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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자녀의 상처를 닦아주는 부모의 사랑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교회 주일학교(초등부)에서 지난 1월에 튤립 구근을 나눠주었다. 튤립 구근을 1월 즈음에 심으면 3~4월에는 예쁜 튤립 꽃이 활짝 핀다. 아이들과 함께 튤립 구근을 심고 따뜻한 곳에 놔두고 물과 정성을 함께 주면서 자라는 모습을 보았다. 한창 싹이 나고 잎에 영글기 시작할 때, 아이들이 “엄마, 튤립 구근에 곰팡이가 피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 튤립은 다른 것보다 키가 작아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들 말을 듣고 튤립을 심은 화분을 보니 정말로 몇몇 튤립은 깨끗하게 잘 자라는데 구근에 곰팡이가 생긴 튤립은 일반 튤립에 비해 키가 1/3밖에 되지 않고 줄기의 색도 짙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곰팡이가 핀 튤립 구근을 조심히 흙에서 꺼내 살살 닦아내고 그래도 깨끗해지지 않으면 그 부분을 칼로 도려내 주어 다시 화분에 심었다. “구근의 일부를 도려냈는데, 과연 잘 자랄까? 혹시, 영양분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해 꽃을 피우지 못하면 어쩌지?” 한번도 해보지 않는 일을 하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이들이 기쁨의 찬 소리로 나를 불렀다. “엄마, 엄마, 지난번에 곰팡이 났던거 봐요. 저렇게 빨리 자랐어요. 이제 건강한 튤립과 키가 비슷하게 되었어요” 정말이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키도 작고 흐물흐물 했던 튤립이 일주일 만에 건강한 튤립과 비슷한 속도와 모양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튤립 구근을 심고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뿌리가 깨끗해야 튤립이 바로 자라듯 아이들이 바른 신앙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부분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숱하게 상처가 나고 분별력을 잃은 채 살아갈 수 있지만, 그때마다 튤립 구근에 핀 곰팡이를 깨끗하게 닦아주듯 아이의 상처를 낫게 해주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끔 코칭 역할을 부모가 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어렸을 때는 아름다운 꽃처럼 조심조심 정성껏 키우다가, 사춘기가 되어 엄마 말을 듣지 않을 때면 그만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튤립을 보며 헝클어진 마음을 다시 잡는다. 금방이라도 시들 것 같았던, 너무 키가 작아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할 것 같은 튤립 뿌리의 더러움들을 닦아내고 상처를 도려내니 다시 쑥쑥 자라며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보이지 않는 아픔과 상처를 보고 닦아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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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3-10
  • [다음세대 칼럼]매일 다른 하나님
    저희 둘째 딸 예나는 일반 학교가 아닌 탈북자 대안학교 장대현학교에서 중등 3년 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2학년 과정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둘째딸 예나와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나가 2017년 12월 25일 성탄절에 교회에서 입교 문답을 앞두고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예나야, 내일 아침에 교회 당회 장로님들 앞에서 너의 신앙을 고백하고 대답하는 시간을 가져야해. 원래는 4주간 교회에서 문답공부를 하고 문답을 받아야 하는데, 장로님들이 예나가 기숙학교에 있다는 이유로 아빠에게 너의 신앙을 잘 점검해서 문답받도록 준비시켜 달라고 하셨어. 그래서 아빠가 오늘 예나의 신앙고백을 먼저 확인하고 내일 교회에서 입교 문답을 받도록 하자” “입교 문답은 엄마와 아빠가 예나가 2004년에 태어났을 때 교회에서 우리 가정에 맡겨주신 선물인 예나를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잘 키우겠습니다고 고백하면서 유아세례를 받았어. 유아세례를 받은 예나가 이제 열다섯살이 되어서 스스로 엄마아빠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예식이 입교문답식이라는거야. 그래서 예나는 이미 아기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진 않을 거야.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교인이 되는거지. 그래서 아빠가 지금부터 몇가지 묻도록 할게.” “1. 예나는 예나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나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니?” 그러자 예나가 “그러면 안 믿나? 당연히 믿지”라고 대답을 하면서 당연한걸 왜 물어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2. 예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고, 그 하나님이 예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계셔. 그리고 그것은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고 살어”라고 답을 이어 갔습니다. “3. 아빠가 하나만 더 묻자. 방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느낀다고 답을 했는데, 예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니?”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나가 “그게뭔말인데? 아빠한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데? 그걸 어떻게 짧게 말할 수 있어?”라면서 저에게 질문을 하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랑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이런 식으로 표현하잖아. 