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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인생을 연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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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시편을 보면, 대적이 그물을 치고 웅덩이를 파고 함정을 만들어서 억울하게 공격할 때에도 다윗은 곡소리를 내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불렀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 얼굴이 일그러지기 쉬운데 어떤 이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징징거리기 마련인 그 때에 오히려 노래를 흥얼거린다.
다윗은 계속 공격을 당하면서도 마음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확정하고 확정하였다. 마음에서부터 병을 만들지 않고 마음의 쓴 뿌리를 제거하고 마음의 강퍅함을 면하고 마음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마음의 풍금을 연주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하지 말고 네 마음을 튜닝하라.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어라. 주님께 맞춘 채널을 고정하라. 데시벨을 높여라. 파장을 보내라.
무반응, 무대책,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져있지 말고 네 마음을 표현하라. 무엇인가 소리를 내라. 차든지 뜨겁든지 반응하라. 묻든지 따지든지 대화하라. 비전, 도전, 응전하라. 죽네 사네 하지 말고 추임새라도 넣어라. 마음의 풍악을 울려라. 나팔을 불어라. 주님은 우리가 찬송을 하도록 만드셨다. 절대 음감을 깨워라. 나만의 음색처럼, 내 정체성을 찾아서 내 속에 장착된 하나님의 영광을 깨워라. 비파와 수금을 연주함으로 주변에 있는 악기들을 소리 나게 하라. 불협화음을 내지 말고 옆에 있는 가족, 성도들과 동역하며 아름다운 동행을 하라.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타파하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다. 야엘은 마치 아침 해가 힘 있게 솟아오름과 같았다. 어둠의 자식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거지를 하지 마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노래와 연주는 사람의 눈을 열어 선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청음이 능력이다. 득음이 음악의 시작이다. 듣는 귀가 음악적인 재능이다. 경청이 지도자의 조건이다. 사람의 말은 들으면 시험에 들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은혜를 받는다. 세상의 잡다한 소리에 귀를 닫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말씀으로 온다. 사랑하면 들린다.
지치고 상한 엘리야는 하늘의 세미한 소리를 듣고 회복이 되었다. 예배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징징거리지 말고 노래를 불러라. 찬송 한 곡을 잘 부르면 가슴에 쓰나미가 밀려오듯이 심금이 울린다. 다윗은 수금을 연주함으로 사울왕의 정신병을 치료한 뮤직 테라피를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였다. 아들 중 막내였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는 대서사시를 만들었다.
솔로가 듀엣이 되고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되고 뮤지컬이 되고 오페라를 연주하게 된다. 손경민 목사님처럼 인생을 작사, 작곡, 노래하라. 네 인생의 지정의를 터치해서 노래하라. 연주하라. 연출하라. 네 인생을 최고의 악기로 만들어라. 별일이 다 있는 인생을 살아가며 우울감에 찌그러져 있지 말고, 자신만의 음색으로 고백하고 온몸으로 연주하라. 그것이 찬양의 멜로디가 되고 인생의 주제가가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찔림과 울림과 설렘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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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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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 8] 주일학교는 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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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교회학교)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조직되었다. 교회 성장과 신앙 전수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저출산 등으로 인해 주일학교가 쇠퇴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교단과 교회마다 여러 방식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일학교에 대해 교회법은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주일학교는 조선예수교장로교회 헌법(1934년)에 언급된다. <예배모범>(7장 주일학교)에 실려 있다. 주일학교는 어떤 순서(절차)로 모이며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교장과 교사의 할 일이 무엇인지 나온다.
우선, 주일학교에서 적용하는 절차는 기도, 찬송, 신경, 교회의 요리(要理)와 헌법 등을 공부하고 전도사업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다.
둘째, 주일학교로 인해 주일 공예배에 출석하는 것과 또한 부모가 직접 자녀 교훈하는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셋째, 항상 당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넷째, 주일학교 교장은 교사 선발, 학생들의 공부와 경건한 자세에 전체 책임을 맡는다.
