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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호 목사]욕망의 정치, 절제의 정치
    왜 지구의 절반은 굶주릴까? 다국적 기업의 음모일까? 지구인 개개인은 관계없을까? 정치인들의 선거공약에는 무조건 잘살게 해주겠다는 공약밖에 없다. 지금도 이 정도면 그런대로 잘살고 있는데도 더,더, 더, 더욱 더 잘살게 해주겠다고 불안한 미소를 보이며 설득한다. 아마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아프리카 (Africa) 사람들이 한국처럼 욕망에 충실하게 소비하는 국가가 되기 시작하면 지구의 자원은 얼마 안가서 끝장나고 말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의 음모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안 보인다. OECD국가 지도자들, 구교의 교종, 복음주의권의 지도자들...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이들의 입에서 이런 말을 빈번하게 듣고 싶다. "이제 우리 그만 절제합시다. 이제 우리 그만 먹읍시다. 이제 우리 이 정도 사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이런 외침이나 슬로건들이 꼭 조그만 단체의 몇몇 사람들, 또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자는 기독 시민단체에 소속된 몇몇의 입에서만 외쳐져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는 지금 소비에 대한 부추김 때문에 둘이 벌어도 먹고 살기 힘들다. 둘이 죽어라 하고 일해도 집 한 채 장만하기 힘들다. 먹고, 입고, 즐기고, 장만하는 일들은 어느 정도에서 자발적 절제를 해야 소망 있는 지구촌이 될 것이다. 지속가능한 지구는 반드시 일정한 기준에서 멈추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분명히 한계에 달한다. 사람들은 애써 그것을 외면할 뿐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지구에 종말을 결정하는 것보다 인간 욕망추구의 총량이 더 빨리 지구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다수의 청년들은 이제 재정을 모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절제나 절약, 이런 용어들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따름이다. 굳이 힘든 일도 하지 않고 싶어 한다. 결혼도 출산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꼭 쓸 만큼만 벌어서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새로운 유형의 히피 열풍이 재현될지 모른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우리시대의 자녀들에게 욕구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절제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시장을 어지럽히는 부덕한 인간이라 욕을 얻어먹기 십상이다. 무한대의 맛을 추구하고 무한대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에 감히 자발적 절제와 자발적 가난을 외치는 것은 이단아처럼 느끼는 세태이다. 어떤 음식이나 맛에 "TRUTH_진리"를 붙이고, 어떤 사람에게 "갓_GOD"을 붙인다. 하나님과 진리를 맛이나 인기인에게 붙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말들이 조크나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매스컴은 무한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대세가 그쪽으로 흐른다. "왜 나만 절제하고 불편하게 살아야 하나? 내가 바보인가? 무지렁이인가? 나도 어깨 힘주고 떵떵거리면서 큰소리 쳐대며 멋지게 살란다" 이런 의식이 뇌를 지배한다. 갈망해도 이루어 지지 않으면 비난과 원망, 상대적인 박탈감과 비교의식에 시달린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종말은 어떤 모습일까?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 중반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다다이즘(Dadaism);<무의미를 의미화 했던 문화, 퇴폐적 예술사조>" 처럼 젊은이들이 자기와 친구를 꾀어 동반자살을 일삼으면서 자유죽음을 찬양했던 광기의 시대를 몰아오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우울한 청년들이 많아진다. 청소년 조현증이 급증하고 있다. 가정을 버리는 이들이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늘어나고 있다. 노인들이 외면당하고 버려지는 시대이다. 고독사가 늘어간다. 묻지마 살해를 저지르는 이들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자식을 버리고 외면하는 파괴적인 정서를 가진 부모들이 늘고 있다. 가히 신 해체주의 시대라고 명할 만큼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지금쯤 정치인들은 무한 욕망을 자극하는 유세보다 우리사회의 격과 질을 높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발언을 해야 할 때이다. 하기야 이런 일에 목숨 걸어야 할 종교가 자기자리를 버렸으니... 그래도 외쳐본다. 이제 우리 격조 있는 세상, 질 높은 사회를 위해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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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11
  • [최윤 목사]스승의 참 의미
