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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규철장로] 이제는 돌이켜야합니다
    얼마 전에 중남미의 한 선교사님이 가짜 선교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현지에 사역하는 선교사로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거주하지 않는 선교사의 수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불안한 치안과 열악한 환경,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운 요인으로 인하여 안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에서 살면서 현지 사역을 하고 있지 않고 있는데 본국에는 현지선교사로 파송 받고 지원을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방문한 남미의 어느 선교지에서는 현지 사역을 하지 않는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본인은 도심지 아파트에서 살면서, 현지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교회를 세우고 아주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하는 다른 선교사의 선교 센터를 며칠 빌려 현지인을 상대로 세미나를 열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마치 본인의 사역지인 것처럼 호도하는 경우였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런 잘못된 일에 대하여 내성이 생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선교사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세를 규합하여 열심히 사역하는 선교사를 음해하거나 왕따를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이런 가짜 선교사들 때문에 진정으로 선교사역에 전심을 다하는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본국 교회와 성도들의 오해로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도 처음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선교적 사명을 갖고 선교지에 부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는 현지적응과 자녀교육 문제 등으로 인하여 잘못됐지만 쉽고 안전한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된 행위가 사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행위는 이들을 파송하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하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오늘의 선교사역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기에 성도들은 선교사님들에게 많은 물질과 기도로 지원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짜 선교사들의 행위가 성도를 기만하고 그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있으며 나아가 선교에 대한 열정을 식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의 책임에서 본국 교회 지도자들의 관리, 감독의 소홀함도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송 선교사를 선정하기 위해 그들의 사명감, 열심, 준비성 등을 고려하여 선정하고 철저히 교육을 시켜 파송했다면, 그리고 파송 후 세밀한 지원과 철저한 관리 감독이 이루어졌다면 이런 한탄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선교사와 배우자의 선교적 소명과 열정 보다 인맥과 학맥 위주로 선정하여 파송하고 그 뒤론 한 번도 확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는 본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더 나쁘고 더 큰 책임을 져야합니다. 오늘의 세계는 하루거리 밖에 되지 않고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지 진출하고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는 어느 곳이든 선교사님들의 모습과 행태가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단지 본인들만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요. 이들 가짜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땀 흘려가며 만든 선교헌금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미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는 선교현장에서도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야 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만약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해 지체한다면 한국교회는 성도들로 부터의 엄청난 지탄과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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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9-23
  • [김영일목사] 정도, 반드시 가야 할 그 길
    ▲ 김영일 목사(통영시민교회) 며칠 전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목사가 제직회, 당회, 공동의회 등 교회 내의 모임을 합당하게 실시하지 않으며, 성도들은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부지와 헌금을 드리는데 목사는 자신이 건축위원장직을 맡아야 한다고 하고, 교단의 정체성과 다른 곳에 기도하러 간다는데 이런 목사를 우리는 거부하니 지도자급에 있는 분들이 중재, 조정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라며 상기된 어조로 항변하는 것이었다. 한 동안 전화기를 들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항의를 들으니 정말 기가 막혔다. 그래서 여러 차례 부탁도 하고, 항의도 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 라는 말로 목사는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대화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 바깥에서 이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교계의 정치체계 테두리 안에서 해결해 보고자 이 사람, 저 사람 전화로 자문과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화를 끊기 전에 그는,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해 보고, 가능성이 없을 때는 연말 예산을 세울 때, 목사의 생활비를 대폭 삭감하여 스스로 임지를 구하여 나가도록 하는게 현명한 방법이라' 는 친구성도의 자문을 받았는데, 그 방법을 사용해 볼 참이라는 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문제들이 발생한다. 그런데 지혜롭게 그 문제를 잘 풀면 아주 아름다운 일이 있지만, 그것을 바르게 풀지 못하면 복잡하게 되어 천사라도 풀 수 없게 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지도해주시는 분들에게서 한결같이 들은 말이 인생의 지침처럼 되어 있다. 그것은 '문제는 풀기 위해 있는 것이지, 망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다. 문제는 분명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그 문제를 푸는 과정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도 발생한다. 그런데 아무리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그 문제를 푸는 데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있는 법이다. 