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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칼럼] 스마트시대, 스나미처럼 몰려오는 중독 문화 정말 막을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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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2]본인은 중독 문화를 죄문화로 정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12장 38절 이하에 예수님 말씀처럼 이악한 세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본인의 책임감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육적인 안목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첫째, 물량 공세로 나타나는 상업주의자들의 집요한 꼼수를 들 수 있다. 광고를 보면 돈을 주는 듯 해 보이는 많은 수많은 애플리케션(이상, 앱이라 호칭)있지만 결국 현질이라는 신종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숨겨져 있다. 공짜는 없다. 결국 공짜인 듯 공짜 아닌 앱은 미성숙하고 절제력이 부족한 우리 자녀들 뿐 아니라 많은 기성세대까지 그들의 현금을 지르도록(일명, 현질) 유혹하는 것이다.
둘째는 과연 중독법안은 가능하며 국회는 법안 상정에 대한 의지가 있을까? 결론만 말하면 본인은 없다고 본다. 한류 문화보다 많은 국가 수익을 내는 게임 산업을 막을 것인가? 게다가 게임이 일상에 미치는 악영향과의 상관관계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들 아우성이다. 또한 이를 빌미로 90%이상의 수많은 네티즌이 중독법안을 반대했다. 재미난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20~30대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일명 pc방 1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임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TV광고와 스마트폰 속에 수많은 광고들을 보라! 게임 광고가 얼마나 많고 일명 미친 듯한 광고들이 득실거리는지를. 일명 이런 광고를 약빤 광고라 부르기도 한다.
셋째는 스마트IT의 발달속도다. 이러한 급속한 발달은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등장하여 유혹할지는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상상에 맡기겠다. 간단한 예로 VR기기를 통한 3D를 넘어선 4D 야동 영상이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기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급속히 늘고 있단다. 연간 새 게임은 50만개가 넘는다.
[조언2]이러한 스마트 중독문화를 통해 다음 세대들은 육적인 필요(Need)를 채우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PC방 폐인이었던 본인은 경험상으로 볼 때 영적인 Need는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천국에 보화를 쌓고 있는 우리는 이 틈새를 끊임없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본인에게는 5명의 자녀들이 있다. 딸3명과 아들2명이다. 내 자녀들은 공중 권세 잡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할 그들이기에, 그들의 앞날을 생각할 때 과연 아비인 나는 어떻게 가르쳐야 좋은 아빠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본인은 내 자녀는 내가 지킨다는 생각에 신앙 교육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바로 가정 내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첫째는 부모를 믿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늘 신앙 교육의 우선순위를 둔다. 이를 위해 힘써 가정 예배에 시간을 들이고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의 안수 기도 시간만큼은 철저히 지키려하며 아빠가 예배 중심을 삶을 살고 있음을 애써 보여 준다. 말씀과 기도만이 그들이 살 길이다. 진리를 알면 그 어떤 중독 문화가 스나미처럼 몰려와 덮칠지도 그들은 이겨 낼 것이다.
둘째는 중독 문화를 하나씩 스스로 알아 갈 때마다 부모는 함께 그것을 재확인하고 문제점을 파악하며 3의 법칙을 통해 환경을 지배하는 자녀로 가르친다. 구체적인 내용은 지면상 생략하겠다. 그러나 부모가 무지하면 결국 내 자녀는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이다.
셋째는 위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하여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력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이다. 성령을 체험한 자는 절제라는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심부름과 공부를 하고 여가를 즐기는 훈련, 여가 중에도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을 구분하는 안목, 주 안에서 비전을 발견하고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사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감과 성실성이 무기가 되어 여가와 중독을 구분할 줄 아는 자녀가 될 수만 있다면 나의 소임을 다한 아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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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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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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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3일. 그날이 지나갔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다. 마음이 감동과 설레임이어야 하는데 왠지 투표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가면 나는 소위 선량(選良)이라면서 온갖 부끄러움을 다 드러낸 그분들보다 더 나을 것 없는 국민의 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가기 싫어도 가야했다. 가야하는 당위성이 바로 주권(主權)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4년 전 2012년 4월 11일 시행되어 5월 30일부터 대한민국 제19대 국회가 출범했었다. 대부분 언론과 국민은 19대 국회를 식물국회로 비아냥거렸다. 세비가 아깝다고 온갖 조소를 다 쏟아낸 4년이었다. 매일처럼 안방에 전달되는 뉴스는 짜증이 나서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이 일수였다.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어느 당이 몇 석을 차지했느냐는 관심도 없었다. 하나 같이 국민을 위한다면서 자기들의 잇속 챙기는 것이 나 같은 바보의 눈에도 보였으니 속된 말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여전히 정치에 관한 뉴스를 관심있게 시청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도 내 자신이 민망스럽다.
