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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꿈은 눈물에 젖을 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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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참 많이 울었다. 불신 가정에서 쫓겨나 겨울 눈보라 속을 걸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가난한 신학생이라 양복이 없어 설교를 할 수 없을 때도 채플실 바닥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서울에 올라와 가락동에서 개척을 한 후에도 토요일이면 설교연습을 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억센 전라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설교 원고를 교정하고 다섯 번에서 일곱 번을 강단에 서서 소리 내어 연습했다. 내일 누가 올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눈물을 흘리며 설교연습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전도지를 들고 동네를 누비며 눈물로 전도하고 다녔다. 그때는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오죽하면 토요일 저녁에 빈 의자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다. “주님, 이 빈 의자에 내일 사람을 앉혀 주세요. 지나가는 거지가 되었든, 넝마주의가 되었든 사람을 앉혀 주세요.”그 눈물은 결코 비관과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 눈물은 도전과 희망의 눈물이었으며 내 영혼을 살리는 꽃씨가 되었다. 영혼을 사르는 불덩이가 되었다. 아니, 이 땅의 불덩이를 넘어 절망과 어둠의 밤을 밝히는 꿈의 별이었다. 야곱도 요셉도 눈물로 꿈을 성취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구약의 선지자들도 조국을 위해 피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예수님도 감람산 언덕에서 훗날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다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며 우셨다. 예수님은 그 당시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당해야 할 처참한 심판을 예견하며 우셨다. 예루살렘은 무너졌지만 주님의 눈물은 마침내 새 이스라엘을 이루었지 않았던가. 젊은이들이 꿈을 잃고 방황하는 비극적 시대다.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절망과 상실의 시대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꿈은 뜨거운 눈물에 젖을 때 빛이 난다는 사실을. 눈물을 적시지 않으면 꿈은 빛나지 않는다. 눈물이 무엇일까? 아픔과 통증, 고독과 가난, 치를 떨게 하는 외로움의 젖은 고백이 아닐까. 꿈은 아픔을 동반한다. 시련과 역경의 채찍에 맞아야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워도 눈물을 쏟아야 한다. 인생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마음 아프다. 인기 연예인, 정치인, 관료, 학자, 사업가 등 우리 사회의 지도층들마저도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삶의 꽃을 꺾어버린다. 차라리 울어야 한다. 그냥 울기만 해도 다시 꿈을 꿀 수 있다. 새 희망이 솟아날 수 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 고난의 산이 첩첩산중으로 막혀 도피할 수 없을 때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보면 어떨까. 울고 울다 밤이 깃들고 산도 강도 모두 잠들 때 까지 울고 또 울어보면 어떨까. 산천도 고요하고 밤의 적막에 휩싸였을 때 그 깊은 슬픔의 끝에서 가느다란 삶의 희망의 실타래를 붙잡을 수 있을지도. 더 나아가 나만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아픈 시대를 위해서 울고, 타인의 상처를 보듬고 울고, 미래의 역사를 바라보며 울고 또 울어본다면 더 맑은 영혼의 정화를 느낄 수 있으리라. 울어야 살 수 있다. 울어야 희망이 있다. 차디찬 새벽 도로에서 쓰러져 잠든 청춘이여, 인생을 비관하고 절망에 빠진 상처 받은 이들이여, 누군가 당신을 위하여 울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는지. 상처 받은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그 분의 사랑이 당신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도시의 밤은 냉혹하고 어둠에 쌓여도 콘크리트 벽에 사랑의 이름을 새겨 넣는 이가 있다. 잠긴 창문 너머로 반짝이는 별들이 당신을 향한 누군가의 눈물이라면, 가을 강가의 은빛 갈대가 당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그 분의 사랑의 손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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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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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가나안, 성공의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신명기 32장 48-5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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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가나안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드시 가나안을 얻어야 한다는 설교를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상당 부분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목적이 가나안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을 만났을 때 단 한 번도 가나안을 얻기 위해 애굽을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더구나 모세는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 쯤 들어가서> 여호와를 섬기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5장 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도 아닌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곳이 가나안이든 광야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라도 하나님만 