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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말씀] 종말론적 삶 (고린도후서 6:1~2)
    인생에 중요한 세 가지는 ①지금 ②여기 ③당신이다. 금은 세 가지가 있는데 소금, 황금, 지금이다. 소금은 간을 맞추고 맛을 내고, 황금은 변하지 않으며 비싸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금 중에 지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지나간 과거를 아쉬워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고, 바로 오늘 현실에 충실한 것이 가장 지혜롭다. 순간이 시간이 되고, 시간이 세월이 되고, 세월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인생이라는 시간여행에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사람과 아름다운 기억을 쌓아가면서 오래오래, 길게 지낸 사람은 그 시간이 추억이고, 행복이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과 아픈 기억을 남기면서 오랜 시간을 버틴 사람은, 그 시간이 상처가 되고 내면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사탄 마귀는 시간차 공격을 한다. 성도가 잠시 막간이라도 방심할 때는 어김없이 빈틈을 파고 든다. 호시탐탐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광명한 천사처럼 화장을 하고 분장을 하고 치장을 하고 환장을 하고 덤빈다.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셨다. 미루고 연기하는 것이 가장 현대적인 죄악이라고 한다. 게을러 터져서 미루다 보면 결국은 거짓말하고, 변명하고 핑계를 대고 결국은 죄를 짓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음에 보자는 사람 안 무섭고 다음에 잘 해준다는 사람 별 볼 일 없다고 한다. 성경의 달란트비유에서 주인에게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칭찬 받은 이유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인생은 풀과 꽃같이 시들고 마르고, 아침안개와 같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때를 분별하며 살아가라. 인생에서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당신 중에 여기이다. 바로 필드, 현장이 중요하다. 선교현장에 가면 거기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현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생생한 성령의 역사가 있다. 기도의 현장, 사역의 현장을 확보하라, 확대하라, 확신하라. 모세의 호렙산, 세례 요한의 광야가 현장이다. 탁상공론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현장에 가야 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위치선정이 탁월하다.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지금 여기, 어려운 골짜기, 징글징글한 현실, 현장을 떠나지 마라. 현장이 혼란하고, 신통찮다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돌파해야 한다. 고약한 현장, 징글징글한 현장을 뚫고 나가면 그때 노하우가 생기고,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시험을 감당케 해주시고, 자신감이 붙게 된다. 살아계셔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이 쌓이는 것이다. 죄인의 길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는 가지도 말고, 서지도 말고, 복 있는 자리를 찾아서 기도의 자리, 찬양의 자리, 축복의 자리를 지킴으로 복의 길목을 지키게 된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그 땅 가운데 그 사람을 들어 쓰신다. 오늘이라 일컫는 지금 하루를 은혜의 때, 절정의 날로 삼아서 베스티스트, 모스티스트한 삶을 이 땅에 건설하고 주인 닮은 정원을 조성하고 아름다운 신망애인 공동체를 만들어라. 세 번째는 당신이 소중하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 다 복을 받아도 내가 망한다면 의미가 없다. 우선순위에서 예수님이 첫 번째(Jesus first), 다른 이웃은 두 번째(Other second), 당신은 세 번째(You third)일 때 기쁨(Joy)이 찾아온다. 이 사람 말을 듣고 이리가고, 저 사람 말을 듣고 저리가고, 다른 사람들 말 때문에 내 마음을 어지럽힐 이유가 없다. 마음을 챙겨서, 마음을 다하여서 오직 주만 따라가리라.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아시고, 나의 집안을 아시고, 나의 체질을 아시고, 내게 맞춤형, 주문제작형, 기능성 복을 주신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주님의 관심은 오직 당신에게 집중되어 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당신이 딛고 서 있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바로 당신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붙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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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목회자칼럼] 효율지상주의에 물든 나의 사고 방식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다. 적은 비용을 투자해서 큰 이익을 남기는 것이 기업의 생존 전략이자 경영 철학이다. ‘효율성’이라는 단어는 기업의 경영을 밝게 하고, 미래를 준비한는 핵심 가치이다. 기업 경영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효율성’을 그대로 가정으로 데려 와보자. 가정의 목적이 이윤이 될 수 있을까? 적은 비용을 투자해서 큰 수익을 남기는 것이 자녀를 양육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 너도나도 가성비를 중심으로 한 효율성을 따질 때, 가정에서도 가성비가 좋은 관계, 가성비가 좋은 양육, 가성비가 좋은 부부사이가 가능할까?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면, 이 아기에게는 온통 소비하는 일만 발생한다. 경제적 소비, 정서적 소비, 심리적 소비 등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한마디로 밑지는 장사다. 그러나 아이는 온 가족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조건없는 기쁨, 무한한 사랑, 경외로운 생명을 선물한다. 이건 효율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효율을 넘어선 가족 관계, 사랑의 가치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물질만능주의가 사회 속에 자리잡으면서 어느덧 효율지상주의가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다. 이 일이 경제적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냐, 되지 않느냐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버린 것이다.