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
[교회법률상식] 굴화리와 천상리는 남울산노회 지역(1)
-
-
- 양 노회의 논리적인 주장으로는 판단기준이 될 수 없어 - 오직 노회분립청원서와 총회의 분립결의 및 촬요로 판단해야
[질의] 2007년에 총회의 울산노회 분립위원회(위원장 최재우 목사)가 울산노회를 분립할 때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로, 남쪽은 남울산노회로 하되 양산시찰은 남울산노회 소속으로 하는 내용의 분립을 합의결의하고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가 보고를 받음으로 울산노회 분립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부터 노회분립에 관련한 지역 경계에 대하여 울산노회는 태화강 중심이 아니고 시찰별 중심으로 분립되었다고 주장하고 남울산노회는 시찰별 중심이 아니고 태화강을 경계로 분립되었다고 주장하여 갈등 중에 있습니다. 이에 관련한 참고서류로 ① 울산노회 분립에 관계된 총회 제91회, 92회 보고서 ② 분립전 울산노회가 총회에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 ③ 분립 전의 울산노회 제52, 53, 54회 촬요 ④ 울산노회의 주장 내용 ⑤ 남울산노회의 주장 내용 ⑥ 김호환 목사의 사실증명서 등을 첨부하여 노회분립과 관련하여 태화강 남쪽에 위치한 굴화리와 천상리가 법적으로 어느 노회의 소속 지역인지 법리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울산 H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측 목사이므로 합동 헌법으로 답한다. 1. 양 노회의 주장에 대하여 울산노회는 태화강을 경계로 분립한 것이 아니라 시찰단위로 경계를 정하여 동부시찰, 북부시찰, 중부시찰은 울산노회로, 남부시찰, 서부시찰, 동해시찰, 양산시찰은 남울산노회로 분립되었다는 주장이고, 남울산노회는 시찰단위로 분립한 것이 아니라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 남쪽은 남울산노회로 분립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은 양 노회의 주장은 서로 상반된 주장으로서 법리적인 면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인 면이므로 노회분립의 판단에 대한 참고자료일 수는 있으나 법리적인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2. 노회 촬요와 김호환 목사 사실증명에 대하여 분립 전 울산노회의 제52회의 촬요는 “노회를 분립하기로 결의한다.”는 내용과 분립위원회를 조직한 내용뿐이어서 경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제53회의 촬요는 “노회 분립 기준”을“태화강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누기로 하다.”는 결의와 “노회명”은“울산노회(북쪽), 울산남노회(남쪽)으로” 결의한 내용(촬요 p.50)으로 노회분립의 경계기준에 대하여 태화강을 경계로 한다는 법리적 기준을 결의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제54회 촬요는 노회분립위원회의 구성으로서 “위원장: 서유성 목사, 서기: 장활욱 목사, 강북측 위원: 목사 - 권주식, 김형백, 정연철, 양성태, 장로 - 강희열, 조경택, 김용길, 강남측: 목사- 안종택, 이성택, 배광식, 김신현, 장로- 이정섭, 이상용, 전성은”으로 결의하여(촬요 p.51) 역시 강북측과 강남측의 위원을 언급하여 태화강이 노회분립의 경계임을 확증하고 있다. 또한 김호환 목사의 “사실증명서”의 내용은 “저희(주사랑교회: 현재 독립교단 소속) 교회는 2006년 당시 남울산노회 소속으로 되어 있으나 노회 분립 당시 북쪽 울산노회가 당회가 모자라 부득이하게 울산노회로 소속이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남울산노회 소속 영내에 속했던 교회가 맞습니다. 사실을 증명합니다. 2015.4.30. 주사랑교회 김호환 목사 (010-3588-0817) 印” 으로 역시 “북쪽은 울산노회”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강을 경계로 하여 노회를 남과 북으로 분립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노회촬요와 사실확인서를 종합해 보면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 남쪽은 울산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한 것이 분명해 보이고 특히 태화강 남쪽에 위치한 주사랑교회는 남울산노회 지역임이 분명하나 태화강 북쪽의 울산노회가 21당회가 되지 못하므로 21당회가 되도록 조정하기 위하여 노회경계와는 관계없이 특단의 비상조치로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회촬요와 사실확인서는 지역 경계를 결의한 증거는 확실하나 노회를 분립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관한 증빙서류이므로 참고하기에 중요한 서류임은 사실이지만 직접적인 판단의 법리적 표준을 삼는 것보다는 분립 전의 울산노회가 총회에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와 총회가 보낸 분립위원회의 분립보고서와 총회가 보고서를 받아 결의한 총회 회의 결의서를 검토하여 판단함이 법리적으로 옳아 보인다.(계속)
-
2015-10-22
-
-
[성공칼럼] 믿음으로 살리라
-
-
성경 하박국에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신약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이 나온다. '산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내 영혼이 다른 사람과 서로 사랑하면서 선을 행하며 기쁘고 자유롭고 당당하고 부유하게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산다''의롭다'의 반대인 '죽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두려워하며 증오와 갈등으로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로운 삶이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럼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진리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믿음을 알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믿음을 깨뜨리는 것은 사소해 보이는 거짓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돈을 일주일 후에 갚는다고 해서 빌려주었다 하자. 