필자는 그것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종종 정도는 융통성이 없어 보이기도 할 수 있고, 항상 한 발 늦어 손해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그런 피해를 만나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융통성이나 꼼수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해결은 아니다. 순간적인 봉합이며, 언제든지 다시 터져 나올 때는 그 전보다 훨씬 더 엄청난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오히려 정도로 걸어가서, 그 결과 실패라는 것을 안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승리를 위한 멋진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필자는 다시 전화를 들었다. '감정 대 감정의 대립은 불이 되는 경우가 많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으니, 정도를 찾도록 하고, 비록 늦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속해서 합의점을 찾아가보도록 하며, 주위의 협력자들이 동역할테니 인내하며 가고, 목회자에 대해 감정적인 결정은 결코 정도가 아니라' 는 간절한 호소를 하고 전화를 마쳤다. 이제 필자에게는 숙제가 남았다. '그 호소를 한 성도의 대상이 된 목회자에 대해서는 어떤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말인가?'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설득할 수 있고, 그의 멘토가 되는 사람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지나친 간섭이 될 수도, 한쪽만 지펴진 불씨가 자칫 잘못하면 두 배의 불씨가 될 수도 있으므로 어느 것이 정도인지를 찾아야 한다. 정도는 중요하다. 그 정도는 각 사안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도를 구하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정도, 그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정도만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도 당당하며 떳떳한 삶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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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9-10
  • [남송우교수] 한일 경제전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인본사회연구소 이사장 아직 한 여름의 더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올 해는 예년 같지 않은 무더위를 경험했다. 여름이란 계절이 주는 더위를 무색하게 하는 한일 간의 경제전쟁이 한 여름을 덮쳤기 때문이다. 일본이 총성없는 경제전쟁을 선포함에 따라 한국민의 반일, 극일의 목소리가 열기를 더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악연과 순연을 지속해온 이웃이다. 이런 연유로 한일 간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적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는 한일 간의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한일 갈등의 근원을 해소할 방안을 제대로 모색해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는 이 점에서 분명한 입장과 실천적 방안을 내보여야 한다. 일본이 우리 나라에 미친 악영향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427년 전에는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국토와 국민을 유린했으며,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그것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 어떤 집단보다 선구자적 입장에서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다. 교회가 그만큼 민족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사회를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지도적 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강도가 약화되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은 갈수록 취약해졌다. 그래서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은 사회가 교회를 염려해야 하는 선까지 추락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일 간의 갈등을 해소해 나가는데 한국교회는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지금 한국은 일본에 대해 단순한 반일을 넘어 극일을 위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자력을 바탕으로 한 극일을 지향하고 있다. 산업에 사용되는 일본산 부품을 국산화 하려고 하는 노력은 이런 중요한 움직임이다.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경제력을 넘어서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명제는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지향점이다. 경제력이든 군사력이든 우위에 놓여 있을 때, 평화공존이 가능한 것이 엄정한 국제질서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적인 힘의 논리는 온전한 평화를 결코 실현할 수 없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 있어 우위의 관계는 종속의 논리가 작동하도록되어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종속화하려는 힘의 논리가 현실적인 국제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힘의 논리가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으면 평화공존은 현실화되기가 힘들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정의가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를 넘어 국가를 넘어 세계보편의 인류애에 바탕을 두지 않은 정의는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한국교회가 내세울 수 있는 중요한 한 몫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인간을 향한 인류애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갈등을 푸는 열쇠이다. 그러나 이 열쇠를 만들고 작동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원한의 역사를 가진 일본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순전한 발상인가? 그러나 한일 간의 근본적 갈등을 푸는 길은 사랑에 바탕한 정의, 정의를 통한 평화 공존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길은 너무나 힘든 길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길과 꼭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극일을 위해 우선은 자력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지만, 그 이유가 단순히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갚기 위한 것이 긍극적 목적이라면, 한일간의 역사의 갈등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 지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근원적으로 고민할 때이다. 이 고민이 현실적 실천력을 발휘할 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제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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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8-27
  • [탁지일교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하라?
