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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서울대 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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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서울대학교에서 치러진 중간고사 중 일부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었습니다. 치기(稚氣)어린 해프닝으로 끝날 뻔 했던 이 사건은 해당 학교가 대한민국 지성의 정점이라는 서울대요(문화일보), 해당 과목이 윤리 강좌며, 해당 학과가 철학과여서 충격을 주었고, 그 파장이 지금까지도 만만치 않습니다. ‘서울대생들이 뭐가 아쉬워서?’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조금은 시대 현실과 동떨어져 살고 계십니다. 한국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취업률 평균은 56.2%입니다. 그런데 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서울대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61%로 전체 대학 순위 50위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을 알아야 서울대 재학생 절반이 A학점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국 대학에 만연한 학점 인플레의 무풍지대는 없었습니다. 지난해 전국 176개 4년제 대학 재학생 중 69.8%가 평균 B학점 이상의 학점을 받았다고 합니다(한국대학신문). 요즘 청년들은 취직을 위해서 좋은 학점뿐만 아니라 각종 자격증, 수상 경력, 심지어는 다양한 봉사 활동 경험까지 요구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이 학점 인플레와 컨닝 사태를 조장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때문에 이번 컨닝 사태를 합리화하거나 동정할 수는 없습니다. ‘컨닝’이라는 말은 ‘교활한’이라는 형용사로 한국에서만 시험 중 부정행위를 뜻하는 말로 쓰는데, 원래 영어로는 ‘cheating’이라고 합니다. ‘취팅(cheating)’은 부정직한 사술(詐術)로써 남을 속이는 ‘사기(詐欺), 협잡(挾雜), 불륜(不倫)’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행위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바로 시험 컨닝입니다. 컨닝은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이며, 공정한 시험의 관리 감독이라는 고유의 업무를 침해하는 범죄 행위입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부정행위에 가담한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학벌지상주의, 결과만능주의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도 근원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의 조류(潮流)가 바뀌지 않는 이상, 조금이라도 더 좋은 학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학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스펙을 얻고자 하는 학생들의 몸부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부림 가운데에는 이 정도 부정과 불법과 불의쯤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바람직하지 않는 의지가 한두 가지 게재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문제는 그 누구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담론(談論)을 가르치지도 제시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 철학이기 때문에, 거기 함몰된 이 세상은 진리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무엇이 옳은가, 즉 공의(미쉬파트)와 정의(체다카)를 말씀합니다. 그것도 추상적인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인 적시(摘示)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신 10장),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신 16장), ‘저울추를 속이지 말고 되나 말로 속이지 말라’(신 25장)와 같은 구절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아무리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려도 그것이 사회적 약자들을 압제하고 수탈하여 얻은 결과라면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롭지 못합니다. 부정직하고 부당한 수단, 방법을 통해 무언가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절대 떳떳하지 못한 독수독과(毒樹毒果)에 불과합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전도(顚倒)된 이 세상 앞에 교회가 외쳐야 할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미래를 책임질 이 시대의 후학(後學)들에게 교회가 가르쳐야 할 말씀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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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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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사모곡(思母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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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1일 밤, 남도의 들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밤, 어머니는 나의 곁을 떠나셨다. 그렇게도 수많은 사경을 헤매시더니, 이제는 정녕 지상의 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 영원한 본향이 있는 곳 천국으로 떠나가셨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다시 살아나셔서 나의 손목을 붙잡고 “막내야, 미안하다. 