그래서 예나한테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묻는거야”라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예나가 저를 참 한심한 듯 쳐다보더니 “아빠, 아빠는 하나님을 한가지로 표현이 가능해? 나는 하나님이 매일 매일 달라. 어떤 날은 하나님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셔. 어떤 날은 나한테 약속을 해주시기도 해. 어떤 날은 위로도 해주셔. 어떤 날은 나를 부담스럽게도 하셔. 또 어떤 날은 기다려주시기도 해. 매일매일 달라”라고 답을 했습니다. 기숙사에서 딸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차 안에서 “저 녀석은 하나님을 진짜 만났다”라는 확신과 함께 감사의 눈물이 운전 중 흘러 내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은혜도 있지만 믿음의 가정 안에서, 부모의 등을 보고, 부모의 믿음의 선택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들어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앙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내 딸 아이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매일 다르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매일 증명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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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8
  • [다음세대 이야기]집중을 위한 단순화-다음세대에 대한 용례적 연구에 앞서서
    포스트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경험해야하는 가장 큰 위기중의 하나가 전통적 교회론의 위기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에도 많은 도전을 받았고 위기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 현장예배의 위기입니다. 이 현장예배의 위기에 봉착하게 됨과 동시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할 현장사역도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못할 뿐 아니라 현장 사역에 위기가 오니까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교회론이 총체적으로 무너지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교회론에 대한 총체적인 재성찰을 통한 재정립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앞으로 코로나가 진정이 되더라도 온라인 예배나 또는 비대면 사역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 진단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론에 대한 총체적인 재성찰을 통한 재정립해야 할 상황에서 덴버 신학대학원의 정성욱 교수는 교회론에는 두 가지 중심이 되는 관점이 있다고 봅니다. 먼저는 조직적 교회론입니다. 이것이 포스트 코로나가 오기 전에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교회론이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하나의 조직 또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 조직적 교회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배가 중심입니다. 이 현장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교회론은 현장예배가 중심이 되니까, ‘대면예배만 참 예배다’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론은 직분 중심으로 관료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조직적 교회는 회의 중심입니다.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등의 회의가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조직교회는 건물 중심입니다. 보이는 예배당과 교회 건물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러한 교회론이 한국교회 135년 동안 지배해 온 것입니다. 조직적 교회론에서 유기적 교회론으로 옮겨 가야하는데 교회를 직분 중심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은사 중심으로 섬깁니다. 은사에 따른 기능 중심으로 섬김이 일어나는 것이 유기적 교회입니다. 그리고 관계 중심입니다. 상호 연합을 강조하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집중합니다. 두 번째는 막힘이 없는 소통을 하는 교회입니다. 내외면적 나눔입니다. 외면적 나눔은 시간, 물질을 나누는 것이고 내면적 나눔은 고민, 갈등, 염려, 두려움 등을 나누고, 내가 슬퍼하는 것을 나누고 그래서 내면적 나눔 외면적 나눔이 아주 적극적으로 일어나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기적 교회론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생명의 흐름을 강조합니다. 생명의 흐름이라는 것은 교회의 생명력은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생명의 흐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경험하고, 그 생명의 풍성함을 경험하고, 풍성한 생명력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선험적으로 정성욱 교수의 교회론을 서술한 이유는 건강한 미래교회의 DNA가 다음세대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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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8
  • [신앙교육 나침반]믿음의 부모를 일으켜라1
