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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오직 은혜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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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에게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락교회 목사가 되면서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영락교회가 6.25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락교회는 1945년 12월 2일에 창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베다니전도교회였으나, 영락교회로 개명했습니다. 지역이 영락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영락교회 하면 한경직 목사님이 떠오를 정도로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은 거의 한 몸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한 몸>이라 하지 않고, <거의 한 몸>이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락교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였습니다. 6.25가 발발한 날은 주일인데, 그날 주보를 보면 장년 출석이 4천 명을 넘었습니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 와서 수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에 전력을 다하셨습니다. 전국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군목 제도를 시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영락교회는 1,004군데의 군인 교회 중에서 건축비 전액 부담으로 300여 교회, 반액 부담으로 300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600여 교회 이상이 영락교회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육 선교에도 힘을 쓰셔서 1938년에 자진 폐교한 숭실대학교를 1954년에 영락교회에서 재건했고, 또 보성여중고를 재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광초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고등학교, 영락중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의료과학고등학교를 세웠습니다. 현재 영락교회는 총 8개의 학교를 운영 중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긍휼과 사랑 사역에도 힘쓰셔서 신의주에서부터 시작하신 고아를 위한 보린원을 비롯하여 중증장애인 시설인 애니아의 집, 모자원 등 현재 총 15개의 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락교회 목사로서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영락교회 성도들은 이것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들이 영락교회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이 완전히 한 몸이 아니라, <거의 한 몸>이라고 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거의>라고 한 이유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 사이에 거리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거리감은 성도들은 이상의 일들을 자랑스러워하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드러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겸손이었습니다.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영락교회 성도들은 한경직 목사님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지만, 한경직 목사님처럼 하지는 못합니다. 여기에 영락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제가 영락교회에 부임한 후에 성도들이 주문한 것은 <한경직 목사님처럼!>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요구였습니다. 하나는 한경직 목사님처럼 많은 사역을 하라는 것과 동시에 한경직 목사님처럼 겸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역은 드러내는 쪽입니다. 겸손은 숨기는 쪽입니다. 두 가지는 물과 기름 같습니다. 저는 무능해서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조용히 있는 것뿐입니다. 뭘 하겠다고 나대지 않는 것입니다. 조용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시편 131편 1절에서 감동받았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조용히 있으면 부수적 효과가 있는데, 그것은 겸손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려고 노력하는 게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성도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제게만 필요한 것일까요?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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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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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아쉽지만 마음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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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탈진을 하여 링거를 맞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부산 세계로교회를 섬기시는 손현보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이러다가 한국교회가 큰 일을 당할 것 같습니다. 10월 27일 종교개혁주일 오전 11시에 광화문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는 연합예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누워 있는 채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긴박한 상황인가요? 아직은 그 정도의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목사님이 함께하자고 하면 해야지요. 제가 주일날 예배를 포기하면서라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주일 오후에는 제가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일간지 기자들과 함께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자라고 배운 신학교, 교회와 역사관을 방문하기 위해 미국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국교회를 위한 염려와 걱정은 같았고 의견이 동일했습니다. 그 분도 단순하고 저도 단순하게 쉽게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사실 말이 그렇지 주일 낮 예배를 포기하고 광화문으로 모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주일 오전에 광화문에서 모인다는 것은 다른 집회와 괜한 혼선을 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런 복잡한 계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의를 한 것이죠. 저의 몸은 많이 지쳐서 계속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회 시간이 오전에서 오후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자단과 순례하는 일정을 조정하기 위하여 담당 목사에게 날짜를 조정해 보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각도로 노력해봤지만, 기자단의 출장 날짜와 선교사들의 출신 신학교 총장과 교수, 역사관 예약 등의 변경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펜젤러 선교사의 후손도 어렵게 시간을 마련했다고 해서, 이를 어찌할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손현보 목사님께서 저에게 공동대회장을 맡아 달라는 간절한 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일을 놓고 제 주변에 있는 동역자들과 의논을 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참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 이름만은 넣는게 좋지 않느냐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한 동역자들이 만류를 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 동기와 목표는 참 좋은 것이지만 일회성 집회로는 대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 기도회 후에도 있을 일을 감당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적지 않는 재정적 부담도 있을거구요. 더구나 참석 못하면서 이름을 올리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날짜가 안 맞아서 출국하시는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담임목사님을 대신해서 희망하는 성도들과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여당이나 야당에서도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법이 발의된 게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차분하게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저에게도 어떤 직책을 맡으면 재정적 부담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저는 잠들어도 10.27, 일어나도 10.27 생각뿐이었습니다. “집회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든지 간에 순수한 진의가 잘 전해져야 할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손현보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집회 시간이 오후로 변경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여를 못하게 되었지만요. 물론 한 번의 큰 기도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략적으로 반기독교의 흐름과 공격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장수는 앞서서 전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선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죠.