    오월의 미풍에 몸을 맡겨 초록물결로 춤추는 청보리 밭과 파아란 하늘을 노래하며 낮게 날아가는 종달새는 우리들의 뇌리 속에 천국의 한 장면일 것처럼 각인되어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렀으며 좋은계절, 좋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할 기념의 날도 많아 하나님의 손길로 창조하신 푸른 계절을 호흡하며 은혜의 향기 가득한 이즈음에는 인류의 구원이시자 큰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욱 사무친다. 그런 5월의 한가운데 ‘스승의 날’이 있다. 제자가 된 처지에서는 스승의 은혜를 되새기고 스승의 처지에서는 올 곧은 스승의 길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제자로부터 언제나 존경을 받아야 하고 또 존경을 받기 위해 늘 반성하고 노력해야 하는 스승의 길은 참으로 힘든 길이다. 그래서 이 길을 묵묵히 가는 스승은 언제나 높고 큰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높고 큰 존재인 ‘스승’은 본래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그것을 밝힐 수 있다면 ‘스승’이 걸어가야 할 길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스승이란 흔히 선생(先生)이란 뜻으로 이해하여 먼저 태어나 경험이 많은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사상가인 한유(韓愈)는 그의 「사설(師說)」에서 나이나 신분을 묻지 않고 도(道)가 있는 곳에 사(師)가 있다고 했다(道之所存 師之所存). 그러기에 성인(聖人)에게는 “정해진 스승이 없으며(無常師)” 스승을 특정한 사람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전도(傳道), 수업(受業), 해혹(解惑), 즉 도(道)를 가르치고,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은 누구나 스승이라고 하고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도(道)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도(道)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며, 도를 가르치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가장 위대한 참 스승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최선의 교육자이며, 가정은 하나님이 세운 첫 번째 배움터입니다. 자녀들을 말씀으로, 믿음 안에서 양육하여야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해 자녀들에게 믿음의 가치관을 심어줄 책임이 있다. 한국 사회의 비극중 하나는 부모가 더 이상 교사이기를 포기한 데 있다. 이는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믿는 자들도 ‘신앙교육’은 당연히 교회에 맡겨버리는 것이다. 어머니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는 스승은 없다. 어머니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을 만드는 위대한 스승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가장 뚜렷한 자국을 남기는 것은 어머니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입은 어머니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이 세계에 기독교의 토대를 세운 위대한 힘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하나로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이며 훌륭한 크리스천이었던 ‘토스토예프스키’는 말하기를 “좋은 기억처럼 훌륭한 교육이 없다.”라고 했다. 최대의 교육은 좋은 기억을 자녀들에게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그 무릎을 세워 실천하며 자녀들과 다음 신앙의 세대들에게 본이 되도록 자애롭게 가르치며 가정과 공동체에서 성경이 가르쳐주신 교육을 세워 나가면 주님께서 기쁨의 열매를 복의 결실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죽이고, 나를 닦고, 나를 세우면 이 어려운 불신앙의 시대를 이겨 나가며 좋은 제자로 스승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을 것이다. 땅을 단단히 다지고 반석을 반듯하게 놓지 않고 지은 건물은 작은 일상의 변화에도 쉬이 무너질 것이다(마7:25).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내 생각과 달라도 잘 인내하는 곳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까지 가는 곳에 결국은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신 6:3). 바라기를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라는 엄중하고 영광된 사실과 돌아서면 뭇 영혼을 제자 삼는 스승이라는 위대 막중한 사명(약 3:1)을 오월의 하늘처럼 밝고 청명하게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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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28
  • [남송우 교수] 한반도 평화 정착과 한국교회
    4,27 남북 정상의 회담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심심찮게 거론되던 때를 생각하면, 분명 큰 변화이다. 이제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긴 하지만, 모든 국민들의 가슴에 희망의 등불이 달리기 시작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일부 정치인들이 정략적으로 정상회담 자체를 쇼에 불가하다고 딴지를 거는 소리를 내고 있긴 하지만, 변화의 큰 물결을 막지를 못할 것 같다. 북미간의 정상회담 결과가 긍정적으로 결론지어진다면, 한반도는 새로운 평화를 향한 전기가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들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동안의 분단체제가 고착된 세월이 상당하고, 온전한 평화 정착까지에는 남북한이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현실적인 과제다. 한국교회는 분단 이후 쉼 없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기도와 북한 선교를 해왔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을 엄정히 살펴보면, 한계가 많았다. 각 교단 별 북한 선교회를 통하든, 개별교회를 통하든, 초교파적인 북한 선교단체를 통하든 북한을 향한 선교는 총체적 전략이 부재했다. 모든 한국교회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긴 했지만, 하나 된 힘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교회는 현실적으로 하나 되지 못한 상태에서 각개전투만 벌여왔던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실상 교회는 하나 되지도 못하고 민족통일이란 더 큰 하나 됨을 부르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아이러니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남북한의 평화정착에도 교회가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도 크다. 