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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오씨와 베씨”
    독일통일에서 제대로 예상 못한 것은 경제 문제만이 아니었다. 서독인과 동독인은 자신들도 모르게 너무도 다른 사람들로 변해있었다. 슈피겔지가 통일 2년차인 1992년 말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독의 69%, 동독의 79%가 서로 이렇게 다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이루어온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45년간 살아온 동독과 서독주민들은 예상 밖의 이질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경쟁이 불필요한 국가계획경제와 권위주의적인 독재정권 아래서 굳어진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이, 치열한 경쟁을 전제로 하는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아래서 형성된 그것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시 서독은 세계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나라로, 높은 임금을 위해 근무시간에는 쉴 틈을 주지 않고 고되게 일을 시켰다. 그런데 동독은 열심히 일해도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다보니 시간 때우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당시 많은 동독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독으로 왔지만, 기업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이들을 외국노동자보다도 선호하지 않았다. 과거 분단시절 국경선을 맞대고 통일을 갈망할 때는 같은 동족으로서의 동질감과 연대감을 강하게 느꼈지만, 막상 뒤섞여 살다보니 오히려 많은 이질감을 느끼면서 서로에 대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나온 말이 동독놈이라는 뜻의 오씨(Ossi)와 서독놈이라는 뜻의 베씨(Wessi)였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게으른 2류 독일인이라 무시했고,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을 돈만 아는 돈벌레라고 비아냥댔다. 통일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극복되었지만, 초기만 해도 동서간의 이런 심각한 갈등상황이 과연 제대로 극복되어 국민적인 통합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이 많이 제기 되었다. 물론 서독인들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통일독일의 주인행세를 하는 그들의 눈에 동독인들의 이해되지 않는 점은 한 둘이 아니었다. 서독의 정신과 의사로 동독사람들에 대해 연구한 마츠는 ‘감정정체론’이라는 말을 썼다. “동독인들은 오랜 세월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 살다 보니 자기표현을 못한다.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타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서 행복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이 자기소외의 경향을 갖는다.” 동독의 권위주의적인 사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붙잡혀가는 그런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솔직한 자기표현이 쉽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가 무시당하거나 소외를 당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고 남과 비교하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애정받기를 요구한다. 그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불안과 공포를 갖게 되고 이것이 타인에게 대해 공격적인 성향으로 나타나며 또래 집단 즉 동독사람들끼리만 뭉치는 내집단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마츠는 이것을 감정정체론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것이 자유롭게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며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름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갖도록 교육받고 자라난 서독인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만약에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어떨까? 남한주민과 북한주민들 사이의 괴리감은 동서독보다 덜할까 더할까? 우리는 이질감을 잘 극복하고 서로 융화하여 통합된 사회로 잘 나아갈 수 있을까? 오씨와 베씨가 우리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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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5
  • [독일이야기] “통일세”
    독일은 환호성과 감격 가운데 통일했지만, 통일 이후 예상보다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우리가 한반도의 통일을 필연적인 과제라 생각한다면, 독일통일의 준비과정과 진행과정 뿐 아니라, 통일 이후 과정도 주목해야 한다. 나는 통일이 된 지 3년이 지난 1993년에 동독지역을 방문했었다. 가는 곳마다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도로를 보수하지 않아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독일에서는 100년이 넘는 집들이 많았는데, 서독은 계속 집을 보수 단장하다보니 깨끗하고 환했지만, 동독의 집들은 어둠침침하고 여기저기 깨지고 금간 곳이 많았다. 이 모든 인프라들을 재건하는 비용 그리고 동독지역의 20%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재정상황을 위해 독일정부는 매년 독일 GNP의 약 4%에 해당되는 136조원을 쏟아 부어야 했다. 이런 큰돈을 계속 지원하다보니 독일의 재정상태가 굉장히 어려워졌고 서독지역에서는 모든 상황이 통일이전보다 나빠져 갔다. 통일되기 전 서독의 국가경쟁력은 세계 2위였는데 계속 하락해서 10년 뒤인 2002년에 15위로 곤두박질 쳤고, 1인당소득도 통일되기 전에는 3만 7천불이었는데 2만 2천불로 떨어졌다. 