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시사칼럼]야누스(janus)
    1월은 영어로 제뉴어리(January)입니다. 로마인들이 숭배했던 ‘야누스(janus) 신의 달(januari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야누스는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중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을 야누스 형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여전히 세 모녀 살해 사건에서부터 소위 문건파동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야누스적인 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hypocrites)이요 안과 밖이 다르며 회칠한 무덤 같다고 책망하셨던 이들이 어찌 비단 그 옛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만이겠습니까?(마 23:25-27) 하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크리소스톰의 말처럼 가식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한 가지 얼굴만을 갖고 살아가는 원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야누스는 또한 ‘문(janua)’의 수호신이기도 합니다. 로마에서 이 문은 특히 전쟁과 평화를 상징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로마의 첫 번째 왕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야누스 신전을 짓고 문을 단 후 ‘이 문이 닫혀 있으면 평화, 열려 있으면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합니다. 실제로 로마제국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 이르기까지 이 문이 닫혀 있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로 정전협정 62주년을 맞았습니다. 한반도 야누스의 문은 지금도 활짝 열려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최근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한다면 핵실험을 중지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모오든 껍데기는 가라” 외치던 반세기 전 시인의 음성이 아련하기만 합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 46:9)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야누스에는 끝과 시작, 과거와 미래라는 변증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야누스의 두 얼굴이 닮은 듯해 보이지만 살짝 다른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한국의 1월에 전형적인 삼한사온(三寒四溫)의 야누스적인 날씨가 반복되지만 결국은 봄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치도 같습니다. 겨울이 가지 않으면 봄은 오지 않습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는 법입니다. 종군위안부가 항의 표시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한 수요집회가 올해로 24주년이 되었습니다. 238명의 명단 중에서 이제 55명이 남았습니다. 더욱이 올해는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된 지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친일 잔재의 망령이 일으키는 소란을 목도합니다. 성경은 야누스보다 훨씬 더 철저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롯의 아내는 결국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 19:26). 가룟 유다는 자기 의(義)를 청산하지 못하고 비참한 배역자의 말로를 걸었습니다(마 27:3-10). 신년을 맞아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일신우일신, 환골탈태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야누스에 내재된 ‘변화’의 이미지는 오늘날 멀티세대(multi-generation)에 잘 어울리는 측면도 있습니다. 멀티미디어, 멀티태스킹, 멀티홈, 멀티비타민, 멀티개스팅, 유아용 멀티변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멀티 전성시대입니다. 최근에 ‘야누스 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야누스 족이란 낮에는 업무에 열중하다가 스키장으로 퇴근해서 밤에는 다이내믹한 레포츠를 즐기는 신세대 직장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비자발적인 멀티족들도 존재합니다. 두세 가지 일을 하며 학업을 이어가거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들 말입니다. 새해 들어 비정규직 4년 연장안이 발표되었습니다. 드라마 미생에 나왔던 비정규직 청년 장그래의 이름을 따서 ‘장그래 방지법’이냐 ‘장그래 양산법’이냐 말들이 많습니다. 두 주장 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더 야누스적입니다. 을미년 정월의 이 혼돈이 이 땅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보다 더 발전적인 변화로 승화되기를 만유를 새롭게 하시는 주 안에서 기원해 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01-17
  • [성서연구]위대하신 주님, 영광스러운 교회(엡 1:15-23)
    요즘 한국 교회의 교세가 감소하고 재정도 위축되고 있다는 말들을 심심치 않게 듣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통계들은 이러한 말들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전적으로 우리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부패한 결과이므로,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회개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자칫 우리로 하여금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의 영광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까 염려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교회의 영광을 잘 보여줍니다.에베소는 바울 사도가 가장 오래 머물며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세 달을 가르친 후 두란노서원에서 이 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에서 전한 바울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교회의 영광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를 잘 이해하려면 에베소가 어떤 곳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주도로서 매우 번성했던 항구도시입니다. 