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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법특강]칼빈과 교회법: 이혼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법을 수단으로 교회를 개혁했다. 개혁가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교회에서 목회하며 교회법을 작성했다. 바로 제네바교회법령(1561년)이다. 근데 전체 173개 조항 중 56개 조항이 결혼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혼에 관한 조항도 있다. 제네바교회는 특별히 이혼 조항을 통해 무엇을 개혁했을까? 첫째, 혼인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경우를 먼저 말한다. 결혼 직후 한쪽이 신체적으로 성적 불구임을 알았을 때다. 이로 인해 혼인을 영위할 수 없다고 불평하고, 고백과 조사를 통해 참되다고 판단되면 혼인은 무효로 선포되었다. 둘째, 이혼할 수 있는 경우를 규정하고 있다. 먼저 한쪽이 다른 쪽의 성적 부정을 충분한 증거와 함께 고소하고 이혼을 요구할 때다. 그 전에 상대방을 용서하도록 권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뜻을 거슬러 강제로 그렇게 이혼을 요구할 권한은 없다고 못 박았다. 더 나아가 성적 부정과 관련해서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되는 경우를 자세히 언급한다. 곧, 상대방의 명백한 과오로 인해 이 사람이 성적 부정을 저질렀다면, 그래서 성적 부정에 부부 둘 다 잘못이 있다고 판단될 때다. 또 한쪽이 이혼을 얻어낼 목적으로 기만하는 것이 밝혀지면 이혼은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네바교회법령은 이혼의 사유로 성적 부정만 말하고 있지 않다. 한쪽이 다른 쪽을 유기했을 때도 이혼을 허락했다. 남편이 고의가 아닌 무역 거래나 기타 이유로 여행을 가서 10년 이상 돌아오지 않을 때다. 또 고의로 유기하여 떠난 남편이 있을 때 아내는 부지런히 조사해서 그의 거처를 알아내어 6주 동안 돌아오라는 공지를 했음에도 오지 않을 때는 이혼을 허락했다. 상습적으로 아내를 버리고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는 남편이 있다면 두 번째는 구금 처벌에 처함과 동시에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그래도 또 아내를 버린다면 세 번째는 엄격하게 다루어서 그런 남편에게 매이지 않도록 이혼을 허용했다. 제네바교회법령의 이혼 규정은 칼빈의 동역자 개혁가 부써(1491-1551)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부써는 본래 수도사였으나 개혁가 루터를 만나 수도사 서약을 파기하고, 도망친 수녀 엘리자베트 질베라이젠과 혼인했다. 이후 혼인, 이혼, 독신 생활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부써는 혼인은 깨어져서는 안 되며, 이혼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혼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와 국가는 쌍방을 화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이혼을 허락하여 새로운 배우자와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없는 관계로부터 해방하여 의롭고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관계, 더 많이 사랑하면서 더 적게 죄를 짓는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단계라고 보았다. 이혼은 혼인의 본질과 목적인 부부의 사랑과 연합이 무너질 때 허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부써는 나쁜 혼인으로 고통받는 사람(대부분 여성)의 입장에서 이혼 문제를 다루었다. 나쁜 고통 중에 고통받는 삶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 아니며, 여기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재혼을 허락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당시 로마교회의 혼인법은 이혼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혼인을 쌍방의 언약이 아니라, 절대로 깰 수 없는 ‘성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식탁과 침대를 분리하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부써는 이는 사탄의 술수라고 말한다. 부써는 간음의 문제는 한쪽이 성적 관계를 원함에도 다른 쪽이 이를 거절하면 이는 그가 간음죄를 짓게 한다고 보았다. 이외에 성적 불구. 유기(버림). 추방 형벌 시, 만성적 정신이상, 불치의 전염병, 과도한 폭력, 이단으로 정죄될 때도 이혼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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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목회자칼럼]권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최근 한국교회는 정치적 사안 앞에서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를 신앙의 표현처럼 여기고, 또 다른 분들은 그 반대 입장을 정의로 주장하며 서로를 향한 비판과 정죄를 서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구도가 신앙의 성숙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처럼 오해되고, 교회 안에도 알게 모르게 ‘편 가르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흐름은 교회를 세상 속에서 고립시키고, 신앙 공동체를 좁은 울타리로 몰아넣는 ‘게토화 현상’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의 절대 권력 아래 살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고 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당대의 통치자가 선하거나 공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권세 너머에서 일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해석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악한 통치자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권세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순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성도에게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로마서 13장의 정신을 가장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한 대목입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권세자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불순종은 세상의 저항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은 권세자들을 향해 조롱이나 분노, 그리고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불순종으로 인해 오는 고난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은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이었고, 하나님 중심의 선택이었습니다. 