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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기자수첩 기사

  • “삶으로 전도해야 한다”
    부울경기독교수선교대회에서 개회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지태영 목사(창신대 교목실장)는 “연변과기대를 몇 번 다녀온 적 있다. 김진경 총장님과 거기서 활동하는 기독교수님들의 삶을 부울경기독교수님들이 본을 삼았으면 좋겠다”고 소개했다. 지 목사는 연변과기대를 졸업하는 학생들의 80%가 하나님을 섬기지만, 김진경 총장과 어느 교수들도 하나님을 전도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학생들의 눈에는 ‘교수님 같은 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라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교수들의 삶이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지 목사는 “정직하게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그 분들의 삶 속에서 많은 학생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을 보고 우리 부울경기독교수님들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척박한 복음률 불모지 부산경남 지방에 희망이 되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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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2-03
  • 장기려 장로는 말년에 무교회주의에 심취했다
    ▲복음병원 원장직을 떠난 이유는? 장기려 박사는 1951년 7월 1일부터 1976년 6월 25일까지 부산 복음병원(현 고신대복음병원) 원장직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사회, 여러분께 많은 은혜를 입었음을 감사드린다”면서 “나는 비겁하고 게을러서 재직시에 많은 과오와 무책임한 일을 저질러서 여러분께 폐를 많이 끼친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고 복음병원 원장직을 떠나면서 <부산모임> 회지 1976년 7월호에 이렇게 겸손한 글을 올려 읽는 이로부터 아쉬운 눈물을 흘리게 했다. 25년간 이 기관에서 일을 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모른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1950년 10월에 영도 영선초등학교 서쪽 공지에 천막 셋을 치고 진료를 하면서 매일 피난민 100~200명의 환자를 전종휘 박사와 같이 진료했다. 인턴으로 그의 수제자 박영훈 장로가 경북의대에 들어가서 졸업을 앞둔 시기에 스승 장 박사를 뒷바라지 했던 것이다. 운영은 돈이 있는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고 없는 환자는 무료로 진료해 주는 방법으로 했다. 복음병원 원장직을 사임한 후 바로 서울의대 외과교수로 일하면서 복음병원을 옆에서 도왔다. 1974년 말이 되어도 새 원장을 모시려고도 않고 해서 1974년 말에 복음병원으로 다시 돌아왔었다. 다시 돌아온 후 현대병원을 발전시킨 것은 그의 제자 박영훈 의사와 故 정기상 검사실장의 공로가 컸다고 평소 말했다. 1965년 4월부터 서울 가톨릭의대 외과교수로 겸임하여 한달 반은 서울 성모병원에서 일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박영훈 의사 외 8명의 우수한 외과전문의를 배출시켰다고 말하였고, “아마 한강이남에서 외과 수술로는 박영훈 의사만큼 잘하는 의사는 드물 것이다”고 공개석상에서 칭찬했었다. ▲그런 제자와 스승의 관계가 무엇 때문에 끊겼을까? 복음병원과 복음간호전문학교를 세운 분은 장기려 박사다. 하지만 병원을 크게 키운 분은 그의 제자 박영훈 장로이며, 훗날 고신의과대학(고신대 의예과)을 세운 분은 박영훈 복음병원 제2대 원장임이 자타가 인정한다. 씨를 뿌린 것은 장기려 박사였지만 나무를 키워 육성시킨 것은 그의 제자 박영훈 장로이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 열매를 따고 사회적 명성과 빛은 스승 장기려 박사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있지, 박영훈이라는 이름은 그 스승 그늘에 가려져 있어 아무도 입 밖에 내어놓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고 스승을 짓밟고 그 스승의 자리를 탐낸 제자라는 오명을 씌워 박 원장에 대한 업적은 온데간데없이 묻어버렸을까?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제자가 원해서 스승의 자리를 탐낸 것이 아니고 복음병원이 경영난 때문에 부득불 수술로 유명한 침례병원의 박영훈 의사를 모셔왔다. 20,000회 이상 수술을 집도한 박영훈 원장에 의해 고신의대가 신설되고, 병원 3동 건물을 완성할 수 있었고 천안 신대원의 자리를 매입 확보할 수 있었던 그의 공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스승 장 박사만 용비어천가를 불러대니 그의 가족 중 아내 목 권사는 어느 지인한테 “지금 집에서 허리가 아파서 바깥출입을 못하지만 온 세상에 박영훈 글자 하나 내세워주는 사람 없이 홀로 쓸쓸히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말년이 외롭지 않겠는가?”라고 하소연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고려학원 이사회(당시 이사장 이경석 목사)는 장 박사의 부실경영난의 책임소재로 원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명예원장직의 직책만 갖게 했다. 그 당시 병원장 교체시기에는 부산의대 출신 의사(레지던트, 인턴) 등이 의국을 장악한 채 장 박사를 옹립했고, 박영훈 의사는 경북의대 출신이어서 결국 부산의대 대 경북의대 파워게임에서 부산의대 출신들이 대거 밀려났다. 