다시 살아브렀다.” 눈물지으시던 어머니… 이제는 다시 그 야윈 음성조차 들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셨다. 어린 시절 술에 취한 아버지께서 몽둥이로 뒷마당의 장독 항아리들을 두드려 깰 때면 “아따 잘 한다, 잘해, 다 깨 버려라, 다 깨 버려!” 삿대질을 하시며 맞고함을 치실 정도로 도도하고 굽힐 줄 모르던 자존심을 가지셨던 어머니, 우리 막내아들 절대로 2등은 안 된다며 일등만을 고집스럽게 요구하시던 어머니… 그 욕심 많은 사랑을 지상에 남겨 둔 채 함박눈 펑펑 쏟아지던 밤 끝내 떠나시고 말았다. 어린 시절 마을의 상여가 나갈 때 마다 막내 아들이 공포를 들어 용돈으로 100원을 받고 공포에 달린 삼베조각을 떼어다가 드리면 어머니는 정월 대보름처럼 환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막내가 살림꾼이구나…” 그때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워 이 밤, 가슴이 미어지는데, 어머니는 끝내 흰 꽃잎 같은 눈송이들 하얀 수건처럼 머리에 얹고 이별이라 손짓하며 영원한 본향으로 떠나가셨다. 막내아들이 예수 믿는다고 그 모진 회초리로 매질을 하시며 예수 믿으려면 차라리 집을 나가버리라고 온갖 핍박을 하시더니 이제는 그렇게 대적하던 예수님 믿고 하늘의 꽃가마 타고 천국으로 가셨다. 그런데 오늘 이 밤, 예수 믿는다고 회초리로 저를 때리시던 어머니가 너무도 그립다. 차라리 종아리에서 피가 터져 나와도 좋으니 다시 한 번 어머니가 일어나셔서 회초리를 들고 나를 때리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도 매를 맞다가 홀로 울며 집을 나오던 그 해 겨울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그때 어머니는 집을 나오던 나를 향해 “썩을 놈아, 이렇게 키워 놓으니까 부모는 안중에도 없냐? 이놈아, 그렇게 하나님이 좋고 예수가 좋으냐? 부모 말을 안 듣는 놈은 자식도 아니니 어서 나가버려 이놈아!” 얼마나 속이 상하고 마음이 찢어졌으면 이런 말을 하셨을까. 원래 어릴 적부터 효자가 되어 부모님을 잘 모시고 싶은 꿈이 있었다. 가난하게 사시던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효자의 꿈 말이다. 그런 순수한 효자의 꿈을 꾸던 나는 어느 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불효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을 하다 보니 결국 부모님께는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 때문에 부모님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시게 되었으니 영적으로 말하자면 효자 중의 효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동안 육신적으로 볼 때는 못 된 불효자였다. 어머니가 마지막 떠나가시는 길, 따뜻하게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한 불효자의 가슴이 저리지 않을까. 5월이 되면 어머니가 더 사무치게 그립니다. 천국에 계실 어머니께서 주님 앞에 더 큰 천국 상급을 받고 크게 칭찬받으시리라 믿으며 불효자는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한 몸 으스러질 때까지 일사각오의 신념으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리라 다짐한다. “어머니, 천국에서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목양일념의 한 길 잘 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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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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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물꼬를 트는 사람은 누구인가(사무엘상 17장 31-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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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돋보이는 자리를 점하고 있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복음서의 문을 여는 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도 다윗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기의 한 복판에도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고, 나치 치하에서 유태인을 드러내는 표지는 가슴에 붙어 있는 다윗의 별이었습니다. 더구나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표현함으로써 메시아를 다윗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명실상부한 성경의 중심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떤 인물일까요? 본문에서 다윗은 <꽉 막힌 물꼬를 트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보냄을 받아 형님들의 위문을 갔을 때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블레셋에서는 골리앗이 나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독하면서 싸움을 돋우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중에는 사울 왕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골리앗과 싸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숨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답답한 상황이었고, 정말 위기였습니다. 이 때 다윗이 그 어려운 상황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우선 그에게는 큰 용기가 생겼습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 왕에게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사울 왕이 백성들에게 했어야 할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소년 다윗이 왕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관을 쓴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면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실 때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다락방에 임한 후에도 사도들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그들이 더 이상 숨어있지 않고. 