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나의 재능, 직업으로 인한 사회의 기여도 등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연봉, 휴가 등을 고려하는 풍조, 가정을 섬기고 돌보아야 할 언약 공동체로 보는 것이 아닌 기능적인 부분만 하고 살아가는 현상 등이 모두 효율지상주의에 갇힌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그러나 여기, 효율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효율적인 측면으로 따지자면 평생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효율성으로 보자면 완전 말도 안되는 선택이다. 경제적으로 따지자면 이익될 것이 하나도 없는 행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이게 바로 최고의 효율, 사랑이라는 것을 마치 온 몸으로 보여주듯 말이다. 성경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 전체가 인생 최고의 효율이자 가치인 사랑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독교 사상임을 나타내고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효율지상주의에서 최고로 꼽는 검사와 의사들의 갈등이 종종 드러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검사와 의사의 민낯을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음에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들고 있는 그들을 선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효율지상주의에 찌들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째, 내가 먼저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돈을 낭비하고 마음대로 살다 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아버지를 포함한 온 공동체가 송아지를 잡으며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 주 내용이다. 세상의 논리라면 효율성이 전혀 없지만, 성경의 논리로 힘든 사람을 품고 내가 먼저 나누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이다.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며 나누는 것이 바로 효율지상주의를 넘어 한걸음 나아가야 할 실천이다. 둘째, 기쁨에 이어 잔치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가진 것을 내어놓고 이웃과 함께 잔치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가 살아있는 사회이다. 내가 내어놓아야 할 잔치 비용이 아까워 기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퍼할 수도 없는 상태. 이런 모습은 어쩌면 하나님 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마음을 개혁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회, 함께 나누며 기뻐하고 잔치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셋째 함께 선한 일을 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선한 일’을 ‘함께’하지 않는다. 주로 이익이 되는 일을 혼자 한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내는 언약 공동체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하며, 내가 먼저 낮아지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세상에 불고 있는 맹목적인 경쟁의 광풍에 저항하며 함께 선한 일을 하는 관계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품는 자들이 될 것이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되돌아보자. 우리 공동체는 과연 ‘교회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효율을 추구하는 집단인지, 아니면 진정 형제 자매가 하나가 되어 ‘사랑’이라는 가치를 살아내는 언약 공동체인지 말이다. 이 언약 공동체를 내가 먼저 세워나가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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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6.25 전쟁기 부산에서의 교회
    6.25전쟁기 부산지방의 기독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부산에서 기독교회는 1892년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혹 1893년) 설립이후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는데, 1896년에는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 1904년에는 엄궁교회(현 은혜로교회)와 하단교회, 1905년에는 항서교회, 수안교회, 금성교회, 기장교회, 구포교회가 설립되고, 이어 두구동교회(1906, 소실됨), 대연교회(1907), 초읍교회(1909), 사상교회(1909), 상애원교회(감만동, 1910) 등이 설립된다. 또 수영교회(1919), 부전교회(1932), 남부민정교회(현 항남교회, 1936), 해운대교회(1937) 등이 설립된다. 이렇게 되어 1940년 당시 부산 지역의 장로교회는 23개 처였고, 다른 교파 교회로는 부산성공회(대청동, 1903), 수정동성결교회(1918. 4), 온천중앙성결교회(1918. 9) 그리고 구세군부산중앙교회(1935) 등 몇 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당시 부산지역 인구는 28만 정도였고 30-35개의 교회가 있었다. 해방이 되자 여러 교회가 설립되는데, 은혜교회(현 새부산진교회, 1946), 성산교회(1947), 성경교회(현 충일교회, 1948), 거제교회(1948), 거성교회(1948), 온천교회(1948), 항도교회(1948), 복음교회(현 신평로교회, 1949), 부민교회(1949), 부산남교회(1949), 제2영도교회(1949), 제3영도교회(1949), 서문교회(1950) 등이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교회당을 접수하여 시작된 교회도 있었다. 그것이 광복교회(1945. 11)와 부산중앙교회(1945. 12)였다. 일제 통치기 부산에서 일본인 교회가 가장 많았을 때는 7개 교회가 있었는데, 해방 당시 대표적인 두 일본인 교회가 광복교회와 부산중앙교회로 개편된 것이다. 전자는 윤인구 목사에 의해, 후자는 노진현 목사에 의해서였다. 해방 후 부산에는 여러 교회가 신설되는데, 1949년에는 장로교회만 31개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중 19개 교회는 부산부에, 12개 교회는 동래부에 소재하고 있었다. 해방 이전까지 부산지방 교회는 교파적으로 볼 때 장로교 중심이었고, 해방 이전 부산에는 성공회 1개처, 구세군 2개처, 성결교회 2개 처뿐이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부산에도 장로교 아닌 타 종파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한다. 예컨대, 성결교의 경우, 동광성결교회(1945. 12)와 영도성결교회(1951. 11)가 설립된다. 감리교의 경우, 1948년 7월 부산제일교회가 설립되는데, 이 교회가 부산지방 최초의 감리교회였다. 