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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기독교교육-가치를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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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필리핀 어린이들을 위해 컴패션 후원 모금을 해야 하는 거죠?”
어느 날 학생 D가 내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어차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거라면 우리나라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요?”
나는 D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D야, 만약에 말이다. 120년 전, 아니 가깝게 60년 전에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의 누군가 우리를 돕지 않고 자기들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만 생각했다면, 지금의 한국이 있었을까?”
“아니오. 우리도 누군가의 원조를 받았으니 이만큼 된 거겠죠?”
“그래. 목사님은 그렇게 생각한다. 네 말처럼 우리나라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이 많아. 그런데 말이다, 우리나라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으면 해.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생활로 받아들였으면 한다는 거지. 이제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제법 커졌단다. 5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한국이 된 거야. 목사님은 그래서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우리나라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누군가 우리를 도왔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나는 우리 브니엘의 아이들이 그냥 우리만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니라 좀 더 넓게, 특별히 제3세계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나는 너희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뿐 아니라 그들을 춤추게 만들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지독한 가난으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필리핀의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모은 돈이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지금 너희들이 하는 모금은 단지 3천 원이라는 액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망이라는 것을 기억해주면 좋겠어.”
젊은 청년시절 김동호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동호 목사님의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라는 슬로건을 교육의 핵심가치로 삼고 학교에서 가르친 지 어느덧 15년이 다되어간다. 이 문구에 매료되면서 내 삶은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타인 중심의 삶’으로 바뀌었다. 나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복 받게 하는 삶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바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은 나의 목회 철학과 교육 철학이 되었다. 브니엘고등학교와 브니엘예술고등학교에 부임하여 15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목사 선생으로 살면서 줄곧 아이들에게 외쳤던 메시지는 “오천 명분을 먹어 버리는 인생이 아니라 오천 명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외침에 반응하는 제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취업하여 첫 월급을 받고 그 월급의 일부분을 컴패션을 통해, 월드비전을 통해 기부약정했다는 제자들이 소식을 전해오곤 한다.
가치교육은 이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때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난 후 배웠던 삶을 실천에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 교육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교육에서, 그리고 미션스쿨이 해야 할 일은 뭔가를 벌이긴 보다는 일상에서 영향력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 있는 교육들이 현장에서 다 많이 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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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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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 나침반]미키마우스 사역의 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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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몇몇 혁신적인 교회는 자녀양육에 집중하는 베이비부머(Baby Boomer) 세대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그들의 자녀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교회는 전 연령이 함께 예배드리고 교육받던 형태에서, 부모가 예배할 때 동시에 운영되는 주일학교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부모세대들은 자녀로부터 한 시간 정도 해방되어 예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녀세대들은 자신들의 발달수준에 맞는 주일학교 예배와 다양하고 역동적인 프로그램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대부분의 교회는 자녀세대를 발달연령별로 세분화하여, 사역전문성을 갖춘 전문사역자를 고용하였다. 또한 자녀세대들이 발달특성에 맞게 활동할 수 있는 맞춤형 사역공간을 조성하였다. 각 부서의 전문사역자들은 교회의 바깥 영역에서 영유아, 어린이, 대학생, 청년들을 위한 사역을 독립적으로 추진하였다. 부서들은 자체의 비전과 프로그램, 커리큘럼, 예산을 세우게 되었다. 스튜어트 커밍스 본드 박사는 이와 같이 전문성을 갖춘 교육부서의 존재에 대해 ‘귀가 하나뿐인 미키마우스’라고 표현하였으며, 독자적인 교육부서가 증가할수록 미키마우스에 귀가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하였다.
각 부서의 성장을 의미하는 미키마우스의 귀의 증가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2014년 8월 5일, 팀라이트는 자신의 블로그에 ‘교회 밖에 있는 주일학교 아이들(Sunday School Our Kids Out of Church)’라는 제목의 글 마지막 부분에 아주 놀라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잃어버린 세대를 되찾을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역사상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세대를 길러냈다.’ 부모와 자녀세대의 분리된 예배와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사실 사이에 다른 이유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둘 사이에 큰 연관성이 있음 또한 인정해야 한다. 각 부서의 독자성이 커질수록 틈새도 커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 부서의 다양하고 재미있는 활동에 익숙한 아동은 청소년 부서에서 드리는 예배가 힘들다. 또한 청소년 부서에서 자유롭게 예배드렸던 청소년이 어렵고 난해한 설교와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부서 사이의 틈새가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잃어버린 세대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마련한 미키마우스의 ‘귀’가 오히려 가장 많은 영혼을 잃어버리는 곳이 되었다.
