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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부모를 일으켜 세우는 교회학교가 되어라!
    아포리아(Aporia)라는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을 뜻합니다. 즉, 더 이상 길이 막혀서 나아갈 수 없는 상태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는 지형적 특성상 항해술이 발달했는데, 선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다가 좌초되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아포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2014년 7월 28일 생존학생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더 위급한 상황에 대한 지식이 많으니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선실에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준 어른은 없었습니다…” 아포리아 상황에서 그 누구도 아이들을 이끌어 출구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골든타임은 이미 지나갔고, 수많은 자녀들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교회와 가정의 신앙교육 현장은 아포리아(Aoria) 상황입니다. 수많은 교회학교 문은 닫힌 지 오래되었습니다. 설령 교회학교가 현장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드리는 상황은 예전과 다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를 지키며 앉은 현장에서는 예배와 소통의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설교자와 선생님의 표정을 보지 못하여 더욱 주의가 산만하며, 신나는 대그룹 활동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아예 진행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자녀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잘 드리고 있을까요? 말씀을 잘 전수받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은 교회교육 현장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어린자녀가 지금 당장 복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린자녀를 단지 교회교육의 대상으로만 봅니다. 즉, 어린자녀를 지금 당장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려내야 할 성도로 보지 않고, 복음을 연습하고 예배를 연습해야 할 교육연습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부모님들은 코로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코로나만 종식되면, 자녀의 신앙교육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녀의 영혼구원에 대한 절박함이 없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코로나키즈들이 교회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지 못하는 현실에 가슴을 치며 몸부림치는 부모들이 없습니다. “얘들아! 여기가 생명의 출구란다. 어서 나가자!”라고 외치며 죄에 빠진 자녀의 영혼을 구해내는 부모가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하루속히 절박함과 시급함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부모들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무기력함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이에 자녀들의 영혼을 구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지나가버리게 됩니다. 여호수아 이후의 자녀세대들이 그러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1세대들은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만난 하나님을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 2장 10절 말씀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놀라운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생생하게 경험했던 세대의 자녀들이 여호와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비참한 일이 발생하였습니까? 그들이 자신들이 만난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전혀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공기 비상사태가 되면, 어린자녀를 동반한 보호자는 반드시 보호자 자신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한 후에 자녀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야 합니다. 보호자가 살아 숨 쉬어야만 어린자녀를 숨 쉬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는 쓰러져있는 부모님들의 영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일에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녀세대들의 마주하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 바로 부모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부모들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자녀들에게 생명의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도록 지원하며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생명의 능력으로 일어선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을 이끌고 생명의 출구로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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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다음세대 칼럼]개독이 기독으로
