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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기자수첩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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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구 감독회장 당선 무효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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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감독회장 선거 당시, 각종 비리 의혹에 휩싸였던 전명구 감독회장이 결국 당선무효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월 13일 전명구 목사가 감독회장 선거 운동 기간에 유권자들에게 수차례 금품을 제공했다고 보고 당선 무효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정명구 감독회장이 선거법 규정을 위반해 선거권자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일과, 서울남연회가 평신도 선거권자를 선출하는 적법한 결의 없이 소속 평신도 312명게 선거권을 부여한 일, 후보자 이철이 장정연회 및 지방회 경계법을 위반해 피선거권을 보유하지 않은 하자가 있다’고 제시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측은 법원 판결에 대해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전명구 감독 역시 결과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다만 지인들을 통해 판결문에 강한 부정을 나타내고 항소할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선된 직후부터, 선거 과정에서 일어난 합법적이지 못한 문제 때문에 줄곧 논란의 중심에 섰던 정명구 감독회장이 이번 판결로 인해 감독회장의 직무를 정상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교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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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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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대를 대순진리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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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대학교를 대순진리회에 매각하려는 시도에 기독교계가 분노하고 있다. 기독교 건학이념을 가진 안양대학교는 최근 재정난을 이유로 대순진리회 계열의 대진교육재단에 매각하려는 시도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안양대 김광태 이사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일학원은 기독교 재단이 아니고, 안양대는 일반 종합대학이다. 신학교만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는 성명서를 통해 “안양대는 지나 1948년 故 김치선 박사가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설립한 대한신학교의 건학이념을 계승한 기독교대학”이라며 “안양대가 대순진리회 계열의 대진성주회 관계자 3명을 이사로 받아들임으로써 사실상 재단 매각을 자행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독교대학을 타종교에 돈을 주고 팔아넘기는 배교 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또 “우일재단 이사장이 교회 장로 신분이라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이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양심으로나 도의적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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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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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영화 ‘사바하’에 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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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0일 개봉예정인 영화 ‘사바하’ 제작진 측에 이단 신천지가 항의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바하 관계자는 “신천지 측에서 항의 공문이 왔었다. 우리는 특정 종교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고 설명했다”는 입장을 전했다.
신천지는 “영화 내용과 일부 장면이 해당 단체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항의성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제작사 측은 '사바하'는 특정 종교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는 입장을 전달하며 예고편 등에서 공개된 짧은 대사가 담긴 장면을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사바하'는 신흥 종교 비리를 찾아내는 종교문제연구소 박목사(이정재 분)가 사슴동산이라는 새로운 종교단체의 실체에 접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이비 이단종교를 소재로 만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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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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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교회 70주년 분리 개척 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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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고신 부산노회 산하 부민교회(박삼우 목사 담임)가 교회 창립 70주년이 되는 2019년을 겨냥해서 지난해부터 당회가 ‘부민교회 기념교회’를 개척하기로 하고 가덕도에 850평 농지를 구입해 토목 설계 및 개척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공동의회에서는 교회가 농지를 매입한 1억1천여만원에 대해 현행 금융실명제에 저촉된다는 것과 10억원 범위에서 대지와 건물비용을 하기로 한다는 제직회 결의와 배치된다는 이유 등으로 사실상 가덕도 개척은 어렵다는 반대 여론이 일었다. 결국 지난해 연말 서구 동대신동에 위치한 건물에 임시 예배 처소를 마련해 따로 분리 개척을 단행했다. 여기에 따라 간 교회 중직자는 현 부산노회 회계인 김범식 장로와 고려 학원 현 이사인 김상윤 장로를 비롯한 20여 가정. 이들은 부민기념교회라는 이름으로 분리 개척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산하 부산노회도 이미 임시노회를 열어 부민기념교회 분리 개척을 허락 한 상태다.