    최근 이단들의 두드러진 특징들 중 하나는 친사회적인 봉사활동이다.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적 시각이 늘어날수록, 이단들은 양의 옷을 입고 동분서주한다. 마치 자신들이 기성교회의 대안인 것처럼 선전에도 열을 올린다. 이를 위해 ‘오론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한다. 의아한 점은 교회의 선행과 순기능에 지면을 할애하는데 인색한 언론들이 이단들의 봉사활동은 다수의 지면을 할애해 적극적이고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일이다. 주요 언론들뿐만 아니라 지방 언론과 인터넷 언론들에는 하나님의교회, 신천지, 구원파, 전능신교 등 최근 주목을 받는 이단 단체들에 대한 기획보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게재되고 있다. 광고인지 보도인지 모를 형식을 갖추고 노골적인 홍보매체로 전락해버린 언론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얼마 전 「미디어오늘」 보도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즉 거액의 대가를 받고 게재한 홍보성 기사라는 것이다. 적어도 공익을 추구하는 언론이라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이단단체들에 대한 홍보성 보도는 자제했어야 한다. 이단들은 이러한 보도 내용을 가지고, 포교와 홍보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조심스러운 점은, 사회적 논란이 되는 단체에 대한 주요 언론들의 홍보성 기사가 게재되면, 누군가는 경계심을 풀고 이단단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단들은 이러한 기사들을 십분 홍보에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 면죄부처럼 사용할 수 있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와 동아일보 출판국 거래내역에 따르면 신동아를 만드는 동아일보 출판국이 올 1월부터 6월까지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이하 하나님의교회)로부터 발행금액으로 받은 돈은 약 12억원 이상”이며, “특히 신동아 6월호가 나올 즈음 7억8000여만원을 발행금액으로 받았다. 신동아 외에도 동아일보 출판국이 펴내는 여성동아 역시 지난 3월22일자 동아일보 LIVING&ISSUE 섹션에 하나님의교회 관련 기사를 발행했다. 이런 식으로 동아일보 출판국이 1월3일부터 6월14일까지 하나님의교회로부터 받은 액수는 총 12억여 원이다.”라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중앙일보 및 유관 언론기관들, 그리고 경인일보 등의 지역 언론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보도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지면에 그 정도 분량이 나가는 거면 기자와 데스크가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독자가 이를 믿고 읽는 것인데, 거기에 돈이 개입하면 돈 때문에 사회적 가치를 과대 포장한 것”이고 “독자 입장에선 기사로 알고 광고를 읽은 셈으로, 독자를 속이는 행위이자 지면 낭비”라고 비판한 곽영신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 연구원의 분석을 덧붙였다. 만약 이러한 부적절한 거래가 사실이라면, 언론이 거래를 통해 자신의 공신력을 매매한 것이다. 성경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태 6:3)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단들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반드시 왼손이 알게’ 한다. 즉 양의 옷을 입고 자원봉사를 하고, 이를 사진으로 담아 언론에 보도하도록 한 후, 이를 가지고 공신력 있는 기관들을 찾아 수상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받은 상들을 인터넷에 올려 자신들을 홍보하거나, 복사해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들이 친사회적인 평범한 종교단체라고 선전한다. 대법원은 지난 해 “원고 교회[하나님의교회]는 1988년, 1999년, 2012년경에 시한부 종말론을 제시하여 여러 기독교 단체로부터 이단 지정을 받은 바” 있으며, “원고 교회의 일부 신도들이 통상적인 정도를 넘어선 과도한 종교 활동과 헌금 등의 문제로 심한 가정불화가 발생하고, 이혼까지 이른 사례들도 있다”고 하나님의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언론의 자유는 침해당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언론도 국민의 올바른 알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일부 언론들의 실리에 대한 집착이 이단 피해를 확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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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8-12
  • [가정호목사] 하나님나라의 풍경 안으로 빈번히 드나들자
    하나님은 한없이 아름다우신 분이다.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설계되었고 그분의 말씀의 선포로 나타난 것이다.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빛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다. 당신이 한없이 아름다우신 것처럼 당신의 자녀들도 한없이 아름답게 회복시키시기를 기뻐하신다. 1. 그 풍경을 경험하면 영혼의 정원이 달라진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중심주제이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응답으로 당신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하신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하는 즉시 내 영혼의 정원이 얼마나 초라한지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은 놀라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혼의 정원을 제대로 가꾸기 위해 말할 수 없는 열정이 솟는다. 2. 말씀 안으로 망명하지 말고 말씀을 통과하여 걸어가자. 하나님이 우리 손에 들려주신 성경은 우리의 망명지가 아니다. 말씀이 우리의 망명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에 감동으로 기록된 한 책, 지상에 존재하는 영원한 언어로 직조된 그 책, 곧 그분의 숨결이 배인 그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그곳이 우리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곳을 우리의 망명지로 제공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말씀은 우리에게 삶의 기준과 원리를 제공해 주시는 그분 자신이다. 