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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규철 장로] 부목사도 주의 종입니다
    모든 교회가 들뜨고 신나는 연말에 유일하게 불안하고 가슴 졸이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부목사들입니다.교회 헌법상으로 부목사의 임기는 1년 이며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계속 시무할 수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부목사의 임기는 1년이며 그 후는 당회장의 의중에 따라 언제든지 해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연말이 되면 각 교회에서는 부목사들의 수평 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인은 좀 더 시무하고 싶고 또한 성도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워도 이런 저런 이유로 나가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필자가 어릴 때의 교회에는 부목사가 없었습니다.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주일학교를 인도 했던 교육조사, 그리고 신대원을 다니면서 교회 목회를 수련했던 전도사, 그 후 신대원을 졸업하면 강도사가 되고 다시 목사고시를 통과하면 정식으로 목사가 되어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교회의 양적인 급성장으로 인하여 담임목사 한분이 교회사역을 담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의 전도사와 강도사들이 맡았던 사역을 부목사들이 맡게 되었는데 한국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신학생들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매년 수 많은 목사 후보생들을 배출하게 되고 부목사의 자리는 한정적이라 경쟁이 치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목사도 대학과 신대원을 거쳐 정식 절차를 밟아 목사가 되었는데 마치 학교의 기간제 교사나 회사의 인턴 사원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더 큰 문제는 시무 기간도 매년마다 갱신하도록 교회 헌법에 명시되어 있어 근무연한을 보장받지 못하니 열악한 처우에도 아무런 항의조차 못하는 실정이고 또한 목회 사역이 부목사간의 경쟁적인 실적과 성장 우선주의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교회 헌법에 목사는 성경에 나타난 칭호인 목자, 그리스도의 종, 사역자, 장로, 교회의 사자. 교사 등등으로 칭하면서 ‘이는 계급을 가리켜 칭함이 아니요 다만 각양 책임을 가리켜 칭하는 것뿐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부목사란 직책은 성경이 아니라 사람이 편의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부목사의 사역이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것이 아닌 성경에 나타난 목사의 칭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게다가 임기를 1년으로 정하고 매년 갱신하는 것은 목사를 성직자가 아닌 직업인으로 스스로 비하하는 오류를 만들었습니다. 부목사가 부임한지 일 년 안에 당회나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앙의 깊이와사역 능력과 인성 등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오늘의 교회가 대형화 되다보니 부목사들도 전문분야에 따라 사역이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주일 학교나 청소년 사역, 찬양, 상담, 선교, 다문화 사역, 교구,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에서의 목사들의 역할이 세분화되고 다면화됨에 따라 협동사역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대교회가 담임목사 한분의 지도 체계가 아니라 집단 사역 체계로 바뀌어 가야하는 당위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담임목사와 부목사들의 관계가 상하가 아니라 동역자로서의 관계로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제는 목사 사례금도 검토해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담임목사에게 과도하게 치중 된 사례금과 많은 수당으로 인하여 교회예산이 부족하다며 부목사에게는 정상적인 가정을 영위하기 힘든 박봉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장과 교사간의 봉급은 호봉이 같으면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업무추진비와 직책수당이 교장에게 더 지불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례금 체계도 동등한 기본사례금과 직책에 따른 수당으로 구분하여 지급하는 것도 한 방편이라 생각합니다. 새해가 되면 교회도 바람직하고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부목사 문제는 교회의 어른들이 솔선하여 깊이 생각하여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지금이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 부목사는 미래 한국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주의 종 입니다.교회는 부목사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토양을 만들어 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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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1-02
  • [안동철 목사] 석고대죄(席藁待罪)