병원을 떠나면서 장 박사는 “나의 복음병원 재직 말기에 일어난 직원 간의 불화, 이 사회의 불화는 나에게 큰 책임감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을 깨닫게 하였으며 그 사명을 위하여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부산모임(1976년 7월호)에 게재하고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시인했다. ▲장 박사는 말년에 무교회 모임에 가담했다 70~80년 전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였던 장 박사는 개인적으로 아주 보수주의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월남 후 똑같은 이름의 부산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여러 교파의 분열양상을 보고 그는 무교회 우치무라 간조, 야남이하라 타다오, 후지이 다케시를 존경하고 그러한 글을 애독하게 되어 주일마다 오후에는 병원 사택에서 무교회 성경연구 모임을 가졌다. 그래서 정든 부산산정현교회 원로장로직에서도 떠나 손정군 형제의 소개로 한국의 무교회 신자들을 사귀게 되었고, ‘작은 종들의 모임’을 주도해 가는 무교회주의자들의 모임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만67세부터 만87세까지 1988년까지 21년간이나 정기적으로 간행된 <부산모임>에는 배후에 김서민, 조광조 선생의 협조가 컸다고 그가 말했다. 결국 한국교회가 부정하는 무교회주의에 신자가 된 장기려 박사는 신앙적인 면에서 기존 장로교 체제를 부정하는 교회를 떠난 영적 아픔을 감수하는 길을 걸었다. 기존 교회(부산산정현교회)의 정신적인 영향을 입혔다고 그의 담임목사였던 박광선 목사는 목회사역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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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현장
    2016-01-26
  • 성산 장기려 선생은 왜 정부의 방북 주선을 거절했는가?
    1991년 어느 aUP날, 8월인가 싶다. 한완상 통일부장관이 지금의 고신대복음병원 3동 옥탑에 상주하던 복음병원명예원장 장기려 박사를 찾아와 방북을 제안했다. 1990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북녘의 아내에게 보내는 망향편지 글을 읽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비전향 장기수 이익모 노인를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한에 보내면서 동시에 장기려 선생을 처자식이 있는 북한에 평화사절로서 보내기 위해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그때 장기려 박사는 “호의는 감사하다”면서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그 상황을 기술하고자 한다. 1950년 7월 1일부터 1976년 6월 25일까지 만25년을 복음병원 원장으로 지내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풀었던 장기려 박사.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민간 차원에서 최초로 설립한 공로로 1976년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과 1979년 제2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분)을 수상했던 그에게 남북한 대화의 물꼬를 트는 평화의 사도로서 하나의 상징적인 면에서 방북제의를 한 것이다. 정부는 흔쾌히 수락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장 박사는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 바람에 한완상 장관은 매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 필자는 박정희 정부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된 서울대 교수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현장취재로 동행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장기려 선생은 자신만 특혜를 얻게 되면 수많은 이산가족들로부터 빈축을 살 수 있다며 거절의사를 밝혔다. 평소 북에 있는 처자식을 그렇게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던 장 박사가 아니었던가? 필자가 품은 그 의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시간이 매우 지나서야 알게 됐다. 아내 김봉수 여사와 자녀들 생존확인 198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3차 적십자연맹총회 및 대표자회의에 참석했을 때 미국에서 거주하던 그의 조카로부터 여전히 북한에서 살고 있는 아내의 편지를 받게 됐다. ‘살아서 잘 지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들과 딸 또한 김일성대학 물리학교수로, 의사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장 박사는 옥탑 거실의 책상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보며 매일 “여보, 오늘도 좋은 아침인데 그쪽은 어때요? 여긴 남쪽 바다 송도가 훤히 보이는 광경이 유난히도 좋구려. 자식들도 잘 있지요? 오늘도 나는 당신과 자식을 위해, 조국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속삭였다. 어느 날, 정부가 평화사절 일환으로 주선한 방북제안을 왜 거절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기자의 근성이 솟구쳐 장 박사가 거처하는 병원옥탑에 올라가 장 박사에게 직접 물었다. 그는 “신 선생, 이생에서 못 만나면 하늘나라, 주님 품에서 죽도록 만날 것인데 무엇이 궁금한가?”라고 대답했다. ‘내가 아는 장기려 박사’를 통해 장 박사를 회고한 함석헌 선생 장기려 선생은 기독교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김교신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교신은 일본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로 그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계승했다. 