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1(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8
    아직 다소 이르긴 하지만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금방 느끼게 된다. 아직 푸르름이 남아있지만 그 가운데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나의 눈이, 귀가 그리고 감각이 반응하며 변함없이 주께서 이루어 가시는 섭리를 깨달아 알게 하심에 감사하며 찬송을 드린다. 마트를 가면 햇과일들로 넘쳐 난다. 이 수확의 계절에 내가 거둬들일 열매는 얼마나 될까? 사람은 누구나 주변의 여러 것들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존재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주목받고, 인정받기 또한 원한다. 세상에서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내에서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기대를 하며 살아간다. 사실 씨를 뿌리지 않고 얻을 열매는 없다. 더욱이 베풀지 않고 나에게 올 것을 기대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우리가 말씀과는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나 아직 덜 성숙하여 그러노라고 하면 달리 무어라 할 말이 없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주께서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한번쯤 생각해 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불평, 불만, 서운함을 갖기 보다는 격려, 배려, 위로를 줌으로서 그 가운데서 얻게 될 기분 좋은 기쁨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남을 나보다 더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초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인데 최소한 우리가 이것만 삶속에서 이룰 수 있다면 개인의 행복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을 변화시키고 진정 성숙한 삶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매우 힘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모두가 어렵다. 그래서 도무지 그런 영적인 여유를 부릴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삶이 팍팍하고 고달플지라도 변함없으시고,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옛날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하였듯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노래가 우리의 고백이 되어 주께 드려지기를 소망해 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10-20
  • [목회자칼럼] 시계형 VS 나침반형
    시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시와 분을 아껴 부지런히 초바늘을 움직입니다. 혹시라도 구멍난 시간이 있으면 그 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일로 채우며 하루 24시간, 일주일 168시간을 쉬지 않고 살아갑니다. 순간 순간 파도처럼 거대한 일이 밀려오더라도 거뜬히 일들을 처리하며 일상을 묵묵히 이겨냅니다. 반면, 나침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침반이 목적을 향한 방향을 가리키듯, 인생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관성있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목적이 분명하기에 철학이 있고, 길이 있으며, 그 길 위에서 자신만의 은사를 펼치고 살아갑니다. 유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인류는 지식의 작용으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나은 시대를 열어간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꿈을 꾸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방법이 모두 다릅니다. 오늘도 열심히 지식을 쌓아가는 시계형 사람과 지식이 나아가는 방향을 보고 살아가는 나침반형 사람 모두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현재 우리나라는 어떠한가요? 먼저, 시계형으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은 세계 10위 내외의 경제 성장과 수출입 7위의 규모, K팝과 K한류 문화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잘 사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살았고 ‘빨리 빨리’ 문화답게 빨리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전쟁 후 70년 동안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끌며 선두 그룹에서 리드하고 있습니다. 반면 나침반형으로 한국을 보겠습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저출산율 1위, 교통사고율 1위입니다. 자살률, 출산율 등은 인간의 삶의 질과 관련된 지표입니다. 자살률과 저출산율 1위는 “지금 대한민국은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얼마 전 한 매체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의 현실을 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소위 선진국이라 하는 미국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족, 관계, 행복, 건강” 등을 답으로 꼽았는데, 한국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질” 즉 돈으로 꼽았습니다. 이와 같은 지표가 계속 보이면, 우리는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시계형 속도인지, 아니면 나침반형 방향인지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속도도 방향도 모두 중요하지만, 이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다시 점검해야 할 때라는 것을. 우리 사회와 비슷한 우리 인생도(삶)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지금까지의 ‘내’가 만들어지기 까지 수많은 교육, 미디어를 통한 메시지 등은 부흥, 성장, 열심, 열정의 시계형 속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 목적과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나침반형 방향이 필요합니다. 한국교육, 한국 기독교 교육은 어떤가요? 지배욕과 호기심, 혹은 지적 욕구만을 채우는 결과 중심의 교육, 즉 시계형 교육이 아니었나요? 교육의 목적이 사랑하며 섬기고 배려하는 인간을 만들어가는 가치와 철학이 있는 나침반형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38년 동안 청소년들을 섬기는 십대의벗을 하다보니 한 해 한 해 보이는 것이 다른데, 특히 올해는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 나침반으로 정확히 보이는 듯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철도 함께 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사랑해서 지금까지 사랑의 나침반으로 인도하신 주님이 앞으로도 그 사랑의 나침반으로 인도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3-10-20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한국기독교여자절제회 100주년
