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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난민의 나라(1)
    2018년 500명이 넘는 낯선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해서 난민 신청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난민수용에 대한 찬반토론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등 때 아닌 난민문제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컸지만, 특별히 이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기독교인들 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읽으면서 올해 미라클 작전으로 아프칸에서 구출된 391명에게 정부는 난민보다는 특별공로자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난민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 두루의 김진 변호사는 외교부나 법무부가 국민을 의식하여 난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피하고 있어 우려된다면서 “아프간인들이 국내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부분 등에서 난민에 준하거나, 난민 지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정식 선진국 지위를 얻은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그에 걸맞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만큼, 난민문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야 한다. 난민을 반가워하고 좋아할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 많은 세금을 써야한다는 재정적인 문제뿐 아니라,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문화적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염려와 아울러 외국인 범죄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사회는 난민문제가 피할 수 없는 과제임을 직시하고 오래전부터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공존하는 것을 배워왔다. 독일생활 초기에 내가 다닌 사설 어학원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우리 반에 서글서글해 보이는 터키인 두 명과 친하게 지내면서 집으로 식사초대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터키인이 아니라, 터키 내의 박해받는 쿠르드족이고, 그중 하나는 전쟁터에서 직접 터키군인을 죽인 전사임을 알았다. 망명자로 받아들여진 이들의 어학공부를 위해 독일정부가 그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또 친하게 지낸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유고내전 때에 애인과 함께 난민으로 온 안나였다. 안나는 크로아티아계이고 그녀의 애인 사올은 보스니아계였는데, 두 사람 다 착하고 정이 많아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우리 교회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이처럼 독일에는 이미 많은 난민들, 망명자들이 살고 있었다. 본래 독일은 외국인에게 친절한 민족이 아니고 외국인이 발붙이고 살기 어려운 나라임을 히틀러 나치가 증명해주었다. 19세기 후반에서야 뒤늦게 얻은 식민지들도 1차 대전의 패전으로 다 상실했기에,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식민지인들의 유입도 적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폭발적인 경제부흥의 과정에서 터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불렀고 이들이 정착하면서 외국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유의 외국인 유입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난민이었다. 그동안도 꾸준히 정치 망명자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난민의 시작은 유고내전부터였다. 1991년부터 시작된 유고내전은 120여만 명의 난민을 만들었는데, 그 중 32만 명을 독일이 수용했다. 안나와 사올도 그들 중 하나였다. 1990년 이후 독일도 통일로 인해 많은 재정적인 부담을 겪고 있었지만, 국제적인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부만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국민들의 합의가 뒷받침 되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특별히 독일개신교회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교회는 삶의 터전을 잃고 오갈 데 없었던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실천하는데 앞장 선 것이다. 난민문제를 앞으로 좀 더 다루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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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독일이야기]정의를 위한 시민의식
    2006년 일본 오사카행 특급열차 안에서 한 치한이 옆 자리에 앉은 20대 여성을 성추행하다가 화장실에 끌고 가 30분 간 성폭행을 했다. 그런데 이 차량에 함께 있던 40여 명의 승객은 울면서 끌려가는 여성을 뻔히 보고서도 “뭘 쳐다보고 있어!”라는 치한의 고함소리에 위협을 느끼며 제지는커녕 승무원에게 신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사회 일각에서 불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로 인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도 그건 나와 무관하다면서 침묵하든지, 몸을 사리는 보신주의로 흘러가기 쉽다. 인권운동가 스탠리 코언은 세상에서 인권 침해와 그 고통의 더욱 늘어나는 이유는 불의한 가해자뿐 아니라 방관자의 완고한 ‘부인’의 태도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독일인들 속에서 이런 부분에서의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느꼈다. 