이런 에베소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아르테미스여신(사도행전에는 아데미)에 대한 믿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로마 황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주전 7세기경부터 에베소에 세워져 있었던 아르테미스신전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 할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습니다. 에베소인들은 자신들이 아르테미스여신을 숭배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이 여신은 젖이 무려 26개나 달린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아르테미스가 그 젖을 먹여 자신들을 살리고 복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또 하나는 로마 황제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최초로 황제의 영예를 얻은 아우구스투스는 에베소를 크게 번성한 도시로 만들었고, 후대의 황제들도 에베소에 많은 특전을 주었습니다. 황제의 배가 항구에 닿으면 마차로 바로 달려갈 수 있도록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닦여졌고, 양편으로 대리석 가로등과 대단한 건축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중 상당부분이 남아 있어 당시의 영광을 보여줍니다.이런 곳에서 바울은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고,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뛰어나게 하셨으며, 바울이 서신을 기록하던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들 보다 더 뛰어나게 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20-21절)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만물 위에 높이시고, 그리스도를 그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22절) 비록 바울은 초라한 전도자로 보였겠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황제보다도, 아르테미스여신보다 높고 위대하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시 그것들 위에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의 택한 백성들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밝혀 주시자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비록 온전한 예배 처소 하나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있었지만, 거대한 신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위대함과 영광을 철저히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21절에서 보는 통치, 권세, 능력과, 주권을 가지고 큰소리치는 대단한 이들이 세상에 많지만, 그들이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예수님은 그 위에 계시며, 우리는 그 예수님께서 머리이신 교회의 일원으로서 예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세상이 교회를 비방하고 그리스도인을 우습게 여긴다 하더라도 우리는 최고이신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교회를 영광스러운 공동체로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위대하신 분의 위대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2015년도에 한국교회를 더욱 영광스러운 교회로 섬겨나가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5-01-17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0)
    몸과 마음이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소(多少)와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셨고 그래서 이해해 주셨다(마 26:40,41).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연약함도 다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히 4:15,16). 이 사실을 생각하고 믿을 때 우리는 잠시 연약하나 탈진하였다가도 분명히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사 41:10, 롬 8:37, 빌 4:13, 요일 5:4). •사람을 만나라 : 사람은 홀로/혼자 살 수 없다. 한자에서 사람은 둘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좋지 못하다”(창 2:18) 따라서 남자의 분신으로 여자를 만들어 남자와 함께 살도록 복을 주셨다(창 2:21~23).남자가 결혼하여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살게 하시고(창 2:24), 우리 모두에게 서로 서로 친구를 만들라고 하셨다(눅 16:9). 즉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으니 서로 친구, 형제, 가족, 이웃으로 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피하지 말고 만나라. 만남과 교제 속에서 우리는 동질감, 소속감, 연대감을 느끼고 누리게 된다. 여기에 삶의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 결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 •땀을 흘려라 :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다(창 3:19). 땀을 흘릴 때 마음 속의 어두운 부분도 함께 씻겨져 나간다. 언제 땀이 흐르는가? 힘써 일 할 때, 힘껏 운동할 때, 힘을 다해 봉사할 때 우리 몸은 땀을 흘린다. 이 세 가지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선물이다. 그러므로 땀을 흘릴 때 머리 속의 복잡하고 무의미한 상상과 잡념들은 사라지고 상쾌함이 찾아온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신다 :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을 앙망하라! 여종이 그 주모(主母)의 눈을 바라보는 것 같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하라.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한 없이 많으시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려는 공의(公義)보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矜恤)이 더 많으시다. 