물론 서독이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고 재정상황도 안정적이었지만, 정부재정으로만 감당하기에는 어림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1991년부터 서독지역 주민들에게서 통일세를 거두기 시작했는데,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범한 직장인의 경우 매월 100마르크 정도로 1년에 약 100만 원을 통일세로 내야했다. 이것이 2020년 말까지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니 약 3천만 원의 통일세를 지불한 셈이다. 분단국가의 통일을 위해서 서독국민들 개개인이 그만큼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것이다. 통일세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국민들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며 받아들였기에 큰 무리 없이 30년이라는 긴 시간 이를 통하여 통일비용을 보전할 수 있었다. 독일은 통일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비용을 써야 했다라는 비판도 없지 않아 있지만, 통일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말해준다. 남북한의 통일비용에 대한 예측은 연구기관마다 천차만별이고 통일 후에 대박처럼 찾아올 경제효과를 부풀리기도 하지만, 우리 국민들 개개인이 허리띠를 졸라맬 각오는 꼭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통일 당시 동독 이 서독에 비해 인구는 1/4, 소득은 1/3 수준이었던데 반해, 한반도의 경우 북한은 남한에 비해 인구가 1/2, 소득은 1/56 수준이다. 단편적인 비교이지만, 우리나라의 통일에는 독일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갈 수 있음을 예측하게 해준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 통일세로 인한 불똥이 예기치 못하게 교회로 튀었다. 단돈 1마르크도 계산하면서 사용한다는 독일 사람들의 눈에 종교세가 크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별히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사람들 중에 종교세를 이유로 교회를 탈퇴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옛동독교회가 통일 후 재정자립을 위해 교인들에게 종교세를 내도록 하자, 동독교인들 역시 탈퇴하기 시작하면서, 독일개신교는 통일이후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 독일교회는 매년 교인들의 탈퇴가 계속되고 있고, 탈퇴 속도가 조금 완화됐다는 것을 갖고 안심하는 처지가 되었다. 통일을 위해 좋은 다리 역할을 했던 교회가 통일의 역풍을 맞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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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2-05-20
  • [독일이야기]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3)”
    서독교회가 동독교회와 ‘특수공동체’로서의 동역관계를 유지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동독교회는 인동초와 같이 외적인 억압을 이겨내며 서서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동독교회들은 동독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목회자들이 인권과 민주를 앞세우면서 반정부집회와 사회개혁의 리더가 되었다. 2017년까지 독일대통령직을 맡았던 가우크(Gauck) 역시 과거 동독의 개신교 목회자이며 인권운동가였다. 특별히 라이프찌히에 있는 니콜라이교회에서 1982년부터 매주 평화를 위한 기도모임이 열렸다. 당시 이 기도모임을 주도했고 2015년 내한했던 보네베르거 목사에 의하면, 1982년에 시작한 월요기도회에서는 반전운동을 비롯해 인권, 여성, 환경 문제 등에 대한 기도가 드려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니콜라이교회 월요기도회에서는 기도만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은 ‘교회’라는 지붕 아래서 동독 독재 정치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냈고, 정치적 이슈를 놓고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니콜라이교회를 비롯한 동독의 개신교회는 동독의 민주주의를 키워가는 중요한 모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집회는 1989년부터는 무언의 촛불시위로 발전해 갔고, 그 수가 점차로 늘더니 마침내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는 당시 동독 수상인 호네커의 실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니콜라이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촛불시위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공산정권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결과를 기대하면서 선거일정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동독 국민 다수가 서독과의 즉각적인 통일을 앞세운 정당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새로운 동독정권은 서독의 콜정권과 통일을 위한 합의과정에서 서독 마르크와에 비해 1/4가치 밖에 되지 않았던 동독 마르크화를 1:1로 교환하기로 하고, 동독주민을 서독의 사회복지제도에 편입시키는 등 동독에 유리한 결과를 도출해 내었고, 결국 1990년 합법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동서독의 통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동독 정권이 와해되고 그래서 서독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흡수된 그런 흡수통일이 아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약 1년 후에 통일이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동독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즉각적인 통일을 선택했고, 그러한 민의를 바탕으로 양쪽 정권이 합의하며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동독의 민의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동독의 개신교회였고, 그것을 또한 가능하도록 도와준 것이 서독의 개신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 통일에 있어서 서독교회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고, 그것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서독교회는 인내와 포용의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한다. 