    ▲ 안동철 목사 텔레비전 사극(史劇)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거적 같은 것을 깔고 왕이 용서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장면을 볼 때가 있다. 사자성어로 석고대죄(席藁待罪)라고 한다. 때로는 왕이 잘못한 것인데도 신하들이 왕을 잘못 모셨다고 하여 석고대죄를 하는 장면도 본다.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2017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올해가 시작되기 전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500년 전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이제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많은 행사와 다짐들이 잘 실천되었는지를 반성할 시간이다. 정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의 그 정신을 한국교회는 올해 잘 회복하고 실천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죄송하게도 ‘예’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다. 개혁자들이 외쳤던 다섯 가지 ‘오직’이 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다. 특별히 이 다섯 가지 ‘오직’ 중 ‘오직 성경’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가 있다.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은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인간과 전통의 가치를 상대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절대화 하였다. 말씀의 빛 아래 다른 모든 것은 비판받아야만 했다.올 한 해 우리의 모습은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했는가? 서울의 모 대형교회에서 있었던 담임목사 부자세습은 한국교계를 넘어 한국사회의 지탄을 지금도 받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력한 언론 중 하나라는 한 방송사는 이 교회의 세습 문제를 연일 다루고 있다. 그 결과 소위 ‘가나안 교회’ 교인은 또 얼마나 많이 늘어났는가? 한국교회의 미래인 청년들은 교회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갔을까?이 외에도 목회자 세금납부 문제에 대한 대처는 정말 성경적이었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아니면 우리의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투쟁이었는가? 북한의 안보 위협속에서 한국교회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접근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접근했는가?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는 성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투명했는가? 인권을 빙자한 동성애와 낙태 등의 문제에 대해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해왔던가? 교회가 세상과 너무 비슷해 혹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것은 아닌가?이런 모습은 꼭 요나 시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욥바 항구로 내려갔을 때 요나가 마주친 현실은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였다. 그리고 요나는 배의 가장 밑층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큰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선장이 요나에게 뭐라고 했는가?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욘 1:6).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를 책망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선지자였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불신 선장이었다! 마치 하나님의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 불신 세상이 교회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큰 폭풍은 어떻게 할 때 사라졌는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비록 요나서 후반부의 말씀을 보면 요나가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완전히 회개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 위기의 순간, 요나는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席藁待罪)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이런 석고대죄는 더욱 깊어졌다. 비록 불순종한 선지자였지만, 그는 자신이 바로 문제의 근원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한국교회, 아니 좀 더 좁혀 작은 교회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그리할 때 세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 앞에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1:16). 지금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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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12-18
  • [주광순 목사] 종교개혁 500주년을 회고하며
    지난 10월로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지 500년이 지났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피 위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한 한국교회가 안타깝게도 이제는 루터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당대의 교회 못지않게 타락해 버리는 것 같아 아쉽다. 비판하고 나온 그 자리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물론 당대의 교회와는 다른 악습이 현재 생겨났다. 이를테면 대교회세습, 개교회주의, 성장주의, 성직주의 등은 현재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악습이다. 또한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는 행위의 포기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전통과 교리로 변절되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행위와 이항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지기에 행위와 믿음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선한 행위들(die guten Werke)에 관하여” 라는 저술을 통해서 행위 문제를 심도있게 고민하였으나, 이러한 고민은 한국 교회에 잊혀져 있다. ‘믿음(?)’을 가지면 어떻게 살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성경 대신에 물려받은 교리나 교회적 전통이 더 중요해졌다. 교회 기구들의 의결이나 전통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고민은 약화되고 말았다. 