성도는 때로 정권과 통치자의 문제점을 볼 수 있습니다. 정책의 한계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근본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세 위에서 일하고 계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자’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여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롬 13:4,6). 이 관점을 놓치면 교회는 정치적 논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고, 세상과 점점 더 멀어지는 신앙의 고립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다윗입니다. 그는 사울 왕의 부패와 불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왕을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다윗은 사울의 행위 너머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준이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판단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이 땅의 권세자들을 판단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준을 신앙의 잣대처럼 여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성도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권세보다 더 큰 권세는 하나님께 있다. 그러니 사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정치적 혼란이 큰 시대일수록 성도는 더 조용히, 그러나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시대를 다스리고 계시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더 큰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 주권을 신뢰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이며,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남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이 땅의 권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신앙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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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메이첸과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자 메이첸은 우리에게 낮설지 않다. 우리 비슷한 세대는 메이첸의 헬라어교본으로 헬라어를 공부했으니 목사나 신학도 가운데 메이첸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또 해방 이후 교회재건운동이 일어나고 교회가 분쟁 가운데 분열로 치닫게 될 때 한부선 선교사와 그를 따르는 교회를 ‘메첸파’라고 불렀으니 그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메첸’으로 말하기도 싫었던지 ‘메추리파’라고 비하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이라는 저명한 책을 썼다는 점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1881년 7월 28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출생한 존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은 11살 때 라틴어를, 14살 때 헬라어를 공부하고 존 홉킨스대학에서 고전어와 불어, 독일어, 비교언어학, 역사, 철학, 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02년 가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는 철학을 공부했고, 다시 독일로 유학하여 마르부르크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접하게 된다. 그가 마르부르크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였던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의 강의를 들었는데, 헤르만은 기독교의 본질을 예수의 도덕적 인격과 주관적 종교적 경험에서 찾고, 성경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역사적 사실들을 부정하거나 재해석하는 신학자였다. 이런 환경에서 초기 기독교, 신약, 조직신학 등을 공부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적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보게 되었고, 후일 자유주의와 싸우는 전투적인 보수주의 신학자가 된 것이다. 1906년 독일에서 귀국하여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1915년 5월에는 프린트스톤 신학교 정교수직에 취임했다. 1918년 제1차대전 막바지에 군복무를 자원하여 프랑스에서 약 1년간 복무하였고 다시 신학교로 복귀했다. 1921년에는 햄턴시드니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얻었다. 이 무렵 박형룡은 프린스톤에서 메이첸에게 배우게 된다. 즉 박형룡은 1923년 9월부터 1926년 5월까지 2년 8개월 간 프린스톤에서 수학하면서 신약성서 헬라어와 신약서론과 주해를 공부했다. 