당시 동서독의 상황과 현재 남북한의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서로가 이념에 의해서 너무도 다르게 변해버렸다는 것은 공통된 것이다. 그 서로 다른 국가가 다시 하나로 합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자칫 경직된 정치이념에 물들어버린 교회는 통일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서독교회의 역할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한국교회가 통일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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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2-04-29
  • [독일이야기]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2)”
    동독의 교회들이 동독개신교연맹(BEK)으로 분리된 후, 서독교회는 주어진 상황에서 동독교회와의 협력과 연합을 위해 노력했다. 먼저 동독교회와 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같은 예전을 지키면서 비정치적인 분야에서의 연합을 통해 한 교회로의 동질성을 유지해가려고 힘썼다. 아울러 성경적 가치를 앞세워 평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여기에 동독교회의 동참을 유도했다. 서독교회는 1958년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EKD) 총회에서 핵무장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1970년대를 지나면서 철저한 반전, 반핵의 입장을 취함으로 핵 평화주의를 그리스도인의 평화사역으로 받아들였다. 바르사와 조약국들이 소련의 핵미사일로 무장하자,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1979년 퍼싱 II 중거리 미사일을 독일에 배치하려고 했다. 이때 서독교회는 이러한 핵무기 배치에 단호히 반대하면서 평화운동을 벌렸다. 같은 시기 동독의 교회들 역시 동독내의 핵무기배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서독교회와 함께 반핵평화운동에 동참하였다. 아울러 서독교회들은 동독교회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존립하도록 도와주었다. 분단 이전부터 독일교회는 교회세라는 제도를 통해 교인들로 하여금 헌금하게 했고 이것이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각 교인들의 직장에서 교회세를 징수하여 교회에 보내주는 일은 국가 세무서가 하는 등 이 제도는 국가기관의 협조가 전제되었다. 그런데 동독공산정권은 이 교회세 징수를 거부했고, 그러다보니 동독교회는 구조적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교인은 공산당원이 될 수 없고, 공산당원은 교인에 가입할 수 없는 등의 제도 하에서 교인 수가 급감한 것도 동독교회 재정난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동독교회를 위해 서독교회들이 재정지원에 나섰는데, 대략 세 개의 서독교회가 한 개의 동독교회 목회자 생활비와 교회운영비를 지원했다. 그 결과 교회가 문 닫기를 바랐던 사회주의정권 아래서 동독교회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훗날에는 이 동독교회들이 동독정권에게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서독개신교회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시간이 가면서 서독과 동독 양정권의 신뢰를 얻어갔다. 그러는 가운데 서독정권이 동독주민의 인권을 위해 전개한 프라이카우프(Freikauf)의 다리 역할을 요청받게 되었다. 이 프라이카우프는 동독이 자신의 감옥에 수감 중인 반체제인사 즉 정치범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서독으로 보내는 것이었고, 서독은 이에 상응하는 돈을 동독에 지불하는 거래였다. 실제로 이 프라이카우프를 통해 1962년부터 1988년까지 정치범 3만 3천여명과 그 가족 25만여명을 서독으로 데려왔고 이를 위해 서독은 약 1조 8천억 원 상당의 금품을 동독에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독정부의 대내외적인 입장을 고려해서 아주 비밀리에 진행해야했다. 그러므로 양쪽 정부는 이 일을 서독의 개신교회에 부탁했고, 교회가 그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것은 서독교회가 그만큼 그 사회 속에서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통일의 가교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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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2-03-18
  • [독일이야기]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1)”
    독일 교회는 근대 역사에서 독일국가와 함께 많은 잘못과 시행착오를 범했다. 한편으로는 국가의 일에 무관심하면서 그릇된 정치를 방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독교신앙과 동일시하면서 교회를 정치화시켜 정권의 도구로 만들고 말았다. 1차 대전에서는 당대 독일 신학계와 교계의 지도자들이 대거 황제의 전쟁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의 원흉인 히틀러가 1933년 반자유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표방하며 집권하자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독일그리스도인’이라는 교단까지 만들어 히틀러의 유대인말살과 전쟁정책의 후견인이 되었다. 패전 이후 독일교회는 불의한 전쟁들에 앞장섰던 자신들의 과오를 누구보다도 뼛속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평화를 교회가 지향해야할 가장 소중한 사회윤리적인 방향키로 삼았다. 교인들에게 평화를 설교하고 자녀들에게 평화를 교육하며, 국가에는 평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요구했다. 