어쨌든 큰 기도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생각은 다 똑같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전략적으로 계속해서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도 정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집회나 기도회를 통해서도 한국교회를 갈라치기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회를 우려하고 너무 비판을 하는 분들도 자제해야 합니다. 칭찬은 못할망정 비판을 하는 것은 그 또한 한국교회를 갈라치기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쉬운 마음을 전하면서 기도회가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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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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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세대와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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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알파세대(alpha generation)”라는 표현을 쓰는 빈도가 늘어갑니다. 사실 그 동안 많이 썼던 “엠지세대(MZ)”라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15세부터 45세까지(1980년~2010년) 연령대를 망라하기 때문입니다. 10년 터울만 해도 세대차가 엄청난데 무려 30년 간격이 있지 않습니까? 1995년을 전후해서 2010년까지를 지세대(Gen-Z, 젠지)라 하고, 그 다음부터 현재까지 출생자를 알파세대라 부릅니다. 앞선 세대와도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알파세대의 특징은 바로 ‘인공지능(AI-generation)’입니다. 이들은 나면서부터 ‘지니’ 같은 인공지능 목소리에 익숙하고, 숙제를 챗·GPT로 능수능란하게 해냅니다. 스마트폰 하나를 들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며 활동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알파의 복음입니다. ‘알파 예수의 복음’입니다.
앞서 언급한 “지·세대(Z-generation)”는 새 천년 전후로 태어나 자란 세대로, 현재 10대 후반부터 20대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1996~2009). 이 시대를 지나며 다들 아이폰(2007.6.29), 페이스북(2004), 유튜브(2005), 트위터(2006), 인스타그램(2010)의 탄생을 지켜보았지만, 지·세대는 이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 세대와 다릅니다. 이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ABCD로 정의해 보았습니다. 먼저 에이(A)는 ‘무신론적’ 성향을 상징합니다(Atheistic). 비(B)는 ‘큰(Big), 총명한(Bright), 뛰어난(Brilliant)’를 가리킵니다. 씨(C)는 ‘크루(Crew)’의, 마지막 디(D)는 ‘디지털(Digital)’의 앞 글자에 해당합니다. 이들을 가리켜 새로운 인류라는 뜻의 이름을 부여하기도 합니다(포노·사피엔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신인류에게도 A·I(인공지능)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있는데, 바로 Am·I(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의 복음’입니다!
다음으로 “3040세대”를 생각합니다. 1980년에서 1995년생까지를 보통 “엠(M)세대”라 하는데, 새천년(밀레니움, Millenium)을 맞이한다 하여 ‘밀레니얼 세대’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엑스(X)세대”(X-generation)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엑스 다음 철자인 “와이(Y)세대”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령대를 고려하면 “3040세대”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들은 이미 사회의 주축입니다. 교회에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닌 숫자가 상당한데 그 가운데 많은 수가 교회를 이탈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소위 ‘가나안 성도’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대가 40대요, ‘플로팅 크리스챤’(부평초 신자, floating christian)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대가 30대입니다(코로나 이후 3명 중 1명이 교회를 떠났다고 함, 목회데이터연구소, 2023).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의 복음’입니다!