이 교회는 1949년 4월 부산 서구 동대신동 1가 49번지의 적산 가옥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했다. 이어서 부암감리교회(1951.1), 해운대감리교회(1951.1), 수정교회(현 성일교회), 대교교회(1951. 3), 시온중앙교회(1951. 9), 보수교회(1952. 1), 영도중앙교회, 온천교회 등이 설립된다. 1950년 말에는 부산의 장로교회는 41개 처에 지나지 않았고, 목사 10명, 전도사 23명으로 교역자는 33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다른 교파의 교회는 10여 개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부산지방의 교회는 50개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1950년 말 통계라고 하지만 6.25 전쟁 발발 당시 부산의 교회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쟁 기간 중 부산의 교회수는 급증하게 된다. 기존교회로부터의 개척(설립)도 없지 않았으나 교회분규나 내분, 특히 고려신학측(현 고신총회)을 따르는 신앙노선 문제로 기존 교회로부터 분리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기 설립된 다수의 교회는 월남한 피난민들이 세운 피난민교회였다. 6.25 전쟁 전후 부산지방으로 월남 피난민들이 유입하게 되자 피난민들은 두고 온 북한 지역의 교회를 부사에 재건하는 등 피난민 교회가 설립되는데, 약 50여개 처로 파악되는데 장로교계가 40여개 처에 달한다. 이들 장로교계 피난민 교회를 설립 년 중심으로 정리하면, 북성교회(현 대성교회, 1950. 2), 성도교회(1950. 12), 구덕교회(1951), 영락교회(1951. 1. 7), 서북교회(1951. 2), 철산교회(현 산성교회, 1951.3), 선천교회(현 산성교회, 1951.3), 우암교회(1951.3), 영도교회(1951), 평광교회(1951. 6), 수정동교회(1951. 7), 평북교회(현 산성교회, 1951. 8), 평동교회 (1951), 남성교회(1951. 10), 산정현교회(1951.10), 평양교회(1951.6.10, 평광교회와 대청교회로 분리된다), 모라교회(1951), 양정중앙교회(1951), 연산제일교회(1951), 원산제일교회(현 성덕교회, 1951. 12), 서북교회(현 동광교회, 1952.1. 6), 거양교회(1952. 1), 한양교회(1952. 3. 2. 이 교회에서 그해 6월 남부민교회가 분리되었으나 1973년 은성교회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삼성교회(1952), 영도중앙교회(1952), 부산서교회(1952. 4. 27), 감만교회(1952. 6), 신암교회(1952. 10), 양정교회(1953. 7), 영주교회(1953. 8), 명신교회(1954. 5) 등이다. 그리고 감리교회로는, 원산지역 피난민 중심의 부산제2교회(현 충무로교회), 해주 출신 교인들로 구성된 일신교회, 평양 출신 중심의 시온중앙교회, 그리고 서울아현교회 성도들 중심의 보수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이렇게 되어 1953년 당시 부산에는 16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부산을 방문한 호주빅토리아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조지 앤더슨(안다손, George Anderson)은 당시 부산교계인사들의 정보를 종합하여 당시 부산에는 156개 교회가 있다고 보고했는데 상당힌 신뢰할 만 하다. 그때로부터 10년 지난 1965년 당시 부산에는 300여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1년 당시 920-950개 교회가 있었고, 현재 부산에는 1800-1850여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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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7-05
  • [성서연구] 무리를 둘러보시고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이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높은 긴장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면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는데, 이는 유대 지도자들이 볼 때 아무 일도 하면 안 되는 안식일에 추수라는 일을 하는 죄로 보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를 비난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면서 제자를 옹호하셨습니다. 이런 긴장이 이미 흐르는 가운데,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과 이들이 다시 마주친 것이었습니다. 마침 회당에는 오른손이 마른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장애인은 비참했습니다. 장애는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되었고, 성전에서도 차별받아 이방인의 뜰까지만 갈 수 있었습니다. 성전 가장 바깥은 이방인의 뜰, 그 안이 유대인 여성의 뜰, 그 안이 유대인 남성의 뜰이었습니다. 더 들어가면 제단이 있는 본래의 성전 뜰이고, 그 안에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건물이 있었습니다. 장애인은 이방인의 뜰까지만 갈 수 있었기에, 사도행전 3장의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장애인도 여성의 뜰에 들어가는 입구인 미문 앞에서 구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오른손이 말랐다는 것은 그가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음을 의미했고, 그는 가난했을 것이며, 회당에는 왔지만, 아무도 그를 중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시당하고,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지 엿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 되며, 이것도 일이라 여겼습니다. 간병하는 사람은 안식일에는 병세를 호전시키는 것도 치료라는 일을 하는 죄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정말 이상한 법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엿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의 안타까운 생각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시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그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실 때부터 자신의 병을 고치실 것을 기대하면서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보는 순간 가슴이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척을 지고는 유대 사회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를 고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은 잠시 갈등했을 것입니다. 