    개독. 어느새 이 단어는 낯익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인들이 영향력을 잃어버린 순간 ‘기독’은 ‘개독’이 되어 버렸다. 14년전 브니엘고에 부임했을 당시 브니엘의 아이들은 브니엘고에 배정되는 순간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아이, 재수 없어!’ 첫째는 기독교 학교라는 이유이고, 그 다음이 교통이 안 좋다는 이유이고, 마지막으로 소문이 안 좋다는 이유이다. 심지어 브니엘을 브니헬(hell)로 부르는 아이들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학교에 부임한 이후 줄곧 나의 목표는 개독을 기독으로 다시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개독이 다시 기독으로 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된다. 기독 교사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자연스레 개독은 기독으로 바뀔 것이다. 간혹 제자들 중 학생으로서 하면 안 될 일을 하다가 적발이 되어서 경찰에 잡히는 경우가 있다. 이때 집에 연락할 가족이 없든지, 도저히 집에 연락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제자들이 마지막에 보호자로 선택하는 사람은 나였다. 그렇게 경찰서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렇게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얻게 되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아웃사이더라고 부를 수 있는 녀석들이 목사의 편이 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건들거리는’ 녀석들이 나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고개만 까딱하던 녀석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거의 조폭의 ‘형님급 인사’로 허리를 숙였다. 사실 이들은 내가 수업을 할 때 가장 건들거리면서 방해만 하던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기 친구들을 도와주고 나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스스로 들을 준비를 하고, 나와 눈 맞춤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학교 욕을 하거나, 교회 욕을 하는 게 아니라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들이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날 이후 J가 말했다. “목사님 이제 개독교라고 안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교회 잘 나가 보겠습니다.” 물론 J는 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3년 내내 잊을 만하면 주일 예배 때 나타나 뒷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가곤 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변화였다. J는 졸업할 때까지 보호감찰을 받으며 부모와 교사의 속을 참 많이 썩였다. 졸업도 하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2,3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포기하지 않고 잡아 주셔서 무사히 졸업을 했고, 군대를 다녀왔고 이제는 철이 들었다. 그는 군대에서 가끔씩 내게 전화를 했다.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시커먼 사내 녀석이, 그것도 까까머리 군인이 보고 싶다고 하니 몸에 닭살이 돋기는 했지만, 마음은 무척이나 흐뭇했다. 이처럼 더이상 개독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고, 고비의 순간에 교회를 찾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삶이다’라는 교훈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전도와 학원의 복음화가 목적인 삶이 아니라, 개독에서 기독으로, 브니헬에서 브니엘로 부르는 아이들이 늘어나기를 기도하며 ‘몸으로’ 승부하고 있다. 한 제자가 페이스북에 남긴 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싶다. “교목 샘. 저 기억나세요? 고등학교 때 제일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화가 나서 유리를 깨고, 팔에 유리를 꼽은 채 상담하러 갔더니 목사님께서 그걸 또 하나하나 빼 주셨던 거였어요. 잘 지내고 계시죠?” 그렇다. 아이들은 어떤 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를 기억하더라는 것이다. 결국 개독이 기독이 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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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하나님, 우리 엄마 이번 책 많이 팔려서 맛있는거 많이 사줄 수 있게 해주세요.”
    나는 현재 1인 출판사를 하고 있다. 아직 출판사가 자립할 상황이 아니라 다른 일도 이것저것 하지만 원래 나의 주 업무는 출판이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책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을 잘 알아서 내가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 글을 쓰거나 교정을 보고 있으면 “엄마, 이번에는 무슨 책 나와?”라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아울러, 몇 권의 책을 출간하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은 엄마가 책을 새롭게 내도 그다지 큰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월 31일, 새 책 출간을 앞두고 그 전 주일에는 밤에 거의 잠을 못자며 마지막 작업을 한창 하고 있었다. 