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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목사님 빚 갚으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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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함께 학교에서 성경 시간 강사로 섬기던 후배 전도사가 반찬통을 가득 채워 가지고 출근을 했다. ‘뭐냐’고 물었더니 L에게 줄 반찬이라는 것이다. 집에 부모님들이 다 안 계신 상황에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데 반찬 만드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L과 좀 가까워진 다음에 집안 사정에 대해 물어보았다. 들어보니 많이 어려웠다. 할아버지의 부도로 모든 빚이 아버지에게 넘어와서 아버지의 월급이 차압을 당해 생활비를 거의 주지 못하신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 벌어지자 어머니는 이혼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살고 계시고, 자신은 동생들을 데리고 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직장일로 집에 가끔 들어오시다 보니 동생들을 돌봐야 하고 밥을 챙겨 줘야 하는데 반찬을 준비해서 밥을 해먹이고 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했다.
18살의 나이에, 학교에서 마음껏 뛰어야 할 남학생이 집에 가서 동생들 반찬해 줄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라.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서 학교 급식 도우미를 하며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L은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를 않았다.
‘목사님 해뜰날 있겠죠? 제가 빨리 자라서 동생들 잘 돌봐야 합니다. 그래서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대견스러웠다. 그래서 매월 내가 쓸 돈을 아껴서 용돈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L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찾아서 전문대학에 진학을 했다.
몇 해 만에 L이 나타났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나타났다. 하고 싶어 한 요리 분야에 취직해서 셰프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 다니는 동안 용기 잃지 않도록 힘을 주어 고맙다며 취직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
“목사님, 첫 월급입니다. 목사님이 필요한데 사용해 주십시오. 조건이 있습니다. 목사님만을 위해 사용해 주십시오. 애들 돕거나 간식 사는데 사용하지 말고 목사님만을 위해 사용해 주십시오. 받았던 사랑에 비하면 많은 금액 아닙니다. 저의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첫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을 목사님께 드리겠다고 오래전부터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봉투를 열어보니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L에게는 큰돈이었다.
“임마, 이거 너무 많다. 너 이거 있으면 동생들한테 좋은 옷에, 맛난 것들 맘껏 사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큰돈을 가져오면 어떻게 하냐?”
“목사님, 저 원래 없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돈들 있어서 사는데 지장 없습니다. 이제 목사님 걱정하실 정도 아닙니다. 그냥 목사님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리하마. 그리고 고맙다.” 나와 L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L이 준 돈을 나를 위해 쓸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하고 싶어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우리 학교 아이들 중 어려운 4명의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조용히 전달해 주었다.
학교에서는 모르는 일이다. L이 전해준 첫 월급 장학금을 받은 아이와 나만 알고 있다. L에게는 알려주고 싶었다.
“L아, 네가 준 돈으로 내가 잘 썼다. 너무 아까워서 그냥 쓰기 아까워서 네 후배들 4명에게 나눠주었다. 너처럼 어려운 애들이 있더라. 그래서 힘내라고 하면서 전해 주었다. 혹시 아냐? 얘들도 나중에 너처럼 그렇게 첫 월급 가져올지..”
학교에서 때로는 나를 보면서 ‘내가 헛짓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 때가 있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들 중에 가끔 “목사님, 애들한테 그렇게 해 줄 필요 없습니다. 점마 저것들 은혜 모릅니다”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뭔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아이들을 대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목사로서 해야 할 일이기에, 크리스천으로서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배웠기에 여전히 나는 내 방법대로 살고 싶다.
나는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그래서 그 은혜를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우리 아이들 삶 속으로 흘러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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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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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힘]테크닉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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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 교사는 자신의 힘과 지식으로 가르치는 자리가 아닙니다.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사역의 현장에서 체험합니다.
교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혀야 큰 열매를 맺을수 있습니다.
오늘은 교사를 향한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교사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성경지식이 특출해야 한다.
교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사가 모르는 부분은 솔직하게 모른다하며 진실된 모습만 보여주면 됩니다. 우리가 매번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배우기도 합니다.
2. 교사는 말을 잘해야 한다.
말을 잘하는 은사가 도움이 되지만 말만 잘하는 교사를 학생들은 따르지 않습니다.
행동과 지속적인 모습이 따라주지 않으면 절대 학생들은 그 교사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3. 교사는 잘 웃겨야 한다.
