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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변함에서 전함으로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고(故) 이건희 회장은 파격적인 변화를 선언했고, 이 회장의 발언은 훗날 ‘혁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효과 때문인지, 혹은 시대의 흐름 때문인지 30년 전에 시작된 ‘변화’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지금은 태풍이 되어 몰아치고 있습니다. 시대 변화의 속도가 빠릅니다. 변화가 대세로 자리잡아 그 흐름을 타지 못하면 금방 도태될 것만 같습니다. 30년 전 대기업 회장은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했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해야 살 수 있다. 혁신만이 살아남을 길이다. 변하지 않으면 곧 죽음이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제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입니다. 세상은 이미 변화와 혁신의 중요성을 알고 하루, 분, 초 단위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지금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있으며, 이 시대 교회의 생존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일까요? ‘변화’는 사물의 성질, 모양, 상태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도 과거와 비교하면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상황, 세상이 인식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 등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의 변화 앞에 교회도 변화의 길을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변해야 할까요? 이불변응만변以不變應萬變 이란 말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가지 변화에 대응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매일 만가지 변화를 겪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 속도에 맞추기 위해 급급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의 수만은 변화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변하는 세상에 대응할 수 있는 것, 만가지 변화를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거나 혹은 변화를 또 다시 바꾸기보다는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인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는 이들에게 인생의 의미, 복음의 가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전해야 합니다. 만족이 없고, 변화를 위한 변화만 계속되는 현실에서 하루 하루 자족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구원의 감격으로 나와 이웃을 섬기는 삶이 어떤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사역인 ‘영혼구원’이야말로 세상의 변화에 가장 ‘혁신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 일을 소홀히 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교양을 쌓는 곳도, 친목 도모를 하는 곳도, 공부를 하는 곳도 아닙니다. 복음의 꽃을 피우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아는 성도들은 교회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첫째, 깨어있어야 합니다. 파수꾼은 경계하여 지키는 사람입니다. 지키는 사람이 졸거나 제대로 감시하지 않으면 경계는 무너지고 안전은 위협 받습니다. 이 시대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성도들은 깨어있으면서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세속화된 한국 교회가 더 이상의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깨어서 지켜야 합니다. 두 번째는 깨어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성도는 본인도 깨어있어야 하고 더불어 잠자고 있는 성도들도 깨워야합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잠을 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혹시, 최근에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내가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는 아닌지,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지키면서 동시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의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자 핵심입니다. “저는 죄인이라서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제대로 전하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을 그대로 올려드리기에 죄인임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안된다고 말할 때가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교회, 복음의 생명력이 흘러 넘쳐 성도의 삶으로 나타나는 교회, 그래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교회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이 복된 복음을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전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이심전심으로 하나가 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어 복음의 파수꾼으로 지키며 전하는 삶. 진정한 변화와 혁신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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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공주제일교회 양두현 장로와 그 후손들
    앞에서 공주지방 선교사였던 프랭크 윌리엄스(禹利岩, Frank Earl Williams)와 그의 아들 조지 윌리엄스(禹光福, George Zur Williams)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프랑크 윌리엄스, 곧 우리암 선교사에 의해 발전된 공주읍교회와 이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양두현(梁斗炫) 장로와 그 후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공주읍교회는 후일 공주제일교회로 불리게 되는데, 스크랜튼 선교사를 한강이남 지역 관리자로 임명하면서 공주지역 선교활동이 시작되었고, 1898년 스크랜튼에 이어 수원, 공주 지역 관리자로 임명된 스웨어러(W. C. Swearer, 1871-1916) 선교사는 1902년 가을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하여 초가 1동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린 것이 공주읍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교회가 남부지역 최초의 감리교회였다. 1903년에는 원산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맥길(W. B. McGill, 1859-1918)과 이용주 전도사가 전도활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샤프(R. A. Sharp, 1872-1906) 선교사가 공주로 오면서 선교활동이 확대된다. 