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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믿음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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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가페의 사랑과 비슷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보면 아무런 조건이 없고 무한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물려줘야 할까요?’
우리가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자녀들을 위하는 것인지에 대해 창세기 26장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절에서 11절 말씀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10절에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있을 때 흉년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런데 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흉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브람 때에 일어난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해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던 그랄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아브람 때에 흉년이 들었을 때는 아브람과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갈려고 할 때에 창세기 26장 2절에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은 이삭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흉년이 들어서 살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축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 지역에 머무르게 됩니다.
여기서 가나안 땅은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신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아야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때로는 우리 인생에 흉년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부모의 입장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줘야 될 중요한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어느 종교든지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참 진리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세의 때에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 밖에도 세상에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심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만이 우리가 믿고 따라에 될 유일한 삶의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물려줘야 할것인가?’
자녀들이 우리를 통해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도록 힘쓰는 것은 우리가 평생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힘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언제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인생의 흉년에 관계 없이 언제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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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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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나침반] 친구가 가득한 교회로 자녀세대가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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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열두 살, 아홉 살이 된 아이들과 우비만 입고 밖으로 나간다. 음악을 틀지 않아도, 온 세상 가득한 레인 비트는 온 가족을 춤추게 만든다. 함께 첨벙첨벙 뛰며 물을 튀기고, 나뭇잎 배를 만들어 물웅덩이에 띄운다. 그 순간, 남편과 나는 열두 살, 아홉 살로 돌아간 것과 같이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어, 어느새 아이들과 몸과 마음의 온전한 일체감을 경험한다.
심각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 대부분은 병리학적인 목적으로 놀이치료를 처방받는다. 정서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정서적 공급을 충분히 받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로인하여, 아이들은 일상에서 어려움과 도전을 만날 때에, 적절히 반응하는 자기만의 전략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로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놀이는 놀이하는 대상과 순수한 정서적 교감을 느낄 수 있으며, 아픈 아이들이 세상에 반응하는 자신만의 전략을 하나씩 만들어갈 수 있는 보석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자녀세대들의 마음이 다치고 상하여 있다. 마음이 다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 아이들의 마음이 다쳤을까? 아이들을 순수한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끊임없이 가르치고 채우려는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이 아이들의 마음을 점점 시들게 만들고 있다.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지식이 가득한 바리새인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기며 가까이 와서 쓰다듬어 치료하는 친구였다.
지금 우리 자녀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이다. 친구라면, 무엇을 할까? 친구라면, 함께 노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 좋은 친구는 함께 노는 친구이다.
교회의 모든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큐티는 잘 했는지, 예배태도는 정숙한지, 밑줄은 잘 채우고, 공과 만들기는 잘 하는지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교사들만 가득한 교회는, 아이들이 가기 싫은 교회이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함께 웃어주고, 함께 뛰고, 잡으러 가고, 잡히고, 재미있게 놀아주는 어른친구,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 삼촌 친구, 이모 친구, 또래 친구가 가득한 교회는, 아이들이 날마다 가고 싶은 교회이다.
온 교회의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서 매 주일 신나게 놀이하면 참 좋겠다. 영유아, 어린 아동들이나 모여서 하는 놀이를 왜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다시 한 번 대답하고 싶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마음이 아픕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목사님, 선생님들이 모두 친구로 변신해야합니다! 아이들에게 친구는 ‘같이 노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같이 놀아야 합니다.”
