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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장기려 선생은 왜 정부의 방북 주선을 거절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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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어느 aUP날, 8월인가 싶다. 한완상 통일부장관이 지금의 고신대복음병원 3동 옥탑에 상주하던 복음병원명예원장 장기려 박사를 찾아와 방북을 제안했다. 1990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북녘의 아내에게 보내는 망향편지 글을 읽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비전향 장기수 이익모 노인를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한에 보내면서 동시에 장기려 선생을 처자식이 있는 북한에 평화사절로서 보내기 위해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그때 장기려 박사는 “호의는 감사하다”면서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그 상황을 기술하고자 한다.
1950년 7월 1일부터 1976년 6월 25일까지 만25년을 복음병원 원장으로 지내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풀었던 장기려 박사.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민간 차원에서 최초로 설립한 공로로 1976년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과 1979년 제2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분)을 수상했던 그에게 남북한 대화의 물꼬를 트는 평화의 사도로서 하나의 상징적인 면에서 방북제의를 한 것이다. 정부는 흔쾌히 수락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장 박사는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 바람에 한완상 장관은 매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 필자는 박정희 정부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된 서울대 교수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현장취재로 동행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장기려 선생은 자신만 특혜를 얻게 되면 수많은 이산가족들로부터 빈축을 살 수 있다며 거절의사를 밝혔다. 평소 북에 있는 처자식을 그렇게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던 장 박사가 아니었던가? 필자가 품은 그 의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시간이 매우 지나서야 알게 됐다.
아내 김봉수 여사와 자녀들 생존확인
198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3차 적십자연맹총회 및 대표자회의에 참석했을 때 미국에서 거주하던 그의 조카로부터 여전히 북한에서 살고 있는 아내의 편지를 받게 됐다. ‘살아서 잘 지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들과 딸 또한 김일성대학 물리학교수로, 의사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장 박사는 옥탑 거실의 책상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보며 매일 “여보, 오늘도 좋은 아침인데 그쪽은 어때요? 여긴 남쪽 바다 송도가 훤히 보이는 광경이 유난히도 좋구려. 자식들도 잘 있지요? 오늘도 나는 당신과 자식을 위해, 조국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속삭였다.
어느 날, 정부가 평화사절 일환으로 주선한 방북제안을 왜 거절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기자의 근성이 솟구쳐 장 박사가 거처하는 병원옥탑에 올라가 장 박사에게 직접 물었다.
그는 “신 선생, 이생에서 못 만나면 하늘나라, 주님 품에서 죽도록 만날 것인데 무엇이 궁금한가?”라고 대답했다.
‘내가 아는 장기려 박사’를 통해 장 박사를 회고한 함석헌 선생
장기려 선생은 기독교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김교신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교신은 일본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로 그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계승했다. 장기려 박사는 우치무라 간조의 정신을 이어 받은 이들과 교제하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친교를 갖는 이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이해했고, 매주 성서공부 모임을 가졌다. 장기려 박사는 그들이 발행한 신앙잡지 ‘성서조선’의 정기구독자였다.
장 박사의 여러 통의 편지 기록과 만 67세부터 만87세까지 21년간 ‘부산모임’의 회지 간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긴 것들을 보고 평화주의인 그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보수적인 부산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한편으로 우치무라 간조를 존경하며 관련된 글도 많이 읽었다. 함석헌은 “한 달에 한번은 자신의 집에서 무교회주의 성경모임을 하고 일반교회에서는 용납 안 되는 나를 초청해 그 모임의 강사로 인도케 했다.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만 더 말하면 의사면서 환자가 오면 전도부터 먼저하고, 병은 의사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제 속의 제 힘으로 낫게 하는 것이라 역설하니 이런 의사가 어디 있는가?”라고 말했다.
21세기 방향성을 잃은 한국교회에 던진 간절한 메시지는?
한국고등신학연구원(원장 김재현)에서 펴낸 ‘역사의식을 갖고 살다간 장기려’ 전집을 출간했다. 장 박사가 21년간 써내려간 그의 신앙적 사상과 삶을 기록한 ‘부산모임’회지 내용을 담아 평소 장 박사에게 가졌던 의문(방북제의 거절과 무교회주의를 추종한 부분)을 대충 알게 됐다.