    2020년 봄, ‘코로나?’라며 가볍게 물음표를 던졌던 존재는 어느새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파괴시켜버렸습니다. 특히 매 주일 예배당과 주일학교를 향했던 신앙생활의 일상이 정지되어버렸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은 계속되는 고통 앞에 무기력한 채로 쓰러졌습니다. 마치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준 마른 뼈의 환상과 같습니다. 골짜기 지면에 말라비틀어진 채로 사방에 흩어져있는 뼈들과 같습니다. 예배당에 나가 예배드리지 못하니 생명을 잃은 마른뼈처럼 이리저리 쓰러져버렸습니다. 어린자녀를 둔 부모들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잠깐이라고 생각했던 펜데믹 사태가 1년이 다되어가자, 처음에는 우왕좌왕 고민하더니 이제는 아예 손을 놓고 자포자기해버린 듯합니다. 교회와 가정 모두 유아부, 유치부,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부 같은 주일학교 조직과 프로그램이 다시 회복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겁니다. 펜데믹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가는 어린자녀들은 태어나서 교회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하였으며, 예배는 미디어를 통해서 드리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이러한 자녀세대를 향하여 그 누구도 심각성과 절박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교회와 가정 모두 그러한 듯합니다. 교회는 당회 때마다 코로나 사태에 청장년들을 잃지 않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느라 뜨거운 논쟁을 벌입니다. 부모들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들의 신앙을 잃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띤 논쟁과 고민의 주제에 ‘자녀세대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 교회와 가정 모두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자녀세대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방관하고 있을까요? 저는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부모들이 자녀세대를 교회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단지 교회학교에 소속되어 교육받아야 할 대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παιδίον, little children)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복음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린자녀들을 예수님과의 만남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지금 당장 복음으로 살려내어야 할 존재, 즉 목양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린자녀들의 미성숙한 발달을 근거로 자녀의 신앙 역시 미성숙하다고 보았습니다. 많은 교회와 가정이 이러한 세상적 인식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로 보면, 교회 주일학교는 자녀세대가 청장년이 될 때까지 신앙을 연습시키는 교육프로그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주일학교를 예배와 신앙생활을 연습시키는 교육기관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주일학교 교육으로부터 단절된 것이 크게 위기가 되지 못합니다. 단지 코로나가 잠잠해져서 주일학교가 다시 재개되면 기독교 연습교육은 다시 시작될 것이니까요.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렸으면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잘못된 인식은 전혀 바꾸지 못하나봅니다. 한국교회와 가정은 자녀세대를 향해 지금 당장 살려내어야 할 영혼이 아니므로 ‘절박함’의 대상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 아이들은 지금 당장 예수님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정말 그러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론을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예수님의 강력한 반박문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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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8
  •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소우주인 너의 머리를, 엄마는 지켜주고 싶어”
    “엄마, 이제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 반에 스마트폰이 없는 아이는 나 뿐이에요. 줌 수업하고 e-학습터 때문에 없던 아이들도 다 스마트폰을 샀어요. 나도 사주세요” 아이를 키우면서 의견이 대립할 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아이에게 설득 당해 요구를 들어줄 때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접점을 찾아 서로 조금씩 양보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협의 여지 없이 나의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다. 스마트폰은 처음부터 나와 아이 사이에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스마트폰의 유혹이 아이가 아닌 내게 있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주위에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엄마가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면 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제대로 챙길 수가 없어. 아이를 위해서라도 스마트폰을 해줘야해. 요즘에 뭐, 인터넷 안되는 키즈폰 이런 것도 많던데 그거라도 하나 해줘. 옆에서 보는 내가 더 불안하다” 나는 8살이 된 아이라면 혼자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더라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험해졌기에 요즘에는 안전 장치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권유했다. 맞는 말이긴 하나 설득은 되지 않았다. 