섬길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가나안만 강조하는 데서 오는 잘못은 가나안을 얻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반드시 가나안을 얻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만약 가나안을 얻지 못한 인생이 실패한 것이라면 모세는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그는 가나안에서 단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 므리바 물가의 사건으로 인해 가나안에 발을 디뎌 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의 삶을 결코 실패의 삶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34장이나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은 모세를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가나안만 강조하다보니 가나안을 얻기 전까지의 삶을 비참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광야 사십 년은 비참한 삶이었나요? 아닙니다. 기적의 떡인 만나를 먹으면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던 은혜의 나날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광야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행함으로써 충실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가나안만 강조하다가 여러 문제를 만났습니다. 가나안을 얻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과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을 얻기 전에 지나가는 광야 생활을 비참한 삶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을 욕구 불만 환자로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을 얻은 사람은 교만하여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광야에서가 아니라 가나안에서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나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 망합니다. 우리는 오늘 광야를 걷고 있더라도 거기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광야를 걷다 보면 어느새 가나안에 도착한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광야 길을 감사함으로 걷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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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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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충남-기독교 사적지 방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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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셋째 날-8일(수), 서천 마량진-서산 해미-공주 금번 충청남도를 택한 이유 중 두 번째 큰 이유가 되는 서천 마량진을 향해 출발했다. 마량진! 두 가지 의미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영어로 쓰인 성경책이 이곳에 전해진 ‘한국 최초의 성경전래지’요, 다른 하나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경번역회에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로 향해 가던 중 이곳 마량포에서 여객선이 침몰되어 순직하신 곳이다. 마량포 선착장 항구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1. 한국 최초의 성경전래지-1816년 9월, 영국의 알세스트 호가 조선해양 탐사차 이곳에 왔다가 함장인 바실 홀이 마량진 참사 조대복에게 영어성경을 선물하다. 2. 다른 하나는 아펜젤라 선교사의 흉상과 그의 사적을 기록한 기념비이다. 근처 언덕 위에 세워진 ‘아펜젤라 순직 기념관’(Henry D. 아펜젤라, 1858~1902, 한국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에는 사적 기록물만 아니라 값진 유물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아펜젤라 부부+언더우드(미북장로교)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여 드린 아펜젤라 선교사의 기도문이 눈에 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많은 은혜를 받고 86km 떨어진 충남 북쪽 끝인 서산 해미를 향해 출발했다. 작년 8월 프란체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1790년~1880년 사이에 6천여명의 무명의 순교자들, 더욱이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생매장’ 순교지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순교지를 볼 때마다 마음에 와 닿는 감동과 도전은 가톨릭은 최선의 정성을 다해서 과거의 순교자들을 추모하며 순교지를 조성하고, 가꾸면서 다음세대들에게 그 귀한 순교사적들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오후 4시경 78km 떨어진 다음 목적지 공주를 향해 출발했다.
ㆍ 넷째 날-9일(목), 공주-경북 안동 공주 방문의 목적은 충청도 최초의 감리교회인 공주제일교회(1902년~)와 문화재로 등록된 ‘옛 교회당-역사박물관’을 보기 위함이다. 현재 공사 중이나 배려로 여러 사적들을 볼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공주영명학교’(1904~, 4만 8천평, 남녀공학:中300+高700)를 방문했다. 교목인 유혜종 목사의 안내와 ‘永明100年史’ 책자를 선물 받았다.(설립:R. A. 샤프 선교사, 유관순을 양녀/이화학당에 추천, 장티푸스로 34세로 요절, 학교뒷산에 선교사가족묘지). 유 목사의 사랑으로 뜻밖에 천주교 순교지 ‘황새바위’도 방문했다. 참수, 교수형, 옥사, 아사, 고문 등으로 금강이 그들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질 정도로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했다. 기념무덤안의 순교자들의 고백문이 감동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오후 3시쯤 마지막 행선지인 안동을 향해 출발했다.(공주-안동:195km) 안동은 금번 여정의 목적지는 아니나 한국기독교회사, 특히 통합측 교회사에서 널리 알려진 곳이라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이다.