    금년은 우리나라 ‘대한여자절제회’가 발족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절제(節制)라는 말이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함’이라는 의미이므로 절제운동이란 우리의 일상에서 근검절약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고 자족하는 안분(安分)한 생활을 생각하겠지만, 물론 이런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술과 담배를 금하는 절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WCTU: World 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는 1883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Willard) 여사에 의해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과 가정과 나라를 위하여’라는 목표로. 특히 술과 담배, 마약의 해독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으로 출발했지만 그 정신은 성령의 열매인 절제생활을 권장하고 보다 성결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시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미국사회에 큰 호응을 받았고, 곧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권과 스웨덴, 일본 등지로 확산되었다. 이 절제운동은 따지고 보면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각성운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음주와 이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였던 리만 비치(Lyman Beecher)는 미국절제협회(Americal Temperance Movement)를 조직하고 금주단연운동을 전개하였다. 1820년대 술(위스키) 가격은 차나 커피, 맥주, 그리고 우유보다 싸게 판매되는 품목이었다. 그러다보니 과도한 음주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830년 당시 1인당 80프루프짜리 술을 1주마다 1.7병씩 마심으로써 연간 순수 에탄올 섭취량이 7갤런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과도한 음주는 미국 사회의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식 있는 여성들도 절제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의 창립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흡연, 마약, 기아, 매춘, 폭력 등 사회적인 문제의 근원은 음주라고 보아 음주와 흡연을 반대하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생활 개선을 고취하고 가난과 질병, 무지를 해결하고 순결과 평화를 이루며 국제간의 상호 이해와 평화를 증진시키려는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조직된 것이다. 이 여자절제운동이 1923년 9월 우리나라에서도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대한여자절제회였다. 세계여자절제회의 팅링 여사가 1923년 6월 한국을 방문하고 6개월간 체류하면서 여러 지역을 다니며 학교와 교회에서 강연을 실시하여 이 운동의 필요성을 고취하였고, 홍에스더, 유각경, 최활란 3 여성을 발기인으로 하여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1924년부터는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여 계몽운동을 실시하였고 각 지회를 조직하여 1926년에는 전국에 26개 지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약 3천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경남지방의 경우, 부산, 마산, 통영에, 경북지방에는 대구, 포항, 김천에 지부가 조직되었다. 1930년 1월에는 절제회의 회보라 할 수 있는 ‘절제’라는 잡지 창간호가 발간되고 1930년대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절제운동을 전개하여 시내 행렬, 전단지 배포, 금주단연 강습회 개최 등을 통해 이 운동을 확대했다. 절제회보는 1938년까지 8호를 발간했는데, 1935년부터는 절제운동도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된다. 금주 강연금지령이 내려졌고, 절제회의 활동이 제약을 받게된다. 1939년에는 절제회의 명칭도 일제의 강요로 교풍회(矯風會)로 개칭된다. 이런 절제운동은 기독여성들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적으로 확대되어 장로교의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1930년대 초부터 절제운동을 전개하여 1932년 5월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가 공식 창립되었다. 이 절제운동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금주단연운동을 실시하였고, 1933년에는 ‘절제시보’를 창간하고 주일학교를 위한 ‘절제공과’를 제작하여 국민정신을 계몽하였다. 특히 1935년 10월 15일에는 윤치호를 위원장으로 ‘미성년자음주금지법실시촉성회’를 조직하여 1938년 ‘미성년자 금주금연법’을 제정하게 만들었다. 또 구세군이 중심이 되어 절제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구세군은 ‘금주신문’을 창간하고 여러 문서를 통해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절제회가 먼저 조직되었고 이들의 활동이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금주단연가(禁酒斷煙歌)가 만들어지고 심지어는 찬송가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금주가 중에는 영문학자 양주동 교수가 쓴 이런 가사도 있었다. 1절: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 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절: 입에 더러운 담배를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다/ 후렴: 술판을 깨치라/ 담배대를 꺽어 버려라/ 이천만 사람의 살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런 절제회의 활동이 금주 단연을 당연시한 오늘의 한국교회를 건설한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10-20