다음 편은 ‘장 박사는 말년에 무교회주의를 따라 종의모임을 주도했는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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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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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랄식품 단지 반대 여론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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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전북 익산에 추진중인 이슬람 할랄식품 단지 설립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SNS 상에서 반대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할랄식품바로알리기전국대책위원회’와 ‘전북기독교언론인연합회'는 지난해 8월 할랄식품 테마단지 조성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할랄식품 테마단지 조성 반대 특별기도회 준비위원회는 최근 익산시청 앞에서 전북기독교연합회 소속 교인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할랄식품 반대 특별 기도회 및 성명서 발표' 자리를 가졌다.
교계내에서는 할랄푸드 단지 조성 사업이 충분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거나 국민적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으며, 이 사업을 통해 극단적인 무슬림들이 유입돼 식품 단지가 이들의 배후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또 할랄식품 단지 조성으로 본래 축산업에 종사하던 주변 농가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할랄 방식의 도축이 동물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기절시키지 않고 서서히 피를 빼 도축하는 방식으로 동물보호법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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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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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없는 주일’ 운동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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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시행하는 교회가 나타다 화제다. 높은뜻정의교회(담임 오대식 목사)가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시작한다. 담임 오대식 목사는 한 달에 한번 주일에 헌금을 거두지 않고, 대신 성도들이 각자 어려운 이웃을 돕도록, 선교와 구제를 몸소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오 목사는 “목사와 장로 그리고 소수의 제한된 사람들만이 교회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교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정의를 구석구석 나타낼 적임자"라며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제안했다. 그는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지 말라. 돈이 많아지니 교회들이 엉뚱한 짓을 한다. 교회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며 “교인들 스스로가 작은 예수로 살고, 선교와 구제의 주체가 돼서 어려운 이웃을 직접 돕는 신앙의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높은뜻정의교회의 이런 운동에 대해 교계내에서는 ‘신선하다’는 반응과 ‘우려한다’는 반응이 공존하는 것이 사실. 하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취지가 좋고, 변화가 필요한 한국교회에 좋은 방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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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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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성 P 목사, '상습 도박' 혐의 불구속 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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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서대문 총회장을 지낸 P 목사가 학교 교비 등을 빼돌려 카지노에서 탕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2부(부장 조상준)는 재단 대출금과 교비 등을 빼돌린 뒤 이를 도박자금으로 탕진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로 P 목사를 최근 불구속 기소했다.
지난 7일자 동아일보에도 ‘도박 탕아 목사’라는 제목으로 이같은 내용이 보도 된 바 있다. 동아일보는 P 목사가 지난 2008년부터 정선 강원랜드 단골 출입자로 출입기록이 조회되는 등 그가 쌓은 카지노 마일리지만 6억원이 넘을 정도로 도박중독자라고 보도했다. 그는 순총학원 이사장을 지내면서 교비와 교회재정을 도박에 탕진한 것으로 보도했다. 현재 그가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금액은 총 66억원에 이른다. P 목사는 2002년 4월부터 2008년 2월까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서대문총회 소속으로 순총학원 3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07년 5월 이후 지난해까지 서대문총회 총회장을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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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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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장기려 박사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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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성산 장기려 장로는 20년 전, 1995년 성탄절 아침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 장기려 박사. 그의 묘비에 새겨진 비문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님을 섬기다 가신분이 여기 잠들다’ 아마 언제가 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예수님의 재림 때 함께 오실 것이다.