1980년대 인텔이 개인용 컴퓨터로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으면서 ‘80286’이란 번호를 붙였고, ‘286컴퓨터’라 불리기 시작하더니 ‘386’, ‘486’, ‘586’이 연이어 나왔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졌는데, 수강신청을 컴퓨터로 입력해야 해서 소동이 일었고, ‘채팅’이 등장했으며, 밤새 온라인게임을 하느라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주역들을 5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이라 해서 586세대라 부릅니다. 최근 2차 베이비붐세대(1964-1973) 은퇴가 시작되었지만 이들을 요즘 에이(A)세대, 뉴-시니어, 욜드(Young Old), 오팔(OPAL; Old People with Active Lives) 등 다양하게 부릅니다. 숫자도 비중도 막강하기 때문입니다(인구의 30%). 게다가 교회에서는 복음전파와 복음교육의 주력 세대입니다(핵심 일꾼의 30%). 이들은 민주화와 학생운동과 사회단체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집단입니다. ‘웨비(WAVY)’라고도 하는데, 재력을 갖추고(Wealthy) 활동적이면서(Active) 추구하던 가치를 단단하게 다지고(Value) 젊음을 놓치지 않으려는(Youth) 신인류라는 의미입니다. 충분히 역량이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희생과 헌신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올해 드디어 한국은 노령 인구 일천 만 시대를 맞았고, 65세 이상 비율이 19%를 넘어서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하기 일보 직전이며, 역사상 처음으로 70대 인구((631만 9천)가 20대 인구(619만 7천)를 추월했습니다. 바야흐로 ‘시니어 시대’입니다! 밝은 면만 존재하진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육아 피로에, 교회에서는 봉사 피로에 시달립니다. 섭섭함과 우울함이 찾아옵니다. 고립감과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끝이 아닙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할 일이 남았습니다. 헤겔은 유명한 <법철학강의>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는 말을 남겼는데, 우리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복음의 독수리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정채봉이 들려주는 동화 속 어른 독수리가 말합니다.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나이가 들수록 상처는 많아지고 깊어집니다. 그럴수록 더욱 절실한 것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구원의 복음입니다. 시니어는 시니어가 전도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날개를 활짝 펴고 벌써 날개를 접어버린 이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시니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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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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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믿음의 정상(베드로후서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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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은 산꼭대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다. 신앙생활에도 유치찬란한 수준이 있고 믿음의 정상이 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정상에서 그의 믿음을 검증받았다. 정상에 오른 사람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무한도전, 한계초월, 지극정성, 지사충성, 일사각오, 일편단심, 오매불망, 꿈에도 소원,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을 거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에 지치면 지고, 일에 미치면 이긴다는 말도 있다.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일상이 정상으로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
베드로후서 1장에는 신의 성품이 나오는데, 신의 한수가 있듯이 신이 내린 성품도 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변화무쌍하며 때로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의 성질도, 마음 밭을 잘 가꾸면 신의 성품을 닮아서 성품의 최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다. 무릇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성을 지키는 것보다도 어렵다.
성자는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야생마가 천방지축 날뛰다가 임자를 만나 연단이 되면 천리마, 준마가 된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개구쟁이가 철이 들면 다정다감한 호인이 될 수 있다. 모나고 까칠한 성질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섬세하고 원만하고 따뜻한 카리스마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말이 되어 툭 튀어 나오고, 말이 씨가 되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품이 되고, 성품이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 사람의 인품, 인상, 건강, 관계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것이 성질이다. 이혼도 성격차이로 하는 것이다. 신의 성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있다. 똥물에도 파도가 있다. 사람마다 성품의 결이 다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① 믿음에 힘을 써야 된다.
② 믿음의 덕을 힘써야 된다.
③ 덕에 지식을 힘써야 된다.
④ 지식에 절제를 힘써야 된다.
⑤ 절제에 인내를 힘써야 된다.
⑥ 인내에 경건을 힘써야 된다.
⑦ 경건에 형제 우애를 힘써야 된다.
⑧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된다.
이런 여덟 단계를 올라서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벧후1:8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은 흡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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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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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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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생각나는 것이 ‘따뜻함’이다. 이 따뜻함은 남녀노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이 따뜻함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 노인, 한부모가정, 외국인, 노숙인 등등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또 하나, 미혼인 사람들도 약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고,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이들은 중심에서부터 밀려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애인 당사자이면서 미혼인 나도 이들과 같다.
이들에게는 어떤 따뜻함이 필요할까?
‘따뜻함’이라고 했을 때에 대부분 ‘물질의 따뜻함’을 떠올렸을 것이다. 비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돈)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물질은 필요하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12월이 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고 그것을 사랑의 온도로 표현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따뜻하게 만든다.