그런데 프린스톤 신학교가 1924년 1월의 어번선언을 전후하여 고등비평을 받아드리는 등 신학적으로 좌경화되자 메이첸은 프린스톤을 떠나 1929년 9월 25일자로 필라델피아에 새로운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 메이첸과 뜻을 같이했던 초대 교수들은 오스왈드 엘리스, 로버트 윌슨, 네드 스톤하우스, R. B. 카이퍼, 코넬리우스 반틸 등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고 6개월이 지난 1930년 3월에 출판한 책이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The Virgin Birth of Christ’이라는 책이었다. 그가 이런 이런 책을 출판한 것은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교회에 만연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응답이었다. 당시 유럽과 영미신학계에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과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이성주의와 과학적 방법론으로 비판하고 재해석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과 같은 가르침을 신화적이거나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 교사 혹은 위대한 인간으로 해석했다. 특히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이성적으로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신성도 부인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를 단순한 윤리체계로 간주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시대 풍조에 맞서 메이첸은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무죄 잉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거부하면 그의 십자가와 부활도 부인하게 되고 결국 기독교의 기본 교의 체계를 파괴하게 되기 때문에 메이첸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고 변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에 대한 메이첸의 관심은 이 책의 출판보다 30년 앞선 1912년부터 표명되었다. 1912년 메이첸은 4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하여 신약학자로서 공적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1편은 예수님과 바울과의 관계에 대한 논문이었고, 다른 3편은 예수의 처녀탄생에 관한 논문이었다. 그가 1923년에 출판한 ‘기독교와 자유주의 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도 동정녀 탄생은 중요한 주제였다. 그런데 이런 이전 연구를 토대로 동정녀 탄생이라는 특정 주제를 확장하고 심화하여 430쪽에 달하는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메이첸은 일생동안 자유주의와 싸웠고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1933년에는 장로교해외 독립선교부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피택되었고, 1936년에는 북장로교로부터 면직 판결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그를 지지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미국장로교를 조직했는데, 이 교회는 1939년 2월부터 정통장로교(OPC)로 개칭된다. 성경적 신앙을 지키기위해 고투했던 메이첸은 1937년 1월 1일 55세의 나이로 메이첸은 노스 다코다에서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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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12-19
  • [교회건축칼럼]재개발 재건축지역의 교회건축리스크 관리
    도시의 기능구조개선과 토지의 효율적 관리의 측면에서 도시재개발 사업이 여러곳에서 진행되고있다. 교회도 불가피하게 정부의 도시정비 정책에 의해 재개발지역 지정으로 많은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도 겪고있다 재개발, 재건축지역 지정후에 교회가 조합과 협상이나 보상등에서 잘 진행되어야 하나 여러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있으며 교회는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교회가 이경우 우선 고려해야 할 핵심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용지에 대한 우선 고려할 사항 대지의 정북방향에 위치한 도시시설 내용에 따라 건축시 일조권적용으로 건축물이 계단식으로 꺾여서 건축될 수 있으므로 이 점을 고려해야하며 대지의 경사도 유무에 따라 토목공사비증대가 발생된다. 교회가 조합에 반드시 요청해야할 내용은 토지를 평단하게 조성하여 제공해달라고 해야하며 이 경우 경사를 평탄하게 하기 위한 토목옹벽공사 범위를 조합측에 요청해야한다. 대지에 필수적인 오수오수처리 맨홀, 대지안전등은 가장 기초적인 협상 내용이다. 둘째, 인허가 진행의 내용 교회가 건축허가 신청시에 토지가 조합의 소유로 되기 때문에 교회는 조합의 대지사용승낙서로 허가 신청해야된다. 따라서 조합으로부터 대지사용승낙서를 받아야한다. 대지사용승낙사유에는 반드시 건축인허가, 지질조사, 사용승인 등의 인허가 명칭을 표기해야되며, 조합의 법인 인감증명서가 첨부되어야한다. 일부교회가 대지 사용승낙서를 나중에 요구하다보면 늦어지기도 하고 조합집행부가 변경되거나 할 경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셋째, 건축비 대출에 따른 사용승인의 내용 대부분 교회가 대출로 건축되어진다. 재개발 재건축지역의 경우 준공은 임시사용승인으로 처리된다. 그 이유는 등기부등본의 정리시점이 아파트 사용승인과 맞물려져있기때문이다. 아파트 단지가 본 승인이 나야 종교용지의 건축도 완전승인 처리되며 이때 건축물의 등기부등본이 완료된다. 대출의 경우 등기부등본 구비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건축비 정산등에 대출이 필요할 경우 아파트 준공이 나야 교회대출도 된다는점을 유념해야한다. 대부분 건축공사 완료되면 대출이 된다고 생각되나 실제와는 다르다. 넷째, 인프라 시설의 내용 재개발 재건축의 단지는 기존건물이 철거되어지므로 기존의 상하수도, 오수, 우수 맨홀, 전기, 가스 인입로의 확보가 되어야 교회건축에 문제가 없게 되는데 대부분 교회부지와 아파트단지가 연결되어있으므로 아파트 시공사로부터 인프라 시설에 협조가 필요하게된다. 결국 조합이 협조해야된다. 조합과 협상과정에서 마찰이 있거나 비협조적인 관계가 구축되어지면 교회는 실제 시공과정에서 조합의 비협조로 어려움을 겪게된다. 