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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법률상식] 헌법개정위원회에 바란다(2)
    (지난호에 이어) 3. 시벌과 해벌은 권징재판이 아닌 교회 예배 의식 만일 예배모범의 시벌과 해벌을 권징조례에 옮겨서 시행한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양상은 마치 상의는 양복정장을 하고 하의는 한복 바지를 입고 신발은 운동화를 신은 사람과 같이 꼴불견 중에 꼴불견인 헌법이 될 것 같아 심히 안타깝고 우려스럽다. 그 이유로 해벌은 재판회나 재판국에서 해벌하는 것이 아니고 행정치리회에서 목사는 노회가, 일반 신도는 당회가 결의하여 예배모범에 규정한 의식으로 행정치리회 회장이 회원에게 해벌·공포하는 것이요, 시벌은 재판회(국)에서 판결하여 원·피고에게 선고한 후 회원들에게는 행정치리회장이 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 10항에 의하여 예배모범 의식으로 공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헌법 조문에서 검토해 보자. 현행 권징조례 제31조에 “치리회가 시벌하거나 해벌하는 때는 장로회 예배모범 제16, 17장의 규정한 바에 의하여 처리함이 옳다”라는 규정에서 여기의 치리회는 권징치리회가 아니고, 행정치리회인 노회와 당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개정위원회는 개정안 제33조(시벌 및 해벌)에서 엉뚱하게 행정치리회인 이 “치리회”를 “재판회(국)”로 개정 초안했으니 또한 기가 막힐 일이다. 해벌할 때에 과거에 재판한 그 재판국은 이미 해산되고 없어졌는데 무슨 방법으로 재소집해서 해벌하란 말인가? 아니면 새로운 재판국을 설치하여 해벌하란 말인가? 말이 도무지 안 된다. 오직 행정치리회가 결의하고 행정치리회장이 예배모범의 의식으로 공포하는 것이다. 당회재판으로 생각해 보자. 재판회는 심리·판결하여 원고와 피고에게 재판회장이 선고하는 것이므로 권징조례에 속하고, 그 판결을 교회에 알리는 공포는 당회장이 예배시간에 교회에 공포하는 것이므로 시벌과 해벌은 권징조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속하는 것이므로 예배모범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법과 세상법이 다르고 교회재판과 세상재판이 다른 점이라는 말이다. 4. 헌법 전면 개정의 의미와 범위 원래 헌법 개정의 절차는 어떤 개인의 청원이나 제의에 의해서 개정안이 총회에 제안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치리회의 헌의(정치 제8장 제1조, 동 제10장 제6조 2항, 6항, 동 제12장 제4조)에 의하여 총회의 결의(정치 제12장 제4조)와 노회의 수의 과정을 통하여(정치 제23장 제1조, 제2조) 총회가 공포 시행하는 것이다. 즉 총회 현장에서 헌법 개정이 긴급하게 요구되는 조문이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총대 개인의 제의나 어떤 집단적 개체(장로회, 교역자회 등) 또는 총회 상비부나 위원회, 임원회 등의 제안으로는 헌법 개정안을 총회에 상정할 수 없다. 오직 “당회가 헌법 개정안을 노회에 헌의(혹 노회 회원들의 긴급 동의안으로 제의)하고 노회가 그 개정안을 받아 결의하여 총회에 헌의(혹 총회 총대들의 긴급 동의안으로 제의)하면 총회가 받아 결의하여 노회 수의 후 공포 시행하는 절차에 의해서만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2012년 제97회 총회에서 “헌법 전면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계속 활동해 오다가 제99회 총회에서 명칭을 “헌법 개정위원회”로 변경은 하였지만 그 기능과 역활은 존속시키면서 그 위원회에 헌법 전면 개정안을 제안하도록 위탁하였다. 그러므로 헌법 전면 개정의 의미(범위)는 모모 교단이 장로교회 헌법의 원조인 웨스트민스터 헌법의 틀과 판을 허물고 세상 법과 같이 삼권분립의 형식으로 개정하여 교회 헌법의 고유한 특성을 훼손한 헌법 개정과 같은 전면 개정이 아니고 현행 헌법의 장과 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법이 정한 헌법 개정 절차 중에 총회에 헌의하기 이전의 하회 치리회가 헌의해야 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총회가 그 절차를 헌법 전면 개정위원회에 위탁한 특별한 비상조치로 보아야지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5. 결론 바라기는 헌법개정위원회는 “성경으로부터 이탈한 중세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기치(旗幟)”를 잊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헌법 제정이야말로 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의 목표인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헌법에서 빗나간 현행 헌법을 웨스트민스터 헌법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헌법 개정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개정위원회는 기이 초안한 개정안은 접어두고 이제껏 헌법을 개정할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하여 출판한 1922년도 판 헌법에서 빗나가게 개정하므로 인하여 시행할 수 없는 부분(정치 제13장 제4조 등)과 시대적 문화적 변천으로 인하여 그 의미가 바뀌어 시행할 수없는 용어(권징조례 제136조 등) 등의 부문만 찾아내서 개정안을 초안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웨스트민스터 헌법으로 되돌려 놓는 헌법 개정으로 세계 만국 장로교회들이 공히 시행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헌법과 버금가는 헌법 개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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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성공칼럼] 악의 근원