많이 힘들어 신음하고 고통 하는 자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신다. 그 응답은 <마음의 평강>으로 찾아온다. 엘리야가 탈진했을 때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고 잠을 주셨다. 예레미야가 고통과 고독 속에서 쓰러져 갈 때 하나님이 평강을 부어주시므로 <내 잠이 달았도다>라고 그는 고백하였다. 공포 속에 갇혀 있던 열 한 제자에게 <부활하사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평강을 주셨다. •가까운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 그리고 도움을 받으라 :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가족을 주시고 친구를 주시고 성도(교우 敎友)들을 주시는가? 힘들고 외로울 때 <서로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라>고 허락하시는 선물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건강하고 능력이 있다고 해서 <나 혼자>만 살면 안 된다. 사람은 자기 미래를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도와주기도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도 받아야 한다. 상부상조(相扶相助)라는 말은 아름답다. 친구의 얼굴을 서로 빛내 주고(잠 27:17), 넘어졌을 때 서로 일으켜 주어야 한다(전 4:9~12).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라 :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능력이요 생명이다.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광야의 고달픈 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듯이 우리는 매일 신령한 만나인 <말씀>을 먹어야 한다(마 4:4, 욥 23:12). 말씀은 우리를 진단, 치료, 수술도 해주고 치유, 회복도 시켜준다(히 4:12,13, 시 119:50). 주일 예배를 제정하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 중 하나는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들음으로 신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소성함을 얻고 치유를 받게 하시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1-17
  • [소강석 칼럼]다시, 첫 새벽길을 떠나며
    외롭고 가난했던 신학생 시절, 겨울 방학이 되면 갈 곳이 없었다. 기숙사에서 신학생들이 겨울에 추우니까 몰래 몰래 전기를 쓴다고 기숙사를 폐쇄한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돌아갈 집이라도 있지만 나는 집에서 쫓겨난 처지라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의 어느 기도원에 가면 잔심부름도 시키고 밥도 먹여준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떠나는 날 신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박종삼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강석아! 그리로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있어라. 그냥 내 방에서 같이 지내자!”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사모님이 반대를 하셨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우리 집에서 살 수가 있겠느냐고…. 물론 나 또한 사모님이 지내라고 해도 지내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나오니까 목사님이 안타까운 얼굴로 지갑에서 돈을 빼어 주셨다. 그런데 목사님 지갑에 돈이 얼마 없어서 사모님께 돈을 가져오라고 눈짓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모님도 눈짓을 하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목사님이 사모님의 팔을 쥐어뜯으면서 큰 소리로 “어서, 강석이가 가니까 2만원만 더 갖고 오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어쩔 수없이 돈을 가져왔다. 나는 그 당시 상황이나 자존심을 생각하면 받을 수 없었지만, 살기 위해 그 돈을 눈물로 받아 왔다. 어쩌면 그 가난하고 배고팠던 신학생 시절이 내 인생의 새벽이었는지 모른다. 밤이 동터 오기 전에 그 춥고 배고픈 새벽 말이다. 그런데 그 때 나는 박종삼 목사님을 통하여 사랑과 섬김의 삶을 배웠다. 그리고 수많은 눈물과 울음 속에서 새로운 사랑과 희망의 길을 발견하였다. 2015년, 새해가 밝았다. 모두들 힘들고 어렵다고 말한다. 어쩌면 경제가 더 악화될지 모른다는 전망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새로운 꿈을 꿈꾸어야 한다. 결코 좌절하고 낙망해서는 안 된다. 밤이 지나면 반드시 붉은 새벽이 동터오고 눈부신 아침이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너무 패배의식과 절망의 소리들이 난무하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사랑과 섬김의 정신을 보여야 한다. 진정 위대한 지도자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먼저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 더 큰 섬김의 역사를 낳게 하는 사람이다. 새해를 시작하며 다시 한 번 사랑과 섬김의 길을 생각한다. 위대해진다는 것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다. 부요해진다는 것은 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베풀고 사랑하는 것이다. 박 목사님이 내게 보여주셨던 그 사랑과 섬김의 빛은 지금도 내 삶의 등불이 되어 인도하고 있다. 밤의 어둠은 붉은 새벽이 동터오기 전의 고요와 정적이다. 그 검푸른 어둠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가슴에 타오르는 사랑과 꿈을 품고 그 어둠 속을 걸어가자. 다시, 가슴 시린 첫 새벽길을 향하여.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15-01-17
  • [함께 생각해 봅시다]꺼진 불도 다시 보자