진입로 설치, 공사용전기, 용수등에 어려움이 생기며 인허가 과정에서도 협조사항이 생기게된다. 재개발 재건축의 조합과의 관계도 협력관계로 관리해야하며 결국 아파트 입주민이 교회의 전도 대상자들이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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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은혜의말씀]충성된 일꾼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기독교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선배를 만나면 본때가 생긴다. 눈이 열리고 가슴에 감동을 받고 깨달음의 은혜를 입으면 복음이 들어간다.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인생관이 바뀌고 가정이 변화되고 문화가 바뀌고 역사가 달라진다. 믿음, 소망, 사랑이 만나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생긴다. 구약성경에서는 갈렙이 멋지고 신약성경에서는 바나바가 귀하다.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그러한 리더십이 더욱 그립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는 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결국 사람 농사가 중요하고 인사가 만사이기 때문이다. 복 중에서도 인복이 중요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다.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갖다 놓은 사람으로, 향유옥합을 깨트리고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했다. 권위하는 자로서 권고, 위로, 상담을 잘하였다. 구약성경에서 모세의 엄마 요게벳이 셋째 아들을 낳고 아름다운 아이임을 알아보았듯이 바나바는 영안이 열려서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사도행전 11:23). 바나바처럼 교회 안에서 부정적인 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은 바라봄의 법칙이고, ‘눈’싸움이 중요하다. 현실에서 나쁜 것을 보지 않고 신령한 것을 보는 영안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바나바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하여 3종 세트가 갖추어진 사람이었다. 영성, 야성, 정성을 갖추었다. 바나바는 최초의 선교사이자 가장 성경적인 안디옥 교회의 최초의 담임목사였다. 그가 다소에 가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바울을 스카우트하고 신약교회 최고의 지도자로 길러냈다. 인재를 알아보고 발굴하고 길러내는 지도자였다. 어떤 사역을 계속 이어가려하면 다음 일꾼, 다음 지도자를 찾아서 세워야 된다. 또한 교회는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찾아서 전도해야 된다. 바나바는 관계중심적인 사람으로, 상처받고 실패하고 낙오된 자를 위로하고 일으켜준 사람이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고 바나바의 여동생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다. 그 마리아가 다락방을 오픈해서 120명이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하시고 초대교회가 탄생했다. 바나바 집안은 초대교회를 잉태한 인큐베이터 같은 역할을 하였다. 바나바 집안은 선교의 명가이다. 한 어머니, 요게벳 밑에서 대제사장 아론, 여선지 미리암, 지도자 모세가 태어났다. 라합 한 사람이 결단함으로 여리고가 진멸당할 때 온 집안이 구원 받았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늘과 실처럼 함께 나타난다. 사도바울의 마지막 목회서신인 디모데후서 4장에 가면 바울이 죽기 전에 바나바와 다투었던 일을 회고하는데, 화근이 되었던 마가를 ‘내게 유익한 자’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바나바는 선교 여행에 실패한 조카를 데리고 고향 구브로로 가서 결국에는 그를 멋지고 유익한 자로 회복시켰다. 말이 안 통하는 시대에 소통의 달인이 되고, 갈등과 불화가 만연한 시대에 피스메이커가 되고, 어디를 가든지 쓰러진 사람을 세우는 상담자가 되라. 바나바처럼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탁월한 일꾼이 되기를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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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시사칼럼]우주 삼국지의 승자는
    2024년 중국 국가항천국(CNSA)에서 발사한 달탐사선 창어(嫦娥) 6호는 달 뒷면 토양의 시료를 채취하여 귀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인류 최초로 달 후면 착륙에 성공했던 2019년(창어4호)에 이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게다가 2035년 완공을 목표로 잡은 ‘국제 달 과학연구기지(ILRS)’ 건설 준비를 위해 내년과 후년 두 차례 더 또 다른 창어호를 쏘아 올릴 예정이라 하니 그 기세가 더욱 놀랍습니다. 한국도 이에 질세라 우주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27일에는 누리호 4차 발사가 성공리에 이루어졌는데, 최초의 야간 발사요 최초의 민간 주도라는 점에서 의의가 컸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위성을 목표 궤도에 안착시키는 정도의 수준이라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인류 달착륙을 시도하려는 중국에 뒤처진 느낌을 지울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이 더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입니다. 지난 12월 18일 혼슈 서부 와카야마현에서 시도된 민간기업 ‘스페이스원’의 ‘카이로스 2호’ 발사 시도도 다시 실패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3월과 9월에 이미 두 차례 시도가 불발에 그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만 거듭하는 일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작사), Japan Aerospace Exploration Agency)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주도형에서 벗어나 2019년 당시 신생기업이었던 ‘인터스텔라 테크놀로지스’가 세 차례 발사를 성공함으로써 완전히 자유로운 민간주도형 우주개발시대를 먼저 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북아시아라는 좁은 지경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경쟁을 펼쳐온 한중일이 이제는 ‘우주 개발’이라는 새로운 경쟁체제를 구축하려 합니다. 