  • [서임중칼럼] leader는 있고 leadership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지도자는 많은데 지도력 부재의 시대라고 아파한다.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다는 말이다. 국가 지도자든 사회지도자든 종교 지도자이든지를 무론하고 우리는 참 ‘지도자’가 그립다. 요즈음 듣는 여의도 1번지 이야기는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나 언행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라면 정치인들에게서 어떻게 국태민안을 기대하겠는가.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모두가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 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를 생각하며 그들을 선택한 국민으로서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오죽하면 ‘내로남불’의 발상지가 여의도 1번지라는 말이 회자(膾炙) 될까. 야당대표가 생사를 건 단식투쟁을 한다. 그를 두고 개인비리를 덮으려고 국정을 마비시키는 꼼수라며 매정하게 논평하는 여당 지도자들, 그것이 국정쇄신을 위한 애국충정이라고 옹호하는 야당 지도자들, 이들의 언행을 보면 어린아이도 돌아서서 코웃음을 칠 상황이 아닌가. 그들의 행태를 보면 문제를 풀어내고 화해와 상생의 멋을 이끌어내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너 죽고 나 죽자는 희한한 판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판다.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었으며, 사회가 시궁창 냄새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내 탓이오’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모두가 ‘네 탓’이다. 카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하게 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래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전 카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을 해왔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이와 같은 리더십에 우리는 박수를 보냈고 동참했다. 이 아름다운 운동이 확산되어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ς)’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를 위반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하고 운전을 하는 것을 심심찮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양심의 소리에 그나마 부끄러워져서일까? 이제는 ‘내 탓이오’도 ‘익수스’도 일상에서 볼 수가 없다. 요즈음 시대를 유튜브 범람 시대라 한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유튜브 방송이 미디어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그런데 이 유튜브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고 삶의 질을 다듬어주기보다는 정사(正邪)가 분별되지 않는 자극적이고 무분별한 내용으로 여과없이 쏟아지고 있다. 사리판단은 뒷전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선호하고 믿고 싶은 대로 생각이 기울어져 흑을 백이라 해도 박수를 보내고, 백을 흑이라 해도 박수를 보내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흑백으로 나뉘어져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공멸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간디는 일찍 우리를 파멸하게 하는 일곱 가지를 갈파했다. 원칙 없는 정치, 근로 없는 축재, 도의 없는 기업, 인격 없는 지식,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신앙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이 일곱 가지가 현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 공멸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이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지도력이 나왔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이 있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하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는 ‘내 탓이오’가 없다. 모두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를 펼친다.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이 세태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일지라도 그리스도인만큼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古稀의 중반을 넘기면서도 나는 1년에 70여 교회의 초청을 받으며 말씀사역을 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끄럽고 벌판이 되어가는 교회의 중심에는 항상 목사와 장로라는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leader는 있는데 leadership이 없다면 결과는 언제나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내용은 긍휼과 겸손과 섬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방법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었다. 진정한 leadership을 가진 leader가 있을 때 그 조직과 공동체는 평행감축(平幸感祝)의 장이 된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3-09-22
  • [성서연구] 성도가 알아야 할 것
    본문은 바울 사도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드린 기도입니다. 이때 바울은 감옥에 계셨습니다. 그는 감옥의 고통 중에도 성도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님의 충성된 종이요, 성도를 사랑하는 목자였습니다. 그는 육체의 안락함과 세상의 부귀영화 따위에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울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드린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반복되는 표현이 있는데, <알게 하소서>입니다. 