일어나 한가운데 서면,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을 게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기로 결단했습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한가운데 섰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리고는 손 마른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순종하자,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손을 내밀라>고 하기 전에 <무리를 둘러보셨다>는 것입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를 둘러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아무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나를 가로막아도, 아무리 케케묵은 안식일 규정이 나를 가로막아도, 이로 인해 내가 미움을 받고 죽더라도, 나의 사랑을 멈출 자는 아무도 없다. 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려 한다. 보느냐? 너희도 은혜가 필요하지 않느냐? 왜 보고만 있느냐? 너희도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너희도 마비된 너희 인생을 내 앞에 가져오라. 내가 너희도 고치고, 은혜를 베풀 것이다>란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당 안의 다른 무리들도 인생이 마비된 사람들이요, 그들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절실했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마비된 인생이 펴지는 복을 얻을 것입니다. 모두가 은혜의 주인공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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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소강석칼럼] “18년째 이어온 보은행사 이야기”
    지난 화요일은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침에 TV조선 ‘뉴스 퍼레이드’ 생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태생이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저녁형 인간입니다. 그래서 젊을 때 새벽기도하는 게 참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피곤하다가도 저녁만 되면 눈이 반짝반짝 뜨이고 머리 회전이 팍팍 돌아가는 걸 느끼죠. 그런데 그날은 일찍 일어나서 분명히 찬물로 세수를 하고 출발을 했는데, 차 안에서도 졸려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죠. 생방송이란 편집을 하지 않고 즉문즉답을 적절하게 잘 해야 하는 것인데, 저는 현장에 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스튜디오로 들어갔습니다.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막상 인터뷰에 응하려고 하니까 목이 많이 잠겨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간 후회를 하였습니다. “물도 좀 마시고, 목소리도 고르게 발성연습도 하고 들어갈 걸 잘못했구나….” 그런데 끝나고 나올 때 앵커께서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목사님, 아주 적절하게 잘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수십 건의 문자가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내용이 “목사님, 너무 잘 하셨어요. 다큐 50분짜리보다 훨씬 더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요. 목이 잠겨서 몹시 불편했고, 워딩도 100% 만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에요. 꾸밈없이 순수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목사다운 목소리였습니다.” 그런 문자가 왔습니다. 이튿날까지 200통이 넘는 문자가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TV조선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피플 퍼레이드 시간에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아닌 목회자를 불러 인터뷰를 한 것이 방송사로서는 큰 결단을 해야 했으리라고 봅니다. 돌아오면서 전날 있었던 평개원 간사들의 모임에 대한 피드백 문자가 몇 개 떠올랐습니다. 이분들은 매일 교회에 출근을 하셔서 몸과 시간과 물질로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어찌 이분들뿐이겠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생각났습니다. 특별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은 김종대 장로님이었습니다. 이분은 18년째 참전용사 초청행사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해 오셨습니다. 수년 전 장로님께서는 후두암으로 성대를 잃으셨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전문 닥터들이 생존하는 것도 어쩌면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굳센 믿음과 강한 신념으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해 왔습니다. 후두를 제거하면 음식 삼키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밥을 점심까지 씹어서 삼켰다고 합니다. 또 점심을 저녁까지 씹어서 삼키고, 저녁식사도 주무시기 전까지 씹고 또 씹어서 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살아야 합니다. 소강석 담임목사님의 사역을 돕고 6.25 참전용사 행사를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라면서 그는 성대를 잃은 후에도 이메일로 부지런히 미국과 소통을 해서 지금까지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겨오셨습니다. 올해는 텍사스 주의 달라스에서 행사를 합니다. 왜 그곳으로 가게 되었냐면, 그 지역에서 우리 교회 초청을 받은 참전용사들이 너무 감동을 받아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도 후원을 하였는데요. 그래서 그곳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김종대 장로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래서 그날 인터뷰를 하고 난 후 장로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물론 장로님은 후두를 잃어 전화로 통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께 “장로님 덕분에 인터뷰를 잘하고 왔습니다. 장로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김종대 장로님을 생각할 때마다 생명보다 귀중한 게 사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순간 또 한 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강종직 장로님이었습니다. 지난 주 장로회수련회를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한 게 아니라 장로님들의 말을 다 경청했습니다. 대부분 다 담임목사의 목회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건강을 염려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좀 약간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때 강종직 장로님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자기 생각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서도 안 돼요. 