그렇다면 교회는 지금까지 구축한 교육부서의 전문성과 독자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여전히 각 연령대에 적합한 사역을 가치 있게 진행해야 한다. 단, 이것만은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각 부서사역은 반드시 교회공동체라는 큰 원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교회 밖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원이 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각 부서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모든 부서들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가정 공동체이다. 따라서 모든 부서가 교회와 한 팀이 되어 동역하려면, 자녀의 일주일의 시간에 최고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부모와 동역하면 된다. 부모를 적극적으로 사역에 동참시켜, 부모로 하여금 자녀들에게 예배의 핵심 메시지를 일상 속에서 전하는 교사가 되게 한다면 틈새는 좁혀질 것이다. 각각의 부서가 가정공동체와 손을 맞잡을 때, 부서간 틈새는 가정이라는 공통분모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좁혀지게 될 것이다. 결국, 자녀세대들은 주일 예배의 한 시간과 일상의 167시간의 틈새가 없는 경건한 일상을 날마다 경험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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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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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엄마가 너희의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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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코로나로 인해 띄엄띄엄 등교하는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와서는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한다.
“내 친구가 그 일 때문에 엄마한테 엄청 혼나고 벌도 섰대. 진짜 슬펐을 것 같아. 내 친구 너무 불쌍해. 그 엄마 너무 했어”
“친구한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니 은별이 친구도 이런저런 부분에서는 잘못한 것 같은데, 그 엄마도 딸이 그렇게 행동해서 기분이 나빴을 것 같아”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의견도 말하려고 시작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이는 이미 100% 자신의 말에 공감하지 않은 나를 향해 불신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도 “그냥 잠잠히 듣기만 할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올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부분적 공감’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면서 깨달은 나의 한계 중 하나는 “나는 누군가를 온전히 100%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나, 내가 낳은 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의 가족은 내게 ‘온전한 공감’ 받기를 원하며 감정을 쏟아 대화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온전히 공감해주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부분적 공감’만 하며 대화의 종착지로 가면 갈수록 내 이야기만 하는 어리석음을 수없이 많이 저질렀다.
특히,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정서적 공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기에 공감하는 척, 마음을 이해하는 척, 100% 경청하는 척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내 것을 아이들에게 주입’ 시켜야한다는 속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람의 내면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는 ‘정서적 지지’이다. 내 편이 되어주는 단 한 사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나의 정서를 100% 공감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단 한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특히 내면이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엄마, 아빠로부터 받는 절대적 공감과 수용이 인생을 건강하게 펼쳐갈 평생의 자양분이 된다.
그런데, 난 사실 공감과 수용이 쉽지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말처럼 그들의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주고 싶은데, 실제 삶 속에서는 나의 정서를 읽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이들의 마음을 100%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오늘부터 연습하기로 했다.
먼저, 아이가 나를 부를 때는 하는 일을 멈추고 아이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 건조기 속에 들어있는 빨래들, 거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책들 등 모두 나의 손을 거쳐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빨리 집안일을 끝내고 아이들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면 아이들이 “엄마”라고 불러도 그 일을 하면서 대충 “어, 무슨 일이니?”라고 흘려보낼 때가 많았다. 아이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훈련부터 시작해보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아이가 부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즉각 반응하기. 물론 쉽지 않았다. 거품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쉴 새 없이 빼다 끼다를 반복했으며 두부 한 모를 온전히 다 써는데 20분이 걸리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절충점을 찾아 처음보다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입장에서 먼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
또한,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하루 10분 정도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이들이 많아서 엄마와의 둘만의 대화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까지는 실천하지 못했지만 지금부터 한 걸음이라도 내딛어 보는 것이다.