미국의 지난 대선을 되 돌이켜 보자면 텍사스 주 등 성경적 가치를 중시하는 중부지역인 ‘바이블 벨트’는 똘똘 뭉쳐 도널드 트럼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동성애, 낙태, 이슬람’ 등에 관해서 보수적 기독교의 표를 얻을만한 정책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려스럽다. 이것은 과연 성경적 가르침인가 아니면 미국 보수교회의 전통인가? 물론 동성애와 낙태가 하나님 뜻에 어긋나며 이슬람에 대항해서 기독교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몰표를 줄만큼 트럼프 후보가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가? 마치 우리나라 대선에서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몰표를 던진 한국 보수교회 생각이 난다. 왜냐하면 트럼프 후보는 성적인 문제나 소수 인종에 대해서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동성애 등을 반대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무조건 대통령으로 뽑는다는 것이 성경적인가? 필자가 보기에 두 후보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몰표가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몰표가 나온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으로도 어떠한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나왔다기 보다는 교회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동성애 반대 같은 것은 어떠한 결함이라도 묵인할 수 있는 면죄부가 될 수 있는가? 다양한 차원에서 성경을 검토하기 보다는 단지 교회적인 시각에 갇힌 것은 아닌가?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동성애나 이슬람 이슈가 보수교인을 맹목적으로 만들고 일방적 지지를 하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나 무슬림혐오가 한국 교회를 지배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어그리는 사람조차도 혐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 같다. 주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한 돌팔매질을 멈추셨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이라고 믿는다. 동성애와 이슬람을 반대하는 것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무슬림을 혐오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또한 동성애 반대자, 이슬람 반대자에게 몰표를 주는 것과도 다를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교인 수가 줄어 가고 특히 청년층의 이반은 더욱 심하다. 필자가 대학에 있기에 여기에 주목해 보자면 이제 한국 대학은 선교사 양성소가 아니라, 선교지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인 대학생 수가 점점 감소할 뿐 아니라, 기독학생도 자기가 기독교인임을 감춘다. 이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 때문이겠지만, 믿음이 행위를 이끌지 못하고 전통이 다시 성경을 밀어내는 것도 주요한 원인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제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축하만할 것이 아니라, 루터처럼 교회 개혁을 힘써야 할 것이다. 피를 흘리는 마음으로, 루터의 말처럼, ‘근원으로(ad fontes)’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성경적 통찰력으로 이 시대와 한국 교회를 다시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이다. 새 시대는 복음을 담을 새로운 형식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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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4
  • [전영헌 목사] 수능, 그 이후
    수능을 마치고 나면 유통업계는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뜨거운 판촉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자 상가에서는 특별판매를 시작하고, 백화점에서는 수험표를 가져온 고객에게 옷을 할인판매하고, 휴대폰 대리점에서는 수험생 특판을 시작한다. 프로농구 경기장에서는 수험생들을 무료로 입장시켜주고, 놀이 공원에서도 수험생들을 위한 할인서비스를 실시하는 등 다양한 판촉전을 벌이곤 한다. 수년간 입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중압감에 시달려온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이런 행사들을 마련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사들 속에는 정말로 청소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업 확장과 이익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가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삼키기 위해서 이리 몸부림을 치는데 과연 신앙의 틀을 제공해야 하는 우리 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능 이전에는 여러 기도회로 기복적인 부분들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수능이후에는 음란과 자극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갈 고3들에게 어떤 안전장치를 해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이를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독가정 속에서도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수능이후 고3 학생들의 뒷마무리 즉 신앙 교육의 성장과 의미를 찾기 위한 과정을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학부모와 함께 하는 찬양 축제 교회들마다 여건과 상황만 된다면 수능 이후 저녁, 아니면 그 다음날 저녁이라도 수험생과 학부모가 함께 하는 찬양집회를 열어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축제를 통해 학생 본인은 물론그동안 뒷바라지로 고생해온 학부모들까지도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시간이 될 것이고 가정에 큰 힘이 됨과 동시에 교회가 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일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가정과 연계하여 학생들의 신앙지도를 원활히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될 것이다. 2. 