지금과 같은 각개전투가 교회마다 이루어진다면,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양상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단순한 북한 선교가 아니라,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한국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지금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철저한 개교회주의를 극복해야 하며, 일차적으로 남한 교회가 하나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성이란 미명하에 분열과 갈등을 계속해온 한국교회 교단들이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란 하나의 목적 아래 아무런 조건 없이 모여들어야 한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협의와 평화정착에 필요한 정부 차원의 조치와 실천들도 단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정치적으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다 해결될 수는 없다. 다양한 모든 영역에서 한반도의 평화정착이란 목적을 위해 해야 할 소임들을 주체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도 한국교회의 역할은 중차대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 상황을 먼 산 불구경하듯 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지금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기도해야 할 시점이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이번에 전개되는 한반도 평화 정착에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지나간다면, 정말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그 존재가 사라져 갈지도 모른다. 주어진 현실을 하늘의 뜻을 따라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때, 교회와 신자의 삶은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주어지는 평화가 어찌 십자가 없이 실현될 수 있겠는가?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먼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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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8
  • [전영헌 목사] 학교를 포기하지말라!
    3월 2일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지난 10년간 근무했던 브니엘고등학교를 떠나서 같은 재단의 브니엘 예술 고등학교로 전보를 받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10년의 시작을 하게 되었다. 브니엘 고등학교나 브니엘 예술 고등학교와 상관없이 나에게 3월은 전쟁과 같은 사역이 시작이 되는 시간이다. 고등학교에서 목사 선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종교인으로, 비기독교인들이 관심가지지 않는, 특히 개독이라고 부르는 기독교 교과목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다. 이유는 일반 교과목과 달리 종교학(성경)이라는 교과목은 일반 고등학생들에게 없어도 그만인 교과목인 동시에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는 더욱 더 거부감이 생기는 교과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3월 첫주간 교목들은 종교 첫 시간에 모든 승부를 다 걸게 된다. 그 첫 시간이 3년을 결정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수의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던졌던 메시지들을 기억하고 꿈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도전받고, 그리고 스스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로 많은 친구들이 방문을 하곤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인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기도 한다. 올해 새로 부임한 브니엘 예술 고등학교 학생들은 자기 목사 선생을 보고 “목사님, 우리 아빠 해주시면 안되요?”라고 울먹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 많은 미션 스쿨들이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이유는 선교사님들이 시작했던 건학 이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또 한가지는 공교육 현장(학교)에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브니엘 고등학교에서 미션 스쿨의 목사 선생으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바로는 학교는 참 매력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결과를 떠나서 학원선교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일에 관심이 없다. 학원 선교는 학교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에 청소년들이 없다고 말을 하고, 청소년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다고 말만 한다.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미래에 대한 투자와 관심은 적게 가지면서 결과만을 볼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학교라는 현장에 있다보니 수많은 교회의 청소년부서와 교사헌신예배 강사로 설 일이 많다. 