온 교회가 진지하고 신중하게 철저히 준비하여 함께 놀이하는 시간을 준비했으면 좋겠다. 단순히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녀세대들의 마음을 돌보고 치료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전략적으로 마련하면 좋겠다. 이 일을 위해서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은 복음놀이 전문가 양성과정을 5월 중 진행한다. 향기나무 성경놀이는 복음으로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의 친구가 되어 즐겁게 하나 되는 놀이이다. 또한 복음으로 가정을 하나 되게 하는 놀이이며, 복음으로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 신앙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놀이이다. 10가지 성경놀이를 배우는 자리가 아니라 1000가지 성경놀이를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문의| 향기나무 교육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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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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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부활을 바라보는 네 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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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제임스 띠소가 1894년에 그린 “우리의 구원자는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십자가를 둘러싼 여러 군상들이 참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네 가지 시선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십자가형을 집행하고 있는 로마 병정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당하게 서서 예수님의 죽음에 이들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 군주의 명령대로 아무 생각 없이 정해진 군법대로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 뿐이죠. 이들은 타인에 대한 감정 자체가 없습니다. 다만 일일뿐이니까요. 이들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지만 그 열심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 가는지, 아파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과 율법사들 같은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을 타고 보란 듯이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 있습니다. 마치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겸손하신 왕 예수님을 업신여기듯이 말입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이 땅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성공에만 집착하는 자들이죠.
세 번째로는 십자가 사건을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지나가는 구경꾼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서 크게 힘을 써서 저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또 얘기는 달라지겠죠. 그러나 패배자 예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앙에 절망에 휩싸인 십자가 밑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여인들입니다. 아마 이들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또 한 사람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자 예수님에게는 이모가 되는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 이곳에는 이렇듯 네 가지의 시선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이 중에 세 가지는 교회 밖 사람들의 시선이고 한 가지만 교회를 다니는 우리의 시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 안에 이 네 가지 시선은 모두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로마 병정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이 말하는 가치와 법칙에만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또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던 유대 종교지도들처럼 자신의 지위와 신앙연수를 자랑하며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아니면 지나가는 구경꾼들처럼 교회 출석은 그런대로 하고 성경공부 제자훈련과 각종 교회 프로그램엔 열심이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주변인의 심정으로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온전히 절망하는 여인들 옆에 서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사랑하며 믿었던 주님이 죽었을 때 여인들이 절망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끝없는 비참한 절망 다음에 부활의 소식이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칠흑 같은 죽음과 절망 속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신다는 것, 절망의 아픔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여인들의 이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네 명 모두 이름이 ‘마리아’라는 점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여자를 대표하는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쓰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쓴 맛을 단단히 본 여인의 이름이죠.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백성들에게도 고난과 절망의 순간은 찾아옵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고통과 아픔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아프게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밑에서 비통에 잠긴, 십자가 밑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흐느끼던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절망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지막 목적지는 절망과 패망의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의 나락 한 가운데 숨겨진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절망하던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보면 마리아라는 이름에는 ‘쓰다’라는 의미 외에도 또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반란’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존의 슬픔과 실패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는 반란의 여인이 바로 마리아인 것입니다. 사람의 가능성과 기대가 끊어진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부활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다음세대 사역도 코로나19 이후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벌써부터 여름행사를 축소해서 진행한다는 교회들, 교회학교가 사라져서 여름행사가 없어졌다는 교회들이 속출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고통가운데 부활의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의 반란을 일으킵시다. 이 부활절에 우리 주님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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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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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영광스럽게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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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92년도부터 청소년사역을 하다가 2014년도부터는 교회사역보다는 교회밖 학교밖 청소년들, 다른 말로 비행청소년들. 특히 죄를 지어 소년법정에 서게 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과정을 돕기도 하고, 재판 후에 돌아갈 가정이 없는 아이들의 재비행방지를 위해 대신 부모역할을 하면서 회복을 돕는 청소년회복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약 10년 동안 2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처분받아 온 아이들의 경우 검정고시를 합격하거나 생활이 달라지거나 눈에 보이는 변화들로 힘이 들어도 감사한 일들이 있어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되었습니다.