그 날 밤에도 아이들이 엄마가 바쁜 것을 아는지 스스로 샤워를 하고 자기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중학교 1학년인 큰 아이와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가 나의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빠, 엄마 이번에 새 책 나오는가봐. 잠도 못자고 엄청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책이 나오면 뭐해? 누가 그 책을 읽는다고…” 이 말을 듣는 순간, 큰 아이에게 당장 뛰어가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엄마 책을… 뭐라고…”라며 큰 소리치고 혼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큰 인내심을 발휘해 참고 그 다음 대화를 이어 들었다. “오빠,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엄마가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책이 잘 나오고 사람들도 많이 봐야지.” 그래, 그래, 역시 딸 밖에 없다. 저렇게 엄마 상황을 이해하며 이쁜 말을 해주니 없던 힘이 저절로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 때, 그 다음 말이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오빠, 오빠도 엄마 책 나올 때 기도 많이 해. 나는 매일 기도하고 있어. 하나님, 우리 엄마 이번 책 많이 팔려서 우리에게 맛있는거 많이 사 줄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그러니까 오빠도 기도해.” 엄마가 하는 일에, 엄마를 위해 진심으로 응원하는 아이들의 기도소리를 들을 때면 일을 하다가도 멈추고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실, 내가 하는 어떤 일에 대해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가급적이면 내게 주어진 것만 생각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이럴 때는, 어느 순간 아이들이 나의 영역에 훅 들어올 때는 조심스럽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출판을 처음 시작할 때, 여러 목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만든 신앙 도서를 우리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우리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믿음의 글들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실제로 중학교 1학년인 큰 아이는 가끔 내가 출판한 책들을 보며 이런 저런 피드백을 해주기도 한다. 순전히 자기 생각으로. 이런 나의 마음을 모아 일주일 전 또 한 권의 책이 엠마우스를 통해 출간되었다. ‘사회비평에세이’라는 비교적 교계에서는 접하기 힘든 분야이지만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편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번에 나온 ‘시선’이라는 책이 (저자인 홍석진 목사님의 표현을 빌려) 예기치 않았던 시대 가운데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길 바라며 더불어 (우리 아이들의 표현을 빌려) 책이 많이 팔려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많이 사줄 수 있기를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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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6-11
  • [교사의 힘] “관계중심의 사역”
    다음세대를 섬기는 사역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다음세대를 향한 사역이 중요하고 더 이상 다음세대를 놓칠 수는 없는 상황이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교회가 다음세대를 중요하게 외쳤지만 다음세대들의 마음에 그것이 얼마나 다가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세대는 표어로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감동이 됩니다. 감동이 되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관계사역은 두가지 핵심적 희생이 따릅니다. 바로 시간과 물질입니다. 둘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장소나 예산이 아니라 교사의 헌신을 통하여 그들을 만나고 떡복이라도 함께 하는 시간이 사랑한다 귀한다라는 말 백번보다 강합니다. 물론 코로나 시대에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쉽지않지만 사람만나는 것이 더 그리워진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집니다. 줌을 사용하고 아이들에게는 배달을 시켜서 함께 보면서 한끼 식사를 하는것도 아이들에게는 효과적인 접근 방법입니다. 이제 본 칼럼을 통하여 조금더 구체적인 관계사역에 대해 글로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다음세대는 말로 살릴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관계와 나눔으로 살립니다. 그 현장에는 반듯이 교사와 사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친구들에게 큰 영향을 받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항상 존중할만한 어른을 찾습니다. 그 자리에 여러분이 서계십니다. 지속적이면서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음세대에게 다가가는 교사가 있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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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부모로서, 인간으로서, 한계를 만났을 때
