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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기자수첩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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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불거지는 교회세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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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천순복음교회가 교회 세습을 단행했다. 인천순복음교회는 담임 최성규 목사 후임으로 큰아들 최용호 목사를 선임했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등이 항의 방문을 하는 등 교계 안팎에서 비난 여론이 일고 있다. 하지만 교회측은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반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달(12월) 중 ○○교회(김○○ 목사) 후임목사 발표가 예고되고 있다. 교계 일각에서는 김○○ 목사의 아들 김○○ 목사가 후임자로 유력하다는 소문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소문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2000년 전 후 논란이 되었던 교회세습 문제가 다시 이슈가 될 전망이다. 더 추락할 곳도 없는 한국교회 신뢰도라고 하지만, 교회세습문제로 더 큰 홍역을 맞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있다. 대형교회가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력, 대형교회라서 감당해야 될 책임감은 왜 그렇게 모르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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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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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한 판단에 신중을 기하는 지혜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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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기사가 있었다. 모 인터넷신문에 난 기사가 한국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난 후 지난 11월 24일(화) 장로회신학대학교 재학생 65명의 이름으로 “김○○ 목사에게 65명의 후배들이”라는 제목의 글이 게시판에 올라왔다. 이 글의 핵심내용은 ○○교회와 ○○○○○교회의 합병소식을 두고 변칙세습인 합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소문에 대해 당당히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한국교회 제2의 한경직 목사와 같이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후배들이 글을 올렸다는데는 이해가 되나, 아직까지 김 목사나 교회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짐작만으로 선을 그어 언급하는 것은 의도된 정치적 행동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지금 이 교회는 김 목사의 결단을 한달 남겨두고 있다. 뚜껑을 열어봐야 어떤 윤곽이 드러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다. ○○교회가 신중히 판단해서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미리 짐작으로 추측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판을 깨더라도 합병쪽으로 몰아가도록 부추기는 것이 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신중히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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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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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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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영삼 장로(89세)는 거제시 장목면에서 故 김옹조 장로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거제 장목에서 최연소로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부산 서구에서만 제4대부터 7번 국회의원에 당선돼 부산 서구가 정치적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경남 중학교가 있는 서구지역에 적을 두고, 서구에 있는 교회를 수요일, 주일 낮, 저녁예배를 순방하며 기도하고 성도들과 인사를 하면서 신앙적인 삶속에서 정치적 담력을 길러냈다. 일찍이 어머니를 좌익계통의 청년에게 피살당해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의식은 그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가 국회의원 제명을 당한 것은 부마사태의 원인제공이 됐다.
서구지역에 있는 고신 동일교회를 시무했던 故 김창인 목사가 서울로 옮겨 충현교회를 개척했을 때 故 김영삼 장로도 충현교회에 출석하여 20년 넘게 교회를 섬기며 헌신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충현교회에서 원로장로가 안 되는 이변이 있자 김 장로를 지지하는 몇몇 성도들이 김창인 원로목사 후임으로 온 아들을 세습을 이유로 반대하는 등 갈등을 빚었고, 신성종 목사가 담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故 김영삼 장로의 장례에서도 충현교회는 완전 배제된 배경에는 이런 숨은 사유가 내재해 있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부산 동양관광호텔에 투숙, 밥은 진주식당에서
늘 부산에 내려오면 부산 중구 광복동 입구에 있었던 동양관광호텔에서 유숙했다. 중구에는 CBS부산방송국이 광복동 농협건물 7층에 있었고, 미화당백화점 인근에는 부산YMCA 임시 사무실이 있었다. 그리고 중구 대청동에는 부산YWCA회관이 자리 잡아 중구지역이 기독교의 메카를 연상시켰다. 부산 기독교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중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서구 지역의 이웃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했다. 중구의 용두산공원을 한 바퀴 돌거나 서구 암남동 해변가를 뛰었다. 조깅 후 돌아와서는 호텔 식사보다 중구 광복교회 옆 진주비빔밥 식당에 들려 지인들과 식사를 하곤 했다. 가끔 동양관광호텔 스카이라운지 조찬기도회에 참석해 교계인사들과 식사하곤 했다.
故 손창희 장로가 손명순 여사와의 가까운 외숙관계로, 교계연락은 손 장로에 의해 모이곤 했다.
