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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이제 가라(출애굽기3:9~12)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사람을 쓰실 때는 반드시 메시지, 명령(order),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말씀은 모세에게 ‘이제는 가라’는 명령(order)을 주십니다. 이제 가라는 말씀이 모세에게는 80년 만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모세를 모세답게 만드는데 80년이 걸린 것입니다. 이제는 때가 찼으니 애굽 땅으로 가 바로에게서 내 백성을 데리고 나와 가나안땅으로 가라는 액션(action.행동)을 명한 것입니다.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전환점이 ‘이제는 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감독하시면서 명령(order)이 떨어졌고 행동(action)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 한 사람에게 계속 집중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보게 됩니다. 시대마다 쓰실 때 닮은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창세기12장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시며 가야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떠나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디메오를 부르실 때에도 마가복음10장에서 자기를 지탱해온 유일한 재산목록1호인 겉옷을 벗어버리고 난 후에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그 들판(현장)에서 지극정성으로 양을 돌보았고 들판에서 다져진 전투적 근성이 전쟁터에서 승군 다윗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칠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명령(order)을 주시고 그 사람의 소박한 일터에서 큰 사역을 부탁하시고 지도자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주실 때 보험도 같이 들어 주십니다. 모세에게 이제가라는 명령을 주신 후에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있으리라’(출3:12)고 하십니다. 모세가 죽고 난 후, 여호수아를 부르실 때도 같았습니다. 여호수아에게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1:9)고 하십니다. 소명이 사명이고, 사명이 수명이며, 부르심과 부담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보증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주와 함께 하는 것이 내 보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라’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도전이 있습니다. 그 시절 최강의 민족이 포진해 있는 가나안땅에 가라고 하십니다. 현실의 한복판으로 쑥 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6:1)고 하시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마5:13)고 하십니다. 이제는 가십시오. 행동(action)으로 옮길 때입니다. 부딪히십시오. 이것이 오늘말씀의 핵심입니다. 모세가 보디가드나 군인이나 무기가 있어서 나간 것이 아닙니다. 마법의 지팡이도 아닙니다. 그저 막대기 하나 들고 나갔습니다.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최고 리더십의 시작은 하나님의 명령(order)에 순종한 것에서 부터였습니다.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 붙들고 어둠을 떨쳐버리고 일어나서 빛을 발하여 보석처럼 영롱하게 현실의 한복판으로 나가 당당한 하나님 사람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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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성경인물탐구]감옥 속에서 꿈을 해석한 요셉(4)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갇힌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는데, 이는 요셉이 바로의 총리대신이 될 준비 단계였습니다. 그 곳에서 요셉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여 줌으로써 옥에서 나갈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전옥은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고 그에게 맡긴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의 결과였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이 종살이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의 범사를 형통케 하신 것처럼 옥살이 하는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사 모든 일에 형통케 하셨던 것입니다. 전옥이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는 것은 요셉에 대하여 조그마한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신뢰하였음을 나타냅니다. 옥에 갇힌 자에게 다른 죄수를 맡기는 것은 탈옥이라는 불상사에 대한 위험 부담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곧 전옥은 자신의 생명을 요셉에게 맡긴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요셉은 그 정도까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신뢰는 인간의 마음으로 갖기 어려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전옥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어 지켜 보호하시며 그 길을 인도하셔서 형통케 하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 나이다'(시 23:3-4). 요셉이 갇혀 있던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는데, 요셉이 갇혀 있을 때에 바로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시위 대장은 요셉에게 그들을 위하여 수종을 들도록 시켰고 요셉이 그들을 수일 동안 섬겼습니다. 하루는 그들 둘 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의 뜻을 알 수가 없어 근심에 싸였습니다. 