    밤 11시 40분. 월요일과 화요일(3월부터 5월, 9월부터 11월)에 내가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다. “돌봐야 할 어린 아이가 있는데도 엄마가 그 늦은 시간에 들어간다고? 일주일에 두 번이나 자정 즈음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아는 몇몇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내게 이런 말들을 하고, 나를 조금 아는 사람들은 돌려서 내게 이런 분위기로 말을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러게요. 참. 그렇네요” 라고 얼버무리고 말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이런 상황을 보내야 할 때라 참고 견디며 있는 중이다. 그런데, 항아리에 물이 차고 차다 한 바가지만 더 부으면 흘러 넘치듯, 이 상황에 대한 나의 감정이 차고 차다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감정이 차고 넘쳐 나의 한계를 만나는 일을 종종 경험한다. 지난 월요일 밤이 그런 날 중 하루였다. 그날도 역시 자정 무렵 집에 들어가니 둘째 아이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평소에는 내가 늦게 들어가는 날에는 아이들이 자고 있다.) 이유를 들어보니, 모르는 수학, 영어 숙제가 있어서 엄마와 같이 하려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내일은 등교하는 날이라 일찍 잠들어야 하는 아이가 숙제 때문에 그 시간까지 엄마를 기다렸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답답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몰려왔다.(물론 남편이 그 시간에 집에 있기에 숙제를 종종 도와주지만, 둘째는 꼭 엄마랑 같이 숙제 하는 것을 좋아한다.) 옷도 채 갈아입지 못하고 아이 책상에 앉아 꼬박 1시간 반을 함께 숙제를 했다. 4학년이 되면 곱셈 나눗셈의 단위가 높아져서 아이들이 힘들어하는데, 우리 둘째가 지금 딱 그런 상황이고, 발음하기 어려운 영어가 많아지는 것 또한 아이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숙제를 다 끝낸 아이를 재우고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었다. 온 종일 해야 할 일을 마치느라 몸은 엄청 피곤한 상태인데 이상하게 정신은 말짱했다. 아니, 정신이 말짱했다기 보다는 뒤엉킨 감정의 실타래가 피곤한 육체보다 더 커서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부모로서 또 다시 한계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일도 하고, 집안일도 뚝딱뚝딱 잘하고, 아이들도 매끈매끈하게 잘 키우는 슈퍼맘이 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현실은 결코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일도 완벽하게 잘하지 못하면서, 집안일은 엉망이고, 아이들은 하나둘 부족한 부분이 있는 약할 대로 약한, 미숙할 대로 미숙한,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를 만나는 내 모습을 또 발견한 것이다. 이럴 때,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감정은 다름 아닌 ‘자괴감’이다. 이상적으로는 잘할 수 있다고 큰 소리 뻥뻥 치면서 실제로는 여기저기 구멍이 펑펑 터지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은 마음, 내가 스스로 부끄러워 당장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자괴감이 나를 짓누른다. 그날 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다시 이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하나님, 오늘도 나는 나의 한계를 만나며, 또 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를 만져 주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긍휼함을 주셔서 하루하루 은혜로 살아가게 인도해주세요” 이런 기도를 한 다음, 이런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주님이 있다는 것에, 내 모든 감정과 상황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나의 주님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나는 부모로서,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나의 한계를 만날 것이고 그런 순간마다 나의 한계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종종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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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5-21
  • [신앙교육 나침반]온 가족 놀이로 경험하는 “Godly Family”
    하나님이 보시니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해졌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도록 지음 받은 부모들이 죄악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형상자가 아닌 사탄의 형상자로 살았습니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과 비례하여 죄악도 함께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비신앙적이고 세속적인 결혼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됨의 가정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아버지 ‘노아’에게 임하였습니다. 노아는 에녹의 증손이며, 므두셀라의 손자이며, 라멕의 아들입니다. 에녹의 ‘동행’ 신앙은 그의 자녀와 손자, 그리고 증손자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리는 순간만 하나님을 찾고 구했지만, 노아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세상의 일만 생각하며 불경건하게 살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당대에 완전한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멸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를 긴급히 부르셨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히브리서 11장 7절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으니라.” 