용기 있는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이의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앞장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그는 다윗은 소년이요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라고 말하면서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물론 사울 왕의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분석은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상황 판단과 분석으로 전문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도자란 분석과 설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타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물꼬를 트기 위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왕관을 쓴 사울보다 다윗이 실질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러했기에 사람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환호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다윗은 맹수와 맞서 양떼를 구원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생명을 거는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그에게 맡기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는 맹수와 같은 주변 나라에 맞서서 이스라엘을 지킬 선한 목자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물꼬를 터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답답한 대한민국 상황,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물꼬를 터 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골리앗을 쓰러뜨려 물꼬를 트는 이 시대의 다윗 역할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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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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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버이 주일 유감(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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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주일, 원래는 어머니 주일
어버이 주일로 바뀐 것은 아쉬워
오늘의 어버이 주일은 처음부터 어버이 주일이 아니고 어머니 주일로 시작되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는 ‘안나’라는 소녀가 자기 어머니 추모예배에 참석한 손님의 가슴마다 카네이션 꽃을 달아 드렸다. 안나양은 해마다 그 날이 돌아오면 추모예배를 드렸고 참석하는 이들의 가슴에 꽃을 달아 드렸다. 그렇게 하던 중 대실업가 와나메이커에게 “한 날을 정하여 모든 어머니의 은덕을 기리는 날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같이 제의했다. 와나메이커가 5월 둘째주일을 그렇게 하는 날로 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어머니의 은덕을 기리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소문이 전국에 두루 퍼졌고 1914년엔 미국 국회에서 이 날을 ‘어머니 날’로 정하고 지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재직 시에 ‘어머니 날’을 정했는데 그 해 5월 둘째주일이 8일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주일과는 상관없이 해마다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지키도록 하였고 교회에서는 날짜와 상관없이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시초에는 ‘어버이 주일’이 아니고 ‘어머니 주일’이었는데 1973년에 ‘어머니 주일’이 ‘어버이 주일’로 변경되었다. 필자는 ‘어머니 주일’이 ‘어버이 주일’로 변경된 것만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물론 부성애도 갸륵하지만 모성애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숭고한가. 어머니의 사랑은 한없이 숭고하고 희생적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주고 받는 법칙으로 되어 있다. 받기 위해 주고 주고는 받기를 원한다. 친구간의 우정도, 남녀간의 사랑도, 심지어 부부간의 애정도 주고 받는 사랑이다. 받은 것 만큼 줘야하고 준만큼 받아야 한다. 준만큼 받지 못할 때 불만이 생긴다. 애정의 비극은 한 쪽이 준만큼 받지 못하고 받은 것 만큼 주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이러한 주고 받는 사랑의 차원을 훨씬 초월한 사랑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주고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준다. 어머니의 사랑은 주기만하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뿐만아니라 어머니는 강하다. 빅토르위고가 한 말처럼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의 강한 정신력은 모성애에서 표현된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 고생은 고생으로 여기지도 않고 자식을 위한 희생은 희생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자신의 고생과 희생으로 자식만 잘 되면 그 이상 바라지 않는다. 얼마나 강하면 그렇겠는가. 