성도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알았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알아야 했고,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강요』제1권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 동기에서 움직이게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여길 때 열심을 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사랑과 능력을 알 때, 그분이 온갖 우상과는 다른 유일한 참 신이심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에베소서가 기록되던 당시 로마 세계에는 온갖 우상숭배가 판을 쳤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우상과 다른 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 안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셨고, 믿음으로 부르시고,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그 안에 엄청난 복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게 부르심 안에 있는 소망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장차 얻게 될 복을 소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또 성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기업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장소적 개념을 추구한다면 천국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장차 주실 천국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아픈 것, 눈물, 죽음이 없는 영생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또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입니다.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홍해를 가르치고,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감옥에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보다 크심을 알았고, 하나님 나라가 로마 제국을 백 개 이상 합친 것보다 크심을 알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엄청난 복과 그 능력을 알았습니다. 비록 현실이 성도를 억압하지만, 그건 잠시뿐임을 알았기에 그는 철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악을 행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합니다.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 중에도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세상의 것을 의지하여 교회와 교단과 교계의 권리를 얻으려고 온갖 추한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아마 이 세상이 영원할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리 교회가 커도 하나님 나라에 비할 수 없을 텐데, 교회를 사유화하여 마음대로 주무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세상을 믿는 것이요, 자신을 믿는 것이요, 사단을 믿는 것입니다. 진실로 바울의 기도에 나오는 것들을 우리 모두가 알길 원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면서, 세상을 극복하길 소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3-09-22
  • [시사칼럼] 삼십 퍼센트의 진실
    집권한 지 1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를 바라보면서 의아한 점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온갖 억측을 불러일으켰던 용산으로 관저 이동, 이태원 참사의 후속처리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과오, 가족의 비리 문제, 국제잼버리대회 졸속 운영 문제, 양평고속도로 사태, 해병대 수사단장 박 대령 사건 등 숨 돌릴 틈조차 없이 이어진 연이은 사건사고 속에서도 콘크리트 같은 30% 지지율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 정부가 시작되면서 들어섰던 전직 대통령들 모두 저마다의 암초를 만나 지지층 급락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IMF 사태, 고 김대중 정부의 경우 두 아들의 구속,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광우병 사태와 BBK 문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문재인 정부의 경우 부동산 문제 등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국정지지도가 추락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현재 대통령은 굵직굵직한 문제들이 줄지어 발생하는데도 굳건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지 나름대로 분석을 시도합니다. 마침 올해가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먼저 ‘파레토 법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였던 그는 자국 내 부(富)의 분배 상황을 연구한 후 20% 인구가 80% 부(富)를 차지하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를 후학들이 ‘파레토 법칙’이라 명명하면서 유명해진 이론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파레토 법칙은 오늘날에도 많은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상위 20% 소득자가 전체 세금의 80% 이상을 부담하고, 백화점 20% 고객이 전체 매출의 80%를 책임지며,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20%의 버그를 수정하면 오류 및 충돌의 80%가 해결된다거나(Microsoft), 심지어 평소 즐겨 입는 옷조차도 옷장 속 20%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다양한 통계적 사실들을 말할 때 곧잘 파레토 법칙을 거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마케팅 전략을 세울 때 이러한 20%를 공략하라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다방면에서 상당히 수긍이 가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지지율을 자랑했던 전직 대통령들이 상기한 여러 문제로 인해 한 자릿수의 처참한 지지율을 기록했던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30% 원리’를 주장하는 사례들도 존재합니다. ‘패션의 70/30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패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말인데, 브랜드의 상위 30% 스타일에서 전체 매출의 70%가 나오더라는 얘기입니다. ‘연애 강자 3할의 법칙’도 있습니다. 연애 잘 하는 사람은 전체의 30%에 불과하더라는 의미입니다. 주로 일본 쪽에서 많이 나오는 말인데(일본인구문제연구소), 『솔로사회가 온다』(북바이북, 2022)의 저자 아라카와 가즈히사에 의하면 연애를 하든지 이미 결혼을 했든지 불문하고, 심지어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 중에서도 연애 강자의 비율이 30%를 차지하고 있더랍니다. 야구의 경우에도 타격을 잘 하는 기준이 3할입니다. 