들이 겪는 고통과 고립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이라며 “피해자들의 치유와 재기를 돕는 실질적인 활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코람데오연대는 이단·사이비 단체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피해 입은 이들을 위한 연대 조직으로, 류광수 다락방의 피해자와 탈퇴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출범 이후 코람데오연대는 실제 이단·사이비 피해를 경험한 당사자들이 전면에 나서며, 제도적 한계를 넘어선 당사자 중심의 보호 시스템 구축에 힘써왔다. 이번 JMS 피해자 지원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연대 측 관계자는 “다락방과 JMS는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며 “두 단체 모두 피해자 대부분이 수년간 자신이 겪은 일이 범죄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신앙으로 포장된 구조적 가스라이팅은 단순한 교리 차이 문제가 아니라, 인권과 생존의 문제임을 사회가 직시해야 한다”며 “사이비 종교가 남긴 상처는 피해자 개인의 삶에 깊이 새겨져 있고, 이 사회에 큰 흉터를 남기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더 이상 방치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이 사회가 함께 연대하며 회복을 돕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코람데오연대는 향후 JMS 외에도 여러 이단·사이비에 대한 피해자·탈퇴자에 대한 지원 체계도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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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2
  • [교회법특강]주일 예배는 왜 두 번일까?
    주일 예배는 왜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일까? 최근 한 번만 드리는 교회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두 번 드리는 곳이 훨씬 많다, 일부 교단을 제외하고는 헌법(교회정치, 예배지침)에서 주일 예배를 두 번 드릴 것을 직접 규정하지 않음에도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주일에 예배를 두 번 드려왔다. 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어떤 이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린 구약의 제사에 기원을 찾지만, 이는 억지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에서 주일에 예배를 두 번 드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두 번째 예배 출석은 저조했다. 주일에 두 번째 예배를 드린 전통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개혁 당시 신앙교육을 위해 두 번째 모임이 생겼다. 본래 주일 두 번째 예배는 아이들을 위해 목사가 교리문답(敎理問答, catechism. 성경의 교훈을 요약해서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만든 것)을 해설하는 시간인데 부모도 거기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 공식 예배로 자리 잡았다. 교리문답 전체를 52주일로 구분하여 주일마다 설교해서 일 년에 모두를 해설하도록 했다. 독일의 팔츠 지방은 오후 예배 시간에 교리문답이 설교 되었다. 당시 팔츠 지방은 주일 예배를 보통 오전과 오후에 두 번 모였지만, 도시는 아침 일찍 한 번 더 예배를 드렸다. 주일 예배 외에 주간에도 모였다. 시골은 한 번, 도시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도 예배를 드렸다. 그 외에도 매일 아침과 저녁에 간단한 예배가 있었다. 이 예배는 30분을 넘지 않지만 그래도 성경 본문을 읽고 짧은 설교가 있었다. 당시 교회는 교회 생활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삶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개혁가 칼빈이 목회한 제네바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정오에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네덜란드 교회는 총회(1618-19년)에서 교회정치를 작성할 때, 제68조에서 교리문답 설교를 위해 주일 오후에도 다시 회집할 것을 규정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시 예배위원회는 교리문답교육을 다루고 교리문답을 작성했다. 바로 그 소교리문답을 1907년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교회 신경으로 채택했다. 이를 “성경요리문답”이라고 불렀다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회정치> 제7장(교회예의와 율례)를 보면 주일 공예배에 꼭 들어갈 순서로 찬송, 설교, 성례 등과 함께 ‘성경교육’이 나온다. ‘성경교육’은 1930년 <교회정치>서부터는 ‘성경문답’으로 변경된다. 곽안련 선교사도 ‘성경소요리문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성경요리문답’은 현 예장합동 헌법 <교회정치> 예배 순서에 아직 남아 있다. 예장고신 헌법에도 얼마 전까지 “성경문답”이 있었다. 이같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전통을 따라 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리고, 헌법 예배지침에 ‘성경요리문답’ 순서를 넣었음에도, 정작 두 번째 예배의 기원과 성격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한때 주일 두 번째 예배를 ‘찬양예배’라 불렀다. 일부 교단은 지금도 헌법에서 ‘찬양예배’ 용어를 사용한다. 개신교의 기초를 놓은 종교개혁가들은 왜 두 번째 예배에서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설교했을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바른 교훈 위에 서고, 이로써 교회가 같음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곧 바름과 같음을 위해서다. 진리를 상대화하고 감성을 중시하는 시대에 바름과 같음을 지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주일 예배를 왜 두 번 드리는지 그 이유와 각 예배의 성격에 대해 교회법에서 속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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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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