즉,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을 보시고, 그와 그들의 가족을 구원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만 붙잡고 아무 징조도 없는 가운데 오랜 세월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임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귀 가정도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 붙잡고, 하나님 말씀 드러내는 경건한 부모와 경건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지적, 논리적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자녀들과 마주하여 온 몸으로 성경놀이를 함께 경험해보세요. 몇 가지 놀이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종이벽돌을 준비하여서 ‘말씀유산 릴레이 놀이’를 해보세요. 가족이 둥글게 모여 앉아서 아빠(또는 엄마)가 말씀스티커를 블록에 하나씩 부착한 후에 옆으로 전달합니다. 이때 반드시 가장을 중심으로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말씀벽돌을 전달합니다. “여호와께서”라고 말씀구절을 또박또박 외치면서 옆에 있는 엄마에게 전달하면, 엄마도 “여호와께서”라고 말하면서 자녀에게 전달합니다. 마지막에 말씀을 받은 자녀가 말씀의 벽돌을 순서대로 쌓아서 창세기 7장 1절 말씀을 완성해봅니다. 놀이를 하면서 귓속말로 주제를 이야기해주세요. “전하자! 전하자! 말씀을 전하자! 아빠, 엄마는 오늘하루 어찌하든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너희들에게 전할게!” 다음으로 ‘말씀밥 보리밥’ 놀이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마주 앉은 후 한 명이 양손을 펼쳐 말씀밥 잡을 준비를 합니다. 다른 한 명이 말씀 스티커를 부착한 말씀 벽돌을 들고 ‘말씀밥’과 ‘보리밥’ 중 한 가지를 외치며 공략을 합니다. 보리밥을 외쳤다면 아무리 꽉 움켜잡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밥을 외칠 때 잡아야만 말씀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벽돌을 이용해서 놀이를 반복하면서 누가누가 말씀벽돌을 많이 가지는지 내기해봅니다. 놀이를 하면서 이렇게 말해주세요. “말씀밥을 줄까? 보리밥을 줄까? 우리 가족은 오늘 하루 어찌하든지 하나님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꼭 붙잡는 가족이 되자.”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에서는 이상의 놀이 외에도 귀 교회의 가정을 경건한 가정(Godly Family)으로 세우는 데 필요한 다양한 성경놀이를 제공해드립니다. 우리집 성경놀이터 ‘Godly Family’를 신청하시면 성경놀이에 필요한 10종 이상의 재료가 포함된 놀이키트와 예배영상자료 및 교육을 제공해드립니다(문의|향기나무 교육개발원 031-30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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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다음세대 칼럼]내가 죽일 놈입니다.
    몇해전 학교에서 아버지 학교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6주프로그램으로 계획을 세워, 부자간의 기질의 차이, 대화법, 아버지의 역할 등에 대해서 workshop 형식으로 진행을 했다. 이름은 아버지 학교였지만 진행을 하다 보니 집단 상담처럼 방향이 흘러갔다. 계획했던 세미나가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실패한 계획 속에서 놀라운 치유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 아이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 가정만 아픔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없는 가정은 없다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참석한 아버지들은 서로를 보면서 위로받고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 학교만의 새로운 아버지학교의 틀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6주간의 과정을 마치고 마지막주차에는 어머니들과 아들들을 같이 참석하게 했다. 간단한 종강파티를 하고 세족식을 진행하게 되었다. 준비한 세수대야에 물을 채워놓고, 아버지들이 정장을 하신 채로 손에 수건을 들고 아들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야간자습을 하던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세미나 장소에 왔다가 엄마 아버지가 계신 것을 보고 당황을 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아들들 몰래 참석하셨던 것이다. 아들들을 자리에 청해서 앉게 했다. 아들은 의자에 앉고 엄마는 의자 뒤편에 서서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아들을 세족하고 축복하는 것이 그 날 계획된 프로그램이었다. 세족을 하기 전, 나는 “지금 이 시간은 우리 아버지들이 아들들에게 세족을 하면서 축복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들, 아들의 발 오랜만에 보셨지요? 이제 아버지보다 발이 더 클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목욕을 같이 다니며 몸을 씻겨주었던 날 이후로는 아마 아들의 발을 씻겨줄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지금 아버지들 앞에 어느 순간 훌쩍 자라버린 아들들이 앉아 있습니다. 지금 세족을 하기 전에 아들들의 눈을 보면서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을 하신 후에, 아들들이 두 발로 씩씩하게 걷고, 뛰고 세계를 누비는 발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곳에는 서고, 필요치 않는 곳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출입의 지혜를 달라고 축복하며 정성껏 발을 씻겨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분 정도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최고의 축복과 격려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용히 음악을 틀어 주고 세족식을 진행했다. 