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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기자수첩 기사

  • 의도는 좋지만 거친 어투 때문에
    최근에 열린 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사로 나선 한 선교사는 말했다. “한국교회 교인 수가 반토막이 났다. 이것은 교인들의 탓이 아닌 목회자와 장로들 탓”이라면서 성도들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다. “故 하용조 목사는 설교 시간에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강요한 적 없지만 성도들이 은혜 받으니 스스로 나가서 전도하더라”면서 “목회자들이 설교시간에 전도하라고 자꾸 강요하니까 교인들이 오히려 하기 싫어한다”며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 거세게 비판했다. 또 목회자들에게 “주일예배에 은혜가 없다면 찬양인도자부터 바꿔라. 신학교에서 조용히 기도에 매진하는 전도사를 찾던지 A선교단체나 B선교단체 출신 전도사들을 찾아라.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기타를 잘 치는 것보다 목사의 설교와 같은 영적 흐름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영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지만, 특유의 거친 어투가 오히려 참석자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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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3-10
  • 체감온도는 이게 아닌데....
    지난 3일 부산성시화운동본부의 ‘부산기독교 교회 전수조사’ 발표 이후 많은 교계 인사들이 의문을 자아 냈다. 체감온도와 달리 지난 10년 동안 부산지역 복음률이 상승했다는 소식에 신뢰도 문제를 제기 했다. 대부분 교회숫자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성도숫자에 대해서는 일선 교회들의 통보를 과연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모 목회자는 “우리가 노회에 보고하는 성도숫자도 사실 신뢰성이 떨어진다. 재적성도를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출석성도, 세례교인으로 보고 할 때도 있다”며 (성도숫자에 대한)교회의 한계를 지적했다. 특히 모 교계인사는 “통계청이 실시하는 2005년 전수조사는 이단들이 포함된 숫자인데, 10.4%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번 11.4%는 이단이 포함되지 않았다. 냉정하게 따진다면 지난 10년 동안 복음률 상승률은 1%가 아닌 3-4% 정도 된다는 소리다”며 “현장에서 목회하는 우리는 더 힘들어졌는데, 어떻게 복음률이 3-4%나 상승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시화본부의 이번 교회 전수조사 실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교회 숫자는 충분히 근거가 있고, (이번 전수조사 내용에 따라)앞으로 교회 연합운동 방향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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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3-10
  • 하늘나라로 돌아간 故 지득용 장로
    길거리에 버려진 약 900명의 아동들이 커서 의사와 교사, 직업군인, 공무원, 자영농업인, 복지사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을 길러낸 착하고 충성된 주의 종, 전쟁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양보육원 설립자 지득용 장로가 지난 2월 6일 94세의 일기로 하늘나라로 갔다. 故 지득용 장로의 장례는 12일 오전 6시 고신대복음병원에서 교계인사와 보육원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고신총회 장로부총회장을 역임한 지 장로의 장례에서는 교계인사들의 환송을 받고 소양보육원이 있는 따뜻하고 양지바른 가덕도 뜰에 안장됐다. △지 장로의 파란만장한 삶 1950년 6.25 사변이 터지자 길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부모 잃은 전쟁고아들을 데리고 가 그들을 먹이고 재우며 기르기 지금의 부산 가덕도 1662평을 매입하고 1951년 12월 24일 정착했다. 대지와 밭을 개간하여 전쟁으로 지치고 실의에 빠진 아동들에게 희망과 신념으로 갖게 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길러낸 것은 지득용 장로의 남다른 박애정신이었다. 그는 일찍이 1942년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 예과를 1년 다녔고 훗날 1958년~1960년 중앙신학교(지금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정식 졸업하며 사회사업가로 거듭났다. 그리고 경상남도 아동복지 시설연합회 이사,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고 경남 사회복지협의회 회장도 역임하며 평생을 사회복지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 일들로 대통령 공의포장(1962), 국민훈장 석류장(1970), 제15대 호암상 사회복지부분(2005)에 수상했다. 