위로여행으로 압박감 풀어주기 본인이 사역했던 이삭교회 고등부에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수능을 마친 주간 금-토요일 1박 2일간 위로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2년 동안에는 고3학생들만 가는 위로여행이었으나 2010년부터는 대학청년부 선배들이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이를 통해 과중한 학업과 입시의 압박감에 시달렸던 후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앞으로 진급하게 될 청년부와의 친밀성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선배들이 멘토가 되어줌으로 대학생이 되기까지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 신앙의 본질 회복하기 한국의 상황에서 수험생은 거의 왕의대접을 받는다. 모든 것에서 면제된다. 나아가서는 예배까지도 면제되는 비극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수능을 마친 이후 신앙의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대학 청년부로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수능 이후의 시간을 잘 활용하여 특별새벽기도, 신앙기초강좌, 교리학교, 기독교 세계관학교, 예배자 학교, 큐티학교 등을 통해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함과 동시에 앞으로 세상이라고 하는 캠퍼스에 노출되어 살아갈 예비 대학생들에게 균형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교육은 그리스도의 닮음을 이루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교회교육의 사명 역시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닮음을 이루는 균형 잡힌 새벽이슬 같은 청소년으로의 양육은 한국 교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분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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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11-13
  • [길원평 교수]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동성애 확산과 합법화를 막기 위한 사역을 하다보면 몇 가지 비판을 듣는다. 첫째,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번에 대법원장 후보자를 반대하는 운동을 할 때에도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우도 좌도 아니며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이번 대법원장 후보자도 동성애 관련 문제가 없었다면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동성애 반대자 중에는 우파와 좌파가 거의 반씩 있기에, 동성애 반대 활동을 할 때에 정치색을 띄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가인권위의 동성애 옹호 활동, 동성애 옹호 입법, 교육, 판결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이 정부, 국회, 법원을 향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의견은 고려되지 않는다. 서구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를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법과 제도들이 막지 못하여 자녀들은 학교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정상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 윤리관을 갖고 공공장소에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 서구를 바라보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깨어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둘째, 차별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난다는 비판이다. 나도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차별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차별에는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미도 있다. 도덕, 양심, 종교,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비판은 정당한 차별이다. 동성애자는 물론 모든 사람에 대한 부당한 차별은 이미 현행 법률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을 만들면 정당한 차별을 포함한 모든 차별이 금지된다. 그런데 남녀, 장애 등에 관한 정당한 차별이란 있을 수 없기에 남녀, 장애 등은 차별금지사유가 될 수 있다. 반면에 동성애, 중독 등에 대한 정당한 차별은 존재하기에, 동성애, 중독 등은 차별금지사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만들면 정당한 차별이 금지됨으로써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 견해, 양심, 학문, 표현, 종교의 자유 등이 제한되고, 학교에서조차 동성애를 정상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금지하는 동성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이다. 셋째, 반동성애 사역만 하고, 약자보호,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등한히 한다는 비판이다. 나도 약자보호, 공의 등이 중요한 기독교적 가치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까지 할 시간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약한 몸으로 교수로서 해야 할 일을 한 후에, 남은 모든 시간을 쏟아 반동성애 사역에 헌신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부디 뒷짐진 채 비판만 하지 말고 함께 동역해 주길 간곡히 호소한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일이 동등하게 귀한 것이기에 상대방을 존중하며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부분 동성애 사역단체들은 5년 이내의 신생 단체로서 교회의 후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동성애 사역자들이 자신의 시간, 재능, 돈을 써가며 헌신하고 있는 실정을 잘 알기에, 그들의 헌신을 뒤에서 비판을 할 때에 마음이 아프다. 