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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칼럼] 두 개의 돌판
    하나님과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람이 생명을 얻으며,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며, 모든 관계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갈라지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제물이 갈라지고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반석이 갈라지고 성막이 갈라지는 것이 나온다. 그 갈라진 그 사이에 하나님이 지나가시고, 하나님이 지나가시면 모두가 사는 일이 생기고, 자유와 기쁨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두 돌판 위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한 돌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한 돌판은 생활 속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계명은 반드시 두 돌판이 모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하나 됨은 깨지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내용 중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이며 자신을 위하여 우상이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과 진리가 둘 일 수는 없다. 생명의 근원과 진리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이 하나를 잃으면 그 즉시 죽음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상이나 자연에게 복을 빌면서 섬긴다고 하자. 조상을 섬기는 것, 자연을 섬기는 것, 심지어는 사람이 만든 돌이나 사람이 만든 그림에게 절하는 것 등은 생명의 근원을 버리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상이나 해와 달, 별은 존재자체가 감사한 일이지만 숭배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다. 피조물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해서 그 생명이 피조물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리면 당장은 괜찮아 보일지라도 조금 있으면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의 내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생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 사랑하면서 악을 행한다면 이것은 사랑한다는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 것이다. 사랑에 어찌 거짓과 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악한 행동 속에는 그 어떤 신의 본성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며 선이기 때문에 선한 말과 선한 행동에서 사랑, 기쁨, 진리가 드러나고 생명력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십계명에서 내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세상의 모든 선을 농축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는 드릴 돈이 없다고 하면서 교회에는 헌금을 하고, 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이것은 제 5계명을 어기는 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기부금을 내거나 교회의 봉사와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생활 속에서 악을 행하면 아쉽지만 하나님과의 하나됨은 깨지게 되는 것이다. 행복한 결혼에도 사랑과 선,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마음속에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둘 사이에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면 당연히 결혼은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 표정이 화가나 있거나 말이 거칠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악이 있으면 이 관계는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의 삶이 다하면 가게 되는 천국과 지옥이란 어떤 곳이며 어떤 사람이 가는 곳일까?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며, 지옥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천국과 지옥은 이미 내 삶속에서, 부부 생활 속에서,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 만들어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고 있는가? 이 두 개의 돌판을 늘 가슴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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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은혜의 말씀] 일상의 영웅 (열왕기상 17:1~7)