가는 교회들 마다 청소년들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부흥(인원의 증가)이 되겠냐고 이야기를 한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똑같다. “지역 학교롤 포기하지 마십시오”라는 대답이다. 나는 이 글을 보는 교회 지도자들이 학원 선교 현장에서 몸부림치는 교사들과 학교의 몸부림을 기억하고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여러분이 섬기는 지역에 미션스쿨이 있다면 그곳의 선교담당 교사나 목사에게 따뜻한 격려의 메시지라도 전해 주면 좋겠다. 지역교회와 학교가 더 연합하여 선한 열매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강단에서만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외쳐지는 기도와 메시지보다 교회의 실천이 더 중요한 시대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주면 좋겠다. 학원 선교를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간곡히 부탁한다.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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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3
  • [가정호 목사] 제국인가? 천국인가? (빌레몬서)
    자신과 주인의 돈을 동시에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다. 그의 주인은 골로새지역에서 주님을 섬기는 빌레몬이었다. 이 노예가 로마감옥에 구금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노예는 당시 골로새 교회의 주된 지도자였던 빌레몬의 집에 재산을 축내는 도적질을 했던 사람이었다. 이 노예는 로마에 있는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 감옥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이유로 구금된 노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울이었다. 이 노인이 감옥에 붙들려와 함께 지내는 젊은 노예인 오네시모를 주목한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이 지냈다. 그리고 그는 바울사도의 돌봄 가운데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평강가운데 빠져든다. 밤과 낮을 함께 지냈다. 마치 주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고동락하였다. 노예인 오네시모는 회심했다. 바울이 경험했고, 빌레몬과 그의 가족이 경험한 믿음과 사랑을 맛보았다. 오네시모는 노예였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맛보았고 바울의 창자같이 귀한 심복이 되었다. 무익한 사람에서 크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복음이 그렇게 사람을 바꿨다. 복음과 성령의 역사는 환경과 시간 공간을 초월한다. 바울은 골로새 지역교회를 섬기는 빌레몬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단 스물다섯구절로 구성된 엽서같은 편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나와 너에게 참으로 필요한 오네시모에게 자유의 표를 주길 바란다. 오네시모가 진 빚과 손해는 내가 배상하겠다". 바울의 삶은 복음전파라는 틀 속에서 체계적으로 섬세하게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너는 내게 진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과 사랑의 빚을 고려하여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유의 표를 주어라. 내게 주어진 권위로 이 일을 할 수 있으나 너의 허락 없이는 이일을 진행하지 않겠다. 너는 내가 권한 것 보다 더 이 일에 협조할 것을 믿는다. 당시 로마제국 전 지역에 노예제도는 탄탄한 사회체계로서 그 틀거리에 어느 누구도 균열을 낼 수 없었다. 제국의 기반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동일한 인간이 짐승취급을 당하는 현장을 보면서 아무도 그것이 잘못된 죄악임을 말하지 못했다. 디도서에서 나타나듯이 바울은 노예제도를 혁파하려는 기획을 한 일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안에서 노예에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신 그리스도의 종이 되도록 그의 전 인격, 전 존재를 바꾸었다. 노예인 오네시모를 자유인이며 해방자로 바꾼셈이다. 공동체의 리더였던 빌레몬은 큰 손해를 감수하고 바울 프로젝트에 자신의 뜻을 합했다. 빌레몬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각성된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 압비아와 아킵보는 골로새 교회의 사역자들이었다. 감옥안에서 교회된 오네시모는 보편교회인 골로새 교회의 도움속에서 자유인이 된다. 해방된 노예가 된 것이다. 로마제국의 기반이 되었던 노예제도는 감옥안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빌레몬서는 이 시대에도 큰 충격을 던진다. 예배당 밖 감옥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본질을 실천함으로서 보편교회가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실천한다. 바울의 복음사역은 충격적이다. 복음은 그렇게 세상에 큰 충격을 준다. 작금의 교회들은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람을 발생시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탄탄한 세속적 틀거리에 균열을 내는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는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속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충격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더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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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09
  • [김충만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다.