아이도 처음에는 스마트폰을 이야기 하더니, 내가 스마트폰의 필요 이유를 물으며 어린 나이에 스마트폰을 했을 때의 유해성에 대해 이야기하니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고 급기야 지난해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스마트폰, 패드, 노트북 등으로 수업해야 하는 상황이 잦아지니 아이는 본격적으로 필요성을 내세우며 당당히 요구했다. “엄마, 6학년 중에 스마트폰 없는 애는 나 밖에 없어요.(물론 나는 이 말이 거짓인 걸 알고 있다) 줌 수업하는데 엄마 노트북으로만 하는거 불편해요. 스마트폰 사주세요” 코로나 상황에서, 13살인 아이에게 아직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은 내게 어떤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엄마’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세월이 바뀌고 부모가 살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데 아직까지 엄마 고집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그럴 싸한 명분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이 바뀌었기에 손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스마트폰이 13살 아이에게 필수품인 것일까? 점심 시간에 가끔 회사 주위를 산책할 때가 있다. 마침 인근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우리 아이들 또래와 비슷한 아이들이 있으면 눈여겨 보는 편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주위를 갈 때마다 보는 풍경은 비슷하다. 학교 앞 담장에 주르르 앉아 스마트폰에 눈을 떼지 못하고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 여름이면 여름, 겨울이면 겨울 할 거 없이 학교 앞 아이들은 대부분 스마트폰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놀이미디어교육센터 권장희 소장은 “생각의 힘, 자기의 힘을 키워야 할 나이에 그 힘을 키우는 것을 방해하는 스마트폰이 초등학생들에게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고 말한다. 말랑말랑한 두뇌, 생각하는 힘 등은 어린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작은 우주인 아이들의 머리에 어떠한 것을 주입하느냐에 따라 10년 후, 20년 후가 완전히 달라진다.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이 아이의 미래를 내다보고 지금 해야 할 것들을 코칭하는 것이라면, 아이의 욕구에 충족하는 스마트폰을 건네는 것보다, 생각을 키울 수 있는 책을 권하고,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관계 등을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작은 우주인 우리 아이들의 머리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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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2-10
  •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코로나19로 집에만 있는 아이들, 가정에서 홈소큐로 신앙 훈련 하기
    “엄마, 밥 주세요” “엄마, 줌 들어갈 시간이에요” “엄마, 점심은 언제 먹어요?” “엄마, 밖에 나가고 싶은데 못나가죠?” “엄마, 오늘은 부산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몇 명 나왔어요?” “엄마, 엄마, 엄마” 2020년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우리 집에서 들려오는 보통의 대화이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아이들 4명이 쉬지 않고 엄마를 부른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하루에 족히 천 번 정도는 엄마를 부르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일을 하기에 낮에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도 있지만 그럼에도 1년 동안 보통의 일상에서 벗어난 양육과 교육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낯설고 버거웠다. 특히,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비대면 예배가 늘어나면서 아이들의 신앙 교육 또한 가정에서 돌봐야 함으로 엄마의 어깨가 날로 날로 무거워지는 듯했다. 비대면 예배가 길어지면서 아이들 또한 주일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에서 조금씩 흐트러지더니 급기야는 “엄마,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는데 꼭 세수해야 해요?”라는 말까지 나오고 어떤 날은 “배고프니까 라면 먹으면서 예배 드리면 안돼요?”라는 아이들의 요청 사항도 있었다. 물론 그 때마다 때로는 설명으로, 때로는 강한 어조로, 때로는 훈계로 이야기 하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집에서 아이들 스스로 말씀을 읽게 하고, 예배를 드리게 할 수는 없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깊어질 즈음, 아이들이 다니는 교회의 주일학교 부서(초등부)에서 ‘홈쇼큐 통장’을 받아왔다. 3학년인 둘째 딸은 그 통장을 나에게 자랑하듯 보여주며 “엄마, 나 이제 혼자 큐티할거야. 그러면 엄마가 매일 이 통장에 싸인해줘야 해. 엄마한테 확인 받아서 다시 교회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달란트를 준대. 나 달란트 많이 모아서 갖고 싶은거 다 살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의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한마디로 ‘말씀 통장’이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넣으면 차곡차곡 쌓이듯이 가정에서 말씀을 읽거나, 큐티를 하거나, 소요리문답을 하면 부모님이 아이의 통장에 도장이나 싸인을 찍어주는 것이다. 참 신기하게, 이게 뭐라고, 이 작은 통장이 아이에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나보다. 우리 집에 있는 초등부 3명이 매일 스스로 큐티를 하고(물론 통장에 엄마 확인을 받아 나중에 달란트를 많이 받을 마음이지만) 엄마에게 매일 확인을 받는 것이다. 예전에는 “말씀 읽어, 큐티 좀 해”라고 잔소리를 해도 시큰둥하던 아이들이 홈소큐 통장에 차곡차곡 확인을 받기 위해 스스로 큐티 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놀랄 뿐이다. 코로나로 인해 가정에서 아이들의 신앙을 잡아 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마침 주일학교에서 통장을 이용해 부모님과 함께 훈련할 수 있도록 해 주어서 참 감사했다. 코로나19로 아이들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요즘,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가정에서 체계적으로 신앙 훈련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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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1-01-06