현 부동산법은 농지에는 교회가 들어서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으로 금융실명제 법에 저촉이 될 경우 상당한 가산금 및 벌금이 부과되는 점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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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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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그 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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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포럼의 유희태 대표는 가난한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만나고 상고를 졸업하여 기업은행에 입사해 37년간 근무하면서 1등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경영능력에 뛰어났다. 그래서 국책은행에서 노조위원장을 거쳐 최초로 부행장까지 고속 승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95세 된 할아버지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내가 60살 때에 은퇴를 했는데 글쎄 어느 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네. 이 나이까지 살 줄 알았으면 인생 계획을 달리 했을텐데 허송세월을 보내 후회가 막심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그 나이에 후회하는 것을 듣고, “나도 인생 후반전에 더 늙기 전에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지역사회 봉사 단체인 ‘민들레포럼’을 만들어 고향 땅에 민들레 동산을 조성하여 유기농으로 효능이 뛰어난 민들레를 재배하게 되고 건강에 유익되도록 보급함은 물론 그 여력으로 ‘한국기아대책기구 홍보대사’로 봉사하면서 딸 쌍둥이를 입양하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내가 읽었던 어느 책에서 이를 알게 되었다. 시편 143편 10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삶에 만족이 있다는 진리의 말씀을 일찍이 깨닫고 늦게 깨닫는 농도에 따라 인생 후반전의 삶이 차이가 난다.
45년이 넘도록 한 우물만 파서 그런지 샘물이 나는 것인지 흙탕물인지 알 수 없어도 그렇게 잘 살았다고 볼 수 없었다. 늘 남으로부터 미움과 질타를 받아 아마도 욕을 많이 들었던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래는 살 것 같은 예감은 든다.
지금으로부터 40~50년 전에 겨우 부산지역 교회가 불과 150~200개가 될까 말까 하는 즈음에 서울에서 본사를 둔 한양대 설립자 고 김연준 장로가 운영하고 이사장인 교회연합신보(지금은 (주)기독교신문)에 기자로 출발할 그 당시만도 부울경, 경북은 그야말로 광야같은 허연 벌판이고 교계 파워는 그냥 모기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허약 그 자체였다.
기사 송고하고 신문 붙이고 발송하는 일에, 광고모집과 수금까지 1인 5역으로 그때의 암울함을 살아갈 때는 교계는 그래도 인정과 눈물과 사랑이 있어 견딜 수가 있었다. 때로는 어느 목사는 “고생이 많다”면서 봉투를 꺼내준 때도 한두번이 아니어서 그 정에 못이기고 정론에 몰두하다보니 세월이 흘려 여기까지 왔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나은 첫 아이와 둘째도 모두 기독병원으로부터 무료로 입퇴원 시켜 준 자애로움으로 감사했던 그 시절이 있었다. 50년이 지난 한국교회와 부산교계는 어떠한가? 살벌하고 얼음판에 독사에게 물릴까봐 이리 저리 피해 다녀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시편 23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함이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이하시리로다”라고 매일 같이 외우지 않으면 살 수없는 온통 신뢰할 수없는 주위엔 영적인 마귀들만 보였다. 언젠가 “봄날이 오겠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그 날은 올 것이라는 기대로 걸어온 반평생을 교계 언론에 매달려 왔다. 이제 손을 놓을 때 무얼하고 사나해서 늦게 배운 부산디지털대학 노인복지학을 전공해서 노인복지사 2급을 땄다. 노인 100세 시대를 보고 평생 배워서 만학의 꿈을 펼쳤다. 쾌청한 봄날은 올 것이고 늙어가면서 죽을 그날도 올 것이다.