    악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 밝은 생각에서 밝은 감정이 나오고 어두운 생각에서 어두운 감정이 나오듯 거짓과 악은 서로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생각과 행동이 짝을 이루어야 하듯이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가 서로 짝을 이루어야 한다. 악은 사랑이 없는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진리란 가슴에 분노와 미움과 적개심을 품고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이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뒤에 있던 차가 새치기를 해서 사고가 날 뻔했을 때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하면서 상대방 운전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그리고 서로 논쟁할 때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것 등이 사랑과 존중을 잃어버린 자기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차가 새치기를 하는구나. 굉장히 다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겠지... 사고 나지 않았으니 감사하지”하면서 마음에 사랑과 여유를 회복한 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야 선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유, 생명, 기쁨 등의 본성과 원천이며, 진리는 그 원천에서 나오는 말이며 사상이며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리는 사랑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기에 내 생각,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물질, 지식, 능력은 선과 자유, 사랑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속에 사랑이 없으면 내 옳음과 내 모든 소유는 악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할 내 생각에 두려움이 있고, 서운함, 적개심, 내 욕망이 있으면 삶은 망가지게 되며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패망의 근원은 모든 것의 근원인 사랑을 버린데 있는 것이다. 책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 속의 왕들을 보면 처음에는 백성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왕이 된다. 여기에서 지혜가 나오고 능력이 생겨 나라가 부유하고 평화롭게 된다. 그러나 왕이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사랑을 버리게 되면 왕이라는 자리에 연연하여 지배욕으로 불타오른다. 그러면 서서히 악이 보이면서 폭군으로 변하며 패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말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내 속에 사랑과 선함 있는지 살피는 것이 악을 막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하는 짝이듯이 더 나아가 사랑 속에는 진리, 옳은 생각,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겉보기에는 밝고 선해 보이지만 그 속에 악한 마음 즉 거짓이 있기에 겉이 화려한 무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음속에 옳지 않은 욕심을 가지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온갖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진리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 근원은 거짓과 어둡게 만드는 생각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거짓을 진짜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을 살다보면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잘 될 때, 안 될 때, 좋은 평가를 들을 때, 비난을 들을 때 등등의 상반된 일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크게 두 가지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하나는 사랑과 선을 만드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거짓과 악을 만드는 생각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상반된 것으로 하나는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 때 나는 어떤 생각을 선택할 것인가? 예를 들어 내 성적이 원하는 대학에 갈 성적이 되지 않는다. 혹은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실직을 했다. 혹은 갑자기 이혼을 했다면 ‘나는 해도 안 돼, 나 같은 것은 살 필요가 없어. 이젠 끝이야’ 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서 사랑과 힘을 잃으며 내 삶이 엉망이 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다시 시도해 보자, 결국 나는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해서 힘과 사랑이 생겨서 내 삶이 살아나도록 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악의 근원은 내가 사랑이 생기지 않는 거짓을 따르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서 사랑을 더하여 악의 근원을 없애고, 사랑과 진리가 항상 함께 같은 양이 되도록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이 있든지 내 안에 사랑과 진리가 균형을 이루어서, 사랑과 진리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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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은혜의 말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여호수아 1 : 7~9 )