지득용 장로는 호암상의 상금 1억 원을 모두 이 소양보육원에 기탁하여 아동들의 음악치료를 위해 리듬밴드부를 만들었고, 전국을 순회했다. 1999년 7월에는 소년, 소녀 오케스트라를 결성해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순회공연으로 하면서 국위선양과 함게 아동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등 아동육성에 헌신해 살아왔다. △숨은 뒤안길에 아픔도 겪어 지득용 장로는 평소 뛰어난 지략가로 故 송상석 목사가 이끌던 법통경남노회의 회계로 송 목사를 보필하는 일급 참모였다. 故 김해룡 장로(진해민선시장)와 故 현기택 장로(마산문창교회)와 함께 송 목사의 오른팔 역할을 하여 고신 총회적으로는 사건 사고가 나면 꼭 전권위원으로 사건을 수습하는 중요 멤버 역할을 소화해 내었다. 그의 탁월한 웅변가이자 이론가였다. 조리를 맞는 그의 발언에 그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재치 있는 변론을 하여 총회적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고신 교단에서 손꼽히는 장로 지도자로 각광을 받아왔다. 그래서 고신 총회 장로부총회장을 역임하고 은퇴 후 전국원로장로회장직을 맡으며 평생을 장로들의 권익과 친교로 우의를 돈독히 한 섬김의 삶을 살았다. 故 지득용 장로의 말년에는 그의 업적이, 그의 섬김이 롤모델이 되어 주위 신·불신 간에 가장 존경받는 어른으로 대접을 받았다. 아동과 같이 천진난만한 성격을 가졌던 지득용 장로. 아론의 지팡이에 옴이 돋고 순이나고 꽃이 되어 살구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일구었던 소양동산에 편안히 잠들게 하시고 하늘의 보좌 옆에 영원히 천국천사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계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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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합똥’이라고 아십니까?
    한국교회의 큰 관심을 받던 사랑의교회와 전병욱 목사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났다.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위임목사 무효청구 및 직무집행금지청구’를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려 사실상 오정현 목사의 손을 들어줬다. 전병욱 목사 사건에 대해서는 예장합동 평양노회 재판국이 전병욱 목사에 대해 공직 정지 2년에 강도권 정지 2개월 등의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 합동 총회 전 총무였던 황규철 목사의 칼부림사건을 비롯해 국내 최대교세를 자랑하는 예장합동에 대한 시선이 싸늘하다. 교단의 개혁과 정화를 촉구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합동 교단을 ‘합똥’ 교단이라고 부른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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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두 신협의 대조적 모습에 유감
    부산지역 교회와 관련있는 신협 두곳이 정기총회를 하면서 대조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A신협은 교회가 창립했지만 지난 2014년 8월 천주교가 창립한 신협과 합병했다. 말은 ‘합병’이지만 ‘흡수’됐다는 ㅍ현이 정확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1월 30일 C교회에서 총회를 열었지만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주류를 이룬 조합원들인데도 하나님 앞에 기도 없이 정기총회 순서를 진행시켰다. 한편 2월 4일(목) 범일동 KT 강당에서 열렸던 B신협은 장기려 박사에 의해 개신교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된 신협이라서 이날 개회선언을 하기 전에는 김운성 목사로 하여금 개회기도를 드리고 시작한 것에 좋은 대조를 보였다. 한곳은 교회 본당에서 시작해도 기도는커녕 교회 마당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지만, 다른 한 곳은 교회당이 아닌 일반 건물 강당에서 시작하면서 정중히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았다고. 하지만 B신협은 회무를 사회 보는 전무가 1년 만에 총무부장에서 상무, 전무로 고속 승진한 가운데 전무가 되었다는데 놀랐다. 능력이 있고 자리가 비워 있어서 승진을 시켰을지라도 일반 회사나 조직체에는 1년 안에 두 계단을 뛰어 넘는 고속 승진은 매우 드문 케이스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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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2-25
  • 다음 이사회에서 2급 직원 임기 규정