있는 그대로 모습이 더욱 좋습니다. 너무 애쓰고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더 하는 것이 역효과를 나타나게 합니다.
4. 교사는 무서워야 한다.
쓸데없이 무섭기만 한 교사에게 누가 마음을 열겠습니까?
권위는 그렇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룰이 있는 것은 좋지만 그 누구보다 교사가 먼저 지켜야 합니다.
5. 아이들과 같아야 한다.
마음을 나누는 것과 아이들과 같은 것은 다르며 아이들은 친구보다 어른중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학생 편에 서서 오늘도 아이들에게 기운을 넣어주는 교사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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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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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얻는 것과 잃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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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 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괜찮다고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눈 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어지러운 상황이 펼쳐져 있으면, 뒤돌아서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해결을 위한 빠른 열쇠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솔직해 질 수 밖에 없는 경우에도 회피하고, 숨고, 외면하며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나와 종종 마주한다. 특히, 아이와 관련된 일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엄마, 은율이 선생님을 만났는데 나보고 은율이 받아쓰기와 구구단을 가르치래”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기 전, 둘째가 학교에서 오더니 나에게 다급한 일을 전하듯 헐레벌떡 거리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둘째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다급할 수 있는 일이다. 본인은 6-7살 때 한글을 다 알아서 1, 2학년 받아쓰기 할 때는 내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했고, 구구단도 설렁설렁 외우면서 끝냈는데 동생은 2학년 1학기가 끝나가도록 학습적인 부분이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으니 충분히 놀랄 만하다.
“엄마가 은율이 봐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네. 알았어. 엄마가 신경쓸테니까 걱정하지마”
그래, 이쯤이면 슬슬 펑크가 날 만도 하다. 셋째 은율이는 온갖 핑계를 대며 학교 공부 봐주는 것을 미뤄왔다.
“12월 생이기에 조금 늦어도 괜찮다. 위에 형과 누나가 있는데 알아서 어깨 너머로 배우겠지. 또릿또릿해서 자기 알아서 다 할거야”
이런 말들이 주 핑계였다. 그 어느 말에도 “엄마인 내가 너무 여유가 없어서 못 봐주고 있다”나, “셋째까지는 도저히 신경쓸 수가 없었다” 등 나 때문, 나 책임이란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순간, 즉 상황을 솔직하게 인식하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그러면 뭔가 총체적으로 복잡해질 것이란 생각에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 4명을 양육하고 일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듣는 말 중 가장 자주 듣는 표현은 “아이 4명을 키우고 일도 하고 정말 대단해요”이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사실 “아니에요. 아이들 양육도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곳곳에서 펑크가 나는데 그냥 모른 척하고 살고 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데, 그냥 씩 웃으며 못 들은 척 하고 만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동 전문가들이 아이가 1세부터 3세까지는 가능하면 주 양육자가 엄마가 되어서 안정적으로 양육하는 것이 아이의 평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단.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그렇게 키우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처해진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은 잘하고 싶은데 많은 한계에 부딪혀 곳곳에서 구멍이 펑펑 터진다.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아이들의 학업에 신경을 쓰고 집에서도 봐주면 별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럴 여유조차 생기지 않아 몇 개월 동안 놔두면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내 희망은 뿌연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뜻하지 않는 문제들만 가득 있는 것을 본다.
그러면, 또 난 상황에 솔직해지지 않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나 때문임’을 피하고 싶지만, 결국 문제의 해결은 ‘나 때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지금 나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지금 내게 주어진 여러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분명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을 것인데, 생각할 여유조차 없을 때는 하루하루 살아내기만 하다 만다. 하지만 내가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고 적절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때 비교적 모든 일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감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주어진 일에 적절한 우선 순위를 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도 이 질문을 대뇌이며 분주한 삶의 퍼즐을 맞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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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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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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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 아이들에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세 가지로 정리해 보자.”하며 주제를 던졌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가족, 친구, 돈’이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의외의 답이 나오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이 많은 G였다. 전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다시 시험을 보고 우리 학교에 입학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공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한 것이다.
“첫째는 여친(여자 친구)이고, 둘째는 자존심이고, 셋째는…… 교회입니다.”
“인마, 아부하지 마라. 교회는 무슨…….”
“목사님, 아닌데요. 정말 교회 맞는데요.”