특히 올해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공천파동이 유권자들을 짜증나게 했다. 정치(政治)의 이치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자기들이 행하는 것들이 정도(正道)라고 오만과 독선으로 전횡을 행하는 것을 보는 국민의 이맛살이 찌푸려진지 오래다.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어놓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TV 화면에 파안대소하듯 웃으면서 우리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공언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역겨움을 넘어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지금, 멈추어 뒤돌아보면 대한민국 국민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결과가 나타났다. 오만과 독선으로 일관했던 새누리당은 제 1당의 자리를 더불어 민주당에 내어주어야 했고 탄핵보다 더 큰 심판이라는 결과를 맞게 되었고, 더불어 민주당은 수도권에서 대승을 했지만 호남에서는 완패를 하여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고, 호남의 민심은 더불어 민주당이 아니라 국민의당에 전폭적인 지지를 함으로 언론은 절묘한 선택이라고 보도하면서 모든 정당은 이제 국민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의 이치를 깨닫게 했다. 총선의 결과를 보면서 국민을 쉽게 생각한 지금까지의 잘못된 정치지도자들의 관점은 국민 심판의 쓰나미를 맞게 되었으니 이제 정신을 차릴 것인가?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세계 지성인들의 영혼을 흔든 책을 출간했다. 1970년에 Future Shock (미래 충격)을 통해 변화의 과정을, 1980년에 The Third Wave (제3의 물결)을 통해 변화의 방향을, 1990년에 그 유명한 Power shift (권력 이동)을 통해 변화의 통제, 즉 다가올 변화를 누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토플러는 15년의 침묵을 깨고 2005년에 Revolutionary Wealth(부의 미래)를 출간했다. 여기서 주목할 내용이 하나 있다. 성장속도를 자동차 속도 100마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 기업이 100마일, 시민단체80마일, 미국가정 60마일, 노동조합 30마일, 정부관료 조직 25마일, 학교 10마일, 국제기구 5마일, 정치조직 3마일, 법체계 1마일로 비유를 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정치조직과 법체계가 가장 속도가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별로 기대는 안하지만 그래도 20대 국회의원을 선출한 국민들의 마음은 이번만큼은 정치조직과 법체계가 조금은 제 속도를 내기를 바램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는 “신과 악마가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터는 인간의 마음이다”라고 했다. 20대 국회로 들어가는 분들은 웃기 전에 자신들을 선택해 준 국민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선량(選良)이라는 이름을 이름되게 하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 국민들이 4년동안 그분들을 볼 때 이번만큼은 파안대소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선거 때만 되면 국민이 무섭다고 큰절도 하고 회초리를 맞겠다고 온갖 엄살을 떨다가도 끝나면 나라와 국민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행태, 정당정치(政黨政治)의 본래 의미조차도 휴지로 만들어 버리고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면서 사당화(私黨化)로 전락시키고 정치(政治)가 아닌 치정(癡政)을 하는 국회가 되지 않기를 충심으로 기도한다. 그리하여 국민들이 내가 잘못 선택했구나 하면서 가슴 치는 일들을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정당이나 후보의 정치적 수사(修辭)에 또 속았구나 하는 자괴감에 다시 4년을 기다리는 아픔이 없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TV광고의 하나였던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글귀는 백번 맞는 말이다. 그리하여 2016년 4월 13일은 대한민국이 국민 모두가 선택을 잘하였다고 파안대소하는 날로 오래 오래 역사에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인류의 스승, 20세기의 성자, 세계의 양심 ‘간디’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일곱 가지를 갈파 했다. 첫째는 원칙 없는 정치(政治), 둘째는 근로 없는 축재(蓄財), 셋째는 양심 없는 쾌락(快樂), 넷째는 인격 없는 지식(知識), 다섯째는 도의 없는 기업(企業), 여섯째는 인간성 없는 과학(科學), 일곱째는 희생 없는 신앙(信仰)이다. 지난 4월 13일에 우리가 선택한 국회의원은 간디가 말한 것을 기억하면서 그와 반대적인 삶을 실천하고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건설케 하는 삶의 자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지도력이 발휘되도록 우리는 이제 기도하면서 후원해야 한다. 이제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정당정치로 20대 국회는 밥그릇 챙기려고 그토록 밤을 지새우며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정책대결을 하노라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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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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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터가 흔들릴 때(시편 11편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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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4일 밤에 이어 16일 오전 1시 25분경에 또 다시 지진이 있었습니다. 이번 지진은 진도 7을 넘는 강진으로서 일본 큐수의 구마모토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늘 지진의 위협 속에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도 집이 흔들리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14일 밤에도 흔들리는 것을 보았는데, 16일 새벽에는 자다가 깰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제 둘째 딸이 놀라 깨어서는 큰 딸 방으로 달려가 책상 아래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지진이 나면 밖으로 나가야 하고, 그럴 형편이 못되면 책상 아래에 숨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배운 모양입니다. 책상 아래는 집이 무너져도 공간이 생겨 오래 생존할 수 있답니다. 어쨌든 이번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지진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진은 고대 근동 지방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대에서 소아시아 방향으로, 그리고 이스라엘 쪽으로 내려오는 지역에도 지진이 빈번했습니다. 그 지역은 주로 석조 구조물이 많은 곳인데, 그것들이 무너진 이유는 대개 지진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지진으로 무너진 신전 터, 성벽 터, 궁궐 터 등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했기에 성서 시대의 사람들도 지진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땅이 흔들리는 지진보다 더 무서운 지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생의 지진입니다. 