    오늘 본문말씀은 여호수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님과 이름이 같은 ‘예수스’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리더십을 지닌 리더였는지 살펴보려합니다. 첫째, 여호수아는 위기의 지도자였습니다. 1장 1절 말씀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를 부르십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에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항상 최악의 순간 최고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여호수아가 독보적인 지도자가 아니고 돕는 베필이라는 겁니다. 1장 1절에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하여 여호수아를 소개할 때 단독적인 스팩이 없습니다. 모세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스스로 잘난 사람이 아니고 융합적이고 어디가든지 섬기는 섬김의 리더십을 지닌 조력자였습니다. 남들을 흥하게 하고 남들이 잘되게 하는 리더십이 여호수아의 리더십입니다. 셋째, 여호수아는 예비되고 겸비되고 준비되고 검증된 지도자라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나이 80이 될 때까지 수십 년을 모세를 도왔던 사람입니다. 준비가 된 사람이 쓰임 받습니다. 전문가들에게 고개 숙이는 이유는 그 한 분야에 오랫동안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40년 동안 모세를 따라다니면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연습과 오랜 단련과 학습을 통해 준비된 지도자가 되어야합니다. 넷째, 여호수아는 능력있는 지도자로 탁월한 분배자였습니다. 이권이 연계되면 예민해집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소통과 나눔의 달인이었습니다.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을 겪게 되는데 천차만별의 사람들에게 그 큰 땅을 정확하게 분배하고 나누었으니 소통과 나눔의 달인인 것입니다. 다섯째, 여호수아는 한계를 뛰어넘은 리더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사선을 넘는다는 겁니다. 한계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체력의 한계, 집안의 한계, 성질의 한계, 경제적 한계를 넘어서 강을 건너갔다는 겁니다. 여섯째, 여호수아는 균형의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1장 7절 말씀에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균형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저것이 아니면 이것을 하다가 시행착오를 겪고 갈팡질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으라고 하십니다. 균형이 건강입니다. 오랜 기도와 말씀 속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를 향해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이 역사를 만들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의 수고를 통해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형성됩니다. 균형 잡힌 건강한 리더십을 통해 삶의 균형수를 유지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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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교회회계]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기본원리
    교회회계 두번째 칼럼이다. 오늘은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기본원리를 설명한다. 매주 교회에서 작성되는 수입?지출 보고서를 어떻게 복식부기로 전환할까? 기업의 회계순환과정(accounting cycle)은 총6단계로 구분된다. 또한 이러한 절차는 교회회계에서도 Excel 프로그램 등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회계장부에 표시될 거래를 식별한다. 즉 교회에서 발생한 수입ㆍ지출을 자산, 부채, 자본(순자산), 수익, 비용으로 구분하고, 이들 5개 항목의 증감에 미친 내용을 식별한다. 자산은 교회가 소유하는 경제적 자원으로, 지출결과가 차년도 이후 효익을 미치며 현금, 예금, 토지, 건물, 차량운반구, 비품, 미수금 등이 있다. 부채는 교회가 갚아야 할 채무로 차입금, 미지급금 등이 있다. 자본(순자산)은 자산에서 부채를 차감한 것이다. 수익은 교회 고유목적 및 기타사업을 통해 얻은 대가로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이 있다. 비용은 지출결과가 당년도에 미치는 것으로 예배비, 교역자사례비, 찬양대육성비, 교회학교육성비, 선교비, 구제비, 제세공과금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식별된 내용은 분개(journal)를 통해 회계장부에 기록한다. 분개는 T자형태 계정을 만들어, 왼쪽을 차변(Debit), 오른쪽을 대변(Credit)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자산?비용의 증가는 차변에, 부채?자본?수익의 증가는 대변에 표시하고, 감소시에는 그 반대로 표시해야 한다. 예로, 십일조 50만원과 교역자 사례비 100만원이 발생하였다면 수입?지출의 원인과 결과를 다음과 같이 차변과 대변 양쪽으로 기록한다. 이것이 복식부기의 기본원리이다. 셋째, 분개장에 표시된 내용을 총계정원장으로 옮겨 적는 전기(posting)를 한다. 전기는 일자별로 표시되는 분개내용을 계정별(현금, 당좌예금, 건물, 차입금, 사례비, 제세공과 등)로 집계하는 절차로써, Excel 프로그램 사용시 “데이터-필터” 기능을 활용해 쉽게 작성할 수 있다. 넷째, 기말시점에 발생주의 기준에 따라 수정분개를 한다. 발생주의는 현금의 수입?지출과 관계없이, 당년도에 실제로 발생한 수익과 비용, 자산과 부채의 변화를 평가하기 위한 것으로 발생, 이연, 평가항목으로 나누어 표시한다. 또 유형자산(건물, 차량운반구 등)에 대해서도 필요시 감가상각을 하고, 손상차손과 같은 회계처리를 한다. 다섯째, 재무상태표, 운영성과표, 현금흐름표와 같은 재무제표를 작성한다. 재무상태표는 자산과 부채, 순자산을 표시하여 교회가 소유하는 경제적 자원과 부채를 나타냄은 물론, 일정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선교ㆍ건축ㆍ장학ㆍ퇴직등의 적립금을 표시하여 효율적 관리를 가능하게 한다. 운영성과표는 수익에서 비용을 차감하는 형식으로 사업운영이익을 표시하고, 또 순자산의 변동내역을 나타냄으로 차년도 교회재정의 예산과 결산을 편성ㆍ집행하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마지막 단계로, 총계정원장에 표시된 각 계정을 마감한다. 