어머니들은 아들의 어깨를 잡고 격려하고 있었다. 축복을 하라고 했지만 침묵이 흘렸다. 쭈볏거리든지, 아니 뭔가 말은 하고 싶은데 용기 내어 말을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한분의 아버지가 갑자기 오열을 하기 시작하셨다. “목사님 내가 죽일 놈입니다. 내가 죽일 놈입니다. 지금 아들에게 축복하라고 하셨는데 지금 내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말은 ‘공부 잘하거라’ 라는 말만 기억납니다. 내가 이러고도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들아 미안하다. 내가 나쁜 놈이다. 내가 나쁜 놈이다.....” 아버지의 외침은 옆으로 전달되었고 아버지의 눈물은 나머지 아버지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왜냐하면 나머지 아버지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제자녀석이 무릎을 꿇더니, 무릎을 꿇고 있는 아버지를 안으면서 “아빠 울지마라. 내 아빠 맘 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이제 내 아버지 눈에 눈물 안 나게 할게. 아빠 울지마라~~” 아버지의 세족이 오히려 아들들이 아버지를 안아 주어야 하는 상황으로 역전이 되어 버렸다. 나 역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아이들에게 일어나라 했다. 그리고 아버지들을 안아 드리라고 했다. “녀석들아 아버지들의 마음이 이렇다. 혹시나 학교에 와서 너희들 눈에 띌까봐 아버지 학교도 몰래 신청하시고, 몰래 도둑 고양이처험 6주간을 다니셨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몰라서 상처 준 것들이 많다면서 시간마다 많이 우셨다. 이 자리에 계신 아버지들은 아버지 자신보다 너희들이 잘 되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하시는 분들이다. 너희들을 위해서 자존심을 구겨 가며 직장 생활하고, 장사를 하고, 너희들이 사회에 자립잡을 때까지 열심히 돈 벌어야 해서 직장에서 안 짤리기 위해서는 험한 꼴 당하면서도 버텨야 한다고 하시더라. 그런 아버지들이 너희 앞에서 울고 계신다. 이젠 너희들이 안아 드려라. 아버지 수고하셨다고 안아드려라. 이만큼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해라. 이제 아버지의 수고를 너희들이 감당하겠다고 말씀 드려라.” 비록 힘들게 세족식을 마쳤지만 이 날을 통하여 아홉 가정은 새로운 가정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아홉 가정은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 계모임으로 모이신다. 학교는 이런 곳이다. 아이들을 붙들고 가야 하지만 때로는 가정으로 눈을 돌리려 가정이 회복될 수 있도록 소통해 주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가정에 관심이 많다. 가정이 살아야 아이들이 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브니엘이 좋다. 일반학교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생명을 나누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우리 학교가 너무 좋다. 브니엘의 이름으로 지금도 가정들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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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좌출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잠시 멈추니, 깊게 보이는 소중한 것들
    5월 5일 어린이날이 지났다. 첫째가 14살이니 14년 동안 5월 첫째 주가 되면 올해는 또 아이들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에 들어간다. 특히 우리 가족은 주말과 주일에는 교회로 인해, 주중에는 여러 상황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제대로 된 여행을 가지 못한 기간이 오래 되어서 2021년 어린이날에는 “어디든 나가야만” 했었다. 코로나가 걱정이 되고, 길게 늘어선 줄이 겁이 나기도 하고, 혹시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면 어쩌지, 라는 염려가 밀려왔지만 우리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어린이날이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곳, 꿈과 환상의 공간, 바로 ‘놀이공원’이다. 4일 저녁 애들에게 “내일은 놀이공원에 가자”라고 말하니, 큰 아이는 엄청 좋지만 사춘기다보니 절제해서 빙긋 웃는 수준이고, 둘째와 셋째는 춤을 추고, 막내는 뭣도 모르고 노는 거냐며 무조건 좋아한다. 밤새 천둥번개가 쳐서 엄마인 나는 마음을 졸였지만, 5일 새벽부터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날이 맑아지면서 아이들의 부푼 기대는 더욱 높아지고, 부산에서 경주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아이들끼리 노래를 부르며 오랜만에 나들이에 흥을 돋우며 신나했다.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긴 입장줄을 보며 나와 남편은 입이 쩍 벌어지게 놀랐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다는 듯 신나게 기다리고, 기분 좋게 입장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디즈니의 배경이, 판타지의 정점인 놀이동산을 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들어서면서부터 알았다. 마치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입장하는 듯한 놀이동산의 넓은 문을 지나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건물들이다. 그 건물들의 아름다움에 빠질 때 즈음에 나타나는 것은 현실 세계에는 없는 짜릿함을 선사해 줄 놀이기구들이 등장한다. 우리 가정은 4명의 아이들의 나이가 다 다르기에 팀별로 나누어 다녔다. 