평소 장 박사를 뵙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를 부를 때 호칭을 박사, 원장, 장로보다는 선생이라고 부르면 참 좋겠다”고 했다. 그와 동향인인 故 함석헌 선생도 늘 ‘함 선생님’으로 불렸다. 장 선생은 우리나라 유명 외과의사 중에서 유일하게 ‘전문의’가 아니다.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외과 전문의 자격을 사양하고 평생 일반의로 봉직했다. 그래서인지 박사보다 선생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필자가 “장 장로님”이라고 불렀더니 “에이, 장로보다 선생으로 불러다오”라고 하지 않는가. 가만 생각하니 그가 섬겼던 부산 산정현교회에서 교회를 떠나 가정교회를 염원했던 터라 일반 한국교회는 문제가 많아 뜻 맞는 의사들을 중심으로 가정에서 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렸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했다. 병원에서 ‘원장선생님’으로 불렸는데 원장 역시 그냥 ‘선생’으로 불러달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장 박사를 추모하는 물결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장기려 박사 소천 2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장 박사를 추모하는 토크콘서트를 열고 관련된 인사들을 초청, 장 박사에 대한 회고를 엮어 출판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CTS에서는 2015년 성탄절을 기해 장기려 박사 서거 20주년을 맞아 그를 회고하는 영상을 상영하며 평소 근면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장 박사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장 박사의 신앙적 행보
일찍이 이북에 있을 때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했다. 젊은 의학도로서 유기형 장로(치과의사), 유기선 장로(의사, 부산영락교회 원로), 유기천 장로(전 서울대 총장), 유기진 장로(의사)와 신앙생활을 같이했다. 주기철 목사, 조만식 장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훗날에는 우치무라 간조의 신앙적 삶에 심취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과 교류하면서 한국교회 장로교가 여러 갈래로 분열이 되자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무교회주의보다 무교파주의적 시각에서 부산 산정현교회를 떠나게 됐다. 그를 뒤따라간 손동길 안수집사도 가정교회를 세워 주일 예배를 드렸다. 이 일로 부산 산정현교회(당시 담임 박광선 목사, 현 산정현교회 원로)는 재정자립면에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의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병원경영악화로 어려움 겪고, 진료거부사태
유일하게 전문의가 아닌 그냥 외과의사로 남아 의사생활을 했다. 그가 세운 복음병원은 규모가 차츰 커지게 되자 인원이 많아지고 경영과 수입에 애를 먹게 되었다. 병원비가 밀린 환자들은 뒷문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의 인건비가 한두 달씩 밀리는 일도 많았다. 하루는 김병삼 내과과장이 급료가 두어 달 밀리자 원장실을 찾아가 “원장님, 왜 월급을 안 줍니까?”라고 물었다. 장 박사는 “김 과장, 자네는 그래도 생활에 여우가 있는 과장이 아닌가. 좀 참게나...”라고 대답하니 김 과장은 “아니, 원장님은 지금 당장 처자식이 없으니 생활비 걱정은 없을 것 아닙니까? 나는 처자식이 있어 월급이 없으면 못 살아갑니다”라고 항의한 일이 있었다. 결국 병원이 부도 위기를 맞자 침례병원 외과 과장이던 박영훈 선생이 오게 됐고, 6개월 만에 경영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 일로 제자(박영훈 원장)가 스승을 몰아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때 병원은 경북의대와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의 파워게임을 방불케 했다. 1차 의사파동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다.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이 진료거부를 하고 박 원장을 매도하기 시작해서, 주동한 채종묵 의사 등 부산의대 출신의사 3~5명이 당시 부산지검 초임 박철언 검사에 의해 구속 수감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故 이동기 씨 부부를 맺어줬던 장기려
부산 서구 아미동 87번 버스종점 부근은 과거 화장터였다. 지금의 까치고개는 대부분 공동묘지였고, 달동네 판자촌에서 장기려 박사는 5평 남짓한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마련했다. 이곳에서 25년 동안 척추결핵병을 앓고 있던 이동기 씨 가족이 살고 있었다. 장 박사는 어느날 병원 입구에 쓰러져 있는 이동기 씨를 발견하고 그를 업어서 병원으로 데려갔다. 수술을 하는 중 척추신경을 건드려 전신마비가 돼 일어서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장 박사는 이동기 씨를 위해 처소를 마련해주었고, 그를 위해 매달 쌀과 부식을 날라다 주었다. 또 그를 보필한 어느 가난한 여인을 반려자로 맺어주었다. 장기려 박사가 쌀을 사서 어느 산 중턱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뒤를 따라가면서 이 같은 사연을 듣게 됐고, 이동기 씨의 가정에 기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됐다. 이들 사이에 자녀가 태어났다. 현대의학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이동기 씨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훗날 이동기 씨의 큰 아들은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공군 파일럿이 되었다. 이동기 씨는 ‘5월의 환상’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늘 강하고 담대 하라는 장기려 박사의 권면으로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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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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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 믿어 죽인 미국 살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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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소재 언론들은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임산부를 살해한 사건을 보도했다. 피해자 시신은 소파 위에 타월이 덮인 채 누운 자세로 발견됐고, 머리 부분에 총상이 있었다.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흑인 여성 애니트라 브랙스턴이다. 범인은 피해자의 시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이라며 하나님을 믿지 않아 눈에 총을 쏘았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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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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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수상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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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내부에서 이만희의 국제평화언론대상 수상 소식이 화제가 되고 있다. (사)한국언론사협회가 주최하는 ‘2015 국제평화언론대상’에 ‘세계평화공헌 특별대상’에 신천지 이만희가 수상자로 내정되었다고 발표돼 12월 중순부터 신천지 내에서는 축제분위기가 되고 있다. 이 상은 국제평화와 언론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올해 3회째를 맞이했다.