이 아들 데리고 사역하면서 참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자기 부모도 안 돌보고 포기한 아이들 데리고 사는데 안 힘듭니까?” “왜 안 힘들겠습니까? 힘들어 죽겠습니다.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힘들긴 한데 참 행복하게 사역합니다’라고 공손하게 은혜스럽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 수고많죠. 이 아이들 좀 변합니까?” ‘안 변합니다. 계속 사기치고 속이고 속을 확 뒤집어 놓습니다. 어른들은 평생을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변하든가요? 집사님은 장로님은 제자훈련도 받는데 좀 변했습니까?’라고 말하려다가 ‘워낙 방치되었던 아이들이라 시간이 좀 걸리지요. 그래도 계속 품어줘야죠’라고 아주 목사답게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처분받아 온 아이들의 경우 검정고시를 합격하거나 생활이 달라지거나 눈에 보이는 변화들로 힘이 들어도 감사한 일들이 있어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주 더 힘든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이나 일러줘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다그치면 ‘까먹었는데요. 몰랐는데요’라는 말로 사람의 속을 확 뒤집어 놓습니다. 감동스런 뮤지컬을 관람하고 돼지갈비를 실컷 잘 배불리 먹고 사라져버렸습니다. 비록 사고쳐서 재판 받아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함께 전국 곳곳을 여행 다니고 좋은 프로그램을 경험하면 좀 괜찮은 대우를 받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제 자녀들을 데리고도 이렇게 문화행사나 시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만 둥지의 아이들에게는 그 이상의 기회와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땅히 더 잘 생활해야죠. 그런데 이탈을 반복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챙겨줬는데 이런 배신을 당해야 합니까?’ 이런 것이 영광스러울까요? 아픈 아이가 회복되고 웃음을 찾고 성공하고 대학가고 하는 성공스토리가 좀 생겨야 영광스러운 것 아닙니까? 잘해주고 원망듣는게 영광스럽습니까?
저는 너무도 절망스럽고 무기력해지고 헛 일을 하는 건가라는 무력감에 참 힘들었습니다. 하나님! 이게 영광스럽습니까? 저는 주님이 걸으신 배신의 길을 안 걸으면 안될까요? 고생은 이제 그만하고 낙을 누리면서 살면 안될까요? 배신은 그만 당하고 칭찬과 인사 좀 받으면 안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안된다!”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도다”
제자 가룟 유다가 배신하여 나간 후에 주님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곧 제자의 손에 팔려 십자가 지고 죽음 당해야 하는 그 상황을 다 아시면서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절망스럽고 수치스러운 상황을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배신하는 자를 사랑하면서 배신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팔아치우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는 헌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나보다 낮은 자를 위해 겸손히 자기자신을 낮추어 생명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영광은 네가 아무 이유없이 오해받고 배신당하는거란다. 네가 둥지 아이들을 선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로 갚음받고 팔려나가는 그런 일을 위해서란다. 순종해라. 그게 바로 하늘의 영광이란다. 그게 바로 걸어야 할 영광의 길이란다. 내가 걸었던 그 길을 너도 걸어야 한다”
지금도 이탈하여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향한 안타까움 속에 주님의 영광의 길을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을 나도 영광스럽게 걸어가렵니다. 제게 은혜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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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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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나침반] 온 세대가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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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놀라운 복음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와 연합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십자가’, ‘그 부활’이 아니라 ‘나의 십자가’, ‘나의 부활’이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나의 옛사람이 함께 죽고, 예수님이 살아날 때에 나도 새사람으로 함께 살아나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강력한 부활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죄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가 되고, 오직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부활절기를 맞이하며, 이 놀라운 복음을 부모세대와 자녀세대에게 어떻게 전하십니까? 아마도 부모세대는 본당에서, 자녀세대는 교육부서에서 예배드리고, 절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이 복음의 본질에 부합한 것일까요? 이러한 모습은 결코 복음적이지 않으며 교회의 본질과도 맞지 않습니다.