장기려 박사는 우치무라 간조의 정신을 이어 받은 이들과 교제하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친교를 갖는 이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이해했고, 매주 성서공부 모임을 가졌다. 장기려 박사는 그들이 발행한 신앙잡지 ‘성서조선’의 정기구독자였다. 장 박사의 여러 통의 편지 기록과 만 67세부터 만87세까지 21년간 ‘부산모임’의 회지 간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긴 것들을 보고 평화주의인 그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보수적인 부산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한편으로 우치무라 간조를 존경하며 관련된 글도 많이 읽었다. 함석헌은 “한 달에 한번은 자신의 집에서 무교회주의 성경모임을 하고 일반교회에서는 용납 안 되는 나를 초청해 그 모임의 강사로 인도케 했다.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만 더 말하면 의사면서 환자가 오면 전도부터 먼저하고, 병은 의사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제 속의 제 힘으로 낫게 하는 것이라 역설하니 이런 의사가 어디 있는가?”라고 말했다. 21세기 방향성을 잃은 한국교회에 던진 간절한 메시지는? 한국고등신학연구원(원장 김재현)에서 펴낸 ‘역사의식을 갖고 살다간 장기려’ 전집을 출간했다. 장 박사가 21년간 써내려간 그의 신앙적 사상과 삶을 기록한 ‘부산모임’회지 내용을 담아 평소 장 박사에게 가졌던 의문(방북제의 거절과 무교회주의를 추종한 부분)을 대충 알게 됐다. 다음 편은 ‘장 박사는 말년에 무교회주의를 따라 종의모임을 주도했는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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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할랄식품 단지 반대 여론 고조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전북 익산에 추진중인 이슬람 할랄식품 단지 설립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SNS 상에서 반대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할랄식품바로알리기전국대책위원회’와 ‘전북기독교언론인연합회'는 지난해 8월 할랄식품 테마단지 조성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할랄식품 테마단지 조성 반대 특별기도회 준비위원회는 최근 익산시청 앞에서 전북기독교연합회 소속 교인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할랄식품 반대 특별 기도회 및 성명서 발표' 자리를 가졌다. 교계내에서는 할랄푸드 단지 조성 사업이 충분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거나 국민적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으며, 이 사업을 통해 극단적인 무슬림들이 유입돼 식품 단지가 이들의 배후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또 할랄식품 단지 조성으로 본래 축산업에 종사하던 주변 농가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할랄 방식의 도축이 동물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기절시키지 않고 서서히 피를 빼 도축하는 방식으로 동물보호법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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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헌금 없는 주일’ 운동 시행
    국내 첫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시행하는 교회가 나타다 화제다. 높은뜻정의교회(담임 오대식 목사)가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시작한다. 담임 오대식 목사는 한 달에 한번 주일에 헌금을 거두지 않고, 대신 성도들이 각자 어려운 이웃을 돕도록, 선교와 구제를 몸소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오 목사는 “목사와 장로 그리고 소수의 제한된 사람들만이 교회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교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정의를 구석구석 나타낼 적임자"라며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제안했다. 그는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지 말라. 돈이 많아지니 교회들이 엉뚱한 짓을 한다. 교회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며 “교인들 스스로가 작은 예수로 살고, 선교와 구제의 주체가 돼서 어려운 이웃을 직접 돕는 신앙의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높은뜻정의교회의 이런 운동에 대해 교계내에서는 ‘신선하다’는 반응과 ‘우려한다’는 반응이 공존하는 것이 사실. 하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취지가 좋고, 변화가 필요한 한국교회에 좋은 방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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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기하성 P 목사, '상습 도박' 혐의 불구속 기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서대문 총회장을 지낸 P 목사가 학교 교비 등을 빼돌려 카지노에서 탕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2부(부장 조상준)는 재단 대출금과 교비 등을 빼돌린 뒤 이를 도박자금으로 탕진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로 P 목사를 최근 불구속 기소했다. 지난 7일자 동아일보에도 ‘도박 탕아 목사’라는 제목으로 이같은 내용이 보도 된 바 있다. 