이만희 수상소식을 전해 들은 부산성시화운동본부는 주최측에 “가정을 파괴시키는 인물이 어떻게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느냐”며 항의 공문과 항의 전화를 통해 이만희 실체를 알렸다. 주최측은 “내부적으로 다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보낸 바 있다.
과연 후보자들을 면밀히 살핀 것일까? 주최측은 이력서, 공적서, 추천서 등을 면밀히 검토했다고 전했지만, 말대로 서류만 심사한 꼴이라고 말들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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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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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대신 장종현 총회장 징역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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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대 설립자이며 예장대신 총회장 장종현 목사가 백석대 총장 재임시 60억원의 횡령 혐의로 지난 12월 10일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구속됐다.
이 문제는 총장 재임시 특정업체에게 공사건을 몰아주고, 공사대금을 부풀린 후 일부를 되돌려 받는 방식으로 지난 2012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상 횡령 혐의로 의혹을 받고, 1심 재판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법원은 건설업자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며 장 목사에게 무혐의를 판결했다. 하지만 2013년 10월 2심 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뒤엎고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건설업자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12월 10일 대법원은 장 목사의 항소를 기각하며, 고법의 징역 3년을 최종 확정했다. 장 목사는 다음날 구치소에 수감됐다.
예장대신 총회는 비상이 걸렸다. 현직 총회장이 구속된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 제2부총회장을 맡고 있는 유충국 목사가 목회자들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 “모두가 무죄를 자신했던 총회장님의 재판이 의외의 결과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학교, 그리고 교회와 총회를 돕던 사람들과 회사들을 살리기 위한 총회장님의 내려놓으심이라고 보시면 정확할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무죄이지만 법적인 잣대는 죄로 인정되는 것 같습니다”며 동요를 사전 차단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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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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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성만 목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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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간격으로 대한민국에 그것도 한국교회 안에 큰 별이 두 개가 떨어졌다. 故 김영삼 장로(전 대통령)와 故 장성만 목사(동서대 설립자, 1932~2015) 모두 80대까지 살았던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풍운아요, 큰 인물들이었다.
한때 대한민국을 풍미했던 큰 인물임은 틀림없다. 故 김영삼 장로는 정치적 인물이지만, 장성만 목사는 때로는 정치인으로, 때로는 교육자로, 때로는 문필가로, 때로는 목회자로 이름을 날린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입지적 인물이고 큰 바위 얼굴 같은 다정다감한 친구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인물이었다.
장 목사와의 인연
2010년 4월 어느 날, 동서대 안의 민석(民石, 장 목사의 아호)도서관 개관 커팅을 하는 날이었다. 행사가 있기 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도서관 개관식 참석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취재하러 오라고 하는 줄 알아서 그 때 갔더니만, 민석도서관 개관 커팅하기 전 교목이 기도한 후 장 목사님이 필자와 강판녕 장로를 즉석에서 앞으로 불러, 나갔더니 하는 말씀이 “여기 신 사장은 처음으로 부산실업전문학교로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찾아주지 않던 1974년 교회연합신보 기자가 찾아와 취재하며 학교를 소개해 준 기억이 있다”고. 그래서 뜻 깊은 날에 불렀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판녕 장로는 이 허언 벌판 산중턱 언덕 아래로 도로를 내고 길을 넓히는데 북구청장 재직시 구청 예산으로 이 길을 넓혀 주는 큰 도움을 받아 이렇게 초청 했다고 설명했다. 이 두 분에게 기념선물과 커팅을 함께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은 적 있다. 전혀 생각도 못한 이벤트에 초청 된 상황이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장성만 목사와의 첫 만남은 그보다 5년 전이었다. 필자가 처음 장성만 목사를 만난 것은 1969년 8월 여름 지인의 소개로 장 목사를 찾아가 서울 대한일보 기자 채용시에 추천장을 받은 것이 처음의 인연이었다.