이번 부활주일에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분리하지 말고, 온 세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함께 받으며, 그 놀라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서는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온 세대 간에 어떤 차별과 편견, 그리고 조금의 문턱도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사하는 ‘하나됨’을 경험하는 부활절 예배와 프로그램을 준비해보십시오. 온 세대가 평생 동안 잊지 못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부활절이 될 것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 하는 부활절 예배를 드린 후에, 그 자리에서 온 세대가 함께 부활의 복음을 경험할 수 있는 ‘복음캡슐’놀이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 사전준비: 에그 캡슐을 한 명의 성도가 하나의 캡슐을 받을 수 있는 수량으로 준비합니다. 각각의 캡슐 안에 초콜릿(또는 검은색하트), 십자가 목걸이, 왕관패치 중 하나를 넣습니다. 이때 1/4 분량의 캡슐에는 아무 내용물도 넣지 않고 비워둡니다. 모두 준비한 후에, 커다란 상자 안에 넣습니다.
■ 진행방법
① 예배를 드린 후, 모든 성도에게 에그 캡슐 하나씩 나누어줍니다.
② 진행자는 각각의 캡슐에 담긴 내용물이 의미하는 복음의 의미를 순서대로 설명합니다. 성도들은 설명을 들은 후에, 모두 일어서서 자신의 캡슐에 해당하는 복음의 말을 돌아다니면서 전합니다.
[초콜릿 캡슐]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십자가 목걸이 캡슐]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빈 캡슐] “예수님은 3일 후에 부활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왕관 캡슐]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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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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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공부냐 신앙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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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음세대 사역을 오래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있다면 “여름 수련회를 가야 하나요? 보충수업을 가야 하나요?” 이 질문입니다. “목사님! 수련회 가야 해요? 공부해야 해요?” 이거 물어보거든요. 이 질문을 받을 때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얘야! 수련회에 가면 그만큼 너는 시간을 손해 볼 수밖에 없다. 2박 3일이든, 3박 4일이든 그래! 너는 시간을 손해 보게 될 거야. 자, 게다가 말이다. 네가 수련회에 그 시간을 쏟잖아? 쏟는 동안에 분명히 다른 애들은 그만큼 공부를 더 할 거야. 그치? 그 아이들은 보충수업에 나와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할 거란 말이야. 자, 그러면 너는 그만큼 뒤쳐질 거야. 분명히 알아. 너는 3일만큼, 4일만큼 뒤쳐질 거야. 그건 하나님 만드신 법칙이야!”라고 얘기해 줘요. 그러면 애가 얼굴이 노래지기 시작합니다. “어? 이게 아닌데?” 이런 분위기로 저를 봐요. 그러면 저는 얘기를 해요. “네가 그 공부를 덜한 만큼을 충분히 다녀와서 더 열심히 해서 만회할 수 있다고 하면 너는 가도 좋아! 자, 그런데 네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다녀와서 그 3, 4일을 보충할 수 없다고 하면...” 여기까지 가면 이 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합니다. “아니, 목사님!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그 얘기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아이는 저에게 뭘 기대했을까요? 이런 것을 기대를 했겠죠. “야! 당연히 수련회에 가야지! 야! 성적?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셔! 야! 수련회에 가면 하나님이 다 책임져! 걱정하지 마! 너 갔다 오면 100점 맞아! 걱정하지 마! 가! 가!” 이런 말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그 아이가 기도한 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그 아이는 이런 기도를 하고 왔을 거예요. “하나님! 내가 믿음으로 수련회 갈 테니까 성적은 하나님이 알아서 만회해 주세요.” 여러분, 이 마음이 어디서 왔을까요? 이게 다 저희한테 온 것입니다. 어른들한테 온 거예요.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쳤어요. 은혜 받으면 다 된다.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그냥 다 맡겨두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거다. 이렇게 가르친 거에요. 그러니까 애들이 수련회에 가면 “하나님 다 해주시겠지! 머! 당연히 해주시겠지.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렇게 생각을 해요. 갔다 오면 당연히 1등하고, 당연히 뭐 하나님 날 높여 주시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얘기합니다. “야! 그거 억지다. 그리고 무지한 거다. 야!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야! 그렇게 생각하면 큰일 나!”라고 얘기해 줘요. 그럼 뭘까요? “자, 봐봐. 공부하면 100점 맞을 수 있어. 그거 맞지? 그런데 공부 안 하면 빵 점 맞는 거, 그것도 당연한 거야.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자연법칙이자, 일반 은총에 해당하는 거야. 아주 당연한 거야. 너 그거를 모르면 안 돼. 그거 억지를 쓰면 안 돼. 그거 모르면 무지한 거다. 자,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부터 중요해. 잘 들어봐. 그런데 하나님은 자연법칙만 만드신 게 아니야. 하나님은 영적인 법칙도 만드셨어. 사람들이 이걸 모르지만 우린 이걸 알잖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수련회에 나오고, 내 인생을 주님 앞에 드리면서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특별한 사명과 목적을 깨닫게 해 주셔. 그러니까 수련회를 왜 가나? 가는 만큼 공부에서 손해를 볼 거야. 그래서 가는 만큼 더 열심히 해야 해. 그러나 왜 가야 하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게 돼! 목적을 분명하게 보게 돼! 그러니까 우리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달라져! 그걸 깨닫는 자리가 수련회야! 그래서 수련회가 중요한 거야. 너 공부가 걱정되니? 공부가 밀릴까 걱정이 되니? 그거 걱정하지 말고 네 인생의 새로운 사명과 목적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기대해! 그리고 그만큼 더 깨달은 만큼 더 열심히 공부할 마음을 가지고 수련회에 가야 해!”라고 말합니다.