이때 수익ㆍ비용은 회계연도가 끝나면 소멸되는 임시항목으로 ‘집합손익’을 통해 0(제로)로 만들고, 자산ㆍ부채ㆍ순자산은 영구계정이므로 ‘차기이월’하는 마감분개를 하여 회계장부를 마감한다. 복식부기 시스템은 현금 수입?지출중심의 단식부기와 비교해 다소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세기에 파치올리가 처음 복식부기를 만든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마태복음 20:21-22>에 “5달란트 받은 자가 5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 내게 5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5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 하였다.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관리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음호는 자금수지계산서와 운영성과표에 대해 설명을 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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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시사칼럼] 장로의 죽음
    지난 4월 9일 전 경남기업 회장이자 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성완종 씨(63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한 심경이었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탄탄대로를 달려가던 인생이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말처럼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고 하는 괴물을 만나 좌초하고 만 셈이니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가 새삼스럽습니다. 이번 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고인이 서산에 있는 한 감리교회의 장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장로는 장로 교회의 꽃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교파를 초월해 장로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장로는 가히 한국 교회의 꽃이라 할 만합니다. 그만큼 장로의 일거수일투족은 교계와 세상에 미치는 파급력이 엄청납니다. 가뜩이나 개신교가 사회적인 신뢰와 대중적인 존경을 잃어가고 있는 마당에, 이번 비사(悲事)가 우리에게 더욱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장로 직제를 만든 이는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요, 장로 교회를 실질적으로 조직한 이는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장로는 모세 시대부터 등장하는(출 3:16; 레 4:15; 민 11:16; 신 5:23 등) 성경적 개념입니다. 다분히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장로와 달리 원어(原語)로 구약의 ‘자켄’이나 신약의 ‘프레스뷔테로스’는 모두 ‘공경할만한 노인 혹은 연장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본래 성경적 의미의 장로는 백성들 혹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연륜과 지혜와 말씀으로 잘 돌보고 섬기는 직분이라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장로의 정치적 성격과 목회적 성격 양자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고 있을까요? 칼빈과 낙스 시대의 장로는 군주(君主)에 대립하는 시민 대표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기점으로 절대군주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정치적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기존의 시스템(system)을 고수했고, 그 결과는 여실히 장로교의 몰락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 국제선교통계보고서(IBMR)의 ‘2013년 세계선교통계’에 따르면 전체 기독교 인구 23억 5,500만 명 중 천주교가 12억으로 여전히 최대 교세를 자랑하며, 개신교에서는 영국성공회 9,100만, 침례교 9,000만, 감리교 7,600만 명에 비해 장로교는 1,800만 명으로 전체 기독교인구 대비 0.8%, 전 세계 개신교 인구 중에서도 3.4%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급격히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고(故) 이정석 박사(Vrije Universiteit Ph. D.)는 선교 초창기의 영수(領袖) 제도와 유교의 신분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한국 장로 제도는 급격하게 세속화되었고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2002.4.10. 기독교개혁신보).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장로 제도와 관련해서 세계사적인 그리고 토착적인 이중의 부담과 한계에 직면해 있는 셈입니다. 더군다나 더욱 심각한 점은, 이것이 비단 장로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종의 ‘장로교화’되고 있는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해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장로 본연의 개념과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수임자(受任者)로서 겸손하게 섬기는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도 감히 격동할 수 없는 ‘리워야단(Leviathan)’일지라도(욥 41:10), 주께서는 그 머리를 부수시고(시 74:14) 벌하시며 죽이실 수 있다(사 27:1) 말씀합니다. 회개하는 백성을 괴물처럼 변해버린 현실 앞에 좌초하도록 결코 좌시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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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소강석 칼럼] 푸른 버드나무의 꿈