    인류와 세계의 역사를 BC(Before Christ, 주전/主前)와 AD(Anno Domini, 주후/主後)로 나눈 분은 누구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의 종교와 사상과 신념이 무엇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과 동서고금을 망라해서 온 인류는 지금 주후 2018년을 살고 있다. 무슨 말인가. 그가 비록 모슬렘이든, 공산주의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 2018년째 되는 해를 온 세상과 열방은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강생(降生)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야)가 역사적 부활을 이루신 날, 바로 그 부활절을 맞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가 만들어낸 허구(신화, Myth)가 아니다. 역사와 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인류를 죄와 사망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는지와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예수는 서구 기독교가 만들어낸 기독교의 아바타(Avatar)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신화(허구)적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단군처럼 신화(허구)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BC와 AD를 가르시면서 역사 한복판에 사람으로 오신 분이시다. 이 역사적 사실과 진리를 성경을 중심으로 좀 더 살펴보자. 복음서와 고린도전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한 세대가 가기 전에 기록되어 당시 기독교 세계(팔레스타인, 유럽, 아시아)에 널리 필사되어 읽혀지던 문서였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만일 앞서 얘기한 성경들이 예수가 사신 후 수 백년 혹은 천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면 역사적 신빙성(Credibility)은 그만큼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성경(복음서, 고린도전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지 불과 한 세대(30년)가 지난 바로 그 전후에 기록된다. 예를 들자면,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난지 불과 30년이 지난 게 지금 2018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당시 서울올림픽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있는 때라는 뜻이다. 그럼 거짓이나 과장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하거나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잖은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면 고린도전서 15장에 많게는 500여 형제가 지금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 아니고서야 어찌 밝은 대낮에 기독교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버젓이 기록하여 세상 앞에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라.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고 이스라엘 역시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바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기록(마 28:11-15, 눅23:52, 24:20-49)에서 로마와 로마 황제를 모독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록들이 공공연하게 복음서 안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사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이를 그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이는 사실이며 역사라는 얘기가 된다. 사람들이 자기가 믿지 않으면 사실인 것까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보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으니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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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6
  • [송시섭 교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넘어 위덴티티(WEdentity)로
    미투(Me too)가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누군가는 오래되고 뿌리 깊은 남성우위 문화의 붕괴라고 하고, 혹자는 이를 모든 권력관계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한다. 오랫동안 억압된 여성들의 한이 터져 나오는 도도한 흐름의 끝에는 보다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고 소망한다. 우리가 느끼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허탈감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 뿌리는 타락한 우리의 죄성(罪性)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죄성으로 모두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걸 보면 거기에는 우리의 본성이외의 또 다른 요소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리라. 여러 원인중 하나라도 찾을 수 있다면, 어둠을 모두 지울 수는 없으나 그 원인을 캐내어 작은 빛을 밝힐 수는 있지 않을까. 현재의 거대한 탁류의 근원에는 ‘정체성’(Identity)에 대한 혼란이 자리 잡고 있다. 근대이후 진리탐구의 시야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타인을 상실하고 자기만을 집중하는 근대인들은 결국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이 지옥’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자기중심의 시대에서는 타인이 객체화되고, 대상화되며, 결국 도구화되고 만다. 