어쩌면 과거 불의한 권력에 맹종하면서 그 속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웃에게 무관심한 결과, 말로 다할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한 역사가 준 교육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 교통사고가 나면 양쪽 보험회사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것이 일반화되어있지만 과거에는 양쪽 차주들이 나와 서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싸우기 일쑤였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통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주변에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라 해도 괜히 끼어들어 낭패를 보거나 불편한 일이 생기는 것이 싫어 말없이 지나쳐갔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이런 경우 목격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시비비를 가려 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재판으로 가는 경우는 증인으로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은, 억울하게 손해를 입는 일이 옳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특별히 약자가 억울한 상황에 처할 경우에 더더욱 나서려고 하는 시민의식이 강하다. 우리 교회의 전도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한번은 주차를 하다가 앞에 서있는 차에 접촉사고를 내었다. 그러자 그가 독일어에 서툰 외국인인 것을 안 차 주인이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한몫 잡을 심산으로 이전에 찌그러지고 흠이 난 곳을 가리키며 이게 다 당신 잘못이니 당신이 물어내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말이 짧아 반박하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 지나가던 할머니가 나서서 차 주인에게 따졌다. ‘내가 다 봤는데, 이 젊은이가 흠집 낸 것은 여기 한 곳 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외국인이라고 해서 덤터기 씌우려는 거냐? 재판하면 내가 이 사람의 증인을 서주겠다’ 이 말에 차 주인은 기가 죽어서 접촉사고로 흠집 난 부분만을 보상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그 할머니가 세웠던 자전거가 넘어져서 전도사의 차에 부딪히며 미세한 상처를 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잘못이니 보상하겠다며 돈을 주려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간신히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사회의 정의가 데모나 선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시민의식이 그 사회를 보다 정의롭게 세워나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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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독일이야기]정리와 질서의 나라
    독일인들이 즐겨하는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정리는 삶의 반이다.” (Ordnung ist das halbe Leben) 여기 오르드눙(Ordnung)이라는 말은 규칙, 질서, 정리정돈 등을 뜻하는 말이다. 독일에 살다보면 왜 이들이 이 말을 자주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이 단어에서 나온 ‘오르드너’라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바인더인데, 대부분의 가정이 이것을 서너 개 갖고 여기에 영수증을 비롯해서 온갖 서류들을 차곡차곡 정돈해놓는다. 보통은 3공 링 바인더인데 그 구멍 간격이 전국적으로 꼭 같다. 애들용이나 어른용이나 모든 문구류의 규격이 꼭 같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정리하는 방식이 꼭 같아, 어려서부터 배운 정리하는 법을 평생 사용하게 된다. 사회의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고 반듯하고 이것이 그들에게는 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독일인들의 질서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 아마도 도로위일 것이다. 나 역시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운전을 했지만, 기본적인 교통법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하고 다녔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이 교통법규들을 조목조목 잘 인지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경우는 사거리를 지날 때에 어느 도로가 우선인지 잘 알 수 없기에 조심해서 좌우를 살피게 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어느 도로나 우선순위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는 우선도로 표지판을 유의해야 하고,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우측도로에 우선권이 있다. 보통 우리 생각에는 직진도로나 큰 도로가 우선일 것 같은데 독일에서는 아무리 작은 도로라도 우측에서 나오는 차량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진다. 이런 규칙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자칫 사고를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교통규칙들을 잘 지키기에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있으면 상대방이 으레 서겠거니 생각하면서 좌우를 보지 않고 몰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밤중 사거리에서 아무도 없다 해도 빨간 불이면 정차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보행자 역시 빨간불에서는 건너지 않는다.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에 사람들이 빨간불에도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너가는 모습이 특이해보였다. 