지진이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발생하듯이, 인생의 지진도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발생해서 인생을 뒤흔들고 가정을 갈라놓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도 그러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충성을 다 바쳤건만 왕이자 장인인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창을 던지거나 자객을 보냈을 때 그의 인생의 터가 사정없이 흔들렸습니다. 수천 명의 군사가 그를 추격할 때 그는 디디고 설 터가 없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들판으로 도망하고 굴에 숨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외국으로 망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그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어디도 안전한 터전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동굴에 숨었을 때 사울 왕이 동굴 입구까지 온 적이 있었습니다. 동굴도 안전한 터가 아니었습니다. 블레셋에 망명했으나 블레셋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살고자 찾아간 곳이 죽음의 구덩이였습니다. 그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터가 흔들릴 때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시편 11편 3-4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인생의 터가 흔들릴 때 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지금 터가 흔들린다고 느끼신다면 만세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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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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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4월이여 노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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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하지만 이 시가 한국 현대사만큼 잘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1948년 제주도 4.3 사건, 1919년 4월 15일 화성 제암리교회 사건, 1960년 4.19 혁명,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4월을 슬프게 했으니 말입니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교회 사건은 스코필드 박사와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을 통해 전모가 알려졌습니다. 3.1만세운동 후 일본군 아리타 중위가 제암리로 찾아와 과잉진압을 사과한다면서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에 모았습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해 물어보는 척하면서 밖으로 빠져나오자 대기하던 군경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고 짚더미와 석유를 던져 불까지 질렀습니다. 김정헌(金正憲), 안경순(安慶淳), 홍원식(洪元植), 노경태는 겨우 살아남았으나 뒷산으로 도망친 노경태를 제외하고는 결국 총격에 맞아 사망했고, 교인이었던 강태성의 아내 김씨(19세)와 홍원식의 부인 김씨도 남편이 걱정되어 달려왔다가 일본 병사에 의해 살해되는 등 이날만 총 23명이 희생되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2주기입니다. 딸을 잃은 한 어머니는 이번 일과 관련하여 신앙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에게 “이제 내게 남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라며 절규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도 비슷한 외침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 45:15) 라틴 교부들은 이를 ‘숨어계시는 하나님(absconditus deus)라고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렇게 외치지 않으셨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시 22:1)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철학자 김용규도 『데칼로그』에서 존재에서 분리된 존재물은 근본적으로 탐욕과 의심과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1960년 이른바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1일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부둣가에 떠오르면서 점화된 4.19 의거는 당일에만 서울 사망자 104명(경찰 측 3명 포함), 부산 사망자 13명 부상자 60명, 광주는 사망자 6명(경찰 1명 포함) 부상자 70명이 나왔습니다. 특히 4.19 전체 사망자 186명 중 학생이 77명, 그 중 대학생은 22명, 고등학생도 36명, 그리고 초중생이 19명이나 되었습니다. “민주주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60.5 사상계), “자유의 나무는 압제자와 애국자들의 피로 새로워진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토마스 제퍼슨)고 했지만, 어린 생명들의 희생은 언제나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토마스 롱은 독일의 ‘다하우’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사진 한 장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끌려가는 한 어머니와 어린 딸의 모습입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비극을 중단시키기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행위를 합니다. 딸 뒤에 바짝 붙어 걸어가면서 손으로 아이의 눈을 덮어 아이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외면하지도 않으십니다. 부재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고백하는 저 하늘 위로 4월의 슬픈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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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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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목양일념(牧羊一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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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투수가 전력투구 하듯 해야
다른 것에 몰두하는 건 있을 수 없어
목사님 한 분이 저를 자택으로 초대하기에 갔더니 붓과 종이를 주면서 “글 한마디만 써주세요” 하기에 한자로 ‘牧羊一念’이라고 써주었다. 뜻은 문자 그대로 목회자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양(교인)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만 정성을 쏟으라는 뜻이다.