동아일보는 P 목사가 지난 2008년부터 정선 강원랜드 단골 출입자로 출입기록이 조회되는 등 그가 쌓은 카지노 마일리지만 6억원이 넘을 정도로 도박중독자라고 보도했다. 그는 순총학원 이사장을 지내면서 교비와 교회재정을 도박에 탕진한 것으로 보도했다. 현재 그가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금액은 총 66억원에 이른다. P 목사는 2002년 4월부터 2008년 2월까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서대문총회 소속으로 순총학원 3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07년 5월 이후 지난해까지 서대문총회 총회장을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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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성산 장기려 박사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故 성산 장기려 장로는 20년 전, 1995년 성탄절 아침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 장기려 박사. 그의 묘비에 새겨진 비문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님을 섬기다 가신분이 여기 잠들다’ 아마 언제가 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예수님의 재림 때 함께 오실 것이다. 평소 장 박사를 뵙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를 부를 때 호칭을 박사, 원장, 장로보다는 선생이라고 부르면 참 좋겠다”고 했다. 그와 동향인인 故 함석헌 선생도 늘 ‘함 선생님’으로 불렸다. 장 선생은 우리나라 유명 외과의사 중에서 유일하게 ‘전문의’가 아니다.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외과 전문의 자격을 사양하고 평생 일반의로 봉직했다. 그래서인지 박사보다 선생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필자가 “장 장로님”이라고 불렀더니 “에이, 장로보다 선생으로 불러다오”라고 하지 않는가. 가만 생각하니 그가 섬겼던 부산 산정현교회에서 교회를 떠나 가정교회를 염원했던 터라 일반 한국교회는 문제가 많아 뜻 맞는 의사들을 중심으로 가정에서 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렸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했다. 병원에서 ‘원장선생님’으로 불렸는데 원장 역시 그냥 ‘선생’으로 불러달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장 박사를 추모하는 물결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장기려 박사 소천 2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장 박사를 추모하는 토크콘서트를 열고 관련된 인사들을 초청, 장 박사에 대한 회고를 엮어 출판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CTS에서는 2015년 성탄절을 기해 장기려 박사 서거 20주년을 맞아 그를 회고하는 영상을 상영하며 평소 근면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장 박사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장 박사의 신앙적 행보 일찍이 이북에 있을 때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했다. 젊은 의학도로서 유기형 장로(치과의사), 유기선 장로(의사, 부산영락교회 원로), 유기천 장로(전 서울대 총장), 유기진 장로(의사)와 신앙생활을 같이했다. 주기철 목사, 조만식 장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훗날에는 우치무라 간조의 신앙적 삶에 심취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과 교류하면서 한국교회 장로교가 여러 갈래로 분열이 되자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무교회주의보다 무교파주의적 시각에서 부산 산정현교회를 떠나게 됐다. 그를 뒤따라간 손동길 안수집사도 가정교회를 세워 주일 예배를 드렸다. 이 일로 부산 산정현교회(당시 담임 박광선 목사, 현 산정현교회 원로)는 재정자립면에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의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병원경영악화로 어려움 겪고, 진료거부사태 유일하게 전문의가 아닌 그냥 외과의사로 남아 의사생활을 했다. 그가 세운 복음병원은 규모가 차츰 커지게 되자 인원이 많아지고 경영과 수입에 애를 먹게 되었다. 병원비가 밀린 환자들은 뒷문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의 인건비가 한두 달씩 밀리는 일도 많았다. 하루는 김병삼 내과과장이 급료가 두어 달 밀리자 원장실을 찾아가 “원장님, 왜 월급을 안 줍니까?”라고 물었다. 장 박사는 “김 과장, 자네는 그래도 생활에 여우가 있는 과장이 아닌가. 좀 참게나...”라고 대답하니 김 과장은 “아니, 원장님은 지금 당장 처자식이 없으니 생활비 걱정은 없을 것 아닙니까? 나는 처자식이 있어 월급이 없으면 못 살아갑니다”라고 항의한 일이 있었다. 결국 병원이 부도 위기를 맞자 침례병원 외과 과장이던 박영훈 선생이 오게 됐고, 6개월 만에 경영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 일로 제자(박영훈 원장)가 스승을 몰아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때 병원은 경북의대와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의 파워게임을 방불케 했다. 1차 의사파동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다.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이 진료거부를 하고 박 원장을 매도하기 시작해서, 주동한 채종묵 의사 등 부산의대 출신의사 3~5명이 당시 부산지검 초임 박철언 검사에 의해 구속 수감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故 이동기 씨 부부를 맺어줬던 장기려 부산 서구 아미동 87번 버스종점 부근은 과거 화장터였다. 