    일상의 기적, 일상의 기쁨, 일상의 행복, 일상의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기적과, 축복과, 대박을 좋아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종합비타민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매일 만나를 주시는 그저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는, 무슨 보약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삼시세끼 밥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 엘리야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아주 소박하게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엘리야의 도피과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계속 피난을 가는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17:3~4} 하십니다. 날이 가물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먹을 게 없으니 시냇가에 숨기고 거기서 강물을 먹게 하다가 까마귀를 시켜서 음식을 공수해줍니다. 가을 추수를 하고 모두 거두어들이는 게 아니라 남은 자들, 나그네와 들짐승을 위해 남겨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작은 것으로 연명하게 하셨습니다. 8절부터 보면 사르밧 과부 집에서 얹혀서 삽니다. 과부 집에 가서 기름 한 병 남고 밀가루 조금 남은 그 집에 빌붙어 연명을 하고, 그러다가 엘리야가 부름 받았을 때는 무너진 재단을 수축하는 하찮은 일을 하고, 모든 사람이 바알에게 무릎 꿇었을 때 엘리야 혼자였습니다. 중간에 이세벨이라는 악한 여인으로 인해 공황장애가 일어나듯이 큰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물 한 병과 떡 하나를 가지고 엘리야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실망하고 낙심에 빠져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십니다. 엘리야가 마지막 죽었을 때는 하나님이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을 타고 산채로 데려가십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난 뒤에 이 땅에 남는 엘리야의 유산이라고는 겉옷하나가 달랑 남았습니다. 엘리야가 위대한 종으로 쓰임 받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것은 헌옷가지하나뿐입니다. 겨자씨운동, 큰 숲 운동이라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게 겨자씨인데 설탕알갱이 정도로 작고, 우리나라에는 담배씨앗이 있습니다. 담배씨앗이 겨자씨하고 비슷합니다. 눈에 보일락 말락 아주미세한 씨앗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묘목을 거쳐서 그게 큰 나무가 되고 많이 자라면 3.8㎜까지 자랍니다. 그게 모여졌을 때 숲이 되고 이게 모여 큰 숲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달란트비유의 핵심은 작은 일에 어떻게 대하느냐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일을 맡기시는 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대박을, 큰 것을, 센 것을 원하고 오늘날 성도들이 헛된 욕심이 많아서, 한판뒤집기를 노려 생활은 대충하고 축복은 크게 받기를 원하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수퍼맨 같은 위대한 종을 만드시는 게 아니고 생활현장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승리하는 일상의 영웅을 주문하신다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때그때 아침마다 새 힘을 주시고 하루하루 승리하게 하시는 일상의 리더, 일상의 인도자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설은 끝나고 기본으로, 다시 ‘현장으로 나아가자’ 우리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지만 그 상태로 머물러 계시지를 않습니다. 다시 힘든 세상으로 어려운 일터로 내려가셨듯이 우리는 다시 현장으로 나아가고, 다시 복음으로, 다시 사랑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일상의 기쁨, 일상의 행복, 일상의 영웅, 생활의 달인이 되어야합니다. 일상에 승리하기 위해서 오늘도 은혜 받고,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힘을 얻어 하루를 감당하고, 하루가 모여 세월이 되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일상의 승리자, 생활현장에서 승리하는 사소한 것에서 진검 승부가 나타나는 생활의 달인, 일상의 삶 속에서 영웅적인 삶을 살고, 작은 것을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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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교회회계]복식부기 시스템 도입을 통한 교회회계 패러다임의 변화, 가능할까?
    섬기는 교회에서 5년째 회계업무를 맡고 있다. 또 대학에서 10년이 훨씬 넘게 학생들에게 회계학을 가르치고 있다. 회계(會計,accounting)란 무엇일까? 또 이 시대 한국교회에 필요한 회계의 역할은 무엇일까? 돈의 흐름을 파악, 결산?보고를 한다는 점에서는 교회회계든 기업회계든 큰 차이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기업에서 사용하는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를 교회에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3년 11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즉 199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회계기준’이 단식?복식부기 구분 없이, 수입?지출의 발생이 차년도에 영향을 미치면 경상수지, 그렇지 않으면 자본수지로 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개정안은 예결산총액이 10억원 이상인 교회를 대상으로 복식부기를 도입, ‘재무상태표, 운영성과표, 현금흐름표’와 같은 재무제표를 작성하도록 권면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본 칼럼은 총12회 연재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단식부기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던 교회회계를 복식부기 시스템으로 전환할 경우, 필요한 여러 문제와 해결방법들을 실무적 관점에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단식부기는 현금주의 개념에 따라 수입?지출을 자금수지계산서에 기록하고, 편성된 예산이 잘 집행되어졌는가를 주로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수입?지출의 발생 원인은 물론, 미래 교회 자산?