다섯째, 주일학교교사는 자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준비해야 하며, 아직 믿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권면하고 심방하며, 특별히 아프거나 사고가 있을 때 심방해서 하나님의 복을 빌어야 한다.
근데 이렇게 주일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신경과 요리, 헌법을 공부하며, 전도사업을 위해 헌금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특별히 입교(入敎, 공적 신앙고백)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역시 1934년 헌법 <예배모범>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교회 교우에게서 출생한 자녀로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는 교회의 권고와 치리 하에 있고 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요리문답을 독습하게 하며, 기도하는 것과 죄를 미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며, 성년이 된 다음에는 출생하면서부터 교회의 교우 된 것을 알게 하고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 참여를 청원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와 특권임을 기억케 할지니라”(예배모범. 10장: 입교(入敎)예식)
이로 볼 때 주일학교(교회학교)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즉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가 주일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 성년이 된 다음 입교를 통해 “교회의 교우 된 것을 알게 하고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에 참여하도록”하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포함한 팔츠 영지에 속한 교회들은 <교회법>을 작성했다(1563년). 그런데 그 <교회법> 목차를 보면 주목할 점이 있다: 설교가 제일 먼저 나오고, 둘째로 세례, 셋째 요리문답(要理問答), 넷째 성찬, 다섯째 권징, 여섯째로 구제/기도 등의 순서가 나온다.
이 순서를 잘 보면 <교회법>의 목적은 말씀이 온 회중에게 전해지고 가르쳐지기 위함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설교가 나온다. 그런데 설교가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언약의 표인 세례가 나온다. 이를 위해 주일학교에서 요리문답으로 교육한다. 그리고 입교를 통해 성찬에 참여하게 한다. 여기서도 주일학교(교회학교) 교육의 목적이 분명히 나온다. 즉, 주일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것을 배우고, 또 성경과 신경과 요리문답, 헌법을 공부해서 마침내 입교를 통해 자신이 교회의 교인된 것을 알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교회법>은 직분과 치리회의 질서를 넘어, 신앙교육을 위한 질서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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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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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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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여름사역이 시작된다. 성경학교와 수련회와 단기선교와 아웃리치의 현장들이다. 성경학교와 수련회는 신앙훈련과 체험이 중심이고, 단기선교와 아웃리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대상들에게 접근해서 지원하는 활동이 중심이다. 예외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름사역의 봉사자들 대부분은 삶의 여유와 은혜의 고백과 은사의 달란트를 가진 자들이 감사와 사명과 의무라는 신앙의 관점에서 자원하고 헌신한다. 이러한 연고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봉사자들은 동행자가 아니라 시혜자의 관점에서 대상자들에게 접근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도적 사역과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 시혜자적 위치와 능력, 헌신자적 마음과 신체를 가진 자들이 봉사자가 되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지나친 자신감과 자기중심적 행동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현지의 상황과 일체화 되지 못하는 문제를 파생할 뿐만 아니라 차라리 지원, 봉사하지 아니하는 것보다 못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풀러신학교 총장이었던 리차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 진리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타 종교와 일반사회공동체에 자행한 기독교의 비예의적인 일들을 비판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라면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시대와 지역과 공동체를 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이란,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면서도 무례하게 행하지 않고, 다른 신앙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충돌하지 말고, 정중하고 친절한 관용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반인들이 가지지 아니한 ‘비일상적인 정중함’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양과 예절을 말하는 것이다. 타 종교와 사회공동체에 기독교적 교양과 예의를 가지라는 것이 성경의 진리를 포기하거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구원의 역사에 선하다고 말하는 다원주의적 성향이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수준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적 진리에 대한 용인이 아니다.