물론 후회하며 골백번 회개하면서 “모두가 내 탓이로소이다”로 고백하면서 살아 온 76년 그 세월이 작다면 작고 많다면 많은 흘려간 세월에 웃음 짓고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범사에 고마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 그 때에는 내 무덤에 침을 뱉고 돌을 던져도 무방하게 받아 드리는 심정이니 이제 제발 미워하는 마음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2019년 새해 벽두에 하게 된다. 이제 반드시 그날은 올 것이라고....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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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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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림 유계준 장로 가문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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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이 일어난지 100년이 되는 2019년도, 유계준 장로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고 주기철 목사, 조만식 장로 등 기독 인사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분단이 일어났던 100년 전 평양 땅이었다면, 그 당시 30대 청년 고 유기선(유계준장로의 3남) 장로는 그의 선친의 조국에 대한 독립을 위한 애착이었던, 100년이 지난 대한민국 안에 일어났던, 유신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자유 민주 국가로 만들기 위해 한 몸을 던졌던 유기선 장로가 행동했던 1970년~1980년 사이에 부산 민주 항쟁의 밑거름과 영양분을 제공한 어른이다. 바로 부산에 뜻있는 기독교 목사, 장로들이 자장분에 기름을 주고 용기를 주었던 불쏘시개 역할을 했던 그 중심에는 부산시 중구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끼고 있는 중부교회와 교회 바로 앞 도로변에 위치한 “유기선 소아과의원” 간판아래 부산교계 뜻있는 민주인사 ‘故최성묵 목사, 송기인 신부, 故오수영 신부, 故김광일 장로 변호사, 故임기윤목사, 故우창웅 교수, 故심응섭 목사, 박광선 목사, 박효섭 목사’등 불과 10여명 미만의 민주인사들이 모여 1974년 5월 24일 ‘부산 인권 선교 협의회’란 부산 최초 저항 조직을 신·구교를 초월하여 조직한 범 민주 인사들의 레스탕 운동의 효시가 되어 결성 한 장소가 아무도 모르게 유기선소아과 원장 집무실에서 결성이 이루어졌다. 그때만 해도 주·야로 정보과 형사와 중앙정보부 부산 분실, 보안사 부산 지부 관계하는 인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폈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필자인 교계 기자한테도 무엇을 하는 회합인지 모르게 단순히 그저 친목모임으로 모이는데 행여나 이상하게 방해 할까봐 필자보고 밖에서 동태를 좀 살피라고 일러 주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의논하는지를 전혀 모르게 비밀에 붙여진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교회 출석하는 집사인 필자보고 별거 아니고 하도 방해를 하니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이날 유기선 장로 생일 초청 자리”라고만 알려 주고는 비밀에 붙여진 것이다. 한 2~3일 지나서야 모임의 성격과 이름, 행동 지침을 알 수 있었다. 귀신도 모르게 결성한 이 모임 때문에 정보기관에서는 관계 출입하는 인사들에게 시말서를 쓰게 하여 불이익을 당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들었다. 이 모임을 통해 주 목요기도회가 정기적으로 모여 전국 곳곳에서 초청된 중요 강사로는 ‘문익환 목사, 그의 동생 문동환 목사, 한완상 장로, 서남동 교수, 김동길 교수 등 수도권에서 유신독재 정권과 투쟁하는 민주인사 거의 대부분이 부산 중부교회에서 매주 목요, 금요기도회에 학생, 청년, 평신도들이 줄을 이어 참석하여 민주 항쟁의 불을 붙여 나갔다. 집회하는 날에는 교회 주변 길목에는 각 대학 학생처장, 과장들이 누가 들어가나 하고 일일이 대학마다 체크를 하는 바람에 여기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옷이며 머리와 마스크를 하는 변장으로 출입하는 광경이 눈에 띄어 누구인 줄 몰라 학생 주임, 과장들이 확인하느라고 쩔쩔 매는 것도 목격 할 수 있었다.