즉, ‘수련회냐? 공부냐?’ 가 아닌 것입니다.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의 영광을 보고 나면 그만큼 더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의 학생으로서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게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수련회냐? 공부냐?’ 가 아니라 수련회를 가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한다. 그래서 “수련회 다녀와서 더 은혜 받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이 너를 통해서 목적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실 줄로 나는 믿는다!”라고 얘기해 줍니다. “그러니 수련회를 가라!” 이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택을 하면 남들보다 분명 더 노력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게 중요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이 일하실 만큼, 우리도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지는 게 맞는 겁니다.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밀리는 게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변화된 우리, 예배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우리의 앞날을 놀랍게 열어가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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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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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참 제자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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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집나온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학교 안다니는 아이들을 학교로 돌려보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나와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교회로 돌려보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복귀시키고, 회복시키고, 보호하고 복음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100여명의 청소년들을 만납니다. 집나온 아이들, 학교 안다니는 아이들을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만납니다. 저도 사람이라 매일매일 반복된 삶에 지치고 힘이 듭니다. 이번 주에도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두 명의 집나온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 세 명이 집을 나갔습니다. 다른 두 명의 아이들을 학교로 돌려보냈는데, 학교폭력으로 신학기를 앞두고 강제전학과 퇴학이 결정되었습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 하며 실망이 컸습니다. 거의 탈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정심여자중고등학교에서 온 편지입니다. 정심여자중고등학교는 안양에 있는 소년원입니다. “쌤 저 상아에요 보고 싶어요.”라는 글로 편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필자가 챙기고 교육했던 아이입니다. 지금은 20살이 되었습니다. 재판을 받지 않고, 집을 나가 있다가 필자에게 도와달라고 온 아이입니다. 작년 9월 재판을 받고 2년간 소년원에 가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갈 집이 없어 방황했던 아이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이 왠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아이는 1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5년 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어머니는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소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10대를 소년원에서 보내는 것이 안타까운 일 일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고 10대를 잘 마무리할까 합니다. 저 여기서 종교 기독교에서 말씀 주일마다 들으며 저 성경책도 가지고 있습니다. 소년원 주일 예배에서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제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선생님~ 양을 돌보는 목자는 양 뒤에서 양을 몰아주며 양이 위험한 길로 빠지면 떨어지지 않게 양을 안전한 길로 몰아주는거 또한 목자의 일입니다. 저를 안전한 길로 몰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주님의 참 제자같아요.” 이렇게 이 아이에게 주님의 참 제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주님의 참 제자같아요.” 이 글이 계속해서 저의 마음에 남아 지친 몸과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편지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의 제자, 참된 제자로 인정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모아놓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무리들과 제자들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3년 가까이 예수님을 쫓아다닌 것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데 특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이 지금 나를 떠나도 좋다. 그러나 만약 나를 쫓아오려거든” 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누구도 좋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고자 한다면 다음의 조건을 채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적인 초청이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열려있습니다. 주께로부터 직접 세움을 받은 12제자라 해도 특권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은 전체 마가복음 중에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로 나아오는 모든 죄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을 따르길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초청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참 제자, 믿을만한 목사와 장로, 진실된 제직, 참된 성도가 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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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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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나침반] generation to 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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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ἐκκλησία)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신분, 성별, 연령을 초월하여 하나 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입니다.