“어째서 그러냐?”“먼저, 지금 제게는 여자 친구가 제일 소중합니다. 제가 지켜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입니다. 남자의 뽀대(자존심)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소중한 이유인데요. 저는 교회에 이제 세 번 가 봤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갔을 때 이상하게도 누군가 내 말을 들어 주는 것 같았고, 교회에서는 나를 이상한 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겹게 자꾸만 웃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또 교회 샘들이 나를 볼 때마다 등을 쓸어 주면서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모습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 이름은 주로 ‘인마’ 아니면 ‘어이’나 ‘야, 새끼야’였는데 이름도 제대로 불러 주시고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은 교회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요.”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나 역시 웃었다. 물론 G는 교회에 꾸준히 출석한 것은 아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만 교회를 찾곤 했다. 하지만 고비의 순간마다(술이 취했든 맨 정신이든)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리고 이런 관계가 그에게 따뜻함을 주었던 것이다.
G는 이제 군 제대를 앞두고 있다. 지난 12월에도 연락도 없이 음료수 한 통을 들고 학교를 찾았다. 나는 반가워서 꼭 안아 주었다. 그런데 녀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휑하니 가 버리는 것이다.
“목사님 생각나서 그냥 들렀습니다. 저 이제 부대로 복귀하는 길입니다. 얼굴 뵈었으니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G의 뒷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아이들은 큰 것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도 감동할 줄 알고 귀하게 여기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사람이 소중하다고 하면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며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온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며 판단해 버린다.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제 위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1~2년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데, 우리는 너무 쉽게 아이들을 포기하고 판단해 버리는 잘못을 하고 있다.
동일한 질문을 내게도 해 보았다. 학교에 근무하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중에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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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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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 나침반]가정세대통합 컨텐츠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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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코로나 상황은 종식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교회학교 사역자들은 점차 줄어드는 코로나의 확산세와 백신접종자의 증가세를 보면서 ‘올해는 여름성경학교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델타 변종바이러스의 출현은 우리의 작은 기대마저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델타바이러스의 빠른 전파력은 연일 역대 최대 확진자를 기록하며, 야심차게 세운 성경학교 계획안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충성스러운 사역자들은 수시로 변하는 코로나 방역상황에서 성경학교 계획안을 여러 차례 수정하면서 가정에서라도 성경학교를 진행하도록 애를 썼습니다. 가정은 교회의 가이드를 따라서 부모가 교사가 되어서 성경학교 교재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특별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역자들의 열심과 달리 가정 현장은 성경학교를 진행하는 데에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열성적이고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몇몇 부모들은 사역자들의 가이드를 잘 따라갔지만, 바쁘고 분주한 육아 현실에 처한 대부분의 부모들에게는 성경학교가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자녀들이 다양한 연령일 경우에는, 부모가 성경학교 교재를 자녀의 연령에 맞게 준비하여 가르쳐야 하니 엄두를 내기 힘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대다수의 교재는 연령별 수준에 따른 내용과 방법을 담은 세대분리 형태이며, 교회학교 환경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구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가정 모두 혼란을 겪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들만의 사역 치트키를 발견한 몇몇 사역자들은 전혀 흔들림 없이 성경학교를 추진하였습니다. 그들은 코로나상황에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고, 이를 위해 과감한 노력과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치트키는 바로 향기나무교육개발원에서 제공하는 신앙교육컨텐츠입니다. 향기나무와 함께하는 ‘우리집 성경학교’는 기존에 만나왔던 신앙교육컨텐츠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첫째,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는 여러 연령이 혼재되어 있는 가정을 위한 세대통합 컨텐츠입니다. 향기나무 성경놀이키트는 비구조화된 놀잇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를 들어 흙, 물, 블록, 곡물, 종이 등과 같은 구조화되지 않은 재료는 놀이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특성을 지닙니다. 그러니 이러한 놀이재료는 연령에 따라 다양하고 창의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어린자녀를 둔 가정이 향기나무 놀잇감으로 만들어내는 놀이와 초등고학년 자녀를 둔 가정이 만들어내는 놀이가 달라지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동일한 놀잇감이 대상의 연령에 따라 다양한 성경놀이를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구조화된 도구는 여러 연령의 가족을 통합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코로나시대에, 가정의 세대통합을 이루어 가정을 성소로 세우고자 하는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세대통합형 신앙교육컨텐츠를 제공합니다.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놀이터 또한 신청자의 대부분이 영유아 부서였던 예년에 비해서, 올해부터는 점차 영아에서부터 초등고학년에 이르는 모든 가정이 참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의 신앙교육컨텐츠로 전 연령의 가족이 말씀 안에서 하나되는 경험을 하니 얼마나 복된지 모릅니다.