  •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우리 집에서 가정예배를 가장 드리기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엄마.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5시. 일반인들의 퇴근 시간 보다는 빠르지만 그렇다고 아이들과 함께하기에 넉넉한 오후 시작 시간은 아니다. 여느 일하는 엄마들이 그렇듯 나 또한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침에 미처 다 치우지 못한 거실, 방 정리를 시작으로 아이들 숙제 봐주기, 저녁 준비하기, 빨래 개기 등 산더미처럼 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퇴근 후 집에서 평안을 누리며 쉬는 것이 아니라 퇴근 후 또 다른 ‘육아 및 집안일 출근’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힘이 없고 지치지만, 아이들은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니 다시 새 힘을 내고 정리할 것들을 하나 둘 치운다. 아이들에게 저녁을 다 먹이고, 샤워까지 한 후 그야말로 나 지칠대로 지쳐, 아이들이 그저 조용히 책읽다 잠들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딱 그 때, 둘째가 이야기한다. “엄마, 가정 예배 준비할까요?” “어… 어… 그래, 오늘 가정 예배 하는 날이지… 그래 조금만, 엄마 준비해야 하니 10분만 있다 하자.” 그래, 맞다. 오늘은 화요일, 가정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매주 식탁에 모여 함께 찬양도 부르고 내가 준비한 가정 예배 순서지에 아이들 사진도 있으니 아이들은 가정 예배 드리는 시간이 신나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1년 전만 하더라도 일주일이 [주일날 예배드리고, 월요일은 쉬고, 화요일은 가정예배, 수요일은 교회에서 수요예배, 목요일은 소요리문답 가정예배, 금요일은 교회에서 금요기도회, 토요일은 주일 준비하며 성경 읽거나 쓰기] 이런 식의 루틴으로 돌아갔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한번 가정 예배 드리지만 그 때는 무슨 열심과 열정이 있었는지 아이들과 일주일 내내 예배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매주일 아이들과 함께 나눌 말씀을 준비하고 편집하는 일에 나는 쉽게 지치고 힘들어하는데 아이들은 할 때마다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포함하면 일주일 내내 예배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 나는 그만하고 싶은데 아이들은 화요일, 목요일만 되면 가정 예배 드리자고 먼저 요청하며 기다리고 있다. 사실, 나는 아이들과 20~30분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30분 이상을 혼자서 준비한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찬양을 고르고, 말씀을 읽은 후 아이들과 함께 나눌 내용들을 아이들 시선에서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함께 기도할 내용들을 정한다. 이 내용들이 다 정해지면 가정 예배 순서지를 만든다. 가정 예배 순서지는 오직 우리 가족의 이름과 사진만 들어있다. 처음에 순서지를 만들 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예배 순서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계속 하다보니 오직 우리 가정 예배만을 위한 순서지를 계획했고, 아이들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넣으면 더 좋아할 것이라 생각해서 해보니 실제로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고 행복해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지겹거나 따분한 것이 아닌 즐겁고 재미있다는 인식이 가정예배로부터 조금씩 확립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매일 한 시간 고민하면 아이들이 즐겁게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니 나도 이 작업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애석하게도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 잘 준비해 막상 예배를 드릴려고 하면 너무 피곤하고 힘들고 하기 싫은 생각이 마음 속에 가득 찬다. 즉, 우리 집에서 가정 예배를 가장 드리기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나인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을 보며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면 아이들이 부르는 또롱또롱한 찬양 소리, 더듬더듬 읽지만 말씀을 한 절 한 절 읽으려고 하는 예쁜 입, 어렵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해보려고 하는 마음을 보면 없던 힘이 다시 생겨나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하루 하루 예배 생활이 쌓이다보면 가정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매일의 가정 예배가 자양분이 되어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도 넉넉히 승리하는 힘을 얻을 것이다. 그 자양분을 위해 엄마는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할 예배를 고민하고 준비한다. 비록 너무 피곤해 잠이 쏟아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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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2