그때에 요셉은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꿈을 고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먼저 요셉에게 꿈을 말하였고 그 다음에는 술 맡은 관원 장이 꿈을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꿈에 대한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사흘 안에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되어 바로 앞에서 술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또 떡 맡은 관원 장에 대한 요셉의 해석은 사흘 안에 바로가 그의 머리를 끊고 그를 나무에 달 것이요, 새들이 그의 고기를 뜯어먹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해석은 삼 일 후에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이 이와 같이 어려운 꿈 해석을 정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지혜와 총명을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 장 그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자신을 옥에서 구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자신이 아무런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었기에 요셉은 자신의 억울함을 술 맡은 관원 장을 통하여 바로에게 호소하려 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예언대로 술 맡은 관원 장은 삼 일 후에 옥에서 나가 복직되어 바로 앞에서 술 따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바로에게 요셉을 위하여 고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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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가정칼럼]유머에 At & T
    유머에 At&T 이론이 있습니다. A란 appropriate 즉, ‘상황, 분위기에 알맞게’다. T는 timely, ‘시간을 맞추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T는 tasteful, ‘관계, 취향을 고려하여’가 됩니다. 초나라의 재상 손숙오는 자신이 죽으면 아들이 가난하게 살 것을 알았다. 부잣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오지만, 부자가 죽으면 상가가 썰렁한 법이다. 그는 자신의 사후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 우맹을 찾아가라고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과연 그대로 되었다. 손숙오의 아들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우맹을 찾아간다. 우맹은 자초지종을 듣고 그에게 자신의 곁에서 멀리 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일 년간 손숙오의 의관을 걸치고 행동과 말투도 흉내 내어, 왕이 우맹을 보고 손숙오와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손 숙오를 그리워한 왕은 우맹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그때 우맹은 아내와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다시 왕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제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가 재상을 하지 마십시오. 초나라의 재상은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손숙오 같은 분은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 충성을 다하고 청렴하게 초나라를 다스려 초나라 왕을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손숙오가 죽자 그의 아들은 송곳조차 세울 만한 땅도 없고 가난하여 땔나무를 져서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손숙오처럼 될 바에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지어 불렀다. 노래를 다 듣고 난 왕은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이후 10대가 잘살 만큼의 재산을 내려주었다. 사마천은 이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진실로 말해야 할 시기를 알았다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초나라의 재상 숙오와 우맹의 이야기를 시인 원재훈은 이렇게 분석해 냈습니다. “우맹은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왕에게 한마디를 하기 위해 궁리하고 행동했다. 즉 일 년 동안 손숙오의 흉내를 내어 왕이 자신을 볼 때 손숙오 생각이 나게 만들었다. 사람은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가 죽고 난 후에 얼마나 그를 기억할 것인가? 국정에 바쁜 왕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맹은 일 년을 기다려 왕에게 다가갔다. 이 절묘한 타임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풍자에 뛰어나 우맹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즉 자신 아내의 입을 빌려 직언을 피하고 풍자를 하였으며, 더불어 시를 지어 불렀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지 눈에 선하다.”완벽한 <At & T>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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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시사칼럼]신학기를 맞이하며
    신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만남을 생각하며 설레던 신학기는 옛말이 된지 오래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동을 둔 어느 예비 학부모 얘기인즉슨, 극성스러운 엄마들은 영어, 한자, 피아노, 미술, 수영의 취학 전 5종 세트를 끝내고 입학시킨다는 겁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학생이 겨우 내내 학원에 다니며 중학교 수학 전 과정을 배우느라 씨름하는 모습도 직접 보았습니다. 하기야 기상천외한 ‘선행학습금지법’이 또 어떤 나라에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얼마 전 끝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와 ‘사랑에 대한 모든 것(The theory of everything)’의 관계가 흥미롭습니다. 웜홀(wormhole)과 블랙홀(blackhole)과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스텔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킵 손(Kip Thorne, 75) 명예교수가 과학 자문을 맡았는데, 그는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의 실제 주인공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74) 박사에 버금가는 이론물리학자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각색상을 수상한 시나리오 작가 그레이엄 무어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stay weird, stay different)으로 더 화제가 되었던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이라는 영화는 2차 대전의 숨은 영웅이자 천재적인 괴짜 과학자였던 알란 튜링(Alan Turing, 1912-1954)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운 교육 열기나 또 실제 학생들의 학업 수준을 고려하면 문자 그대로 한 편의 영화 주인공 같은 이런 인물들이 한국에서도 많이 배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근 하버드 이공계 학부를 다니는 학생들이 한국 학교를 방문해서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푸는 수준의 수학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쩔쩔 매는 동영상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노벨상쯤은 우습게 아는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는 전혀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여기에 한국 교육의 아이러니와 미스테리가 존재합니다. ‘인구론’이란 신종어가 있습니다. ‘인문계 구직자의 90%가 논다’를 줄인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취업에 그리 유리하지 않은 학과들은 하나 둘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 해 7월 전국 초중고교생 18만 명을 대상으로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실시한 2014 학교진로교육 실태 조사에서는 중고교생 10명 가운데 3명이 장래 희망하는 직업이 없다고 답했으며 그나마 응답한 학생 중 절대 다수가 교사나 공무원을 1순위로 꼽았습니다.