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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법을 준수하는 사회
    아이들을 기르다 보니 익숙해진 단어 중 하나가 ‘성장통(成長痛)’입니다. 특히 야외활동이 많았던 날이면 어김없이 다리가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 호소하는 딸들에게 아내는 슬기롭게도 ‘그건 성장통(growing pains) 때문이야’라고 말해주곤 했습니다. 아픈 원인을 제시해 주었을 뿐 아니라, 조금 만 참으면 그 대신 키 큰다는 믿음은 실로 대단한 효능을 발휘하곤 했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앓고 있는 여러 가지 병리적(病理的) 현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얘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불과 100여 년 만에 ‘조선(朝鮮)’에서 ‘IoT 강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은 그 대신 일종의 아노미(anomie) 현상을 겪으면서 상식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몰상식(沒常識)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조금만 조심하고 조금만 용인하면 될 층간소음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내 차를 앞질러 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폭행과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호기심으로 구입한 파라니아(piranha)를 무단 방류하는 행위가 연일 신문지면을 뒤덮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경기도의 한 교회가 표어 중 하나를 ‘상식이 통하는 교회’로 정했겠습니까? 그 자체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하나의 반증(反證)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하셨으니, 이제부터라도 성도들은 먼저 상식이 통하는 삶을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상식이 통용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둘째,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느 집단 어느 사회에나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원칙(principle)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원칙이 파괴되는 경우 사회는 큰 혼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쌍방 진지한 합의로 도달한 약속은 으레 지켜지리라 믿는 신뢰가 여기 속합니다. 정치인들이 선거 과정에서 제시하는 공약(公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라는 사실을 일반 대중들이 눈치 채기 시작하는 순간, 이 사회에서 약속을 향한 신뢰는 이미 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1997년 당시 미국을 강타했던 소위 ‘르윈스키(Lewinsky) 스캔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이를 일종의 ‘가이드 라인(guide line)’으로 삼기 마련입니다. 윤리적으로 그 정도의 성적 일탈은 사회에서 허용된다는 일종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제시한다는 뜻입니다. 공적 기관이나 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교회가 흔들림이 없다면 그 사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교회들이 절실한 세상입니다. 셋째, ‘법을 준수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합법성뿐만 아니라 정당성까지도 구비한 법이냐 하는 점입니다. 희대의 현자(賢者) 소크라테스(Socrates)는 죽는 순간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플라톤이 쓴 대화편 ‘파에도(Phaedo)’에 잘 나타나 있는데, 도망치라는 크리토(Crito)의 요청을 거절하고, 갚을 빚을 대신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들이켰습니다. 인륜과 정의를 올바로 구현하고 있는 법이라면 마땅히 지키고 준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대한민국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획득하고자 했던 가치가 바로 정당한 법, 정의로운 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다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절차적 정당성이나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 법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의 한국 사회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법을 준수하고 수호하는 일입니다. 여전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이른바 ‘코리안 스타일’로 떼를 쓰고 완력을 써야만 일이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적어도 교회들만이라도 법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 만드는 일에 교회가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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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소강석 칼럼] 꿈에도 상처가 있다
    한번은 거제도로 교역자수련회를 간 적이 있다. 오전엔 세미나를 하고 오후엔 유람선을 타고 외도 관광을 하였다. 그런데 외도로 가는 길에 보니 푸른 남해의 바람이 만들어낸 기암절벽이 한 폭의 유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푸른 파도와 섬의 도시 거제도, 해금강과 십자동굴, 100미터가 넘는 기암절벽은 경외감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롭다. 바람의 손자국, 파도의 거친 부딪침이 최고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기암절벽 끝에 서 있는 낙랑장송의 고고한 자태는 심장이 멎을 듯 벅찬 감동을 주었다. 어찌 금강산에 그런 소나무가 없고,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왜 멋진 나무가 없으랴만. 오히려 바다 한 가운데서 거친 파도와 세찬 해풍 속에서도 기어이 기암절벽에 뿌리를 박고 낙랑장송으로 서 있는 자태는 어느 나무도 따라올 수 없는 절박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것은 위태로운 절경이며 상처 난 꿈의 조각이었다. 맞다. 아, 꿈에도 상처가 있다. 꿈은 화려하고 빛나는 것만 아니다. 조개의 상처에서 흐르는 눈물이 훗날 값진 진주가 된 것처럼 상처가 나야 꿈이 꽃핀다. 모든 꿈에는 상처의 흔적이 있다. 나에게도 상처가 있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무도 부목사로 불러주는 교회가 없어서 교회 개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말이 개척준비이지 거룩한(?) 