목회자는 목회 외에 다른 것은 몰라도 허물이 아니다. 목회 외에 다른 것은 몰라야 그가 참 목회자다운 목회자이다. 목회자는 세상 정치에 관해 몰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골프, 테니스 등을 할줄 몰라도 전혀 허물이 아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목회에만 전념하면 그가 목회자다운 목회자이다.
한 침대 만드는 회사는 광고하기를 “우리는 침대 외엔 다른 것은 모릅니다” 그랬다. 그 침대가 그리 잘 팔린다고 한다. 목회자도 목회 이외엔 몰라야 교회로부터 인정받는 목회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회자들은 목회는 건성으로 하고 다른 것에 정신을 팔고 있다.
한 곳에 바둑을 무척 좋아하는 목사가 있다. 어느 토요일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날 오후 2시부터 세례문답을 하도록 되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바둑에 빠져 있었다. 세례문답을 시작할 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도 목사가 오지 않는다. 사택에도 안계시고 혹시나 하여 장로가 기원에 가보니 목사가 바둑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장로가 “목사님” 이렇게 부르기가 미안해서 옆을 가서 서있었다. 얼마후 인기척을 느낀 목사가 장로를 보더니 “장로님이 여기 무슨 일이세요?” “오늘 세례문답하는 날 아닙니까” 그제서야 목사가 ‘아차’하며 일어나 교회당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목사 한분은 지난번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국이 진행되는 동안 시작부터 마칠때까지 TV중계를 보느라 주일준비도 뒷전이었다고 한다.
미국 한인교회 K목사는 예배시간을 앞두고 잠시 낚시터에 갔다. 웬일인지 고기가 잘 잡힌다. 예배인도할 것을 잊어버리고 계속 고기를 잡다가 결국 예배인도를 하지 못한 큰 실수를 했다. 이건 필자가 본인에게 직접 들은 얘기이다.