부채 관리에 미치는 내용을 표시하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해, 복식부기는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음이 기업회계를 통해 이미 검증되었다. 첫째, 수입?지출 중 차기이후에 미치는 영향이 자산ㆍ부채로 집계되어 교회의 재무상태를 명확히 함은 물론, 연도별 비교를 통해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재산관리와 예산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선교, 건축, 장학, 퇴직금 등 특수목적의 기금을 재무상태표에 표시하여 회계 투명성을 높이고, 내부통제제도 효과를 증가시킨다. 셋째, 발생주의 원리에 따른 신용거래, 손상차손, 감가상각, 공정가치 평가 등의 회계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넷째, 자금수지계산서 잔액과 재무상태표 차기이월의 일치를 확인, 회계처리 검증가능성을 높이고 재무제표간의 관련성을 높일 수 있다. 교회회계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 교회(church)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과 달리 이윤동기도 없고, 개인에 의한 소유나 지분청구권도 없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그에 사용되는 재산이나 헌금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으로 정의한다면, 교회 지도자와 회계담당자는 이를 맡은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해 효율적으로 재산관리가 이루어지고 또 보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교회마다 필요한 내부통제제도를 확립하고,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가 이루어지도록 협조되어야 할 것이다. 본 칼럼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2013년에 만든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을 기초로 복식부기 시스템을 설명해 갈 것이다. 또한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Microsoft사의 Excel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운영성과표와 재무상태표를 작성할 수 있는 매뉴얼을 제시할 수 있도록 검토해 갈 예정이다. 위 회계기준은 우리나라 회계 제정기관인 한국회계기준원이 발표한 ‘비영리조직 회계기준’을 수정하여 만든 것으로, 교단을 넘어 앞으로 교회회계의 방향을 제시해 가는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규모에 따른 비용부담도 크게 관계가 없으므로 개척교회로 특별히 열악한 상황에 있지 않는 한, 많은 교회 지도자와 회계담당자가 관심을 갖고 동참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음호는 교회회계 복식부기 시스템의 구체적인 기본원리에 대해 설명을 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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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시사칼럼] 지도자론 소고(小考)
    우루과이 남서부에 헤랄드 아코스타(Gerald Acosta) 씨는 정초부터 운이 나빴습니다. 5일 아침에 출근했다가 신분증 기간 만료로 작업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화도 나고 걱정도 되고 게다가 날씨까지 왜 이렇게 찌는지, 할 수 없이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았지만 야속하게도 아무도 차를 태워주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낡은 관용차가 한 대 섰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비어 있는 뒷자석에 탄 아코스타 씨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조수석에 유명한 루시아 상원의원이, 그리고 운전석에는 그녀의 남편 호세 무히카(Jose Mujica) 씨가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루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올 해 2월 말로 임기를 마친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립니다. 독재에 저항하다 14년을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던 그는 대통령 취임 직후 관저(官邸)를 노숙인 쉼터로 내놓고 해안에 있는 대통령 별장도 팔아버렸습니다. 그 날 아코스타 씨를 태워주었던 관용차 역시 20년 째 몰고 있는 자기소유 차량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거주하던 수도 외곽 낡은 주택에서 손수 운전하며 출퇴근했던 이 소박한 대통령은 월급의 2/3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면서, 재임 기간 동안 연평균 성장률 5%, 국민소득 16,000 달러에 국가 부패지수 21위 등 모두 남미 최고를 기록하며 취임 시보다 훨씬 높은 지지율과 국민들의 존경 속에서 퇴임했습니다. 같은 달 중순, 미국의 민간 우주항공업체 스페이스X와 해양대기국(NOAA)은 디스커버 위성을 쏘아 올렸습니다. 여타 위성과 달리 지구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인 160만 km 지점에서 ‘블루 마블(Blue Marble)’이라 불리는 지구 전체의 사진을 찍어 전송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위성에는 ‘고어의 위성(Gore Sat)’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1998년 미국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Al Gore)가 재임 당시 “아름다운 지구 전체의 모습을 담아 24시간 내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환경의 소중함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시작했던 프로젝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당시에도 수익성 문제로 인기가 없었고, 이후 부시(G. W. Busch) 정부에서는 예산 낭비라는 이유로 아예 백지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7년 만에 쏘아 올린 이 위성은 인기나 당리당략을 초월한 한 정치인의 혜안(慧眼)이 결국 옳았음을 증거합니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은 총리후보자 검증 문제로 온 사회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지 어언 15년째, 그러나 공직후보자들의 수준은 발전은커녕 퇴보한 것이 아닌가 우려스러울 정도입니다. 