백수생활을 한다는 것이 한 가정의 가정으로서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시간도 여유가 있고 해서 개척준비의 일환으로 운전면허를 따기로 결심하고 시험을 보았는데 하루 만에 필기와 실기 코스 모두 합격을 하였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운전면허 합격증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자랑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아들을 품에 안고 하는 말이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들아, 너희 아버지가 이제 운전면허를 땄으니 택시운전이라도 해서 너를 굶기지는 않겠구나...” 그 순간 내 자신이 너무나 처량해지고 인생이 서글퍼졌다. 불타는 소명감으로 충만하였던 나에게 아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는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그 말에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아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내가 보란 듯이 이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하리라, 세상의 차별과 불가능의 벽을 넘어 반드시 꿈의 승리를 보여 주리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반드시 나타내 보이리라.”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돈도 없고 학벌도 없고 후원자도 없는 시골 출신의 내가 개척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묘연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평가와 잣대이지 나의 꿈의 판단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꿈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불가능과 편견을 넘어서 기적 같은 교회 부흥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상처가 있었기에 자극이 되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릴 수 있었다. 꿈을 생각하면, 해금강의 기암절벽이 떠오른다. 천년의 바람과 파도가 스치고 간 그 상처가 눈에 선하다. 꿈에는 상처가 있다. 마치 해금강 절벽에 서 있었던 낙랑장송이 바위틈에 피어난 난초들과 더불어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나를 보시오. 수천 년, 수만 년 해풍에 깎이고 다듬어지며 기암절벽을 만들었지 않소.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의 고독을 누가 알아주겠소. 꿈에도 상처가 있다오. 아니, 그 잔인한 상처를 견딘 자만이 위대한 꿈의 조각을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거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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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성서연구] 모세를 극복하고(여호수아 1장 1-4절)
    얼마 전 2015년도 여자월드컵 예선에서 우리 국가대표팀이 스페인을 이겨 사상 첫 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날 전반전은 우리 팀은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고, 결국 한 골을 내준 상태에서 전반전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후반전이 되자 우리 팀은 전혀 다른 팀처럼 보였습니다. 수비 라인은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았고, 공격진에게 활발한 볼 배급을 해 주었습니다. 결국 후반에 두 골을 넣어 드라마처럼 짜릿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후에 윤덕여 감독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하프 타임에 선수들에게 밀고 올라가도록 주문한 것이 주효했다고 했습니다.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잠깐 쉬던 바로 그 시간에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2015년도의 하프타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반기 여섯 달을 보내고 후반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코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2015년도의 후반전을 어떻게 뛰어야 할 것인지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매우 적합한 가르침을 줍니다. 본문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프타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전반전은 사백 삼십 년 동안 살던 애굽에서 벗어나 광야까지 가는 과정이었고, 당시 주장 선수는 모세였습니다. 그들의 후반전은 광야에서 출발하여 가나안을 얻는 과정이었고, 그 주장 선수는 여호수아였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은 모압 평지에 있었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얻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백성들은 매우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반전에 자신들을 이끌었던 주장 선수인 모세가 후반전에 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낙심했습니다. 사실 백성들에게 모세는 거의 하나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 얼마 동안 보이지 않았을 때 백성들은 금방 혼란에 빠져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 정도로 모세는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신명기 34장에 보면 모세가 죽은 후에 그의 무덤을 모른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애굽의 무덤 문화에 익숙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 노예로서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죽은 후 그들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했다면 그들은 모세를 숭배하느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잊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무덤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모세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대한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후반전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 과거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2절에서 <내 종 모세>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모세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후반전을 시작하려면 과거를 극복해야 합니다. 