이런 독일교회의 단호한 평화주의적 태도가 독일통일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독일은 전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된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고,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장벽은 이 냉전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이런 가운데 평화를 앞세웠던 독일교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냉전논리에 일방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도리어 동서화해와 이념갈등의 극복을 위해 힘썼다. 1945년 동서독 분단에도 불구하고 양쪽 교회들은 1969년까지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EKD)라는 하나의 조직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서로 간에 많은 만남과 교류를 추진하였고, 하나 됨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들의 노력은 자연스레 통일을 갈망하게 했다. 이것을 경계한 동독정권은 1969년 동독교회를 EKD와 분리시켜 동독개신교연맹(BEK)이라는 이름으로 묶으면서 서독교회와의 교류를 단절시켰다. 아울러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원이 되지 못하게 하는 등 무언의 압력을 통해서 동독교회를 고사(枯死)시키는 정책을 펼쳐갔다. 수많은 교인들이 이탈하는 가운데 교회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의 교회들은 자신들을 소위 ‘사회주의 안에 있는 교회’로 칭하면서 사회주의와 공존과 비판을 겸하여 갖는 교회로 조심스럽게 자리매김을 했다. 이때 서독의 교회의 반응이 매우 중요했다. 얼마든지 색깔론을 뒤집어씌워 동독교회를 빨갱이교회로 매도하면서 교류를 단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냉전시대에는 그렇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독교회는 그리하지 않았다. 동독교회를 비난하거나 매도하기보다는 사회주의 독재정권 아래서 취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동서독 교회의 관계를 ‘특수한 공동체’(Die besondere Gemeinschaft)라 부르면서, 주어진 상황에서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했다. 이것은 서독교회가 자신을 ‘자본주의 안에 있는 교회’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체계를 절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정치이념을 뛰어넘어 서있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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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4
  • [독일이야기]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독일 통일에는 당시 수상이었던 헬무트 콜의 역할이 컸다. 그의 정치적인 판단력과 추진력 그리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소련으로부터 통일의 동의를 받아낸 외교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분명 1989~90년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독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결국은 통일을 이끌어낸 보수당(기민 기사 연합) 콜 수상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기반은 이미 1969~74년 서독의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빌리 브란트에 의해서 닦여졌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20년간 장기 집권한 보수당은 동서독의 관계에 있어서는 초대수상 아데나워의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이는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힘의 우위로 동독을 고립시키려는 정책이었고, 그 밑바닥에는 동독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이념대결을 펼치려고 하는 냉전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좌파정권인 사민당의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이런 대결정책은 평화공존의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브란트는 좌파였지만, 소련의 체코 침략과 베를린 봉쇄에 대해 강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반공주의자라고 자처했다. 집권 후 그는 소위 동방정책을 펼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로 냉전과 분단을 극복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동독의 공산정권과 대결하고 힘의 우위로 눌러서는 아무런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동독뿐 아니라, 동유럽과도 수교하고 정상외교를 가졌는데 폴란드 방문 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 사죄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참회뿐 아니라, 화해와 평화를 위한 의지를 드러낸 행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서베를린 시장이었을 때부터 공산정권의 경직된 속성을 잘 아는 브란트는 동서독의 관계에서 통일보다는 ‘분단의 평화적인 관리’를 앞세웠다. 동서독의 분단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체제와 국가를 인정하면서 둘 사이에 평화적인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자는 것이다. 그가 통일을 앞세우지 않은 것은, 이미 서독의 경제력과 국력이 동독을 월등히 앞지른 가운데서 서독이 말하는 통일은 자칫 동독정권의 붕괴를 전제하는 공격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2년 동서독간 기본조약을 맺었고, 이것은 이후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양독간에 화해와 협력의 제도적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 기본조약 하에서 동서독은 서독주민의 동독방문, 서신교류와 경제협력, 문화 교류, 동독주민의 서독방송 시청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를 증진시켜나갔다. 이러한 동방정책은 브란트 이후 중단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같은 당의 슈미트 수상은 브란트의 좌클릭에 대해 서유럽국가들이 의구심을 갖자 약간 우클릭하면서 서방진영을 아우르며 이 정책을 이어갔다. 