도입 초기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중요한 시금석이었던 ‘위장전입’은 정치적 면죄부를 받은 지 오래입니다. 부동산투기나 병역기피는 진부적인 정치적 상투어 정도로 희석되었습니다. 대의(代議)의 주체인 국민들의 의사보다 당론(黨論)이 우선하는 현상도 한결같습니다. 아, 우리는 언제쯤 “삶에는 가격이 없다”며 검소한 삶을 실천하는 지도자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쯤이면 개인적인 영욕(榮辱)이나 당리당략(黨利黨略)이 아니라 국가의 대계(大計)와 민족의 미래(未來)와 자유와 정의와 환경과 같은 지순(至純)한 가치들을 위해 매진하는 지도자를 목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동전 한 닢도(마 17:27) 옷 한 벌도(요 19:23) 소유하지 않은 담백함과, 하나님 나라의 큰 뜻을 위해 희생하는 참지도자의 전형(典型)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사모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회의 지도자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산다면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바울이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까닭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였지만(행 20:34; 고전 9:12; 살후 3:8), 결국 소박하면서 대의를 위해 사는 그 모습이 아시아와 유럽을 바꾸고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그런 지도자 하나쯤을 기대하는 것은 망상입니까 아니면 소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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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소강석 칼럼] 연해주를 울린 아리아
    최근에 연해주를 방문하였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가 아니던가.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발원지요 최초로 임시정부가 세워진 곳이다.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여 맨 먼저 최재형 선생이 처형당한 곳을 찾았다. 최재형, 그는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배고픈 환경을 극복하고 연해주의 드림을 꿈꾸며 포시에트 항구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배고프고 허기져서 항구에서 쓰러졌다. 바로 그 쓰러진 꼬마를 러시아의 한 선장 부부가 발견하고 양아들로 삼는다. 그런데 최재형은 천재였다. 러시아 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잘하는지 자라서 러시아 군의 통역관이 된다. 그는 천재일 뿐만 아니라 민족애와 조국애가 가슴을 사무치게 하였다. 그래서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면 자기가 러시아 군에 팔아주겠다고 고무시켰으며 약속대로 군납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이익금의 대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해 주었다. 특별히 안중근 의사의 모든 독립활동을 지원해 주고 무기를 사서 독립군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있는 한인들을 결집해서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일본이 독립군들이 어떻게 넉넉하게 활동을 하는가, 의아해서 조사를 해 보니까 뒤에 최재형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가 최재형을 새벽에 잡아다가 우수리스크에 있는 소베스가야 언덕으로 끌고 가서 처참하게 처형을 하였다. 나는 먼저 최재형이 처형당한 언덕을 찾아갔다. 바로 그 옆에는 우수리스키 감옥이 있었다. 그 감옥에는 한 독립군이 잡혀서 갇혔다고 한다. 그 언덕은 건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념비 하나도 없었다. 아직도 흰 눈이 쌓인 언덕이었다. 기억을 하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만 알고 있지 아무런 글자 하나 새겨지지 않았다. 나는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서 기념비를 세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 언덕에 서서 생각해 봤다. “과연 대한민국 사람들 가운데 누가 얼마나 최재형선생을 알고 있는가. 더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누가 알겠는가. 최재형선생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피로 얼룩진 고난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고난과 수치의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만이 강하고 미래가 보장되는데 과연 우리는 지난 날 민족의 수치와 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박물관 동판에는“망각은 포로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는가. 안내를 하는 선교사에게 그가 처형당할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날 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상상해 보았다. 일본 헌병이 최재형 선생을 얼마나 짐승처럼 두들겨패고 어쩌면 개머리판으로 온 몸과 머리까지 내리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총살을 시켰을 것이다. 그때 최재형선생의 생각과 내뱉었던 말을 상상해 보았다. 특별히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니 나는 목사로서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하나님, 노비로 태어났던 몸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마흔까지 일하다가 이렇게 죽게 된 것도 영광일 뿐입니다. 