그런데 약속한 날짜에 갚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음에 주겠다고 하며 또 약속을 했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이것도 어겼다. 말로는 하겠다고 해놓고 실제 상황에서는 지키지 않으면 이런 행동이 거짓말이며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심리 상담이나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영성훈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거짓은 치유나 나를 만나는 것이나 사랑하는 관계를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 거짓에 어찌 믿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돈이나 권력은 거짓으로 얻을 수 있지만 치유, 사랑, 진리를 만나는 것처럼 속사람과 관계된 것에는 결단코 그럴 수 없다. 믿음에는 진리가 꼭 있어야 하는데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매 순간 삶 속에서 옳은 것, 진짜,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삶에서 실패했을 때나 전혀 희망이 없을 때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이 잘못되었지?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옳음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이렇게 방법을 찾아서 행동으로 옮길 때 다시 기쁘고 자유스러운 삶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부부가 수년을 같이 살다가 이혼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부부가 사랑으로 가는 길이며 진리를 행하며 사는 것이다. 외도, 지저분함, 배우자를 무시하는 말과 행동, 거짓말하는 것,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없애야 진리대로 사는 것이다. 삶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옳은 길, 진리를 찾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려움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첫 걸음이다. 모든 분야에는 살아나게 만드는 진리가 있다. 몸에 관한 진리, 마음에 관한 진리, 관계, 부부, 가족, 성공, 자연에 관한 진리 등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을 것이다. 모든 진리는 몸, 마음, 관계, 부부, 가족, 자연 안에 기쁨과 자유로움, 밝음과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길이며 방법이며 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몸이 아파서 고통스럽고 주변의 사람들도 떠나가고 돈도 없어져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다시 살기 위해서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길 때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몸에 관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부분에 진리가 있으며 진리를 따라서 살아갈 때 내 삶은 건강해지고 부유해지는 것이다. 내 삶이 어려울 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망가지는 방향으로 가며 살 수도 있다. 또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삶 속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하지 않으면 삶은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더 큰 진리 즉 영적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본래 삶은 사랑과 자유, 기쁨이 가득한 것이다. 이런 삶을 다시 회복하는 길로 들어서려면 먼저 정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으로 진리 아닌 것은 거절하고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2015-10-22
-
-
[은혜의 말씀] 사망에서 생명으로 (막2장1~5절)
-
-
오늘 성경말씀은 전신이 마비된 중풍 병자가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회복되어서 새털처럼 일어나는 그런 기적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볼 때 유형무형의 중독이나 마비가 오는 시대라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중독, 생각의 마비, 관계의 마비가 되어 힘들어 합니다. 중풍병이라는 것이 풍을 맞아서 몸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어지며 무기력해지는 상태인데 이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시면 피가 돌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소생시켜 주시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삶속에서 그런 부활로 나타나는 데는 어떤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기적의 단계, 천국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오늘 말씀 2장 1절에 보면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이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입소문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집에 들어가시니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고, 천리향이 퍼져 나가듯이 소문이 나니까 환자들이 오고 각색병자들이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 