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과학고·영재고 진학 현황’을 보면 조사 대상 19개교 졸업생 전체의 17%가 의대로 진학했는데, 결국 이 수치는 최상위층 학생들이 의대를 선택하는 현실을 방증합니다. 교사나 의사는 훌륭한 직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적성이나 비전이 아니라 안정성과 수익성만이 학생과 부모와 사회의 일률적인 잣대가 되어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어디서부터인가 잘못 되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몇 개의 학원을 전전하며 밤 10시, 11시가 되어서야 귀가해서 또 과제하고 공부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드는 현실은 인권유린수준입니다. 마땅히 창의적이어야 할 글쓰기까지 기계처럼 주입하고 제작하는 현실 속에서 창조적 파괴와 혁신적 사고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교육에 관한 한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도 좋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대다수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취학과 진학을 앞둔 자녀를 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시여, 더 이상 돈과 물질과 세속적 가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지배하도록 좌시하고 동조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창조적 마인드와 꿈을 발견하도록 길을 열어줍시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자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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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성서연구]바나바를 일찍 등장시키시는 이유(사도행전 4장 36-37절)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내용 외에도 성경의 편제, 길이, 구성, 전개방식 등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섬세한 의도가 잘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사도행전을 어떤 순서로 전개하고자 하시는지 그 개략적 의도를 미리 밝히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해 성령께서 일하신 것을 기록한 책인데, 그 핵심은 복음의 확장입니다. 그런데 1장 8절은 그 복음의 지리적 확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예루살렘에서, 그 다음엔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에까지 복음이 확장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도행전은 철저히 이 순서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이렇듯 치밀하게 사도행전을 전개하신 하나님께서는 4장 끄트머리인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라는 한 인물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무대에 머문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그의 이름, 고향, 출신, 그리고 그가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다는 것만 언급한 채, 바나바를 다시 무대 뒤로 들여보내셨습니다. 그 후 바나바는 5장, 6장, 7장, 8장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9장 27절에 가서야 비로소 바나바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5-8장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을 바나바라면, 9장에 와서 그의 이름, 고향, 출신, 밭을 판 이야기 등을 언급해도 충분할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그를 4장 끝에서 미리 무대 위에 불러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땅 끝 선교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땅 끝 선교를 위해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처음 한 일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을 성도들에게 소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 사울과 함께 안디옥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 안디옥교회가 이방 땅으로 가는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그 선교사란 다름 아닌 바나바 본인과 사울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도운 것도,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한 것도, 그 안디옥교회가 이들을 파송한 것도, 파송 받은 사람들이 바나바와 사울이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땅 끝 선교의 치밀한 섭리였습니다. 1장에서 12장까지 읽으면서 독자들은 <언제 땅 끝 선교가 이루어질 것인가>하는 의문점을 가질 법도 합니다.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4장 끝에서 바나바를 등장시킴으로써 <난 이미 땅 끝 선교의 주역이 될 사람을 준비했다. 여기 그가 있으니 보라! 난 지금도 내 계획에 따라 일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1장 8절에서 언급하신 복음의 지리적 확장의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모든 일을 추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교회들이 위축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일을 계속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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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서임중 칼럼]왜 네 탓인가?