교회는 어떤가? 교회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12월 25일 성탄예배를 드릴 때에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모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교회 주변 또는 교회 내에서 찾아서 지원하거나, 단체의 기부를 하는 형식으로 돕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형식적이든 비형식적이든,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시선의 따뜻함’에 대해서는 어떤가? ‘따뜻함’이라고 했을 때에 단 한 번이라도 ‘시선의 따뜻함’을 떠올려 본 기억이 있는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선의 따뜻함이 중요하다. 아니 필요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따뜻한 시선을 기다리고 있고 필요로 하고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약자들이나 미혼인들에게는 사회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교회 중심에서도 벗어나 있기에 더더욱 필요하다.
이들이 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을 전통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서의 시선, 전통적으로 관습되어 내려온 시선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하나님의 시선, 사회적 약자들과 동행하셨던 예수님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들을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그들(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대접 받고 유명한 이들만 따뜻하게 품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고 연약한 자일수록 교회는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한 우리의, 그리고 교회의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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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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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시종여일하고 신시경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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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서 연합사역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말로 감당할 수 없는 복이며 은혜다. 괜찮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기준은 처음 함께 했을 때의 마음이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그 처음의 마음은 당연히 공동체의 가치와 목적에 합하고, 순리적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우리 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깊게 살펴보면 시작하는 일의 내용과 자세가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악하고 나쁜 일도 시작만 하면 이미 반은 진행되었기에, 시작하는 일이 선하고 아름다워야 함은 명약관화하다. 또 시작이 반이라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시작과 함께 이미 반을 이루었기에, 그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위해서도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신시경종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당나라 충신 위징이 당 태종에게 올린 글에 나온다. 그 의미는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나태하고 게을러질까하는 두려움이 찾아올 때는 신중하게 일을 시작하고 일의 끝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라고 진언하였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한명회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사위였던 성종에게 유언처럼 당부한 말이 바로 신시경종이다. 군주가 조금만 마음을 게을리 하면 간신배들의 아첨에 넘어가기 때문에 항상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간언했다. 대국을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신시경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충신이 자신의 주군에게 목숨과 마음을 담은 글을 올린 것이다.
한명회가 남긴 말 중에 신시경종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말은 “시근종태는 인지상정이지만 종신여시 하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지만 끝날 때에는 태만해 진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할지라도 군자는 처음과 끝이 동일하게 근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신여시와 비슷한 말은 시종여일이다. 시작과 마침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한명회가 노년에 유배를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후회와 회한 그리고 성종이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언한 것이다.
처음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미를 지닌 초지일관도 있다. 이것 또한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일이관지’ 즉 처음의 뜻을 끝까지 꿰뚫는다와 모든 것은 하나로 꿴다와 같은데, 처음의 마음이 마침의 시간까지 뜻을 잃지 아니하고,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시종여일, 신시경종, 종신여시, 초지일관 등은 거의 다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곧 성공한 삶이며 승리한 인생이다. 역사 이래로 충신들은 한결같이 자신들도, 그리고 자신의 주군도 그렇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초심을 지켜 성공한 사람은 더 강력하게, 초심을 잃어버려 실패한 사람은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솔하고 담대하게 진언한다. 나도 시종여일 신시경종 하는 사람들이 참 좋다. 참 괜찮은 사람들이다. 내 곁에 이들이 있기를,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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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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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부열 선교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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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내한하여 강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감부열 선교사는 1940년 6월 세 번째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다시 내한하지 못했다. 이때 감부열은 뉴저지의 플레인필드제일장로교회와 엘리자벳제3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게 되자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며 미국에서 목회를 정리하고 1947년 4월 4일 다시 내한했다. 해방된 한국교회의 재건이 시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속히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한국어도 능통했고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는 다시 북한의 강계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대구지부로 배속되었다.
대구 정착과 교회 재건으로 분주하게 지냈는데 1950년 6월에는 전쟁이 발발했다. 대구로 피난해 온 피난민들을 돕고 교인들을 보살폈다. 그의 대구 주택은 피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피난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 위험하다고 본 그는 안의와 선교사와 같이 안동으로 가서 안동선교부의 기물과 주요 문서를 대구로 옮겼다. 안동이 점령당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에서 수복감사예배를 드릴 때 그는 미군 군목 자격으로 킨슬러와 힐, 아담스, 보켈, 마펫 등과 같이 평양으로 가서 예배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로 돌아왔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이 후퇴하는 긴박한 현실에서도 한국에서의 군목제도 도입을 위해 노력했다. 미국 군목병과의 교범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군목제도를 도입하는 일에도 기여하였다고 한다.