목회자도 적당한 취미생활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는 건성으로 하면서 취미생활에 몰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목회는 투수가 전력투구하듯이 해도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취미생활에 빠져 정신을 잃고 그래가지고서 어찌 목회다운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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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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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잔인한 4월의 꽃향기 휘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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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부터 따뜻한 봄이 밀려온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던 겨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1년 사시사철을 하루도 쉼 없이 달리는 삶이기에 겨울과 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나 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한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갔다. 심방을 가서 보는데 창문으로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봄은 계절의 여왕이고 여자의 계절이란 사실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여자 집사님들께 물어보았다. “봄이 되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개나리, 진달래, 철쭉꽃이 피면 여자로서 머리를 곱게 꾸미고 싱그러운 옷을 입은 채로 나들이를 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깁니까?”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하였다. 사실은 함께 동석한 제 집사람의 마음을 엿보기 위해서 물어 보았던 것이다. 그랬더니 여자 집사님들이 이런 말을 하였다.“목사님, 새에덴교회에 와서는 봄이고 가을이고 뭐 그런 것 다 잊어 먹었어요. 전도하고 심방하고 양육하느라 계절의 여왕이고 여행이고 이런 것 다 잊어 먹었어요. 시간만 나면 전도하고 싶고 새가족 보면 양육하고 싶고 조금만 여유 있으면 헌신하고 싶고 그렇게 살다보면 한 해가 훌쩍 가 버려요. 누가 그렇게 만들어 준 줄 아세요? 목사님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새에덴교회가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 감사하고 또 한 편으로는 너무 미안했다. 주의 교회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즐겁게 충성하는 모습이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또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또 한 분의 집에 심방을 했다. 정말 적극적으로 교회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의 집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참 못난 목사를 만나 죄송합니다. 내가 좀 평안하고 조용한 스타일로 목회를 하면 좋은데, 한국교회 영광성과 거룩성 회복을 위한 열정이 지나쳐서 우리 성도들도 너무 고생을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우리 성도들이 부족한 나를 지지해주고 눈물로 후원해 주어서 민족을 섬기고 한국교회를 지키는 일을 감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그랬더니 “목사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목사님이 개교회 성장에만 관심 갖고 편하게 안주하는 목사님이 아니라 국가를 섬기고 한국교회의 공익을 위해서 일사각오로 일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운데요. 저희도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목사님의 하시는 일을 돕고 섬기겠습니다.”나는 이런 성도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내 작은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도들의 아로새긴 은쟁반의 옥구슬 같은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잔인한 4월에 나에게 준 가장 큰 위로의 선물이고 격려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시인 엘리어트는 “4월은 황무지에서 라일락을 꽃피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우는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그 잔인한 생명력이 있기에 황폐했던 겨울 산야에 화사한 개나리와 진달래, 철쭉꽃이 피어나지 않는가? 나는 봄이 되어도 너무 바빠서 꽃구경을 할 시간도 없다. 여전히 내 앞에는 수많은 외부일정과 집회, 심방 등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나에게는 4월은 잔인한 달이다. 그러나 그 잔인한 4월 때문에 한국교회의 들녘 위에 순백의 영적 목련을 꽃피우기도 하며 신앙의 라일락을 꽃 피우고 화사한 철쭉꽃을 피우기도 하리라. 그리고 그 꽃은 결국 푸르고 푸른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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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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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해외 한인 선교사 가족 수양회 인도 見聞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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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총회 세계 선교 60주년 행사에 (2015년 6월, 고려신학대학원 강당) 참석한 해외 선교사들로부터 선교지를 방문하여 선교사 가족들에게도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많이 생각하던 중 교회 당회와 의논 후 제법 긴 선교지 방문에 나섰다. 2016. 3. 15(화) 출발하여 4.8(금) 돌아오는 일정이다. 3.15일(화) 김해 공항에서 아침 8시 출발하여 낮 12시경 HongKong 공항에 도착하였다. 밤 12시경 남아공화국으로 출발하므로 시간 여유가 많아 홍콩 엘림 한인교회(조윤태 목사 담임)을 방문하였다. 땅 한 평 값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집 한 채 값과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물가가 비싼 곳에서 예배 처소를 장만하여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유산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지켜 나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마치 「대한 독립군」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감동이 솟아났다. 두 사람이 몸을 바짝 맞대고 누워야 할 만큼 참으로 좁은 공간을 비롯하여 두개의 〈Guest Room〉을 준비하여 교통 요충지인 홍콩을 찾아오는 선교사들의 쉼터로 제공하고 있는 엘림 교회의 갸륵한 배려를 보면서 이 정도라면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회들이 나그네를 위하여 〈Guest Room〉을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우리는 겉치레나 체면문화가 심하여 상당수준의 집을 마련하여야 “Guest Room"이라고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사고 때문에 실제로 이 시설을 갖추고 있는 교회는 얼마 되지 않는 실정이다.