즉 세 번 나와서 한 번꼴로 살아나가면 훌륭한 타자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이처럼 30%라는 비율은 정확하게 설명할 길은 없어도 우리 일상에서 실질적으로 임상적으로 체험하는 경험적인 수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 영역만큼 경험치가 무의미할 때가 많은 분야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원리 역시 지금 대통령의 지지율 30%의 정밀한 기반이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30%’ 견고한 장벽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얼마 전 대통령의 발언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으로부터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1년 전과 달리 ‘문제는 이념이다’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새는 두 날개로 나는 법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지금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홍범도 장군’ 같은 논쟁이 이로부터 기인한다고 봅니다. 독립전쟁의 영웅이지만 공산주의는 안 된다는 시각에서 촉발된 논쟁이 아닙니까?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므로 한-미 동맹 강화가 가장 중요한 정책일 수밖에 없고, 필요하다면 일본과도 손을 잡고 반공을 위해서라면 강제징용이나 오염수 같은 문제에 있어서 조금은 양보해도 좋다는 인식이 나타나지 않나 합니다. 올해로 어느덧 휴전 70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6. 25 세대들에게 전쟁은 아직도 실제적으로 현재진행형입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거나 전쟁 종료 후 약 10년 안에 태어나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학습한 세대가 바로 나이 60대 이상이며 현재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로 견고한 콘크리트 지지층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가 아닐까요? 이념이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 현실에서 반공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나 민생과 같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리바이어던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반공은 국시일 수 있으되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영적인 하한선만은 반드시 지키며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3-09-22
  • [은혜의말씀] 최고의 예배자가 되십시오(창 4:1-5)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기브온에 가서 일천 번제를 드렸는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말씀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수한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제사하러 오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숫양의 번제와 실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 하시면서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다시는 제사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히 11장은 그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있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답은 믿음으로 드리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자신의 예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배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순간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기 편의대로, 자기 생각대로 드렸지, 하나님을 생각함이나,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는 최고의 것을 드리는 예배입니다.(4절) 아벨은 뜨거운 감사와 감격으로 첫 새끼를 바쳤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첫 번째였습니다. 이런 우선순위는 우리 인생의 출발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주일 예배를 미리 준비하십시오. 예배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십시오. 주일 예배에 좀 일찍 나오셔서 한 주를 돌아보고, 오늘도 예배를 통해 주실 말씀을 기대하며, 미리 설교 본문을 읽고 기도한다면, 얼마나 예배가 은혜롭겠습니까? 우리의 우선 순위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는 자신을 드리는 예배입니다.(4,5절) 우리가 드림을 강조할 때 항상 따라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 그 자체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제물보다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의식이나 모습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배는 그 사람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삶이 곧 예배입니다. 예배는 예배드리는 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주목하여 찾으십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아벨처럼 믿음으로 최고의 예배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3-09-22
  • [목회자칼럼] 비비불불 용감사하라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면서 우리의 언행심사가 바뀐다.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야할까? 비비불불 하지말고 용감사 해야 된다. 이 말은 박한기장군의 부대에서 처음 보았다. 원래는 비비불불 하지말고 용감미인대칭하라는 부대의 구호였다. 비교하지 말라. 인간사의 모든 불행은 남들과 비교하는데서 불행이 시작된다. 사탄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으로 비교하면서 열등감, 수치감, 패배감을 준다. 우월감이나 교만한 마음도 똑같다. 주께서는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신다. 사랑은 조건반응이 아니고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를 부끄러워 하지마라. 나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빠지기 쉽다. 이 세상에 부러워할만한 온전한 존재는 없다. 100점짜리 인생이 없듯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제조, 제작, 제품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스페셜한 VIP이고, 사랑받는 존귀한 존재이다. 누구도 비교선상에 두지 말고 주님 앞에서 내 길을 걸어가라.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의 군사 되리라!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마라. 비판, 심판은 하나님만 하신다. 오늘 한국교회의 큰 병은 너무 쉽게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판단이 앞서면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게 된다. 남들을 판단하는 것을 멈출 때 사랑이 시작된다. 남을 가르치거나 고치려고 덤비지 마라. 