그 책에 숨지 말고, 그 책을 통과하여 세상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말씀의 은혜가 뚝뚝 떨어지는 그 몸을 그대로 이끌고 세상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야 한다. 3. 신앙의 정점에 아름다운 향내가 진동하게 하라. 다윗의 신앙의 목표는 아름다우신 하나님에게 참여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우신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덧입는 것이었다. 지성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정서(그분을 향한 감정)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말과 행동, 태도가 한없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감동을 넘어 충격을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선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의 정점에서 경험하는 일상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영화로워지시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4. 새로운 교회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교회시대에 교회가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던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사랑과 공의)이 나타났을 때이다. 교회가 정치적 힘, 물질의 힘, 세속적인 어떤 능력으로는 절대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없다. 중세 카톨릭이 황제 위에 군림하고 세속 왕에게 대관식을 하는 파워로 군림했지만 중세의 풍경이 결코 아름답지 못했었다. 그 이유는 그 시대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종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창조주의 말씀이 역사하는 교회의 신비를 올바로 경험한 새로운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등장하게 되면 이제 새로운 시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겸비한 교회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 가정호 (세대로교회 목사, 부산기윤실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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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7-30
  • [최윤 목사] 맹목주의적 신앙이 교회를 죽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지혜롭지 못한 것인지, 또 어찌 보면 의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매한 것인지 모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정치 현장이나 국회 그리고 각종 집회에서 보더라도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문제해결과 협의과정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이 오직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큰 목소리에 따라 몰려다니는 맹목적 패거리주의들만 난무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가 그지없는데 역시나 시선을 교회로 돌리면 그 곳의 상황도 자못 심각하다. 목회자들은 동문과 교단에 발목 채워진 채 시정잡배(市井雜輩)같은 의리와 패거리주의로 인해 개혁자들의 모토인 5Sola는 색이 바래진지 제법된 것 같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맹신하고 잘못 가르치고 전하는 바를 맹목하여 따름으로 한국교회의 수준을 후퇴시켜 놓았다는 세간의 비판에 절망스럽게 직면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여 증명해 내거나 설명할 수 없는 체험적인 요소와 신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 보통 교회용어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지칭하는 개인적 회심을 경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기도 한다(비기독교인이 그런 체험을 심리적인 착각이나 합리화라고 비난하더라도 어차피 개인의 체험의 영역이니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샤머니즘적 기복신앙과 다른 점은 그런 사사로운 체험이나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바램과 기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신의 음성, 즉 ‘계시’(Revelation)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지금도 신앙인들에게 임하고 있고, 그 계시를 통한 교제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도 신의 계시인 성경의 교리적, 신학적 해석의 범주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한다. 체험의 영역으로만 기준을 세우면 ‘정통과 이단’은 구분할 길이 모호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모습과 계시를 중시하는 이성적인 기독교의 원리 가운데 뭔가 어울리지 않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주변에 신앙이 독실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계시 의존적’이라기보다 ‘체험 의존적(Empiricism)’이며, 합리적이라기보다 ‘맹목적(Blindness)’이고, 지성적이라기보다 ‘반지성주의적(Anti-intellectualism)’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원래 계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계시를 분별하는 합리적인 이성을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은 잘하지만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거나 난해한 구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대부분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건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 일단 믿어봐. 믿으면 다 이해가 가!” 