ㆍ 다섯째 날-10일(금), 안동-대구-마산 마지막 날이다. 본래 계획에 없던 곳이어서 편한 마음으로 안동 시내를 둘러보았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양반도시 같은 넉넉함과 여유가 보인다. 평소에 가고 싶었던 통합측 ‘안동교회’(1901년~)를 방문했다. 3천여평의 대지에 고풍스러운 옛 교회당, 그 옆에는 ‘100주년기념건물-SOLI DEO GLORIA’이 지어져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 본당, 옛 건물은 교육관...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지금도 옛 교회당을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새 건물은 교육관과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당으로 사용하는 건물에 들어가니 마루바닥이고 소리가 삐꺽~ 그러나 정이 담뿍 묻어나는, 참으로 감동적인 곳이었다. 젊은 김승학 담임목사의 설명,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아닌 한국 성도들이 세운 교회, 3.1운동당시 독립선언문을 등사한 곳, 한국교회 최초의 청년면려회 창립지, 안동 최초의 유치원, 안동최초의 성소병원...등”을 듣고 원로장로님의 안내를 받아 안동교회 역사전시실에 들어서자 벽면에 붙어있는 말씀이 나의 마음을 감동으로 뚫고 들어왔다. 신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나는 그 말씀을 4월 19일 주일 설교시 본문으로 택하여 성도들과 금번 안식주간의 삶을 나누었다. 대구를 거쳐 마산에 도착하니 밤 8시 30분, 그동안 달린 거리는 1,076 km!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의 사랑과 기도로 2015년 안식주간을 은혜와 안전 가운데 마치게 됨을 감사드린다. 모쪼록 “옛 것을 귀히 여기고, 기억하고, 감사하고, 옛것으로부터 지혜와 경계를 공급받으면서 오늘과 미래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와 교회”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기독교사적지 방문을 통해 받는 도전과 배움이 너무도 큼으로 앞으로 성도들과 함께 1박2일/2박3일 일정으로 목회에 접목하면 어떨까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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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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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총회 노회 분립 위원회의 반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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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에 이어) 3. 전통노회와 분립노회와의 관계 노회분립의 원칙은 분립할 노회의 지역 경계가 정해지면 그 지역 안의 모든 교회는 분립할 노회의 소속교회이고 그 외의 지역 관할 내의 모든 교회는 전통노회에 소속한다. 따라서 혹 명부에 누락된 교회가 있다고 할지라도 분립할 노회지역에 위치한 교회는 자동적으로 분립노회에 소속하고, 전통노회 지역에 위치한 교회는 자동적으로 전통노회에 소속하는 것이요 총회나 분립위원회가 간섭할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본 건은 무지역노회로서 지역이 없으므로 전통노회의 각 지교회의 명부를 작성하고 분립할 노회의 가칭 명칭과 각 지교회의 명부를 작성하여 총회에 노회분립허락청원서를 제출한 후 총회의 허락과 동시에 분립할 노회에 가칭이라는 용어도 붙일 필요 없이 노회명칭이 확정 되며 지교회의 수도 확정되는 것이 헌법이 정한 법리이다. 그러므로 총회가 보낸 노회분립위원회는 청원서에 기록된 대로 전통노회는 어떤 간섭을 할 수도 없고 간섭해서도 안 되고 오직 분립할 노회의 지교회들만 소집하여 제1회 ○○노회를 조직해주면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총회가 파송한 노회분립위원회는 전통노회의 역사성과 회기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므로 전통노회를 해산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반역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전통노회가 존재하지 않는 노회분립은 있을 수 없다.
4. 황금알 자리의 금품수수에 대하여 모 인터넷 신문(2015.1.16. 입력)에 “노회 분립위는 여전히 황금알(?) 자리”라는 머리기사의 내용으로 “분립노회를 마친 노회 관계자는 ‘이번 분립예배로 양측에서 약 2천만 원 이상이 들어가서 노회 재정이 바닥이 난 상태’라고 말했다”고 보도되었고 이어서 “또 다른 관계자는 ‘노회분립 과정에서 그렇게 재정이 많이 들어갈 줄 상상도 못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고 보도하였다. 또 계속 이어지는 보도내용은 “또 노회 분립위는 황금알 자리라는 것은 몇 년 전 총회석상에서 모 인사에 의해 공개적으로 희자될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다”고 했는데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이어지는 기사에 “수 년 전 ○○노회 분립활동을 도왔다는 ○○교회의 한 중직 자는 ‘당시 노회분립을 위해 적어도 1억5천 이상은 들었다’고 실토한 바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상과 같이 노회분립위원회의 실상이 언론에까지 보도된 이상 그 내용은 성경과 헌법과 총회의 정체성에 반역하는 행동에 대하여 총회는 철저히 조사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총회나 노회가 이와 같은 반역행위를 방치한다면 과연 치리회의 존재가 필요하다 하겠는가?
5. 결론 원래 노회의 분립은 노회가 비대하여 효율적인 노회행정을 위해서 서로가 분립을 원치는 않지만 부득불 노회가 연구위원회 등을 선정하여 충분히 검토한 후 필요에 따라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가 허락함과 동시에 분립노회의 명칭과 교회수도 화정되므로 총회의 노회분립위원회는 황금알(?) 자리라는 비난을 받을 것 없이 총회가 지급하는 비용만을 가지고 노회가 청원한 서류에 명시된 지교회들만을 소집하여 총회가 확정해 준 분립노회를 조직해주는 사회자의 업무일 뿐이다. 그런데 근간에 노회분립의 양상은 대부분 양측으로 나뉘어 갈등을 거듭하다가 결국 분립의 악순환으로 이어는 것 같아 보인다. 본건 평양노회 분립의 경우 “평양 A노회(김선규 목사 측) 평양 B노회(고영기 목사 측)” 등으로 표기한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노회분립 과정에서 어느 한쪽은 21당회가 못 된다는 시비는 물론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헤쳐모여 식의 노회분립의 추태를 부리고 있는 것이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총회의 노회분립에 관련한 교회행정 하나만 보아도 각 치리회의 교회법률에 대한 개혁이 절실해 보인다. 총회여! 