    동성애차별금지법이 합법화되면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자리로 전락해‘꺼진 불도 다시 보자’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불조심 표어이다. 근간 우리나라에는 불조심 외에 또 한가지 꺼진 불도 다시 봐야하는 것이 있다. 그게 뭔가. 동성애차별금지법을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다.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150명의 시민위원과 37명의 전문위원을 앞세워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제정하여 동성애를 합법화하려 했으나 기독교와 시민단체 등의 저항에 부딪혀 추진을 포기하였다. 표결에 부친 결과는 60:16 이었으나 합의도출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진을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박원순 서울시장의 결의가 비상하기 때문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2014년 10월 12일자 인터넷판 보도에 의하면 “대만이 아시아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첫번째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박원순 시장은 “한국이 첫번째 나라가 되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이만큼 갈망하고 있고 의지가 확고하다.반대여론에 밀려 제정하려던 서울시민인권헌장 추진을 폐기한다고 했지만 동성애자들이 서울시청에 몰려와 점거 농성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사과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상태라고 하니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는가. 진짜 꺼진 불도 다시 봐야할 형편이다.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시도할 것이 불보듯 뻔하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동성애차별금지법안이 국회의원들의 발의로 국회에 계류 중이고 TV방송도 동성애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으로 동성애를 미화,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라. 짐승도 교미할 때에 수컷과 암컷만이 하며 순리를 거스리지 않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동성끼리 성적관계를 갖는 동성애를 인권을 앞세워 합법화하려고 하니 이게 정신나간 짓이지 뭔가. 만의 하나 동성결혼이 합법화된다고 하자. 순결해야 할 성문화는 파괴되고 남녀간의 구분도 없어지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도 파괴되고 인간이 짐승보다도 못한 자리로 전락되고 만다. 한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그들이 장애인들을, 다문화가정을, 외국인을 차별하지 말라며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다 하면서 동성애자들을 싸잡아 그들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자칫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인권을 앞세우고 하는 여러 좋은 내용들은 98%의 빵과 같다. 쥐가 98%의 빵을 먹고 죽는 것이 아니라 빵 속에 있는 2%에 불과한 쥐약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할 것 아닌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1-17
  • [시사칼럼]2015 센서스(census)
    2015년은 10년마다 국가(통계청)가 주관하여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Population and Housing Census)’가 열리는 해입니다. 특히 우리가 이번 센서스(census)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난 번 2005년 조사에서 나타난 종교 관련 통계의 충격적인 결과 때문입니다. 당시 총 인구 4,455만 명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은 2,497만 명(53.1%)으로, 불교도가 1,072만 명(22.8%), 개신교인 861만 명(18.3%), 천주교인이 514만 명(10.9%)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첫 번째 센서스였던 1995년에 비해 불교는 40만 명(3.9%) 증가, 천주교는 295만 명 증가(74%)한 데 반해 개신교만 14만 명 감소(-1.6%)한 결과였습니다. 물론 통계방법 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천주교)’ 항목이 먼저 나오고 ‘기독교(개신교)’ 항목이 한참 뒤에 있어서 일부 개신교인이 앞의 항목에 가표를 해버렸을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입니다. 비슷한 시기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조사(2004)에 의하면 종교를 가진 사람(전체 인구의 53.5%) 중 불교 24.4%, 개신교가 21.4%인데 비해 천주교는 6.7%에 불과했다는 근거를 함께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번 2015 센서스를 특히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2005 천주교 부흥’은 사실인가 신기루인가? 작년에 한국 사회를 강타한 교황 신드롬은 천주교의 약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개신교의 쇠락은 어느 정도 사실인가? 2014년 4월 실시한 개혁신학회의 보고에 따르면 이단 및 사이비 기독교인이 100만 명을 상회한다는데, 이들을 제외한 순수 개신교인은 과연 얼마인가? 그런데 최근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5 센서스는 종전과 같이 전수조사 원칙이 아니라, 행정자료 중심의 등록센서스를 위주로 하되 10% 표본만 현장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라 합니다. 맞벌이 가정 증가 및 사생활 보호,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2005년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습니다. 현장조사가 확실히 응답률이 더 좋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주민등록표 등 행정자료에 기재된 답변의 신빙성이 더 높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한국 교회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권면이자 기회가 아닌가 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센서스 포로(Census Captivity)’나 진배없었습니다. 숫자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또 그렇게 이번 센서스를 저마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기다려 왔을 뿐, 정작 뼈를 깎는 자성(自醒)과 개혁(改革)의 몸부림은 없었습니다. 이번 통계방식의 변화는, 교회의 본질이 통계에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수치(數値)를 우상으로 삼지 말고, 진정한 성찰과 회개에 이르라고 하는 주님의 마지막 경고입니다. 오늘날 센서스 개념을 확립한 이들은 로마인이었습니다. 로마는 공화정일 때부터 조세와 징발을 목적으로 주기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특히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통치하던 시절(주전 27-주후 14) 제국 전역에 걸쳐 시행했던 ‘켄수스(census)’는 성경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눅 2:1; 행 5:37). 