한때 야당시절 수중에 노잣돈이 떨어졌을 때였다. 유신말기쯤 자택연금을 당했을 때 익혀 두었던 붓글씨 수십 장을 표구로 해서 광복동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어 자금을 조달했다. 그때 당시 홍인길, 문정수 씨가 비서로 있을 때 매우 가깝게 접촉한 사람들이 교계인사였다. 이성만 장로(은성교회)는 같은 거제 출신으로 꼭 써야할 자금을 지원한 숨은 헌신자로 지목되어 때로는 국세청의 세금조사까지 받는 수모도 겪었다. 그러나 훗날 대통령에 당선되고 당선축하예배의 경비 일부는 이성만 장로에 돌아와 지원하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이성만 장로는 부산장신대가 인가받을 때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 시절에 김해시청에 전화하여 건축 관계 등 도움을 받는 보은도 받았다. 은혜를 주면 은혜를 갚았던 것이 그, 김영삼 장로의 의리 있는 인간성이 이를 말해주었다.
△부산 서구에 김영삼 장로 기념관 설립 움직임
서구는 그야말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자 서구민들에게는 가장 신세를 많이 진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구지역에 故 김영삼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박극제 서구청장은 “매우 현실적인 반가운 일이고 이를 추진하는데 서구청에서 적극돕겠다”고 말했다.
사실 서구지역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렇다 하게 기여한 업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인 훌륭한 지도자를 길러낸 서구민들의 자긍심은 높이 살만하다. 서구민들의 의리와 자존심이 씨를 뿌리고 거둔 결과이다.
그가 남긴 것은 이 나라의 민주화의 나무에 꽃이 열매를 맺게 한 것이고, 그 열매가 바로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 나라에 제사장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 헌신한 신앙이 남긴 흔적은 별로였다는 평가가 있지 않을까.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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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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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영삼 장로와 한국교회에 얽힌 일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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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장로와 손명순 권사의 결혼식은 마산문창교회 돌벽교회당에서 가졌다. 김영삼 장로는 일찍이 할아버지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 故 김홍조 장로(2008년 작고)도 경남 거제 장목에서 신명교회를 세웠다. 평생 5곳(마산 수정교회 등)의 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적 유산을 이어 받은 김영삼 장로는 이화여대 약학과에 재학 중인 손명순 여사와 1951년 3월 경남 마산 추산동 마산문창교회(故 김석찬 목사)의 주례로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시 손명순 여사가 다니던 이화여대는 재학 중 결혼 금지라는 학교 규칙이 있었지만 이를 어기고 몰래 졸업한 일화가 유명하다. 김영삼 장로는 부산 경남중·고교에 재학 시는 고신 부산남교회(故 한명동 목사)에 출석했다.
▲서울 충현교회에서 장로 장립 받아
김 전 대통령이 가장 오래 출석한 교회는 예장합동 서울 충현교회(故이 김창인 목사)다. 1965년부터 출석하여 1972년에 집사안수를 받고, 5년 뒤 장로 직분을 받았다. 김창인 목사와는 평소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신성종 목사 담임시절인 1992년 대통령 당선 취임식 전인 2월 25일 자택에서 가족 및 지인들과 감사예배를 가졌다. 또 취임식에 가기 전 신 목사에게 안수기도까지 받았다. 신 목사는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손을 성경 위에 얹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에도 그의 신앙의 동료인 충현교회 김차생 장로를 종교 담당 특보로 세워 초교파적으로 목사님을 모시고 주일날 청와대 안가에서 예배를 가졌다.
▲영·호남 나라를 위한 기도회와 나사본 사람들
6공말기부터 1990~1993년 사이 교계 인사와 크리스천 정치인들이 나라를 걱정한 나머지, 동서화합을 접목하는 뜻에서 이루어져 만든 나라사랑운동본부(일명 나사본)를 만들어 ‘영·호남 나라를 위한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가졌다.
하나님도 하나이시고 주님과 성령님도 하나이시기에 동서 교계 지도자들이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했다. 김영삼 장로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함께 기도회에 참석했다. 1991년 4월 1일 대구 금호호텔에서 1천여 교계인사가 모였다. 2차는 91년 7월 1일 광주 무등산관광호텔에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가 모여 예배를 가졌다. 3차인 93년 8월 30일 부산 허심청에서 두 전 대통령은 불참하고 김영삼 장로의 부친 김홍조 장로와 김덕룡 장관이 참석했다. 부산에서는 손상률 목사, 故 손창희 장로, 정금출 장로, 이성만 장로와 김태동 목사, 장차남 목사가 주축이 되었다. 대구는 권영식 장로, 김용구 목사, 우성기 장로, 광주는 최평우 장로, 최기석 목사, 한완석 목사가 각각 역할 분담을 했다.