코람 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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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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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목적과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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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범죄의 중심에 돈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돈이 있으면 행복하고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말들을 한다. 이 내용에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은 통장에 돈의 숫자가 적어지면 나이는 들어가는데 자녀들 교육시키고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이 돈으로는 턱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통장의 숫자가 늘면 어느새 마음은 행복해지고 자신감도 생긴다. 그리고 교회에서 행사를 하거나 부모의 역할이나 선을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돈이며, 돈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돈은 이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돈 때문에 선한 길로 갈수 있고, 돈 때문에 악한 길로도 갈 수도 있다. 돈을 취할 수도 없고 돈을 버릴 수도 없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돈과 관련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돈이 목적인가? 하나님이 목적인가? 여기서 ‘돈’은 돈, 권력, 성적, 지식, 소유 등의 모든 재물을 말하며,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와 선 등의 본성을 귀중히 여기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돈이 목적일 때는 돈이 있으면 나는 높아지고 힘도 생기고 행복하다. 그러나 재물이 없으면 나는 하찮으며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불행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사람은 돈을 추구하는 삶이 삶의 전부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목적이라는 말은 돈, 권력, 지식, 소유 등의 모든 재물을 사용하여 사랑을 보여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돈이 목적이 되는 것과 사랑이 목적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반대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목적이 되면 돈을 벌기 위해 돈 걱정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내가 나를 믿어주고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바라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갖고 원하면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원함이 이루어질 것을 100% 믿으면서 방법을 찾아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그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이렇게 쉬지 않고 노력하여 결국에는 목표를 이루어낸다. 그리하여 자신의 목적인 돈과 권력과 명예와 소유 등의 재물을 이루어낸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 하면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재투자 한다. 돈과 권력은 많아지고 결국에는 혼자 모든 것을 차지하는 상황을 만든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돈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돈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된다. 결국 돈을 목적으로 하는 그 길은 악한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이 사랑과 선이 되면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본성과 선을 행하는 것에 목표를 두게 된다. 여기에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돈과 권력과 지식과 건물과 소유를 향한 목표가 있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악과 거짓을 행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잃지 않으며, 사람을 이용하여 사람을 잃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즉 돈이 없을 때는 돈 걱정하지 않고 지금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내가 나를 믿어주고,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바라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갖고 원하면서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100% 믿으면서 방법을 찾아서 공부하고 연구하여 그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리고 돈이 생기면 돈에 집착하지 않고 쉬지 않고 노력하여 결국에는 돈과 권력과 명예와 소유 등의 재물을 이루어낸다. 지금까지는 돈이 목적일 때와 같다. 그러나 사랑이 목적이기에 이루어낸 돈과 권력과 지식과 소유 등을 본성과 사람을 살리는데 재투자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과 선은 더 많아지며 사람들과 함께 더 기뻐하고 더 자유로워지고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목적이 마지막의 내 삶을 결정한다. 돈을 얻기 위해 거짓과 악을 행하여 본성과 사람을 잃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돈과 지식과 권력 등은 사랑과 선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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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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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약할 때 강한 은혜 (고린도후서 12장 9절~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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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세계에는 역설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강한 것이 좋고, 큰 것이 좋고, 센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오늘 성경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 약할수록 나는 강해진다. 