즉 로버트 샤프는 명설학당을, 부인 엘레스 샤프는 명선학당을 설립했다. 그런데 샤프 선교사가 순회전도 여행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6년 3월 5일 급사했고, 대신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가 1906년 공주로 오게 되는데, 그는 이전 학교를 수습하여 영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 학교가 후일 공주 지역 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이 학교에서 수학한 이가 유관순 의사였다. 감리교 공주선교부 거점 교회로 출발한 공주읍교회는 건실하게 성장하였고, 안창호, 윤성렬 목사, 황인식 등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크게 기여한 인물이 양두현, 지누두 부부였다. 이들은 우리암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공주제일교회 출석하며 믿음으로 살았는데, 새벽기도회 참석, 십일조 헌금 등 당시 성도들에게 본을 보았고, 교회와 이웃에게 사랑과 선행을 행하며 교회를 섬겨 공주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드려 전도사업을 전개하게 했고 교회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를 잘 아는 우리암 선교사는 양두현, 지누두 부부가 회심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는 과정, 그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토지를 기증하려는 의지 등에 대해 선교사들이 발간하던 영문 잡지 Korea Mission Field 1924년 12월호(254-5쪽)에 소상하게 소개했다. 양두현은 1938년(소화 13년)에는 전답 20,963평을 교회에 기증했다. 당시로 볼 때 엄청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한 것이다. 이때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명의로 포상장을 수여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포상장 공주지방 공주읍교회 양두현. 우인(右人)이 자기의 소유 재산인 전답 20,963평을 본 교회 천국사업에 봉헌하였음으로 그 봉사적 성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자에 은제(銀製)상패 1개를 수여함. 소화13년(주후1938)년 10월 1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사 양주삼.” 이런 헌신을 고려하여 공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서만철 박사는, “양두현은 공주지역의 대지주로서 공주감리교회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했다. 양두현 장로의 아들이 양재순(梁載淳, 1901-1998) 박사인데, 공주 영명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하고 1922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리학(文理學科)에서 1년 간 수학한 후 1923년 세브란스 의전에 다시 입학하여 1925년 졸업과 동시에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함흥 자혜병원, 군산 구암병원 등에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1927년에는 공주에서 공제(公濟)의원을 개업했다. 공주에서의 제1호 양의사였다. 이때부터 70여 년간 인술을 베풀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특히 그는 선대에 이어 공주읍교회를 섬겼고, 1958년에는 장로로 장립 받아 봉사했다. 그는 공주제일교회를 위해서도 재산을 헌납했지만 특히 1980년에는 공주시 계룡면 화은리에 화은감리교회를 사비로 신축하고 그 교회와 인근 주민들에게 20여 년 간 무료진료를 하기도 했다. 우리암 선교사가 194년 일제에 의해 한국을 떠나게 되었을 때 “영명학교는 양재순, 당신이 맡아야 해”라고 하여 양재순 박사는 1940년부터는 모교인 영명학교(영명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봉사했고, 이보다 앞서 1946년에는 충청남도보건후생국장을 맡아 도정에도 관여한 바 있다. 양재순 박사의 넷째 아들이 부산교계에 널리 알려진 양덕호(梁德鎬, 1934- ) 박사인데,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서 3년간 수학 한 후 선대의 유지를 따라 의사가 되고자하여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 후 장기려 박사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외과과장으로 근무하며 여러 의료기관 사회봉사기관에서 활동했다. 1982년에는 부산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어 3대째 장로로 주님을 섬겼다. 특히 그는 장기려 박사가 시작한 부산 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이사로 25년간 봉사했다. 양덕호 장로는 선친의 공제의원과 그 주변 땅을 공주제일교회에 헌납하여 교회의 재건축을 가능하게 했다. 양덕호 박사의 아들이 양한광 박사인데, 서울의대 출신인 그는 위암수술의 권위자로 서울대 암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지가 선정한 세계 50대 의사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암 선교사로부터 받은 복음이 양두원- 양재순- 양덕호- 양한광으로 이어지며 인술을 더하여 우리 시대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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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3-25
  • [성서연구] 하나님의 긍휼이 머무는 곳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수태고지를 받았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마리아는 늙은 친척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 중에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50) 여기 긍휼이라 번역된 단어는 <엘레오스>로서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머무는 자리가 어디일까요? 마리아는 두려워하는 자에게 임한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이 말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인사했을 때, 그녀에게는 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은 < 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눅 1:30)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온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모친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큰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임할 때 마리아는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움과 은혜의 상관관계를 알게 됩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하고, 은혜가 임할 때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두려워했을까요?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게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의 평범한 처녀였습니다.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났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 과정을 통해서 마리아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은 두려워하는 자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부심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이 교만한 자들입니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입니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는 흩으십니다. 