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2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기자수첩

실시간 기자수첩 기사

  • 성산 장기려 장로의 신앙 사상과 그의 역사 의식 (2)
    ▲장기려 박사의 25년 시대를 마감하고 박영훈 새 원장 시대에 들어가 1976년 6월 25일 박영훈 장로의 제2대 원장 취임과 장기려 박사가 퇴임하는 그 날 장 박사는 인사말을 통해 “박영훈 전문의사가 저의 후임으로 원장에 취임하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요 또한 여호와이레(하나님이 준비 하셨음)라고 믿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병원은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수년 전부터 이 병원에 불화가 생겨서 인사문제가 어려워졌고 또 작년에는 경리상 부채가 생겨서 이 모든 책임을 느끼고 두어 번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그때마다 사표를 반려해 주셨고 오늘까지 만 25년간을 근속하게 해 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요, 불명예로 가득 찬 저를 명예원장으로 추대해 주신 총회와 이사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새로 취임하는 원장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시고 병원 발전에 사명을 다하실 것을 믿으면서 이것으로 저의 퇴임사를 드립니다”라고 고별사를 대신하고 떠났다. ▲장 박사의 신앙정신은 보수적이었으나 훗날 무교회로 기울어 장 박사가 젊었을 때 평양 산정현교회에서의 신앙은 그야말로 보수적인 신앙에서 배워 교회장로직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월남하여 부산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있던 약 10년간에는 한국교회가 분열과 분쟁으로 교권이 활개를 칠 때였다. “아, 이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한국교회를 한탄하시지 않겠냐”며 1970년대부터 우찌무라 간조와 김교신, 그리고 함석헌 선생을 초청하여 무교회주의적인 신앙사상을 주입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장 박사는 그 당시 분열로 망신창이가 된 한국교회를 보고 최초로 교회를 세웠다. 중구 부평동 소재한 신성교회는 어느 교파에 가입 된 적이 없는 독립 교단으로 몇 년간 있다가 박광선 목사가 시무 할 당시 사하구 괴정동으로 대광교회와 합병해 통합 부산노회 부산 산정현교회로 명칭을 바꾸어 새로 출발 한 것이다. 장 박사는 보수적 신앙을 가졌지만 중간에는 무교회주의적인 작은 종들의 모임으로 가정에서 주일날 예배 드리고 십일조는 아예 삭제하여 스스로 헌금하는 퀘이커 신앙으로 탈바꿈 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산모임에 나가 보면 거의 우찌무라 선생의 강의나 주석을 가지고 성경공부 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 함석헌 선생을 초청하여 강의를 듣곤 했다. 함 선생도 장 박사는 교파를 멀리하고 순수 복음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교회가 다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한다고 역설했다. 장 박사가 부산 산정현교회 원로장로로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교회를 떠나고 말았을 때에 담임목사였던 박광선 목사가 가장 괴로워하며 안타까워한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장 박사 혼자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손동길 안수집사 등 몇몇 교인들도 장 박사를 따라 교회를 떠나는 상황이 되었다. ▲장 박사는 왜 기존 교회를 떠나가게 됐을까?…평화주의자로 발돋움 그것은 분열로 얼룩진 한국교회에 희망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며 종종 말씀 가운데 강조했다. “이 땅의 불쌍한 동포들의 살 길은 하나님의 나라 곧 평화, <샬롬>”이라고 설파했다.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장 박사가 한반도의 분단을 걱정한 나머지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평화를 주러 왔노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장 박사는 평화주의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된다. 장 박사는 한시도 이북에 두고 온 처자식을 잊지를 못했다. 그 심정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찾아오는 남북통일을 이루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라고 늘 강조해 왔다. 세계평화와 한반도의 평화는 오로지 복음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같이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그의 차원 높은 신앙을 읽을 수가 있었다. ▲장기려 박사의 신앙과 소명의식은? 장 박사는 1972년부터 복음병원 내 불화를 보고 ‘나의 생애와 헌신’이란 부산모임 회지에 이렇게 그의 심정을 적었다. “그때 나는 나의 책임이 가난한 환자의 진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평화를 이룩하는데 있음을 절감했다. 환자 진료보다는 평화에 대하여 더 힘써야겠다고 느꼈다. 원내의 평화뿐만 아니라 이 민족의 평화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하여 살아야하겠다”는 소명의식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장 박사의 신앙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1965년 즈음에 일본 야나이하라 타다오 선생의 히브리서 11장 1~4절까지를 해석한 <기독교 이상주의>라는 글을 읽고 난 뒤 그 사상 정신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무교회정신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도록 신앙에 심취한 것이다. 신이건 장로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16-04-21
  • 교계 연합기관 및 지도자들 기독자유당 지지 호소
    4.13 총선을 앞두고 한기총과 한교연 등 연합기관과 교계 지도자들이 기독자유당의 지지를 호소하고 나섰다. 지난 5일 오전 7시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목회자 초청 간담회’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동성애 합법화와 국내 이슬람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하나가 돼야 한다면서 기독자유당의 여의도 입성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기독자유당은 이날 결의문을 발표하고 4.13 총선에 한국교회가 하나 될 것, 한국교회 전 성도가 투표에 적극 참여할 것, 동성애·이슬람·차별금지법을 저지할 것, 이번 총선을 제2의 3.1절 운동으로 전개할 것, 개인적 목적을 위해 만든 다른 기독정당은 인정하지 않을 것, 8일과 9일 사전 투표에 100% 투표할 것을 다짐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6-04-07
  • 부산에는 누가 나오나?