둘째,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는 가족을 말씀 안에서 마주하게 하는 놀이중심 컨텐츠입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기독 가정은 자녀에게 주로 인지적, 언어적인 방법에 치우쳐 하나님 말씀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부모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한 영향력입니다. 그러한 부모가 자녀들과 마주하여 생명의 복음을 놀이로 경험한다면, 그 시간은 세상의 미디어 자극을 능가하는 생명의 고자극 시간이 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몸과 몸을 맞대며 놀이할 때 가족들은 ‘놀다보니 하나님!’, ‘놀다보니 예수님!’, ‘놀다보니 성령님!’을 전인적으로 경험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향기나무놀이를 만난 가족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생명의 향기가 되어 은은하게 퍼지는 중입니다.
셋째,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는 언택트 시대, 메타버스 환경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컨텐츠입니다. 김현철 목사님의 저서 「메타버스 교회학교」가 현재 기독교출판부문 1위를 기록하며, 한국교회에 선한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메타버스 교회학교」 중 성경학교를 다루고 있는 내용에 향기나무 우리집성경학교 컨텐츠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언텐트 시대에 점차 많은 교회가 우리집 성경학교를 실시간 온라인으로 진행하면서 기존에 해왔던 성경학교 이상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 비결은 바로 가정을 마주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비록 온라인으로 진행하지만, 온 가족이 마주하게 하여서 놀이중심으로 진행하는 우리집 성경놀이는 비대면의 제약을 뛰어 넘어 가정을 말씀으로 회복하고 치료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역자의 온라인 실시간 가이드는 성경학교 진행에 부담이 되는 부모들의 짐을 덜어주며, 온 가족을 더욱 성경놀이에 몰입하도록 돕습니다. 실시간 온라인 우리집 성경학교에 참여하는 가정들은 비록 또래와 마주할 수 없지만, 가족과 마주앉은 생명의 자리에서 지금까지 경험해본 그 어떤 대면환경보다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자리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올해도 우리집 성경학교를 통해 아름다운 이야기가 계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놀이키트를보며 유치하다고 고개를 젓던 까칠한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성경놀이를 시작하자 부드러운 눈빛으로 누구보다 즐겁게 참여하였다는 이야기’, ‘엄마인 본인이 마음의 치유를 받아 울며 놀이에 참여했다는 이야기’, ‘중학생 큰아들이 가장 천진난만하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야기’, ‘아이들이 아침마다 향기나무성경놀이 언제하냐고 묻는다는 이야기’, ‘우리집 성경학교에 은혜 받은것이 감사해서, 향기나무에 더 많은 가정성경놀이개발에 동역하고자 적지않은 물질을 후원해주신 감동적인 이야기’
가정을 말씀 안에서 마주하게 하여 일상의 자리를 성소로 세우기 위한 향기나무의 세대통합 성경놀이개발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많은 격려와 후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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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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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힘]달란트중심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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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은 달란트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춤과 게임도 모두 한 달란트입니다.
어느것이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이 아닙니다.
100명중 1등은 단 한명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달란트 중심의 교육을 하면 모든 아이들이 활기차게 사랑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달란트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귀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 달란트의 우열을 우리가 정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공부중심의 교육에서 달란트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면 많은 아이들이 행복해집니다.
교회는 이것을 학부모에게 훈련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앞으로 많은 부분들이 로봇으로 대체되는 시대에 많은 직장은 없어지고
또 새로운 직장들이 생길 것 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아이에게 주신 달란트를 찾고 세워주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순종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달란트를 찾을 때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일단 돌아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것 중 제일 잘하는 것이 아마도 그의 달란트일 것입니다.
그 달란트를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세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의 욕심이 들어가지 않아야합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마음껏 해 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십시오. 그 분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지지해주시면 달란트 발달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달란트 중심의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달란트는 더 좋고 또 어떤 달란트는 별게 아니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없이 이땅에 태어나게 한 생명은 없습니다.
그 계획이 부모의 계획가 다를수 있음을 인정하고 높은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면 됩니다.