우리 목사님은 전적으로 우리와 다른 분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목사님께 순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처럼 강직한 발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아주 엄숙하고 숙연해진 것입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우리 교회는 18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보은이 한 개인의 인격이라면, 보훈은 한 국가의 품격이죠. 우리 교회는 적어도 보은을 넘어 보훈의 정신을 함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아니 18년 동안 이어온 보훈행사의 스토리를 만들어낸 교회죠.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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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시사칼럼] 국격을 떨어뜨리는 사람들, 국격을 끌어올리는 사람들
    언젠가부터 “국격(國格)”이란 말이 회자되는데, 사실 이 말은 그 유래도 불분명하거니와 2011년에 들어서야 표준어로 지정될 정도로 본래 익숙하여 자주 쓰던 용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사용빈도가 증가한 듯합니다. 최근 국내의 M경제지 사설에는 “국격”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칼럼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국격 떨어뜨리는 디올백 · 기내식 특검 모두 부적절하다”(6. 6). 누가 국격을 떨어뜨린다는 말일까요? 과다한 기내식 비용을 지출한 전 대통령의 부인입니까, 아니면 선물의 정도를 상회하는 명품 가방을 받고서도 아무런 해명조차 하지 않고 있는 현 대통령의 부인입니까? “영부인의 뇌물수수 의혹을 덮어주는 대통령”입니까?(야당 대변인, 2. 23) 영부인의 단독외교를 주장하다가 혼란을 자초한 전 대통령입니까?(J일보, 6. 3) 대통령의 해외순방취소가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입니까(야당 원내대표, 2. 16), 아니면 이번에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해외순방을 감행하는 행동입니까?(윤 모, 배 모 여당 의원, 2. 23) 지금부터 30여 년 전 바로 이맘 때(1993. 6. 7)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켐핀스키호텔(Kempinski Frankfurt)은 갑자기 찾아드는 한국인들로 특수를 누렸습니다. 삼성의 후계자 이건희 회장이 전 계열사의 임·역원들을 모두 소집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신경영(新經營)선언’을 했는데, 그 핵심을 한 마디로 알려주는 말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 그리고 2년 후 중국 베이징에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나라는 기업경쟁력은 이류, 행정력은 삼류, 그리고 정치력은 사류”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평하기를 이류에 불과하다던 삼성이라는 기업은 뼈를 깎는 혁신을 이루어 냈습니다. 1995년 당시 통화가 잘 안 된다는 불만이 폭주하던 휴대폰 15만 대를 시가 500억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는 퍼포먼스까지 감행하더니, 2002년 휴대폰 4,500만 대를 팔아 일약 3조원의 수익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류에 불과하다던 정치는 어떻습니까? 혁신은커녕 지금 현재는 오히려 국격을 갉아먹는 적폐(積弊)로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며칠 전 이제는 범세계적인 팝그룹이 된 비티에스(방탄소년단, B. T. S.)의 일원이자 맏형인 김석진이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다는 소식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외신을 타고 퍼져나갔습니다. 역시 복무 중인 구성원들이 휴가를 얻어 축하해주러 왔고, 팬덤(fandom)들도 다양한 플래카드와 현수막과 풍선 등을 내걸고 축하했지만 현장에 나타난 이들은 적었습니다. 앞서 소속사에서 “전역일은 다수의 장병이 함께 하는 날이니 별도의 행사가 없으며, 혼잡에 따른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팬 여러분께서는 현장 방문을 삼가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회사에서 팬들까지, 교양과 배려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비티에스는 종종 전설의 비틀즈를 소환합니다. 빌보드 음악순위에서 최근 10년 간 가장 많은 1위곡을 냈고(6곡), 둘은 발표한 솔로 곡마저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여당의 혁신위원장을 포함하여 이들의 군역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얼마나 비등했습니까? 심지어 특례 조항의 신설 취지로 병역법 개정이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당하게 군대에 입대했고, 최선을 다해 병역을 마쳤거나(특급전사)성실하게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조교) 중입니다. 무엇이 국격을 떨어뜨리고 끌어올립니까? 전술한 사례들에서 문제되는 부분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이를 합쳐서 ‘공정(公正)’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같은 사안이라면 같은 절차나 같은 실제가 똑같은 원칙과 잣대에 의해 적용되어야 합니다. 동일한 사안이라면 남의 경우를 다룰 때나 나의 경우를 다룰 때 똑같은 원리와 과정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정(公正)’입니다. 한국의 정치권은 괄목상대한 경제력이나 문화력에 견줄만한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바로 이 ‘공정’이라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래서 국격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는 겁니다. 반면 엠지(MZ)세대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이 대단한 케이팝 가수들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원입대하여 여타 젊은이들과 똑같이 병역의 의무를 실천함으로써 공정의 극치를 보여주며 국격까지 한껏 높여주었습니다. 주께서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이는 또한 지극히 기독교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른 기준의 도량형이나 저울추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거듭해서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레 19:35-36; 신 25:13-15) 바울 사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로마시민권의 특례까지도 포기하고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지 않았습니까? 하늘 보좌까지 기꺼이 버리시고 사람과 똑같이 되신 주님은 어떠합니까? 우리라도 부디 국격을 떨어뜨리는 사람 되지 말고, 국격을 끌어올리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의 국격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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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위드애] 천국과 지옥