자, 이 새로운 ‘우주삼국지’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흥미로운 점은 삼국이 발사체를 명명(命名)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언급한 중국의 ‘창어’는 우리말로는 상아(嫦娥) 또는 항아(姮娥)라고 하며 중국 전설에서 달에 산다는 여신의 이름입니다. 공산주의를 고수하며 유물론을 신봉하는 국가에서 공공연하게 신(神)을 표방하다니, 저들은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반면 일본은 민간 주도로 돌아서서는 ‘엡실론’이란 우주발사체를 운영하다가 얼마 전부터 ‘카이로스’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쏘아 올리고 있습니다. 둘 다 헬라어에서 유래했지만 전자는 알파벳 중 하나에 불과하나 후자는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의 막내아들로 알려진 ‘기회의 신’ 혹은 ‘시간의 신’에 해당합니다. 일본이야 원래가 ‘신화의 나라’라 해도 무방할 터이니 의아할 것 없지만 그래도 미지의 영역을 향해서라면 신적인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내심이 살짝 엿보이는 듯해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독특합니다. 첫 발사체는 우주발사기지가 있던 고흥의 나로도에서 이름을 따서 ‘나로호’라 불렀고, 이번에는 아마도 운율까지 고려해서인지 ‘누리호’가 되었습니다. 한국 특유의 해학미가 엿보이는 발상입니다. 과연 우주삼국지의 승자는 누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우주는 한중일에 미국과 EU까지 다 합쳐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합니다. 우주에는 1조 톤을 네 번 곱한 만큼의 물질이 있습니다. 관찰 가능한 우주에만도 1백만×1조×1조×1조×1조×1조×1조 개의 원소가 존재합니다. 별은 어떨까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우주가 여러분의 거실이라면 은하는 그곳에 있는 가구이고 별은 그 위에 앉은 먼지 알갱이들이다. 거대 성운군은 소파가 되고 거대 인력체는 TV 스크린에 불과하다.”(리처드 스웬슨, ‘과학으로 만난 하나님’, 195) 그런 별의 수를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시편 기자는 일찍이 노래했습니다(시 147:4). 1998년 우주왕복선을 탔던 존 글렌은 “이러한 창조물을 올려다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주의 경험으로 나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라는 인터뷰를 남긴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삼국지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민간기업도 정부기구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 승리하십니다. 날이 갈수록 무한한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고,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리를 마침내 우둔함에서 건져주시며, 지극히 높은 피난처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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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성서연구]아름다운 예수님, 아름다운 교회
    언젠가 모 교회에서 찬송가 478장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그날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세계가 가슴으로 밀려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국군 지프차를 타고 새벽 다섯 시에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 오래 기다려서 천지를 비롯한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던 태양을 바라보던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까운 남산의 마음까지 노랗게, 붉게 울긋불긋 물들이던 단풍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가슴을 채웠습니다. 또 부모와 온 세상이 담겨 있는 아기들의 눈동자는 얼마나 맑습니까? 그런데 그날 저는 새로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창조 세계가 아름답다면, 그것을 창조하신 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생각했습니다.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위대함이 배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가 말씀하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세상 창조에 함께하셨습니다. 그 분이 오셨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실로 아름답습니다. 병자, 가난한 자, 외로운 자, 귀신 들린 자, 심지어 죽은 자에게까지 예수님은 선하고 좋으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을 품고, 일으키고, 낫게 하고, 살리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답도다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하나님께서는 천사 하나를 보내신 게 아닙니다. 최상의 존재,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실로 아름답고, 최고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분이 세상에 오실 때의 모습은 참 초라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우신 성자께서 세상에 오셨는데, 왜 찬란한 영광의 모습이 아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도록 오셨을까요? 여기에 복음의 위대함과 신비가 있습니다. 외국의 한 성도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백만 대군이 변방을 지키고, 로마 황제 시저의 궁전에는 비파 소리 높고, 용사들이 은상을 자랑하던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베들레헴 언덕 위, 소와 양이 구유 안에 있는 여물을 찾고 있는 그곳에 내려 보내사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여셨다. 