아빠와 함께 다니는 아이들은 바이킹, 롤러코스터 등 고난이도의 놀이기구, 엄마와 다니는 아이들은 가족 열차, 회전 목마 등 유아들이 탈 수 있는 것으로 즐겼다. 어린이날이라 오후에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평소 같으면 짜증내고 화를 내야 할 아이들은 그 때는 자기들끼리 즐겁게 이야기하고 놀면서 잘 기다렸다. 또한 놀이동산에 있을 때에는 아이들을 다그치거나 큰 목소리로 이야기해야 할 경우가 없을 정도로 말을 잘 들었다. “엄마, 11년 동안 살면서 오늘이 가장 즐거운 날이에요”라는 말을 둘째가 했을 만큼 아이들도 좋은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하루 온종일 집중해서 시간을 보낸 적이 많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는 주일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바빴고, 평일에는 각자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즐길수가 없었다. 물론 틈틈이 여유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는 썼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늘 부족했을 것이다. 겨우 하루, 아침부터 오후까지만 부부의 일들을 멈추고 아이들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으니 힘이 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에 대한 소중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깔깔대고, 긴 줄을 기다리면서도 장난을 치고, 놀이기구를 탈 때는 가슴이 콩닥콩닥 거린다고 서로 이야기하고… 함께 웃고, 함께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부모가 부모의 일을 멈추어야 아이들의 소중하고 귀함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매달 이렇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겠다, 혹은 두 달에 한번 여행을 가겠다는 등의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나의 일을 멈추고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내야겠다는 결심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했다. 잠시 나를 멈추니 우리 아이들의 소중함이 더 깊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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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5-07
  • [신앙교육 나침반]타락한 세상에서 경건한 가정 세우기
    지금 우리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 아래, 삶의 모든 결정을 인간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다고 지속적이며 은밀한 자극으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우리와 자녀들이 속한 세상의 동료집단은 이러한 세속적 인본주의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타협’이라는 방법을 매우 지혜롭게 여기며 강요합니다. 그들은 사사기 17장 6절의 말씀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아무 기준도 없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최선이며 지혜롭다는 것을 과시합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인본주의라는 고상한 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혼외정사나 동성애, 낙태 등에 대한 타협과 옹호에 자신도 모르게 동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온통 가득하고, 그들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악한 이 세상을 보시고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창세기 6장 6-7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현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번뇌와 근심이 가득하십니다. 하나님은 현재 큰 고통 가운데 신음하시며 한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열렬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칠흙같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가정이 있는지 열렬히 찾고 계십니다. 말라기 2장 15절 말씀에는 경건한 자손을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Godly offspring)을 얻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은 지금 타락한 세상 속에서 경건한 가정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보면, 경건한 가정을 세우려고 몸부림치는 부모를 찾고 계십니다. ‘경건한’(Godly)이란 말은 ‘하나님을 드러내는’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삶이란, 성경을 두 손에 잡고 거룩한 말과 모양을 갖춘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편안한 쇼파에 앉아서 자녀와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에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것, 파자마를 입고 누운 채로도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즉 하나님과 일상속에서 매순간 동행하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노아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제사드릴 때만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녹 할아버지로부터 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거 같습니다. 