    저는 등산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제 아내와 함께 등산을 했습니다. 푸르른 신록의 숲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들이키며, 시원한 바람을 맞고,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제 아내가 “천국이 이것보다 더 좋을까?”라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나무가 있는데, 우리는 살아서도 천국, 죽어서도 천국, 영원한 천국을 살고 있으니, 지금 이것도 천국을 누리는 것이고, 죽어서는 더 좋은 천국을 누리겠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천국 같았던 기쁨도 몇 시간이 지나자 육체의 상황에 따라 변했습니다. 하산길에 아내의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무릎이 아프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아내는 “지옥이 이것보다 더 괴로울까?”라고 말을 하며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그런 아내가 안쓰러웠지만, 함께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도와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동행했습니다. 나의 무릎이 아프지 않다고 아픈 아내를 뒤로 내버려 두고 빨리 내려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무릎이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이 제 아내이고, 제 아들과 딸의 엄마이고 우리는 가족이니까요. 하지만 가족이 아닌 무심한 등산객들은 저와 제 아내를 추월하여 앞서서 내려갔습니다. 그분들을 비난하거나 원망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분들도 빨리 내려가서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까요. 육체의 상태에 따라서 똑같은 환경이지만 천국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장애 때문에 평생을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평생을 지옥처럼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분들의 아픔을 똑같이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함께 안타까워하며 동행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니까요. 뇌출혈로 편마비 상태가 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어르신의 가족이 여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70대 노부부가 휠체어를 밀면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부만 왔으면 너무 힘들어서 여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족은 사위와 딸이 함께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힘이 센 젊은 사위가 장인어른을 도우며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가족은 천국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동감하고 함께 아파하며 동행하는 삶이 천국을 누리는 삶이 아닐까요?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아파하며 함께 울기도 하시고, 우리의 지옥 같은 삶이 천국 같은 삶이 될 수 있도록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천국을 누리는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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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은혜의말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삼상 15: 17-23)
    “리더(leader-지도자)는 리더(Reader-읽는 자)여야 한다.”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이 말을 신앙적인 언어로 바꾸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은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 겸손한 마음입니다.(17절) 사울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작게 여길 때 &#8211; 겸손할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사울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9절을 보면,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좋은 것을 남겼다고 했지만, 사실은 값지고 좋은 ‘전리품’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승리는 내가 한 것이라는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2>12절을 보면,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은’ 하나님의 흔적이 아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아말렉을 이기게 하셨는데, 사울은 자기가 이긴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겸손을 잃으면 하나님의 은혜도 잃게 됩니다. 겸손은 자아를 통제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나의 나 됨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2. 순종의 제사입니다.(22절)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말씀이 일치하는 삶이 있는 순종의 예배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어떤 제물을 가져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 순종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순종할 마음 없이 거저 습관적인 종교생활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종교적 형식만 갖추고 의식적으로 예배할 때, 그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고백이 일치하기를 원하십니다. 순종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듣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진정한 회개입니다.