내가 약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보혜사 성령님, 내가 약할 때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표현되기를 연한 순과 같고, 예수님은 자라날 때 무슨 아름다운 모양이나 풍채가 없다 하십니다. 가녀린 잎과 같이 연한 순과같이 자라나 세상 죄를 지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 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심으로 연약과 부족함을 친히 혼자 담당하셨습니다. 본문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족 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대서 온전하여 진다. 그러므로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하는 것은 내 여러 약한 것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안에 머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그 시대 최고의 스펙과 학벌을 자랑하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사도바울이 본문에 와서 「내 그런 것 들은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십자가만 자랑한다. 약한 것만 자랑한다.」 합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우리가 긴 세월을 살다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일이 많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 같지만 살아남는 자가 강합니다. 강한 이빨은 부러지기 쉽지만 부드러운 혀는 절대 안 부러집니다. 우리가 일부러 약할 것은 없지만 약한 것이, 없는 것이, 약점이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고 숨길 것도 아니고, 창피 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펙을 자랑하고 자기 학벌을 학위를 자랑할수록 부질없는 것입니다. 돈을 천억을 만졌다고, 나라의 높은 고관대작을 차지했다고 누가 존경 할까요? 아무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하고 애지중지 하는 게 무엇일까요? 내가 부끄러워하고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약한 그때가 강함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내 몸에 아픔이 있기 때문에 건강에 신경을 더 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럴 때 생사화복, 흥망성쇠,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주관자 되시는 주님께서 찾는 자에게 상주시고 두드린 자에게 열어주십니다. 약할 때 강한 은혜세계를 자랑하고, 세상의 부러울 것이 없고, 황제 앞에 서든지 어디 가든지 도도하고 당당하게, 거침없이 살아간 바울처럼 약점이 많고 부끄러움 많고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한, 성경적인 프리즘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 찬송하는 사람, 성경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재해석 되어야합니다. 더 이상 자랑하던 것을 내려놓으시고 부끄러워하던 것을 반대로 해석하십시오. ‘하나님 내게 복 주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 사도바울이 삼세판 기도해도 낫지 않은 그 지병 때문에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 병을 오히려 감사하는 겁니다. 내 은혜가 오히려 내게 족하다. 내가 아프니까 겸손해지는 겁니다. 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문제를 문제 삼지 않고 문제를 기도제목 삼아버리면, 쓴물이 단물이 되고 애물단지가 보물단지가 되고 근심거리가 간증거리가 되는 걸 기억하여 약점마저도 자랑하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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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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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새 봄의 결혼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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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젊은이의 결혼에 동의할 수 없는 분은 지금 당장 저 이층 창문 바깥으로 뛰어 내리십시오.” 주례자의 이 한마디는 하객들에게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자신의 이런 경험 때문인지 ‘좋은 주례사는 일가(一家)를 이룰 신혼부부와 하객들에게 경건함과 아울러 폭소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더 좋겠다.’는 게 문 태인 시인의 생각입니다. 그런 그가 최근 참석했던 결혼식에서의 멋진 주례사를 이렇게 리포트 합니다. “신랑의 대학교 은사인 주례는 지도교수라는 인연을 맺은 만큼 평생 신랑에 대해 애프터서비스를 해드리겠노라고 했다. ‘신랑에게 하자가 발생하면 밤 12시에라도 당장 나에게 전화를 하세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런 말씀들이 이어졌다. ‘사랑은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큰소리를 지르지 마세요. 경어체로 햇살처럼 말하세요. 미주알고주알 따따부따 하지 말고 문을 닫고 나와서 숨을 크게 내쉬세요. 한순간이라도 울지 마세요. 휴일 오후에 ‘뭘 드시겠어요?’라고 아내가 물을 때 ‘아무거나’라며 우유부단하고도 퉁명스럽게 말하지 마세요. 단둘이 있을 때는 보는 사람 없으니 유치하게 노세요.’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가 기대하던 ‘더 멋진, 유머를 폭죽처럼 터뜨리는 주례사’란 기실 신랑 신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의 가치가 떨어질 만큼 떨어진 세상을 향한 하늘의 목소리여야 합니다. 때문에 주례사는 참석한 하객들에게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반추하는 회초리(回初理-돌아올 회(回)·처음 초(初)·다스릴 리(理)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拿琛返-붙잡을 나(拿). 보배 침(琛), 새롭게 할(返)으로 꼭 붙잡아야 할 보배)이 되어야 합니다. 