▲유기선 장로 결혼식 비화
고인이 된 유기선 장로와 그의 부인 박화선 권사(부산영락교회)와의 결혼식날 일화가 유명했던 사실이 있다. 부인 박화선 권사는 일본 동지사대학을 나왔던 여성 엘리트 규수였다. 기선은 아버지한테 “제가 하는 결혼이니 제 뜻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나 양가 부모님의 생각이 중심이 되고 저는 그저 따라야만 하는 결혼이라면 저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겠습니다”, “도대체 네 생각이 무엇이냐? 네 뜻대로 하겠다는 말이 무엇인가?”,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완강히 버티었다. 기선의 결혼식날이 왔다. 1)예물 보내는 허례와 낭비는 일체 배제하고 2)결혼식날 신랑, 신부 승용차 일체 거부 3)축하금 사절 4)결혼식 날짜는 1938년 9월 29일 오후 5시(이유는 9월 29일은 기선의 생일, 오후 5시는 큰 형님이 계시는 평양 기독병원 내과과장이 환자 돌보는 4시까지 돌보고 올 수 있도록) 5)신혼여행은 없음. 그들 두 부부는 목사님의 기도로 시작하여 축사, 축하는 없었는데 하객 중에 손을 높이 들고 나오는 분이 “나는 조만식이올시다. 오늘과 같은 결혼식은 처음보고 정말 모범적인 결혼식입니다”고 즉석에서 멘트 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신부와 마주 앉아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조국을 위해 애국가 4절을 틀리지 않고 부르는게 아닌가? 그때는 애국가를 부르면 구속되는 때에도 아랑곳 않고 신혼 초야를 이렇게 보내게 된 것이다. 마칠 때 즈음 애국가 4절까지 불렸던 것은 위로는 하나님을, 아래로는 조국을 사랑하라는 뜻을 심어주었다는 특이한 결혼식이었다.
유기선 장로는 평양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 유계준 장로를 도와 약국(반도제약회사)을 경영 종사을 하여 월남하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법조 길을 걷지 않고 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결국 의사로의 한 평생을 보낸 것이다. 어느 날 필자가 만난 자리에서 “장로님은 왜 법 전공을 하면서 판·검사 길을 걷지 않고 의사 에 종사 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유 장로 왈 “하도 대한민국 국내 정치하는 분들 대부분들 인사들이 유명 대학 법대 출신들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이따위 정치하는 분들 보고 구역질이 나서 이래 안되겠다하여 의사자격 시험에 도전하였다”고 사연을 들려 주었다. 그럴 것이 이 나라에 중요 정치하는 분들의 면면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유명 대학 법대 출신이고 판·검사, 변호사 사법계인사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유기선 장로의 가훈은 ‘기도하고 노력하여 순교의 피를 빛내 보자’ 그의 이미지는 카이저 수염을 하고 다녔다. 키는 162센티이고 마치 등소평과 같은 스타일이었다. 늘 아침 새벽기도하고 오면 멀지 않는 용두산공원에 올라가 한 바퀴 유산소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시켰다.
하루는 우연하게 필자와 마주 앉은 점심시간에 부산영락교회가 분규로 매우 혼란스럽던 시절이었다. “장로님 고현봉 목사님이 고명자 집사와의 그런 이상한 소문을 믿습니까?”라고 엉뚱한 질문을 던진 일이 있다. 그는 “나는 그런 소문에는 관심이 없고, 고 목사님이 월남하여 양딸로 입양한 사실은 충분히 이해한다. 홀로 있는 목사님께 딸이 봉양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런 이상한 관계는 추호도, 생각도, 그런 짓은 절대 안 할 어른으로 존경한다. 좀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듣는 교인들의 소리에 현혹 된 것이 탈이었지 그만한 목사님이 별로 없지 않는가? 너무 부정적으로 여기지 마시오”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 듣고는 대인다운 어른으로 여겼다. 결국 유기선 장로는 훗날 고 목사와 결별하고 통합 부산노회 산하 부산영락교회 하단에 있는 교회에서 부인 박화선 권사와 함께 원로 은퇴로 하늘나라로 소풍 갔다.
신이건 장로
<대동강의 십자가 책>(저자 김호민 목사)에서 참조하고 70년대 후반은 역사의 현장에서 지켜 본 팩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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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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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장신대는 행정 공백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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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장신대 김임권 이사장의 유지이사 임기가 완료되는 시점이 금년 1월15일. 작년 10월 취임했기 때문에 4개월짜리 이사장이 된 셈이다. 여기에 탁지일 총장 직무대행도 사표를 제출해 2019학년도 졸업식과 입학식에 대한 행정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내부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또 2019년 신입생도 미달 상태라 학교에 대한 걱정이 큰 상황이다.