그리고 조선인이여, 광복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수치와 비극을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해야 광복의 영광을 길이길이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볼 때 마치 최재형 선생의 음성이 광복의 아리아처럼 소베스가야 언덕을 메아리치는 듯 했다. 연해주를 메아리친 아리아가 한반도를 울리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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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성서연구] 뜰 안과 뜰 밖(요 18:15-27)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후해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느냐>를 두고 논할 때 사람에 따라 차이가 많아 보입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안나스, 로마 총독인 빌라도, 백성의 장로들과 기타 지도급 인사들은 가장 책임이 많아 보입니다. 가룟 유다도 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죄가 무겁다고 생각됩니다. 이들 중에서도 빌라도는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했노라고 발뺌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군중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군중심리에 흥분되어 별 생각 없이 소리 질렀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에는 십자가 사건에 구경꾼이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은 소리를 지른 일도 없고 단지 구경만 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어떨까요? 아홉 명의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도망했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두 명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 두 명중 한 명은 베드로요, 다른 한 명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요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익명의 한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뜰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잠시 후 베드로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둘은 뜰 안의 제자였습니다. 그 둘은 일찍 도망한 아홉 명에 비하면 훌륭한 제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둘은 뜰 안의 제자였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평소에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와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큰소리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결심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뜰 안에까지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둘러싸고 청문회라도 열린다면 베드로는 그래도 제일 나아 보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뜰 안에까지 갔으니 말입니다. <나는 저 사람들 보다는 낫지....>라고 자부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런 상대적 만족감에 도취되어 살고 있습니다.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맛에 삽니다. 그리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본문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었습니다만, 다른 복음서는 이 장면을 다루면서 마지막에 닭 울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베드로의 통곡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사람의 통곡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감만큼이나 큰 자괴감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즐기던 상대적 우수성이 볼품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데서 오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뜰 밖의 아홉 제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 결과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아홉 제자보다 더 간사하고 악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뜰 안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뜰 안과 뜰 밖이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뜰 안에 있었다고 자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특정인들을 거명하기도 하고, 특정 교회를 들먹거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자신은 무죄임을 은근히 주장하는 것 같아 보기 민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오늘의 어려움에 대해 우리 모두는 공범입니다. 본문의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입니까? 요한이라고 추측을 해 보지만, 그런 추측은 무익합니다. 차라리 익명의 그 한 제자가 우리 자신이라고 고백합시다. 우리 자신도 상대적 만족감에 심취해 왔으며, 교만했으며, 실제로는 조금도 나을 게 없었음을 자인합시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 죄인일 뿐입니다. 다른 이를 향해 돌을 던지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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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코엑스 사거리에 ‘봉은사역’이라니