주최측은 동서화합을 위한 역사적 선언문도 나왔다. 우리 기독교의 교파를 초월한 모든 성도들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모든 간판을 즉시 내리고 국가의 번영과 민주발전을 그리고 동서 일치와 7천만 겨레의 하나됨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다짐한다고 적시했다. 무엇보다 김영삼 장로는 부산 서구지역을 사랑하고, 이곳을 제2정치적 고향으로 삼았다.
부산 서구에서 중고교를 다녔고 서구 지역민의 도움으로 8선까지(거제 장목에서 첫 국회의원 당선 제외) 가능했다. 늘 주일이 되면 지역 교회를 순방하면서 기도하거나 인사를 하는 등 서구지역 교회의 예방이 잦았다. 김영삼 장로는 "하나님 아버지 나라와 대한민국을 위해 학실이(확실히의 경상도 발음) 기도하오니 이 기도를 받아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故 김광일 장로를 비서실장으로 발탁
1993년 초대 박관용 비서실장 이후 두 번째로 故 김광일 장로(변호사)를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발탁해 교계와 소통하며 김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하게 했다. 대통령 특보시절까지 김 전 대통령을 모시면서 한국교회에 신세진 분들을 일일이 청와대로 불러 함께 식사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아마 김 전 대통령이 김광일 장로를 발탁한 것은 중고대학 선후배이긴 하지만 기독교 장로로서 더 친밀한 정을 두어 왔었다고 훗날 김광일 장로가 청와대에 찾아간 필자에게 말한 적 있다. 김광일 장로는 “김 전 대통령의 신앙은 나도 놀랄 정도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잘 챙겨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무실에 앉으면 조용히 기도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고 들려줬다.
신이건 장로
▲ 2003년 10월 21일(화) 부산롯데호텔에서 부산교계 지도자들이 김영삼 장로 부부를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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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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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문제, 왜 세상 법정으로 가져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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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장로는 1957년 3월 30일생(58세)으로 부산 태생이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이 땅에 사회적 약자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유일하게 법원에 판·검사라고 느낀 끝에 30년간 법정에서 사회적 약자와 힘없는 장애인, 소수자 보호를 위해 법관으로 살아왔던 독실한 크리스천 법조인이다.
김신 장로는 부산 고신 삼일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아 교회를 10여간 섬겨왔다. 그는 스스로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를 지녀 한때 법관 임용 당시 좌절을 겪기도 했었다. 사회일반 언론과 인권단체에서 장애인이라 해서 법관 임용에서 탈락시킬 수 있느냐며 화재의 인물로 떠올랐고, 여론에 힘에 의해서인지 5개월 후에야 판사 임용이 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장애가 있는 신체를 부끄러워하거나 열등감 속에서 소극적으로 살기보다는 자기노력과 개발을 계속해야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그를 강하게 하였다고 평소에 신앙간증을 통해 말해왔다.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시절에는 장애인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라는 에세이집을 냈다. 책 출간을 앞두고 믿는 분에게 제작을 의뢰했었는데, 제작가격보다 더 주었던 일화도 있었다.
필자가 그와 만난 것은 평신도 집사 시절이던 1985년도부터인가 싶다. 그와 초·중학교를 함께 다니며 매일 책가방을 메면서 그를 옆에서 도와 준 친구 안흥일이 지금은 목회자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교회와는 담을 쌓고 있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같은 기숙사 친구의 전도를 통해 우연히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1983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임용한 이래 부산고등법원, 울산지원,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등 관내 각급 법원에서만 30년 간 정통 향토 법관으로 지냈다. 독신한 기독교신자라는 수식어도 따라 다녔다. 부인 신화순 권사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둔 가장이며, 자녀들도 법조인 길을 걷고 있다.
한때 부산교회, 신평로교회 자체 분규사태로 교회가 둘로 나눠질 때 당시 교회분쟁 민사담당 부장판사로 재직할 때 매우 곤란했던 것은 그가 현직 판사이기 이전에 교회 시무장로라는 교회 항존직 직분 때문이었다. 이를 어떻게 화합해서 화평을 이루느냐에 고심했다. 그때 새벽재단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그의 신앙적 고백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가 매주 화요일마다 성경공부를 위해 나오는 부산기독기관장 조찬예배를 출석했는데 김 장로가 회장직을 맡을 때였다. 교회분쟁 해결 대안을 놓고 토론할 때 그의 심정을 표현했었다.