그는 제사드릴 때뿐 아니라 모든 순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창세기 7장 1절 말씀은 경건한 부모로 인해 한 가정이 어떻게 세워지는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은 노아에게서 ‘의로움’을 보셨습니다. 이는 노아의 모든 삶이 죄로부터 온전히 깨끗하였다는 의미가 아닙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를 따라 살아가는 시대에, 노아만은 매순간 하나님의 ‘의’를 붙잡고 살려고 발버둥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 눈에는 의로움으로 보였고, 그 의로움은 온 가족을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매일매일 하나님 말씀을 내 안에 가득 채우고, 그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려고 고군분투하는 부모를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찾으시는 경건한 부모가 바로 저입니다! 저희 가정을 구원해주세요!”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가정으로 세워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에서는 “Godly Family"를 주제로 경건한 가정 세우는 여름성경학교 컨텐츠를 개발하였습니다. 온가족이 경건한 노아와 그들의 가정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 컨텐츠는 가정에서 성경학교를 진행할 수 있도록 놀이키트와 영상자료를 제공하는 놀이중심의 신앙교육 컨텐츠입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 말씀 앞에 마주 앉아 놀이하면서 경건한 가정으로 세워지는 첫걸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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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1-05-07
  • [다음세대 칼럼]스며들게 하다
    오늘은 오래전 브니엘고를 졸업하고 서울 K대에 진학한 제자가 자신의 SNS에 적은 글을 옮겨볼까 한다. (원문 그대로 옮겨보고자 한다) 내가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침예배 하는 걸 보고 한숨을 쉬었다. 길거리에서 항상 나를 붙잡고 설교하던 교회 다니시던 아주머니들이 생각났다. 게다가 내가 졸업할 때가 되어서도 그 예배를 좋아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난 아직도 교회도, 성당도, 절에도 다니지 않는다. 첫 종교수업이 있는 날에, 전영헌 목사님을 만났다. 언제나 그렇듯 첫 만남은 아무것도 모르는 서로가 편견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지고 만나는 자리였기에 목사님이라는 위치에 계시는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별다른 느낌도 없었고, 성경을 읽어주면서 나에게 기독교에 대한 교육만 시키지는 않을까 경계심이 일었었다. 하지만 2년동안(고1, 고3) 목사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건 그런게 아니었다. 아마 나와 함께 수업을 들은 모두가, 배운건 그런게 아니었을 것이다. 2년동안, 몇십번의 수업을 하면서, 몇십가지의 수업내용이 있었겠지만 내가 기억하고 내가 그 몇십번의 수업내용들 속에서 배운 것은 한가지였다. 아마도 목사님께서도 그 한가지를 계속 말하셨던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 배운 것을, 어떻게든 실천해보려고 노력했고,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온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고 회의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새삼 느끼는 건, 어쩌면 내가 행동한 것들이 틀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그 생각마저 틀린 것일지도 모르지만...맞겠지)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한번씩 중얼거리게 되는 단어가.....영향력. 그때 목사님이 가르친 건 바로 영향력이었다. 오래전 졸업한 제자가 나에게 보낸 글이 아니라, 자신의 SNS 개인 담벼락에 적은 글이다. 나는 우연히 이 글을 보고 내가 하는 일이 헛일이 아니구나 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제자는 대학에 들어간 후 청년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문득 자신을 지탱해주는 의미들을 생각하던 중에 나에게 배웠던 종교수업시간의 내용들이 무의식중에 자리잡고 있음을 이야기 한 것이었다. 학교는 그런 곳이다. 매일 똑같은 시간들의 반복 속에서 의미없는 것 같은 순간 조차도 시간이 지나고나니 의미로 다가오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제자녀석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뻔한 종교수업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몸부림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목사가 할 수 있는 말은 늘 정해져 있다. 뻔하다. 그러나 그 뻔한 것을 들키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성경적 가치관을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그 가치가 훗날 성경의 메시지였음을 알게 된다. ‘스며들다’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속으로 배어들다’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교육은 이런 것이다.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은연중에 속으로 배어들게 하는 것. 지금도 현장은 그렇게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이 일을 위한 교회와 기독교 가정의 뒷받침이 있다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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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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