우리 부부는 엘림교회 사모님과 부목사님 그리고 특히 이훈 집사님으로부터 따뜻한 후대를 받고 South Africa Airways편으로 장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의 땅에 서구 백인들(화란,영국)이 건설한 나라 남아공화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최고로 크고 아름다운 도시 요하네스버그는 유럽이나 미국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공항에서는 다시 East London으로 가야 하므로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하는데 여행가방(짐)이 세 개나 되다보니 어느새 짐꾼 두명(흑인)이 달라붙는다. 짐짓 못이기는 척 짐을 나누어 운반하는데 가까운 거리임에도 10불을 요구하므로 10불을 팁으로 건네주었다. 출발문(Gate)으로 향하는데 이번에는 짐꾼 친구가 내 겉 옷 점퍼를 자기에게 벗어 달라고 한다.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어난다.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을 통하여 “네 겉옷을 달라하는 자에게는 속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셨는데 이를 어찌하나? 짧은 순간이지만 난감해 하던 중 「이곳은 별로 춥지도 않고, 나는 앞으로 추운 곳 독일 Berlin으로 가서도 수양회를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점퍼는 내가 사직동 교회를 위임받을 때 꽃다발을 들고 나왔던 화동(사직유치원 어린이)이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첫 봉급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담임목사에게 2년 전 선물로 준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지녀야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스스로 세[우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선교사들은 저 멀리 가나, 우간다, 모잠비크, 케냐, 시에나리온, 레소토 그리고 남아공 등 여러 국가로부터 열일곱 가정 50여명이 참석하여 3박 4일 수양회를 가졌다. 나와 조윤태 목사가 번갈아 말씀을 증거하였으며 선교사들의 특강과 선교 보고회를 꼬박 꼬박 참석하여 나도 은혜를 많이 받았다. 모든 선교사들이 나의 후배들이므로 더욱 사랑스럽고 대견해 보였다. 낯선 문화, 열악한 생활환경, 먼 이국땅에서의 외로움, 풍토병, 현지 교회를 세우고 일꾼들을 훈련시켜 세워나가야 하는 일, 그리고 자녀 교육 문제등 태산같이 쌓여 있는 선교사역 속에서도 당당하게 대처해나가는 모습들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여행 경비를 뚝 잘라서 추가로 행사 경비를 후원하였다.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담임 정은일 목사가 중국과 한국 여행의 여독으로 맡기로 했던 특강 시간을 못하게 되자 이번 행사 디렉트로 섬기는 노록수 선교사가 내 아내에게 (사모의 간증)을 맡겼다. 6년 전, 심각한 탈진 상태로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있던 나에게로 시집와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회복되고 목회를 계속할 수 있도록 결정적 헌신을 하였던 그 세월 속에 묻어 두었던 사연들을 간증할 때 선교사 부부들이 격려와 치유와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므로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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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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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은 실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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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mega church)로 특히 한국교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시카고의 윌로우크릭교회(빌 하이벨스 목사)가 32년 목회연구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Reveal: Where Are You?』). 그 교회 사역자 출신인 그렉 호킨스(Greg L. Hawkins)와 캘리 파킨슨(Cally Parkinson)이 집필한 이 책은 1만 명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3년간 조사하고, 수백 명을 일대일로 면담하고, 교회의 철학과 프로그램 전반을 점검한 후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뭔가 잘못됐다, 우리가 실수했다... 숫자로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 2009년 11월, 국제제자훈련원 발행지인 「디사이플」은 한국형 제자훈련의 완성자라 불리는 목사님과의 대담 기사를 실었는데, 제목이 “나의 교회론과 제자 훈련은 엇박자가 된 것 같다”였습니다. 기사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제 제자훈련은 한국 교회 안팎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와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2013년 9월, 한국 교계의 원로 한 분이 CBS 대담 프로에 나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장애인 복지에 힘썼고 담임목사가 분가하는 보기 드문 목회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신망이 두터웠던 분의 말이라 상당한 무게감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목회 40년을 뒤돌아보고, 제가 롤모델로 삼았던 미국 대형 교회 목사들을 볼 때, 제가 그 허상을 좇아 왔어요. 목표가 잘못 설정됐어요. 그런 점에서 실패에요. 그 사람들이 하는 제자훈련도 해 보고 선교도 열심히 하고, 속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여기까지 왔어요. 다음 세대는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0대 총선 전야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와 한국정치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모임이 존재했지만 대체로 ‘정교분리’라는 원칙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기독교 정당 운동의 바람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동성애, 할랄(이슬람)과 같은 중대한 이슈들 앞에서 이제는 직접적인 반대 입법이 시급하며 이 일을 위해서 기독교 정당 의원이 국회로 입성해야 하므로 정당투표와 비례대표가 중요하다는 구체적인 전략과 대안까지 제시하는 단계입니다. 