동성애 옹호자들은 동성애 사역자들이 편협한 마음을 갖고 동성애자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모두 근거가 없는 모함이다. 실제로는 대다수 동성애 사역자들이 건전한 신앙심을 갖고 약자를 향한 긍휼함을 갖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동성애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가 분열되어 하나가 되지 못하면 결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 옹호자들은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다양한 거짓을 퍼트리고 있다. 서구 교회는 분열이 되어 동성애 문제를 막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따르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서 순결한 믿음을 갖고 거룩한 삶을 다음 세대에 보여 주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이 싸움을 반드시 이길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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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17
  • [성인심 사무총장]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라'
    지난 2016년 6월 23일, 삶의 편리라는 명분아래 신고리5·6호기는 원자력안전위원회 9명 중 7명 위원의 찬성으로 건설허가를 받았다. 건설승인 절차는 비민주적이었다. 한 번씩의 공청회와 설명회가 끝이었다. 건설된 신고리5‧6호기 인근 주민은 물론이고 30km 반경에 거주 중인 부산, 울산, 경남 380만 명 주민과의 사회적 합의가 전혀 없었다 전세계가 강화하고 있는 원전 안전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 결정이었다. 지난 6월 19일, 고리1호기 영구정지 기념식에서 문재인대통령은 ‘신고리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출하겠다.’라고 발표한 후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현재 신고리5·6호기 건설에 대한 공론화가 진행 중에 있으며 건설 중단과 건설재개에 대한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신고리5‧6호기의 공정이 30%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건설을 중단할 경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건설 기업의 경제적인 손해, 노동자의 일자리 문제, 지역 주민들의 손실, 그리고 전력 생산 감소와 전기료 상승에 따른 국민의 부담이 발생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음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게 될 경우 그 피해와 경제적인 손실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가장 안전하다고 했던 후쿠시마도 지진, 쓰나미라는 자연의 위력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진으로부터 안전하다던 우리나라도 2016년 한반도 지진 관측 사상 가장 강력한 5.8 규모의 강진이 경주에서 발생함으로써 결코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직도 그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핵발전소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현재 핵발전소 지역 주민들이 겪고 있는 갖가지 피해와 주민간의 갈등으로 인한 지역의 위기 등의 현실도 깊이 헤아려야 한다. 지금 언론들은 신고리5·6호기 건설을 중단하면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전기요금이 폭등하게 된다는 등의 거짓정보를 국민에게 보내고 있다. 최근 5년간 최대 전력 발생 시에도 공급 예비율은 최소 8% 이상을 유지하고 있고, 전력소비량도 늘지 않아 가동되지 않는 발전소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17년 7월 폭염에도 전력설비 예비율은 34%나 여유가 있었다. 과도한 전력 수요 전망이 빗나가고, 전력소비증가율은 줄어들거나 정체된 추세에 있다. 전력공급은 충분하므로 신고리5·6호기는 지을 이유가 없다. 전기요금 폭등도 마찬가지다. 정부에서도 2022년까지 탈원전으로 인한 전기요금 인상은 없을 것이라 발표하였다. 신고리5·6호기를 건설하지 않고 LPG 발전으로 대체한다면 가구당 약 300원의 전기요금이 증가를 예상한다. 민간연구소인 현대경제연구원은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로 올리고, LPG 발전소 가동률을 60%까지 확대하면 2030년 기준으로 약 월 5천 원 정도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신고리5‧6호기 건설 중단과 탈원전으로 인한 비용부담은 우리의 우려와 다르게 미미하다. 또, 핵발전소를 가동하면 발생하는 핵폐기물에 대한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들어 내는 쓰레기와 달리 핵폐기물은 치명적인 방사능 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 폐기물의 방사능 성질이 없어지려면 10만년 이상 인간, 동물, 식물로부터 완전히 격리하여 보관해야 하며 영구적으로 특별관리가 필요한 위험한 쓰레기이며 전 세계적으로 고준위 핵폐기물에 대한 처리는 아직도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기존의 핵폐기물 저장공간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어 더 이상 핵폐기물을 처분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신고리5·6호기 건설은 핵폐기물과 모든 위험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창조세계의 가장 큰 위협요소가 핵발전소가 되고 있다.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만들어낸 핵발전소가 지금의 우리 그리고 미래세대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하나님의 처음 그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주신 이땅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고리5‧6호기를 백지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며 명확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17-09-25
  • [강규철 장로] 성도님들은 행복하십니까?