어머니의 은덕은 마땅히 누구나 다 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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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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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충남-기독교 사적지 방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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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중 목회에서 복음의 핵심을 만나는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에 진액을 쏟는다. 해마다 그 절기가 가까이 올수록 영적 긴장감에 쌓인다. 나는 지난 26년 가까이 교회 앞에 “십자가를 머리로 만나고, 십자가를 가슴으로 체험합시다”를 강조하며 2주간 장기집회를 가져 왔다. ‘사순절특별새벽기도회’ & ‘고난주간특별묵상집회’. 올해는 어느 지역을 탐방할까? 묵상 중에 충청남도로 정하고, 지난 4월 6일(월)~10일(금)까지, 논산/강경읍, 서천/마량진, 서산/해미읍, 공주, 경북 안동을 방문하면서 5일 동안 달린 거리는 1,076km이었다.
ㆍ 첫째 날-4월 6일(월), 강경읍 오전 11시 30분 경 첫 목적지인 젓갈로 유명한 강경읍을 향해 출발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최초의 예배처소를 방문키 위함이다. 산이 없는 강경읍의 유일한 동산인 옥녀봉(43.9m)에 예배처소를 아담하게 복원시켜 놓았는데 그 초가집에서 한국 침례교가 시작된 것이다. 강경-인천을 오가며 포목 장사하는 지병석이 서울에서 침례를 받고 그 다음 해에 미국 보스턴의 클라렌톤교회가 파송한 폴링 선교사 부부가 지병석 집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초가집이 한국기독교침례교가 태동한 역사적 장소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치 빌립보의 자주장사 루디아가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인, 유럽 최초의 세례교인 그리고 그녀의 집이 유럽 최초의 교회가 될 줄이야! (행16장) 교회는 몇 년 전에 폴링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 보스턴 클라렌톤 교회당과 꼭 같은 교회당을 지었는데 지금의 강경침례교회이다.
ㆍ 둘째 날-7일(화), 강경읍-병촌리-서천 근처 카페에서 아침 요기를 하고 다음 행선지인 서천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웬 하나님의 은혜인가? ‘Coffee-flower’ 주인이 강경대흥감리교회 권사, 그분에게서 강경의 여러 가지 귀한 정보들을 얻었다. 강경은 일제 강점기 때 군산, 목포와 함께 3대 포구, 물류기지여서 역사적인 유물이 많은 곳이란다. 근대역사전시관이 있는 강경제일감리교회를 방문했다. 역사전시관에 들어섰을 때 나의 마음을 찡~하게 울린 글이 있었다.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글 사방에는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한 가지 목적을 전하기 위해 선진 자기 나라를 떠나 머나먼 이국만리 미개한 조선으로 온 수많은 선교사들의 사진들이 나열돼 있었다. 그 외 진귀한 자료들을 둘러보면서 지난 역사를 중시하여 한 건물 전체를 역사보존관으로 제공한 강경제일감리교회가 부러웠다. 그 다음으로 간곳은 강경성결교회. 이 교회를 만난 것은 금번 여정에서 뜻밖에 얻은 값진 소득이었다. 신사참배거부에 뿌리를 둔 재건교회 목사로써 한국 최초의 일제신사참배거부운동의 진원지 교회가 강경읍에 있음을 발견할 줄이야! 사적은 이러했다. 이 교회 성도인 김복희 집사(주일학교교사/강경공립보통학교교사)는 1924년 10. 11 강경신사의 祭日을 맞아 학교에 참배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57명의 학생들과 함께 불참했는데 어린이들과 학생들의 대부분은 강경성결교회의 주일학교 학생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보도되었고, 총독부에선 학무국장을 파견하여 조사하고,... 결국 김복희 교사는 면직을 당했다. 그때의 사건을 기념해서 교회 옆 마당에다 ‘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비’란 기념비를 세웠는데, 김 교사와 57명의 학생들을 뜻하는 크고 작은 57개의 돌들이 기념비 주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 교회 이우호 전도사의 소개로 강경읍에서 10여km 떨어진 병촌성결교회의 방문도 뜻밖의 은혜이다. 6.25 전쟁 때 66명이 순교당한 최대의 순교 교회다. 갓난아이, 만삭임신부, 어린이,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미소 창고에 가두어 고문하면서, “기독교신앙을 버리면 살려 주겠다. 예수 믿으면 다 죽이겠다”. 결국 66명의 병촌성결교회 성도들이 잔혹스럽게 집단 학살을 당한 것이다. 그 66명의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최근에 기념관을 지었는데 매우 이색적인 건축양식이었다. 하루 일정을 잡았던 강경! 그러나 뜻밖에 방문할 곳이 많아서 이틀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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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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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미조직교회가 교육목사 청빙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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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목사는 부목사가 아니니 미조직교회도 청빙 가능-부목사는 당회 결의로 교육목사는 공동의회 결의로 청빙