권세 있다고 자부하는 자는 내리치십니다. 부자를 빈손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 즉 비천하고 주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답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면 모르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비록 좀 배웠고, 가졌고, 힘이 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버러지와 같을 뿐임을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상실했습니다. 겁 없이 설쳐댑니다. 교단 일을 하는 이들은 대개 어느 정도 목회나 삶에 성공한 분들이라 여겨지는데, 그래서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냄새나는 거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보기 민망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에 힘을 주는 이들은 목회자, 중직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연약함 때문에 떠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강한 자보다 차라리 약한 자, 높은 자보다 차라리 낮은 자, 가진 자보다 차라리 부족한 자가 되는 게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세상에 오신 이유, 십자가에까지 낮아지신 이유는 낮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높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려 했다면 굳이 그렇게 낮은 자리에까지 오지 않으셔도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까지 내려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높이에 있던 행악자가 긍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억합시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이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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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소강석 칼럼] 우리들만의 교회는 아니었는가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있다. 교수신문에서 지난해를 정리한 사자성어였는데 이익을 보고 올바름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대표 지용근)의 ‘한국교회 명목상 교인 실태 및 신앙 의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접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최근 10년간 20~40대 개신교인 절반가량이 감소됐다는 것이다. 나부터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것 같다. 우리 교회는 청년부도 건재할 뿐 아니라 30~40대가 주를 이루고 코로나 이후에도 상승세를 타고 있는 교회이기에 전혀 감지를 못했는데 통계가 그렇게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그랬을까. ‘교회 3.0’ 저자 닐 콜은 ‘종교 없음’이라는 결론을 냄으로써 미래 시대일수록 인간이 종교와 멀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독일의 신학자 한스 큉은 미래엔 종교적 영성은 목말라 하지만 제도적인 교회를 향해서는 거부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일찍부터 조망했다. 그러나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20~40대 지성인들이 한국교회를 외면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우리가 정말 반성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현상은 코로나19 기간을 거치면서 더 그랬다고 한다. ‘정말 우리만의 교회는 아니었는가.’ 한국교회는 그간 엄청난 비판을 받아왔다. 그 비판 중에 ‘네오마르크시즘’ 사상으로 인한 전략적 공격도 있었지만 더 큰 것은 ‘그들만의 교회’, ‘그들만의 카르텔’을 이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우리가 복음을 잘못 전했던지 아니면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지가 그 이유일 것이다. 역사의 거울을 다시 한번 볼 필요도 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교황 클레멘트 6세는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모여서 믿음으로 흑사병을 이기고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당이 집단 감염의 진원이 되어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희화화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가도록 놔두신단 말인가. 왜 죄 없는 어린아이가 저렇게 죽어가고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도 죽게 놔둔단 말인가.’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에 보면 이렇게 신을 우롱하고 교회를 희화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 인문주의와 르네상스가 태동하게 됐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달랐다. 먼저 구빈원을 만들어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그리고 흑사병이 왔을 때 구빈원 자체가 격리시설로 사용됐다. 구빈원뿐 아니라 노약자와 일반 성도들은 교회로 오지 말고 집에 머물라 했다. 대신 성직자들이 찾아가 예배를 드려 주도록 했다. 소수이긴 하지만 현장예배는 끝까지 지켰다. 이처럼 칼뱅은 예배의 존엄성을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했다. 그래서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은 제네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다. 일대일 영혼 구원도 중요하다. 개교회 성장도 중요하다. 나 역시 내 교회라고 하는 우물에 갇혀 이렇게까지 된 줄은 몰랐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한국교회가 사회를 따듯한 사랑으로 감싸는 ‘선샤인처치’(Sunshine Church)가 되고 ‘허들링처치’(Huddling Church)가 돼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결과 아닌가. 이렇게 되면 우리도 결국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유럽 교회를 따라갈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복음을 잘못 전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견리망의처럼 우리만의 교회를 이루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 모두 다시 일어나 바른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자. 교회는 진리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실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다시 선샤인처치, 허들링처치로 돌아가자. 젊은이들에게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자. 차갑게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에 햇살을 비추고 허들링을 하자. 