    요즘 일부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지나친 대립을 하다가 법정 싸움으로 까지 번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장로님들은 목사님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가라고 하고 목사님은 위임의 권한을 주장하여 버티면서 이전투구를 하는 동안 성도님들도 패거리로 나뉘어 상호 비방하다가 실망하게 되고 상처받은 마음으로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나 진리파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과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을 성도님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분에 넘치는 성전 건축으로 인해 주일 헌금의 상당액이 은행 이자로 지출됩니다. 정말 힘들게 일하며 번 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것이 교회 건물 유지와 이자로 상당액이 쓰여 진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본 교회 성도님들이 행복하다고 생각 하십니까? 혹시 성도님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당회가 의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회의 분쟁과 갈등이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집안일보다 교회 일을 우선하시는 성도님께 가정으로 돌아가 자녀들을 돌보며 가정의 행복을 지키도록 권면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행사가 너무 많고 그에 동원되는 성도님들의 일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특히 주부들이 교회 행사로 인해 자녀 양육과 가정을 소홀히 하여 생기는 문제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목사님들께서는 성도님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그리고 빠듯한 생활비를 아껴서 내는 헌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교회 헌금봉투의 종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습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모자라 수많은 명목의 헌금 봉투를 받는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 당회가 어떤 사역을 결정할 때 성도님들의 입장과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도님들은 주일날이 기다려지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위로받고 한 주간의 지친 영혼이 회복됨을 체험 하고 싶습니다. 성도님들은 본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평안함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성도들 간의 포근한 사랑으로 피곤한 심신이 재충전되길 소원 합니다. 힘들고 좌절될 때 찾아온 목사님의 따뜻한 위로의 기도를 받고 싶어 합니다. 사회에서는 별 볼일 없이 천시 받고 있지만 그래도 교회에서는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합니다. 왜냐면 성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이며 본향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교회가 성도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부담과 압박감을 더 많이 주며 때로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성도님들은 그들의 가정이 신실한 믿음의 가정이 되길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들의 자녀가 주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어린자녀들에게는 부모의 사랑의 손길이 날마다 필요합니다. 주일은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함께 어울려 한 주간을 돌아보는 사랑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녀들이 좋은 교회를 다니고 좋은 목사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 합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많이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도 바칩니다.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자존심, 사소한 욕망,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고 사랑과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영적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성도들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섬기면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제는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건전한 신앙생활과 믿는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진지하게 의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7-09-11
  • [송시섭 교수] 4차 산업혁명시대속의 교회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세상과 동떨어져 ‘자연인’으로 살 수 없는 우리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 작은 휴대폰을 매만지며, 모든 삶의 순간들을 그것에 몰입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할 때 마다 우린 사회발전에 종속된 개인에 불과함을 느낀다. 얼마 전 만난 청년 한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한 고민은 그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공통된 고민이 아닐까 한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 이질적인 가치관의 압도 등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고통과 괴리감은 그저 우리가 감당해야할 고난이며 거쳐 가야 할 과정인가.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세상과의 단절과 소외의 산물인가. 