받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주님을 만날 때 그런 기적의, 부활의, 소생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신기한 것이 예수님께선 온 세상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시고 구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구세주로 오셨고,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다가오지만 한사람 중풍 병자에게 집중해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주열방을 품는 스케일이 있어야 되지만 아주 세미하고 작은 것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는 디테일이 있어야 되는 이유가 우리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가시는데 어떻게 임하십니까?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사람들이 모여서 전심으로 기도할 때 그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했던 일이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마음이 이심전심, 동병상련, 대동단결, 마음을 하나로 합쳐서, 그 다음에 기도하고 성령이 임하시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동지의식을 가지고, 파트너십을 가져서 형제가 연합해 동거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보면 내가 믿음이 자라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도 사람이고 내 신앙생활의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입니다. 인간 방패가 있는 반면에 인간 방해가 있다고 봅니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힘들 때, 무서울 때, 내 손잡아주고 기도해주는, 내 편이 되어 말씀 한마디 툭 던졌는데 그것이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게 하고, 인생을 포기할 상황에서 다시금 힘을 얻게 만들고, 소생케 하는 그런 친구가 되고, 파트너가 되는, 그런 멘토가 되고 선생님이 되는 사람이 많지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를 부르고, 주를 의지하고,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한계를 초월하는, 문제를 돌파하는 힘이 있습니다. 발상전환, 고정관념을 버리고 아름답게 일어나는 잔디처럼 밟아도 살아나고, 펄떡거리는 물고기와 같이 시대를 역류해서 살아가는 그런 살아있는 신앙, 회복되는 신앙이 있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2015-10-22
-
-
[가정칼럼] 영적 결핍을 이겨내려면
-
-
술에 잔뜩 취해 밤길을 비틀거리고 걷던 술꾼 한 사람이 맞은편에 서 있던 할아버지와 부딪혔다. 순간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는 나뒹굴고 말았다. 겁이 더럭 난 그는 얼른 할아버지의 뺨을 두들겨 보고 심장에 귀를 대어 본다. 아무 소리가 없자 할아버지를 등에 들쳐 업었다. 한순간에 집을 내 다른 그는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찬물을 끼얹고 다리를 주무르며 제발 살아만 달라고 애원해 본다. 그러다가 지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새벽녘 눈을 뜬 그는 기겁을 하고 만다. 물에 흥건히 젖어 있는 침대에 KFC 할아버지(광고용 마네킹)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왜 술을 찾을까?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실 도피인 것이다. 술에 취하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에 애를 쓴다. 이를 숨바꼭질의 순례라 부른다. 굳이 술만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술 속으로 숨어 버리고 어떤 이들은 취미생활로 숨어든다. 그래야만 편하다. 숨다가 거기에 중독된다. 일 중독증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린다. 그러다가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자신을 잃어간다. 일의 노예로 스스로의 삶을 제한한다. 이러한 중독증상은 가정생활을 파괴시킨다. 한마디로 말해 영적 결핍증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한다. “성령에 충만 하라”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앤드류 머레이가 정확한 답을 주었다. “성령 충만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을 갖지 않도록 나는 그것이 고도의 흥분상태나 절대적인 완전함, 혹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어떤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함은 단순히 나의 모든 본성을 성령의 능력에 굴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전체를 성령께 복종시킬 때 하나님 자신이 나를 충만케 하실 수 있다.” 결국 성령 충만 외에는 영적 결핍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 화려한 외식도 명품구매를 위한 쇼핑도 세계 일주 여행도 영적 결핍을 메워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권한다. 비겁하기 위해 온갖 궁리를 하고 그 일을 변명하기 위해 쏟아 붓는 에너지의 십분의 일만 자신을 직면하는 일에 써보라는 말이 있다. 이제 나 자신의 충만한 삶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 보자. “성령님이여 저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성령에 충만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는 되도록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겠습니다. 언제 어느 때 실수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에 충만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는 중요한 결정을 보류하겠습니다. 종종 잘못될 가능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출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사에 중요한 결정 앞에 잠시라도 성령의 충만을 구합니다.”- R. A토리