결혼식의 꽃이라 불리는 주례사와 더불어 결혼의 서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적으로 던져지는 ‘신랑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신부를 사랑하기로 결심합니까?’ ‘신부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변치 않고 신랑을 사랑하기로 결심합니까?’에 대해 기어드는 목소리로 ‘예’라고 답하는 대신 자신만의 서약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서툴지만 자신이 쓴 결혼축시로 서약을 대신할 수 있고, 악기 연주나 노래로 신랑 신부에게 자신의 다짐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명문장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난, 당신이 두 번 세 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도 처음 듣는 것처럼 친절을 다해 짜증 부리지 않고 설명해 주겠습니다. 난, 현관문에 쓰레기통을 마련해 놓고 짜증과 분노와 피곤은 다 집어던지고 환한 햇살처럼 맑은 얼굴로 퇴근하겠습니다. 당신의 나와 다른 습관을 존중하며 당신을 바꾸려고 덤벼들기보다 나를 바꾸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는 말 한마디가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는 말보다 더 진솔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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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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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미술품 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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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미국 크리스티 미술 경매장에서 사상 최고가의 작품이 나왔습니다. 스페인 출신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가 그린 ‘알제의 여인들(Les Femme d’Alger)’이 1억 7,936만 5천 달러(약 1965억)에 익명의 구매자에 팔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카소와 비슷한 시기 활약하면서 약간은 알력을 겪기도 했던 스위스 출신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남자(L’Homme au Doigt)’ 또한 근소한 차이로 사상 세 번째인 동시에 조각으로는 최고가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미술품은 어떤 작품일까요? 현재까지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거래된 작품은 박수근의 ‘빨래터’로 45억 2,000만 원(2007년 5월), 이중섭의 ‘황소’가 35억 6,000만 원(2010년 6월), 김환기의 ‘꽃과 항아리’가 30억 5,000만 원(2007년 5월) 순으로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을 포함해서 국내 랭킹 10위까지 다 합쳐도 이번 피카소 작품의 20%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일반인들이 느끼기에는 상당한 액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저금리 현상에 부동산 경기마저 얼어붙자 예술품 수집에 눈을 돌리는 소위 ‘아트테크(art-tech)’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결과라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이러한 추세를 파악해서 현재 거래액 1,000억 이하인 미술품 시장을 2018년까지 6,300억 규모로 키우겠다는 ‘미술 진흥 중장기 계획’을 작년에 내놓은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미술품 시장의 과열 조짐에 대해 의문표를 제기합니다. 첫째, 국내에서도 미술품 거래와 관련된 양도소득세 문제가 불거진 적이 있었습니다만, 국제 미술품 시장을 양분하는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의 경우에도 최근 고가의 미술품 거래가 일종의 조세 회피의 수단으로 오용(誤用)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의 시각 때문입니다. 둘째, 천문학적으로 뛰어오른 가격이 일종의 빈부격차를 표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영국 경제학자 프레드 허시(Fred Hirsch)는 1970년대 영국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원천적으로 극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위치재(positional goods)’라고 정의했는데, 작금의 ‘미술품’은 그가 말한 위치재의 전형이라 해도 뭐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그런 상품같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에서 미술품 시장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아마도 (사)한국화랑협회 주최로 지난 2002년부터 시작한 한국국제아트페어(KIAF)가 아닐까 합니다. 2007년 5월 8일 서울 코엑스 태평양홀에서 전세계 18개국 208개 화랑이 참가해 미술품 5,000여점을 전시·판매하는 제6회 KIAF가 열렸습니다. 백남준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된 행사장에 청년들과 교사들을 인솔해 견학간 적이 있습니다. 교사 한 분이 개구쟁이 아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는데, 돌아다니다가 그만 진열해 놓은 항아리 조각을 떨어뜨려 깬 적이 있습니다. 행사진행요원들이 뛰어오고, 뜻밖의 상황에 많은 사람들도 걱정 어린 눈빛으로 모였습니다. 대경실색해서 가격을 물어보았더니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 2,000만 원 정도 간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행사 본부에 가서 보상이라든지 법적 책임의 분담 문제에 대해 상의하고, 인솔자로서 일단 명함을 건네고 당시 사역하던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만, 그 날부터 잠도 못 자고 전화만 오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기도는 또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사역을 시작하고 그렇게 절실하게 기도를 많이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직도 깨진 작품을 보상하라는 전화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는 『컬처 메이킹(Culture Making)』(IVP, 2009)에서 ‘문화창조자 예수’를 거론하면서 이제는 인간이 오히려 문화에 의해 거꾸로 변화되는 시대라고 탄식한 바 있습니다. 