늘 교회분쟁이 사회재판으로 끌고 올 때 ‘왜 크리스천들은 교회 안에서 해결을 못하고 사회법정으로 끌고 오는지’에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것이 지금 기독교 화해조정위원회를 만든 양인평 당시 부산고등법원장 재직 시에 함께 고민했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때론 필자에게 교단 헌법을 묻곤 했을 정도로 교회분쟁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부산교회(통합)과 신평로교회(합동) 교회 분쟁을 매듭짓는데 일반 법 적용보다는 서로 따로 판사실로 불러 기도하는 가운데 해결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 때문에 대법관 후보 청문회시 야당의원이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김신 대법관은 크리스천 법관으로서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하고, 판결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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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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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총 임시총회 소집 요구 정관개정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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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총(대표회장 이성구 목사)은 총회가 5개월이 지났음에도 전체임원회에서 정관규약 개정 등 미비한 내용을 정리하여 임시총회를 개최하기로 한 결의를 지키지 않아 정관규약 개정위원회가 오는 23일(예상) 임시총회를 소집 요청하도록 총회 임원회에 긴급으로 건의했다.
부기총 정관 개정위원회(위원장 박선제 목사, 이재완·석준복·김명석 목사, 조운복·신이건 장로) 6인이 지난 12일 부기총 사무실에 모여 정관개정을 만들어 임시총회에 내어 놓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부기총 임원회가 임시총회 소집요구 건의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임원회 소집을 앞두고 있어 두고 봐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성구 대표회장은 정관개정위원회가 모일 필요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데다, 임시총회 소집도 ‘모일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부정적 시각을 나타낸 바 있다. 지난번 노블리안뷔페에서 가진 증경자문위원회와 연석회의에서 이와 같은 견해를 나타낸 바 있으나, 최근 증경자문위원(증경회장단)과 일부 임원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뜻에서 연석회의를 가진바 있다.
한편, 만일의 경우 임시총회 개최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는 쌍방간의 충돌이 불가피해져 회원들에게 총회소집 요구서명을 전개할 수 있다는 의견도 개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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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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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만 지워서야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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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칼부림 사건’으로 충격을 준 예장합동 전 총무 황규철 목사와 박석구 목사. 사회는 물론 한국교회 내에서도 떠들썩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황규철 목사와 박석구 목사는 예장합동 출신 목회자들이다. 물론 이들은 이미 교단을 탈퇴했으나 교단 총회 전 총무이고 노회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에 합동 교단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합동 총회는 지난 11월 9일 실행위원회를 열고 사건 당사자인 황규철 씨와 박석구 씨에 대해 총회 및 노회 공직 역임 기록 및 명부상 이름을 영구 삭제하기로 결의했다. 이미 교단 소속 목사가 아니지만, 그 흔적마저 지우겠다는 것이다.
과거 기록만 지워서야 새로워질 수 있을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한국교회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진정한 쇄신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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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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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연합기관들 “지금 바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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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연합기관들이 최근 분주한 일정 때문에 실무자들이 “정신없다”고 고민을 털어 놓고 있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성구 목사)는 트리축제가 막바지로 다가온 가운데, 최근에는 부산기독교역사관 건립을 위해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다.
부산성시화운동본부(본부장 안용운 목사)도 금년 말 ‘다음세대’에 포커스를 맞춰 다양한 행사 준비에 분주하다. 11월 중 담임목사 초청 다음세대 사역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4/14 윈도우 컨퍼런스’도 개최했다.
21세기 포럼측도 13일 문화대상 후보자를 최종 마감하고 곧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심사에 착수한다. 20일 경 수상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부문 당 3-4명 정도가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기관 관계자들은 “연말이라 바쁜것 같다. 연말에 연합기관들의 중요 행사들이 몰려 있어 정신이 없다”며 금년에도 분주한 연말을 보낼 것 같다고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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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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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시사매거진 2580 ‘목회자 전별금’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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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MBC 시사매거진 2580이 ‘목회자 전별금’을 주제로 대형교회의 목회자 전별금을 다뤘다. 특히 이 프로에서 홍대새교회 전병욱 목사가 나와 MBC 측과 인터뷰를 했다. MBC 2580은 삼일교회가 성추행 문제로 교회를 떠난 전병욱 목사에게 13억이란 돈을 준 것을 주목했다. 전 목사는 인터뷰에서 “(삼일교회에 기여한 것이 있어) 적으면 적었지,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외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사랑의교회, 광성교회, 광림교회, 금란교회 등을 예를 들어 전별금 문제를 다뤘다. 이 프로에서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목회자가 30년 넘게 한 곳에서 목회를 한 뒤 30억이란 돈을 전별금으로 받는 것에 대한 여론도 조사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과하다”는 반응이었다. 이번기회에 한국교회가 목회자의 전별금 문제도 상식선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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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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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교계 인물2] 황교안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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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교계에서는 그를 ‘황전도사’로 불러왔다. 물론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되기 전에는 그에게 친숙한 호칭은 전도사. 앞으로 목사안수를 받아 반드시 목회자가 되는 것이 그의 영적 꿈이었다고 지난 날 부산기독기관장회 멤버로 참여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법조계 양인평 장로가 부산 고등법원장 시절 부산기독기관장회를 창립했다. 법조계 멤버 중 김신 대법관, 그리고 황교안 국무총리, 허진호 장로(법률구조 전 이사장)를 배출할 만큼 이름 있는 많은 기독 법조인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아마, 영의 은혜를 입는 모양”이라고 어느 목사가 한마디 코멘트 했다. 초대회장 장성만 목사 재임기간에는 기독대학총장들이 대거 참여했고, 법조인 중 현직 부산가정법원 원장 최인석 장로가 회장을 맡고 있다.