    코엑스 사거리에 ‘봉은사역’은 말도 안돼 지금이라도 고쳐 ‘코엑스역’이라고 해야 오는 3월 28일 개통되는 서울지하철 9호선 2단계 구간 929정거장 명칭이 ‘봉은사역’으로 확정되어 논란이 크게 일고 있다. 이유는 서울시가 929정거장에서 매우 가깝고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코엑스 대신 더 먼 곳에 있는 특정 종교시설 이름으로 역명을 정했기 때문이다. 봉은사역이 들어서는 곳은 왕복 12차로 도로가 나 있는 코엑스 사거리다. 코엑스 사거리는 코엑스와 바로 연결되어 있고 봉은사는 120미터 떨어져 있다. 서울시의 역명제정기준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고 해당 지역과 관련성이 뚜렷하고 지역 실정에 부합하는 명칭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 기준에 따른다고 하면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은 당연히 ‘코엑스역’이라고 칭해야 한다. 코엑스는 연 평균 5천만 명이 드나들고 국제적 회의와 박람회 등이 연간 3천건 넘게 열리는 주요 시설이 아닌가. 그런데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을 ‘코엑스역’이라고 하지 않고 일개 절간 이름으로 ‘봉은사역’이라고 하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어쩌면 불교신도 중에서도 어떤 이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서울시의 처사이다. 서울시는 봉은사가 강남을 대표하는 전통사찰이고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역명을 ‘봉은사’라고 정했다고 한다. 강남구청은 두차례 설문조사 후 서울시에 ‘봉은사역(코엑스)’, ‘코엑스역(봉은사)’을 추천했지만 서울시는 ‘코엑스’를 괄호안에 넣는 것도 거부하고 ‘봉은사역’이라는 단독명칭으로 확정했다.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국교회 주요 연합기관인 한기총과 한교연이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봉은사 역명을 바꾸지 않으면 범기독교적으로 행정불복종운동을 펼치겠다고 천명했지만 반응이 있겠는가. 지난해 12월 강남구청이 주민센터를 통해 수렴한 주민들의 역명칭 선호도 조사 결과는 ‘코엑스역’이 1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주민들의 여론도 묵살하고 ‘봉은사역’이라고 확정한 서울시가 기독교가 반대한다고 ‘봉은사역’을 ‘코엑스역’이라고 개정하겠는가. 박원순 서울시장은 알려진대로 불교학생회 출신이고 여러 불교단체의 자문위원이었고 뿐만아니라 여러 모임에서 발전방안을 제시하였고, 여러 불교상을 받았으며 한국 불교계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14인 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었고 봉은사 미래위원장을 맡아 4년간 역임했다. 그러니 어찌 ‘코엑스역’으로 되겠는가. 그러나 단호히 말하거니와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은 마땅히 ‘코엑스역’으로 개정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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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목회자 칼럼]“en Christus”
    “en Christus”는 바울 신학의 핵심중의 하나이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이다. 그 신학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 주님은 사복음서 여러 곳에서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이렇게 나타내셨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제자들의 열매 맺는 삶과 기도 응답의 비결은 그런 관계에서 나옴을 강조하셨다. 요15:5, 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 “en Christus”가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해 핵심적인 기독교리로 신학화 되었다. 그가 여러 교회에 보내는 모든 서신서에서 “en Christus”는 수도 없이 나온다. 3년 전 성경 66권중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매일 새벽마다 묵상 중이었다. 난해하다는 책인데, 당시 묵상 중에는 왜 그리 흥미롭고, 재미있고, 은혜로운 말씀으로 읽혀지는지, 많은 은혜를 받은 적 있다. 나의 성경책, 요한계시록 빈 여백에는 이런 저런 나의 묵상의 글들로 가득 채워져 나갔다. 특히 어느 한날 새벽 묵상에서 계14:13의 말씀이 전날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과 오버랩 되면서 큰 은혜가 되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전날 오전 8시 30분, 특별한 장례예배를 인도했다. 주일 단칸방에서 심장마비사, 그 다음날 그 집을 방문한 보호인에 의해 발견, 119로 마산의료원으로 후송, 일가친척이 없음으로 빈소 없이 시신안치소에 보관, 그리고 어제 발인예배 후 화장터로 이동한 장례였다. 고인의 가난한 삶, 고독한 삶, 유별난 성격을 알기에 나의 가슴은 저려왔다. 그 자리에 참석한 10여명의 성도들의 마음도 동일했을 것이다. 故 최봉애 집사(86세), 세상적으로 보면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말년에 교회에 나와 주님과 교회와 벗 하면서 지내시다가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주안에서 임종을 맞으신 것이다. 눅16장에서 주님이 들려주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생각난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자의 인생은 부러운 인생, 거지 나사로의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주 밖에서 죽은 부자는 불쌍한 인생, 주 안에서 죽은 나사로는 행복한 인생이었다. 한가지 놀랍고 감동적인 일은 몇 주 전에 고인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셨는지 2004년부터 시작한 “성전건축매월구좌헌금”(2004년~2011년)봉투 8개를 가져 오셨다. 