지금의 까치고개는 대부분 공동묘지였고, 달동네 판자촌에서 장기려 박사는 5평 남짓한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마련했다. 이곳에서 25년 동안 척추결핵병을 앓고 있던 이동기 씨 가족이 살고 있었다. 장 박사는 어느날 병원 입구에 쓰러져 있는 이동기 씨를 발견하고 그를 업어서 병원으로 데려갔다. 수술을 하는 중 척추신경을 건드려 전신마비가 돼 일어서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장 박사는 이동기 씨를 위해 처소를 마련해주었고, 그를 위해 매달 쌀과 부식을 날라다 주었다. 또 그를 보필한 어느 가난한 여인을 반려자로 맺어주었다. 장기려 박사가 쌀을 사서 어느 산 중턱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뒤를 따라가면서 이 같은 사연을 듣게 됐고, 이동기 씨의 가정에 기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됐다. 이들 사이에 자녀가 태어났다. 현대의학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이동기 씨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훗날 이동기 씨의 큰 아들은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공군 파일럿이 되었다. 이동기 씨는 ‘5월의 환상’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늘 강하고 담대 하라는 장기려 박사의 권면으로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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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하나님 안 믿어 죽인 미국 살인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소재 언론들은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임산부를 살해한 사건을 보도했다. 피해자 시신은 소파 위에 타월이 덮인 채 누운 자세로 발견됐고, 머리 부분에 총상이 있었다.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흑인 여성 애니트라 브랙스턴이다. 범인은 피해자의 시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이라며 하나님을 믿지 않아 눈에 총을 쏘았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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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12-31
  • 황당한 수상소식
    신천지 내부에서 이만희의 국제평화언론대상 수상 소식이 화제가 되고 있다. (사)한국언론사협회가 주최하는 ‘2015 국제평화언론대상’에 ‘세계평화공헌 특별대상’에 신천지 이만희가 수상자로 내정되었다고 발표돼 12월 중순부터 신천지 내에서는 축제분위기가 되고 있다. 이 상은 국제평화와 언론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올해 3회째를 맞이했다. 이만희 수상소식을 전해 들은 부산성시화운동본부는 주최측에 “가정을 파괴시키는 인물이 어떻게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느냐”며 항의 공문과 항의 전화를 통해 이만희 실체를 알렸다. 주최측은 “내부적으로 다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보낸 바 있다. 과연 후보자들을 면밀히 살핀 것일까? 주최측은 이력서, 공적서, 추천서 등을 면밀히 검토했다고 전했지만, 말대로 서류만 심사한 꼴이라고 말들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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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12-31
  • 예장 대신 장종현 총회장 징역 3년
    백석대 설립자이며 예장대신 총회장 장종현 목사가 백석대 총장 재임시 60억원의 횡령 혐의로 지난 12월 10일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구속됐다. 이 문제는 총장 재임시 특정업체에게 공사건을 몰아주고, 공사대금을 부풀린 후 일부를 되돌려 받는 방식으로 지난 2012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상 횡령 혐의로 의혹을 받고, 1심 재판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법원은 건설업자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며 장 목사에게 무혐의를 판결했다. 하지만 2013년 10월 2심 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뒤엎고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건설업자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12월 10일 대법원은 장 목사의 항소를 기각하며, 고법의 징역 3년을 최종 확정했다. 장 목사는 다음날 구치소에 수감됐다. 예장대신 총회는 비상이 걸렸다. 현직 총회장이 구속된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 제2부총회장을 맡고 있는 유충국 목사가 목회자들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 “모두가 무죄를 자신했던 총회장님의 재판이 의외의 결과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학교, 그리고 교회와 총회를 돕던 사람들과 회사들을 살리기 위한 총회장님의 내려놓으심이라고 보시면 정확할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무죄이지만 법적인 잣대는 죄로 인정되는 것 같습니다”며 동요를 사전 차단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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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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