이번 최고가 경매를 보면서 저만 느낀 소회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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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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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마음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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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칠순을 향하여 나아가다 보니 시력이 근시안에 원시안까지 겹쳐지면서 불편스럽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을 생각하고 신앙을 생각하는 깊이가 더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이가 젊을 때는 멀리 볼 줄 모르고 사고력도 얕고 사물을 보는 것도 극히 피상적으로 보게 되는데 나이가 들면서 인생도 멀리 보게 되고 생각하는 것도 깊어지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만사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지도 모른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그래서 ‘괴테’는 “눈은 감각의 여왕”이라 했고 ‘플라톤’은 “눈은 인간의 태양”이라고 갈파했다. 사물의 도리를 바라보는 눈을 활안(活眼) 이라 하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눈을 혜안(慧眼)이라 하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을 구안(具眼)이라 하고, 밝게 빛나는 눈을 형안(炯眼)이라 한다. 눈이 있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보이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눈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자가 있었는가 하면 눈으로 말미암아 실패한 자들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보암직하게 보인 눈 때문에 죄를 지었고, 삼손은 들릴라의 외적 아름다움을 보는 눈 때문에 결국 두 눈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뽑히는 고통을 당했다. 나귀가 보았던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 발람은 보지 못한 것은 물질을 먼저 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이다. 예수를 정치적인 왕으로 보았던 가룟 유다는 인류의 구원자를 하찮은 은 30에 팔게 되었으며, 화해와 베풂의 원리를 실천했던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하고 난 이후에 바라본 황량한 사막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기에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력이 좋지 않으면 안경을 사용한다. 목사는 책을 자주 보게 되어서 그런지 일반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근시안에 원시안까지 겹쳐서 불편을 겪게 되는데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다초점이라는 참 좋은 안경을 맞추어 주신 분이 계셔서 더 없는 고마움을 갖게 한다. 목사를 사랑하고 위하시는 마음! 그분의 눈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단순하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경을 맞추어 주신 것을 뛰어넘어 목사의 다양한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다. 안경을 사용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도 안경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푸른 색깔의 안경을 쓰면 모든 사물이 푸르게 보이고, 붉은 빛깔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모든 것이 붉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안경도 어떤 색깔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마음에 사랑의 색깔을 하고 보면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감사의 색깔을 하고 보면 모든 것이 고마울 뿐이다. 불평과 불만의 색깔을 하고 인생을 보면 모든 것이 불만투성이일 뿐이고,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마음으로는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의 면면이 전부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즐기는 사람은 상대방의 모든 말이 거짓으로 들리고, 사기를 치는 사람은 상대방의 모든 언행이 사기로 느껴지고, 매사에 부정부패에 길든 삶을 사는 사람은 공의와 진실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범사까지도 부정과 부패한 것으로 느껴지고 보이는 것이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농담주고받기 이야기는 그래서 교훈이 된다. 친구 관계를 상기하면서 농담주고받기를 하게 된 상황에 이성계가 먼저 무학대사를 보고 “대사의 얼굴은 돼지같이 생겼다.”고 하면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향하여 “임금의 얼굴은 개같이 생겼다.”라고 받아야 하는데 대사는 “임금의 얼굴을 보니 부처님같이 생겼다.”라고 하여 이성계가 화를 내면서 친구 관계로 허심탄회하게 마음 주고받고자 하는데 이러느냐고 하자 무학대사가 “아무리 개 같다고 하려 해도 바라보니 부처님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개같이 생겼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받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부처면 모든 사람이 부처로 보이고 느껴진다는 이치다. 내 마음이 맑으면 보이는 것 또한 맑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그러므로 남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동일시의 오류다. 그래서 도둑의 눈에는 사람들이 도둑으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한다. 남을 내 생각으로 재단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합리성이다. 그 근간이 마음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 진리이다. 