    요즈음 여의도 1번지 이야기를 듣노라면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고 도대체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 그것밖에 안 되며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국태민안을 기대하기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2004년으로 기억한다. 한나라당이 만든 연극 ‘환생경제’에서 비록 연극일지라도 특정 인물을 극화하여 구사된 언어는 듣기 민망하기 그지없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저것이 선량(選良)들의 수준인가?” 싶어 TV 채널을 돌렸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야당 대표선거가 끝나자 말자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곧바로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모든 것이 그들의 탓인 양 연관된 대통령부터 사과해야 한다는 엇박자 언행이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최고위원으로 선임되자 말자 독설부터 쏟아낸 정모 의원의 말을 듣는 국민들의 마음이 불편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야 박수를 칠지 모르지만 같은 당 소속의원들조차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어 간다.”고 탄식을 하는 소리를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된다. 어디 그것이 야당 지도자들만 그런가? 여당 지도자들의 작금의 언행 보도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하나같이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진정한 의회민주주의가 죽어버린 슬픔이 나 혼자만의 아픔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슬프고 아픈 것은 왜 우리는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목이 쇠도록 외치던 지도자들로 인하여 우리들은 고통받아야 하는가이다.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고, 사회가 시궁창 냄새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仁’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仁’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그건 정치권의 이야기라 접고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가? 가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다. 그래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 가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 해오고 있다. 많은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σ)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본보기가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위반을 하기도 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한 운전을 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는 것이다.언젠가 교회 뒷골목에서 접촉 사고가 발생한 사건을 본 일이 있었는데 사고 차량을 세워두고 양측 운전자가 욕설을 하면서 상대방 잘못을 강조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차량에 모두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 하나는 “내 탓이오”와 하나는 “익수스”물고기 스티커였다. 왠지 나 자신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르고 수치스러운 자괴지심에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전국을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면서 가슴이 먹먹하고 고뇌스러운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오늘 교회의 가장 힘든 부분은 “네 탓”을 노래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교인들 마음이 황량한 사막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네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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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함께 생각해 봅시다]흐뭇한 얘기 (2)
    선행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해야 하고 은혜 입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잊지 말아야1880년에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젊은 의학도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책을 갖고 이집 저집 방문하면서 팔고 있었다. 하루는 책은 팔리지 않고 허기는 지고 목이 갈해서 한 집에 들어가니 소녀가 “우리집에는 어머니뿐이고 돈이 없어 책을 살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의학도가 “책은 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냉수 한 컵만 줄 수 있겠습니까?” 소녀가 물 대신 시원한 우유 한 컵을 줬다. 의학도가 목이 얼마나 갈했던지 우유 한 컵을 단숨에 마시고 “한 컵 더 청해도 되겠는지요?” 그랬다. 소녀가 기꺼이 시원한 우유 한 컵을 더 줬다. 의학도가 두 컵을 마신 후 물이 아니고 우유이기 때문에 값을 지불하려고 하니 소녀가 손사래를 치면서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손님에게는 항상 친절히 대하기만 하고 절대로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로부터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의학도가 큰 병원 외과과장이 되었다. 하루는 회진하면서 한 병실에 들어가서 한 환자를 보니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래 전에 무더운 여름에 물대신 시원한 우유를 주던 그 고마운 소녀가 아닌가. 의사는 그를 알았는데 환자는 의사가 그때 그 의학도인 것을 알지 못했다. 그 환자는 매우 위중했다. 의사의 지시로 환자를 당장 특별실로 옮기고 24시간 계속 특별간호를 받게 하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도록 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환자가 며칠 후 기적적으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하루는 담당의사가 “이젠 내일 퇴원해도 됩니다” 이 환자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지만 기쁨보다 치료비 걱정이 더 컸다. ‘내가 평생을 두고 조금씩 갚아 가겠다고 하면 믿어 주실까?’