    학교법인 고려학원이 최근 이사회를 열고 2급 직원(재단 사무국장, 병원 행정처장, 대학 사무처장)들의 임기 시행세칙을 다음 이사회에서 만들기로 결의했다. 학교법인 감사가 “임기를 넣는게 맞다”는 감사 사항에 대해 이사들이 논의한 후 다음 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립대학에서는 행정직 보직자의 임기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임명권자의 권위와 재량권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또 이사회는 병원 노조와의 대화 창구를 열어 두기로 했다. 이를 위해 최한주 이사와 옥재부 이사 두 명에게 일임을 했다. 한편, 지난 고신대 학위수여식 이후 일부 이사들과 고신대 전광식 총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전 총장은 행복기숙사건과 무척산기도원 매입건에 대해 설명했다. 전 총장은 기숙사 부지의 기반이 약해 추가공사비용(5억원)이 생겼다는 말과 모금을 통해 무척산기도원을 매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 등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무척산기도원 매입금은 2억 5천만원 수준으로 모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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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2-25
  • 복음병원 약품 구입, 공개입찰 시달
    지난달 22일 고려학원 법인이사회(이사장 강영안 장로)에서는 고신대복음병원에 납품하는 약도매상을 앞으로 공개입찰로 새로 선정하겠다고 결의하여 약 구매에 관한한 공개입찰에 붙이라고 병원에 지시했다. 약을 공개하는 경우 대학, 국립병원에서는 공개입찰을 붙여 구매를 하는데 고신대복음병원에서의 이때까지 관행은 약 총판 등 도매업자들 5~6개처가 공급해왔다. 만일 공개입찰을 하면 이때까지 지불해야 할 약품 미불금 약 400억 원을 10개월 씩 결재해 왔는데 미불금 전액을 모두 상환한 후에야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면, 이 막대한 부채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의 대안도 없이 무조건 공개입찰에 붙이라고 한다면 완전 갑질 논란에 휘말리는 결과라고 병원 집행부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더구나 공정위에 알려지면 약품대금 10개월 결재도 위반되어 불이익처분을 받는 처지인데 법인이사회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시행 촉구만 한다면 어찌할 거냐며 손을 놓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 병원 간부는 답답함을 호소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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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화려하게 복귀한 두날개컨퍼런스
    지난해 한해 두날개컨퍼런스는 이단 시비에 휘말렸다. 지난해 5월 예장합신 이대위가 ‘두날개의 이단성에 관한 공청회’를 열고, 두날개컨퍼런스의 이단성에 대해 제기했다. 이런 교계 분위기를 의식해서였을까, 지난해 컨퍼런스를 과거와 같은 대형 전시장이 아닌 풍성한교회에서 열었다. 그러나 두날개선교회측에서 예장합신 이대위의 공청회에 대해 설명회를 가지는 등 적극 대응하고 나섰고, 풍성한교회가 속한 예장합동 교단에서 예장합신 이대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합동 총회와 합신 총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합신 이대위가 공청회를 개최한 것이다. 지난 가을 합동총회에서 합신총회에 항의하기로 결의하며 전세가 역전됐다. 오해를 벗은 두날개컨퍼런스는 벡스코 전시장이 아닌 오디토리움을 대관해 화려하게 복귀에 성공했다. 홀을 가득 메운 3천여명의 성도와 외국인들이 눈에 띄며, 두날개컨퍼런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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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삶으로 전도해야 한다”
    부울경기독교수선교대회에서 개회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지태영 목사(창신대 교목실장)는 “연변과기대를 몇 번 다녀온 적 있다. 김진경 총장님과 거기서 활동하는 기독교수님들의 삶을 부울경기독교수님들이 본을 삼았으면 좋겠다”고 소개했다. 지 목사는 연변과기대를 졸업하는 학생들의 80%가 하나님을 섬기지만, 김진경 총장과 어느 교수들도 하나님을 전도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학생들의 눈에는 ‘교수님 같은 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라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교수들의 삶이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지 목사는 “정직하게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그 분들의 삶 속에서 많은 학생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을 보고 우리 부울경기독교수님들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척박한 복음률 불모지 부산경남 지방에 희망이 되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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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장기려 장로는 말년에 무교회주의에 심취했다