하지만 성경은 그 정확한 실시 연대나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만 그 일로 인해 한 부부가 어쩌면 시도할 생각조차 못했을 베들레헴 여행을 감행했고, 그 결과 예언대로 한 아들이 나심으로(사 9:6; 7:14) 모든 것이 달라진 사실만을 증언할 뿐입니다. 올 해 있을 센서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시행될지 또 무슨 결과가 나타날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금번 센서스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반드시 새로운 변화와 그로 인한 회복의 역사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간 주님께서 여러 경로를 통해 촉구하시고 경고하신 음성을 분별해서 그 명령에 순종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일탈(逸脫)했던 경로에서 벗어나 다시 주의 협로(狹路)를 따라 걷는 성도와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대망(待望)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01-01
  • [성공칼럼]종에서 주인으로
    많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의존하며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을, 어떤 사람은 사람을,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어떤 사람은 부적이나 돌과 나무 등을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 속에 두려움이 생길 때나 두려움을 넘어서서 욕심이 생길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의존하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으며, 약한 상태이며, 이용하려는 마음이 숨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하지만 결국은 의존일 경우가 많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고 대상만 달라졌을 뿐이다. 삶이 어려워지면 여지없이 나는 본래의 당당한 나를 잃게 되면서 의존하게 된다. 나는 순식간에 약한 종이 되어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 오랜 시간동안 몸부림친다. 걱정하고 울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간구하고 위로받고 안도하고 기뻐하고 또 두려워하고 간구하고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편안해지기는 하나 변화는 없고 두려워하고 기도하고 울고 원망하고 등등 이러기를 오랫동안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내 삶이 땅 속 깊은 어둠속에서 나오기 위해 벌레와 싸우고 흙과 싸우고 있는 씨앗과 같다. 폐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기침 한 번하면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런 기침은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다. 결국은 가래가 나오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 사람들은 이 아이를 죄인 보듯 한다. 그래서 아무도 곁에 오는 사람이 없어 외롭기 그지없다. 죽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다. 혈기 왕성했던 아이가 기가 죽어서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하며 몇 달 몇 년을 속으로 외쳤다. 두려움과 답답함 속에 화가 나고 우울하며 하나님께 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말씀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아이는 자신이 의존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살기 시작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구나. 이제 부터는 내가 살 것이다.’ 하며 잘 먹고 활동도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약도 잘 먹고... 그러는 중에 드디어 병에서 회복되게 되었다. 그 후 상담을 배우게 되고, 본래의 나를 알게 되고, 마라톤을 하면서 지금 70대의 활력이 넘치는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이 버린 것은 하나님이란 이름의 자신 속에 있던 의존의 대상 즉 자신의 의존성이었다. 의존성을 버리자 이 아이는 자유로워졌으며 힘이 생겼으며 자유로워지고 독립하게 된 것이다. 삶이란 처음에는 종으로 살다가 주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얼마동안은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다가 때가 되면 독립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학생도 잠시 선생님이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을 따르다가 때가 되면 자신의 길을 가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영적인 상황에서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다가 때가 되면 의존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 변하는 것은 내가 종에서 아들로, 주인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아들로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로 산다는 것은 종으로 살지 않고 주인으로, 나로 산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일을 만나든 내 속에 하나님의 본성을 잃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성경이 사실이냐, 아니야는 논쟁이나 사람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한 사건과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나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 것 때문에,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억울해하고 논쟁하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어둡게 만든다. 그러나 주인은 성경이 사실인 것과 이야기인 것에, 또 예상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성경 속에 더 많은 진리를 발견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자신의 삶을 잘 만들어간다. 하나님은 삶으로 다가오시기에 매 순간 누군가를 의존하는 종으로 살지 말고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1-01
  • [목회자 칼럼] “감사드립니다”