16세기 개혁교회 주일학교는 교회의 이러한 본질을 회복하는 세대통합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유아, 어린이, 청소년, 장년, 노년이 모두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우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매 주일, 복음을 ‘함께’ 듣고, ‘함께’ 은혜 받으며, ‘함께’ 결단하였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면, 자연스럽게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의 신앙전수가 활발해집니다. 존 웨스터호프3세는 신앙 전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온 세대가 함께 예배드리며, 함께 복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고,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자녀세대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는지에 대한 정체성이 수립됩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예배와 프로그램은 세대와 계층과 문화를 뛰어넘고,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 되는 신비와 기쁨을 공유하는 시간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예배와 프로그램을 의도적이고, 정기적으로 마련한다면, 자녀세대들은 교회와 한 가족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세대들은 ‘함께함’의 경험 속에서, 자신이 ‘교육부서의 학생’이 아닌, ‘교회의 참된 성도, 참된 지체’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100년의 역사가 넘는 시골의 어느 교회를 만났습니다. 그 교회는 수많은 세월 속에,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300여명 모였던 교회가 현재는 60명 남짓 남게 되었습니다. 남은 성도들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하여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후회와 원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향기나무 사역팀을 보내셨습니다. 처음에는 주일학교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겨울성경학교를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은 저희 사역의 본질인 ‘세대통합’의 가치를 들으시고, 방향을 완전히 바꾸셔서 세대통합 겨울성경학교를 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은 저희 팀과 함께 준비 기도회 중, 간절히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향기나무 집회와 성경놀이를 통해서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이 한 말씀 붙잡고 기도하며 나아갔습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복음집회와 복음 성경놀이터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강하게 임재하셔서, 서로를 마주보게 하시고, 서로에게 미소를 짓게 하시고, 서로를 감싸 안게 하셨습니다. 그 날 참 추웠던 날씨였지만, 교회 예배당 안은 유아, 아동,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 모든 세대가 복음 안에서 기쁨으로 하나 되니, 그 온기로 인하여 참 많이도 따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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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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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다원주의를 넘어 예수님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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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러분의 자녀나 다음세대가 “왜 예수님만 믿어야 해요? 세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있고 여러 신앙들이 있는데 왜 예수님만 우리를 구원하시죠?”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원주의의 도전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원주의란 예수님만 구세주가 아니라 어느 종교나 어느 대상이나 하나님이 될 수 있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다원주의는 신은 마치 산 정상에 있는 것과 같은데 인간이 어떤 길로든 올라가기만 하면 결국에는 다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다르지만 결국은 신에게 다다를 수 있으니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라고 하는 게 다원주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다원주의 논리에서는 누구를 믿느냐 하는 신앙의 대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중요하지 않고 도리어 믿는 인간의 열심히 중요해집니다. 얼마나 열심히 믿냐, 얼마나 열심히 산에 올라가느냐, 얼마나 열심히 정성을 드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분들을 여러분들 아시잖습니까?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그 새벽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서 그 물을 뜨고 그 깨끗한 물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하는데 그 기도를 누가 듣는지를 모릅니다. 그걸 누구한테 비는 겁니까? 달님한테 비는 겁니까? 별님입니까? 구름입니까? 하늘이 듣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 기도를 열심히 드립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직장 다니는 분들 보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개업하면서 돼지머리 놓고 그 코에 돈을 꽂아 넣으면서 고사를 지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 정성을 누가 받는 건지 아냐고 물어보셨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 정성은 갸륵하지만, 그 정성이 누구에게 가는 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위안을 받는 겁니다. “난 열심히는 했어. 나는 그냥 최선을 다했어. 정성껏 했어. 그러니까 내가 정성을 드렸으니까 좋은 결과가 날 거야.” 그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다원주의는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기독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모든 다원주의를 부숴버립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 모든 다원주의, 모든 실용주의를 부숴버리는 게 기독교입니다. 