사랑과 감사가 있는 마음은 천국이지만 미움과 원망과 저주가 있는 마음은 이미 지옥이다. “먼 곳만 보는 사람은 가까운 곳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가까운 곳만 보는 사람은 먼 곳에 있는 적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경영리더십의 교훈이 생각난다. “곤충의 눈으로 발밑을 보고, 새의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라.”는 교훈도 있다. 그것은 동시에 나무와 숲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기업경영이나 정치현장에서도 가까운 곳만 보고 있어서는 트렌드의 변화나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고, 반대로 먼 곳만 보고 있어서는 내부의 균열을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교훈한다. 교회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좋은 이치를 새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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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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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무리를 작별하신 후(마가복음 6: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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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Technology of Achievement>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소위 <쪼개진 인생, 쪼개진 시간>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쪼개진 시간이란 하루라는 시간이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종류의 시간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근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일에 매달려 삽니다. 성취의 기쁨을 크게 느끼는 것도 이런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후 5시 이후 근무가 끝나면 딴 사람이 된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하던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립니다. 이럴 때 그의 하루는 쪼개진 시간이 됩니다. 하루라는 시간만 쪼개지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애 전체가 쪼개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쪼개지는 문제는 그 안에 일관성, 통일성의 부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관성과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쪼개지는 것입니다. 근무 시간에 일할 때와 동일한 일관된 태도로 근무 후의 시간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의 생애는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관성의 부재로 인해 쪼개지는 결과가 나타나는 몇 가지 경우를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 홀로 있을 때에 일관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할 때는 아주 점잖고 고상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빈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헨리 나웬은 <홀로 있을 때 그대 누구인가>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 일이 많을 때와 일이 없을 때에 일관성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일이 많을 때는 정말 인생을 알차게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일이 없을 때는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28장의 말씀처럼 <성읍에 있으나, 들에 있으나, 들어가나, 나가나> 복을 받는 것이 중요하듯이, 성읍이든 들판이든, 들어갈 때든 나올 때든 일관된 삶의 모습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함께 계실 때>,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셨습니다. 피곤하셔서 제자들과 휴식을 취하려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무리들이 거기까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무리들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고,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리와 작별하신 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본문 46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와 작별하셔서 혼자 계실 때,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할 일이 없어졌을 때, 우리처럼 빈둥거리신 게 아니라,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무리와 함께 할 때나 무리와 작별한 후에나 예수님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삶의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서 지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나 홀로 있을 때, 여전히 우리는 <나>로서의 존엄성을 잃으면 안됩니다. 둘째로 <사명>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사명의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기도>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의 기도를 올리셨고, 홀로 계실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비난받게 된 이면에는 표리부동한 모습, 이중 인격적 삶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믿을 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다시 존경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무리와 작별한 후>에 더욱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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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