그곳에 폭력의 상대방, 사회적 약자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가 「타자의 추방」(Die Austreibung des Anderen)에서 말하듯이 우린 세계화, 정보화를 통해 모두가 같아져버린 사회 속에서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을 하고 있다. 팀 켈러 목사는 「답이 되는 기독교」(Making Sense of God)에서 우리에겐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으로 알려진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의 저자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의 정체성을 향한 세 가지 길을 인용하면서 현대인들은 ‘안을 보는 부류’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주적 질서를 믿지 않고, 자존감을 얻으려고 늘 경쟁하고 변화하는 유행에만 민감한 우리들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그 탈출구로서 ‘위를 보는 사람’을 제시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우리 말 ‘위’(上)와 같은 발음의 영어가 ‘위’(We)라는 사실이다. 이제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던 자존감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려야 한다. 자아의 압제를 벗어나 ‘우리’로의 여행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나만 보는 관점을 돌려 위를 바라보고, 내 옆의 이웃을 보게 되는 순간, 아이덴티티(Identity)로부터 위덴티티(WEdentity)로 한 걸음 나가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조어(造語)를 발견하곤 무릎을 내리쳤다. 깨달음의 눈을 떠 가장 가까운 아내와 남편을 바라보자.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오랜 정을 나눈 친구들, 그리고 매주 만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보자. 나를 벗어나 너를 발견하며, 나의 믿음이 아닌 우리의 고백을 다른 본문의 다양한 톤으로 읽어보자. 신경(信經, Creed)은 단조로운 음의 합성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역정을 담은 화음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의 눈앞에서 포스트모던이 무너지고 있다. 모두를 연결해줄 것처럼 외치던 신탁(神託)들은 결국 모두를 끊어놓고 말았다. 이제 나(I)만 외치던 주문에서, 주님의 마지막 기도처럼 우리도, 우리(We)가 가득 찬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우린 새로운 인식, 위덴티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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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3-12
  • [박철 목사]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
    요즘 신문을 잘 안 보게 된다. 답답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회면을 보아도, 정치면이나 경제면을 들여다보아도 그 어디에도 희망적인 소식은 없다. 그래도 이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기에, 수박겉핥기식이라도 읽지만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다. 민심이 흉흉하다. 살풍경한 기사거리로 넘쳐난다. 지금 세상은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궤도이탈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세상은 힘이 세고 가진 것이 많아야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은 죄를 짓고서라도 자기만, 자기 가족만 편히 살기위한 목적으로 온갖 수단과 편법이 등장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다. 지금 이 시대는 어른이 없다. 권위의 부재현상이 더욱 노골화되어 가고 있다. 서로 자기가 잘 났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상대방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언성을 높이다. 그렇게 사회문제를 잘 진단하면서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원망과 탓이 지배하는 사회이다.예수께서는 “너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선언하셨다.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도 한 줄기 빛을 이기지 못한다. 소금 한 주먹이면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 오늘의 교회가 제 구실을 다했으면 사회가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오늘의 한국교회는 소위 ‘교회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맘몬과 바벨이 혼재된 그릇된 신앙의 형태를 양산했다. 이 사회의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교회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타협했다. 부의 축척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했다. 바벨이라고 하는 종교권력이 독버섯처럼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렸다.예수의 영성을 따르지 않았다.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아무런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 채 겉만 화려하게 장식하여 프로그램화했다. 회칠한 무덤과 다름없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섬김의 영성을 한국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또 한국교회는 나눔의 영성을 가르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그런 실천이 부족했다. 교회만큼 부자가 있는가? 