혁신은 항상 이렇게 임한다. 세상이 하나같이 혁신을 제왕과 군대에게 고대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가난한 갓난아기를 초가집에 내려 보내어 세상에 신기원을 여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분의 가장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초라한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장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셨기에 부활의 예수님도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부활 승천하셨고, 세상에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남기셨습니다. 이제는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아름다움의 뒤를 이어 성도와 교회의 삶을 통해 아름다움이 나타나야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에베소서 1장 22~23절을 봅니다. <22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어디서나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 계신 곳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야 할 그의 몸입니다. 겸손과 온유로, 참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을 본받아 살아감으로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가장 아름다운 예수님을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도 세상에 아름다움을 드러내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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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서임중칼럼]더불어 사는 세상이 그립다.
    지금의 여당이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확정했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정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더불어’라는 단어를 당명의 고유명사로 사용한 발상은 참 기발해 보였고, 그래서 박수를 보냈다. together, with, side by side, 이 단어들이 담아내는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더불어’는 단순히 함께 있는 상태를 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화롭게 존재하는 관계를 뜻한다.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연대감, 갈등보다 균형과 공존을 중시하는 조화, 나와 다른 존재도 품어내는 포용성, 개인보다 ‘우리’를 중심에 두는 공동체성, 이 모든 것이 ‘더불어’라는 말 속에 담겨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단어가 정치적 당명의 고유명사로 사용되었을 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더불어민주당의 모습을 보며, 화려한 수사보다 국민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더불어의 정치’가 더욱 그리워진다. 정치만 그런가. 교회도 다르지 않다. 한 해의 달력도 마지막 장이 서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처럼 저물어 간다. 창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오늘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는 시대를 살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은 메말라 가고, 광야의 먼지처럼 불평과 원망이 삶의 옷이 되어버렸다. 국내외 정세를 보면 그야말로 카오스, 혼돈의 연속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서 ‘더불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소리만 들려온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도 심상치 않다. 국내 정치 역시 여의도 1번지에서 ‘정치(政治)’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정치의 본래 의미는 온데간데없다. 교계도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도 영적 신음소리가 깊어지고 있다. 스스로 교회 지도자라 자처하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도, 정작 자신은 피해자인 듯 행동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런 혼돈이 깊어질 때마다 결국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대안은 없는가. 바울은 이 문제를 두고 이렇게 고백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4)” 바울의 고백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간다. 신학자 존 스토트(J. Stott)는 이 부분을 세 가지로 해석했다. 불신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사로잡혀 있고, 성숙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 ’(self-confidence)에 머물며, 성숙한 성도는 ‘자기 혐오’(self-disgust)와 ‘자기 절망’(self-despair)을 인식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호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토트는 결론적으로, 불신자나 거듭나지 못한 자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을 깨닫지 못하고, 그로 인해 탄식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런 이들이 공동체 안에 존재할 때 평안과 행복이 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의 고통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만삭되지 못해 난 자와 같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법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고 고백한 바울은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1:24)”의 삶을 연주했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한 삶은 하나님의 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왜 교회가 시끄러운가. 