전쟁 중에서도 한국교회는 신학교 문제로 혼란하였고, 총회가 두 학교, 곧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제3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1951년 9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설립할 때 대구의 감부열을 초대 교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인돈(William Linton), 권세열(Francis Kinsler), 조하파(Joseph Hopper) 선교사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명신홍 한경직 등은 초대 교수로 추대되었다. 이 학교가 오늘 총신대학교로 발전했다.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일할 때 그 가까이에서 일한 한국인이 서정환(徐廷煥, 1906-1952) 전도사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고산진(高山鎭) 출신인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고,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구로 와 그와 함께 일했다.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 부부를 부모처럼 여기고 함께 일하기도 했다.
감부열 선교사는 1952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 주 젱킨스타운의 비버대학(Beaver college)과 일리노이주 휘튼의 휘튼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얻고 1953년 대구로 돌아왔다. 1954년 4월에는 대구에 계명기독대학이 설립되는데, 초대학장으로 추대되었다. 처음 120명으로 출발했으나 1958년 3월에는 첫 졸업생 49명을 배출했다. 도서를 확보하고 도서관을 건축하고 또 음악당을 건축하는 등 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1958년 7월에는 학장직을 안두화 선교사에게 넘겨주고 8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0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한국선교 경험을 담은 The Christ of the Korean Heart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1958년 김윤국에 의해 ‘한인 중심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었다. 길지 않는 145쪽에 지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전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5-6명의 선교사 외에도 고난과 시련 가운데 믿음을 지켰던 한국인 17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김익두, 서정환, 손양원, 안의숙, 이대영, 이승만, 이영식, 임한성, 주기철, 한경직, 한병혁 등이다. 그가 남긴 또 한 가지 저서는 강계에서 함께 사역한 바 있는 노혜리, 곧 로즈(H. A. Rhhodes)와 1935년 이후의 북장로교의 한국선교사를 정리한 500여 쪽에 달하는 역사책(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35-1959)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는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그가 북한에 있을 때 사냥도 즐겼는데 동료들과 곰사냥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어려움 중에서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고, 곰으로부터 큰 화를 당한 일도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나는 살겠으나 곰은 살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위기를 벗어난 일도 있다고 한다. 그가 대구에서 일할 때 정일영 목사가 그를 힘들게 하고 괴
롭혔다고 한다. 정일영(鄭一永, 1901-?) 목사는 평양신학교 31회 졸업생(1936)으로 대구 대봉동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부열 선교사는 참고 지내다가 한 말이, “정 목사, 예수 사면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1972년 1월에는 부인 안혜리(헬렌) 여사가 사망했다. 미국펜실베니아주 빌라 신위드의 웨스트민스터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에 감부열은 루시 링컨(Lucy E. Lincoln, 1905-?) 여사와 재혼했다. 루시 여사는 남편과 사별하고 10년째 혼자 지내던 여성이었다. 5년을 같이 살고 1977년 1월 감부열 선교사는 86세로 사망하여 첫 부인 헬렌 옆에 안장되었다. 감부열은 헬렌과 사이에 1남(Archibold) 3녀(Helen, Frances, Ann)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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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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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그림자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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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에 교회에서 연로하신 담임 전도사님과 장로님과 예배당 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장로님이 말없이 내 몸을 옆으로 밀어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내고 전도사님이 사택으로 들어가신 후 장로님이 제 손을 잡고 조용히 건네주시는 말씀을 하셨다. “서 선생,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돼. 따라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내가 전도사님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것을 보신 장로님이 일깨워 주신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른 공경에 대한 마음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그림자를 따르는 것은 좋지만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되는 교훈은 목회 사역에서는 물론 내 실존의 의미와 삶에도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오래전 프랑스 작가 ‘아델베르트 폰 사미소’(Chamisso Adelbert von)의 ‘피터 술래밀의 놀라운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최문규 옮김;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었다. 슐레밀은 가난한 청년으로서 하루는 어두컴컴한 부둣가를 거닐다가 이상한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무슨 물건이든지 다 끄집어낼 수 있는 신비한 주머니를 슐레밀에게 내밀면서 슐레밀의 그림자와 바꾸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가난하게 생활하던 슐레밀은 별생각도 없이 자신의 그림자를 그 신비한 주머니와 바꾸게 된다. 순간 그 사나이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그 주머니를 건네주고 슐레밀의 그림자를 아주 익숙한 솜씨로 돌돌 말아 자루에 넣고 사라져 버렸다. 그 사나이는 악마였다.