    4.13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선거지역구가 개편되면서 예비후보로 이름 올린 인사가 많았지만, 뚜껑을 열고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기독교인 선거후보자가 별로 없다. 이번 제20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후보들 중 기독교인 후보는 부산 해운대갑 하태경(새누리당) 후보, 사하구 을 조경태(새누리당) 후보, 사상구 장제원(무소속) 후보로 알려져 있다. 서울 및 수도권 지역에는 기독교인 후보가 많은 반면 부산에서는 드물어 아쉽기만 하다. 지역 복음률이 낮은 것을 반영하듯 기독교인 후보 찾기가 어렵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6-04-07
  • 그렇게도 시끄러운가요? 청빙문제로
    부산에 있는 K교단 B교회는 담임목사 후임문제로 내홍을 앓고 있다. 결국 몇몇 권사와 은퇴장로들이 노회에 고발장을 최근 제출하고 말았다. 내용인즉 후임자 후보로 들어 온 34명 가운데 1차 심사를 거쳐 11명으로 압축하고, 2차 심사를 통해 5명의 후보자를 가려냈다. 그런데 그 중 J목사가 2차 합격자 5명 안에 든 것이다. 문제는 J목사는 1차 합격자인 11명 중에 없었는데, 2차 합격자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이다. 청빙위원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올라있었다. J목사는 정규 박사학위도 아니고, 교단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에 태클을 걸고 청빙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 내용이다. 한편 고발장 내용은 청빙 이외 개척교회를 하다가 목회자가 다른 곳으로 가는 차제에 그 교회를 1억원에 매매하였다고 부동산 중개비 800만원을 포함한 1천만원 가량이 입금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밝혀달라는 내용이었다. 교단 총회장을 배출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가 시끌시끌한 가운데 공은 노회재판국에 넘어가게 된 것을 노회 안 중진들은 공석 중인 교회에 사탄이 시험하고 있다고...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6-04-07
  • 재정 어려움 호소
    부활절연합예배 헌금이 1천 3백여만원이 거둬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작년 1천 9백여만원보다 6백만원이 적은 것이다. 문제는 광고수입인데, 작년에 비해 2천7백여만원이 덜 거둬졌다고 모 관계자는 말했다. 부기총 모 관계자는 “예년에 비해 약 3천만원 정도 적자가 났다. 사람들이 예년에 비해 참석률이 좋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 “다음 회기 넘겨줄 돈이 부족할 것 같다”며 걱정했다. 교계 모 인사는 “일련의 부기총 문제들 때문에 지역 성도들이 외면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시끄러운 모습만 보여주니, 찾고 싶겠느냐?”며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부산의 대표기관이기 때문에 하루속히 위상을 회복하기를 바란다”고 바람을 전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6-04-07
  • 성산 장기려 장로의 신앙 사상과 그의 역사 의식 (1)
    ■복음병원과 인연 복음진료소가 영도 제3영도교회 천막과 교회 창고에서 시작 되었다. 그 당시는 전시 중이라 무료진료한다는 소식에 부산의 수많은 피난민들 속에서 화제가 되어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가 1951년 6월 21일 부산 남항동2가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복음진료소를 세운 당시 직원은 겨우 3명에 불과했다. 전영찬 선생이 모금 한 돈5천 달러로 수술 용구를 구입해 겨우 진료할 수가 있었고 전영찬 선생은 미군 하야리아부대에 가서 박영훈 학생을 동행하여 크리스마스 실과 그림엽서를 직접 제작하여 미군들에게 판매, 모금을 계속 할 수가 있었다. 장 박사가 그 해 7월 1일 복음진료소를 개원한 후 그의 명성을 듣고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로 도저히 진료를 감당하지 못해 1개월 후 영도 영선동 180번지 약 210평의 공지에 천막 3개를 치고 진료를 이어 나갔다. 그때 함께 도왔던 서울 의전 출신의 차봉덕 의사와 후배의사 전종휘 박사가 내과를 진료하는데 합류했다. 그 후 외과 담당 이상기 선생과 경북의대 학생이었던 박영훈 학생은 방학기간동안만이라도 심부름도하고 장 박사를 옆에서 도왔다. 