합동 교단산하의 노회 중 어떤 노회는 지교회의 교육목사 청빙을 허락하는가하면 어떤 노회는 “미조직교회가 교육목사 청빙은 불가하다.”고 하므로 혼란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에 관하여 교회 정치의 변천과 법리를 정리함으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교회 헌법 정치의 변천 장로교 최초의 헌법인 1922년도 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4장(목사)에는 목사의 칭호가 없고 三. (목사의 직무)에 ① 지교회 목사 ② 신학교나 대학교 교사 ③ 선교사 ④ 종교 신문, 서적에 관한 직무를 위한 기관목사 등으로만 구분하여 목사의 직무와 목사의 칭호를 겸하여 규정하였다. 그 후 1930년도 판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4장에 三을 三조(목사의 직무)로 하고 ⑤ 종교 지도자 ⑥ 신학 졸업 후 임직조건 등 2항을 추가하였고 四조(목사 칭호)를 신설하여 ① 위임목사 ② 임시목사 ③ 동사목사 ④ 원로목사 ⑤ 공로목사 ⑥ 무임목사 ⑦ 전도목사 ⑧ 지방목사 ⑨ 선교사 등을 두고 교육목사는 없었는데 1966년도 판 헌법에 목사의 칭호를 변경하면서 교육목사를 추가하여 ① 위임목사 ② 임시목사 ③ 부목사 ④ 원로목사 ⑤ 무임목사 ⑥ 전도목사 ⑦ 교단기관목사 ⑧ 종군목사 ⑨ 교육목사 ⑩ 선교사 ⑪ 은퇴목사 등으로 현재 헌법에 이르고 있다. 2. 부목사와 교육목사의 구분 부목사는 정치 제4장 제3조 3항에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계속 시무”를 언급하는 것은 임시목사의 시무기간이 1년간(동 2항 참조)이므로 계속시무 허락을 받아야 하고, 교육목사는 시무기간 규정이 없으므로 전도목사, 기관목사 등과 같이 계속시무 청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목사인데 미조직교회에서는 보좌할 위임목사가 없으므로 청빙할 수가 없으나 교육목사는 미조직교회에도 교육해야할 교인들이 있으므로 마땅히 청빙할 수 있음이 법리이다. 그런데 교육목사는 동 제9(교육목사)항에 “노회의 허락을 받아 교육기관에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교수하는 목사이다.”라고 규정하여 노회의 허락을 받아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목사라고만 하였고, 어디에서 청빙하며 어디에서 가르친다는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하여 동 제3조 5항에서 선명하게 설명을 하고 있으니 “목사가 노회나 지교회나 교회에 관계 되는 교육기관에서 청빙을 받으면 교육하는 일로 시무할 수 있다.”라는 규정이다. 즉 교육목사는 ① 노회의 교육기관이나 ② 지교회에서나 ③ 교회에 관계 되는 교육기관 등에서 청빙 청원을 하고 청빙하는 교회와 청빙하는 교육기관에서 교육하는 일을 시무하는 목사라는 말인데 지교회에서 청빙한다함은 지교회의 공동의회의 결의로 당회장이 청빙한다(교회정치해설 p.146 참조)는 의미이고, 교육기관은 해 기관의 이사회의 결의로 기관장이 청빙하는 것이 법리이다. 여기에서 “교육기관에서 성경과 교리를 교수하는 목사이다”를 대학교 교수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 보이는데 여기 “교수하는 목사”에서 “교수하는”은 명사로서의 대학교 교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므로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교수하는) 목사”로 이해해야 한다. 3. 결론 교육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가 아니요 교회 또는 교회에 관계 되는 교육기관에서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목사인데 교회에서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조직교회나 미조직교회나 중단할 수 없는 중요하고 필수적인 교육 사항이므로 교육목사는 조직교회뿐만 아니라 미조직교회에서도 청빙하는 것이 당연한 법리이다. 즉 부목사는 미조직교회에 보좌할 위임목사가 없으므로 청빙할 수 없으나 교육목사는 조직교회에만 교육해야 할 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조직교회도 교육해야 할 교인이 있으므로 청빙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육목사를 청빙할 수 없는 지교회는 교육전도사로 대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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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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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주를 시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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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시작은 두려움이며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원시시대에 두려움 때문에 귀신을 숭배하게 되고, 갑자기 호랑이나 곰 때문에 죽을 뻔 했다면 두려움 속에서 호랑이와 곰의 형상을 만들어서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험에 처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영웅을 보면 그 영웅이 늘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신이라 생각하여 그 영웅의 동상을 만들어 숭배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도 돈과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욕심으로 귀신과 해와 달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만나게 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며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가 참 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진리이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증거하고 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마음으로 믿어져야 한다. 마음으로 믿어지기 위해서는 진리는 이해에 속한 것이기에 자유를 갖고 이해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가 주이신 것을 간절한 원함을 갖고 말씀을 묵상하며 찾고 찾으면 어느 날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 속의 주인이 주님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주인이 된다는 말은 내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나 돈 때문에 두려움이나 서운함, 미움, 적개심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주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주를 시인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주를 시인한다는 것은 주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행동으로 삶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결심은 다 한다. 