과거가 아무리 영광스럽더라도 극복해야 합니다. 그 영광은 교만으로 남아 우리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과거가 수치스럽더라도 극복해야 합니다. 그 수치 역시 열등감으로 남아 우리를 힘들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란 소중히 기억하고 미래로 전진하는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집착할 대상은 아닙니다. 과거의 올무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를 극복합시다. 우리 안의 모세를 극복합시다. 영광스러운 과거이든 부끄러운 과거이든 모두 내려놓읍시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얻었다 함도 아니고,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잡은 줄로 여기지도 않고, 뒤에 있는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부름의 상을 위해, 즉 미래를 위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과거를 다 내려놓고 후반전에 출전하길 바랍니다. 죄가 있었다면 십자가 보혈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자랑스러운 성취가 있었다 해도 다 잊으십시오. 그리고 2015년도 후반기라는 백지 위에 마치 처음 시작하듯 아름다운 삶의 그림을 그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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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 (2)
    한국이 대단한 나라로 발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아니할 수 없어 IQ(지능지수)가 한국인이 세계 1위이다. 스위스 취리히대학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IQ가 한국이 1위이고 일본이 2위, 대만이 3위, 싱가폴이 4위, 5위가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이태리 등이다. 1960년대까지는 가장 우수한 두뇌를 가진 민족으로 유태인을 꼽았으나 지금은 다르다. 어떤 이는 홍콩이 세계 1위라고 하지만 홍콩은 국가가 아니고 일개 도시아닌가. 국가별로는 한국이 1위이다. 대한민국은 두뇌부터 자랑스럽다. 한국의 의술을 생각해 보라. 과거에는 한국의 의사들이 미국에 가서 간 이식수술 연수를 받아 왔는데 지금은 미국 교수와 의료진이 한국에 와서 간 이식수술 연수를 받고 있다. 연수를 받던 나라에서 연수해 주는 나라로 바뀐 것이다. 한국의 병원들이 각종 암 수술 성적에서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 갑자기 병원에 가야할 경우 아무데나 가지 않고 지정돼 있는 병원으로 가는데 아시아 순방 중에는 삼성서울병원으로 오도록 되어있다. 한국의 의술이 이만큼 인정받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또 이걸 보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는 높이 150층 건물을 오르는데 불과 52초 밖에 안걸린다. 일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비하면 10배 정도 빠른 속도이다. 이 고속 엘리베이터를 한국의 기업 현대가 만들지 않았는가. 오랫동안 세계 엘리베이터계를 주름잡던 일본 미쯔비시를 드디어 제쳤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또 한국이 디지털 X-선을 개발한 것을 생각해 보라. 지금은 필름으로 찍은 X-선은 어디서도 사용하지 않는다. 의사들이 X-선 필름을 들고 이리저리 다니지 않고 각기 갖고 있는 PC모니터를 통해 맘대로 빼서 본다. 이 놀라운 것을 누가 개발했는가. 우리나라 중외메디칼이 개발하여 유럽연합CF의 인증을 받아 냈다. 지금은 온세계 모든 병원에서 한국이 개발한 이걸 사용하고 있다. 누구나 병원에 가면 이 디지털 X-선을 찍으면서도 이것을 우리 한국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는 걸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알고보면 우리 대한민국 대단한 나라이고 자랑스런 나라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이 어떻게 이 같은 나라로 발전했는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시편 127편을 보면 뭐든지 하나님이 되게 해 주셔야지,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안된다고 말씀했다. 단적인 예로 북한은 남한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저토록 어려운 처지에 있지 않은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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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목회자 칼럼] 은혜로운 임직식
    지난 주일 임직감사예배를 은혜 가운데 마침을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본 교회 중심으로 드리고 싶다는 임직자들의 청을 받아들여 주일에 갖게 되었지만 원근각처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본당을 가득 메웠다. 1시간 반에 걸친 임직감사예배! 시종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었다. 특히 장로로 임직 받은 김상철 장로, 하 진 장로의 간증적인 답사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말이 있다. “지도자는 되기 쉬어도,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가족 같은 공동체여서인지 교회 지도자로 선출받기가 쉽지 않다. 어제의 임직식은 장로는 5년 만에, 권사는 8년 만에, 안수집사는 9년 만이다. 모처럼의 지도자 배출인지라 그만큼 교회의 기쁨은 컸고 잔치 분위기였다. 어제 임직받은 분들에게 남겨진 과제가 있다. 그것은 8명의 임직자들이 존경받는 지도자로 꾸준히 성장하며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임직식을 앞두고 지난 한달 동안 기도해 온 기도제목은, “존경받는 지도자-온유, 겸손, 섬김,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화목한 가정-부부, 자녀, 부모, 형제, 생업의 축복을 주옵소서”. 어제 주일오전의 설교제목은, ‘좋은 교회지도자가 되려면...’(눅9:57~62)이었다. 임직 받는 분들만 아니라 이미 지도자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담임목사인 나 자신을 비롯하여 동역 목회자들,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목자, 교사, 찬양대원,... 모두를 위한 설교였다. 설교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좋은 교회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 구원의 은혜, 받은 은혜들을 잊지 말자. 