그림자를 주머니와 바꾼 슐레밀은 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의 의혹을 받게 되고 놀림을 당하고 곤욕을 치르게 되면서 점점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자기 방에 들어앉아 혼자가 된다. 밤에는 사십 자루의 초를 방 전체에 켜놓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 불안하고 초조함으로 밤을 지새우게 된다. 사랑하던 여인과도 그림자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고 실연의 쓰라림을 경험해야 했다. 주머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낼지라도 이미 그 주머니는 삶의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었다.
슐레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으려 하지만 악마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이번에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슐레밀의 영혼을 요구한다.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와 바꾼 신비한 주머니를 던져버리고 광산으로 들어가 고된 일을 하면서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가 결국 말년에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친구 사밋소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죽는다.
“친구, 사람들 틈에서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사랑해야 하네.”
그림자란 직접 접촉할 수 없지만, 인간 본연의 소유물임을 교훈한다. 있을 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을 하찮게 여기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은 국가, 가족일 수 있고 신앙이며 양심이며 명분일 수도 있다. 비록 그림자는 팔았지만 자신의 근본인 영혼은 팔지않고 자유로운 삶을 택했던 주인공을 통해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슐레밀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당장 눈앞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그림자를 팔아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어쩌면 에서에게 있어서 장자라는 명분쯤은 지금 당장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고 그래서 눈앞의 팥죽 한 그릇이 더욱 소중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렸다.
눈앞의 팥죽보다는 명분과 가치를 존중했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겨 팥죽 한 그릇을 기꺼이 에서에게 건네 줄 수 있었으며 그것은 야곱의 일생을 결정하는 축복의 계기가 되었다.
삼손이 ‘나실인’의 명분을 들릴라의 무릎보다 간과하였고, 발람이 모압왕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삯’을 예언자의 명분보다 귀히 여겼고, 고라의 권력욕이 역할의 명분을 패역으로 몰락시켰고, 가룟 유다는 지고한 예수 제자의 명분을 은 30과 바꾸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준엄하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얼마나 소름 돋는 말씀인가. 그림자의 소중한 이치를 모르는 열매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 같은 삶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교훈이다.
여의도 1번지의 선량(選良)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림자의 교훈을 생각한다. 국회의원이라는 존귀한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과 당리적인 이해타산에 팔아버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지고한 정치철학을 짓밟고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국민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오늘의 모습이다.