    지난 12월 11일(목) 오전 11시에 ‘(사)경남기독교총연합회 제16차 정기총회’가 대표회장 직을 맡게 될 문수석 목사가 시무하는 창원벧엘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지역 교계의 어른들과 경남 18개 시/군 기독교연합회(2천5백여 교회, 3십여만 성도)의 백여 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모든 총회절차가 잘 진행되고 대표회장을 비롯하여 새로운 임원진들이 구성이 되었다.개인적인 능력과 교회와 교단적 형편으로 본다면 벅찬 자리요 직무임에도 지난 1년 동안 별다른 하자 없이 제15대 대표회장 직(2013년 12월~2014년 12월)을 감당해 나올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린다. 그 하나님의 은혜! 지난 1년을 회고해 보면서 몇 가지로 축약시켜 본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마산재건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성전건축(2012년 11월~2014년 5월)이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서도 교회는 기도와 물심양면으로 담임목사의 연합사역을 적극 뒷받침해 주었다. 그와 같은 은혜는 평소에 쌓아 나온 담임목사와 성도간의 신뢰, 개교회 중심이 아닌 보편적 교회론, 재건교단의 위상 회복을 위해 힘써 나옴에서 주어진 열매가 아닌가 생각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실무임원진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경남지역에선 가장 큰 기독교연합체이기에 임역원 규모만 할지라도 무려 팔십여 명에 가깝다. 그래서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 8명으로 구성된 실무임 원단 중심으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간다. 교파와 교단과 개인적 영성이 다름에도 섭섭했던 일이 전혀 기억에 없을 정도로 실무임원들은 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즐겁게 동역해 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교단의 형제교회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영남노회 산하의 교회들은 대부분 농촌교회들이고 미자립교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 행사 때마다 십시일반으로 기도와 물질로 동참해 나왔다. 그런 협력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는 실무임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고 감사했던지... 교단이 작아서인지 모르나 재건교회는 가족 같은 사귐을 누리고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지역 내 많은 교회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본 연합회의 무게와 사역의 규모로 본다면 큰 교단, 큰 교회의 지도자가 대표회장직을 맡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조건에 해당되지 못한 나에게 그 무거운 직무가 주어졌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무거운 직책에 대한 두려움, 어찌할꼬? 다른 하나는, 감사제목, 작은 교단, 작은 교회도?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협력해 줌으로 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지역 교계 지도자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어떤 사역이든 절대 필요로 하는 것은 선배들의 경륜과 지도와 도움이다. 마산에서 이십여 년 목회해 나오면서 확인되는 것 중의 하나는 교계 지도자들 간의 친밀함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부족이 많은 나는 특히 본 연합회의 대표회장 직을 거쳐 가신 10분의 명예회장, 그 분들의 한결같은 도움을 많이 받았다.여섯 번째, 하나님께서는 지역의 ‘기독방송+언론사+기업체’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의 사역에도 사방에 알림이 필요하고 물질적 후원이 필요하다. 교회들, 연합단체들이 해마다 경험하는 감사제목이겠으나 금번에도 그분들로부터 많은 편리와 지원과 도움을 받았다. 교회와 연합회에서도 저들의 선교사역과 성도의 기업들이 형통하도록 지속적인 기도와 관심을 보여야할 것이다. 피곤할 때 생기는 입가의 물집! 며칠 전에 나의 입가에 마치 훈장처럼 물집이 생겼다. 대표회장직이 나에겐 무거운 짐이었나 보다. 어제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별다른 하자가 없었기에 다시 한 번 연합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와 그 직책을 나름대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1-01
  • [서임중 칼럼]이름보다 삶이 중요하다
    전국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갔을 때 들은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3박 4일 일정의 강사가 광고되었는데 서임중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왔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임중 목사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아도 그 사람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삶인가를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의 소유자인가를 알 수 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작명소가 있어서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가히 몸부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도 작명소가 호황을 누린다고 한다. 이름 짓는데 수십, 수만 원까지 들여가면서 이름을 짓는 경향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성경에서도 이름을 짓는 일에는 아주 신중했다. 모든 성경의 위인들이 이름대로 살다가 이름대로 죽은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 생활환경, 기타에서 취한 것이 여러 가지로 보여진다.동·식물에서 이름들을 취하여 명명했는데 다말은 종려나무, 데라는 염소, 레아는 들소, 라헬은 양, 갈렙은 개, 드보라는 벌, 요나는 비둘기 등이다.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성질에 따라 지은 것도 있다. 에서는 털 많은 자, 십보라는 아름다움 등이다. 그리고 부모의 경건성, 감사 등에 의해 지어진 이름도 있는데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등이다. 