구원의 은혜와 받은 은혜들을 머리로 만나고, 가슴으로 체험하는 사람은 늘 감사, 감격, 빚진 마음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공로와 의를 하나님께 돌리고,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돌린다. 교회직분을 계급, 훈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 겸손히 섬기는 기회로 받아 들인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둘, 예수님이 중시하신 세가지에 유념하자.(눅9:57~62)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주님에게 세 사람이 찾아왔다. 12제자처럼 주님의 최측근이 되기 위해서, 오늘로 말하면 교회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가 면접시험에서 탈락했다. 그 까닭은? 1. 주님은 동기를 중시하신다.(57~58절)주님은 첫 번째 사람에게서 불순한 동기를 보셨다. “나 예수는 머리 둘 곳도, 잠 잘 곳도 없는 무주택자, 무소유자인데 그런 나를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고?”. 그렇다. 무슨 목적에서 목사, 선교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직을 사모하는가에 대한 도전이다. 2. 주님은 우선순위를 중시하신다.(59~60절)두 번째 사람에게서 우선순위에 실패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셨다. “무엇이 우선인가? 무엇이 중요한가?”,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는 것이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 주님은 일편단심을 중시하신다.(61~63절) 세 번째 사람에게서 주님과 가족, 그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셨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도다”. 그렇다. 직분을 맡은 자의 기본적 자세는 “두마음/나뉘어진 마음이 아닌, 일편단심/한마음이다”(Not a double-mind, but a single-mind) 성도들의 사랑, 신뢰, 존경받는 좋은 교회지도자 되기를 힘쓰면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날로 아름답고, 은혜롭고, 화목하고, 건강하고, 그래서 권세 있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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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6
  • [성공칼럼] 무엇이 당연한가?
    내 외부 환경은 모두 내 속 사람의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겪을 때는 두려움 속에서 환경을 탓하거나 원망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나와서 수르광야에서 사흘 길을 걷게 된다. 즉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걸으면서 물을 찾지 못하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마라’라는 지역에 이르러 샘물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나오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두려움과 원망과 탓일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당연히 나와야 하는 것은 원망하고 탓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 때문에 이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땅에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메르스라는 바이러스 앞에서 어떤 사람은 손을 자주 씻고, 어떤 사람은 비타민 C를 먹고, 어떤 사람은 메르스를 해결하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수고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많이 두려워하고 있다. 사실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은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나 메르스에 전염되면 원망하고 탓하고 욕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메르스로 인해 고통당하고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더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이러스를 해결하기 위해 원인을 찾아올라가 보면 그 근원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지배욕과 소유욕과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순서에 따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가장 위에 사랑과 선, 그 다음에 소유욕, 가장 밑에 자기지배욕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서 돈과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가장 위에 지배욕이 있고, 그 가운데 소유욕이 있고 맨 밑에 사랑과 선에 대한 원함이 있는 사람은 지배력을 갖고 사랑과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발로 밟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나 누구든지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려는 중심이 있을 때 함께 살 수 있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심에 자신의 의도가 있거나 의도는 좋다하더라도 거짓과 악을 행하면 결국에는 상대방을 이용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짓밟는 것이 되어버려서 삶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12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오랫동안 교회의 사택에서 생활하다가 날개영성하우스를 지으면서 아이들의 학교 가까운 곳에 처음으로 전셋집을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 그 집이 은행에 근저당이 되어있는 일명 깡통 집이었다. 집 주인의 의도적인 사기에 전세금의 절반을 날리고 몇 달 후 집을 비워주어야 했다. 우리 가족 다섯 명은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자연스럽게 나오겠는가? 집 주인에 대한 원망이나 스스로의 무지함에 대한 한탄이 당연한가? 나는 가진 돈이 없어서 절망스럽고 무서웠지만 집을 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으로 두었다. 그리고 집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내 속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우선 돈이 되는 것은 다 구했다. 