사실, 나도 엄마로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어서 아이들의 온전한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 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되는 존재,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 편이라는 정체성을 내가 먼저 인식하고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가치를 마음 속에 담고 노력할 때 아이들에게 나의 진심이 조금이나마 전달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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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세대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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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힘]평생 잊을 수 없는 교사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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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을 기대하며 아이들을 만나길 설레는 토요일 저녁을 보내고 계십니까?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만하는 것이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알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받는 아이들은 분명 그 교사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주일 밤마다 교사가 된 것을 후회하고 내일 만날 아이들을 떠올리며 답답한 마음을 갖는 교사는 똑같이 아이들도 만나고 싶지 않는 교사일겁니다.
그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주중에도 만남이나 카톡으로 소통하는 교사를 아이들은 기억합니다. 그 기억은 평생 갑니다. 물론 매주 공부한 것을 말하라 하면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사에 대해 말하라 하면 따뜻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관계를 통해서 마음을 엽니다. 아이들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습니다. 마음은 진정한 관계를 통해서만 열려집니다.
교회는 수없이 외쳐지는 표어나 말들이 많습니다. 다음세대는 표어나 말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터치로 변화됩니다.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면 시간이 지나고 지속적인 그 선생님의 삶을 통하여 아이들은 마음이 열립니다. 그 열린 마음으로 듣는 복음이 또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여 아이들과 만나야 합니다. 1대1이나 1대2까지는 관계형성에 도움이 되지만 3명이상 만나면 이미 소그룹이 형성됩니다. 아이들과 만남을 조금 어색하셔도 1대1이나 1대2안에서 하셔요. 그리고 무엇인가를 전해주거나 가르치지 마시고 그저 간식함께 드시고 시간을 보내시면 됩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줌(Zoom)으로 만나시고 치킨을 집으로 쏘셔도 좋습니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줌으로 만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합니다.
성경공부시간에 가르치는 성경은 진리입니다.
그 말씀 외에 사람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교사인가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교사, 아이들과 시간과 물질을 들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교사. 바로 그 교사가 아이들을 살립니다.
학생들이 좋아한다고 다 좋은 교사는 아닙니다. 말씀 준비 안 하고 아이들과 항상 놀기만 하는 교사는 직무유기입니다. 그러나 주중에 만남이나 카톡으로 관심과 사랑을 느낀 아이들에게 교사의 말씀은 들리는 말씀이 됩니다. 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들리는 말씀은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는 교사가 있는 한 아직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도 아이들은 그 교사의 헌신을 통해 변화하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음세대는 진심으로 삶을 나누는 교사 한사람을 통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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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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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몸으로 경험하며 가슴으로 느끼는 교육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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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뻘뻘 흘리고 산을 오른 후 시원한 물 한 잔 벌컥벌컥 마시기, 해가 질 무렵 모래를 밟으며 시원한 바닷가의 공기 느끼기, 놀이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다 엄마를 발견한 후 와락 안기기, 보조바퀴를 뗀 후 신나게 두 발 자전거로 달리기>
요즘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육아 프로그램들을 보면 두 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구나!’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것은 돈이 전부가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할텐데…’라는 생각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화려하게 세팅된 키즈카페에서 노는 아이들이 바닷가 모래를 만질 때 느껴지는 오묘한 촉감과 약간의 지저분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이가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부모가 알아서 제공하면 아이는 무엇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을까?
세상은 물질만 있으며 뭐든지 다 이룰 수 있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줄기차게 말하지만, 사실 인간이 인간되는 가장 기본적인, 예를 들어 사랑, 자존감, 배려, 충만과 같은 마음의 자양분들은 물질 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그 다른 요소 중 하나는 대체 불가능한 자신만의 경험이다.
5년 전, 1년 동안 제주도에 살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막내가 100일 정도 될 무렵이었다(막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외출이 가능한 한 달 후부터 여기저기 함께 다녔다). 그 때 나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기’였다. 내가 본 제주도는 발을 딛는 모든 곳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만 가면 환상적인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고, 또 차를 타고 10분 정도 더 가면 저기 오름직한 동산이 반기고 있었다. 절물자연휴양림같은 곳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매일 매일 다른 매력을 뿜어내기에 언제든 가도 새로웠다.