아이들의 달란트가 아름답게 열매맺는 교육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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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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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율법과 은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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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험난한 방학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1년 6개월 동안도 거의 방학처럼 지냈는데 8월부터는 공식적이자, 본격적으로 방학이 시작되었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는 아이들이 온전히 쉴 수 있는 방학에 엄마인 나도 들뜬 마음으로 즐거운 시간을 계획하곤 했는데, 아이들과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이제는 그럴 에너지마저 사라지고 “오늘은 또 어떻게 세 끼 밥을 줘야 하나?”는 걱정이 먼저 든다.
아이들도 이미 집에서 지내는 상황과 시간에 익숙해져서 특별한 일 아니면 별 흥미를 갖지 못하고 조금씩 지쳐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럴 때, 아이들은 방학을 맞이했지만 특별히 재미있는 일이 없을 때, 하루 종일 집에서 무언가는 하면서 보내야 하는 이럴 때, 교회에서 ‘1week, 1word - 한 주에 한 구절씩 성경암송’ 책자를 나눠 주었다. 코로나19로 가정에서 신앙 훈련을 한다는 취지로 한 주에 한 말씀씩 30주 동안 계속해 12월에는 ‘전 교인 30구절 성경암송’ 대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말씀 카드를 받은 나도 시큰둥, 아이들도 시큰둥이었다.
‘이 더운 여름에 집에서 말씀 암송하는 것으로 아이들과 씨름해야 하나? 분명 아이들도 하기 싫어 할텐데… 어떻게 하지?’
이미 시작도 하지 않은 내 마음 속에 포기부터 하고픈 마음이 꿈틀꿈틀 싹트고 있었기에 암송 카드를 받고는 책상에 두고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막상 방학이 시작되고, 집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게 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암송 카드였다.
“그래, 시간이 많을 때 아이들에게 말씀 암송을 하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 한번 해보지 뭐”
이런 결심을 하고 아이들에게도 슬쩍 의견을 물었다. “교회서 암송 대회를 하는데, 대회에 나가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대” 라든지, “초등학생은 참가만 해도 상금이 있다는 말이 있던데…”라며 아이들을 살살 달랬다.
선물 이야기를 하고, 일주일에 겨우 한 구절 말씀이라며 안심을 주니, 아이들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결국 기나긴 방학을 암송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 지… ”
“야, 지은율 너 제대로 안외울래? 그 부분에서 꼭 틀리더라. 모든 지각,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 이라고”
“누나, 이 부분 너무 어려워. 도대체 지각이 뭐야? 우리가 학교 늦게가는 그 지각이야? 하나님이 지각에 뛰어나?”
“설마, 하나님이 지각하겠냐? 나도 잘 몰라. 그냥 외워. 계속 읽다보면 외워져.”
그렇게 나른했던 방학의 날들이 아이들의 암송 소리로 다시 활기차졌다. 아이들은 누가 잘 외우냐, 못 외우냐 다투기도 하지만, 서로 잘 외우고 있는지 봐주기도 하고, 틀린 부분은 반복하며 서로 짚어주면서 말씀 암송 재미에 한걸음 더 다가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방학 동안 말씀을 암송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율법적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막상 실제로 해보니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고 무엇보다 자율적으로 암송하는 태도를 보여줘서 너무 감사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깨닫고 삶 속에서 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즐거워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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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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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 나침반]코로나 시대, 경건한 가정을 향한 열망을 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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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 급여 500만원 이상, 자동차는 2000CC 이상, 예금 잔고 1억 이상, 해외여행 1년에 한 번 이상. 이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식하는 중산층의 기준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가정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기준에 조금이라도 근접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남들보다 더 안락한 집에서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자 하는 열망, 더 풍요롭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채 부모와 자녀 모두 달려갑니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 믿으며 전속력으로 달리고 또 달립니다. 그렇게 윤택한 삶을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와 학원에서 지내는 통에, 우리가 살아가는 집은 의식주만 해결하는 하숙집이 된지 오래입니다.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모든 사람이 지쳐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질주는 멈추지 않습니다. 코로나 시대는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을 새로운 동력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며 계속해서 박차를 가합니다. 부모들은 온오프라인으로 초연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오늘하루도 정제되지 않은 수많은 TMI(too much information)의 홍수로 자신만의 철학이나 주관을 잃어버린 채 달려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계속 달려가면 점점 더 행복해져야 하는데, 행복하기는커녕 가족들의 몸과 마음이 분열되고, 고장이 나고, 병이 듭니다. 시편 127편 1절(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말씀은 이에 대해 명료하게 기록합니다. 집을 세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집을 멋지게 세우면 세울수록 가정은 점점 무너집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하나님을 담지 않고 달려가면, 가정은 반드시 무너지고 고장이 나도록 설계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요? 