    봄의 꽃들이 피어난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던 겨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1년 사시사철을 하루도 쉼 없이 달리는 삶이기에 겨울과 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서재에서 창밖을 본 순간 앙상한 버드나무 가지에서 푸른 싹이 터 오르는 것을 보았다. 싹만 나온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가 봄바람 결에 흔들렸다. 그 순간 나의 마음도 흔들렸다. 아니, 하나의 공간, 우주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가녀린 나뭇가지의 흔들림 속에 광활한 우주의 질서와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겨울나무도 생명이 있기에 봄 햇살 아래 새싹을 피운다. 생명은 감출 수 없다. 꿈과 열정은 무엇도 막을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속에서 절박한 꿈의 몸부림을 본다. 허공을 향한 생명의 절규를 듣는다. “나, 여기 살아 있어요. 보세요. 마침내 긴긴 겨울을 견디고 다시 살아나 새싹을 피웠잖아요.” 나도 저 푸른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꿈꿀 수 없을까. 꿈이 잠든 시대다. 겨울 버드나무처럼 말이 없다. 버려진 주검처럼 차갑다. 청년 실업과 자살, 사이코패스 범죄,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성적타락, 이념, 지역, 계층갈등, 경제침체 등 암울한 현실 속에 꿈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메마른 겨울 버드나무처럼 보인다. 겉으로 볼 때는 죽은 나무 같다. 차가운 눈보라에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난 보았다. 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새싹을.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었고, 꺼져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붉은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절망과 상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 속에는 분명 생명의 씨앗이 있다. 희망의 노래가 숨겨져 있다. 푸른 버드나무는 차가운 새벽바람과 이슬을 맞으면서도 끝끝내 새싹을 피워 올리지 않는가. 창가로 다가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를 바라본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낸 버드나무…. 그건 춥고 가난하고 외로웠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었다.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아주 오래된 반가운 벗이 찾아온 것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버드나무가 내 삶을 투사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덧 나는 혼자 이렇게 고백하였다. “버드나무야, 살아줘서 고맙다. 네가 겨울을 이기고 살아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거야. 겨울 끝에서 피어나는 너의 절박한 꿈이 많은 사람들을 살려 낼 거야. 봄날을 향해 달려가는 너의 희망과 생명의 질주가 겨울 들판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다시 심장이 뛰게 할 거야. 푸른 버드나무야, 넌 겨울은 봄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편의 시가 되었구나.” 우리의 새로운 삶, 제2막의 인생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불행한 상황 앞에 절망하지 말고 내 안에 숨겨진 역동적 희망, 꿈의 푸른 에너지를 펌프질해보면 어떨까. 내 안에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생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푸른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처럼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손짓하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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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성서연구] 가나안보다 중요한 것(출애굽기 5장 1-3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에게 단 한 번도 자신들이 가나안에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히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이들은 가나안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광야로 가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이 강조한 것은 자신들이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했고, 이것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모세와 아론에게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라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는 것, 제사를 드리는 것,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광야로 사흘 길 쯤 가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머물던 고센에서 가나안까지는 가장 빠른 길로 가도 열 하룻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길쯤 가서 절기를 지키겠다는 것은 광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광야든, 가나안이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다는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부록인 <소요리문답> 제 1문항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것이며, 그 분이 계심으로 인해 한없이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가 광야에 있든지, 가나안에 있든지, 그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간과합니다. 