유럽인들 속에 팽배한 개인주의로 인해 이번 코로나 방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독일이 나름 선방하고 또 어떤 나라보다도 쓰레기 분리를 잘 실행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정리정돈을 중시하고 규칙과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생활화 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반듯한 사회를 보통은 동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좀 차갑고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구나 법과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적응이 쉽지 않은 사회이다. 독일에 오랫동안 살다가 직장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된 한 교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생활에 익숙했던 그는 처음에는 파리의 무질서함이 너무나 적응이 안 되어 힘들었다. 특히 교통규칙이 독일처럼 엄격하지 않고 잘 안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차를 갖고 나갈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이제는 프랑스의 자유로운(?) 삶에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도리어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과거 독일을 생각해보니 숨이 막혀왔다. 그 법과 규칙에 꽉 매여 있는 갑갑한 사회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고, 이제 다시 돌아가라면 죽어도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리와 질서의 나라의 명암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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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독일이야기]차별의 문제
    아시아인으로 유럽이나 미국에 살다보면 누구나 크건 작건 인종차별을 겪게 된다. 인종차별을 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기에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게는 못하지만, 일상 속에서 의식 무의식적으로 차별의 태도를 드러낸다. 하는 사람은 의식하지 못해도 당하는 사람은 그것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는데, 나 역시 독일에 살면서 종종 그런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다. 또 교민이나 학생들 중에는 직장이나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인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서유럽인들에게는 자신들의 탁월한 문화가 세계를 주도해왔다는 자만심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고, 그런 우월감은 다른 인종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게 만든다. 2009년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깊은 감회를 말하면서도 미국 사회에서 진정한 인종차별의 치유는 앞으로 100년 안에는 불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그만큼 아직도 인종차별의 뿌리가 깊다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종차별은 서양의 백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도처에 인종차별의 흑역사들이 있고, 우리민족도 과거 일본에 의해 심한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 아니 우리들 역시 오늘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에서 자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과거 역사를 보면 이 차별의 선두에 기독교회나 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주의를 앞세우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큰 죄를 범했지만, 이것은 그들만의 죄가 아니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인들 속에 뿌리 깊이 내린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였다. 초대교회 시대에 기독교를 박해했던 유대교인들은, 밀라노칙령 이후부터는 기독교인들의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 중심의 단일사회였던 중세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끝까지 개종을 거부하고 자신들끼리 모여 게토를 이루며 살았다.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조소와 증오는 문학작품들에도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글에도 담겨있다. 이후 유럽이 근대화되고 다원화사회로 변모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게토에서 나와 사회로 진출했고, 과학과 학문, 예술과 경제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또 다시 시기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천년을 이어온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폭발한 것이 인류사에 가장 커다란 오점으로 남겨질 ‘홀로코스트’였던 것이다. 그것이 독일의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은, 당시 이 나라가 시민정치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해서 선동정치가 가능한 정치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과거 유대인뿐 아니라 흑인이나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그에 따른 증오와 폭력에 앞장선 사람들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차별의 근거를 성경 속에서 찾으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는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자신의 신앙 속에는 그런 그릇된 면이 없는가를 돌아보도록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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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8-13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4)