부모님과 아는 사람에게 빌리고 적금을 해약하고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고 이번에 전세가 아닌 집을 사게 되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빚을 다 갚고 편안히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사람의 진짜 모습은 마지막 때 나타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때,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가슴 철렁한 문제가 생겼을 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부사이에도 돈이 없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고 이혼을 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돈이 없기 때문에 더 행복하고 사랑하는 부부도 있는 것이다. 오늘 당신은 많은 사건을 만날텐데 무엇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화내고 원망하는 것이 당연한가? 아니면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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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6
  • [은혜의 말씀] 신언서판의 신앙(눅 2:49~52)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유일한 기록으로 12살 때 유월절 절기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여기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긴 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 없는 예배를 드리고 예수님 없이, 정신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신언서판(身言書判)의 네 가지 신앙을 살펴보려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을 평가할 때 몸 신(身), 말씀 언(言), 글 서(書), 판단할 판(判) 이 네 가지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먼저 몸 신(身).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중요하지만 영혼은 육체에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 말씀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바로 우리 몸이라고 합니다. 천하 없는 사람도 몸이 아프면 다 부질없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형통한 복을 받아야 되지만 그중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우리 몸에 대한 관리입니다. 우리 몸가짐이 반듯해야합니다. 웬만한 것은 우리가 다 몸으로 합니다. 몸으로 효도하고, 몸으로 돈 벌려 직장 다니고, 몸으로 예배드립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 말씀에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가 말씀 언(言).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은 말투가 공손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또 로마서 10장 10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알갱이가 마알, 말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 생각이 그대로 튀어나오는 것이 말이기 때문에 생각을 조심하고, 생각의 첫 단추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글 서(書). 칼보다 펜이 강하다고 합니다. 필력. 한국 사람은 행동을 앞서는데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약하다고 합니다.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기도수첩에 기도제목을 적고, 전도수첩에 전도대상자를 적어보세요. 적어놓고 보면 부담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 어려운 가운데도 난중일기를 적었고, 다윗은 그 힘든 가운데서도 시련을 기록했고, 바울은 힘든 겨울 길 과정에서도 편지를 많이 적었잖아요.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기록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판단할 판(判). 판단력입니다.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하다고 어떤 일을 당해도 복잡한 일을 쉽게 처리하는 사람이 있고, 어려운 일 가운데 오히려 감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은 모든 것을 자기가 선택하고 판단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모든 것은 내가 판단하는데 오판을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 신언서판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과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입만 열면 내속에 거친 모습이 정제되지 않고 쏟아지고 급한 성질이 드러나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통해 신언서판의 신앙의 모습을 나누는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첫째는 세월이 필요합니다. 춘하추동을 지나면서 변화되고 성숙되고 숙성되고 발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땀 흘림이 있어야 성공이 있고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응답이 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 흘려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셋째는 빙산의 원리로 보는 겁니다. 신언서판의 신앙을 내가 진단을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랜 세월 속에서 내가 지금 못된 습관이 들고 내 몸에 돌이 쌓였는지, 덕이 쌓였는지 진단해보며 날마다 예배할 때마다 새로워져야 되는 겁니다. 또 오늘 말씀가운데 2장 52절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작년보다 금년의 마음이 더 따뜻하십니까? 작년보다 더 철든 모습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이 자라가야 됩니다. 변화와 성장과 성숙이 되어야 됩니다. 옛날 어른들이 신언서판을 통해, 언행심사를 통해서 ‘저사람 반듯하구나’라고 했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잡동사니가 아니라 신언서판을 통해 ‘ 저사람 믿음이 반듯하구나’해야 합니다. 신언서판의 변화가 결국은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카리스마가 되고 아우라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예수님 향기가 진동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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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6
  • [가정칼럼] 실버문화가 바뀌고 있다.