그리하여 출애굽의 목적에 대해 오해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출애굽시킨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게 하는 도구였을 뿐,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자유가 목적이 되면 방종으로 흘러 범죄하게 될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마음대로 하여 범죄한 것이 그 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출애굽의 목적을 <가나안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도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땅에서 얻은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가나안이라는 땅을 목적으로 여기면 기복적 물신주의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든지, 가나안에 있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그들의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면 거기가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가나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다면, 거기가 멸망의 장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면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가나안처럼 모든 조건이 좋지 못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어도,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면 그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풍족해도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높이고 경배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해도, 병들었어도, 어려운 환경에 있어도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도록 힘쓰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그에게는 광야도 가나안이 될 것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을 높이는 행복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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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건강은 건강할 때에 챙겨야
    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과 검진이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 필자가 지난 3월 4일 복음병원에 입원했다. 다음 날 위,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기 위해서 였다. 저는 내시경 검사를 비롯해 각종 검진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다. 입원실이 2인실인데 들어가 보니 이미 한 사람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서로 인사말을 교환하고 어디가 어떠하길래 입원하셨냐고 물으니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받기 위해 이 병원에 왔다는 것이었다. 초면인데도 시원시원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열심히 하는 분인데 나이가 44세였다. 얼마 전부터 속이 쓰리기에 병원에 갔더니 위궤양 같다며 약을 주기에 먹었으나 효험이 없어 큰 병원에 가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니 위암인데 초기가 아니고 위를 절반 이상 절제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수술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나 있는 이 병원에 수술 받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암환자 같은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음식도 잘 먹고 환자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에는 암이 그토록 퍼져 있었다. 제가 왜 이같은 얘기를 하는가. 위, 대장내시경 검사 등 건강검진은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나면 그때 할 것이 아니라 아무 증상도 없고 건강하다고 생각되는 때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이 뭔가. 내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검진 결과 건강하면 다행이고 악성종양이 발견되면 더 다행 아닌가. 왜냐하면 아직 초기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은 종양은 내시경 시술로써 간단히 제거하고 만다. 필자가 금번에 절실히 느낀 것은 젊다고 안심하지 말고 40대라도 정기적으로 각종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에 이상이 있다고 느낌이 있어 진찰을 받으면 암인 경우는 이미 때가 늦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모두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대로 무서운 병은 대부분 상당히 심해질 때까지는 아무 증상을 못 느낀다. 