이사장 김임권 장로에 대한 유지이사직이 이사회가 정한 정년 70세에 해당 된 상황이다. 이사회가 총회에 질의 한 결과 총회 규칙부가 ‘불가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 장신대의 경우 유지이사직에 대해 고시영 목사도 은퇴한 후로도 직무하는 관례가 있었으나, 이 경우 이사회가 법 이전 만장일치로 가결 할 때는 가능 했지만, 부산장신대 이사회는 “법이요”를 들고 나와 이사장 임기 문제는 결국 무산 되고 말았다. 그런 과정에 김임권 이사장한테 모 중진 목사가 지난 토요일 중재안을 가지고 나와 빅딜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중재안은 ‘민경진 교수를 총장으로’, ‘김임권 이사장은 각서를 쓰고 연말까지 근무’, ‘공개사과하고 약속한 기부금 2억원 공탁’이다. 그러하면 총회질의 한 것을 철회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김 이사장은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하고 총회 결정을 따르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연말 일부 이사들과 마찰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사들이 말장난 하면서 흥정하는데 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 불쾌한 말을 하고 이사회 장소를 떠났다”고 했다. 또 “일부 이사들이 일부 교수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각종 고소 고발 사건의 주체들이며, 책임도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라며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지금 학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폭로했다.
김 이사장은 “권 처장을 이유 없이 해고하라고 하고, 손 교수 해임 건을 반대하라고 한다”며 “이사들이 이사회의 결정 사항을 반대하는 일들이 자행되는 마당에 어찌 이사장 직무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가?”라고 분개했다. 이사장 임기 문제에 대해서는 “이사장 임기문제 가지고 총회 질의 한다고 해서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떠날 명분이 주어졌는데, 어떻게 안나올 수 있는가”라며 부산장신대에서 마음이 떠났음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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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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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림 유계준 장로 가문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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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130년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물량주의에 물이 들어 기복주의에 메몰 되어 버린 지가 그 여태였으며, 허울 좋은 명예와 자리다툼에서 분쟁의 씨앗이 번져 오염된 지가 여태였던가, 무조건 교회만 부흥시켜 대형교회로 만들어 권좌에 앉으면 그만이란 착각에 빠져 버린 지가 그 얼마였던가. 이제 초대교회 흔적이 차츰 지워가는 이때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진 한 가문이 있어 한국교회 자존심을 살리게 하고, 한국교회 순교의 정체성을 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평양 산정현교회 출신 유계준 장로 가문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이 땅의 첫 순교의 피를 뿌렸다면 84년이 흘러 산정현교회 유계준 장로가 대동강에 다시 순교의 십자가가 우리 영혼 속에 길이 유산으로 남아 흐르고 있다.
유계준 장로는 1905년 마포삼열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유계준 장로는 죽음도 불사했다. 그는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의 연통제 요원으로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독립신문 평남 지역 반포 책임을 맡아 나라 사랑에 뜨거운 신앙을 불 태웠다.
예수님은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는가?(눅18:8)”라고 탄식했던 그 모습대로 행동하며 살았던 믿음을 지켜 왔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한결같이 복을 받고 뛰어난 자랑스런 믿음의 가문으로 남아 있다는 점 기억해 두었으면 한다.
필자는 2018년 2월에 편찬한 ‘대동강의 십자가’란 집필을 한 서울 산정현교회 김호민 목사가 보내 준 책을 틈나는대로 읽다가 부산영락교회 고 유기선 장로(유계준 장로의 셋째 아들)와 70-8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 민주화를 위해 배후에서 협력한 유기선 장로의 행적과 그의 자손에 대해 알게 되어 2019년 새해 첫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려 한다.
유계준 장로는 8남매를 두었다. 1남 기원은 하버드대학교 의학박사로 국립의료원장을 지냈고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차녀 정혜(이화여대 졸업)씨는 이한빈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과 결혼했다.