그 이후에 들어선 헬무트 콜의 우파정권도 동방정책을 중단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동구권과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신뢰를 쌓더니 마침내 독일통일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념대결에서 평화공존으로 전환한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훗날 독일통일의 기초가 되었고, 통일정책을 정쟁의 도구로 악용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이어간 독일의 성숙한 정치가 통일을 향한 대로를 닦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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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2-02-11
  • [독일이야기] 통일에 대한 염원
    새해를 맞이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각자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내면 깊은 곳에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아시아국가로는 흔치 않게 전 세계에 문화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라로 우뚝 섰지만, 우리에게는 뭔가 소화되지 못한 것이 묵직하게 남아 있다는 느낌이 있다. 일의 매듭을 짓거나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저편 구석으로 밀어 넣은 그런 불편한 감정이다. 유구한 역사의 단일민족이 겨우 70여 년 전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었는데, 이것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한 민족 한 국가로 되돌려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국가는 먼저 통일된 독일과 같이 반드시 자유로운 민주국가이어야 한다. 이 통일이야말로 우리 국민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대적인 과제이다. 그러나 그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 생각하니, 사회일각에서는 통일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그냥 분단된 상태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2019년 한 신문사에서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통일에 관한 국민여론 심층분석'을 했는데, 이에 따르면 "통일을 원한다" (60.4%), "원하지 않는다"(27.3%), "모르겠다"(12.3%)였다. 특히 35세 미만에서는 통일을 원한다는 답변 비율이 50%를 넘지 않아 젊은 세대에서 통일에 대한 바람이 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북한의 핵문제를 포함해서 남북 간의 이념갈등, 주변 열강들의 방해 등 넘어야 할 산은 크고 많다. 그러나 나는 독일의 통일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생각을 갖는다. 독일 통일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독일 역시 당시 여러 가지 여건을 보았을 때에 이렇게 통일이 빨리 올 것을 기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치 전문가들 중에서도 그런 예측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붕괴라는 예기치 못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때 독일은 그 바람을 놓치지 않고 돛을 올려 순풍을 타고 재빨리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들이 통일을 위해서 많은 것을 준비했다고 해도, 이런 외적인 큰 변화가 없었다면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작금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통일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남북관계를 위해 뭘 시도해도 그저 한 순간의 이벤트처럼 보일 뿐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우리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세계의 역사의 궁극적인 주권자가 계시다.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자 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세계의 역사를 드라이브 해 가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세계 역사를 흔드시고 그의 뜻대로 이끌어 가실 주님을 바라고 기대하면서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갖자. 그리고 그 주님께 기도하며 간구하자. 아울러 통일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냉철하게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준비하도록 하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에 관해 독일의 통일이 우리에게 유용한 참고서가 되어서 많은 것을 시사해줄 것이다. 모쪼록 올 한해 통일을 위한 크고 작은 진보가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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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독일이야기] “성탄절에 울리는 평화의 소리”