말라기 2장 15절(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만든 가정의 본질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 보면 ‘경건한 자손’은 ‘Godly offspring’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그토록 열망하시는 자손을 설명하는 ‘Godly’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답게’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담은’(with God) 자손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 된 가정이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 하나님을 담고 살아갈 때 참된 가정으로 서도록 디자인하였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바라보면서 어찌하든지 남보다 안락하고 윤택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정을 바라보면서 어찌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부모와 경건한 자녀로 서길 열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가정이 하나님을 담은 성소로 세워지길 열망하시며, 부모들이 먼저 그러한 열망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세상의 복을 열망하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부모들의 열망을 멈춰 세워야 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인정을 향해 자녀들의 손을 맞잡고 달려가는 부모들에게 그 길의 끝에 사망이 있음을 일깨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의 브레이크로 그들을 멈춰 세워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 귀한 것은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가정이며, 그 가정 안에 하나님을 담고 살아가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임을 분명히 지도해야 합니다. 가정이 하나님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면 됩니다. 시편 1편 1절 말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은 우리 가정이 하나님 말씀에 ‘즐거워하다’와 ‘묵상하다’로 반응하며 살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코로나 시대, 교회는 점점 더 온라인 미디어와 메타버스 활용을 향한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결코 간과하지 말 것은 이러한 온라인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부모들이 세상을 향한 열망을 멈추고 하나님과의 대면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도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들이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한 동력으로 자녀들과 대면하여 신앙을 전수하도록 일깨우는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코로나시대에 만나게 되는 다양한 온라인 도구를 활용할 때에, 성도가 삶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씀을 받고, 받은 말씀을 삶속에서 살아내도록 하는 궁극성을 유념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모든 가정이 세상을 향한 열망을 멈추고 경건한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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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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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남이냐? 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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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불편한 아이를 둔 어머니가 계셨다. 가끔씩 학교에 오실 때면 교목실에 조심히 오셔서 “목사님 커피 한 잔 주실 수 있으세요?”하면서 나를 잠시 만나고 가고 하셨다.
하루는 학생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목사님, 제 소원 아니 우리 부부의 소원이 뭔지 아세요?”
“우리 애보다 하루 늦게 죽는겁니다. 불편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애를 지지해주고 끝까지 지탱해줄 사람은 우리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보다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이 말을 듣는데 가슴이 얼마나 먹먹했는지 모른다.
신약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등장한다. 귀신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그 지역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머니는 예수님을 무작정 찾아왔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탁을 한다. “우리 딸이 귀신을 들렸는데 불쌍히 여기고 고쳐 주십시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내 백성(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지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가나안 여인의 입장에서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날 상황이었다.
만약 나였다면, 분명히 따졌을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서 일한다고 말은 하면서 사람을 가려서 하냐?”고 분명히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차 부탁을 한다.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부탁을 한다.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다시 부탁을 한다.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이 여인의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귀신 들린 딸을 고쳐 주셨다.
나는 이 사건을 뒤집어서 생각해봤다. 귀신 들린 딸이 힘들었을까? 어머니가 힘들었을까?
분명히 힘든 당사자는 어머니다. 위의 제자 이야기처럼 이 땅의 부모님들은 내가 아픈 것, 내 자존심 상하는 것, 그렇게 개의치 않는다. 내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모든 것 다 내려 놓고 자녀들을 위해 희생한다. 가나안 여인 역시 정작 힘든 것은 자기 자신이었지만, 어머니가 힘들지만 힘들다고 하지 않고, 우리 딸 아이가 불쌍한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만약 귀신들린 사람이 내 딸이 아니라 남이었으면 분명히 어머니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린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내 딸이니 내가 힘든 것이 아니라 딸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 교회 교육현장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아이들이 남인가? 딸인가?
과거 우리나라 주일학교 부흥이 일어났던 시기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우리를 가르치실 때 남이 아니라 딸같이, 아들같이 여기며 우리를 신앙적으로 이끌어 주셨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수준도 높고, 교회의 여건도 잘 정비되어 있지만 과거의 신앙의 야성은 다 사라진 듯 하다.