주객이 전도된 십자군 전쟁의 당위성과 우월의식, 종교암흑기였던 중세시대의 진리독점과 권력탐욕이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포위하고 박해하였을 때 자행된 잔인함과 거만함의 치욕스런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 지역과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 개인과 개인의 혐오 그 기저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종교적 지배성, 우월성, 배타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가 시행하는 여름사역의 현장에도 십자군 전쟁의 교만함과 중세시대의 잔인함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단기선교 현장에서 믿음과 신앙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실천하는 땅 밟기-타종교의 전당에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건물에 십자가를 그리고, 봉헌함에 전도지를 삽입하는 행위-는 타종교와 타종교인에 대한 무례와 교만이다. 교회 마당에서 타종교인들이 함께 주문을 외우고, 교회 건물에 부적을 그리고, 헌금함에 탱화나 코란을 넣는다고 생각해보라. 또 아웃리치 현장에서 시행되는 도시교회 프로그램의 강제적 주입, 맘몬주의와 번영신학의 자랑, 지역의식과 토속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는 정복주의적 우월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무례함과 거만함이다. 종교를 포괄적 의미로 정의하면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통해 학습되고 축척되어진 문화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가 문화보다 우위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종교가 문화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오히려 하위개념을 가지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면 종교는 단지 한 부류의 집단들이 그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문화현상일 뿐이다. 또 문화에는 하급문화, 상급문화가 없다. 다름의 문화가 있을 뿐이다.
일반인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불친절하고, 거만하고 차별하고, 폄하하고, 혐오하는 자들을 향해 무례한 자들이라고 낙인찍는데, 하물며 절대적 사랑과 주도적 희생과 순교적 용서를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비성경적 무례함을 가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모든 사역자들이 다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가짐으로 이번 여름사역의 현장에는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기독교적 예절과 교양을 가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과 삶을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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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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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 전쟁의 기적: 기적으로 살아남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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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3년1개월 2일, 곧 1,129일 간의 전쟁은 민족적 시련이자 국가적 재난이었다. 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건물, 도로, 철도, 교량, 항만 시설 등 국가 기간산업은 파괴되었다. 주택, 교육·의료시설, 종교시설, 문화재도 파괴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인명 피해였다. 한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등 군인 270만여 명과 민간인 250만여 명(남한 99만968명, 북한 150만)이 죽거나 다쳤고, 남편을 잃은 과부는 30만 명, 이들에게 딸린 자녀들은 약 51만7천 명에 달했다. 10만 명의 고아가 생겨났고, 이산가족은 1천만 명에 달했다.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를 복구하는 데 최소한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한국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대국으로 우뚝섰다. 기적이었다.
6.25는 처음부터 불리한 전쟁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비안정적인 상태였다. 해방 후 좌우익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20일에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게릴라전을 포함한 정치적 대립으로 약 10만 명이 희생자가 생겨났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나고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전체 의석 210석 중에서 이승만의 집권 세력은 겨우 30여 석을 얻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126명이 당선되었다. 정치적 불안정의 반영이었다.
군사적으로 남한은 열세였다. 북한군 병력은 201,050명이었으나 남한은 그 절반인 103,827명에 불과했고, 북한의 항공기는 226대였으나 우리는 22대, 북한의 함정은 110척이었으나 우리는 겨우 36척에 불과했다. 북한의 화포는 2,492문에 달했으나 우리는 절반인 1,051문뿐이었다. 북한은 242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전쟁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였다. 6.25 직전 전방 지휘관들은 대거 교체되어 지휘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2사단장 유준홍 준장이 의정부 7사단장으로, 1연대장 김종오 대령이 원주 6사단장으로, 16연대장 이성가 대령이 강릉 8사단장으로, 국방부 1국장 이종찬 대령이 서울수도사단장으로, 8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대전 2사단장으로, 7사단장 이준식 소장이 육사교장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도사단 소속이었던 2연대가 춘천 6사단으로 예속되어 병력이 서울에서 홍천으로 이동하던 중 전쟁을 맞았다. 의정부 7사단의 예비연대인 25연대도 부대이동명령을 받고 온양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의정부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전쟁 준비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 먼 후방에서 게릴라소탕전을 벌이고 있어서 남침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더 심각한 현실은 농활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장병들은 주말에 대대적인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국외적으로 볼 때, 남한은 무방비 상태였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군을 시작하여 1949년 6월 말에는 군사고문단 495명 외에는 완전히 철수했다. 