    독일에 가서 늘 궁금했던 것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베네룩스3국등 6개 국가에서 출발해서 지금은 27개국으로 확대된 유럽연합(EC)이라는 체제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한 나라 안에도 민족과 언어가 달라 갈등하고 싸우는 나라도 있는데 말이다. 네덜란드로 가기 위해 처음 독일 밖으로 나갈 때에 국경에 초소도 없고 통제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 신기했다. 이미 1985년에 생켄조약을 따라 국경을 완전 개방한 것이다. 그리고 1999년 화폐도 유로화로 통일되면서 EC는 경제통합공동체가 되었다. 그 전에는 국경만 넘으려 해도 환전에 신경 써야 했는데, 모두 유로화를 쓰니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정말 하나의 느슨한 연방국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1945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고, 수많은 전쟁을 치른 나라들이 맞나 싶을 정도의 통합을 이룬 것이다. 얼마 전 영국이 탈퇴하는 등 EC 붕괴설이 나돌기도 하지만, 그리 쉽게 무너질 체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민족이고, 저마다의 역사와 전통과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들이 이렇게까지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오랜 세월을 공유한 기독교문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토대가 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에 대한 갈망이다. 두 차례의 야만적인 세계 대전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본 유럽인들은 평화보다 귀한 것이 없음을 체득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평화에 대한 열망이 훗날 독일통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쟁 한 가운데서 평화를 꽃 피운 크리스마스 휴전은 유럽평화의 밑거름으로 회자되는 실화이다.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 독일과 연합군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참호전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었다. 그해 12월 24일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독일 군인들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합창했고, 그 소리가 영국군진지까지 울려 퍼지면서 이를 듣던 영국 군인들도 이 찬송을 함께 불렀다. 한낮까지만 해도 총과 포탄소리로 진동하던 전선은 양쪽 젊은이들의 크리스마스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찬송들은 미움과 증오로 얼어붙고 피폐해졌던 군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크리스마스의 동이 터올 때에 한 독일군 병사가 작은 나무에 초를 단 크리스마스트리를 손에 들고 영국진지 쪽으로 걸어갔고 이를 본 영국군인 하나가 참호에서 나와 서로 평화의 악수를 나누었다. 뒤이어 양쪽 병사들이 하나 둘씩 나와 서로 악수를 하며 성탄 인사를 나누면서 크리스마스 휴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변에 널려진 동료의 시신들을 땅에 묻을 수 있었고, 심지어 서로 축구를 하면서 샬롬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비록 짧은 휴전이 끝나고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이후 유럽에서 평화를 말할 때에 즐겨 회자되는 감동적인 일화가 된 것이다. 이 성탄절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높이고 찬송할 때,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미움과 증오 그리고 싸우려는 욕망은 힘을 잃게 된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 주님의 평화가 온 세상 속에, 특별히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 찬 곳에 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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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독일이야기] “통일을 이룬 나라”
    내가 독일에 간 1992년은 독일 통일 2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계 경제대국이고 문화강국이었던 독일에 부러운 것이 많았지만,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그들이 일궈낸 이 통일이었다. 세계에서 외세에 의해 분단된 단 두 나라 가운데 독일이 먼저 통일을 이루면서 우리만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게 된 것이다. 1994년 종교개혁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 과거 동독지역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루터유적지가 옛 동독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동독으로 넘어가면서 옛 서독과 동독 국경휴게소에 들렀다. 당시의 동독초소 하나만 남아있을 뿐 다 철거되어 5년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고 긴장된 국경이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동서독을 가로막았던 담장이 무너진 터에 서서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나라도 속히 통일을 이루어주십시오. 동독과 동유럽이 와해된 것처럼 북한정권도 와해되고, 그래서 독일처럼 자연스럽게 흡수통일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말이다. 1989년부터 시작된 동유럽의 붕괴, 소련연방의 해체 등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 은 북한의 붕괴와 아울러 그렇게도 염원하던 통일이 곧 올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벌써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통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독일은 되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 것일까? 독일과 우리가 처한 역사적인 상황, 대내외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은 통일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었고 우리는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통일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동유럽공산권의 갑작스런 붕괴 가운데 동독정권이 붕괴되고 그래서 서독이 날로 동독을 흡수하면서 통일을 이뤘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독에서 미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가운데 갑자기 통일이 됨으로 말미암아 통일 이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평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판단이다. 