복음진료소는 주님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병원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을 진 그 사랑을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나눠주는 참으로 병원 같은 병원 바로 기독병원의 역할을 다하는 복음 그 자체이었다. 한국전쟁의 소식을 듣고 어려운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모금한 5천 달러의 거금으로 병원 기초를 놓았던 전영찬 선생은 병원 총무일을 보는 중 해외 및 국내 모금에 사소한 잡음으로 의심받는 일이 생겼다. 전 선생은 더 이상 의심받아가면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잠시 접어 두었던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출국을 하고 말았다. 고신 대한기독교경남 구제회는 사람을 부려먹고는 의심과 의혹으로 전영찬 선생을 섭섭하게 한 것과 그가 세상을 뜨기까지 교단 차원에서 그 분을 불려다가 사과하거나 감사장을 준 적이 없다며, 훗날 그의 아들 전 교장이 교육협력위원장이 됐을 때 법인이 관선회복을 위해 찾아 간 교단 인사들에게 그런 말을 실토한 일이 있었다. ■복음병원 부지 확보의 공로자는 복음병원의 부지를 확보한 이면에는 부산남교회를 시무했던 한명동 목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 것이다. 지금의 서구 암남동 34번지에 위치 한 1만3천평 중 병원 부지 5천평, 신학교용 교사부지 8천평의 땅 구입은 남교회를 시무하던 천사당 주인인 박봉화 장로와 삼일교회 주영문 장로, 주태화 장로, 이성태 집사, 김선애 집사의 헌금이 큰 몫을 작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1951년 6월 영도에서 개원한 복음의원이 만 6년만인 1957년 6월 1일 송도로 옮기게 되고 천막병원에서 콘크리트 벽돌 병원으로 단장한 종합병원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대표 박손혁 목사)가 주체가 된 복음의원이 비영리 의료법인으로 병원 개설 허가를 받았고 직원은 도합 39명이었다. 그리고 1965년 9월 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유지재단에 재산을 편입시켜 명실 공히 교단 병원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복음간호학교 설립, 장 박사 초대교장이 되어 병원에는 절대적인 간호사가 필요하여 1968년 3월 3년 과정으로 복음병원 부속 간호학교로 설립 허가를 문교부로부터 받았다. 그때 초대 교장이 장기려 박사였다. 병원은 거듭 발전하여 1966년 7월 2일 보건의료기간으로 지정 받았고 67년 12월에는 레지던트 수련병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 송상석 목사는 복음병원 원장 장기려 박사가 퀘이커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와 국내에는 김교신, 함석헌 선생을 불러다가 한달에 한번씩 강연하는 등 고신교단의 개혁주의와는 정반대의 신앙노선으로 가는 장 박사를 자진 사임케 하려고 했다. 그 방법으로 병원 경영이 어려우니 곧 병원 부도가 날 판국인데 어찌 하겠는가로 압박하자 장 박사는 미련 없이 병원장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때 제일영도교회 출석하는 장 박사의 제자 박영훈 의사를 후계자인 제2대 병원장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복음병원 분규 사태, 부산의대와 경북의대간의 대결 미국 하버드에서 간연구로 수학하던 박영훈 의사를 귀국하도록 장 박사가 지시 하는 바람에 서둘러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1973년 병원 안에는 부산대 출신 의사 채종묵, 김훈, 박영식, 김재만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이 의국을 중심하여 진료를 거부하고 경북의대 출신 박영훈 제일외과 과장은 물러가라며 스승을 배신한 제자라고 주장했다. 소위 의료진료 거부 사태에 이르자 당시 부산지검에 첫 부임한 박철언 검사가 이들을 선도한 의사들을 모조리 구속하게 되었다. 그 배후 세력에 대해서도 몇몇 시니어급 의사들을 입건하게 되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박영훈 의사는 침례병원 외과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겨우 진정이 되었다. 1976년 1월 병원 경영에 어려움이 있자 침례병원에 있는 박 과장을 불러 제2대 원장으로 임명한 것이 당시 법인 이사장 이경석 목사이다. 장기려 박사는 명예원장으로 추대하고 박 원장이 1976년 6월 25일 제2대 병원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25년간을 오로지 병원 일에만 전념 한 인간 장기려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신이건 장로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16-04-07