봉투마다 한번의 빈 공란 없이 12개월 수납도장으로 가득 찍혀있었다. 너무도 귀한 유품이었다. 오후에는 김선엽 집사의 전도로 몇 개월 전에 등록한 이순옥 성도의 시어머니(90세)가 위독하여 집중실에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감사하게도 믿는 분이시고, 아직은 소통이 가능한 상태라 다시한번 신앙을 확인 할 때에 “아멘”이라고 화답함을 보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에 해당되는 분이여서 이순옥 집사와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저녁에는 이경숙(김충기)집사의 고성에 사시는 부친(82세)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고성병원에서 진주 경상대병원으로 응급치료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시간에 이 집사와 통화의 시간을 가졌다. 전화에서 슬피 울며 들려오는 첫 마디는, “목사님, 지금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동생들은 다 전도했는데 여태껏 아버지를 전도하지 못했어요. 그것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살아 생전에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며 중요한 것인가를 아는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의 이유다. 다음날 아침 전화통화에서 지난 밤 사이에 별세하여 마산 영락장례식장에 안치되고 남동생 부부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장례를 주관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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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교회법률상식]합동총회 유령 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에 없는 위원회는 활동 못해-종결된 사건에 “화해수습처리위원회”는 어불성설 제98회 총회가 황해노회 동산교회 건으로 최성용 씨가 상소한 상소 건에 대하여 “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2013)” p.85에 “특별재판국을 설치하기로 가결하다.”라고 결의하고 다시 재판하여 보고하도록 위탁하였다(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pp.229-230 참조). 특별재판국은 총회가 다시 재판하여 보고하라고 맡긴 최성용 씨의 상소 건을 판결하고, 제99회 총회에 보고하니 총회는 “주문(최성용 씨와 최정환 씨가 황해노회 원심재판국을 상대로 상소한 상소 건은 기각한다.)대로 받기로 가결하다(제99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p.63).”로 채용하여 종결하였다. 그런데 제99회 총회 중에 박창복 목사 외 117명이 “황해노회 소속 동산교회 건 특별재판국 불법 설치 및 결의에 대한 조사처리위원회 설치의 건”이라는 긴급동의 안을 서기에게 교부한 후 서기와 일부 총대들이 “긴급동의 안!”이라고 세 번이나 회장에게 제안하였으나 회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받아들이지 아니하였고 결국 총회가 파회됨으로 긴급동의 안은 자동 폐기되어버렸다. 그러나 총회임원회는 “잔무는 임원회에 맡기고 파회하기로”하였음을 빙자하여 이미 폐기된 긴급동의안도 잔무라고 하면서 2014.11.25일에 대전중앙교회당에서 임원회를 개최하여 여러 건의 긴급동의 안을 다루는 중에 동산교회 관련 긴급동의 안에 대하여 “박창복 목사 외 117명이 긴급 동의한 황해노회 소속 동산교회 건 특별재판국 불법 설치 및 결의에 대한 조사처리위원회 설치의 건은 이미 본 총회가 특별재판국의 판결을 채용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황해노회 동산교회 화해조정위원으로 부총회장 2인과 회계를 선임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결의대로 2015.12.8일에 모임을 갖고 위원장 박무용 목사, 서기 이호영 장로, 회계 서병호 장로로 조직하고 임원회에서는 “화해 조정위원회”라 명명하여 결의하였는데 위원회는 무엇이 부족했는지 “화해수습처리위원회”라는 명칭으로 둔갑하여 출석 요구서까지 발송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본 사건은 최종심인 총회가 특별재판국의 판결을 만장일치로 채용하였고, 사회법에 소송을 제기한 24건도 모두 승소하여 종결되었으니 더 이상 수습, 처리 등이 필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화해조정위원회”니 “화해수습처리위원회”니 하는 잠꼬대 같은 일을 꾸미려하는지 알 수가 없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총회임원회가 잔무를 처리하면 반드시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에 기록하는 것이 법인데 제99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2014)에는 “긴급동의안 처리”에 대한 결의 항목도 없고, 요람에 광명 동산교회 관련 “화해조정위원회”이든 “화해수습처리위원회”이든 간에 아무런 위원회도 없다. 그런데 “화해수습처리위원회”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이와 같은 행태를 두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또한 그 귀추가 어떻게 될지 자못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총회 결의 내용에도 없고 총회 조직에 대한 요람에도 없는데 활동은 하고 있으니 “유령 위원회의 활동”이라고 함이 적절해 보인다. 그럼 이에 관련한 최근의 역대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제97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2012) p.80의 “19. 조사처리”부터 p.83의 “23. 기타 가-라”까지는 정치부가 보고하지 못하고 남겨둔 채 “잔무는 임원회에 맡기기로 결의”하고 파회되었으므로 위의 정치부 보고서 PP.80-83에 기록되어 있는 잔무에 속한 그 안건을 임원회가 처리한 후에 제97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에 빠짐없이 기록하였고 p.89에는 “긴급동의안 처리” 항목을 기록하였으며 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2013) p.86에도 역시 “긴급동의안 처리” 항목이 기록되어 있다. 결론으로 제99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에 회의 결의 내용에 긴급동의안 항목이 기록되지 않았고 요람에도 역시 소위 3인의 “화해수습처리위원회”라는 조직도 없으며 교회법으로나 사회법으로도 완벽하게 종결된 사건이므로 수습할 일도 없고 처리할 사안도 없으며 수습이나 처리에 응해 줄 상대도 없으니 시간과 재정만 낭비하지 말고 유령 위원회의 활동을 중단하고 해산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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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성공칼럼] 나(Ego) 전쟁