각종 암이 그렇다. 당뇨병이 그렇고 고혈압도 그렇다. 아프지 않다. 이런 질환은 모두 ‘조용한 살인자’이다. 그러므로 내 몸에 전혀 자각 증세가 없어도 검진을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나 건강이상으로 소중한 것이 있겠는가. 건강을 잃고 나면 재물도, 명예도, 권력도, 재간도, 업적도 모두 아무 소용이 없게된다. 첫째가 건강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반드시 건강할 때에 챙겨야 한다. 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이고 정기 검진이다. 이 한마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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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목회자 칼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존경하는 김북경 목사(런던한인교회 원로)로부터 온 E-메일에 첨부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의 연설문’의 내용이 참으로 감동적이여서 함께 나누길 원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우루과이 대통령(81세)의 연설문은 감동적이다. 발전과 행복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이런 연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아래 연설문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진 남미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까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 2010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지난 2월 말 퇴임했다. 그는 집권기간 중 대통령 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어주고, 대통령 월급 1,300만원 중 90%를 빈민주택기금으로 기부했다. 차는 28년째 타고 다니는 폭스바겐 비틀. 대통령 경호원은 2명, 집은 33년째 살고 있는 우루과이 전통가옥이다. 그의 집권 이후 우루과이는 매년 5.5%대의 경제 성장률을 이뤘고 국민소득 1만5천불, 국민 65%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호세 무히까 대통령의 연설문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의문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후 내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왔습니다. 과연 우리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현재 잘살고 있는 여러 나라의 발전과 소비 모델을 흉내 내자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독일 가정에서 보유한 자동차와 같은 수의 차를 인도인이 소유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산소가 어느 정도 남을까요? 더 명확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양의 부유한 사회가 하는 그런 소비 행태를 세계의 70~80억 사람이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원이 지구에 있을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언젠가 우리가 다른 논의를 해야만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문명은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명은 시장 경제와 경쟁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무한의 소비와 발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시장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가 자원을 찾아 세계 곳곳을 다니는 세계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계화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이런 무자비한 경쟁에 바탕을 둔 경제시스템 아래서 우리가 연대나 더불어 살아가자는 논의를 할 수 있나요? 어디까지가 동료이고 어디까지가 경쟁 관계인가요? 우리는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량소비가 세계를 파괴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제 부족한 식견으로 보면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만든 사회 모델인 것 입니다. 그리고 반성해야 할 우리들의 생활방식인 것입니다. 제 동지들인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6시간 노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6시간 노동을 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하고 있어 결국 이전보다 더 오랜 시간 일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오토바이나 자동차 등의 구매에 들어간 할부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돈을 다 갚고 나면 자신이 저처럼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는 노인이 되어 있고, 자신의 인생이 이미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 아닌가 라고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개발이 행복을 가로 막아서는 안됩니다. 개발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만 합니다. 개발은 행복, 지구에 대한 사랑, 인간관계, 아이 돌봄, 친구 사귀기 등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은 바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울 때 우리는 환경 문제의 가장 핵심 가치가 바로 인류의 행복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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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교회법률상식] 헌법개정위원회에 바란다(1)