물론 대한일보 발행인이 한양대학교 설립자 김연준 장로로 그가 발행한 신문이 일간지 대한일보와 주간지 교회연합신보였다. 한달간의 수습기자로 있을 때 소위 수방사령관 윤필용 사건이 터졌다. 그때 김연준 장로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고 대한일보가 폐간되었다. 직원들도 뿔뿔이 헤어지는 마당에 나는 주간지 교계신문 교회연합신보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인연으로 오늘날까지 교계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 첫 만남이 글을 쓰는데서 출발된 장성만 목사, 그가 민주신보(국제신문의 전신) 시절 문화면에 글도 썼던 계기로 수필가로 알려졌다. 그리고 부산기독문화 월간지 단행본을 발행한 적도 있었다.
장성만 목사의 칼럼은 독자에게 어필
본보 발행 20년 동안 한국기독신문에 칼럼을 써왔다. <장성만 목사 칼럼>은 A4 1장 내용의 글이 지면을 장식하여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워낙 유명한 집필과 명성이 있는 관계로 그의 글은 독자와 한국교회에 심금을 울려주기엔 충분한 감동적인 메시지였다. 이런 글들이 모아져 ‘피리는 불어도’라는 소책자가 출간되기도 했다.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을 잊을 수 없어
장 목사가 소천하기 7일전 11월 29일 주일 오후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신이건 장로 폰입니까? 여긴 장성만 목사님 집인데, 장 목사님 바꿔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장 목사를 바꾸어 준 전화에 “신 장로, 이번 21세기포럼 기독문화대상을 받게 되어 축하합니다. 진작부터 주고 싶었는데 늦게 주게 되어 한편 미안하고 내가 몸이 아파 시상식에 못 갈 것 같아 미안합니다. 꼭 나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전화로 인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필자와 마지막 통화였다. 전화를 바꿔 준 분이 장 목사의 사모 박동순 이사장이었다. 이 육성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생과 사, 이생과 저생 이런 갈림길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는가?
장 목사는 황무지와 같은 사과밭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땅을 일궜고 기적의 땅,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만든 신앙의 선구자인 어른이었다. 목회자로, 교육자로, 정치인으로 때론 문필가로 25권의 저서를 남긴 그의 주옥같은 명언과 메시지가 우리의 가슴에 찾아들곤 했다.
장 목사가 간 하늘나라는 천국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가득하고 예수님의 보좌 곁에 계실 장 목사의 빛나는 영광의 환희가 선하게 비쳐지길 원하고 있는 것은 나만의 기대와 환상은 아닐 것이다.
평안히 잠드십시오. 평소 가난한 자의 편에서 아껴 주시고, 도움을 주신 장 목사님, 편하게 아프지도 않고 찬양소리에 영광 돌릴 천국의 자리에서 지켜보고 계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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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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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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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들이 수능이 끝난 고3을 대상으로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어 교회와 가정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신천지의 경우 각종 설문지를 통해 학교 앞, 지하철, 번화가 등에서 선물공세를 펼치며 학생들에게 접근한다. 이때 학생들의 신상정보를 파악 한 후 포교활동에 착수한다. JMS도 각종 오디션이나, 연극, 영화 등 예능쪽으로 고민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또 다른 이단들도 각종 취미활동이나 진로, 각종 상담을 통해 고3 학생들에게 접근한다. 고3의 경우 수능이 끝난 뒤 시간이 많고, 다양한 여가 활동을 펼치고 싶은 욕구가 높다. 이점을 이단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단전문가들은 “교회 내 다음세대 사역자들이 고3 학생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인지시켜 줘야 한다. 그리고 크리스천 가정에서도 자녀들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특히 교회 밖 성경공부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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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