    보스니아에 모스타르라는 다리가 있다. 이 지역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한 쪽은 이슬람, 한 쪽은 가톨릭이 함께 산다. 그런데 1993년에 이웃끼리 전쟁이 벌어져서 이 다리가 로켓포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가정집의 담에는 수 백, 수천의 총알이 박혔던 흔적이 남아있다. 함께 웃고, 함께 음식을 나누던 이웃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 30만 명이 죽은 것이다. 이런 전쟁이 왜 벌어졌을까? 누구 때문인가? 바로 나 즉 에고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곳에서 살았다면 나의 종교는 가톨릭 아니면 이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도 나의 옳음을 주장하면서 나와 종교가 상대방을 향해서 총구를 겨누었을 것이다. 민족과 종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말이다. 모스타르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은 내 속에서, 우리 가정에서,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모든 전쟁은 나(Ego)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갈등과 전쟁은 나(Ego)를 없게 할 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갈등과 서운함과 싸움 속에 에고가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의 갈등도 나(Ego) 때문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음으로 나(Ego)가 태어난다. 나는 아버지다. 나는 남편이다. 나는 누구다. 내가 했다. 내가 만들었다. 내가 옳다. 나만 옳다. 상대방이 나(Ego)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화가 나고 서운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죽일 것이다. 등등의 나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 나(Ego) 때문에 나와 함께 있는 가족은 참아야 했으며 고통당해야 했다. 그들이 참지 않았으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이런 나 때문에 오랜 세월 참아준 아이들과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30년 된 친구들끼리 13일 동안 옛날 유고슬라비아 지역이었던 발칸지역으로 선교여행을 하고 왔다. 여행 중에 내 생각을 표현했는데 친구 한명이 내 생각을 공감하지도 않고 무시했다. 나는 불쑥 화가 났다. 나는 나를 무시한 친구가 밉고 꼴도 보기 싫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옳다. 내가 최고다, 나를 알아 달라...’ 이런 생각이 내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잡지 않으면 여행이고 뭐고 끝이 날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나(Ego) 때문에 본성을 잃고 있으며 상대방을 미워하며 제외시키고 있었다. 이런 에고 전쟁이 커져서 모스타르의 전쟁, 부부간의 전쟁, 종교전쟁, 세계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에고)는 허상이다. 모든 종교는 종교보다 종교성을 드러내야 한다. 종교의 본질은 사랑이며 기쁨이며 빛이며 생명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 속에서 사랑이 나오고 빛이 나와야 종교성이 있는 것이며, 누구든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 최고를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종교성을 갖고 있으면 상대방의 종교가 다르거나 나라와 민족이 다르더라도 본질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종교 때문에 갈등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종교는 있지만 종교성은 잃어버린 종교 에고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Ego)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커진다. 나(Ego)라는 것은 세상의 것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Ego)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반대가 된다. 모든 생명과 힘과 능력과 부의 근원은 나(Ego)가 아니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Ego)가 근원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Ego)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도 반대가 된다. 나(Ego)를 사랑하는 것은 내 생각, 내 이익, 내 권력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나(Ego)가 악의 근원이며, 그 악 속에 악마가 있는 것이다. 내(Ego)가 없을 때 나는 주를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Ego)가 없기로 결정한다. 내(Ego)가 없으면 내 속에서 그 어떤 갈등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 속에 전쟁이 없으면 그 어떤 전쟁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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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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