    독일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냉철하고 끈질기게 파헤치고, 또 과오에 대해서 처절하게 반성하는 예는 드물 것이다. 어느 나라나 자랑스러운 역사뿐 아니라,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역사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특히 강대국인 경우 분명 근대사에서 다른 민족을 약탈하고, 이웃 나라들을 괴롭힌 흑역사들이 많이 있다. 때로 양심적인 학자들이 그것을 파헤치고 드러내지만, 국가가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고, 국가 내에서도 서로 상반된 정치이념들로 인해 역사가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독일은 이점에서 확실히 달랐다. 나치의 유대인학살과 반인륜적인 사건들을 숨기지 않고 낱낱이 파헤쳐서 전시하였고, 이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극우세력이 발을 붙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청산의 가장 핵심인 인적청산을 철저히 했다. 전후 수많은 나치전범과 그 동조자들을 찾아내어 재판하였는데,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일은 지속되고 있다. 올해 2월 독일 검찰은 나치 수용소에서 비서로 일했던 여성과 경비원이었던 남성을 기소했는데, 둘의 나이는 각각 94세, 100세였다. 아무리 고령자라해도 재판정에 세울 정도의 건강이면 반드시 세웠고, 수용소에서 직접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어도 방조한 책임을 물어 낮은 직급의 관리자·경비원·비서 등도 사법처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집요하게 과거를 청산하려고 하는지 그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독일은 국가지도자가 매년 반복되는 홀로코스트나 전쟁 기념일마다 참석하여 사과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이가 바로 빌리 브란트 수상이었다. 동방정책을 통해 동서의 화해를 이루려했던 그는 1970년 폴란드 방문 시 과거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두어 살게 했던 게토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 세운 기념비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그가 결단하고 행한 이 ‘바르샤바에서의 무릎 꿇음’ (Warschauer Kniefall)은 이후 독일의 진정한 참회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뼈아픈 과거청산의 용기와 진정성은 주변국가들 속에서 신뢰를 회복하게 하였고, 이것이 훗날 독일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통일 이후에도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경제, 군사, 외교면에서 다시금 강대국의 지위를 확고하게 누리게 되었다. 이와 대비되는 나라가 스위스이다. 나치가 유대인들로부터 약탈한 금괴를 거래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나치에게 전비를 마련해준 스위스는,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하고 참회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면서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스위스의 저술가 아돌프 무쉬그가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지에 이런 글을 썼다. “(과거를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마치 마취가 풀릴 때처럼 먼저 고통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역사적 사실을 시인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는 종종 아픔이 따르지만,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고, 그런 자에게 또한 바른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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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7-23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3)
    2000년 경 독일 남부의 대도시인 뮌헨을 방문했을 때에 근교에 있는 다카우 수용소를 찾았다. 이곳은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만들었고, 유대인 뿐 아니라 나치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가둔 수용소로 여기 수용된 약 20만 명 중 정식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이 41,500여명에 이르렀다. 이 수용소는 나치가 독일 전역에 만든 수용소 중에 가장 먼저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미군들이 처음 도착했을 당시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이곳으로 보낸 ‘죽음의 기차’에 2300여구의 시신이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후 이 시신들을 비롯해서 다카우 수용소의 비참한 장면들이 공개되면서 나치의 끔찍한 만행이 전 세계에 드러나게 되었다. 독일에는 다카우나 부헨발트 수용소와 같은 나치시대의 수용소들이 박물관처럼 보존되고 전시되어 있다. 당시 나치들이 반유대 감정을 조장하는데 사용했던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문서들, 생체 실험 등의 만행들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고, 수용소 내부를 공개하여 당시 수용자들의 비참했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 이곳 수용소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우슈비츠와 같은 곳에서 자행된 유대인들 집단학살에 관한 내용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사실 그 가해자들은 다른 누가 아닌 한 세대 전의 독일인들이다. 