우리만의 교회가 아닌 소통과 공감, 사랑과 섬김의 교회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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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시사칼럼]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요즘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책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입니다. 화제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 2023)는 교양서적으로서는 최초로(그것도 철학책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망라하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전혀 팔릴 것 같지 않아 출판사에서 들어온 제의조차 처음에는 거절했다는 저자(강용수 고려대 교수,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활동할 당시에도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음은 물론 학계에서는 거의 따돌림을 당하다시피했던 보통은 염세주의자로 잘 알려진 이 철학자가 이토록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실 쇼펜하우어의 가장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헤겔의 낭만주의적 이성주의 철학에 반기를 들고 발표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입니다(발간 후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실망함). 하지만 21세기 한국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인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흔에..”, 36).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71).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확실하다”(201). 쇼펜하우어 하면 동시대를 살았고 성향 자체도 일견 유사해 보이는 또 한 사람의 철학자가 생각납니다. 쇼펜하우어보다 25년 늦게 태어나서 5년 먼저 사망한 덴마크의 사상가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입니다. 두 사람은 당대 주류 중의 주류였던 헤겔에 대한 반감과 근대 과학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 같은 측면에서, 그리고 ‘고통’(쇼펜하우어)과 “불안”(키르케고르) 같은 실존적인 개념을 자기 철학의 핵심 키워드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작 키르케고르는 죽기 얼마 전에야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니 의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의 영향력이 사후에 오히려 더 크게 발휘되었다는 점도 비슷한데, 쇼펜하우어는 니체와 러셀과 비트겐쉬타인 같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및 융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나아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이나 바그너 같은 음악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출발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현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폴 틸리히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득세하는 반면 키르케고르는 왜 여전히 인기가 별로 없을까요? 아마도 인간은 누구든지 『절망에 이르는 병』(1849)을 면할 길이 없는데,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과 『공포와 전율(두려움과 떨림)』(1843)에서부터 모색해 오던, 철학적 이성의 길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길에서 키르케고르는 인생과 철학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시대적 흐름 속에 갇혔습니다. 20세기 말에 선각자로 자처하던 인물들이 이른바 “제3의 길”(Anthony Giddens)을 제창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 ‘제4의 길’이나 ‘제5의 길’이라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강원대의 이현훈 교수 같은 분은 2년 전『예정된 미래: 네 가지 뉴노멀과 제4의 길』(파지트)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 인류는 “디지털사회”, “노인사회”, “양극화사회”, “홀로세(holocene)”를 극복할 수 있는 ‘제4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점차 일상이 되어가는 전쟁과 기후변화와 환경재앙과 국내적 정쟁 등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답답함과 우울함에서 오는 압박을 견뎌나가야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속이라도 시원하게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거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일갈하는 ‘꼰대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 대중들은 “자기계발서의 거짓 위로에 지쳤는데 철학책에 위로 받았다” 혹은 “거침없는 팩폭에 감동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열광하는 겁니다. 하지만 실존적인 위기에 직면한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선은 바로 인간의 실존 가운데로 직접 뛰어드신 하나님의 실존인 그리스도이며, 그를 믿는 신앙만이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사실은 핵심을 더 찌르지 않았습니까?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많이 묵상할 이 계절에, 대중들에게는 쇼펜하우어보다는 차라리 키르케고르가 이제는 더 가까이 다가서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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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은혜의말씀] 아름다운 소식 (왕하 7:3-10)
    사마리아성에 극심한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아람 왕 벤하닷과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바닥난 성내는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7:1) 하나님의 말씀이 내일은 기적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실 때 놀라운 은혜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의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기근과 굶주림으로 사람을 삶아먹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지옥과도 같았던 사마리아성의 상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은 아닐까요?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의 욕심과 욕망,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지마는 끝내 공허함과, 굶주림, 채우지 못하는 쾌락 앞에,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습니다. 내일이면 사마리아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복된 소식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마리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운 소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성안은 굶주림과 기근으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지만, 이 네 명의 나환자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보고 체험하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기쁨을 거저 가서 보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그 은혜를 전할 수 있습니다. 2. 