  •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엄마, 나는 달을 믿지 않아서 소원도 안 적었어”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열심히 학교를 잘 다니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부모들은 대부분 느끼겠지만,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휴대폰 액정에 ‘아이 담임선생님’이란 문구가 뜨면 본능적으로 불안함이 밀려온다. “우리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났나?” 등 발생하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의 나래를 펴며 미리 걱정한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둡지 만은 않았다. “은성이 어머니, 저 담임 ㅇㅇ선생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무슨 일이 있나요?” 선생님이 별일 아니라고 운을 떼며 시작한 이야기는 실제로 선생님에게는 큰 일이 아니었지만 부모인 나의 입장에서는 아주 큰 일이었다. 추석을 앞둔 국어 시간이라 그 날은 ‘달과 소원’에 관한 내용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달을 크고 동그랗게 그린 다음에 음력으로 8월 15일이 되면 달이 엄청 큰 원이 되며 아름답게 빛난다고 알려주며 달에게 소원을 비는 우리 나라 풍습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펴게 한 다음 문제를 읽고 답을 쓰게 했다. 문제는 다음과 같이 나왔다. “친구들이 이뤘으면 하는 소원이 있죠? 크고 둥근 달에게 소원을 말해보세요. 소원이 이뤄질 수도 있어요.” 문제를 읽고 1학년 학생들은 하나 둘 생각하며 자신의 소원을 책에 또박또박 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첫째 은성이는 쓰지도 않고 멀뚱멀뚱 담임선생님만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은성이에게 “너는 왜 안쓰고 있어? 소원이 없어?”라고 말하니, 아이가 “그게 아니라, 저는 쓸 수가 없어요”라고 말을 했단다. 그리고 뒤에 따라 오는 말이 선생님을 당항하게 했다. “저는 교회 다니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달에게 소원 빌면 안돼요”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아이들을 가르쳐 온 선생님은 이 부분을 수많은 아이들에게 설명했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달에게 소원을 말할 수 없다고 한 아이는 우리 첫째가 유일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날 상황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선생님은 내게 “어머니, 제가 은성이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했는데도 결국 소원을 안적었어요. 만약, 오늘 은성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대략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만 알고 있으세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선생님과 통화를 마치며 그날 있었던 아이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첫째는 엄마가 A를 말하면 A라고 있는 그대로 믿는, 그런 아이였다. 집에서 아이들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을 읽을 때도 다른 아이들은 “이건 왜 그래요? 예수님은 왜 선악과를 먹었어요?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해요?” 등등 궁금한 것도 많고 의심스런 질문도 많은데 첫째는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편이다. 큰 아이를 불러 물었다. 큰 일도 아니고, 단순히 학교에서 달에게 소원을 적는 것인데 굳이 안 한 이유가 있냐고. “엄마, 지난 주 집에서 예배 드릴 때 기억해요? 하나님 말고 다른 것들에게 비는 것은 다 우상이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우상숭배 하는 거 제일 싫어하고. 달에게 소원 비는 것도 우상숭배 잖아요. 나는 달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 할 수 없어서 소원도 안 적었어요.”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느라 애 쓴 아이의 모습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가, 융통성 없는 저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만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가 나름대로 자신의 신앙에서 갈등을 했고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신앙 선택의 기준이 집에서 함께 한 예배고 말씀이라는 것이 아이들을 가정에서 말씀으로 가르치려고 애쓴 나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물론,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아이에게 충분히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맛에 힘들지만 가정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린다. 아이들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수많은 선택 앞에 기준이 될 수 있는 가치가 형성되기를 바라며 힘들지만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말씀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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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0-11-04
  •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미술 학원, 피아노 학원, 줄넘기 학원도 있는데 왜 성경 학원은 없을까? 없으면 내가 하지 뭐!’