게다가 성경에 대해 그리 해박하게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거나, 중요한 구절들을 주제별로 암송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요즘 젊은 기독교인들은 사실 이 정도의 성경암송조차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추앙받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그것도 지성이 차단된 순종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 관한 것이든, 교리와 신학에 관한 것이든, 교회의 문화와 제도에 관한 것이든 어떤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 문화가 있다. 조금이라도 꼬치꼬치 캐묻거나 따져 물으면 바로 불온한 신앙을 갖고 있는 신자로 찍히거나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곤 한다. 아니면 교회를 흔드는 불순한 사람으로 찍혀서 요주의인물이 되고 만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소통과 교제를 믿고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을 매 주마다 외우는 교회가 가장 소통하기 어려운 ‘불통’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가나안 교인(교회를 안 나가거나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며 방황하는 교인)들과 정통을 떠나 이단에 늪에 빠져드는 교인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이런 뿌리 깊은 교회의 반지성주의 문화가 한 원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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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7-09
  • [원대연목사] 경남학생인권조례(안)는 마땅히 폐기되어야한다
    지난 5월14일 경상남도 도의회 교육위원회는 6대3으로 경남학생인권조례를 부결시켰지만, 박종훈 교육감과 찬성측은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언론 등을 통해 왜곡 선동하고 있음을 보며 개탄을 금치 못한다. 왜 경남학생인권조례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하는가? (1)계급투쟁적 헌법 제10조의 내용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처럼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이란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이며, 인간이 태어나면서 본래 가지고 있는 누구나 보장되는 ‘보편적 인권’이지만, 경남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인권은 계급투쟁적 인권관에 뿌리를 둔다. 학생들에게 교사를 지배계급으로, 학생은 억압받는 피지배층으로 교육하여 대결구도를 만들고 있다. (2)특정이념적 교육기본법 제6조는 ‘학교 교육이 정치적, 파당적,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미 조례를 제정한 서울시 교육감 등은 전교조의 사상적 배경을 둔 진보 교육감들이요 공통된 인권 개념을 갖고 있다. 다시말해, 이들의 인권은 특정 사상을 가진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파당적 성격이 농후한 것으로, 학생들에게 특정이념을 주입하려는 의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교육의 중립성을 해친다. (3)초법적 경남학생인권조례 제42조(학생인권침해사건의 조사)에는 ‘학생인권옹호관은 구제신청이 있는 경우에는 인권침해를 받았다고 주장되는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사건에 대하여 조사한다. 다만, 사안이 중대하거나 향후 유사한 사건의 예방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등 조사를 하여야 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학생인권옹호관은 피해당사자의 동의없이 조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학생인권옹호관이 교사 등을 직접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징계를 요청하는 권한을 가진 것은 국가사무와 관련된 것으로, 조례안의 제정 범위를 넘어선 초법적인 것이다. (4)반성경적 가장 큰 문제는 제16조(차별의 금지)와 제17조(성인지교육의 실시)이다. 성관계 경험이 있는 학생에 대한 차별의 금지,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자유와 보장을 명시하고, 청소년에게 임신과 출산이 한 인격체로서 주어진 성적자기결정권이기에 차별받을 수 없다고 하며, ‘성인지 교육’(젠더 교육)을 학교는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항은 동성애를 확산시키는 위험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조례안의 성평등은 우리나라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전제된 남녀 양성평등교육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원대연목사, 마산교회, 나쁜경남학생인권조례제정반대 경남도민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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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6
  • [한석문목사] 예수처럼
    원주의 예수라 불리는 무위당 장일순의 일화집인 ‘좁쌀 한 알’에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시골 아낙이 찾아와 딸 혼수 비용으로 모아 둔 돈을 소매치기 당했다며, 그 돈을 찾아 달라고 매달렸다. 선생은 아낙을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갔다. 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 놓고 노점상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러기를 사나흘 하자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들을 죄다 알 수 있었고, 마침내는 시골 아낙의 돈을 훔친 작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선생은 소매치기를 달래서 남아 있는 돈을 받아 냈다. 거기에 자기 돈을 합쳐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뒤로도 선생은 가끔 원주역에 갔는데, 그것은 소매치기에게 밥과 술을 사 주려는 것이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이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잔 받으시고 용서하시라고.” 앞으로 소매치기 같은 짓 하지 말라든가, 나무라는 말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선생에게는 그들 행동의 옳고 그름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더 컸던 것 같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사람들 앞에 끌려나와 부끄러움 가운데 내동댕이쳐졌던 한 여인이 생각난다. 