집 안에서 장난감을 갖고는 한 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노는 것을 지겨워하는 아이들이 밖에 풀어 놓으면 한 두시간은 물론이고 한 나절 내도록 놀고 또 노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을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밖’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밖에 나갔을 때 마음껏 상상하며 어디든 뛸 수 있는 자연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싸한 자연이 아니라도 괜찮았다. 아이들이 직접 경험하고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만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최적의 교육 장소였다.
최근에 오랜만에 바닷가를 찾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아직 해가 떠 있는 것을 보며 “오랜만에 아이들과 바닷가에 가서 시원한 바람을 맞자”며 온 가족이 갑자기 바다로 간 것이다. 바닷가에 도착 후 처음에는 그 주변을 산책했다. 새롭게 꾸민 구름다리(?) 같은 것도 건너고, 돌도 몇 개 주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아이들이 모래 위를 걷고 싶다고 해 양말을 벗고 본격적으로 바다 곁에서 맴도는 순간 아이들의 숨은 뜻이 드러났다.
“엄마, 바닷물에 발만 살짝 담그면 안될까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바닷가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은 그 순간 이미 아이들이 바닷물에서 놀고 있으며 결국 옷이 다 젖을 것을 경험적으로 예상해야 한다.
‘그래, 너희들이 여기까지 왔으면서 어찌 그 말이 나오지 않나 싶었다’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아직 날이 추우니 10분 정도 정말 발만 담그자”라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받아내고 아이들을 물로 보냈다.
“오빠, 진짜 시원하지. 우리 안으로 더 들어가자”부터 시작해 “우리 물이 오면 4명이 동시에 뛰는 거 하자”까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난치고 웃고 떠들며 달이 저 멀리 보이지 않을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그렇게 놀았다.
“엄마, 코로나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오늘처럼 매일 매일 밖에 나가서 놀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한결같이 밖에서 또 놀고 싶다며 다음을 기약한다. 그리고 그 날 아이들의 일기장에는 “너무 재미있었다” “또 가고 싶다” “바다가 너무 좋다” 등 기분 좋은 단어만 가득 써 놓았다.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밖에서 놀기’. 나는 앞으로도 상황이 되는 한 이 교육 방법을 추구하며 몸으로 경험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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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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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 나침반] 1/168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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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8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분모 168은 하루 24시간에 일주일을 곱한 시간의 총합입니다. 즉, 168은 우리가 일주일 동안 살아가는 일상의 시간입니다. 분자 1은 자녀들이 신앙교육을 위해 보내는 평균 시간입니다. 이 한 시간은 주일에 주일학교 예배와 후속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일주일 168시간 중 평균 1시간 영적인 영향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학교는 일주일에 겨우 한 시간 가량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의 나머지 시간인 167시간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생애의 주기(영아기-노년기)마다 부모의 미세한 표정과 반응을 포함한 모든 생활방식과 태도에 강력한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가는 자녀에게 그대로 전수되며, 그것은 자녀들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영향력이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악을 쓰고 대든다고 고민하는 부모와 상담을 해보면, 문제의 원인은 바로 악을 쓰고 싸우는 부부에게 있었습니다. 서로를 무시하고 공격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는 자신의 부모와, 미래의 가족에게 똑같은 공격성을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사는 아버지 가인의 영향력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예배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는 일상 속에서 결코 하나님을 찾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가인의 자녀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창세기 4장 16절 이하에 보십시오. 가인의 자녀들 역시 하나님이 없는 일상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오늘 하루 어찌하면 나의 이름이 드러날까? 어찌하면 즐겁게 살아갈까? 어찌하면 편안하게 살아갈까?’를 궁리하며, 그것을 위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일상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아버지 셋의 자녀들을 보십시오. 겉으로 보기에 웅장한 성도, 화려한 업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고 길렀습니다. 자녀들과 씨름하는 바쁘고 분주한 일상의 자리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동행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영향력은 자손 대대로 전수되어 타락한 세대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은 노아에게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가족들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게 하려고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과중한 업무를 해내며, 틈나는 시간은 각종 미디어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갑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노스리지(CSUN) 연구에 따르면 가정에서 부모들과 자녀들이 나누는 ‘의미 있는 대화’는 주당 평균 3분 30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과 교감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결과입니다. 크리스천 부모들은 다를까요? 대답은 생략하겠습니다. 크리스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전혀 발휘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미디어의 노예가 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부모들, 그리고 미디어로부터 강력한 영향력을 받고 있는 자녀들! 지금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자녀들과 유일하게 서로의 표정을 바라보며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는 부모입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주 앉아 말씀에 반응하는 시간을 꼭 마련하셔야 합니다. 교회지도자들은 이를 위해서 부모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167시간의 일상이 되도록 교육하며 적극 도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자녀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부모의 일상으로부터 생명의 영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부모들이 일상 속에서 자녀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족중심의 신앙교육 컨텐츠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러한 시간은 세상의 강력한 영향력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생명의 고자극이 되어서 부모와 자녀의 삶을 형통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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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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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하나님 이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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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마지막 주일 이삭교회 고등부 교역자로, 교육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온천제일교회를 사임하고 브니엘고등학교 교목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교회를 찾던 중 평소 좋아했던 정진섭 목사님(이삭교회 담임목사) 밑에서 사역을 하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목사님께 부탁 전화를 넣었다.