-
2015-10-22
-
-
[시사칼럼] 그리스도인의 자유
-
-
19세기 중반에 기하학(幾何學)을 좋아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기하학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진리를 차려놓은 과정”이었으며, “사고를 이끌어주는 놀라운 스승”과 같았습니다. 19세기 말엽에 로마법, 농민법, 인종학 등 사회과학에 심취한 경제학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공부를 통해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익혔고, 이를 통해 “인류가 처해 있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앞의 젊은이 이름은 앙리 파브르(Henry Fabre, 1823~1915)로 훗날 『곤충기』를 썼고, 뒤의 젊은이 이름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로 비구상적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가 되었습니다(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422-24). 만일 파브르에게 ‘너는 기하학을 잘 하니 반드시 수학자가 되어야 해’라고 강요하고, 칸딘스키에게는 ‘전공과 관계없는 미술을 택하지 말라’고 압박을 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른바 ‘곤충세계의 호머요 선지자’는 탄생하지도 않았을지 모르고, 우리는 고도로 추상화된 현대회화의 걸작을 만끽할 가능성조차 빼앗겼을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와 창조정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파브르 같은 솔로몬도 있고(잠 30:17~21) 악령을 제어하는 음률시인 다윗도 있으며(삼상 16:23) 건축기술을 전공한 성경학자 바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행 18:3). 종교개혁자 루터 또한 법학도였으며 뛰어난 음악가였고, 역시 법을 전공했던 칼빈은 로마의 키케로(Cicero, 106~43, B. C.)에 관한 인문주의 논문을 썼으면서도 탁월한 목사신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498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Wittenwerg)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 요 8:32)는 말씀이 가시화된 사건입니다.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교황과 로마교회의 획일화된 교조주의(敎條主義) 가르침만을 무비판적으로 굴종했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개신교회는 등장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1520년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세 편의 개혁주의 문서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인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 외의 어떤 절대적인 이념(理念)이나 주의(主義)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지난 20세기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파시즘(fascism), 볼세비즘(Bolshevism), 매카시즘(McCarthyism) 등의 광풍(狂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선한 양심을 뒤틀리게 했으며 심지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갔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어른들이 볼 때 당연한 것도 아이들에게는 궁금하고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일방적으로 정답 하나를 말해주기 보다 열 마디 이상의 대답을 해주면 아이들 상상력과 창의력이 길러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천재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왜?’라는 아이 같은 호기심에서 발생한다.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포기하지 말라”(이지훈, 『혼창통』, 138). 세상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그러한가(scrutantes Scripturas)” 하면서 성경을 보았다 했습니다(행 17:11). 무비판적으로 맹종한 것이 아니라 조사하고 연구하면서(anacrinontes, scrutinizing) 성경을 읽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세상의 진리와 가치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혹시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사상의 자유시장(free market of idea)’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데, 미켈란젤로 식으로 말하자면 이 둘은 결국 ‘같은 한 주인’에게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Jesus liberabit vos!
-
2015-10-22
-
-
[서임중 칼럼] 오늘도 사도 바울의 흉내를 낸다.
-
-