어디 그뿐이랴. 은퇴 이후 한주도 쉼 없이 전국 방방곡곡 세계 여러 나라 초청을 받고 말씀 사역을 하는 동안 보이고 들리고 경험하는 일상에서 유다서에 기록된 경고메시지를 간과하고 명분보다는 실리(實利)에 낭패스러운 삶을 연주하는 지도자들의 행태는 주님의 아픔이기 전에 공동체의 슬픔이 되기도 한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사명이며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다. 그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에 더럽히고 그 명분을 이해타산에 팔아버리면서 주님의 교회를 카오스 현상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이 유다서에 경고한 주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나의 열매가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비록 그림자일지라도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장로님의 가르침이 새삼 생각난다. 아프고 벅찬 삶의 여정에서도 ‘목사’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가히 몸부림하면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그를 실증하는 삶을 엮어내는 삶을 살아가면서 오늘도 그림자의 교훈을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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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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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그들이 모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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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께서 위기에 몰리시면 그 엄청난 능력으로 적들을 이기고 나오실 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모진 수욕과 고통을 참으셨고, 가야바 법정에서 있었던 산헤드린공회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정죄를 받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그 과정을 본 가룟 유다는 절망했습니다. 예상을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면서 자신이 무죄한 피를 범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유다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그 은을 성도에 던져 넣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인 반응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던진 은 삼십을 핏값이라 부정하게 생각하여 성전고에 두는 게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에서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성전이 거룩한 것은 성전 건물이나, 드나드는 사람이나,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이 거룩하거나, 드려지는 예물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전이 성전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깨끗한 예물만 성전고에 두기 때문에, 다시 말해 거룩한 자신들이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기는커녕 그들이야말로 가장 악한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찾아온 유다를 외면하면서 책임지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물론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큰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판을 깐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던 차에 유다가 어리석게 걸려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린 자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유다의 은 삼십을 핏값이라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보다 더 악한 자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 착각은 결국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도 나그네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들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들은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자신들은 죄인도, 나그네도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나그네이지만, 자신들은 예루살렘의 주인으로서, 언제까지라도 부귀영화를 누릴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무서운 착각입니다. 그들 역시 나그네입니다.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떠날 자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에 머무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당시 유대 사회, 특히 예루살렘에서 기득권층이요,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오늘로 비유한다면 기성 교회의 지도자들에 해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칫 우리도 이들처럼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죄인이지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나그네지만, 자신은 나그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는 추하지만, 자신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역시 나그네입니다. 우리 역시 무수한 상처를 내고, 마음의 피를 흘리게 하면서 삽니다. 예수님 앞에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찾을 때 시작됩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나그네요, 피 흘리는 자임을 알 때, 예수님의 복음이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한국교회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처럼 굳어졌습니다. 상대를 향한 유다라고 비방합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볼 때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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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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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 봉준호와 비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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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스웨덴 아카데미는 한국의 한강 작가를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비할 바 없는 영예겠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성으로서도 최초요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 기록을 갈아치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모습에서 무척 닮아 있습니다.
첫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진리를 재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자로서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명장 마틴 스콜세지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에게서 배웠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대단한 환호가 쏟아졌고 평단의 찬사가 이어졌지만 정작 스콜세지 감독은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다지요? 대신 로랑 티라르가 쓴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에는 “영화의 관점이 명확하고 개인적일수록 그 영화의 예술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는 스콜세지의 말이 실렸다고는 합니다(조준형, 연합뉴스, 2020. 2. 11).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은 한국의 작은 일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한국 고유의 풍자와 해학을 가미했는데도 세계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한강이 다루는 글들도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많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다수인데도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개인적이지만 예술성이 높을 수 있고, 한국적이지만 보편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던지는 시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막과 번역의 한계를 유월(踰越)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역시 봉준호가 남긴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1인치 자막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미국인)은 훨씬 더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2020. 1. 5,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국 영화를 선호하면서 외국 영화를 보려면 감수해야 하는 자막을 그는 “1인치 장벽”이라 불렀는데, 봉 감독이 이룩한 작지만 위대한 성취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장벽의 일부를 허무는 데 일조했다는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번역 타령을 해댔습니까? 유독 탁월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민족의 문학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 하나를 받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을 번역 문제로 치부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 이상 번역도 또 하나의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하게 증명되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내용이 얼마나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 봉준호와 한강은 바로 이러한 면이 문학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일종의 도전(challenge)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면서 각자의 반응(response)을 촉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셋째, 가부장제(paternalism)의 혁신적 파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뉴욕타임스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지 하루만에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의 최고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기념됐지만, 한강 작가와 다른 여성 작가들이 대표하는 것은 여전히 뿌리 깊게 가부장적이고 종종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는 논평을 내놓았습니다. 여기서는 남성중심주의나 권위주의를 가리키지만,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더 확장 적용이 가능합니다. 한강과 봉준호는 이전에 소위 ‘블랙리스트’에 나란히 이름이 올랐습니다. 2016년 당시 특검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 백서”를 통해 그런 사실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을 마치 부모처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가부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단지 픽션일 뿐인데, 여전히 소재를 문제 삼고 방향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 일상에도 그런 잔재들이 많습니다. ‘한 발자국 가까이’나 ‘휴지는 휴지통에’라는 문구들을 생각해 보세요. 전 국민이 모두 이런 지시를 하나하나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노벨상위원회가 어째서 고은이나 황석영이 아니라 한강에게 상을 안겨주었는지를 우리 모두 다 같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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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