“목사님, 저 좀 써주십시오. 지금은 이삭교회에 제가 섬길 자리가 없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에 집중하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리가 비면 저 좀 불러 주십시오”
전화를 드린 그 주간에 사역을 잘 하시던 부목사님이 갑작스럽게 사임을 하시게 됐고 학교 부임한지 한 달 만에 긴급으로 이삭교회에 부임을 하게 됐다.
내 앞에 사역을 했던 목사님이 사역을 잘 하셨던 것 같다. 교사들과 학생들의 신망이 높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갑작스런 사정으로 잘 하던 부목사가 사임을 하면서 듣도 보도 못한 목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임을 하니 고등부 전체가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양이 마치 내가 잘 있던 사람을 밀어낸 분위기였다. 첫 교사모임 분위기를 아직 기억한다. 쌔~한 분위기, 요구조건만 늘어놓던 교사들의 모습, 한 쪽에서는 ‘당분간 우리에게 웃음은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는 말들. 왠지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부임한 첫 주일에도 고등부 예배 대표 기도를 하던 집사님이 사임한 목사님에 대해서는 눈물로 기도를 하시는데 그날 부임한 목사인 나에 대해서는 기도를 하지 않기에 그 때의 난감했던 기분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이때는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기댈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동네북 같은 신세였다. 첫 예배를 드린 주일 고등부 아이들의 숫자가 20여명 남짓 됐다. 내 사역이 원래 항상 바닥칠 때 부임하는 것이 주특기였던지라 하는데 까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설교와 제자훈련에 집중하고 아이들하고 친해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스럽게 학교에서 아이들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교목실을 찾아 주고, 와서 농담하고 놀다가 가고, 그리고 몇 안 되는 이삭교회 아이들이 찾아와서 말동무 해주며 그렇게 학교와 교회에서의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이들의 지지가 늘어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도움을 받은 아이들도 늘어났고, 건빵으로 인해서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아이들도 많았다.
2008년 4월 20여 명되던 아이들이 8월을 넘어서면서 70-80명의 인원으로 급성장을 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교회로 모이기 시작한 아이들이 제자훈련을 받고, 토요 기도회, 주일예배에 시간이 지나도 열기가 식지 않고 1년 이상을 계속 이어갔다는 것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2009년 세례식을 하는데 고등부 아이들 50여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대부분 브니엘의 아이들이었다. 세례 받는 모습을 보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나는 이 아이들 전도한 적도 없고, 교회 오라고 한 적도 없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찾아와서 교회를 나오더니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이게 뭡니까? 하나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첫 수업에서 말했던 것처럼 한 번도 전도를 한 적도 없고, 교회 이야기를 한 적도 없기에 나는 ‘하나님 놀랍습니다. 하나님 정말 놀랍습니다’하는 고백만이 나올 뿐이었다. 이삭교회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청소년들이 세례를 받은 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선 글들과 같이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청소년들은 사람보고 예수 믿는다. 그리고 그 사람 뒤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더라는 사실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교회학교가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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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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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 나침반]부모를 일으켜 세우는 교회학교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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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Aporia)라는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을 뜻합니다. 즉, 더 이상 길이 막혀서 나아갈 수 없는 상태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는 지형적 특성상 항해술이 발달했는데, 선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다가 좌초되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아포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2014년 7월 28일 생존학생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더 위급한 상황에 대한 지식이 많으니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선실에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준 어른은 없었습니다…” 아포리아 상황에서 그 누구도 아이들을 이끌어 출구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골든타임은 이미 지나갔고, 수많은 자녀들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교회와 가정의 신앙교육 현장은 아포리아(Aoria) 상황입니다. 수많은 교회학교 문은 닫힌 지 오래되었습니다. 설령 교회학교가 현장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드리는 상황은 예전과 다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를 지키며 앉은 현장에서는 예배와 소통의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설교자와 선생님의 표정을 보지 못하여 더욱 주의가 산만하며, 신나는 대그룹 활동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아예 진행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자녀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잘 드리고 있을까요? 