은퇴 1년이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이 명시 한 정년을 지키지 못하고 조기 은퇴한 것은 분명 법리적으로 잘못임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동역자들에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헌법이 정한 정년을 지키는 것이 은혜요, 질서라는 것을 요즈음 강조한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은 이유는 일찍 그것을 마음에 담았고 개인적인 서원과 말씀사역의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다 건강할 때 나에게 주신 은사의 하나인 말씀 사경회에 전념하고자 한 것이었다. 나는 가난과 병약함과 고난의 환경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다. 대형교회를 담임하면서도 늘 이 부분이 마음자리에서 어느 한 날도 떠나지 않았기에 조금은 일찍 은퇴하여 농어촌 개척 산골교회를 다니면서 자비량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사도 바울의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그래서 2년 단위로 부흥사경회 일정을 약속하는데 52주 매 주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50여명 미만의 교회의 초청만 허락하여 자비량 1일 부흥회로 헌신하고, 주중에는 조금은 갖추어진 교회들의 초청을 받아 말씀 사역을 하고 있다. 운전에 익숙하지도 않고, 숙식도 대형교회 시무할 때처럼 갖추어진 환경이 아니어서 이래저래 불편함이야 말할 수 없지만, 칠순에 이르는 나이에 아내와 함께 번갈아 운전하고 차내의 찬송과 말씀을 들으면서 어촌 길, 산골 길, 고속도로를 주행하노라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한다. 휴게소마다 들러 아내랑 마주앉아 차 한 잔 나누면서, 평생을 목회 뒷바라지만 하고 여기까지 온 아내에게 쉼의 은총을 갖게 하지 못하고 고달픈 여정을 갖게 하여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면, 아내는 “이보다 더 행복은 없다.”고 웃음을 짓는다. 조기은퇴를 하게 될 때 교회에서는 목회와 관련된 다양한 뒷바라지를 해 준다고 결정하였지만 이래저래 뒷말이 있어 나는 거절했다. 목사라는 이름의 거룩한 자존심 하나로 오늘에 이르렀는데 잡다한 흠집 내기로 목사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내 자존심으로는 허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프고 힘들고 외롭지만, 아내와 함께 운전을 하면서 여전히 서원한대로 사도 바울의 복음사역을 흉내라도 내고 싶은 하루를 열고 닫는다.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여정을 나는 2차 여정까지는 돌아보았다. 그때 편리한 교통수단을 통해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참 많이 울고 웃었다. 그 때 결심한 것이 나도 남은 생애 바울처럼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헌신하리라 서원했었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상황과는 다르게 말할 수 없는 편리한 교통수단과 환경이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그가 복음전도에 일생을 바친 그 삶을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경기도 파주에서 전라도 해남까지 이르는 곳마다 눈물행전을 쓰고 있다. 35명 정도 모인 어촌교회, 가장 젊은 교인이 62세로 90% 이상이 70대를 넘긴 어르신들만 사는 산골교회, 어른이라고는 5명 정도, 어린아이들이 10여명 정도 모여 혼신을 다하여 박수치며 찬송하고, 말씀마다 아멘을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개척교회, 통성기도를 시켜놓으면 통곡이 터지면서 차마 그 기도를 멈추게 할 수 없는 상황에 강단에서 강단 아래서 함께 울고 또 울면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 예배를 마치면 “목사님, 한번만 안아줄 수 없어요.”하는 허리 굽은 할머니를 품에 안고 그냥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낸 시간이 엮어지는 주일 예배는 감동과 행복, 아픔과 고뇌, 기쁨과 축복이 뒤엉킨 시간이다. 주일 오전예배를 마치고 나면, 점심시간은 못난 목사를 주님처럼 영접하며 예배를 준비한 교인들이 집에서 각자가 갖고 온 온갖 반찬들을 앞에 내놓고 오랜만에 밥을 했다고 자랑하듯 기뻐하면서 시골특유의 밥그릇 위로 밥이 올라오도록 고봉으로 담은 밥그릇을 앞에 놓고 “목사님 목사님, 이것 다 잡숫고 또 잡수셔요.”하면서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은 그대로 강사라고 섬기는 연로하신 권사님의 표정은 문자 그대로 천사였다. 그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차라리 울음이라는 표현이 맞다. 찬송하면서 울고, 기도하면서 울고, 말씀 선포하면서 울고, 그렇게 눈물 행전을 기록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말씀 사역을 한다. 은퇴하고 난 후, 선배 목회자들이 충고했던 것처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온갖 아픔과 억울함과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다는 말을 귀넘어들었던 현역시절이 회고된다. 그렇게 웃고 울면서 함께 했던 평행감축의 목회 현장이었는데 바통 터치가 끝나자 말자 이방인이 된 듯 돌변하는 교회 현실을 보면서 충격과 놀라움에, 이것이 내가 목회한 곳이 맞는가 싶은 상황에 트라우마(trauma) 현상에 실어증으로 유구무언이 되었다. 그러다가 주님 가신 길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어루만지심을 입고 일어나 내면의 아픔을 안고 억울하고 참담한 일을 당하면서 할퀴고 쥐어뜯는 일을 겪으면서도 골고다 언덕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가야 할 길을 걷는다. 사도 바울이 족보와 학벌과 명예와 권력과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말씀의 두루마리를 들고 그토록 모진 매를 맞고 헐벗고 굶고 병들고 동족과 이방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바다와 강과 시내의 위험을 겪으면서 오직 말씀사역을 하면서 침묵하면서 주님가신 길을 걸었던 것처럼, 나는 오늘도 그 사도 바울의 흉내라도 내고 싶은 마음에 여전히 말씀 사역의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이 없다. 주님이 어서 오셨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간절하다.