그러나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경에서 보면 귀신도 예수가 구원자인 것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모습은 거짓과 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인 것을 시인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이해는 했으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거짓과 악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를 볼 때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대로 사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며, 선을 행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랑이며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진리가 겉으로 드러날 때는 사랑의 행동으로, 선함으로, 밝음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승진할 기회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자. 이 때 이 기회를 내가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고, 거짓과 악을 눈감아 주면서 돈을 받아야 하고, 나는 이익을 보지만 누군가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을 거절하는 것이 주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대면 주를 시인하지 않는 것, 즉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를 시인할 것이요.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를 부끄러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주를 시인하라는 말은 사랑과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먼 후일 죽어서 저 세상 갔을 때 처음 가는 영의 세계라 두려움과 막막함에 처해 있을 때 주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이제 안심하라. 내가 바로 네가 주로 믿고 사랑했던 예수다. 내가 바로 이곳의 왕이다.”라고 하시면서 나를 받아주시고 알아주시면 얼마나 안심이 되고 감격스러울까?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삶을 살면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서 사랑과 선을 선택하고 행하면서 주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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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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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염려, 나라, 족함(마태복음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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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재물관, 물질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이 땅에 쌓아두지 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마라. 공중의 새를 보라. 들판의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모든 부귀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한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믿음이 작은자들아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한다. 한날의 괴로움도 그날로 족하다.’(6장19~34말씀) 오늘 말씀 제목을 ‘염려, 나라, 족함’이라고 한 이유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한 것은 필수종목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공동묘지나 조용하지, 어느 집이든 근심 없고, 어떤 몸에 병균이 없고, 어떤 사업장에 고민거리가 없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불안한 것은 필수불가결한 당연한 현상이지만은 그러나 그렇다고 불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 불안거리, 염려거리가 바뀌는 겁니다. 매일 내 돈, 내 문제, 내 가정, 내 자식을 걱정하던 사람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천국을 대망하면서 시온의 대로를 걸어가게 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갈 때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뼈가 녹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세계가 엉망진창이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신앙이 천박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우리는 신앙생활을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가지치기를 해야 되며 시선을 처리를 다시 해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에 거짓된 것, 헛된 것, 부질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헛되고 허무한데 굴복해선 안 됩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라고 하시며 세월을 아끼고 술 취하지 말고 세상에 중독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5장17~18말씀) 모든 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선순위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우선순위를 찾아서 먼저 구할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후서12장 9절 말씀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병든 것도 감사, 아픈 것도 감사, 이 모든 강력한 감사가 삶의 환경이나 내면의 세계를 바꿔 놓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권자는 이렇게 달라야 합니다. 