다원주의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만약에 산 위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이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올라가면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정상의 자리를 박차고 우리에게 내려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높은 곳에 가만히 앉아서 “야! 올라와 봐! 실력껏 올라와! 올라오는 사람만 내가 만날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갈 능력이 없는 우리, 하나님을 만날 능력이 없는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는 모든 종교를 뒤집어엎습니다. 모든 종교가 다 “열심히 믿어라! 잘 믿어라! 최선을 다해라! 너희가 잘하면 하나님이 너를 만나 줄 수도 있다. 천국 갈지도 몰라!”그게 신앙이었다면 이제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끌어안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시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심과 정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를 사랑하시고 누구를 부르러 찾아가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가 중요해집니다. 그분은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돈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 이름난 사람만 품어 안는 사랑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찾아와서 만나 주십니까? 주님은 누구를 선택하셨습니까? 여기에 대한 기준을 마가복음 2장 17절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2:17)
이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의사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병든 자에게라야.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병이 들어 죽게 생겼는데 이게 난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겁니다. 난 어떻게 이 병을 치유할 수도 없고 이 병을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의사에게 목을 메고 매일매일 찾아와서 나 좀 고쳐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 그 미천한 사람, 그 막막한 사람, 그 병든 자, 그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쓸 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영혼의 치료자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다음세대가 믿고 따를 진리가 되십니다. 우리, 다원주의의 도전을 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부모와 교사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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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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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평범하게 살아봤어야 평범하게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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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누가 책임지고 키울 수 없어 보육원에 맡겨졌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보육원 생활에 답답함을 느껴 순간적으로 가출하였는데 그때 나쁜 오빠들을 만나 성폭행과 성매매로까지 이어져 한 번의 가출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희진이는 성매매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제가 이 사건의 국선보조인이 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줄곤 자신의 비행을 부인하던 희진이가 재판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제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 이제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요. 저 사실은 가출 기간 동안 오빠들이 시켜서 성매매를 했었어요. 오빠들이 잡히면 안된다며 울산, 대전, 인천, 수원까지 데리고 다니며 시켰어요” “이제 왜 사실을 말하는거니?” “사실대로 말하면 소년원 갈까봐 겁나서 거짓말 한거예요. 처분을 잘 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는데, 이젠 처분이 어찌 되든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서받고 싶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생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잡히게 되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털어놓은 희진이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동안 성매매를 너무 많이 해서 횟수도 모르겠어요. 어떤 오빠는 하루 2~3회 정도 시켰고, 또 다른 오빠는 4~5회 정도 시켰어요. 가출한 7개월 중 5~6개월 정도 그렇게 성매매를 한 것 같아요” “가출한 후 도움받기 위해 갈 곳도 찾아갈 사람이 없었어요. 어떤 날은 정말 하기 싫어서 아무리 사정을 해도 계속 시켰어요. 딱 하루 제 생일날만이라도 안하게 해달라고 부탁부탁하여 겨우 그 날은 하지 않았어요”라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 이제부터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교복 입고 학교 다니고 싶어요”라며 희진이는 울부짖었습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아픔과 고통을 누르느라 끄억끄억거리는 소리를 내뱉으며 희진이는 힘들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저 이제 10호 소년원 보내도 갈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 그동안 잘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라는 희진이의 인사를 뒤로 하고 저는 소년원의 철문을 나왔습니다. 돌아와서 판사님에게 제출할 의견서를 정리하는 내내 희진이의 ‘이제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울부짖던 그 울음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렸습니다.