누구든지 문제가 있지만, 문제가 있으니까 기도하고, 힘드니까 교회 다니고, 그러면서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판단하는 난도질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불평하지 말라. 매사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을 탓하고, 핑계를 대고, 이유를 찾는 사람은 답이 없다. 밖에서 답을 찾지 말고 문제 안에서 답을 찾으라.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문제의 현장에서 내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동서남북 앞뒤좌우가 꽉 막혀도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위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사람 앞에서 불평을 하면 감정이 전이되고 증폭되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질 뿐이니 불평은 입에 담지도 마라. 불만하지 말라.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고 내 잔이 넘친다고 하였다. 이런 시를 적었을 때가, 10년을 떠돌아다니고 노숙하고 동굴에 기어들어가고 사선을 넘나들며 제일 힘들었을 때이다. 제일 고달플 때에 주님이 나의 목자요, 요새요, 산성이시며 피난처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이었다. 사도 바울도 그러했다. 바울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 은혜가 족하다고 고백하였다. 한날의 괴로움도 족한 줄로 알라. 포기의 축복이 있고, 내가 주인 삼은 것을 내려놓을 때 자유가 온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용서하라. 시기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먼저 용서하는 자가 어른이다. 가슴 속에 응어리를 남겨두지 마라. 누군가를 미워하면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기고, 스트레스가 되고, 불면의 원인이 되고, 병이 된다. 요셉은 하나님의 큰 구원계획을 기대하면서 자기를 괴롭힌 형들 때문에 분노하지 않고 마음으로 용서하였기에 병들지 않고 용모가 아름답고 준수하여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되었다. 분노의 잔을 채우지 말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신 것처럼 나도 긍휼사역을 하는 것이 사함 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감사하라.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다. 최고의 감정은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가 최고의 항암제이고 해독제이며 방부제다. 내 마음에 감사가 없다면 확실히 병든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쓴 게 약이 되니까, 신 게 몸에 좋으니까. 배은망덕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마라. 하나님 한 분만이 내 힘이 되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영적인 건강의 바로미터가 바로 감사와 기쁨이 있느냐 이다. 절대 감사! 평생 감사! 다만 감사! 사랑하라.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말없이 사랑하는 것을 배워라. 티내지 말고 생색내지 말고 자기 의를 내세우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사랑하라. 엄마가 자식을 사랑할 때가 그러하다. 사랑하는 만큼 희생한다. 사랑이 묘약이다. 비비불불 용감사, 이 모든 것이 내 의지와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 충만할 때 가능하다. 주님 앞에 울고 기도할 때, 회개하면 회복이 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그러니 성령을 훼방하지 말고,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라. 그리하여 언행심사에 변화가 와서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난 뒤에 살인자, 도피자였던 모세가 지면의 누구보다도 더 온유한 자가 되었듯이 우리도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야겠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3-09-22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부산 지방에서의 초기 교회와 수세자, 직분자들
    부산과 경남지방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된 것은 1890년대 초였다. 1891-1892년 어간에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가 설립되고, 1896년에는 영선정교회(지금의 제일영도교회)가 1905년에는 자갈치교회(현 항서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4 교회를 사초(四初)교회라고 불렀다. 동래부에 속한 동래읍교회(지금의 수안교회), 기장읍교회도 1905년에 설립되었다. 이어 부산진교회로부터 분립된 두 교회, 곧 대연교회(1907)와 초읍교회(1909)가 설립된다. 1910년에는 감만동 상애원 내에 상애원교회가, 1911년에는 하단교회가, 1919년에는 수영교회가, 1932년에는 부산진교회로 분립된 부전교회가 설립된다. 부산지방 첫 수세자는 1894년 4월 22일 북장로교 선교부의 윌리엄 베어드로부터 세례를 받은 심상현 김기주 이도념이었다. 이들 3 사람은 호주 선교사들의 고용인이었고, 부산진교회 첫 세례교인이 된다. 그로부터 약 두 달이 지난 7월 15일에는 서두엽과 곽수은이 역시 베어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이 초량교회 첫 세례신자가 된다. 서두엽과 곽수은은 베어드 선교사의 고용인이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가량 지난 후인 1895년 11월 3일에는 부산지방에서 3번째 세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날 남자 10명, 여자 11명, 유아 1명 등 22명이 세례를 받았다. 집례 목사는 호주 선교사였던 앤드류 아담슨이었다. 부산지방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세례받은 세례식은 호주 선교사 왕길지가 내한 한 이후 첫 세례식이었던 1901년 2월 3일의 일이었다. 이날 성인 41명, 어린아이 27명, 곧 68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날 7명의 가정과 6명의 가족 등 두 가정 전원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런 일은 한국교회에서 흔치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부산지방에서 첫 장로, 첫 목사는 누구였을까? 부산지방 첫 한국인 장로는 1904년 5월 27일 장립을 받은 심취명(沈就明, 1875-1958)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부산지방 첫 수세자였던 심상현의 동생으로 부산진교회 첫 신자였고, 부산지방 첫 수세자 가족으로 두 번 째 수세자(1895. 11. 3)가 되었다. 또 그는 부산지방 첫 기독교식으로 1896년 6월 10일 오후 3시 부산진의 호주선교사관에서 아담슨(Rev. Andrew Adamson)의 주례로 김봉숙(金鳳叔)결혼 예식을 드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부산진교회 첫 장로이자 한강 이남의 최초의 장로였다. 