    노후의 생활양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자식농사가 최고의 노후설계]라는 얘기가 옛말이 된 대신 능력 있을 때 저축을 하고 은퇴 후에는 부부끼리 지내는 새로운 노후설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제2의 청춘을 즐기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무덤에 갈 때까지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노령 층에 확산되고 있는 것. 사업자금을 대 주거나 집을 사 주려고 자식에게 일찌감치 재산을 넘겨줬다가 최소한의 노후생활 기반마저 잃어버리고 후회하는 노인들이 늘면서 상속은 최대한 늦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가고 있다. [내 돈이 자식 돈이고 자식 돈이 내 돈]이라는 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퇴직금을 받기 보다는 연금생활을 하면서 자식과 따로 살겠다는 것이 50, 60대의 지배적인 생각이고 노후를 대비해 국민연금이나 노후보장보험 등에 가입하는 40, 50대도 크게 늘었다. 1. 독립선언을 해라. '내 나이 예순 다섯, 이제 내 맘대로 살 때도 됐지.' 진즉에 남편과 자식에게서 독립선언을 했어야 하는데 후회가 돼.'라는 분들이 많다. 노년의 삶은 부록이 아니다. 노년의 삶은 새로운 준비의 시기다. 그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발목을 잡으면 한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해 주는 부역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부모에게도 일종의 책임이 있다. 희생만이 능사가 아니다. 노년은 할 일이 없는 방학기간이 아니다. 자녀들에게 자녀들의 삶이 있듯 내게도 내 인생의 있음을 말해라. <엄마가 뿔났다>(KBS II)에서 김혜자는 당당히 안식휴가를 받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인생의 주권선언(?)이 필요하다. 2. 부부의 사랑에도 공짜는 없다 좋지 않았던 부부 사이가 나이 들었다고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지는 법은 없다. 먹고사느라고, 아이들 기르느라고 소진된 사랑의 에너지를 보충해야 할 때다. 공짜 밥은 없다. 자식중심에서 부부중심으로 빨리 전환해야 노년이 복되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매달리다 보면 부부관계는 또 뒷전으로 밀려난다. 서먹서먹한 부부관계가 자식들에게 좋은 유산일 수 없다. 로맨스 그레이란 말이 있잖은가 말이다. 분홍빛 데이트도 즐겨라. 실제 로멘스 그레이가 노화를 늦춘다. 3. 사는 재미를 찾아라. ‘고전무용도 하고 합창단, 산악회까지 하느라 아주 바빠 죽겠어.’ ‘그래도 이렇게 다니니까 생기가 있어서 좋아.’ 한결같이 그들이 말한다. ‘사는 게 이렇게 재밌다는 걸 애들 키울 때는 몰랐어.’ 사는 재미는 많다. 찾아 다녀라. "윗세대만 해도 사람들 시선 때문에 놀 수도, 놀데도 없어서 몰래 무도장 같은 데 가고 그랬지. 지금은 그렇지 않아. 뭐든 배우면서 놀고 싶어. 배우는 게 그렇게 재밌어. 욕심이 생겨. 따라잡기 어렵지만 그래도 남는 게 있는 것 같아. 건강만 따라준다면 꾸준히 배우고 즐기면서 나를 위해 살고 싶어." 얼마나 흥미 있는 고백인가 말이다. 노화를 늦추기 위한 행동전략에는 이런 것도 있다. 가족 등 제한된 인간관계를 피하라. 즐길 수 있는 놀이 활동을 찾아라. 호기심 새로운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라. 새로운 집단 활동에 가입하라. 공부, 창조적인 사고들을 지속하라. 실버문화, 내가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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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6
  • [시사칼럼] 찰스톤의 용서
    한국의 젊은 선교사가 아프리카 한 부족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먼저 그 마을 족장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족장님,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낙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족장이 잘라 말했습니다. “소용없소!” 한국의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왜요? 어째서 소용없다는 거죠?” 그러자 족장 왈,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미국 사람들이 벌써 다 점령해버렸을 거요!”(『유머 복음』) 지난 6월 17일 밤, 미국 동남부 사우스캐롤라니아 주 찰스톤(Charlston) 소재 이매뉴얼아프리칸감리교회(Emanuel AME Church)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던 9명의 기독교인들이 총기 난사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클레멘타 핑크니(Clementa Pinckeny) 담임목사를 비롯해 87세, 70세의 사촌자매, 20대의 대학생 등 수요일에도 교회를 나올 정도로 신실한 교인들이었습니다. 