그해 8월에는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그해 10월에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김일성 정권에 힘을 부여하였고, 한반도에서 패권을 노리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다. 국제적으로나 국외 사정으로 볼 때도 불리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25는 패배가 예견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일곱가지만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 미국의 신속한 참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조리 주에 있는 사저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런데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고 이틀 후인 6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참전과 파병을 결정했다. 그때에는 애치슨 라인이 유효했고, 한미 간에 방위조약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참전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참전 결정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 공군의 한국전에 대한 작전 명령을 허락했고, 이틀 후 미육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도록 허락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1주일도 않되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공군과 육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고, 전쟁기간 중 파견된 미군은 40만 명이 넘었다. 트루먼의 신속히 결정 배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간절한 호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면 5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찬들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호소가 트루먼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 지도부의 김두봉과 홍명희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이 소련 문서에서 드러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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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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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 장래증축과 확장성을 고려한 건축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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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이 완성되고 입당 후 약 2~3년 정도가 지나면, 한국교회는 크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주차장의 부족현상이며 둘째는 교육공간의 부족 현상이다. 주차장의 부족 현상은 현재 주차장법이지방 조례마다 차이는 있으나 보통 100㎡마다 당 1대의 주차를 설치하게 되어있다. 가령 1000평 구모의 교회라면 약 1000석 규모가 되는데 이 경우 33대의 법적인 주차대수가 확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현실상 겨우 법적주차대수정도밖에는 설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1대의 주차장을 설치하기 위해서 약 7.6평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00석 규모교회에 33대의 주차장을 설치하므로 현실적으로는 맞지 않는 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주일예배시 주변이 항상 주차장으로 혼잡스러운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차장의 확보는 현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장래성에 대비한 주차장의 계획은 교회부지에서 직선끼리 300M이내에 주차장 부지가 있으면 건축허가가 가능하다. 주차장으로 전용가능한 공간의 확보도 장래성에 주요한 수단이다. 또한 기계식 주차장도 고려해 볼만 하다. 기계식 주차장은 적은 공간에 수납식으로 많은 주차를 수용하므로 공간의 효율성에서는 유리하다.
교회장래성과 확장성에서 고려해야 할 내용 중 부족한 교육공간의 확보 문제이다. 한국 교회의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은 한국교회 공간의 분포가 예배홀(본당)위주로 건축되어지기 때문이다. 즉 100평 교회를 건축한다면 본당이 50평을 차지한다. 전체 연면적에서 본당이 차지하는 비율이 보통 45%에서 50%평을 점유한다. 또 공유시설(계단, 홀, 화장실, 복도)를 제외하면 순수 교육공간의 분포는 17%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처럼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을 극복하기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옥상공간의 활용이다. 옥상공간은 건축법상 바닥 면적에 산입되지 않으므로 교회에서 부족한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옥상의 외벽난간을 2.5M정도 설치하고 지붕에 경량식 구조로 덮개를 설치하면 내부실로 사용할 수 있다. 또 옥상공간은 야외 청소년 체육 공간 카페, 노천극장, 기도처소 등의 다양한 기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대부분 교회지붕이 경사 지붕구조로 되어 있어서 활용할 수 없게 되어있다. 무의미한 교회 형태는 오히려 획일적이 형태만을 양산시킨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 현실에서 작은 짜투리 공감 하나도 아쉬운 여건임을 감안할 때 옥상공간의 활용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 건축시 에는 항시 향후 10년 앞을 보고 장래성을 대비해서 계획해야 한다. 불과 2~3년 후에 다시 증축하거나 리모델링 해야만 하는 교회가 많다. 10년 후를 보고 건축하기위해서는 2~3개 층을 현재 건물에서 증축 가능하게 기둥의 크기나 인프라시설을 여유 있게 고려해서 장래에 증축 시에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증축의 방향성은 도심지 교회는 부지가 협소한 관계로 수직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천원교회는 부지가 넓으므로 수령방향으로 증축이 이루어짐을 교려하여 이에 따른 동선과 공간의 배치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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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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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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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아 부산에 있는 나를, 서울에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오후예배 설교자로 초청해주셨다. 나를 초청해주신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사랑(장애인)부를 담당하고 계신다.