물론 기독교 정당의 유래가 한국정치사에 없지는 않습니다. 1945년 해방 후 한경직 목사 등이 주도한 기독교사회민주당,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함께 주도한 기독교자유당 등이 있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총선과 달리 이번에는 어떻게 반응하고 호응할지 교계 안팎의 귀추(歸趨)가 주목됩니다. 그러나 이번 기독교 정당 운동을 조금 다른 각도로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일종의 파산선고라고 부르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평생 소속정당의 압력과 압력단체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 폐지에 헌신한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 같은 크리스챤 국회의원이 우리에게는 왜 없는 것입니까? 핍박과 환란 속에서 주를 신뢰하고 사랑했던 한국교회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19대 국회의원 1/3 이상이 개신교인(전체의 37.1%)이라는 통계가 이를 방증(傍證)합니다. 천주교인을 합치면 국회의원 2/3가 기독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심도 있는 제자훈련을 받은 이들도 여럿일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훈련과 달리, 그 동안의 한국교회 제자훈련은 정녕 실패했다는 얘기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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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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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누가 왕이 될 것인가(사사기 9장 7-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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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사사들이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활약했던 인물들로서 세습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사사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왕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왕이 없던 사사시대에 왕이 되고자 했던 인물과 그를 추종했던 어리석은 사람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비유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드온은 사사로서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기드온은 무려 칠십 명에 이르는 아들을 두었고, 이 외에도 세겜의 한 첩을 통해 아비멜렉이란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형제들을 학살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그 때 간신히 목숨을 건진 말째 요담이 선포한 것입니다. 나무들이 왕이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감람나무는 기름을 두고 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포기할 수 없어 거절했고, 포도나무는 새 술을 포기할 수 없어 포기했습니다. 나무들은 할 수 없이 가시나무에게 요청했고,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불이 나와 사를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왕이 되기를 거절한 감람, 무화과, 포도나무는 기드온과 그의 선한 아들들을 가리킵니다. 본래 기드온은 왕이 되어 다스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오직 여호와께서 통치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참조, 8:22-23). 반면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와 같이 폭력적 방법으로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요담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다 함께 망하게 될 것이라고 저주했고, 그 저주는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참고, 9:56-57) 우리는 이 비유에서 두 가지 종류의 악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가시나무의 악입니다. 가시나무는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왕이 되는 게 무엇일까요? 감람, 무화과, 포도나무가 왕이 되기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합니다. 왕이 되려는 것은 뿌리가 뽑혀 요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땅에 박혀 자라야 가치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열매는 그 나무에 주어진 본래적 사명입니다. 그러나 왕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본래적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가시나무는 아무런 열매가 없는 쓸모없는 나무였습니다. 그런 나무이기에 왕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 삶에 충실하고, 자기 열매를 하나님 앞에 맺는 사람은 헛된 명예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왕이 되는 것보다 열매 맺기를 좋아합니다. 두 번 째 악은 나무들의 악입니다. 나무는 왕이 필요 없습니다. 뿌리만 땅에 내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왕이 필요 없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통적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무들이 왕을 구하듯, 그들은 쓸데없는 왕을 세운 것입니다. 왕들이 이스라엘을 행복하게 했습니까? 왕정 역사를 보면 왕들 때문에 나라 전체가 고통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하나님 외에 어떤 왕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 대신 가이사를 왕으로 모셨습니다(참고, 요 19:14-15). 