나만 누리는 것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환자들은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자신들만 누리고 침묵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지 않는 침묵은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 혼자만 누리고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나를 위한 구원에서 남을 위한 구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3.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지금도 지옥을 향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아름다운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길 원하십니다. 나를 통해 이 생명의 복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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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위드애] 장애인과 일
    [장애인식개선칼럼 - 위드애(with 愛)]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일과 인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발을 만드는 사람은 ‘신발을 만든다’는 ‘행동’을 통해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공공에 도움이 된다는 감각’, 즉 ‘공헌감’을 느낌으로써 ‘열등감을 줄이’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용기를 낸다면 인간관계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인간관계 안에 들어가면 마찰을 피할 수 없겠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관계 안에 들어가야 사는 기쁨을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다.” 사람에게 ‘공헌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합니다. 열등감을 줄이고 자신감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일이 중요합니다. 일이란 그저 밥벌이 수단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일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장애인도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와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 일하는 장애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 세상이 생산성을 내세워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장애인의무고용제'를 마련하여 일정 비율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있지만, 많은 기업이 장애인 고용 의무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누군 ‘고용 부담금’을 더 높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기업들이 장애인을 더 고용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장애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할까요? 현실이 어떻든 어떤 모양으로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지런히 계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잘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아 하면서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고 공헌감도 느끼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찾아 나가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생산성을 따져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기기를 잘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것이 아예 없어도 좋습니다. 그저 오늘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 곁에 함께하는 것, 곁의 사람이 되는 것, 저는 그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았나... 그런 생각하면 한편으론 주눅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랬지요, 사람은 누구나 그 존재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고 가치 있습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 고맙고 행복합니다. 더욱 용기를 내어 사람들 사이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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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목회자칼럼] 렌탈 인생의 마감 시한
    미국인들의 인생에 대해 정의한 명제 중에 “렌탈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미국인만이 아니라 현대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갚아야 할 할부금과 대여료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가계부채도 결국은 빌린 것이다. 불교는 생의 윤회를 말한다. 이것은 현재의 삶은 과거의 자신이 뿌린 씨앗에 대한 열매이고, 미래에 주어질 삶을 잠시 빌려서 사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교는 삶의 근원이 부모라고 말한다. 이것은 조상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지금의 내가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지금 나의 삶이 후손들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기에 실상은 후손들의 삶을 빌리는 것과 같은 의미다.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삶이 마감되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잠시 동안만 허락된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내가 영위하는 것이다. 흘러가는 인생이 아니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인들의 권력도, 기업 총수의 권한도, 선생님의 권위도, 법관들의 위엄도 실상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대상자들로부터 위임받은 것, 즉 부여받은, 빌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객전도의 모습으로 채무자가 채권자를 윽박지르는 형국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불쌍하기 그지없다. 총선의 정국에서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지도자들에게로 향하는 아주 작은 마음으로의 인정이 있다면 사실 그것도 신앙을 가진 자들과 일반적 양식을 가진 자들에 의해 주어진 것, 즉 빌려진 것이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절대 권력과 능력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성직자들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지도자들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처음부터 내 것은 없었는데 착각하며 산 것은 아닐까? 