서울 근교인 의정부에서 40여 년간 살았지만,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기에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그래서 설교 당일에 올라가 헤매지 말자는 마음과 사랑부 성도들과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 전인 토요일에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초청해주신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사랑부 예배 때에도 설교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순간, 망설였다. 나는 나를 초청해주신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사랑부 예배와 설교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서 참여할 생각이었는데 설교라니, 그리고 나 보다 더 심한 장애로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 앞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님과 통화를 하여 몇 가지를 물었다. 일단 사랑부 예배시간을 물었고, 예배에 참석하는 장애유형과 나잇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이 교회에서 오후에 설교를 하는데 사랑부 성도들도 참석여부를 물었다.
나의 물음에 목사님께서 답을 해주셨는데, 사랑부 예배는 장년부 예배시간과 같은 11시며, 자녀들이 사랑부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부모들은 장년부 예배를 드린다. 그렇게 각자 예배를 드린 후, 부모들이 사랑부 예배실로 와서 점심을 함께 먹고, 소모임을 잠시 하고 귀가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보니 4시에 있는 오후예배까지 사랑부 성도들이 교회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듣고, 부산에서 나를 서울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더 있으신지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랑부 예배 설교를 수락했다. 무명(無名)인 나를 부산에서 서울까지 부르신 것은 장년부에게 장애인식전환교육도 중요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서 장를 가진 성도들을 만나 교재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께서 날 부르신 뜻에 더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주일 오전, 사랑부 예배시간 전 보다 일찍 도착하여 초청해주신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고 기도회를 함께하고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이날 나의 설교제목은 "약함을 자랑하라"였다. 나를 포함하여 장애를 가진 자들이 열 명 남짓이었는데 예배드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고,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 후, 한 형제는 나보고 다음 주에 또 올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건 아마 하나남의 자녀라는 것과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공통점이 처음 만난 우리의 사이를 허물어준 것 같아서 사랑부 예배에 참석한 것이 내겐 기쁨으로 기억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의정부에서 장애인교회를 7년 섬겼던 경험과 부산에서 3년 사는 동안 여러 장애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경험들이 이날 참으로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고, 세상 관심사에서 멀어진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고 장애를 가진 내가 목사로 부름 받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신체는 갈수록 연약해진다 하여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나의 약함을 자랑할 생각이다. 나의 약함을 하나님은 강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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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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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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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터진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충돌을 포함해서 도처에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들과,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는 환경적 재앙들, 빈발하는 범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와 만연하는 우울증과 불안증세 그리고 늘어만 가는 과잉행동결핍장애와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병리적 현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관적 시각을 가진 이들은 지금 우리가 절망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최근 등장한 “절망사”(絶望死, Deaths of Despair)는 ‘절망사회’의 인상적인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Stewart Deaton)이 제기한 개념인데, 경제를 넘어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양극화와 이로 인한 박탈감과 자괴감과 소외감으로 말미암아 자살이나 약물 및 알콜 중독에 따른 사망이 급증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국가 차원의 절망사 연구가 있었습니다(2022년 6월,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보고서). 이런 지경이라면 우리에게 아니 인류에게 희망이란 존재하는 걸까요?