    이번 호(872호)부터 도서출판 엠마우스 김희정 대표의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를 싣습니다. 교계 기자로 활동하다 기독교 서적 출판에 사명을 갖고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김희정 대표는 4명의 자녀를 둔 엄마이기도 합니다. 첫째가 글을 읽기 시작할 무렵 ‘아이와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엄마는 말씀을 읽고, 아이는 그 말씀에 관한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만들기를 한 것이 아이와 함께 한 신앙 활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아이들이 한 명씩 늘어갈 때마다 소요리문답, 가정 예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과 함께 가정에서 신앙 훈련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네 명의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정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막내가 책상 위를 뛰어다녀 15초에 한번씩 다시 의자에 앉혀야 하는 일 등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희정 대표는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워킹맘으로 네 명의 자녀를 바른 크리스천으로 양육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신앙 훈련이 중요한 이 때, 4명의 아이들과 좌충우돌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김희정 대표의 자녀 양육기를 통해 이 시대 많은 크리스천 엄마들의 삶을 나누고 공감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저녁 식사 후, 나는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하면 아이들은 샤워를 합니다. 가끔은 욕실에서 물풍선 놀이도 하고 비눗방울 놀이도 하며 3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기도 하지만 일단 내버려 둡니다. 그 시간에 충분히 놀아야 이후에 내가 “이제 나와서 예배 드리자”고 말하면 불평하지 않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과 함께 모이는 책상 위를 정리한 다음 그날 아이들과 함께 할 자료들을 올려 놓고 그제야 아이들을 부릅니다. “이제 그만 씻고 나와, 엄마 준비 다했어” 한번에 말해서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절대 그럴 리가 없죠. “빨리 나와, 빨리. 마지막에 나오는 애는 욕실 청소 다 해야 한다”고 협박이 섞인 투로 말하면 그제서야 부랴 부랴 나와 옷을 입고 책상에 앉습니다. “우리 오늘은 소요리 문답하는 날이지. 엄마가 프린트 해 준거 먼저 봐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처녀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학원’이었습니다. 학교 주변, 상가 주변, 아파트 주변 등 고개를 들면 학원 이름이 빼곡히 펼쳐졌습니다. 피아노 학원은 기본이고, 영어, 논술, 태권도, 심지어 줄넘기 학원도 있었습니다. 그렇죠. 학교 다닐 때는 이것 저것 많이 배우고 경험해야 하니 이런 학원들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 당연하다면, 크리스천 아이들을 위한 학원, 왜 성경 학원은 없을까? 교회 주변에 그런 학원 하나씩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이런 조금 다른 생각 끝에, ‘성경 학원이 없으면 집에서 내가 우리 아이들 성경 학원 선생님 하지 뭐!’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후 내 아이가 태어나면서 집에서 본격적으로 우리 아이들만을 위한 성경 학원을 차렸습니다. 첫째가 13살인 지금까지 이 학원은 계속 운영돼 오고 있지만 매달 수강료가 들어오지 않아 적자이고 말을 듣지 않는 4명의 아이들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도 엄마인 저는 오늘도 아이들의 신앙을 위해 뭔가를 공부하고, 뭔가를 만듭니다. 한국기독신문 지면을 통해 저의 이런 좌충우돌 육아기를 전하게 되어 부끄럽기도 하지만 저와 같이 아이를 양육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어머니들과 함께 나누고 자녀들을 잘 키워보자는 생각으로 글을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저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힘들지만 부모와 함께 신앙 훈련을 하는 가정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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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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