이런 오랜 세계관적인 고민들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채 우린 ‘4차 산업혁명시대’(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를 맞았다.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처음 언급되었다는 이 표현은 불과 1년이 지난 지금 온 세상의 화두가 되어 있다.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시대를 연 3차 산업혁명(제1차 정보혁명)은 이제 ‘융합’과 ‘연결’이라는 키워드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해가고 있다. 이른바 제2차 정보혁명의 시작이고, ‘초연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초연결(hyper-connection, 超連結)은 자연스럽게 빅 데이터(Big Data)의 축적을 가능케 하고 이는 이른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초지능’(super-intelligence, 超知能)을 등장케 했다. 온 사회를 뒤덮고 있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메아리가 우리 성도들의 귀에 울려 퍼지고 있지만 교회는 각 산업혁명의 시기마다 그랬던 것처럼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아닌가. 초대교회의 외침이, 종교개혁의 명제들이 ‘원형 그대로만’ 반복되고, ‘너희는 저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론이 오늘 이 자리에서 구현되지 않는 한 우리 교회는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사회와 분리되고 자칫 퇴행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그건 아마도 시대정신과 사회변화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성경의 진리를 그 시대상황에 맞게 새롭게 재편하고 재해석하는 길일 것이다. 교회역사를 돌이켜보면, 플라톤 철학을 교부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스콜라철학으로, 인문주의를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성경에 감춰진 새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었던 과거의 선배들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 시대의 슬로건인 ‘초연결’이라는 개념은 교회내 순환형, 쌍방향의 성도간 교제(communion)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될 것이고, ‘초지능’은 영적지능(faith-inspired intelligence)의 향상을 통한 집단영성의 확대를 이루어줄 것이다. 카톡이나 밴드를 통한 성도간의 나눔, 전문가 평신도에게로 열려진 강단, 직분의 개념을 넘어서 은사중심의 자발적이고 폭 넓은 참여와 의사결정, 토론과 질문을 통한 사회적 이슈의 성경적 해석, 지역사회와 보다 밀착적인 활동의 발굴 등을 통해 지역민들이 들르고 싶은 장소, 이웃들이 머물고 싶은 공간, 사회인들이 공감하는 주제를 공유하는 거점으로 교회가 새롭게 거듭날 수 있게 되리라 생각된다. 진리는 불변이 아니라, 일관성에서 그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 새 포도주가 새 부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 부대가 새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7-08-28
  • [박철 목사] 예수의 현재성
    교회와 예수그리스도의 관계를 다시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교회는 예수의 무엇이며 또 예수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떤 것인가.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요 예수는 그 머리라 했다. 이 내용은 바울의 글에서 바울의 표현을 빌린 부분이다. 예수의 말씀으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제자의 요구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주는 암시를 기독교가 해석을 해야 하는데 기독교는 예수의 말씀에는 근접을 삼가고, 바울의 형편에도 가까이 가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으니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정면으로 해석하면 교회와 메시아 예수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대속 죄의 의미일 때 신자(교회)의 십자가는 대속 죄의 회답의 십자가이며 복음 선교의 십자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생애의 함축인 십자가로 예수와 신자의 관계를 세웠을 때 혼선이 없는, 아주 투명한 논리가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역사 위에서 고전을 하게 된 것은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씀의 의미(내면의 요구, 상징으로의 문학적 표현 등등)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대서 오는 결핍이 된다. ‘예수 이름으로’는 ‘예수의 예수로’ ‘예수의 자격으로’ ‘예수의 권위로’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예수 이름으로는 ‘예수 인격의 현재’가 동원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 다시 정리하면 ①교회는 예수의 몸 ②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보았다 ③예수 이름으로가 지니는 정상적인 가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마음에 간직하고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현재를 대변하고 대신해야 한다는 당위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현재로까지 교회가 발전(성장)해 주지 않는다면 교회는 역사의 무대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소멸되어 갈 수 있다. 지금 교회가 지닌 도덕적 가치는 제1급에 해당하지 않는다. 인류가 쟁취한 휴머니즘의 요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의 도덕적 성취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선진형 NGO(비정부기구) 들의 Human Story 만큼의 설득을 따라잡지 못하는 수준으로 세상을 더 이상 감동시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골고다가 일회성 사건이 아니고 오늘의 역사의 교회 현장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일어나야 할 사건으로의 십자가는 교회가 보존해야 한다. 