그들 중에는 나치와 그에 동조하여 이런 범행에 직접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고, 이런 수용소내의 끔찍한 일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그런 일을 자행한 나치정권을 선택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고, 침묵하면서 소극적으로 방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버드대의 골드버그는 ‘집단범죄’(collective sin)라는 개념을 적용하면서 그 시대의 독일국민들은 반인륜적인 나치범죄의 공범자라고 말했다. 이처럼 분명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부끄러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이 모든 것을 객관화시켜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숨기지 않고 다 발가벗겨 보이고 있다. 마치 그들의 자녀들과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이처럼 잔인하고 못된 민족이었소 하고 전시하는 것 같이 말이다. 그리고 TV에서는 자주 미국에서 만든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을 방영해주고 있다. 그 영화에서 당연히 독일군이 양민을 괴롭히는 악한 놈들로 묘사되고 미국군은 의로운 군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저녁 메인뉴스에서 나치의 만행과 홀로코스트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나는 여기서 독일이 과거 역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진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진정한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과거 나치 독일과 지금의 독일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독일인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세계인들의 비난을 담담히 받을 뿐 아니라, 자신도 함께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정당이나 몇몇 정치인들의 정치이념이 아니다. 사회전반에 두터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고, 나아가 학교에서 나치가 보여준 독재, 인종차별,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철저히 교육함으로 건강한 시민의식이 세대를 이어가게 하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정직한 회개를 통해 지난 날 지은 죄의 굴레에서 자유케 되는 신앙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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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7-09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2)
    독일의 역사의식을 본받자고 하지만, 그들이 과거에도 항상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은 이미 1914년에 발발된 1차 세계대전의 주범이기도 했다.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한 사건이 이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였지만, 유럽은 이미 제국주의간의 세력다툼으로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었고, 특별히 독일의 빌헬름 2세의 무모한 팽창정책이 전쟁의 근본원인이었다. 그리고 전쟁을 앞두고 독일의 당대 유명한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포함한 93인의 지성인 그룹은 황제의 전쟁정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이 전쟁은 결국 3,6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이미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쫓아낸 독일은 종전을 위해 모인 베르사이유조약에 서명했다. 독일은 많은 영토를 잃고 전쟁배상금을 물게 되었으나, 연합군이 자국영토까지 쳐들어오기 전에 항복하므로 인해 국가 인프라가 유지되는 등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완전히 망하지 않은 독일은 이 참혹한 결과를 이룬 전쟁의 원인자로서 참회할 줄을 몰랐고 역사를 정직하게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국력이 점차 회복되자, 전승국 영국과 프랑스가 가하는 억압과 고립정책에 반감을 갖게 되고 또한 과도한 전쟁 배상금에 대한 불만도 커졌다. 아울러 권위주의적인 구시대에 익숙했던 보수적인 사람들은 전승국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바이마르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전승국들에 의해 독일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과거 독일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다시금 강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앞장 선 것은 개신교회였다. 특히 과거 황제의 권위적인 통치에 안주하면서 교권주의에 익숙해 있었던 교회 지도자들은, 전쟁 후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고 자유주의라는 명분하에 이런 체제가 흔들리는 것에 불안하면서 민주정권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독일의 민족주의가 루터주의와 맞물리면서 교회는 쉽게 민족주의에 함몰되어갔다. 1917년 종교개혁 400주년을 계기로 루터주의 신학자 ‘칼 홀’(Karl Holl)로부터 발화된 루터 르네상스는, 점차로 ‘루터와 정치’, ‘루터와 술’, ‘루터와 가정, 연애, 여인, 교육’ 등 사회 각 방면을 루터와 연결시키면서 루터에 열광하게 했다. R. 오이켄이 ‘루터와 우리’ 라는 책에서 루터를 ‘참된 독일인의 형상이자 심볼’로 규정했듯이, 루터는 순전한 신앙의 교부이전에 가장 자랑스러운 독일의 영웅으로 간주되면서 민족주의의 중심에 놓여졌다. 이런 민족주의 열풍은 극우정당인 나치에게 길을 열어주어 마침내 1933년 집권당이 되게 했고,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이 참혹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서 이미 민족주의와 극우정치로 정치화된 개신교회는 누구보다도 히틀러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가장 커다란 전쟁의 공범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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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6-25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1)”