지위와 자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잠시 맡겨준 사명의 자리다. 때가 차면 그 짐과 무게 그리고 아주 작은 권위를 다시 돌려줘야 한다. 채무변제에는 정해진 시한이 있기에 빌린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 자원해서 돌려주지 않으면 강제로 차압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빌린 것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라면 마감 시한을 선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 때 유익과 영향을 남겨야 한다. 또한 빌린 것에는 본질에 대한 댓가 즉 이자가 부과된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을 때는 파생과 소멸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끝이 나지만 빌린 것에는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도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끝날 때 계산의 시간이 찾아온다. 내 인생의 유예기간은 언제까지일까? 부채와 이자를 갚을 만큼의 삶의 흔적은 가졌는가? LIFE,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것을 남용하거나 탕진해서도 안 된다.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여길 때 그것의 진정한 가치가 나타난다. 부활주일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사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부산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함께 달려가기를 소원해 본다. 나의 인생이 마감되고 내가 가진 자리의 유한성이 소멸되기 전에 허락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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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우광복(禹光福, George Zur Williams) 의사
    앞에서 우리암 선교사에 대해 소개했는데 사실은 그의 아들 조지 윌리암스, 곧 한국이름 우광복(禹光福)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우광복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른 잘못된 정보가 퍼져 있고, 그의 활동이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잘 못 알려진 점들도 있기 때문에 바로 잡을 의무도 있다. 우광복은 우리암으로 불린 프랭크 윌리암스(Frank Earl Cranston Williams)의 장남으로 1907년 4월 7일 제물포항 부둣가 언덕에 있는 선교사 집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선교지는 공주였으나 아기를 출산하거나 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 곳이 인천이기에 인천의 선교사집에서 출생한 것이다. 얼마 후 공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다. 그의 한국어 이름이 ‘광복(光福)’인데, ‘광복(光復)’으로 오인하여 그의 아버지가 조선이 광복을 꿈꾸며 작명했다고 말하지만 아들이 출생한 1907년 당시는 일제의 조선 병탄이전이었으므로 광복을 꿈꾸며 작명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아버지가 세운 공주 영명학교에서 공부하고 15살 때 미국으로 가 콜로라도의 덴버에서 생활하던 조부모의 보호 아래 고등학교를 마치고 덴버대학에 입학했다. 의가가 되기 원했던 그는 화학을 전공하였고, 물리학이나 동물학도 공부했다. 1928년에는 덴버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까지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고, 덴버와 메리랜드 주 리치몬드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해군 군의관이 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승선한 군함이 인천에 정박하게 되어 그는 다시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해방 이후 미군정이 통치할 때 우광복 의사는 군정 책임자인 하지(John Reed Hodge, 1893-2963) 사령관의 특별 보좌관으로 발탁된다. 군의관(중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 가운데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광복 의사는 하지 중장의 통역은 물론, 미 군정기 인사 및 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그가 특별보좌관으로 일한 기간은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에 의하면 약 3개월 정도였다고 하지만 공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서만철 박사에 의하면 약 5개월 정도였는데, 아놀드 군정장관의 요청에 따라 군정에 참여하고 후에 한국 사회에 기여하게 되는 여러 사람을 추천하게 되었고, 초기 미 군정기 정치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즉 미군정의 한국인 관료구성과 이승만의 귀국에도 영향을 발휘한 것이다. 예컨대, 영명학교 출신으로 미국 유학을 미치고 귀국한 조병옥 박사는 치안 책임자인 경무부장으로, 영명학교 교사였던 이묘묵은 하지의 통역관으로, 황인식은 초대 충남도지사로 추천했다. 이런 활동으로 초기 미군정에서 일한 한국인 50명 중 35인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정병준 교수에 의하면 우광복은 주로 선교사 인맥을 통해 두 달 동안에 한국인 관리 7만5천명을 선발하게 했다고 말한다. 서만철 박사에 의하면 우광복은 이승만의 귀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중도좌파로 인식되던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공화국(人共)을 미군정에서 부인하게 함으로서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공화국으로 수립하는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 간 우광복은 버지니아의과대학 교수와 보건연구기관장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큰 의학적 업적은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밝혀낸 것이다. 자신도 흡연을 했는데 자신의 연구 결과를 보고 흡연을 중단했다고 한다. 버지니아의대에서 암연구를 계속했던 우광복은 그 후 메릴랜드주의 베데스다로 가서 국립보건연구원(NIH)의 요청으로 암연구센터를 세웠다. 이 기간 최대의 업적은 살아있는 암세포에서 대사과정의 자외선 흡수를 미세하게 측정할 수 있는 비디오카메라 현미경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다. 또 그는 버지니아종양의과대학을 설립하여 교수와 총장으로 일했고, 그 후에는 샌프란시스커의 태평양의료센터에 새로운 건강연구기관인 의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런 연구 기관의 설립 외에도 의학적 연구를 통한 기여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출생하여 한국과 미국에서의 긴 봉사의 여정을 마치고 1994년 11월 22일 87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티뷰론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자신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 일부는 누이동생 올리브가 묻혀 있는 공주 영명동산의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나머지 유골은 아버지가 묻혀 있는 글린데일에 있는 포레스트 론 기념공원 군인 묘지 자유의 뜰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이 글의 중요 정보는 기독교역사연구소의 ‘내한 선교사 사전’과 서만철의 ‘우리암과 우광복 이야기’에서 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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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3-04