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계산서를 받아보고 이 환자가 눈물이 핑 돌았다. “치료비는 이미 우유 두잔으로 청산되었습니다. 하워드 켈리”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 얘기인가. 허기진 고학생에게 기꺼이 물대신 우유를 대접한 소녀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그녀가 위중한 것을 보고 우유 두컵 대접 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주고 치료비를 자기가 담당한 하워드 켈리의 마음 역시 얼마나 아름답고 갸륵한가. 우리가 여기에서 받아야할 교훈이 뭐겠는가.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에 대가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은혜를 입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갚을 기회가 오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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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목회자 칼럼]탈진과 회복 (11)
    시편 119편 7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고난을 좋아할 필요가 없다. 고난을 초청할 필요는 더욱 없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피해가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완전히 피해가는 인생을 본적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고난을 감수한다. 그 사연들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마음이 아프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알아두어야 한다. 고난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성경적으로 알아두면 의미 있게 고난을 감당해 나갈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이 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연단(훈련)’이라고 말한다. 연단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사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장성한 분량의 사람, 강한 사람,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연단 없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은혜의 교리, 은혜 사상〉에 익숙해 있다. 그러다보니 훈련, 연단, 고난 같은 것에는 익숙하지 않는 약점을 갖고 있다. 세상을 보라. 인생의 보람이나 성공, 목표 달성을 위하여 쏟아 붓는 노력이나 훈련을 생각해 보라!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훈련 과정〉을 밟는다. 한때 인터넷 상으로 세계적인 무용수 강수진의 발, 세계 최고의 방상 체조 선수 김연아의 발, 축구선수 박지성과 박주영의 발이 공개 된 적이 있다.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발은 아름다운 모양새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글어지고 굳어지고 마모가 돼버렸다. 특히 두 여성의 경우 아름다운 여성의 발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우지 않을 만큼 험하고 후천적으로 못 생겨버린(?) 발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발 모양에서 오히려 엄숙한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세계도 〈고난, 연단〉이 있어야 마땅하기 않겠는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봄과 가을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실로 환상적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인다. 그러나 일년내내 봄과 가을만 있어서는 안 된다. 뜨겁고 무더운 여름이 있어야 곡식과 과일과 나무와 풀들이 자란다. 무럭 무럭 자란다. 심지어 사람도 자란다. 학생 시절에 여름방학을 끝내고 9월에 개학을 하면 청소년들이 엄청나게 자랐음을 보게 된다. 몰라볼 정도로 커버린다. 그리고 가을이 있으므로 곡식과 과일이 탐스럽게 익는다. 가을의 황금 들판을 생각해 보라. 가을이 있으므로 말(馬)도 살이 찐다. 그러므로 〈고난〉 두려워하지 말자. 고난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지자. 고난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공부하자. 「고난 없이는 영광(보람)이 없다」(No Cross, No Crown)는 말은 진리다. (롬 8:18) 우리 예수님께서도 십자가(十字架) 고난을 겪으시고 나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기피 한다. 회피 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고난’하면 아예 외면을 한다. 신앙의 세계는 마냥 행복하고 평탄하고 편안하리라고 기대한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히브리서를 묵상해 보라. 믿음의 사람들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을 기꺼이 각오하면서 살았다.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 대하여 새로운 공부와 이해가 꼭 필요하다. 무조건 고난을 싫어하거나 기피하지 말아야 한다.바울사도는 젊은 청년 제자 디모데에게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일깨워준다. (디모데후서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난이 포함된 훈련을 받을 때 우리는 강한 사람, 강한 그리스도인, 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한마디로 성경은 우리에게 〈온상의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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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소강석 칼럼]꿈은 불멸이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쥐들이 우글거렸던 지하실 23평. 나는 그곳에서 교인 한 명 없이 교회를 개척했다. 꿈은 있었으나 현실은 참담했다. 그래서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오죽하면 토요일 저녁이 되면 빈 의자를 붙잡고 기도하겠는가. “주님, 이 빈 의자에 내일 사람을 앉혀 주세요. 지나가는 거지가 되었든, 넝마주의가 되었든 사람을 앉혀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럴 때면 난 이런 감동을 내가 믿는 주님으로부터 느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내가 너에게 맡 겨준 양을 목숨처럼 사랑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나는 다시 화답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양을 제 생명을 다해 사랑하겠습니다.” 