    오늘날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과 많은 갈등관계에 있다. 그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전 마이니치 한국특파원이었던 사와다 가쓰미는 ‘한국과 일본은 왜?’라는 책에서 일본인들의 태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였고 80년대까지도 한참 발아래 있어서 늘 내려다 본 한국이었다. 그런데 그 한국이 어느 새 쾌속 성장하여 이제 자신과 어깨를 같이 하려고 한다. 과거 압도적인 우위의 한일관계에서 지금의 수평적인 관계로 전환되는 이 현실이, 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익숙한 일본인들에게는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뿌리 깊은 것은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이다. 패전 이후 그들은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80년대에 버블붕괴와 장기 경기침체, 특별히 B. 글로서먼이 지적한 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참사로 자신감을 상실한 일본은 더더욱 역사적 사실을 대할 용기를 잃어가고 있다. 자신들의 과거를 사실 그대로 마주하고 극복하기보다는 그런 것들을 은폐하고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심지어 여전히 영웅적인 신화이야기들에 매달리고 있다. 도리어 아베를 비롯한 정치가들은 이런 역사왜곡을 통해 민족주의를 부활시키고 강한 일본을 표방해왔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국민들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숨기려 하고 약한 자들은 숨어버리려고 한다. 일본 내각부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약 1백만 명의 히키코모리(은둔형외토리)가 있고, 향후 1천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는 국민들 속에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배타심을 키워왔다. 독일 언론들도 이러한 것들이 일본 사회를 더욱 더 활기 없이 침체되게 만들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2차 대전에서 일본과 함께 주축국이 되어 패전을 경험했고, 전후에 일본 다음으로 세계경제 대국이 된 독일은 일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 다름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서 시작되었다. 패전이후 독일은 과거의 수치스러워 잊고 싶은 자신들의 흑역사와 마주했다. 그것을 덮거나 미화하지 않고 처절할 만큼 파헤치고 인정하고 사죄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에 대한 독일의 태도는 ‘우리가 할 만큼 했다’라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파헤치고 사죄를 반복하는 현재진행형이다. 그 결과 독일은 주변나라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했다. 그 신뢰는 독일을 다시금 유럽의 리더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유럽국가에서 민족주의 극우주의 정당이 득세하는 와중에서도 독일은 이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해가고 있다. 물론 독일도 난민문제를 계기로 AfD라는 극우정당이 커지고 있지만, 정치적인 주류가 될 수 없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런 역사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있느냐는 과거사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가는 뒤돌아보는 예언자’라는 슐레겔의 말처럼,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 그런 점에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독일의 역사의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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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6-11
  • [독일이야기]친환경의 나라(3)
    2019년 UN총회에서 스웨덴의 툰베리가 기후변화로 인한 전 지구적 재앙을 경고하는 연설을 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우리나라 고1에 해당되는 16세였다. 그녀는 15세에 스웨덴 의회 앞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파업’ 1인 시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에 뛰어들었고, 지금은 세계 10대 환경운동가 중 하나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청소년 환경운동가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어릴 때부터 환경교육을 시키고 환경의식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시민들 속에서 꾸준히 성장하면서 형성된 높은 환경의식 때문이고 그것이 또한 활발하게 활동하는 다양한 환경단체들과 함께 정치나 경제 그리고 교육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독일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중 한 독일어 교사와 독일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은 친환경정책을 펼치는 녹색당의 확고한 지지자라고 해서 처음으로 녹색당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일은 오랫동안 우파 기독교당(기민당과 기사당연합)과 좌파 사회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거대정당이 번갈아가며 자유민주당이라는 소수정당과 연정을 이루어왔다. 1979년에 창당되어 당시 15년 밖에 안 된 녹색당은 이 오래된 세 개의 정당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정당이었다. 그랬던 녹색당이 점점 커지더니 최근 여론조사의 정당지지도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특별히 20대~40대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 금년 9월 총선에서 독일 최초로 녹색당의 여성총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가 증폭되고 있다. 