핵심가치를 붙들고 영적통찰력으로 우선순위를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 성경중심으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행해 나가는 나그네 인생이고 본향은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 시민권자로서 멤버십카드가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인배 같은 그런 신앙을 걷어치우시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기도하며 신앙을 다시금 업그레이드 시키십시오. 그래서 주님 마음에 쏙 들고 주님 눈에 확 띄는, 정곡을 찌르고 심금을 울리는 기도가 다이어트 되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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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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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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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황실의 찰스 왕세자. 그의 아버지 필립 공(公)은 아내와 아들의 그늘에 가려 존재조차 희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들 찰스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아들의 일생을 자신의 무릎 위에서 철저히 조종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찰스에 대한 첫 번째 교육 목표는 엄격한 장교 출신인 자신처럼 강인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94년 피플지(誌)는 필립 공을 빈정거리기 잘하는 엄격한 규율가라고 묘사한 일이 있다. 지적(知的)이었지만 예민하고 다른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례하게 들리는 농담을 툭툭 던지는 안 좋은 기교도 지녔다고 한다. 1957년 만 아홉 살이던 찰스는 고든스턴 공립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스파르타식을 고집한 군 출신 아버지는 귀족학교 이튼스쿨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섬세하고 수줍음 잘 타는 소년이었다. 필립은 학교생활에 어려워하는 아들 찰스를 겁쟁이라고 불렀고 마흔 여덟이 될 때까지 찰스의 아이디어에 경멸을 쏟아 부었다. 이런 조롱이 찰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찰스는 아버지를 항상 영웅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높은 기대대로 사는 것에 늘 바동거려야만 했던 것이다. 찰스는 생일잔치에도 나타나지 않는 아버지의 정신적 학대에 어린 시절 내내 복종해야 했다. 필립은 마음으로도 찰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버킹검 궁전에 있는 필립의 방에는 아들 찰스 대신 딸 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편애 속에 자랐다. 아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기보다 하인을 통해 전갈을 보내는 등 권위적인 방식으로 일관했다. 찰스는 천성적으로 마초맨(남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압력과 경멸을 받을 때 찰스는 친구들에게 “내 갈 길을 가고 싶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2세는 자식을 돌볼 시간이 없는 여왕이었고 금욕주의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키스를 하거나 꼭 껴안기보다는 의무를 강조했다. 어린 시절 찰스는 하루 동안 30분 정도밖에 어머니를 볼 수 없었고 유모의 손에 의해 길러져야 했다. 찰스는 전기에서 사랑스런 포옹과 키스를 갈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 여왕은 그렇지 못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심리학자, 아동학자, 교육학자들이 자녀양육에 관한 책을 썼다. 그 양은 지구를 덮고도 남을 분량이다. 하지만 그 책을 요약하면 딱 한 문장이다.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6:4) 성경이 말하는 ‘노엽게’의 의미는 ‘아이들을 괴롭게 말라. 화나게 하지 말라. 흥분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이 노여움이 사회악이 되고 범죄가 된다. 역기능 자녀가 출생하는 환경이 된다. 때문에 바른 부모교육은 이 작고 작은 노여움을 정복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가장 큰 자녀의 분노는 부부 불화 “어릴 때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싸웠다. 이유도 없이 서로는 서로의 감정들을 고함으로 표현했다. 등교할 때마다 골목길을 나올 때 이웃 어른들께 인사를 하며 나는 수치심으로 얼굴도 들지 못한 채 항상 도망치듯 빠져 나와야만 했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모습들은 이렇게 움츠려 들었고 지금도 어른들 앞에서라면 마치 죄인처럼 떳떳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다.” -한 젊은이의 일기 중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많은 일들 중에 가장 큰 노여움은 부부불화다. 자녀들은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볼 때, 이내 안정감을 잃는다. 삶의 의욕이 꺾인다.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심지어 자살충동도 느낀다. 때문에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학습 환경은 부모환경이라 부른다. 부모의 불화는 원초적인 심리 감정이라 불리는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는 순간, 이글거리는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마음에 불을 지른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반대로 부부의 화목한 모습은 자녀의 삶에 에너지가 된다. 매사에 자신감을 심는다. 의욕을 갖게 한다. 꿈에 부푼다. 긍정의 에너지는 나야말로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자존감으로 연결된다.