  •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부산 교계 중견 교회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어느 성도가 안타까워 본보에 전화로 제보를 해 왔다. 사연인즉 A 목사가 부임한지 3년이 됐고 B교회 당회는 작년 연말 A 목사가 3년이 되면 더 이상 연임하지 않기로 9명의 시무장로 중 6명이 찬성, 1명이 반대, 1명은 기권, 1명은 불참해 결의했다. A 목사가 4월 노회에 연임이 보류가 된 상태에서 B교회 제직회는 3월 20일 제직회를 속회하고 노회 규칙부에 당회에서 담임목사 연임문제가 나왔을 때 담임목사 당사자는 불참한 가운데 대리당회장을 세우지 않고 투표한 것이 불법인지 적법인지 여부를 노회 규칙부에 질의하자고 대다수 제직들이 찬성하고 나섰다. 이 때,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자 당회 서기가 나와 다음 당회시 재논의하기로 하고 다시 정회를 선포하고 말았다고 한다. 노회에 가면 노회가 개입하게 되고 더 시끄럽게 되니 당회에서 재논의하는 방안을 강구하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담임목사가 나갈 곳도 없이 사임하는 것은 반대 여론이 많아지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내가 왜 나가야 되느냐”고 항변한 담임목사는 “그동안 100여명의 교인을 증가시켰는데 왜 나가야 됩니까?”라고 제직회에서 항변한 것이 불씨의 도화선이 된 것이라고 어느 성도는 말해 주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6-03-24
  • 고려학원 이사회 정회, 일부 이사들 퇴장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가 지난 22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이사회를 열고 감사보고를 받았다. 이영욱, 박철용 감사는 재단국장과 복음병원 행정처장에 대해 징계요구를 하였고, 이사회는 감사보고를 받은 이유 때문에 징계위원회를 구성했다. 재단국장의 경우 이사회가 결의하지 않은 부칙조항 삽입 문제로 징계위원회(박윤배, 옥재부, 변성규 이사)에 회부되었는데, 서면경고나 견책 정도의 말이 흘러나올 정도로 경징계가 예상되고 있다. 반면 병원행정처장의 경우 이사장과 이사들의 의견이 크게 달랐다. 감사보고에서는 행정처장의 임기가 종료됨을 확인했고, 이에 따라 일부 이사들은 새 처장을 뽑기 전까지 대행체제로 가자고 주장했지만, 강영안 이사장은 임기종료를 선언하고, 이사장 직권으로 복음병원장에게 행정처장 임기종료 사실을 통보했다. 또한 새 행정처장을 총장과 협의하여 이사회에 제청할 것으로 요구했다. 징계위 회부에 대한 말들도 무성하다. 감사보고는 분명 징계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지만, 이영욱 감사는 ‘감사 추가 의견’을 통해 행정처장이 그럴만한 행동을 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고려학원 관계자는 “징계위 구성이 죄가 있다고 확정하는 건 아니다. 검사가 기소했다고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통해 확정하듯이 징계위원회에서 감사보고를 기초로 이 문제를 철저히 조사해서 징계수위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감사보고 내용 중에는 처장이 각 부장들에게 골프채를 선물로 준 것이 정관 52조 3항(교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을 위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직원들 중에서는 징계를 너무 포괄적으로 적용했다는 의견도 있다”고 말했다. 병원 관계자도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선물을 준 것이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앞으로 상사가 부하직원을 강압적으로만 대하라는 것이냐”며 “기독교 기관답지 않은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행정처장 직무대행 논란으로 일부 이사들이 퇴장하는 등 고려학원 이사회가 다시 파행을 겪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임학 병원장이 현 처장을 다시 제청할지, 아니면 새로운 인물을 제청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6-03-24
  • 기독당 50만표 넘을까?