  • [서임중칼럼] 망원경과 현미경 목회
    나의 목회병법 10가지 가운데 망원경 목회병법과 현미경 목회병법이 있다. 문자 그대로 멀리 보는 것과 가까이 보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안동을 떠나 포항으로 임지를 옮기던 날, 예배당 마당을 가득 메우고 들어선 성도들의 얼굴에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헤어짐의 아픔과 슬픔들, 아니 절박하고 처절하다는 표현이 맞을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들……. 그날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아니 결코 지울 수 없는 목회 여정 중의 한 날이었다. 그날 새삼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8년을 섬겨오던 교인들의 실상을 그날에야 더욱 확연히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황은 달랐지만, 포항중앙교회를 떠날 때도 그랬다. 함께 울고 웃던 교인들의 실상을 그날에야 제대로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던 교인들은 무덤덤한 표정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항상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교인들은 저만치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제서야 깨달음이 왔다. 가까이 있는 것을 재대로 볼 수 있는 현미경이 내게 없었고, 전체를 볼 수 있는 망원경이 내게 없었다는 것. 서 목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듯했던 사람들은 저만큼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이었고, 서 목사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다는 듯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던 교인들은 여기저기 서서 울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주저앉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소리 없는 울음을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만감이 교차하던 그날, 아직도 그날은 멀어지지도 지워지지도 않고 내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이 후로 나의 목회병법에 망원경 목회와 현미경 목회를 추가했다. 먼 곳만 보는 사람은 가까운 곳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가까운 곳만 보는 사람은 먼 곳에 있는 적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경영리더십의 교훈이 생각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원경과 현미경 가운데 하나만을 갖고 있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 성공을 하고 한 가지만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목회 현장 또한 다를 바가 없다. “곤충의 눈으로 발밑을 보고, 매의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라.”는 교훈도 있다. 곤충의 눈은 현미경과 같고 매의 눈은 망원경과 같다. 곤충의 눈으로는 가까운 곳 나의 발밑을 보아야 하고, 동시에 매의 눈으로 먼 곳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나무와 숲을 모두 본다는 뜻이다. 기업경영이나 정치 현장에서도 가까운 곳만 보고 있어서는 트렌드의 변화나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고, 반대로 먼 곳만 보고 있어서는 내부의 균열을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교훈한다. 그래서 성공자의 삶에는 반드시 곤충의 눈과 매의 눈을 확보한 시야가 있다. 1982년에 발매된 조용필 4집 <못 찾겠다 꾀꼬리>에 ‘비련’이라는 제목이 있다. 당시 매니저 최동규 씨는 이와 관련된 감동 이야기를 남겼다. <4집 발매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시골의 한 요양병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14살 지적 장애가 있는 소녀가 한 번도 감정을 보이지 않고 있었는데 비련이라는 노래를 듣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원하는 돈을 드릴 테니 직접 와서 노래를 불러줄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는 것이다. 행사 하나만 나가도 엄청난 돈을 받던 가수왕 조용필 씨는 예정된 4개의 행사를 모두 취소하고 위약금까지 물어가며 그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지적 장애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불러주었다. 아무 표정도 없던 아이가 펑펑 울었고 부모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노래를 마친 조용필은 소녀를 안아주며 사인한 CD를 선물했다. 부모가 사례를 한다고 하자 조용필은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돈보다, 또 앞으로 벌게 될 돈보다 더 비쌉니다.”라는 말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순을 넘기면서도 국민가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조용필 씨의 현미경 철학을 통해 그의 망원경 삶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은퇴 10년이 되었다. 함께 했던 많은 동역자들이 다시금 생각난다. 함께 울고 웃으면서 교회를 섬겼던 교인들이 새삼 조명된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통한 배신과 아픔, 가슴 치며 통곡했던 시간이 있었다. 가장 사랑하고 섬기고 돌보았던 사람들의 외면을 경험하면서 쓰라린 고통으로 잠 못 이룬 날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그들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했다. 그것은 망원경으로 보고자 하는 나의 인간관계관의 실천이었다. 조금은 멀리서 보는 것이 아름답기에 그들을 향한 내 마음을 아름답게 다듬어 가고 싶은 관계개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곁에서 함께 웃고 울면서 이해하고 관용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동행과 동역을 경험하면서 오늘도 하루를 연다. 그 아름다운 관계가 부서지지 않기 위해 현미경으로 보는 인간관계가 일상이 되었다. 멀어져간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싶어서 망원경으로 보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삶을 이어가고 싶어서 현미경으로 본다. 걸어나온 내 인생의 모든 삶의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본다. 그리고 이즈음 새삼 삶의 여정에 正視, 正思, 正心, 正言, 正道, 正行을 다짐한다. 동시에 유다서 11~13절 말씀을 묵상한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인간관계는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나를 지키시고 돌아보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님처럼 그렇게 살아간다면 너와 나의 관계는 더욱더 아름답고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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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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