(30절) 사무엘이 책망할 때, 사울은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 자신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21절) 변명으로 일관할 뿐 전혀 회개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왕을 버렸다고 할 때’ 30절을 보면, ‘자기가 범죄 하였지만 지금은 자기의 죄를 사하고, 자기와 함께 제사하러 올라가 달라고 간청하지요.’ ‘자기 체면’ 때문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사무엘을 붙잡고 늘어진 것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 나를 ‘왕 대접’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 했을 때 멋진 변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진실한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참된 회개는 범한 모든 죄를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겔18: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다하여 죄를 고백하며 그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을 향해 회개의 문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진정한 회개의 문을 활짝 여시고 죄에서 돌이켜, 진실한 믿음의 길로 달려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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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목회자칼럼] 부산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평양까지
    새로운 한국교회의 부흥과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노래하거나 말할 때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백두에서 한라까지”다. 한국교회 부흥의 시작은 1907년 평양을 기점으로 전국의 교회로 확산된 평양대부흥운동이다. 평양 장대현교회에 연합집회로 모였던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역사가 나타났다. 당시 런던타임즈는 “마치 밖으로부터 뭔가 물밀듯 밀려드는 강력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한 듯했다.”고 보도했다. 선교사, 지도자, 성도들의 변화와 헌신으로 부흥의 불길과 성령의 파도는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에 경건하고 건전한 부흥 운동의 모델이 되었고, 나아가 한국교회를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흥을 말할 때 그 역사의 현장과 시작점이 된 평양과 1907년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코로나 19가 지나간 한국교회는 위기의 상황을 넘어 소멸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증가했고, 예배 의식은 약화 되었고, 순종과 헌신과 봉사의 열정은 식어졌다. 세상과 국가 공동체는 할 수만 있으면 쾌락과 방종 그리고 타락과 무신론의 문화를 파종하기에 여념이 없다. 황금만능과 자기 중심주의적인 삶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잠식하고 있으며, 철저하게 현실에 안주한 의식은 다음세대를 점점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어른 세대는 복음화율이 20%, 젊은 세대는 10%, 청소년 세대는 미전도종족인 3~5%, 유치원은 1~2%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부산에 소재한 1830여 교회 중, 주일 예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가 상당수다. 청년회가 없는 교회가 절반을 상회하고,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부지기수다. 교단을 초월해서 신학교는 정원미달이 고정화되고, 젊은 신학생보다는 중년의 신학생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저출산의 문제는 세상보다 교회 안에서 더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반인들의 출산율이 0.74:1이라면 교회 청년들은 0.62:1이다. 이슬람은 자녀가 알라의 축복이라고 교육함으로 한 가정에서 약 8명의 자녀를 출산하고 있다. 이슬람은 자녀 출산을 통해 2050년까지 지구 인구의 절반을 무슬림화 하겠다는 계획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열패감과 좌절 그리고 절망과 탄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을 허비해야 할까?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자리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야 한다. 깨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의 자리로 함께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믿음의 사람은 정말로 위대하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했고, 엘리야는 비가 없던 땅에 비를 오게 했고, 바울은 성경과 교회를 남겼고,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9월 8일 해운대성령대집회는 누가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이웃교회가 무너지면 다음은 우리 교회 차례다. 그러므로 부산에 성령의 파도와 바람과 물결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나와 우리 교회를 위함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만 있었으면 멸망하지 않았다. 도시 전체와 의인 10명이 대등의 관계에 있었다. 하나님은 오늘, 부산과 한국교회를 살릴 의인을 찾으신다. 그 찾으시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모두가 홍보대사, 후원자, 함께 백사장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개교회의 사역은 그다음 주에 해도 된다. 해운대성령대집회는 10년만에 이루어지는 연합집회이며 공동체적 기도의 현장이다. 이를 통해 반드시 부산과 한국교회에 성령의 역사, 부흥의 바람, 부산대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부흥의 표현과 성령 임재의 역사성이 바뀌기를 바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평양까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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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신학자 구두인 신부