    지난 3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기독자유당(대표 손영구, 이하 기독당)이 창당됐다. 기독당은 앞선 두 번 선거에서 비례대표가 주어지는 50만표를 얻지 못했다. 4년 전에는 45만표에 그쳐 아깝게 비례대표 당선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내 진입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6-03-24
  • 내가 본 인간 장기려 박사 (2)
    아래 편지는 미국에 있는 조카(장혜원)가 이북에 가서 직접 살아있는 아내 김봉숙 여사(80대)가 친필로 조카를 통해 보내 온 육필 서신이 바로 순애보를 연상케 하는 편지내용이다. 김봉숙 사모의 답장>>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 꿈속의 당신이 무의촌에 갔다 오면서 주머니 속에서 쌀 봉투를 꺼내 주시면 저는 하루 종일 기뻤습니다. 당신이 거기에서도 당신답게 사신다는 것을 혜원의 편지를 받기 전부터 저는 알았습니다. 이산 가족들과의 만남이 하루 빨리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팔십이 넘도록 살아 있음이 어쩐지 우리가 만나게 될 약속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썩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 때에 오려나 일구월심 나의 맘에 그대 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암만 말하여도 안타깝지만 하여 이만하고 당신과 기용이네 가족이 건강하여 만나게 될 그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으며 부디 옥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 평양에서 김봉숙 올림 - ▲춘원 이광수씨의 ‘사랑’ 모델로 삼아 장기려 선생은 평양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1909년 7월15일에 유복한 믿음 좋은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고 송도 고보 3학년 때부터 자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삶을 살겠다며 그 때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 후 경성의전에 입학하여 졸업시는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과학에 명성이 높은 백인제 선생의 조수와 제자가 되었다. 이때 춘원 이광수가 의전병원에 입원하여 신장 절제수술을 백인제 선생의 집도로 수술을 받고 장기려 선생이 이때 춘원을 도와주면서 인술을 사랑으로 섬기는 헌신을 보고 춘원이 훗날 ‘사랑’이란 소설의 주인공 모델을 장기려 선생을 ‘안민’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그 후 장 선생은 일본인 기리하라 교수가 나고야 의과대학교수로 전근되어 간 계기로 나고야 의과대학에서 1940년 학위를 받았다. 백인제 스승의 추천으로 대전 도립병원 원장으로 가게 되었으나 가지 않고 기독교 병원인 평양에 있는 기홀병원 외과과장으로 갔다. 해방이 되자 평남 인민위원회 위생과장을 거쳐 제1인민병원 원장 겸 외과과장이 되었다. ▲간첩 누명 쓴 일 훗날 월남 한 후에 남한 특공대로부터 간첩 누명으로 일주간 조사와 취조를 받았을 때 한상동 목사와 미국인 마두원 선교사가 선처를 호소함으로서 두 분의 신변보증과 신변인수를 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1951년 6.25가 발발하자 국군이 북진하자 국군이 평양에 들어오고 국군을 야전 병원에서 군의관과 함께 진료하였다. 마침 수요일 오후 교회에 가서 장기려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함께 예배 드리던 미군 군의관이 같이 남하하자고 권유하여 짚차를 타고 집으로 가서 1950년 12월 3일 오후 집에 남아있는 둘째아들 가용이만 데리고 차에 탔다. 개성을 거쳐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한 날이 바로 12월 18일이었다. 장 선생은 부산에 있는 제3육군병원에서 진료를 돕고 있었다. 제3육군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던 장 박사를 만나러 온 한상동 목사와 전영찬 선생이 찾아왔다. 전영찬 선생은 자기가 미국에서 공부 도중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모금운동과 유엔미사원호처,<uncac>에서 병원을 지으면 약품을 제공하겠다는 말과 함께 장 박사를 설득하게 되었다. 불우한 사람들을 진료한다는 말에 장 박사는 하나님 앞에 서약할 때 불쌍한 내 민족을 위해 헌신 하겠다는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즉석에서 허락한 것이 복음병원과 깊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복음병원의 시작이 그때부터였다. 신이건 장로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16-03-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