그때 예수는 돌을 들고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인을 향해 이해와 연민을 가진 한 분이셨다. 예수는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묻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인을 안심시키고,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짓지 마라”며 여인을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힐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 역시 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삶을 살고 가신 분이다. 지난 달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프랑스군 특수부대가 무장조직과의 교전 끝에 인질 4명을 구출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출해 놓고 보니 인질 네 명 중에 한 명이 한국인이었다. 안타깝게도 인질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특수부대원 2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로 인해 네 명의 인질은 세간의 비난을 피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이번에 그들이 여행한 지역은 한국 외교부에서 정한 2단계 여행자제국가여서 한국인 여성에게는 더더욱 비난이 쏟아졌다. 발표 직후 온라인상에서는 긴급구조상황인 이 여인의 항공료 등에 대한 정부지원여부에 대해 일대논란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는 가족들이 항공료를 보내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지만, 여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반응이야 응당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겠다. 가치판단으로 사람을 재단하기 이전에,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심정을 헤아려 주는 여백이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수의 마음이 아닐까?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한잔 받고 용서하라고.” 예수의 마음이 아니면 절대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한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섬세해질 수 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 세상은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한석문 목사 | 해운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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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0
  • [노상규 목사] 첫 날부터 일꾼이다
    ▲ 노상규 목사(상내백교회 담임) 흔히 교회에는 방해꾼, 구경꾼, 일꾼이 있다고 한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방해꾼,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일꾼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고, 일꾼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많은 교회에서 “일꾼을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9:37-38)고 하신 말씀을 염두 해 두고 하는 기도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교회에 일꾼을 보내 주신다. 그런데 정작 기도의 응답으로 온 일꾼을 알아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교회의 일꾼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새로운 가족이 오랜 기간 잘 훈련을 받고,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분들이 많다. 일반적인 시간에서 보면 그 생각이 맞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필자는 새로운 가족이 교회에 출석을 한 첫 날부터 그는 그 교회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에 유익을 주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자가 오면 그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가장 힘을 얻는다. 그리고 새가족사역팀원들이 신이 난다. 또한 건강한 교회라면 온 성도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힘을 얻는다. 정작 새가족 자신은 모르지만 담임목사, 새가족사역팀, 온 성도들이 하나님이 그 교회공동체와 함께하시는 증거임을 보며 힘을 얻고 기뻐하는 것이다. 교회에 큰 유익과 힘을 주는 그가 일꾼이 아니라면 누가 일꾼인가? 새가족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가족에게도 그의 신앙생활이 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과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의 선한 부담감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자신과 가정, 교회공동체와 민족공동체, 열방을 섬길 수 있는 진정한 일꾼으로 세워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꾼을 보내어 주옵소서!”라고 말할 때, 이사나 결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전입해오는 헌신된 일꾼을 보내어 달라는 소망도 담겨 있는 것이다. 