드디어 재판 날. 판사님은 희진이의 진심어린 반성하는 태도를 보시고 둥지센터에서 지내도록 선처해 주셨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판결이었습니다. 소년원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희진이도 저와 함께 둥지에서 지낼 수 있다는 말에 너무 좋아 몇 번이고 판사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희진이는 둥지에서 지내면서 중졸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희진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2개월 정도 일한 월급을 들고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몇 번의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희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희진아! 너 왜 이러니?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잖아? 교복 입고 학교 가고 싶어했잖아?”
한참 뒤에 답장이 왔습니다.
씨X. 평범하게 살아봤어야 내가 평범하게 살지. 평범하게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 뭘 더 원하는거야?
그렇게 희진이는 둥지를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보호관찰위반으로 구인장이 발부된 상태에 서울에서 불심검문으로 붙잡혀 재판을 받고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10호 처분을 받아 소년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때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아껴주시고 믿어주시고 보살펴 주셨는데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게 고작 이것 뿐이라서 죄송해요. 감사해요. 도와주셔서. 미안해요. 이런 모습 밖에 보여드리지 못해서. .... 도와주지 않으시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를 딸이라 불러주시고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 많이 못나고 부족한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고 또 주고 또 주셔서 감사해요. 한 없이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보듬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감사할게 많은데 어리석은 모습만 보여드렸네요. 후회. 당연히 되죠. 제가 늘 그랬죠.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구요. 바로 이거였네요. 제가 갚지도 용서받지도 못할 잘못. 기회는 여러 번 있었고 제 발로 그 기회들을 차버렸네요. 제가 왜 그랬던 걸까요. 도대체 왜. 어떻게 해야 저를 멈출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저는 행복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행복들을 피해 도망치려고만 할까요. 왜 저는 늘 이런 식일까요. 모르겠어요. 저도 저를 모르겠어요. 잘하려고 해봐도 그게 잘 안되요. 왜 안될까요.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서 사랑과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목말라하고 필요해 했는데 너무 오랜 기간 마르고 굳어 갈라져서 걷잡을 수 없을만큼 작아지고 작아졌어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행복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건지. 사랑과 관심을 어디에 담아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늘 힘들었던게 이거일까요. 모르겠어요. 이젠 정말 나도 나를 모르겠어요.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이 나오는데 무엇을 위해 우는 것까요.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린걸까요. 견딜 수가 없어 미치겠어요. 정말 진짜 너무 힘들어요. 저는 왜 구제불능일까요. 이렇게 못되쳐 먹은 걸까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만둘 수 있을까요. 뭐가 필요한건지 무슨 방법을 써야 하는지 하나도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너무 아프고 망가지고 힘들어서 정말 죽고만 싶어요.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요.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아픈데 아무리 생각하고 쥐어짜 내봐도 모르겠어요. 정말 죽고 싶을만큼 아파요 마음이. 원래 이렇게 쓰려던게 아니었는데 말이 변해버렸네요. 저는 감사하다고 할랬어요. 감사하다고. 너무 고마웠어요. 진심이예요. 아빠. 사랑해요. 딸 희진이가”
평범하게 산다는게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김종환이라는 가수가 그의 딸 리아킴에게 만들어 준 노래 가사 한 절 한 절이 와 닿습니다.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집에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 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론 그대가 아플 때도 약속한대로 그대 곁에 남아서 끝까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위급한 순간에 내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에 위안이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서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가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세상 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며 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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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