절망은 현대에 비로소 등장한 신조어가 아닙니다. 고비마다 사람들은 절망을 외쳤습니다. 중세의 흑사병은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절망이라는 더욱 치명적인 질병을 안겼습니다. 151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로마를 방문했던 루터는 당시 실상을 목격하고 얼마나 절망했던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란 말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인적·물적피해와 함께 끔찍한 참호전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을 혹자는 “절망의 전쟁”이라 불렀습니다(존 엘리스, 자크 타르디, 반철진). 75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많은 이들을 그야말로 절대 절망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를 ‘희망’이라 불렀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아서 더 절망적인 상황이 무수한 성경에는 절망 대신 소망이란 단어가 들꽃처럼 피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자 한병철은 희망이란 세계내부 사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정신의 상태 혹은 영혼의 차원이라 정의합니다(『생각의 음조』(2024), 142). “무엇보다 이 희망은 비록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이 외적 조건이 절망적일지라도 살아갈 힘을 주고 항상 새로이 시도할 힘을 주는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이 감옥에 있을 때 쓴 서신(Briefe an Olga)에 나오는 말인데, 역시 감금상태에 있던 바울이 남겼던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빌 1:20)라는 표현과 내용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하면 희망을 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림이라는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희망을 역설적이라고 보았습니다. “희망은 아무런 활동 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이뤄내려는 비현실적인 갈망도 아니다. 희망은 도약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를 위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와 같다.”(『희망의 혁명』(1968))
희망하면 흔히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와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희망의 철학자요 기독교적 실존주의자인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 일컬었는데 ‘걷는 인간, 길 위의 인간, 여행하는 인간’이란 의미로서 희망의 여정을 걸어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희망하다’는 “현실에 신용을 부여하는,” 즉 “현실에 믿음을 거는, 그럼으로써 현실이 미래의 약속이 되게 하는” 행위입니다(한병철, 139). 그렇지만 현실에 기대를 걸 수 없는 상황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희망의 신학자’라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1926-2024)이 그랬지요. 17세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나갔다가 전쟁포로가 되어 3년을 수용소에서 지냈습니다. 신용을 줄래야 줄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누군가 그를 찾아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찾은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찾았습니다.” 그를 찾은 존재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이 희망과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를 믿습니까? 부활을 믿습니까? 영생의 약속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안심하세요. 당신에게는 절대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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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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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평화에 이르는 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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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학교 정성철 교수께서 쓰신 ‘국가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해서 로버트 저비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국가는 왜 싸우는가, 사회평론 아카데미) 로버트 저비스에 의하면 나선형 모델(Spiral 모델)과 억제 모델(Deterrence 모델)이 있습니다. 나선형 모델은 안보 딜레마에 기초하여 충돌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두 국가가 모두 자국의 안보를 위해 방어적 행동을 취하지만 이는 상대의 안보 불안을 야기 시킨다고 합니다. 결국 두 국가는 위기의 고조를 막지 못한 채 충돌에 이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모델은 유화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북한 모두 평화를 희망하더라도 오해와 불신으로 상대의 방어적 행위를 공격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경우 남북한은 번갈아 가며 그러한 오해에 따른 대응을 취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충돌로 치닫게 되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비극은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갈 때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억제 모델의 관점에서 평화는 상대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상대의 도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결국 양측은 대규모 분쟁에 휩싸이고 맙니다. 상대방이 군사적 수단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봉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결의에 찬 국가들 사이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죠. 상대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 6.25 전쟁의 발발도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 따른결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한의 공격이 엄청난 피해를 불러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였을 때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왔다는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한반도 평화를 지향해 왔습니다. 하지만 상반된 가정에서 기초한 두 입장의 정책제안은 상이하다고 합니다. 나선형 모델에서 국가는 현상 유지를 희망하는 불안한 행위자이지만, 억제 모델에서 상대국은 불만족으로 현상 변경을 노리는 도전적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정성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북한은 오랜 경제 실패와 외교 고립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국가인가? 이라크 전쟁과 후세인 처형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실패 국가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면서 체제 안정이 위협받을 경우 모험적 도발도 감행할 준비가 된 도전 국가인가? 그것도 아니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외부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며 정권 안보에 사활을 건 공격적 행위자로 볼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의 대북 통일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북한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 안보를 추구하는 불만족 국가인가?” 이에 대한 우리 안에서 열린 토론이 합의에 이를 때 저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대북 통일 정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
다. 다소 전문가적이고 어려운 글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던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6.25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의 번영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6.25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안보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새 길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 교회는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9년째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사들이 거룩한 낙수 효과를 이루며 나비효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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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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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구색만으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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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어려서 자라난 동네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넓게 여겨졌던 길이 지금은 좁은 뒷골목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창 축구가 유행하고 있었고, 주 상대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재 한국 축구는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축구 열기는 꼬마인 우리에게도 퍼져서 뒷골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을 찼습니다. 6학년 동호 형이 중심이었고, 나머지는 5학년과 6학년이 섞여 있었습니다.