또 1912년에는 부산경남 지방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된다. 심취명은 1875년 12월 5일 심인택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본명은 심상호(沈相鎬)였으나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취명으로 개명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유가적(儒家的)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가 초기 부산지방 기독교계와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된 것은 그의 형 심상현(沈相炫)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로서 부산진교회는 부산지방 최초로 당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는 한국장로교회가 독로회도 구성하기 전이었다. 이 당시 장로로는 장연군 송천의 서경조, 용강의 방기창, 증산찬천의 송인서,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천의 한석진 등 이북지방에 10여명의 장로들이 있을 때였다. 장로로 봉사하던 그는 왕길지 선교사의 추천을 받고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수학하고 1910년 6월 제3회로 졸업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김익두, 김종섭, 박정찬, 채정민, 한득룡 등이 그의 동기생들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울산병영교회 시무장로로 봉사하다가 1912년 7월 2일 밀양읍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경상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서 그는 부산, 경남지방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그를 이은 두 번째 목사가 1915년 7월 안수를 받은 정덕생(鄭德生) 목사였고, 세 번째 목사는 1919년 1월 안수를 받은 박성애(朴晟愛) 목사였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9-22
  • [소강석칼럼] 엘리멘트 시티를 이룰 수는 없을까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을 아는가. 어린아이뿐 아니라 장년에게도 인기를 얻으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불과 물, 공기, 흙 등 4원소가 사는 엘리멘트 시티에서 불인 ‘앰버’와 물인 ‘웨이드’가 만나 특별한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을 담았다. 생각해 보라. 물과 불이 어떻게 사랑을 이룰 수 있겠는가. 물과 불은 상극이다. 불은 물을 끓게 하고 또 아무리 타오르는 불도 물을 부으면 사그라들게 돼 있다. 물과 불은 절대로 하나가 되려야 될 수가 없다.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 앰버는 우연히 웨이드를 만난다. 그들은 결코 만나서도 안 되고 하나가 될 수도 없는 존재다. 하지만 웨이드는 앰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꿈을 응원한다. 그러면서 상극인 두 존재가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둘은 “우리가 하나 될 수 없는 이유는 백만 가지지만 나는 널 사랑해”라고 말하며 서로의 손을 붙잡는다. 마침내 불과 물이 만날 때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불의 세계 언어인 ‘디쇽’을 외친다. “영원한 불꽃은 없으니 빛날 때 만끽하라”.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앰버와 웨이드는 사랑을 이루며 새로운 꿈을 향해 떠난다. 엘리멘트 시티는 서로 다른 4원소를 의인화해 다르다는 이유로 다투고 싸우고 분쟁하는 우리 세대를 향해 경종을 울린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발휘해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어떻게 불과 물이 만나 무지갯빛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감탄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해 봤다. “한국교회도 엘리멘트 시티를 이룰 수는 없을까” 하고 말이다. 원래 나 또한 교회 성장 지상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눈이 뜨였다. 어느 한 교회가 대형화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영국과 미국 교회를 보라. 대형교회가 많았지만 반기독교 악법을 막지 못하지 않았나. 그건 서로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과 불처럼 상극을 이뤘기 때문이다. 서로 크기를 자랑하는 순간 반기독교 악법이 통과된 것이다. 여기에 눈을 뜬 나는 줄기차게 한국교회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적과 같은 부흥을 이루며 위상을 떨치던 한국교회가 언제부터 정체되고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는가. 교계가 다투고 분열하면서부터 쇠퇴기를 걷게 된 것이다. 마치 불과 물은 결코 하나 될 수 없다며 반대를 위한 반대, 분열을 위한 분열만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더 늦기 전에 더 멀어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반드시 하나가 돼야 한다. 유독 한국교회를 향해서만 밀려오는 반기독교 사상과 문화, 정서의 쓰나미를 막기 위해서라도 연합해야 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엘리멘트 시티를 이뤄야 한다. 아무리 선각자가 외쳐도 시대가 선각자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이뤄지지 않으면 큰 역사를 이룰 수 없다. 그렇듯이 아무리 연합을 외쳐도 한국교회가 각성하지 못하면 공허한 메아리가 돼 사라질 뿐이다. 지난 주일(13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광복 78주년 기념 및 한기총·한교총 통합 결의 기념예배’를 드렸다. 나는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100만 가지가 넘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한다”고 외쳤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한국교회총연합 광복 78주년 한국교회 기념예배’에서도 “일제강점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나라를 해방하기 위해 다른 종교 지도자와도 손을 잡았는데 한국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우리끼리 어찌 하나 될 수 없는가”라고 외쳤다. 물론 연합만이 능사는 아니다. 연합한 이후 한국교회가 새로운 각성과 부흥·영성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 중 불 같은 사람도 있고 물 같은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때 무지갯빛 세계를 이룰 수 있다. 우리 모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랑을 하자. 영화 속 대사인 ‘디쇽’처럼 빛날 때 하나를 이뤄야 한다. 이를 통해 무지갯빛 찬란한 엘리멘트 시티를 이루자.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3-09-0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