검거된 범인은 뜻밖에도 딜런 루프(Dylann Roof)라는 앳된 청년이었는데(21세), 조사 결과 심각한 백인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원래 이곳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이용해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경영하던 남북전쟁 당시 대표적인 ‘남부’ 지방으로, 아직도 주 의회 등 몇몇 공공장소에 당시 노예제도를 찬성하던 13개 주의 연합을 상징하는 ‘남부연합기(The Confederate Battle Flag)’를 사용하고 있다 하니, 21세기의 젊은이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젖은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습니다. 한편 이 지역을 바이블벨트(Bible Belt)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주로 미국 내 앵글로 아메리칸 계열의 보수주의 기독교 세력권을 의미하지만, 핍박과 설움 속에서 노예 해방과 인권 운동을 주도하며 풀뿌리처럼 자란 아프리칸 아메리칸 교회들을 포함해야 더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이 두 세력은 오랜 세월 동안 반목과 질시만을 거듭해 왔을 뿐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참사로 예수 안에서 연합 운동(‘Charlestonunited’)이 펼쳐지고 있으며, 나아가 미국 전체를 용서와 치유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법률의 관례에 따라 열린 루프의 보석재판법정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날 화상대화를 통해 피해자 가족들은 루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생자 에델 랜스(Ethel Lance, 70세)의 딸 나딘 콜리어(Nadine Collier)의 목소리입니다. “다시는 어머니를 안을 수 없지만 당신을 용서한다. 그리고 당신 영혼에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 당신은 나를, 또한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신다. 그래서 나도 당신을 용서한다(God forgives you, and I forgive you).” 총기 사고의 생존자인 동시에 숨진 티완자 샌더스(Tywanza Sanders, 26세)의 어머니인 팰리시아 샌더스(Felicia Sander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수요일 밤 성경공부 시간에 너를 두 손 벌려 환영했다. 하지만 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 중 몇을 죽였다. 내 몸 살점 하나하나가 다 아프다(Every fiber in my body hurts). 티완자는 내 아들이었고, 내 영웅이었다. 하지만 성경공부 시간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너를 즐거워했다(As we say in the Bible study, we enjoyed you). 하나님께서 네게 자비를 베푸시기를(may God have mercy on you)..”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할지니라”(마 18:21~22). 오 주여,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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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6
  • [서임중 칼럼] 유언비어(流言蜚語)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후 그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삶의 자리를 불편하고 좌절케 한 것이 유언비어였다. 천안함 사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광우병 소고기 파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유언비어로 국민생활이 불안하고 불편스러웠다. 지나고 나면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결과에 허탈감에 고소(苦笑)를 금치 못한다. 메르스 질병이 확산되면서 가장 화가 나고 불편스러운 것이 역시 유언비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는 내용이 연일 뉴스에 보도가 되고 경찰에서는 철저하게 유언비어 단속을 한다고 으름장을 놓지만, 국민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유언비어는 메르스 질병보다 그 확산 속도가 더 빠르고 멈추지 않는다. 유언비어는 근거가 부족한 상태로 소문에 의하여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람들 사이에 연쇄 반응적으로 퍼지는, 말 그대로 유언(流言)이고 비어(蜚語)다. 그 전달경로가 일정하지 않고 내용도 당면의 상황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지만 보통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유언비어다. 