독일은 통일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왔고, 그런 가운데 기회가 찾아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기회를 붙잡아 통일을 이루는 것도 어찌 보면 실력인데 그것이 독일에게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해해서 안 되는 것은 동독은 붕괴된 것이 아니고 독일통일도 흡수통일이 아니다. 만약 정말 동독정권이 붕괴되고 흡수통일이 되는 것이었다면 훨씬 엄청난 혼란과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동서독국경선에서 가졌던 생각처럼, 또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염원하는 바처럼, 만약 북한 정권이 붕괴가 된다면 과연 어떤 시나리오가 전개될까? 북한이 순순히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될까? 혹 우리 손에 들어온다고 해도 북한 주민이 순순히 우리의 통치에 순응하려고 할까? 북한 주민 2천5백만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통일에 대한 환상과 나이브한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이루어진 독일통일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바라고 기도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독일통일과 그 속에서 독일교회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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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독일이야기] “난민의 나라(3)”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내전은 전 국민의 1/3이 넘는 90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을 만들었고, 그 불똥이 유럽으로 튀면서 유럽의 정치지형도까지 바꾸었다. 시리아 난민들 중 일부는 우선 레바논과 요르단 등 중동지역의 난민촌에 수용되었지만 더 많은 이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터키와 그리스로 몰리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를 넘어 동유럽을 통과해서 서유럽으로 가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동유럽제국들은 국경을 통제하면서 이들을 거부하고 냉대했다. 유럽연합 내에서도 난민을 놓고 각 나라 간의 긴장과 갈등이 커지는 등 시리아 난민문제는 유럽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2015년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난민 100만 명을 수용하겠다고 전격선언하면서 ‘우리가 해낸다!’(Wir schaffen da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유럽연합의 수장격인 독일이 총대를 메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들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메르켈의 이 선언은 우선 독일 내에서 큰 찬반을 불러일으켰다. 난민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녀의 이 통 큰 정책을 두 손 들고 환영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녀가 인기영합의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며 비판했고 이것은 지지율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런 메르켈 정책에 부담을 느낀 주변국에서도 충분한 논의과정이 없었음을 인해 독일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충분한 논의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서로 뒤로 빠지려는 상황에서 그녀는 불도저처럼 밀고 나간 것이다. 결국 독일은 메르켈의 선언대로 2015년~2016년에만 약 12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고, 유럽의 제국들도 뒤따라 난민 수용을 선언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또한 결과적으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난민반대정책을 앞세운 극우정당들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8월 독일국영방송(ZDF)은 메인뉴스에서 이들 난민을 추적한 결과 2015년 이후 다른 나라로 간 30만 명을 제외한 남은 난민들은 독일 사회에 잘 정착했고 이들 중 50%가 이미 산업전선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우리가 해낸다!’라는 메르켈의 구호가 결실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난민으로 인한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들이 잘 정착하도록 국가가 체계적으로 교육하였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도우면서, 결과적으로는 부족한 노동인력을 채우는 등 난민과의 상생이 가능함을 독일 사회는 보여준 것이다. 유엔난민기구에 의하면 지난해 말 기준 세계난민은 8,240만 명으로, 지구촌 인구 100명 중 1명이 난민인 셈이다. 오늘날 한국인들 모두가 영화와 드라마 K-pop과 음식 등 우리 고유의 문화가 세계 속에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되기를 원하듯, 우리 역시 세계가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들을 외면하지 말고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10:19)고 명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근본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가르치고 있다.(히11:13) 예수님도 태어나면서부터 애굽으로 난민의 길을 떠났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족과 고향을 잃고 타지로 떠도는 이 난민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긍휼함을 갖고 끌어안고 돌보는 데 앞장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오피니언
    • 독일이야기
    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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