말씀을 잘 전수받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은 교회교육 현장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어린자녀가 지금 당장 복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린자녀를 단지 교회교육의 대상으로만 봅니다. 즉, 어린자녀를 지금 당장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려내야 할 성도로 보지 않고, 복음을 연습하고 예배를 연습해야 할 교육연습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부모님들은 코로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코로나만 종식되면, 자녀의 신앙교육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녀의 영혼구원에 대한 절박함이 없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코로나키즈들이 교회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지 못하는 현실에 가슴을 치며 몸부림치는 부모들이 없습니다. “얘들아! 여기가 생명의 출구란다. 어서 나가자!”라고 외치며 죄에 빠진 자녀의 영혼을 구해내는 부모가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하루속히 절박함과 시급함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부모들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무기력함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이에 자녀들의 영혼을 구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지나가버리게 됩니다. 여호수아 이후의 자녀세대들이 그러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1세대들은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만난 하나님을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 2장 10절 말씀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놀라운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생생하게 경험했던 세대의 자녀들이 여호와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비참한 일이 발생하였습니까? 그들이 자신들이 만난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전혀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공기 비상사태가 되면, 어린자녀를 동반한 보호자는 반드시 보호자 자신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한 후에 자녀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야 합니다. 보호자가 살아 숨 쉬어야만 어린자녀를 숨 쉬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는 쓰러져있는 부모님들의 영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일에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녀세대들의 마주하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 바로 부모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부모들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자녀들에게 생명의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도록 지원하며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생명의 능력으로 일어선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을 이끌고 생명의 출구로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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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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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개독이 기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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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독.
어느새 이 단어는 낯익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인들이 영향력을 잃어버린 순간 ‘기독’은 ‘개독’이 되어 버렸다. 14년전 브니엘고에 부임했을 당시 브니엘의 아이들은 브니엘고에 배정되는 순간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아이, 재수 없어!’ 첫째는 기독교 학교라는 이유이고, 그 다음이 교통이 안 좋다는 이유이고, 마지막으로 소문이 안 좋다는 이유이다. 심지어 브니엘을 브니헬(hell)로 부르는 아이들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학교에 부임한 이후 줄곧 나의 목표는 개독을 기독으로 다시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개독이 다시 기독으로 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된다. 기독 교사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자연스레 개독은 기독으로 바뀔 것이다.
간혹 제자들 중 학생으로서 하면 안 될 일을 하다가 적발이 되어서 경찰에 잡히는 경우가 있다. 이때 집에 연락할 가족이 없든지, 도저히 집에 연락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제자들이 마지막에 보호자로 선택하는 사람은 나였다. 그렇게 경찰서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렇게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얻게 되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아웃사이더라고 부를 수 있는 녀석들이 목사의 편이 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건들거리는’ 녀석들이 나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고개만 까딱하던 녀석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거의 조폭의 ‘형님급 인사’로 허리를 숙였다.
사실 이들은 내가 수업을 할 때 가장 건들거리면서 방해만 하던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기 친구들을 도와주고 나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스스로 들을 준비를 하고, 나와 눈 맞춤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학교 욕을 하거나, 교회 욕을 하는 게 아니라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들이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날 이후 J가 말했다.
“목사님 이제 개독교라고 안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교회 잘 나가 보겠습니다.”