교회의 십자가라고 하니까 예배당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그것이거나 목걸이 팔찌용 장식품이거나 가끔씩 속죄한다면서 십자가 틀을 끌고 돌아다니면서 시각성 시위를 하는 그런 따위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희생이요 대속이며 용서이고 대신 살아줌이다. 내가 너를 대신하고, 또 네가 나를 대신한다는 생명의 일체(일치)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이기심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타종교나 세상의 가치들을 경멸해서도 안 된다. 그 이전에 교회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처럼 무덤도 남길 수 없는 존재까지임을 말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의 역사 현장에서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또 그만한 자신감을 가진 품위 있는 기독교(교회)가 가능한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예수와 만남에서 성취하는 것이 교회요 신자(求道者)이다. 세상 종교에서는 가는 곳까지 가는 것이 되지만 예수는 만나야 만나는 것이다. 기독교가 하루 빨리 하늘을 떠나 땅(人間)에 오시는 이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하루 빨리 예수 십자가의 그 현장이어야 하며, 십자가는 교회의 현재에서 영원한 진행형 사건임을 교회가 배워야 하는데, 이 땅의 교회들이 예수 하나 십자가에 메달아 놓고 그걸 쳐다보면서 "예수여! 아프죠, 고통스럽죠!" 해가면서 마치 문지방 위에 메달아 놓은 명태 대가리(미신, 민간 종교 사람들이 만들어 둔 부적과 같은 것) 같은 것이 기독교의 십자가라면 그것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예수의 현재가 바로 너와 나임을 깨달아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17-08-07
  • [가정호 목사] 사랑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 존재자체가 사랑인 사람
    "사랑은 ~~~ 해야 한다" ~을 해야 하고, ~도 해야 하고(고전13장)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랑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나면 그 사랑에 균열이 생기고 심지어 권태가 성장하면 언약도 내팽개친다. 사랑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랑에 실패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의무가 되어 시달리다보면 사랑의 대상을 증오하기까지 한다는데 큰 의문이 있는 것이다. 왜 사랑에 실패할까? 고민을 많이 해보아야 한다. 그게 가정이든, 목양이든, 어떤 관계이든 사랑에 실패하면 그것으로 부터 오는 좌절감과 낙심이 크다. 그런데 '사랑은 ~~해야 한다'는 성경본문을 뒤집어서 보면 이렇다. 오래 참음, 그 자체가 사랑이다. 친절함, 그것이 사랑이다. 시기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자랑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교만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무례히 행치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쉽게 성내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한다면서 수시로 성내는 것은 자기 속임이며 실패하는 사랑 사랑이다. 원한을 품지 않음, 그게 사랑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관계 속에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이렇게 많다. 이런 것들 중 하나 하나 몸에 배어 나타나면 상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을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데...' 하는 강박을 버리고 위에 것들을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런데 그 순종과 실천이 자기 힘으로 절대로 안 된다. 되는 듯 하다가 내 팽개친다. 언제나 실패한다. 그래서 사랑은 오직 성령의 사역이다.1) 어느 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의 연합"이 성숙해지면 사랑의 요소들을 실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스스로 놀란다. '아! 내가 <사랑-사람> 이 되었구나'. <사랑-사람>은 자기의 이성이나 감정으로부터 오는 열정으로는 한계가 있다. 언제나 사랑이 바닥치고 사랑이 기근에 시달린다. 사랑이 집을 잃고 여기저기 헤매면서 노숙한다. 방황하는 사랑은 한없이 슬프다. 그러나 부활의 주를 의존하는 의존성이 원만해지면 비로써 자신이 <사랑-사람>되었음을 보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된다. 그것은 쾌락이다. 실패하지 않는 사랑의 지속성은 하늘이 주시는 쾌락이다. 이 쾌락에 맛을 경험하게 되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이 포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을 떠받들어 승리하게 한다. "사랑의 감정이 없어도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장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성령이 주시는 힘을 의존하여 사랑인 것들,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면 놀랍게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진다. 사랑하면 비로써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의 정서가 자라나는 것이다. -------------------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언약인 새언약의 일꾼에 합당한 자격을 주셨다. 그것은 문자는 죽음을 가져오는 반면,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고후3:6)
    • 오피니언
    • 정론
    201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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