스토트의 해석에 따르면,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혐오’와 ‘자기 절망’이 없고, ‘자기 확신’을 넘어 불신자의 영역인 ‘자기 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고뇌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평안과 행복은 관심 밖이고, 행동 기준은 오직 ‘자기’가 된다. 그렇기에 아름다움과 행복이 연주될 수 없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일평생 고난과 역경,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결국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호흡에는 두 가지 은총이 있으니 마시기와 내뱉기가 그것이다. 전자는 억누르고 후자는 상쾌하게 해준다. 인생 또한 이처럼 기이하고도 멋지게 뒤섞여 짜여 있다. 하나님이 너를 압박하시면 그분께 감사하고, 너를 풀어주시면 다시 감사하라.” 얼마나 깊은 표현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의 삶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다. 성탄의 절기라 온 세상이 요란하지만, 정작 주님이 오실 때처럼 소외된 이들은 여전히 관심 밖에 있는 듯하다. 사람 살맛나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 그리운 이때에, 올해의 성탄절만큼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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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은혜의말씀]명가의 조건
    명품, 명가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본문의 내용처럼 3,4대까지 저주를 받는 가문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켜서 풍성히 받은 복이 수천 대까지 이어지는 명문대가가 있다. 복 있는 사람, 쓰임 받는 한 사람이 일가를 잘 이루면 믿음의 명가가 시작되는 것이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설립자 김용기 장로님의 “호”가 “일가”이다. 한 사람의 원칙과 고집이 조국이여 안심하라는 구국기도 동산을 만들고, 알도록 배우자며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웠다. 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며 농장을 일구어서 대한민국에 새마을운동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개척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케 된다. 한국의 전통적인 부자는 식솔이 많고, 오래오래 이어지고, 난리 때에 진가가 드러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전통적인 한옥의 구조는 사랑채보다 안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안방마님의 살림살이가 결정적이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누구보다 강하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부모님의 희생과 수고를 밑거름 삼아 자식들이 잘 되는 것이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이 옮겨져 바다로 간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가 바로 성도의 모습이다. 성도는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고통당할 때 오히려 향기가 진동한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긍휼사역을 하고 경천애인, 경건미인대칭이 되면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되니 선교대국을 이루게 된다. 유대인들이 강한 이유는 고생을 많이 하고 사면에 적이 있으나, 절기를 잘 지키고 자녀 교육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특정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파고, 차별화, 특성화, 전문화 과정을 거치면서 비교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독특함까지 갖출 때 비로소 명품이 된다. 신앙의 명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선대부터 쌓아 온 기도의 마일리지가 후대에도 이어지며 빛을 발하게 된다. 아이야의 축복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통해 이어진다. 외할머니 로이스가 가진 거짓이 없는 믿음이 어머니 유니게를 거쳐 아들 디모데에게로 흘러갔다. 부모세대는 잘 살았지만 자녀세대에 이르러 망하는 가정을 막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편 37:25에서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거나 걸식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수천 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죄를 짓는 자들은 삼, 사대에 망하는데 이는 삼, 사대 동안 벌을 받다 보면 결국 나중에는 복을 받을 씨가 말라 버리기 때문이다. 포도나무 한 그루가 심겨지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름다운 포도원을 이루었다. 45년 전에 부산의 변두리 구포, 덕천동에 심겨진 포도원교회가 어느새 화명성전, 화명 비전센터, 금곡 드림센터, 양산 미션센터, 아프리카 우간다 포도원교회로 큰 숲을 이루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품이 명품이 되고 소박한데서 대박이 나고 평범한 것이 비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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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 [교회법특강]종교개혁가 칼빈은 왜 엄격한 권징을 반대했을까?