이 민족의 전도된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할 교회가 과도한 탐욕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듯하다.2차 세계대전 본 훼퍼가 당시의 나치즘을 제동장치가 고장 난 자동차에 비유했다면, 오늘 이 사회의 총체적 위기에 대하여 적어도 ‘내 탓이요’하고 나서야 할 집단이 바로 기독교, 교회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교회는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하여 총체적인 접근과 열린 시야를 갖고 대해야 한다. ‘새 포도즙은 새 가죽부대에’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교회는 개혁적이어야 한다. 과거 분단체제에서 경험한 고루한 사상과 현실안보라는 잣대로 소경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이, 그런 근시안적인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불의한 이 시대의 양심의 표상으로, 균형감각을 가진 건강한 대안세력으로 나서야 한다. 자신들의 집단적 도그마를 충족하고 과시하기 위한 실력 행사는 자제되어야 한다. 교회는 어떤 목적으로든 군중심리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루가12,15)라고 말씀하셨다. 한국교회가 물신의 마력에 힘입어 자신과 이웃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부정한 인간탐욕을 만들어 내는 ‘위험한 천국’의 허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교회는 겸손히 예수의 나눔과 사랑, 그리고 섬김의 정신을 본받아 소리 소문도 없이 흔적도 없이 이를 실천하면 한다. 광고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이 사회는 점진적 변화의 열매가 저절로 열리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18-02-26
  • [김광영 장로] 종교개혁 500, 그리고 그 너머
    지난 한해, 한국기독교계가 펼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는 곳곳에 넘쳤다. 그 역사성이나 의미의 중요성이야 주지의 사실이지만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교회개혁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또 많은 세미나와 강좌의 내용이 교회를 넘어 사회와 세계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가? 앞장서서 주도한 종교개혁사와 교회사를 전공한 분들과 신학자들이 열심히 강좌를 주도한데 비하면 그 영향이 미흡하다. 그 결과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이라 기대하였다. 사족을 달자면 강사 구성도 종교개혁 전공, 비전공 가리지 말고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종교개혁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역사는 교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파장은 세상의 변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500년 전에는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하여 신학은 물론 문화와 예술, 인문, 출판, 정치, 법률, 과학, 기술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변화를 주었고 르네상스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작은 면죄부 판매가 도화선이 되었지만 실제는 성직자가 특권으로 누린 타락한 교권에 대하여 말씀에 굶주린 일반 신도들의 호응과 도전, 또는 교권의 권위에 대하여 말씀의 권위 즉, 성경의 권위가 우위라는 생각이 진리라고 믿었기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파문된 루터나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의 역할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목표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도들도 말씀이라는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들이었고, 진리를 외칠 수 있는 입을 가진 자들이며, 그 진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권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사와 사제들에게만 제한된 라틴어 성경을, 보지도 읽지도 못해 진리에 굶주린 영혼들에게 읽혀야하는 필요를 채워준 일을 우선 하였다는 점이다. 루터 등 개혁가들이 라틴어에 능통하였다는 점과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성경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하였다. 때를 맞추어 개발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합작하여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 된 것도 한글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되었듯 그 때도 빠르게 유럽을 점령한 것이다. 또한 개혁자들이 변화의 시대를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경으로 깨우치고 교회의 틀을 바꾸는 것이었다. 교권이라는 특권을, 그리고 제 행사를 일반화 시키는 패러다임을 바꾸는데 있었다. 로마교회와 달리 예배의 식도 바꾸고 모국어로 성경을 함께 읽고 설교하는 것이다. 이를 위시하여 신앙적 인쇄물이 쉽게 전달되어 세상의 변화를 보는 눈이 열리게 하는 시대를 이룬 것이다. 이렇듯 한국개신교회는 수용 130여 년 역사에서 얼마나 개혁을 이루었는가? 물론 많은 영향도 결과도 있었지만,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선도하지 못하고 또 선한봉사를 많이 함에도 지탄을 받는다. 너무도 안타깝다. 그런데 지난 한해의 강좌와 세미나에서 보고 들은 바로는 위클리프, 후스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이력서와 고난을 넘는 무용담을 듣게 된 것과 몇 권의 책을 소개받아 역사적인 사실을 아는 것에 치중한 것만 같았다. 한국교회, 무엇을 개혁하자는 것인지, 또 국가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핵심을 찾기 어려웠다. 교인으로서 예배참석과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강좌를 끝맺음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우선 그 주제가 한국기독교의 교권은 건전한가? 또 미래 한국교회와 사회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키워드는 너무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각 교단의 총회를 비롯한 교권에 대한 논의도 필요했다. 장로교의 경우 총회나 노회는 목사, 장로의 구성비가 50:50인데 완장은 거의 목사가 점령한다. 또 만인제사장을 설명하고도, 제사장은 목사에 국한한다. 그리고 제 행사를 주일에 집중하는 것이 개혁인가를 묻지도 않았다. 교단과 연합기관의 대표는 목회에 지장을 준다. 엄밀히 말하면 이중직이다. 또한 이단종파나 타종교가 밀려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대책 논의나 토론의 비중은 약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났어도 계속 그 너머도 탐색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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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2-05