그동안 녹색당이 책임 있는 정당으로서 친환경적이면서도 경제성장에 부합한 환경정책을 꾸준히 제시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독일국민들의 환경의식이 높이지고 환경에 대한 위기감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2011년 3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독일의 환경운동과 정책에 큰 전환이 되었다. 일본 같이 세계경제대국이면서 꼼꼼한 나라가 이런 참사를 겪었다면, 우리도 겪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결국 보수당 총리였던 메르켈은 정책을 변경시켜 2022년에 독일내의 원전들을 완전폐쇄 하도록 결정했다. 과연 이 탈원전정책이 성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독일은 이후 재생에너지 생산에 박차를 가하여 현재 총에너지 생산에서 재생에너지의 비율이 40%에 이르고 있다. 현재 6.5%정도 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와 비교한다면, 재생에너지에 대한 독일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정말로 녹색당이 집권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광폭의 환경정책을 펼칠지 궁금해진다. 독일 역시 통치자나 집권정당에 의해 환경정책이 좌우되기도 하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강한 힘은 민초들에게 있다. 환경의 가치를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그것이 일상의 삶과 의식 속에 배어가고 실천되면서 그렇게 성장해가는 시민들이 여론을 주도하여 정치지형을 바꾸고 그래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지만 결국은 보다 친환경의 나라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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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독일이야기]친환경의 나라(2)
    오늘 환경문제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바로 쓰레기 문제이다. 인류가 매일 매일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은 땅과 바다를 오염시킬 뿐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그럴듯한 광고에 매료되어 물건을 구매한 사람은, 아직 쓸 수 있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일을 고민하게 된다. 배달음식을 주문해서 한 끼의 배를 채우면, 남은 음식쓰레기와 더불어 스티로폼과 비닐, 플라스틱 등 다양한 종류의 쓰레기를 처분해야 한다. 가급적 쓰레기로 나올 것을 줄이고, 쓰레기 중에 재활용이 가능한 것을 분리해서, 버리는 양을 최소화하는 것이 친환경적인 삶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부터 전국적으로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하였고, 지금 세계에서도 쓰레기분리를 잘 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독일은 오래전부터 시작해서 1993년에 내가 갔을 때는 이미 생활화되어 있었다. 동네 곳곳에 재활용 쓰레기 수거함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특이한 것은 빈병수거함이 그 재료의 차이에 따라 흰색, 녹색, 갈색 병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독일의 환경정책은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을 늘리는 것이고, 국민들 역시 그런 것이 생활화 되어 있다. 가급적 1회용 용기를 줄이기 위해 음료수 용기에 ‘저당’이라는 뜻의 ‘판트’(Pfand) 제도를 도입했다. 가령 음료를 담은 병, 플라스틱, 또는 종이팩의 경우 한번 쓰고 재활용수거함에 버리는 일회용이 있는가하면, 판트용으로 여러 회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있다. 이런 음료수에는 판트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다 사용한 뒤 가게로 가져가면, 그 판트 비용을 돌려받게 된다. 병은 모르겠는데, 주스를 담은 종이팩을 재사용하는 것이 특이하게 생각되었다. 보통 병은 50회 정도를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고, 플라스틱은 잘 세척하면 25회 정도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병이 무거우므로 차량운반 중 CO2가 더 많이 배출되는 것을 이유로 플라스틱이 더 환경적이라고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내가 있을 때에 비해 지금 이 판트제도는 훨씬 더 광범위해지고 일상화가 되어서 이제 마트에서 파는 음료용기 중 일회용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아울러 독일은 벼룩시장이 일상의 문화처럼 되어있다. 지역마다 주간으로 나오는 벼룩신문은 값이 비싼 편인데도 많은 독자들을 갖고 있다. 이 안의 정보를 갖고 직접 연락해서 서로 만나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벼룩시장이 온라인상에서 점점 발달해 가고 있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여기서도 정기적으로 열리는 큰 벼룩시장은 상업화되어 있어 새 물건을 가져다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동네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은 주로 동네 사람들이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사고판다. 가끔 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애들이 자기가 쓰던 물건을 직접 흥정하는 것을 보곤 했다. 환경과 경제를 교육하는 장이 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벼룩시장이 발달하다보니 남이 입던 옷을 입고, 쓰던 물건을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심지어 아이 물건도 새로 사지 않고 남이 쓰던 것을 잘 세척해서 사용한다. 절약이라는 관점 이전에, 쓰레기를 줄이고 자원을 아낀다는 점에서 본받을 좋은 문화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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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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