그러나 우리의 왕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되든,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뿐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난국에 우리 스스로 왕이 되려는 허망한 꿈을 버립시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우리만의 열매를 충실히 맺읍시다. 아울러 어떤 사람을 우리나라와 인생의 왕으로 추대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바라봅시다. 총선을 앞둔 우리가 투표할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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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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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만 70세 전 원로목사 총회 총대, 운영이사장 될 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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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사장 직무대행을 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그런데 본 기사 내용에 “하지만 노회 회원권이면서 조직교회 위임목사가 아니라 미조직교회 임시목사라는 이유로 총회 총대가 될 수 없다는 총회 결의(제87회)가 있다. 정년 전 은퇴한 원로목사는 노회 회원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총회 총대가 될 수 있으므로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논리는 교단 헌법을 짓밟고 하위 법을 우선하는 역행으로서 오히려 교단을 혼란케 하는 위헌적 주장이다. 교단 헌법이 보장한 노회의 정회원인 “만 70세 이전의 원로목사”에 대하여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런 법리는 밭갈이하는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그 이유로써 기사내용을 분석해 보면 제87회 총회가 결의한 “전북 노회장 유성종 씨가 헌의한 미조직교회 목사(임시목사)가 노회장과 총회 총대가 될 수 있는지를 질의하는 건은 법(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없다)대로 하기로 가결하다.(제87회 총회 촬요 및 요람 p.53)”의 결의를 준거하여 엉뚱하게 “정년 전 은퇴한 원로목사가 총회 총대와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논리는 하위 법을 내세우면서(세상법원과 같이) 상위법인 교단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법을 박탈하는 논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영이사회 규칙 제4조에 운영이사회 구성요건에 21당회 이상의 노회에서 파송한 이사로 구성한다. 원로목사는 운영이사로 파송할 수 없으며 이사 자격이 상실된다.”는 잘못된 규칙을 준거한 것 역시도 규칙 내용에 규칙으로서의 미비점은 차치하더라도 하위 법을 내세우면서(현행 세상법원의 법리를 따르면서) 상위법인 교단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원로목사의 기본권인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논거이기 때문이다. 3. 상위법 우선의 원칙 장로회정치는 “총회의 규칙과 결의는 헌법을 우선하지 못하고 노회의 규칙과 결의는 총회의 규칙과 결의를 우선하지 못하고 당회의 규칙과 결의는 노회의 규칙과 결의를 우선하지 못하고 동류 치리회의 결의는 동류 치리회의 규칙에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교회와 치리회의 행정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기사 내용은 총회의 결의와 운영이사회의 규칙을 빙자하여 상위법인 교단 헌법보다 하위 법을 우선하면서(정교 분리의 원칙에 어긋난 세상법원의 법리를 따르면서) 교단헌법을 짓밟고 장로교회의 헌정질서를 어지럽히는 괴변으로 정년 전 원로목사의 기본 회원권인 피선거권을 박탈하려 들고 있다. 부언컨대 제87회 총회의 결의는 수치스러운 결의이다. 왜냐하면 ① 교단헌법에 상충되는 결의요, ② “미조직교회 목사(임시목사)”라는 문장은 미조직교회 목사와 임시목사를 분간하지도 못하는 무지의 소치요 ③ “법대로 하기로”의 괄호 안의 설명으로 “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없다.”고 함은 법을 잘못 설명한 총회의 씻을 수 없는 수치요, ④ 노회는 질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 법리를 질의하였고, 총회는 “법대로 하기로”라는 결의를 하면서 교단헌법은 임시목사가 정회원이므로 “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없다”고 답하였으니 질의한 노회도, 답변한 총회 역시도 법리해석에 있어서 수준미달의 수치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노회는 이런 수치스러운 질의를 해서도 안 되고 총회는 이런 수치스런 질의에 대하여는 질의의 대상이 아니므로 반려하거나 “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있다”고 답해야 한다. 임시목사는 노회의 회원권에 있어서 위임목사와 동등하므로 투표만 받으면 노회장과 총회총대는 물론 총회장도 될 수 있는 것이 현행 교단헌법이 규정한 권리인 것을 총회는 아는가 모르는가? 또한 기사 내용 중 운영이사회 규칙 제4조와 관련하여 “원로목사는 운영이사로 파송할 수 없으며 이사 자격이 상실된다.”는 문장에 “정년 전”이라는 단어가 없고 단순하게 원로목사라고만 한 것을 정년 전 원로목사까지 포함하여 피선거권이 없는 것처럼 호도하였다. “정년 전 원로목사”와 단순하게 “원로목사”라는 용어는 그 신분이 엄연히 다르다. 보편적으로 “원로목사”는 정년이 되어 은퇴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된 자를 칭하고 “정년 전 원로목사”는 노회의 정회원으로서 피선거권을 구비한 노회원이다. 4. 결론 거두절미하고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치리회가 상위법인 헌법에 상충되는 규칙이나 결의는 할 수 없고, 만일 헌법에 상충되는 규칙을 정하거나 결의를 했다면 그 규칙과 결의는 시행해서도 안 되고 그 규칙과 결의는 폐기처분해야함이 법리이다. 따라서 노회의 정회원에 속한 정년 전 원로목사로서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인 “송춘현 목사가 운영이사회 소집권을 갖고 있으며 송춘현 목사가 소집하지 않는 운영이사회의 소집은 위법이다.”라는 주장은 교단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정당한 법리이자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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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