-
2015-10-22
-
-
[성서연구] 유다의 품에서 샬롬(여호수아 19장 1-9절)
-
-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점령한 땅을 나누었을 때, 아직도 일곱 지파는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땅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 방안은 지도를 그려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도를 그려온 후 지도를 놓고 점령할 땅을 분배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중에서 시므온 지파의 땅 분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의 땅 분배는 참 이상합니다. 다른 지파는 모두 자신들끼리 모여 살도록 분배되었는데, 시므온은 유다 지파의 땅 이 곳 저 곳에 분산되어 살도록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유다 지파의 몫이 너무 커서 나눠 가지게 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둘째 이유는 시므온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응보였습니다. 일찍이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 동생인 디나가 세겜에서 겁탈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세겜의 남자들을 도륙한 일이 있었습니다. 복수의 감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을 몰살시킨 것은 지나친 분노였습니다. 후에 그들의 부친인 야곱은 열두 아들에 대해 예언적 유언을 언급하면서 시므온과 레위는 그 형제들 중에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49장 7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결국 시므온이 유다의 땅에서 기업을 받은 것은 이 말씀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레위 지파도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진 것을 보면 야곱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가 이렇게 땅을 받은 데는 매우 큰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죄인은 구주의 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죄인의 지파요, 반면 유다 지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는 왕의 지파였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였고, 예수님께서도 동정녀 탄생을 하셨기에 실제로는 상관이 없지만, 형식적으로는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등에는 예수님께서 소위 “이새의 줄기”,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죄인이 구주 예수님의 품에 거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죄인은 오직 예수님의 품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이 결국은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 품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살길 원합니다. 둘째, 후에 여호수아가 세상 떠난 후 땅을 점령하러 갈 때 유다 지파가 제일 먼저 출정하게 되는데, 그 때 시므온 지파가 합류하여 따라가게 됩니다. 이에 대해 사사기 1장 3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할 때 제일 먼저 앞장 선 것은 유다 지파였습니다. 유다 지파가 예수님의 상징이라 했으니, 언제나 예수님께서 앞장서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란 찬송 그대로 대장되신 주님을 모시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품에만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기업, 우리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언제나 대장 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려 하지 말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2015-10-22
-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수록 위대한 이승만 대통령
-
-
이승만 없었으면 건국이 어려웠고
좌우합작했으면 적화됐을지 몰라
해방 직후 국민의 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미국마저도 좌우합작으로 정부를 수립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사코 반대하고 끝내 단독정부 대한민국을 수립하였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계를 휩쓴 사상은 좌우합작 사상이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 대항해 이기기 위해서는 좌파든 우파든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명분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부정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았다.
그러한 민족대단결주의의 명분은 해방 후 우리 한반도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좌파든 우파든 모두가 손잡고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다른 의견을 달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의 대명분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었다. 원래 우파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이고 온건하다. 단결력과 투쟁력이 약하다. 반면에 좌파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단결력이 강하고 투쟁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파가 좌파와 손을 잡으면 우파가 좌파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좌우합작의 연합정부를 세웠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같은 동유럽국가들이 모두 공산화된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중국에서도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이른바 국공합작을 했다가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 한국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같은 좌우합작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그 위험성을 밝히 알고 있는 지도자는 이승만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당시 미국도 좌우합작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주의적인 태도는 단호했다. 이유는 조직력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으면 공산화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국내외적으로 온갖 역경을 딛고 악조건과 싸워 종내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게하여 UN이 1948년 5월 10일 한국 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그랬으나 가을에 열리는 UN총회에서 승인받는 것이 문제였다. 반대표를 던질 위험성이 있는 나라가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국가 승인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개인을 상대로 호소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에 승인되었다 이승만, 생각해 볼수록 위대하지 않은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2015-10-22
-
-
[시사칼럼] 어느 개혁주의 화가의 일생
-
-