2남 기형씨는 의학박사로 부산대학교 교수로 오래동안 봉직하다가 정년 은퇴하였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는데 의사, 교수 집안이고, 3남 기선 장로는 의학 박사로 부산 유기선의원 원장으로 헌신했다. 부인 박화선 권사(부산YWCA 회장 역임)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사, 차남 정근 장로는 서울 법대를 나와 동원자원 개발 사장이고, 맏딸 정은 씨는 윤승연 서울 고법원장을 지낸 분이고 차녀도 강형욱 서울 나우병원장과 결혼했다.
4남 기천은 하버드대, 예일대학 법학박사로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부인 헬린 실빙 박사와 국제 결혼으로 슬하에 자녀가 없다. 5남 기진은 미국 시카고 외과의사로 봉직했다. 6남 기묵은 미국 캘리포니아 의학대학 내과 교수로 슬하에 딸이 소아과 의사다.
그리고 장녀 기욱은 동경여자의대를 나와 서울 누가의원 원장으로 봉직했다. 슬하에 아들 차한이는 서울의대를 나와 가천의대교수로 있고 딸 차송이도 서울 여대 교수로 있다. 차녀 기숙은 동경공립약대를 나와 뉴욕 생화학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인 플리처의대 교수와 결혼, 아들 미로가 미국 프린스턴 교수로 있다.
하나님은 유계준 순교자의 가문에 의료계, 법조계, 교육계, 경제계, 정치계 등 말할 수 없도록 풍성한 믿음의 가문으로 이어가는 일꾼으로, 그것도 국제적인 믿음의 유산으로 계승한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미국에는 신앙의 명문가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이 있다면 한국엔 신앙의 명문가로 꼽는다면 바로 유계준 장로 가문을 첫째로 추천할 수 있지 않을까? 아브라함에게 천대까지 복을 주신 것처럼 순교자의 가문에도 이렇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켜주신다는 교훈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놀랍고 놀랍도다.(계속)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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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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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소리뿐인 한국 교회여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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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예수님이 오실 대강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가 “주여 어서 오소서”라고 기도하며 주의 재림을 희망과 기도 속에서 기다리는 절기를 보내고 있다.
이 기다림과 성탄은 세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과 둘째, 오늘도 우리 삶속으로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것은 인간 각자가 맺힌 것을 풀고 화해의 손을 내미는 사랑의 미로를 보여 주는 것이며 셋째는 마지막 때인 종말에 심판의 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어서 빨리 이 땅에 평화의 온누리가 되도록 기도하며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맑고 순수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지 못한다면 우리들이 바라는 기다림은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성탄절의 소란스러움 속에 묻혀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말 것이다.
특별히 금년 한국교회 10대 뉴스에 첫째와 둘째가 서울 명성교회 세습과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편목 관련해 세상법정에서의 판결이 문제라는데 자성하며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집안 싸움하는 가운데 밖에서는 이를 비웃으며 이단들이 주인 노릇해 가며 일간지 전면 광고로 한국교회를 비웃고 비난하고 있는 지경이다. 매주 한 차례씩 전면광고로 공격적으로 시도하는데 한국교회 주요 대표기관들은 서로들 싸움박질 한데서야 되겠는가?
서울에는 한기총이 둘, 셋으로 분열되고 제2의 도시라 불리던 부산지역 교계는 부기총이 둘로 갈라져 정상화를 위한 부기총 바로세우기에 몰두하는 가운데 있다. 선배 원로 목사들을 후배들이 무더기 징계로 축출시키는 보복적 행태로 치닫고 있다. 볼썽사나운 징벌적 작태에 대항하여 검찰에 집단적 고발 사태로 대응하며 싸우는 사태를 보면서 주님 오시는 성탄을 맞이할 수가 있을까? 진정한 그리스도께 성탄예배드린다고 해도 주님은 외면할 것이다.
이번 주간에 안신이 장로와 김태동 목사가 덧없이 하늘 나라로 가셧다. 천국 가시는 길에 순서가 없듯이 우리 서로가 내가 옳니, 네가 그르니 하며 아웅 다웅 싸울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내려놓고 주님 오실 대강절 마지막 주일 안으로 아니면 이 한 해가 가기 전에 무조건 하나로 화해하며 서로 용서하며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것이다.