  • [장시웅 교수] 격려의 힘
    어린아이는 태어나 첫 발걸음을 떼며 부모의 격려와 응원 속에서 걸음마를 배우게 된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격려의 말 한마디에 큰 힘을 얻게 된다. 돌이켜보면 필자도 어려서부터 학창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지지와 격려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하는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응원해준 분이 있었는데 바로 나의 순장, 김00 목사님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1학년 때부터 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훈련받으며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전도할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 때, 내 마음 속에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도자의 삶을 사는 교수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순장님에게 말했더니, 참 좋은 생각이라고 좋아하며 격려해 주셨다. 나는 전도와 양육 훈련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전액장학금을 받았고, 순장님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내가 교수가 될 것임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리며 격려해 주었다. 내가 힘들어서 그 길을 포기하려할 때도 잘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격려해 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기에 마침내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대학원 시절, 나를 아껴주시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바로 나의 지도 교수님이셨던 정00 교수님이시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석사과정을 시작했고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기에 당시 마음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오직 박사를 빨리 마치고 논문이나 빨리 써서 졸업해야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나의 생각을 눈치 채신 교수님은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셨고 나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교수님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일을 맡기셨고 맡기신 일에 대해 성실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니 무척이나 좋아하시면서 나를 격려해 주셨다. 박사과정 가운데 많은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거나 보고서를 쓰는 등의 일은 스트레스 받고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완성했을 때마다 “잘했어”, “수고했어” 하시며 격려해 주신 말씀 한마디는 나의 마음의 모든 짐을 눈 녹듯 사라지게 했다. 그런 지도교수의 칭찬과 격려는 3년 만에 박사과정을 졸업할 수 있게 했고, 졸업 후에는 바로 교수로 임용되어 교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교수로 임용된 후, 내게는 새로운 격려자가 생겼는데 바로 동료 교수님들이시다. 임용 후 몇몇 교수님들과 기독교수회를 재건했고, 많은 선배 기독 교수님들이 총무로서 열심히 섬기는 것을 보시고 사랑으로 격려해 주셨던 것이 내 삶의 큰 에너지가 되었다. 또한 교수로서 교육하고 연구하는 삶을 살면서 딜레마에 빠져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친구 교수의 도움과 격려를 통해 이겨낼 수 있었다. 좋은 논문이 없으니 연구를 수행할 연구비를 딸 수 없고, 연구비가 없으니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를 할 수 없었다.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우울증까지 겪으며 탈출구가 없던 차에 친구와 함께 공동연구 과제를 계획하는데 참여하게 되었고, 한나와 같이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한 결과, 규모가 큰 공동연구 과제를 수주할 수 있었다. 친구 장 교수는 항상 나를 높이 평가해주었는데, 별로 능력도 없고 조금 성실한 것뿐인 나를 학교일도 잘할 수 있다고 추천했다. 학장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던 내게 ICT공대 학장 선거에 나가도록 도전하며 격려해 줬고, 결과적으로 학장에 당선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돌이켜보니 지난 날 나의 삶을 격려해 주셨던 많은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것 같아 참 감사하다. 그러한 격려들은 내 삶의 큰 에너지가 되었고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부족한 나에게 좋은 격려자들을 일마다 때마다 붙여 주셔서 지금까지 나의 삶을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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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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