지난 10월 1일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루 전인 9월 30일 네덜란드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가 그린 초상화 두 점을 공동으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네덜란드의 예트 부세마커(Jet Bussemaker) 문화장관은 현재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이 그림들을 양국 정부가 절반씩 부담해서 1억 6,000만 유로(약 2,120억 원)에 구입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서 순회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중(公衆)을 위해 미술품을 산다는 사실도 생소하고, 그것도 구매 경쟁에 나섰던 두 나라가 대의(大義)를 위해 국적을 초월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합니다만, 보다 뜻 깊은 의미가 이번 미담(美談)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각기 210×135cm, 210×134cm 크기의 두 작품은 결혼식을 앞둔 예비 부부 마르텐 솔만스(Maerten Soolmans)와 오프옌 코피트(Oopjen Coppit)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는데, 그림이 그려진 1634년은 렘브란트가 정든 고향 레이든(Leiden)을 떠나 암스테르담(Amsterdam)에 정착한 지 4년째면서 그곳에서 만나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 사스키아 아위렌부르크(saskia Uylenburg)와 약혼한 지 1년 만에 백년가약을 맺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생활도 안정된 렘브란트는 이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連作)-「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1633),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1633), 「그리스도의 승천」(1636), 「그리스도의 매장」(1639), 「그리스도의 부활」(1639)-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렘브란트가 태어날 무렵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레이든 대학에서 가르쳤던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의 영향으로 예정론을 부정하는 ‘항의파(remonstrant)’가 일어나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습니다. 1618년 도르트레히트(Dortrecht)에서 개혁교회 첫 국제회의가 열렸고, 개혁파들은 아르미니우스 파를 정죄하고 ‘도르트신경(The Canon of Dort)’를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과정에서 1609년부터 종교적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해 와 있던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0년부터 1629년까지 대거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이처럼 화가 렘브란트는 종교개혁 이후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과 장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1642년, 지금은 렘브란트 불세출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야경」을 세상에 선보였을 때 쏟아졌던 혹독한 비판과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이 그를 은둔과 파멸로 내몰았습니다. 1656년 마침내 그는 파산했고, 1668년 9월 남아있던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 티투스마저 잃은 후, 이듬해인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 운하 끝자락에 위치한 호젠흐라흐트(Rozengracht)라는 마을 작은 집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할 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재산도 명예도 가족도 건강도 남아 있지 않았던 1668년, 렘브란트는 262×206cm의 걸작(傑作) 「탕자의 귀환」을 그렸습니다. 머리털도 외투도 없이 낡아빠진 옷에 찢어진 신발과 상처투성이의 발바닥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은 차마 얼굴도 보여주지 못한 채 등을 지고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어깨와 등을 만지며 거의 감긴 눈으로 측은하게 바라보는 노(老) 아버지의 모습이 애틋해 보입니다. 1669년, 렘브란트는 마지막으로 98×79cm의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을 남겼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렘브란트의 하나님』, 안재경, 홍성사, 287에서 인용). 돌아온 탕자처럼, 시므온처럼, 그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긴 지 345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프랑스에서 네덜란드에서 나란히 전시될 솔만스와 코피트의 초상화처럼, 그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천국에서 주를 그리며 서 있겠지요. soli deo gloria!
-
2015-10-07
-
-
[목회자칼럼] 연변기행
-
-
지금 우리에게 중국동북지방은 <연변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번에 다섯 번째로 연변지역을 방문하면서 보다 깊이, 보다 책임감 있게 연변에 대하여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연변지역을 중심한 중국의 지금 동북지방은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출발과 삶의 첫 번째 터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이 처음 여기서 출발하였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부여, 옥저라는 이름으로 나누어져 살다가 고구려가 이들을 통합하면서 나라(국가)다운 나라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으로는 역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백제와 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그 결과 일컬어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가 열려 아시아동북지역은 우리 한민족에 의하여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면서 세 개의 나라가 700여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가 AD 660년에 백제가,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에 의하여 정복되면서 아시아 동북지역의 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는 <통일신라>라고 부르고 있지만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정복은 당했으나 실상은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신라의 통치권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고구려가 가꾸어 놓았던 저 광활한 송화강, 목단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던 기름진 땅은 그 때 이후로 우리 한민족의 영역에서 멀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우리 한민족의 영토는 최고조에 달했었는데 지금은 역사의 안타까운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우리는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을 북쪽 국경으로 하는 말 그대로 <한반도 3천리>만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1870년대 말, 함경도 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 조선왕조는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어 조정의 통치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극심한 흉년에다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시달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불쌍한 백성들은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1870년대의 두만강 이북 땅은 청나라의 행정력 또한 제대로 미치지를 않아 거의 방치상태로 버려진 땅이었다. 함경도 지역의 우리 조상들은 고향에서 굶어서 죽느니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변 땅으로 들어가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드문드문 청나라의 국경 경비대들이 있었으나 먹고 살 길을 찾아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청나라 군대의 위협과 천대 멸시를 온 몸으로 감수하면서 방치되고 버려진 그 땅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토굴과 토담으로 된 움막을 짓고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삶>을 시작하였다. 함께 모여 이웃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면서 황무지를 파헤쳐 씨를 뿌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여기 저기 자그마한 논밭이 일구어지고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 저 연변 땅은 우리 한반도 남쪽의 기름진 당과 너무나 흡사하게 옥토로 변모 되었다. 나는 이번 방문길에서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맨손으로 피땀 흘려 일구어 가꾸고 넓혀왔던 연변의 논과 밭은 140여년이 지난 지금 아름답고 탐스럽기가 그지없어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
2015-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