그 때부터 나의 목회 비전은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였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큰 부흥을 이루었다. 최근에 월간중앙에서 한국 종교지도자 인터뷰를 하면서 나에게 ‘영혼 사랑의 승부사’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었다. 난, 꿈이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힘들고 경제가 어렵다고 너무나 쉽게 꿈을 포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꿈은 불멸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꿈은 길 위에서 잠들지 않는다. 고난의 비바람이 불어올수록 더 강해진다. 바람 보다 먼저 쓰러지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들판의 풀처럼 꿈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반드시 다시 일어나 꽃을 피운다. 나 또한 여전히 꿈을 꾼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수만 명의 성도가 모이는 신도시 대형교회 목회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꿈에 목마르다. 이루고 싶은 꿈에 배가 고프다. 왜냐하면 나의 꿈의 목적은 사람들의 숫자나 교회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영혼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모으고 얼마나 큰 건물을 짓느냐에 꿈의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느 정도 꿈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눈보라가 치는 겨울날, 예수를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나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개인적인 성공이나 명예, 세상적인 부귀영화에 꿈의 목적을 둔 적이 없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로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영혼 사랑의 목마른 꿈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 꿈은 시내산 떨기나무 사이로 타오르던 불꽃같은 불멸의 꿈이다. 암울한 현실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불멸의 꿈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다시 꿈을 꾸면 검푸른 새벽하늘, 추위에 몸을 떨며 끝끝내 빛을 발하고 있는 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난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를 보면 희망이 생기고, 꿈이 생겨나는 꿈과 희망의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은 불멸의 인생이 된다. 왜냐하면 꿈은 불멸이기 때문에, 그의 삶은 끝나도 그가 남기고 간 꿈의 기억과 영향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더 위대한 꿈의 꽃을 피울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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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가정칼럼]사랑하지 않을 때 외롭다
    정호승 시인은 인간의 외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다. 인간만큼 고독한 존재는 없다. 그것이 인간의 기본 명제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혼자 외롭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도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인간이 외롭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결혼은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정시인은 외로움을 이해하는데서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면서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즉 혼자 있어도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 차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를 좀 더 살펴봅니다. 그렇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을 때 외롭다. 아무도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 때 나 또한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때 외로움에 몸을 떨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장 많이 상처를 받듯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장 많은 외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 이면서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답은 하나입니다. 사랑해 사는 일입니다. 장밋빛 인생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세기의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삶을 조명한 영화입니다. 노래와 사랑만이 삶의 이유이자 전부였던 그녀는 죽기 전 인터뷰에서 사랑은 경이롭고 신비하고 비극적인 것이라 말했습니다. 덧붙여 자신에게 노래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사랑 없는 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사랑이 노래였고 노래가 사랑이었던 주인공은 정작 수많은 스캔들의 주인공이었지만 그의 사랑은 오직 하나, 마르셀 세르당이었습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오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연인을 위해 부르는 마지막 노래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는 이런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남겨진 새날을 위해 오늘 다시 뜨는 태양을 위해, 내겐 후회 없으리... 우리도 후회 없는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그녀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여성들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사랑.” “그럼 젊은 여성들에게는요?” “사랑.” “그럼 어린이들에 게는요?” “사랑” 하나님은 우리의 결혼생활을 통해 그런 사랑을 완성시키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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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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