황교안 전도사는 대표적인 공안통, 공안검사로 이름을 떨쳤었다. 이번 통진당 해체도 손수 헌법재판소에 직접 가서 소명자료 등 진술을 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그가 부산동부지원 제1차장 검사시절 만났었다. 그는 부산에도 기독교교도소를 만들어 기독교적 교화를 통해 범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교도소 전도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몇몇 부산지역 교회를 순방하면서 헌신예배를 통해 교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항상 동행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 최지영 권사였다. 최 권사는 성악을 전공하여 황 전도사와 함께 듀엣으로 특송하는 등 부부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이후로 몇 번 가진 식사자리를 통해 그의 기독교적 품성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뜻하는바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야간에 수도침례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 부산고검장 시절인 2010년 부산기독기관장회가 매주 화요일, 동구 좌천동 옛 금호호텔에서 조찬성경모임을 가질 때 필자도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는 말이 없고 인자한 학자와 같았다. 아마 옛날 같으면 성균관 대사헌에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고 느꼈다. 마지막 검사 생활도 부산에서 고검장으로 끝을 맺고 2011년 9월 19일부터 2013년 1월까지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변호사로 활동했다.
한때 변호사 시절, 그의 저서 종교활동과 분쟁의 법률지식(시민법률상담) 등 기독교계에 관한 교회법과 사회법을 비교 연구하는데 매우 유익한 법률상식을 제공해주었다. 물론 그는 교회헌법에 관한 해설을 일반법률적 성문법 구조안에서 풀이하는 매우 까다로운 부분까지 자세히 설명하되 가급적 교회 헌법과 권징 틀 안에서 교회분쟁을 해결할 것을 권고하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변호사에서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장관이 된 것도 뜻밖이었고, 국무총리직은 꿈에도 생각 못한 자리였다고 어느 사석에서 말한 것을 보고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005년 서울중앙지검2차장 시절에는 국정원과 안기부의 불법도청사건을 진두지휘하여 당시 불법도청을 지시하거나 묵인한 혐의로 임동원과 신건 등 국정원 전직 원장을 구속시키는 공안검사의 관록을 제시하기도 했다.
황교안 전도사는 매사에 원칙을 중시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독인다운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바울사도가 “늘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한 것처럼 교만치도, 잘난 체도 않고 겸손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와 부산 동부지검1차장 검사시절 모 구청장과 교계 J장로가 불구속 기소가 됐을 때 관할 지역이라 한번 해운대 센텀시티 오션 중국집에 만찬을 한 일이 있다. 공과사를 명확히 구분하여 제대로 말도 못 끄집어냈으나 그는 말은 안 해도 묵시적 눈치로 무엇을 주문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함께 우리가 다 죄인이니까 남을 저주,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다. 침례교 전도사로 서울 소망기독교 교도소에도 그가 함께 일조한 것으로 안다.
한때 국무총리 후보 시절 청문회에서 야당 인사가 “부산 여자들이 거세다”고 본보 기사 내용을 들어 보이면서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부산 여성들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본지의 기사를 검색해 황교안 고검장 시절에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한때 김신 대법관 후보도 청문회 시 본보 기사를 가지고 야당 인사들이 공격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참여정부시절 검사장에 바로 낙방한 고비도 경험하기도 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경기고등학교와 성균관대를 나와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공안검사 길만 외로이 지켰다. 1957년생 아마도 국무총리를 하면서 애굽에 팔려간 요셉처럼 지혜롭게 국사를 잘 운영하면서 위로는 하나님을 아래로는 국민(백성)을 섬기는 기독인 향기가 나는 총리로 마무리하기를 기대한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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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