사건과의 관련해서 지어진 것은 야곱이 그 막내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으로 바꾼 것은 흉조(凶兆)에서 길조의 이름으로 바꾸는 데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해산하여 낳은 아이를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이라고 한 것이 그 예다. 특별한 일로 이름이 바뀐 것도 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요셉이 사브넷바네아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된 일들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예언적, 상징적으로 명명된 경우도 있고, 하나님에 관계된 이름도 많으며, 가나안의 신 바알과 관계된 이름도 나타난다. 신약시대에는, 여러 나라의 국어가 사용되어 그리스명, 라틴명, 히브리명 등의 이름, 혹은 한 사람이 둘이나 세 가지 이름을 가진 경우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름을 잘 지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이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이름을 빛내는 것이 더욱 유명인(有名人)이 되는 것이다.예수라는 이름은 참으로 존귀한 이름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는 존귀한 이름들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삶이 이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유다’라는 이름은 ‘그를 찬미하자’, ‘그를 기억하자’라는 아주 좋은 의미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가장 실패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중요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약점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지도자의 지도력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지배자로서의 자기모순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며 그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소위 유명(有名)한 사람들의 이름이 다음 세대에까지 아름답게 우러러 존경받지 못하고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름이 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기의 이름이 되게 하여야 하지만 자기 스스로 유명인(有名人)에 도취해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삶이 이름 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의 삶이 이름 되게 하여야 한다. 목사와 장로답게 살아 목사, 장로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어야 한다.새해가 밝았다. 365일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높여졌으면 좋겠다. 이 땅의 온 교회가 그렇게 아름다움을 연주했으면 좋겠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15-01-01
  • [함께 생각해 봅시다]현역은 모르는 은퇴목사의 심경
    현역은 은퇴목사의 심경을 몰라은퇴한 후 비로소 실감하게 돼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지 않은가.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내 동무 어디 가고 나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어느 은퇴 목사는 이 노래를 은퇴 목사의 주제곡이라고 했다. 왜일까. 은퇴하고 나면 갑자기 주변환경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든다. 주변에 그토록 많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외로히 혼자 앉아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면 외롭기 한이 없다. 여러 해 전 얘기다. 은퇴한 P 목사에게 현역으로 있는 후배들이 물었다. “목사님, 은퇴를 해보니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의 대답은 “말도 마세요. 말로는 어떻다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한번 겪어보세요” 하더니 그 건강하던 분이 은퇴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목사들이 누구나 은퇴하기 전에는 은퇴목사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젊음을 경험한 노인들은 젊은 이들을 이해하지만 늙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 이들은 노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솔직히 저부터 그러했다. 은퇴목사 한 분이 사직동교회에 출석하셨다. 주일마다 설교하던 목사가 매주일 예배참석만 하고 가는 것을 보면서도 은퇴목사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은퇴한 후에 생각하니 그 어른의 따분한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후회된다.그러면 은퇴목사가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뭔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인 점은 은퇴하고 나면 고독하고 적적하다는 것이다. 시무할 때에는 연일 해야할 일이 있고 가야할 곳도 많고 초대를 받기도 하고 매일 시간을 쪼개어 일정을 소화한다. 은퇴하고 나면 하룻밤 사이에 사정이 달라진다. 누구 한 사람 차 한 잔 같이 하자는 사람이 없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전화도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회가 운영하는 노인대학에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무할 때엔 모든 교인들의 관심이 담임목사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교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교인들의 관심은 새 담임목사에게 집중된다. 공예배 시간에 기도할 때에도 멀리 해외에 가 있는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면서 은퇴목사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건 새 담임목사가 듣고 어떻게 생각할런지 몰라서 그런다는 말이 있다. 끝으로 은퇴목사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큰 대접은 무엇인가. 그건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역으로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한다. 자기가 은퇴를 해 봐야 비로소 실감이 나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1-0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