    개혁가 칼빈(1509-1564)이 꿈꾼 교회는 권징(勸懲)을 시행하는 교회였다. 이를 위해 교회의 영적 정부인 치리회를 별도로 구성했다. 그리스도가 주신 명령(마태 18장)을 따라 교리와 생활에서 과오를 범할 때 처음에는 두 번까지 은밀하게 권하고 훈계하지만 계속 자기 죄를 고집할 경우 세 번째는 모든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출교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은 출교가 교회에 유용하며 필요하지만 엄격한 권징은 반대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재세례파를 논박하는 글을 썼다. 그는 왜 엄격한 권징을 반대했을까? 재세례파의 지도자 메노 시몬스(1492-1559)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그는 네덜란드 사람으로서 본래 교회의 신부였다. 개혁가들의 저술을 읽고 영향받지만 재세례파의 지도자가 된다.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자로 알려졌지만, 출교에 대한 입장은 아주 엄격하다. 그의 저술 『출교에 관한 문답』에서 이를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출교를 당해야 하는 사람을 마태복음 18장과 고린도전서 5장에 근거해서 공개적이고 부끄럽고 육체적인 생활을 좇는 사람, 이단적이고 부정한 교리에 빠진 사람(딛 3:10) 등은 교회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분리’할 것을 명령했다. 남편과 아내, 부모도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들도 교회에서 출교와 ‘분리’를 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들로부터 오염되기 때문이다. 다음을 보라: “어떤 사람이 이런 출교(명령)를 지키지 않았음에도 경건한 자라고 불린다면, 그 역시 징계를 받아야 하는가? 아무리 경건한 자라 하더라도 경건을 순종 속에서 보여야 할 것이고.....만약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성경에 금지된 것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공개적으로 반항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우리가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회중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출교 때문에 서로 분리할 수 있느냐? 아버지와 자식 간도 마찬가지인가? 먼저 징계의 법칙은 보편적이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아비와 자식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우리는 추방이 배교자의 거짓 교리와 육체로 더럽혀지는 것을 막아 준다고 말한다. 누구도 우리를 더럽힐 수 없기에 성령은 그들을 차단해서 우리가 그들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신다. 남편 또는 아내, 그리고 자녀를 그리스도 이상으로 사랑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에 칼빈은 『재세례파 논박』(1544년)에서 첫째,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말씀과 성례가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곳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으며,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둘째, 그러한 ‘오염된’ 교회에서 자기를 ‘분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지상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교회여서 “누구든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성례에 사악한 사람들과 함께 참여할 경우, 자신이 깨끗하고 청결한 양심을 갖기만 한다면 그들의 무리에 오염되지 않는다”고 했다.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를 예로 들며 “광신자들이 도입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참 신자는 교회의 악한 자들로 인하여 자신이 오염될 것이 두려워 무리로부터 자신을 분리했다고 읽지 않으며 도리어 자기가 나무란 잘못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고치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하였다(고전 5:1이하, 갈 5:4 이하). 칼빈은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분리’는 우리를 교만에 부풀게 하고 위선으로 미혹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버리게 하는 마귀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사보다 더 거룩한 모습을 갖고, 만약 그러한 자만으로 그리스도의 회중에서 우리를 분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마귀가 된다.” 이러한 칼빈의 교훈은 큰 의미가 있다. 권징이 사라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엄격하게 권징을 하는 것 역시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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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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