허위제보와 유언비어는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지만 허위제보는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으로 유언비어와는 구별이 된다. G. W. 알포트와 L. 포스트만은 유언비어 전달의 강도는 그 내용의 중요성과 모호한 상황의 곱에 비례한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질병 확산 같은 정치적 혼란과 재해적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불만이 팽배할 때, 유언비어의 영향을 받기 쉽다. 그리고 그것은 불평과 불만을 어떤 대상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파괴적 의도로 만들어진다. 특히 괴담이나 악담 같은 경우는 빠르게 전파되어 그것이 하나의 설(說)이 되면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혼란에 처하게 된다. 명심보감에 ‘經目之事 恐未皆眞 背後之言 豈足深信’(경목지사 공미개진 배후지언 기족심신)이란 말이 있다. ‘눈으로 직접 본 일도 참된 일일까 하고 두려워하는데, 등 뒤에서 하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하다. 그럴듯한 유언비어에 마음을 도적질 당하면서도 자신의 인격과 삶이 손상당하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유언비어는 언어폭력이 되고 인격말살의 죄악이다. 그런 말을 날조하고 조작하여 퍼뜨리는 것을 쾌감으로 느끼는 마음은 이미 지옥이다. 양심이 화인 맞고 인격이 부서진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인격과 도덕적 가치가 확립된 사람은 그와 같이 확인도 안 된 것을 사실인양 퍼뜨리는 말을 믿고 함께 춤을 추지 않는다. 한 때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식품을 수입한다는 등의 괴담이 인터넷과 SNS 등으로 급속히 확산돼 국민 불안이 커지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때도 있었다. 소고기 파동을 겪었고, 천안함 사건을 겪었고, 세월호 사고를 겪었고, 지금은 메르스 질병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민정서가 카오스현상이다. 이 상황에 메르스 질병과 관련된 유언비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다. 유언비어가 확산되는 곳은 언제나 진실이 어둠속에서 신음을 한다. 그 사이에 유언비어는 거리를 활보한다. ‘카더라’와 ‘찌라시’에 마음을 도적질 당하면서 스스로 유언비어에 동화(同化) 되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벌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나고 나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이 없지만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현실에 동류(同流)되어 간다. 한(漢)나라 때 성품이 곧고 너그러운 직불의(直不疑)란 사람이 있었다. 직불의가 시종으로 문제(기원전 180~157)를 섬길 때의 일이다. 함께 살고 있는 동료 한 사람이 휴가로 고향에 갈 때 잘못해서 동료의 금을 가지고 가버렸다. 주인은 자기의 금이 없어진 것을 알고 직불의가 훔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다. 그 사실을 안 직불의는 훔친 것은 틀림없이 자기라고 말하고는 사죄하며 금을 사서 반환해 놓았다. 그런 얼마 뒤에 동료가 고향에서 돌아와 잘못 가져간 금을 반환시켰다. 직불의를 의심했던 주인은 자기의 경솔함을 부끄러워했다. 그 뒤부터 직불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평판이 돌았다. 그 일 때문에 문제의 눈에 들어 태중대부(궁궐의 고문)까지 승진하게 됐다. 그 무렵의 일이다. 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사람이 그를 모함했다. “직불의는 공무 처리가 뛰어나고 모습이 준수하지만 흠이 있습니다. 그가 그의 형수와 간통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시지요?”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직불의를 아끼는 한 사람이 직불의를 찾아가 시중에 나도는 소문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직불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개의치 않았다. 직불의를 모함하고 폄훼하는 유언비어는 세상에 창궐한데 직불의는 여전히 자기소임을 성실히 감당해 나갔다. 나중에야 그 소문이 유언비어였음이 드러났다. 직불의에게는 형(兄)이 없었던 것이다. 금(金)이 변하지 않듯 진실은 영원하고, 진실은 변명하지 않으며, 진실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 이치이다. 다만, 그렇게 진실이 드러나기까지는 온갖 아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겪어야 하지만, 결국 역사는 속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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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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