부기총의 지난 40년 동안 한번도 이렇게 분열되거나 갈라서는 일 없이 서로 의견 차이는 있어도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그때마다 서로 양해하고 잘 넘어 갔다. 그런데 왜 이 모양이 되고 대립되는 그 근본 원인을 분석해 볼 때 바로 부산시로 부터 거액의 크리스마스트리 축제 기부금 3억5천만원과 중구청으로 부터 1억원의 기부지원금으로 오는 잿밥에 관심이 있는 원인을 지적할 수 있다. 서울의 밥퍼 최일도 목사는 20년 동안 한푼도 정부 지자체로부터 트리문화축제 돈을 받지 않고 순수 독지가들로 부터 도움을 받고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재정의 투명성에 초점을 맞추어 깨끗한 재정 운영이 기본 핵심의 윤활유가 되었다는 것에 교훈을 삼아야 되지 않을까? 부기총은 10년 전 부터 지자제의 기부금 지원금을 받기위해 만든 사단법인의 운영과 갈등 그리고 이원 구조로 운영되는 부기총의 정관 등이 이번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는데 서로가 자성해야 할 것이다.
맘모니즘 이것이 문제의 핵심 키라면 이제 전문성이 있는 광복동 포럼 등과 중구청에 돌려주고 부기총 본래의 사업인 부활절 연합 예배와 신년하례회에만 열성을 보인다면 1800여 부산 교회들이 도와주고 지원하며 주님의 오실 대강절과 성탄절에 최대의 성탄 선물이 될 것이다. 제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여 정신 차리고 하나가 되어 수많은 이단, 적그리스도와 싸울 준비를 해야 주님이 즐겁게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절이 될 것이다. 탄식소리뿐인 이 땅의 한국교회여 어이하겠는가?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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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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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덴교회 담임 소강석 목사가 폭발적인 목회 성공을 이룬 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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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소강석 목사
얼굴에는 껌어 쩨쩨하고 마치 레슬린 선수 같기도 하고 작은체구에어떻게 보면 시골 촌사람 같아 보이는 그를 만난 것은 아마 부산기독교총연합회(부기총) 주최로 2013년 4월 부산 벡스코에서 부산 부활절 연합 집회 주강사로 초청하기위해 의전을 갖춘 벤즈 외제 승용차로 이성만 장로와 함께 김해 공항에서 부터 행사 장소까지 같이 동승했던 기억이 난다. 승용차 안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하며 동정 인사를 나눈 소강석 목사의 첫 대면에서 그의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진솔한 느낌을 받아 퍽 재미있게 농담도 잘하시는 목회자로 인상을 받았다. 그 이후 필자가 출석하는 은성교회에 부흥회 강사로 초청한 만남의 계기가 되었다.
물론 함께 동승한 이성만 장로 아들이 단국대 교수로 있으면서 새에덴교회에 갓 출석한 총각 교수가 이 장로에게 바짝 다가서는 소 목사의 친절한 화술에도 감탄도 했지만 끈득지게 파고 드는 그의 접근성에 모두 다 손발 들었다. 반드시 자기교회 교인으로 잡아 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파고들어 교수에 대한 정보를 아비로부터 얻어려는 집념에는 과히 고개를 숙일 지경이었다.
이 날 차안에서의 전도 전락은 100%성공에 가깝게 느껴졌다. 소위 동물의 세계에서 "한번 물면 목숨이 다하도록 놓지않는 동물세계 마냥 교인 전도는 바로 이것이다고 자타가 인정할 정도였다. 그 날 집회에 선 첫 말이 “어이엿 어리둥어엿이”하며 장례 새의 나가는 것에 종까지 흔드는 모습에 청중을 휘어잡는 화술에 녹을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날 새에덴교회는 30년 전 신학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 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88년 가락동 건물 지하에 세들어 첫 개척한 것이 오늘의 새에덴교회 시작이었다. 지하 단칸 공간에서 분당을 거쳐 현재 용인 죽전으로 세번씩이나 옮겨 오늘에 이른 것이 등록교인 4만 5천명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했다.