    - 예배모범의 시벌과 해벌을 권징조례로 옮김은 언어도단 - 시벌과 해벌은 권징재판이 아닌 예배모범의 의식(儀式) 2015년 3월16일 합동 총회 회관에서 헌법개정위원회의 주관으로 헌법 개정을 위한 전문가 초청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간담회의 결과는 별 소득이 없어 보여 아쉬움만 남게 되었다. 1. 예배모범 제16장, 17장을 삭제한 개정안 그 아쉬움 중에 한 가지를 언급하면 모 발제자의 설명 중에 “예배모범에 있는 시벌과 해벌은 권징조례로 옮겨야 한다.”고 하였고, 예배모범 개정 초안에도 역시 예배모범에 “제16장 시벌과 제17장 해벌은 권징조례 편으로 보내는 것이 옳을듯함”이라고 이유를 밝히면서 예배모범에는 삭제되었으나 권징조례 개정 초안에는 추가되지도 않았다. 즉 예배모범 제16장 시벌과 제17장 해벌은 1922년에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 출판한 한국 장로교 최초의 헌법인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필자 : 주 예배모범 제17장 시벌 제18장 해벌)의 pp. 232-243에 110행으로 되어 있고, 현행 헌법에는 1922도 판 헌법과 같은 내용으로 pp. 261-266에 107행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개정위원회가 초안한 개정안에는 예배모범 제16장과 제17장 전체를 아예 삭제해 버렸다는 말이다. 교회의 시벌과 해벌 의식 절차가 없어졌으니 만일 개정안대로 헌법이 개정 시행된다면 시벌과 해벌 의식을 어떻게 시행하려는지 자못 궁금하다. 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 10항”에 “권징”을 두고 있어 법리적으로 정치와 권징과 예배의식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런데 헌법개정위원회는 예배 의식 안에 기도, 찬송, 성경낭독, 강도, 성찬, 헌금, 축복 등을 두는 것과 같이, “권징” 중에 “시벌과 해벌”은 재판에 속하는 부분이 아니고 의식에 속하는 부분이므로 예배모범 안에 두고 있는데 왜 예배모범에서 삭제 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2. 일관성 없는 헌법 개정의 원칙 이에 대하여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필자는 이의를 제기하려 하였으나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기에 이제 지면을 통하여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예배모범에 있는 시벌과 해벌은 권징치리회의 재판에 속한 것이 아니고 행정치리회장이 교인들 앞에서 공포하는 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헌법에도 권징조례에 두지 아니하고 예배모범 안에 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헌법 번역판인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헌법 PP. 232-243 참고). 여기에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모 교수의 신도게요, 소 요리문답, 대 요리문답에 관한 발제 중 “조문의 내용과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성경을 인용한 그 성경을 바꾸거나 삭제할 수 있느냐?”는 의제가 나왔을 때, “원문에 인용한 성경은 절대로 바꿀 수 없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위원회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정치에 관하여 발제를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헌법에 어긋난 개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헌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현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 과감하게 바꾸어야 한다.”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법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도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교회 헌법 개정에 관련하여 교리 편은 개정이라기보다는 새로 번역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교리 편과 함께 관리 편인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도 다같이 1643.7.1.부터 1649.1.22.까지 5년 6개월 22일 동안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1,064회나 회집하여 제정한 똑같은 웨스트민스터 헌법이다. 이 헌법을 한국 장로교회는 1915년부터 1921년까지(제4회 총회록 P.32, 제6회 총회록 PP.18-19 참고) 9인 위원(마삼열, 양전백, 원두우, 김필수, 김선두, 곽안련, 함태영, 배유지, 남궁혁)에게 위탁하여 장장 6년간 교리 편과 관리 편을 함께 번역하여 출판한 것이 조선예수교장로회 1922년도 판 초유의 헌법이다. 그런데 똑같은 웨스트민스터 헌법 조문 중에 “어떤 조문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조문은 과감하게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요, 이율배반이다. 즉 어떤 것은 보수를 주장하면서 예배모범의 시벌과 해벌은 총 13페이지의 107행을 전부 삭제해 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개정안 예배모범에 제16장 시벌과 제17장 해벌을 삭제해 놓고는 개정안 권징조례 제33조 (시벌 및 해벌)에는 “시벌과 해벌은 헌법 예배모범 제16장 제17장의 규정대로 … 행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개정위원회의 개정안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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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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