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아빠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 아이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다.”자녀들에게 그 선물을 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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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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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네팔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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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우연히 네팔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향 9개를 발견합니다. 2년 전 tvN에서 방영되었던 ‘나인(nine)’이라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 때 배경으로 등장했던 마을이 포카라(Pokara)였습니다. 마을 뒤편으로 등장하는 ‘인간이 오르는 것을 신이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산’이라 불리는 ‘마차푸차레(Machapuchre)’의 압도적인 위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그 지역 일대를 지난 4월 25일, 진도 7.7의 강진이 덮쳤습니다. 최초에 보도되었던 수십 명의 사상자 수는 현재 사망 5,057명, 부상 10,915명으로 불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히말라야 산맥 자락에 웅크리고들 있는 오지(奧地)가 많기 때문에 전체적인 피해는 가늠할 길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시장조사기관인 IHS는 이번 지진으로 인한 복구비용이 50억 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인구 3,000만 명에 1인당 GDP 700달러의 나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중한 재해(災害)입니다. 이미 긴급구조단을 현지에 파견한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국제사회의 돕는 손길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번 네팔 지진도 천재(天災)에 인재(人災)가 겹쳤다고들 합니다. 지진 발생 불과 1주일 전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전세계 지질학자를 비롯한 과학자 50명이 모여 1934년에 이 나라를 강타했던 지진이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덮칠 가능성을 경고했다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번 지진을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기사도 떴습니다. 그런데 대비는커녕 이처럼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다니 믿을 수 없다는 논조입니다. “지진을 그냥 천재(天災)라고 말하고 하늘 탓만 할 수는 없다. 미 캘리포니아에서라면 주민 100만 명에 10~30명이 숨질 때 같은 지진으로 네팔에선 1,000명이 숨진다. 파키스탄, 인도, 이란, 중국이라면 10,000명이 숨지게 된다. 지진피해가 인재(人災)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 지질조사국 한 과학자의 논평입니다. T. S. 엘리어트의 말처럼 4월은 잔인한 달인가 봅니다(April is the cruellest month). 지난 28일에는 세월호 선장 등 승무원 15명에 대한 항소심 공판이 열렸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믿고 질서정연하게 대기하던 어린 학생 등 304명이 끔찍한 고통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재판장의 말에 유족뿐만 아니라 방청객 모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지만 1년이 지났어도 세월호는 인양되지 않고 여전히 차가운 바다 밑에 수장(水葬)되어 있습니다. 네팔 지진 사태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재난입니다. 그렇다면 작년 이맘 때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어떻습니까? 인구 5,000만 명에 1인당 GDP 28,738달러를 자랑하는 OECD 가입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이 사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네팔은 힌두교도가 전체 인구의 80%를 넘습니다. 힌두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에는 33,333개의 신들이 나오는데, 오늘날 힌두교의 신들 숫자는 3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klaiein meta klaionton)”고 말씀합니다(롬 12:15). 주한네팔인협회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네팔인의 수는 약 29,000명이며 이들 중 대부분이 근로자들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고향 소식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네팔로 돌아가는 분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천재지변에 어쩌면 인재까지 겹쳐진 재난 속에서 슬퍼하는 네팔 사람들을 위해 함께 울고 또한 기도하는 일은 그저 아름다운 미담이나 휴머니즘(humanism)의 발로(發露)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주어진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하물며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자녀를 마음으로 부둥켜안고 처절하게 눈물 흘리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들 가족들의 슬픔에다가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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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