기존성도는 절대로 받지 않는다는 일부 교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일꾼의 부족을 피부로 느끼며 훈련된 일꾼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꾼이 왔을 때 그 일꾼이 정착을 하고 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배려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단에 대한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교회들은 새로운 일꾼이 오면 혹시 저 사람 이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고, 대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 새로 온 일꾼들도 그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단에 대한 염려는 담임목회자와 당회에 맡기고, 보내어 준 일꾼을 환영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일꾼이 왔을 때 담임목회자와 당회는 빠른 시간 안에 심방과 심도 있는 상담을 통해 그의 달란트와 그동안의 섬김을 파악하여 교회의 가장 적절한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기존의 성도들도 새로운 일꾼이 일할 수 있도록 과감히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다른 영역에서 섬기는 배려도 필요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직분에 대한 집착을 가진 분들은 새로운 일꾼이 오면 자신의 경쟁자로 보고 은근히 밀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까지 지방색, 정치색이 자리를 잡아서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 즉시 부정적으로 대하거나 여론을 형성하여 밀어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새가족이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전입을 온 훈련된 일꾼이든 그는 첫 날부터 주님이 보내주신 그 교회의 소중한 일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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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7
  • [최병학 목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86세대의 마지막 사명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일찍이 독일의 시인 B. 브레히트는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비극은 86세대의 비극입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세대’인 86세대(30대였던 1990년대까지는 386세대라고 불렸고, 이후 40대로 접어들어서는 486세대라고도 했지만, 2018년 이후 언론에서는 그냥 86세대라 표현)는 밖으로는 파시즘과 싸우면서 안으로는 파시즘을 키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회자되는 ‘꼰대론’의 발생사적 근원입니다. 한때 정의를 외치며 자신을 희생했던 세대의 정치적 실패는 사회 전반에 더 큰 실망감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를 퍼뜨립니다. 그리고 중앙대 독문과 김누리 교수에 의하면 “지금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의 뿌리는 바로 86세대의 실망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86세대가 꼰대 짓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틀을 잡을 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합니다. 재벌개혁, 정치개혁, 교육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감행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86세대는 폭압적인 군사독재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고, 민주적인 국가, 정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꿨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사명감이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현재 민주개혁정부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냉철해져 볼까요? 86세대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나요? 중·고등학생들은 살인적인 경쟁에서, 대학생들은 경제적인 압박에서, 청년들은 실업의 고통에서, 노동자들은 해고의 불안에서, 실업자들은 생존의 공포에서, 여성들은 성적 억압에서 해방 되었나요? 나아가 우리 사회는 더 평등해지고, 국가는 더 정의로워졌나요? 국민은 더 행복해졌습니까? 사실은 ‘헬조선’, 곧, 한국 사회는 시대착오적인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86세대의 실패는 무엇 때문인가요? 김누리 교수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줍니다. “첫째, 정치적 비전과 상상력이 빈곤했다. 둘째, 도덕적 우월감의 덫에 갇혔다. 셋째, 파시즘의 역설 때문이다.” 그렇다면 86세대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김누리 교수는 독일의 68세대를 소개합니다. ‘반(反)권위주의’적인 운동으로 부조리한 세계, 억압적인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했던 68세대는 나치 전력을 가진 자가 수상이 되는 파렴치한 나라를 철저한 ‘과거청산의 나라’로 바꾸어놓았고, ‘라인강의 기적’ 속에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던 나라를 모범적인 복지국가로 변화시켰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감행’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동서독의 오랜 적대를 허물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동방정책을 발전시켰습니다. ‘경쟁은 야만’이라는 철학 아래 경쟁을 금하고, 아이들에게 자유와 행복감을 만끽하게 하는 학교, 학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연구보수’라는 명목으로 생활비까지 주는 대학,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검소하고 유능한 의원들로 채워진 연방의회, 노동자들이 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업, 100만 난민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민사회. 이것이 68세대가 만들어낸 독일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86세대가 꼰대 짓을 버리고, 다른 세상의 기틀을 만들면 됩니다. 적폐청산과 개혁을 감행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촛불세대들에게 지금보다 못한 세상을 물려주지 않는 것, 헬조선인 ‘지옥’을 넘겨주지 않는 것, 이것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86세대에게 남겨진 마지막 시대적 사명입니다. 그 소명을 소리 없이 감당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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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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