▲4만5천명 출석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로 자리잡아
과거 전도사 시절에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첫 사역지로 부임한 백함교회 교인 불과 10여명 남짓, 이곳에서 1981년 당시 광주신학교 2학년 초년 전도사였던 그는 겁도 없이 이곳 백암 마을은 "모두가 전도를 포기 한 곳"으로 알려진 불신의 사각지대에 들어왔으니 분명 젊은 전도사는 일주일도 견디지 못해 쫓겨날 것이다는 입소문에도 겁없이 달려 들었으니 패기만만한 신초라기 신핑 소 전도사가 300호 남짓한 마을에 들어와 전도할 때마다 '나가라고'고 뗏자을 놓아도 마다하지않고 먼저 어린 아이들에 다가가 웃기기도 하는 원멘 쇼로 꼬마 아이들을 불려 모이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욕을 하면 '제가 소 씨이니 이왕이면 소 새끼'라고 불러 달라"며 그들 곁으로 다가 갔다, 마을 어른들이 필요없다"해도 모내기며 타작할 때가 되면 다가가 몸으로 떼우고 마을 애경사에도 빠지지않고 다닌 결과로 그를 마을 이웃 친구로 받아드리게 됐다, 그리하여 1984년 12월에 현재의 자리에 백암교회 헌당식을 올릴 수가 있었다, 이것이 고난 뒤에는 반듯이 기쁨과 영광이 온다는 신념과 믿음이 있어던 관계로 목회 인턴 과정을 경험한 곳이 바로 백암교회 사역이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대형교회로 부흥시킬 수가 있을가?
물론 그의 장모님 권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하나 소 목사는 설교를 할 경우 온 몸과 영혼을 다 바친다. 설교 중에 시인이 되어 시 낭송을 하는가 하며 때론 복음가수가 되어 한 곡조 부르고는 마음에 안차면 이선희 가수의 "J에게" 한 소절을 구설프게 댕긴다. 그래서 그의 전도 전락 가운데 특이한 부분은 그야말로 국내 이름이 있는 대형가수 "남진, 송대관" 등 많는 가수들을 영입하여 교인으로 만들어 주변 불신자들이 유명 가수들 보려 오게 되게 연예인들 보려 온 전도 전락이 맞아 떨어진 최고의 설교 전락이 성공한 결실이다, 그뿐아니라 국내 유명 정치인들도 전도하여 이곳으로 예배드려는 바람이 불어 물결처럼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몰려 오기도 한다. 시인이자 문학도 였던 그의 열정은 기존 문인들을 능가할만큼 세련된 글 재능이 있다.
그리고 소 목사는 교회예산의 상당 부분을 나라를 위해 받친 소영웅들 해외에서 파병한 해외전우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보은 보답을 잊지 않게 예산을 투자하게 되니 내이웃을 내 몸과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실천하는 교회로 잡아가다 보니 이 교회야 말로 강당에서 외치는 말씀과 일치하는 행동을 보고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 오는 것이다. 다음세대의 희망이 새에덴교회을 보고 새 소망이 한국교회가 있다는 것을 희망의 메세지을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을 많은 젊은이들이 본 것이다. 사회와 국가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따뜻한 겨울 나기 나눔 축제를 열고 이웃에게로 다가가기 때문에 수많는 교인들과 불신자들이 이곳 새에덴교회로 몰려 든 이유이기도 한다는 교회사 연구 학자들이 나름대로 분석을 할 수가 있었다. 설교시간엔 웃음과 위트가 장내를 감동으로 끌어들이는 독특한 기술이 있다. 누구나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소탈한 설교 내용이 모든 교인이 공감하는데 매력이 넘친다.
소 목사는 "대형교회라해서 교만에 빠지지않고 늘 백암교회 시절의 사역 초심처럼 겸손하게 교인들에게 다가가는 한국교회 롤 모델의 전형적인 순수한 목회자로 남기를 소원하고 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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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