한번은 뒷골목 축구에 만족할 수 없어서 한참 떨어진 구로초등학교에 갔습니다. 한쪽에서 공을 차고 있노라니까 유니폼을 멋지게 입은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구로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부러운 눈으로 정식 선수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수들은 운동장 가운데서, 우리는 구석의 남은 운동장에서 공을 찼습니다. 그런데 축구팀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더니, 연습 경기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뒷골목에서 공을 찬 우리가 정식 선수들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축구팀 선생님이 어이가 없었는지, 또 오라고 했고, 그 다음 주 토요일에는 다른 학교 축구팀들까지 와서 토너먼트 경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동호 형에게 축구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정도입니다.
구로초등학교 축구팀은 왜 동네 아이들에게 졌을까요? 유니폼에, 축구화를 멋지게 신고, 코치 선생님도 계시고, 포지션별로 선수도 다 있는데, 왜 졌을까요? 그 이유는 진짜 선수다운 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막아낼 수비 선수가 없고, 골을 넣을 선수가 없습니다. 열한 명이 뛰고 있는데, 모두 있으나 마나입니다. 구색은 갖추었지만, 실력은 없었습니다. 흔히 폼만 잡는다고 하지요.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가르쳤고, 지혜로운 자들은 책략을 베풀었고, 선지자들은 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다 갖추었기에, 더 이상의 선지자는 필요 없다고 여기면서,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18절이 이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당시 유다 백성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타락하여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고, 지혜로운 자들의 책략은 제 눈에 안경이었고, 선지자들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양 포장했습니다. 예레미야만이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시대에 여호사밧과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치는 전쟁을 하러 가기 전에 선지자들에게 묻던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백여 명의 선지자가 승리를 예언했습니다. 그때 <미가야>만 패배와 왕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가야의 예언처럼 아합왕은 부상했고, 결국 죽었습니다.
수가 많아도 소용없습니다. 진리가 중요합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면 어리석은 군중은 눈이 어두워서 진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목회자 중에는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분위기와 성도들이 좋아하는 분위기에 맞추어야 하는지, 목회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 해야 하는지를 갈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신앙 양심을 따라 행하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홀로 있더라도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투브 등의 조회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씀이 진리인지가 중요합니다. 조회수에 속지 말고, 진리를 분별하는 <영들 분별하는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진리 위에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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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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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신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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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은 믿음, 소망, 사랑 3가지 면에서 진단해 볼 수 있다.
A. 믿음이 없이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주를 기쁘시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가 없다.
②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믿음이 없으면 진격을 할 수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쁜 것이다.
③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 동행, 연합, 닮음이 불가능하다.
④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찾을 수 없다. 믿음이 있을 때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사모하고 부르짖는다.
⑤ 믿음이 없이는 상을 받을 수가 없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주님을 믿을 때에 목숨을 다하여 충성할 수 있다.
결국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에 믿음이 크도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라고 하셨다. 믿음만큼, 믿음대로, 꿈 꾼 대로, 소원대로, 말한 대로, 심은 대로 되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대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다. 믿음도 자란다. 믿음에도 알통이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근육을 길러서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된다.
B. 소망이 없으면
소망이 없으면 인내할 수가 없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루살이 같이 막가파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 부활소망이 없으면 성도의 노력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천국 소망을 가지고 나그네 세월에 인내하고, 참고, 견디어 낼 수가 있다. 현재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장차 받을 하늘의 상급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다.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기다리며 견디어 낸다. 성도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천국 계단을 묵묵히 올라가야 한다.
C. 사랑이 없으면
①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②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③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④ 사랑의 동기가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충고도 득이 안 되고 독이 될 뿐이다.
믿음이 역사하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이 수고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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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