    한국에서 일한 저명한 신학자 구두인(具斗仁, Charles Goodwin, 1913-1997) 박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려신학대학에 입학한 이후인 1972년 혹은 1973년경으로 생각된다. 부산의 보수동 고서점에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논단’ 7집(1962. 10)을 샀는데, 거기에 실린 구두인의 “희랍어와 한국어 발음의 비교”라는 글을 대하게 되었다. 그 때는 희랍어를 공부하기 이전이었음으로 글 내용을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국인들은 서양인들보다 더 정확하게 희랍어 본래대로 발음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짧은 논문이었지만 영어는 말할 것도 없지만 희랍어와 나전어 한글과 중국어까지 비교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연유로 ‘신학논단’ 11집(1972. 6)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히랍어 어려운 말”(γλώσσαι ελληνικαι)이라는 한글로 쓴 논문이 게재되어 있었는데 희랍어 몇몇 단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원의를 바르게 전달하는가를 취급하고 있었다. 이런 글을 대하면서 구두인 교수는 고전어에 박식한 학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가 예일대학교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수득했다는 사실과 그가 성공회 신부로서 선교사 신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비록 그는 신약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는 실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였다. 신약은 말할 것도 없지만 히브리어나 구약에도 박식했고 교회사나 예전, 교리 등에도, 심지어는 교회음악에도 깊은 식견을 지닌 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구두인 교수를 늘 마음에 두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미국 코넷티컷주 하트포트에서 1913년 5월 5일 출생했다. 1931년 성 바울신학교를 거쳐 1935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하여 옥스퍼드에서 수학했다. 1939년에는 미국켐브리지성공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사제서품을 받고 10여 년 간 성공회 신부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60년 예일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대한성공회의 요청으로 1960년 9월 교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성미가엘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에서 교수하는 한편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79년까지 연세대학교 신학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고전어, 성경원전 강독, 신약학 등을 가르쳤다. 이 기간 중에 구약 강좌가 필요하면 구약을 가르치고, 교회 음악 교수가 없을 때는 교회 음악도 가르치는 만능 교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은퇴한 이후에는 성공회 부산교구 휘하의 부산 수영의 성공회 수양관에서 생활했다. 성공회 성직자는 결혼할 수 있으나 그는 독신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가 부산에 살고 있기에 대학자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장로교인인 내가 성공회 신부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든 중 교회연합회가 주최한 세미나가 성공회수양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행사에 참석하면서 구두인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1984년 혹은 1985년이었을 것이다. 당시 성공회수양관은 부산시 해운대구 우2동 1072-55번지에 있었는데 주변에 밭이 있었고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다. 수양과 건물에 주택이 붙어 있었는데 그곳이 구두인 신부의 거처이자 서제였다. 당시 관리인에게 면담을 청했는데 마침 구 신부님이 미천한 신학도를 기꺼이 만나 주었다. 키도 크고 건장했으나 어깨가 완전히 굽어 있었다. 일생동안 공부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신으로 살다보니 그의 이웃이란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그는 고양이 한 마리와 가족처럼 살고 있었다. 그날 구두인 박사는 나를 맞아주었고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나는 그에게 서재(書齋)를 한번 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기꺼이 나를 서재로 안내했다. 책으로 가득찬 한 벽면 책장 위로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커틴을 제치자 값진 고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16세기 간행된 책들이 있었고 성공회 관련 고문헌들, 그리고 한국에서의 성공회 시원에 관한 문서들, 곧 영국인 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의 문서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그가 프랑스 파리의 외방전교회 샤를르 달레 신부(par Ch. Dallet)가 쓴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를 가리키며 이 책을 아느냐고 물었다. 1980년 역간된 안응렬 최석우 신부의 역본은 알고 있었지만 1874년의 불어판 원본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3권으로 구성된 호화 양장본이었다. 내가 소장하고 싶은 그의 고서들이 나를 유혹했다. 이런 고서들 외에도 금영 측우기(測雨器)는 아니었으나 측우대(測雨臺) 같은 것도 있었다. 책장을 커튼으로 가린 것은 햇빛에 책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7년 전인 1990년 ‘성공회의 특징’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 추천의 글을 쓴 이가 대천덕 신부였다. 이 책에 쓴 구두인 신부의 한마디는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내가 속한 교파를 가장 좋은 교파로 여기면서도 다른 교파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경청해야 하고, 다른 교파의 가르침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혹은 우리는 “다른 교파에 대해 존경하면서도 이의를 제기하고,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존중해야 한다.”는 등이다. 그는 1997년 6월 28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8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의 보물 같은 책의 행방이었다. 후에 들으니 성공회대학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 생을 살았던 성공회수양관은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 이곳에는 송원파크빌라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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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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