물론 J는 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3년 내내 잊을 만하면 주일 예배 때 나타나 뒷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가곤 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변화였다. J는 졸업할 때까지 보호감찰을 받으며 부모와 교사의 속을 참 많이 썩였다. 졸업도 하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2,3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포기하지 않고 잡아 주셔서 무사히 졸업을 했고, 군대를 다녀왔고 이제는 철이 들었다. 그는 군대에서 가끔씩 내게 전화를 했다.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시커먼 사내 녀석이, 그것도 까까머리 군인이 보고 싶다고 하니 몸에 닭살이 돋기는 했지만, 마음은 무척이나 흐뭇했다. 이처럼 더이상 개독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고, 고비의 순간에 교회를 찾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삶이다’라는 교훈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전도와 학원의 복음화가 목적인 삶이 아니라, 개독에서 기독으로, 브니헬에서 브니엘로 부르는 아이들이 늘어나기를 기도하며 ‘몸으로’ 승부하고 있다.
한 제자가 페이스북에 남긴 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싶다.
“교목 샘. 저 기억나세요? 고등학교 때 제일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화가 나서 유리를 깨고, 팔에 유리를 꼽은 채 상담하러 갔더니 목사님께서 그걸 또 하나하나 빼 주셨던 거였어요. 잘 지내고 계시죠?” 그렇다. 아이들은 어떤 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를 기억하더라는 것이다. 결국 개독이 기독이 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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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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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하나님, 우리 엄마 이번 책 많이 팔려서 맛있는거 많이 사줄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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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1인 출판사를 하고 있다. 아직 출판사가 자립할 상황이 아니라 다른 일도 이것저것 하지만 원래 나의 주 업무는 출판이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책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을 잘 알아서 내가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 글을 쓰거나 교정을 보고 있으면 “엄마, 이번에는 무슨 책 나와?”라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아울러, 몇 권의 책을 출간하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은 엄마가 책을 새롭게 내도 그다지 큰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월 31일, 새 책 출간을 앞두고 그 전 주일에는 밤에 거의 잠을 못자며 마지막 작업을 한창 하고 있었다. 그 날 밤에도 아이들이 엄마가 바쁜 것을 아는지 스스로 샤워를 하고 자기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중학교 1학년인 큰 아이와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가 나의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빠, 엄마 이번에 새 책 나오는가봐. 잠도 못자고 엄청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책이 나오면 뭐해? 누가 그 책을 읽는다고…”
이 말을 듣는 순간, 큰 아이에게 당장 뛰어가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엄마 책을… 뭐라고…”라며 큰 소리치고 혼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큰 인내심을 발휘해 참고 그 다음 대화를 이어 들었다.
“오빠,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엄마가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책이 잘 나오고 사람들도 많이 봐야지.”
그래, 그래, 역시 딸 밖에 없다. 저렇게 엄마 상황을 이해하며 이쁜 말을 해주니 없던 힘이 저절로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 때, 그 다음 말이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오빠, 오빠도 엄마 책 나올 때 기도 많이 해. 나는 매일 기도하고 있어. 하나님, 우리 엄마 이번 책 많이 팔려서 우리에게 맛있는거 많이 사 줄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그러니까 오빠도 기도해.”
엄마가 하는 일에, 엄마를 위해 진심으로 응원하는 아이들의 기도소리를 들을 때면 일을 하다가도 멈추고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실, 내가 하는 어떤 일에 대해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가급적이면 내게 주어진 것만 생각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이럴 때는, 어느 순간 아이들이 나의 영역에 훅 들어올 때는 조심스럽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출판을 처음 시작할 때, 여러 목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만든 신앙 도서를 우리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우리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믿음의 글들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실제로 중학교 1학년인 큰 아이는 가끔 내가 출판한 책들을 보며 이런 저런 피드백을 해주기도 한다. 순전히 자기 생각으로.
이런 나의 마음을 모아 일주일 전 또 한 권의 책이 엠마우스를 통해 출간되었다. ‘사회비평에세이’라는 비교적 교계에서는 접하기 힘든 분야이지만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편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번에 나온 ‘시선’이라는 책이 (저자인 홍석진 목사님의 표현을 빌려) 예기치 않았던 시대 가운데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길 바라며 더불어 (우리 아이들의 표현을 빌려) 책이 많이 팔려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많이 사줄 수 있기를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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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