    ▲복음병원 원장직을 떠난 이유는? 장기려 박사는 1951년 7월 1일부터 1976년 6월 25일까지 부산 복음병원(현 고신대복음병원) 원장직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사회, 여러분께 많은 은혜를 입었음을 감사드린다”면서 “나는 비겁하고 게을러서 재직시에 많은 과오와 무책임한 일을 저질러서 여러분께 폐를 많이 끼친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고 복음병원 원장직을 떠나면서 <부산모임> 회지 1976년 7월호에 이렇게 겸손한 글을 올려 읽는 이로부터 아쉬운 눈물을 흘리게 했다. 25년간 이 기관에서 일을 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모른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1950년 10월에 영도 영선초등학교 서쪽 공지에 천막 셋을 치고 진료를 하면서 매일 피난민 100~200명의 환자를 전종휘 박사와 같이 진료했다. 인턴으로 그의 수제자 박영훈 장로가 경북의대에 들어가서 졸업을 앞둔 시기에 스승 장 박사를 뒷바라지 했던 것이다. 운영은 돈이 있는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고 없는 환자는 무료로 진료해 주는 방법으로 했다. 복음병원 원장직을 사임한 후 바로 서울의대 외과교수로 일하면서 복음병원을 옆에서 도왔다. 1974년 말이 되어도 새 원장을 모시려고도 않고 해서 1974년 말에 복음병원으로 다시 돌아왔었다. 다시 돌아온 후 현대병원을 발전시킨 것은 그의 제자 박영훈 의사와 故 정기상 검사실장의 공로가 컸다고 평소 말했다. 1965년 4월부터 서울 가톨릭의대 외과교수로 겸임하여 한달 반은 서울 성모병원에서 일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박영훈 의사 외 8명의 우수한 외과전문의를 배출시켰다고 말하였고, “아마 한강이남에서 외과 수술로는 박영훈 의사만큼 잘하는 의사는 드물 것이다”고 공개석상에서 칭찬했었다. ▲그런 제자와 스승의 관계가 무엇 때문에 끊겼을까? 복음병원과 복음간호전문학교를 세운 분은 장기려 박사다. 하지만 병원을 크게 키운 분은 그의 제자 박영훈 장로이며, 훗날 고신의과대학(고신대 의예과)을 세운 분은 박영훈 복음병원 제2대 원장임이 자타가 인정한다. 씨를 뿌린 것은 장기려 박사였지만 나무를 키워 육성시킨 것은 그의 제자 박영훈 장로이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 열매를 따고 사회적 명성과 빛은 스승 장기려 박사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있지, 박영훈이라는 이름은 그 스승 그늘에 가려져 있어 아무도 입 밖에 내어놓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고 스승을 짓밟고 그 스승의 자리를 탐낸 제자라는 오명을 씌워 박 원장에 대한 업적은 온데간데없이 묻어버렸을까?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제자가 원해서 스승의 자리를 탐낸 것이 아니고 복음병원이 경영난 때문에 부득불 수술로 유명한 침례병원의 박영훈 의사를 모셔왔다. 20,000회 이상 수술을 집도한 박영훈 원장에 의해 고신의대가 신설되고, 병원 3동 건물을 완성할 수 있었고 천안 신대원의 자리를 매입 확보할 수 있었던 그의 공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스승 장 박사만 용비어천가를 불러대니 그의 가족 중 아내 목 권사는 어느 지인한테 “지금 집에서 허리가 아파서 바깥출입을 못하지만 온 세상에 박영훈 글자 하나 내세워주는 사람 없이 홀로 쓸쓸히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말년이 외롭지 않겠는가?”라고 하소연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고려학원 이사회(당시 이사장 이경석 목사)는 장 박사의 부실경영난의 책임소재로 원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명예원장직의 직책만 갖게 했다. 그 당시 병원장 교체시기에는 부산의대 출신 의사(레지던트, 인턴) 등이 의국을 장악한 채 장 박사를 옹립했고, 박영훈 의사는 경북의대 출신이어서 결국 부산의대 대 경북의대 파워게임에서 부산의대 출신들이 대거 밀려났다. 병원을 떠나면서 장 박사는 “나의 복음병원 재직 말기에 일어난 직원 간의 불화, 이 사회의 불화는 나에게 큰 책임감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을 깨닫게 하였으며 그 사명을 위하여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부산모임(1976년 7월호)에 게재하고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시인했다. ▲장 박사는 말년에 무교회 모임에 가담했다 70~80년 전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였던 장 박사는 개인적으로 아주 보수주의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월남 후 똑같은 이름의 부산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여러 교파의 분열양상을 보고 그는 무교회 우치무라 간조, 야남이하라 타다오, 후지이 다케시를 존경하고 그러한 글을 애독하게 되어 주일마다 오후에는 병원 사택에서 무교회 성경연구 모임을 가졌다. 그래서 정든 부산산정현교회 원로장로직에서도 떠나 손정군 형제의 소개로 한국의 무교회 신자들을 사귀게 되었고, ‘작은 종들의 모임’을 주도해 가는 무교회주의자들의 모임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만67세부터 만87세까지 1988년까지 21년간이나 정기적으로 간행된 <부산모임>에는 배후에 김서민, 조광조 선생의 협조가 컸다고 그가 말했다. 결국 한국교회가 부정하는 무교회주의에 신자가 된 장기려 박사는 신앙적인 면에서 기존 장로교 체제를 부정하는 교회를 떠난 영적 아픔을 감수하는 길을 걸었다. 기존 교회(부산산정현교회)의 정신적인 영향을 입혔다고 그의 담임목사였던 박광선 목사는 목회사역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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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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