여름을 지나가면서 올해도 예전과는 다르지만 수련회라는 이름으로, 부흥회라는 이름으로 여름 사역들을 진행했을 것이다. 이 사역 가운데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은 남이었는가? 딸이었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본질의 회복이다. 프로그램, 교육여건이 아닌 본질의 회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는 여름 사역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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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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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직박구리가 나에게 깨우쳐 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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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이었다. 평소보다 여유롭게 시작하는 토요일 아침에 아이들과 함께 산을 오르기로 했다. 날도 화창하고 기분도 좋아 아이들을 연신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한 20분쯤 길을 걸었을까, 갑자기 제일 앞서 가던 셋째가 소리를 지르며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 셋째 옆에 가서 자세히 보니, 새 한 마리가 뒤집혀서 퍼득퍼득 거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새가 (사람이 누워 있는 모양처럼) 뒤집힌 것을 보지 못해서 아픈 새가 불쌍하기보다 징그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아이들은 아픈 채로 힘없이 쓰러진 새를 불쌍히 여기며 ‘우리가 구해야 한다’고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길 바랐다.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엄마인 나는 거리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어린 새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렁이와 개미의 공격에 누워 있는 새의 날개가 잠깐 퍼득일 때는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 뒤로 숨기도 했다. 그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저 적당히 동물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다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그 자리를 뜨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30분 즈음이 흐른 후부터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여기에 계속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할 수 없어. 이제 그만 산에 가자”고 재촉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완강했다. 특히 둘째 딸은 금새 눈물이라도 뚝뚝 흐를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내게 동물병원에 전화를 하든, 어떻게 하든 이 새를 돕기 전에는 절대 산에 가지 않을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정말 난감했다. 특히 아이들이 “엄마는 교회도 다니면서 어떻게 이렇게 아픈 새를 보며 그냥 갈 생각을 할 수가 있냐”고 말할 때는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19에 전화를 했다. 모르겠다. 왜 하필 그 때 119가 생각이 났는지, 119로 전화하면 이런 위급 상황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19에 전화해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민원 상담하는 곳인 110에 전화를 하란다. 119를 끊고 다시 110에 전화를 하니 야생동물 구조와 관련된 것은 관할 구청에 알아봐야 한단다. 그리고 덧붙여서 오늘이 토요일이라 관련 민원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할 수 있다는 상세한 설명과 함께. 다시 또 영도구청에 전화를 하니, 야생동물 긴급구조대로 연락해 드디어 담당자와 전화 통화가 이뤄졌다.
담당자에게 누워있는 새 사진을 문자로 보내주니 어딘가에 부딪힌 ‘직박구리’라며 상자를 구해 옮긴 다음 잘 보관하고 있으면 오후에 구조하러 오겠다고 한다.
내가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하자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상자를 구하는 일도, 새를 보호하는 일도 아이들이 알아서 다 했다. 나는 징그러워 차마 직박구리 근처에 가기도 싫은데 둘째는 맨손으로 그 새를 만지며 상자에 담아 집까지 모시고(?) 왔다. 아이들은 집 앞 놀이터에 직바구리를 두고 눈을 떼지 못하며 긴급구조원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약 2시간 후 긴급구조차량(야생동물-천연기념물) 이라는 마크가 붙은 차가 와서 직박구리 상태를 확인하고는 잘 치료하겠다고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그제야 안심하며 놀이터에서 돌아와 밥도 먹고 자기들끼리 직박구리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이 작은 해프닝으로 인해 나는‘당황스런 사건을 만날 때 나의 말과 행동’을 직면하게 되었다. 아픈 새를 볼 때 아이들이 한 말은 “어떻게 해서든 구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라는 것이었고, 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며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기를 바랐다. 또한 아이들이 “길거리에 아파 누워있는 새를 보고 그냥 갈 수는 없다”고 말했을 때도 나는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집에 데려가서 키울 수도 없지 않냐”며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했다.
“할 수 있을 만큼 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아이들에게 쓰지 말라고 했던 문장들을 내가 계속 쓰고 있었다.
그날 밤 혼자 많은 생각들을 했다. 이론과 실제의 간극,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 등에 대해 아이들을 통해 배웠던 점들을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육아 15년 차이지만 여전히 나는 아이들을 통해 오늘도 배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함을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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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