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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이름보다 삶이 중요하다
    전국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갔을 때 들은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3박 4일 일정의 강사가 광고되었는데 서임중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왔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임중 목사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아도 그 사람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삶인가를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의 소유자인가를 알 수 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작명소가 있어서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가히 몸부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도 작명소가 호황을 누린다고 한다. 이름 짓는데 수십, 수만 원까지 들여가면서 이름을 짓는 경향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성경에서도 이름을 짓는 일에는 아주 신중했다. 모든 성경의 위인들이 이름대로 살다가 이름대로 죽은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 생활환경, 기타에서 취한 것이 여러 가지로 보여진다.동·식물에서 이름들을 취하여 명명했는데 다말은 종려나무, 데라는 염소, 레아는 들소, 라헬은 양, 갈렙은 개, 드보라는 벌, 요나는 비둘기 등이다.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성질에 따라 지은 것도 있다. 에서는 털 많은 자, 십보라는 아름다움 등이다. 그리고 부모의 경건성, 감사 등에 의해 지어진 이름도 있는데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등이다. 사건과의 관련해서 지어진 것은 야곱이 그 막내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으로 바꾼 것은 흉조(凶兆)에서 길조의 이름으로 바꾸는 데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해산하여 낳은 아이를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이라고 한 것이 그 예다. 특별한 일로 이름이 바뀐 것도 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요셉이 사브넷바네아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된 일들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예언적, 상징적으로 명명된 경우도 있고, 하나님에 관계된 이름도 많으며, 가나안의 신 바알과 관계된 이름도 나타난다. 신약시대에는, 여러 나라의 국어가 사용되어 그리스명, 라틴명, 히브리명 등의 이름, 혹은 한 사람이 둘이나 세 가지 이름을 가진 경우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름을 잘 지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이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이름을 빛내는 것이 더욱 유명인(有名人)이 되는 것이다.예수라는 이름은 참으로 존귀한 이름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는 존귀한 이름들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삶이 이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유다’라는 이름은 ‘그를 찬미하자’, ‘그를 기억하자’라는 아주 좋은 의미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가장 실패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중요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약점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지도자의 지도력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지배자로서의 자기모순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며 그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소위 유명(有名)한 사람들의 이름이 다음 세대에까지 아름답게 우러러 존경받지 못하고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름이 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기의 이름이 되게 하여야 하지만 자기 스스로 유명인(有名人)에 도취해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삶이 이름 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의 삶이 이름 되게 하여야 한다. 목사와 장로답게 살아 목사, 장로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어야 한다.새해가 밝았다. 365일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높여졌으면 좋겠다. 이 땅의 온 교회가 그렇게 아름다움을 연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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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함께 생각해 봅시다]현역은 모르는 은퇴목사의 심경
    현역은 은퇴목사의 심경을 몰라은퇴한 후 비로소 실감하게 돼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지 않은가.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내 동무 어디 가고 나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어느 은퇴 목사는 이 노래를 은퇴 목사의 주제곡이라고 했다. 왜일까. 은퇴하고 나면 갑자기 주변환경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든다. 주변에 그토록 많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외로히 혼자 앉아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면 외롭기 한이 없다. 여러 해 전 얘기다. 은퇴한 P 목사에게 현역으로 있는 후배들이 물었다. “목사님, 은퇴를 해보니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의 대답은 “말도 마세요. 말로는 어떻다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한번 겪어보세요” 하더니 그 건강하던 분이 은퇴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목사들이 누구나 은퇴하기 전에는 은퇴목사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젊음을 경험한 노인들은 젊은 이들을 이해하지만 늙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 이들은 노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솔직히 저부터 그러했다. 은퇴목사 한 분이 사직동교회에 출석하셨다. 주일마다 설교하던 목사가 매주일 예배참석만 하고 가는 것을 보면서도 은퇴목사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은퇴한 후에 생각하니 그 어른의 따분한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후회된다.그러면 은퇴목사가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뭔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인 점은 은퇴하고 나면 고독하고 적적하다는 것이다. 시무할 때에는 연일 해야할 일이 있고 가야할 곳도 많고 초대를 받기도 하고 매일 시간을 쪼개어 일정을 소화한다. 은퇴하고 나면 하룻밤 사이에 사정이 달라진다. 누구 한 사람 차 한 잔 같이 하자는 사람이 없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전화도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회가 운영하는 노인대학에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무할 때엔 모든 교인들의 관심이 담임목사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교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교인들의 관심은 새 담임목사에게 집중된다. 공예배 시간에 기도할 때에도 멀리 해외에 가 있는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면서 은퇴목사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건 새 담임목사가 듣고 어떻게 생각할런지 몰라서 그런다는 말이 있다. 끝으로 은퇴목사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큰 대접은 무엇인가. 그건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역으로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한다. 자기가 은퇴를 해 봐야 비로소 실감이 나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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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성서연구]다시 원점에 서서(엡 6:24)
    신앙이란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것만이 진리요, 진리만이 영원합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온 세상이 변질되는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본성이 변질되는 것들에 더 쉽게 동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첫 타락도 그렇습니다. 하와는 이미 에덴동산에 있는 많은 과실들을 먹고 있었지만, 그것들로 만족하지 못하여 사탄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손을 뻗었고, 그로 인해 인류는 타락했습니다. 사람은 뭔가 새로운 것들을 접해보고 싶은 본능을 가진 것 같습니다.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권태를 느끼면서 한눈을 팔게 되는 것이라든지, 첫 출근하면서 감격하던 직장에 싫을 느끼고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마음 역시 그렇습니다. 신앙에 첫 눈을 떴던 교회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을 하다가 급기야는 다른 교회를 옮겨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처음 걷던 길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듯이 보입니다. 마치 아침저녁으로 늘 걷던 산책로에 싫증을 느껴 새로운 길로 접어든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새로운 길이 우리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사람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테크닉에 더 의존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복음을 말했지만, 복음은 포장지일 뿐 그 안에는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겸손의 모범을 말하면서도 속 깊은 곳에서는 한 계단이라도 더 높이 서려는 욕망이 부글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기도 하지만, 그 사랑은 우러난 것이 아니라 기획된 냄새가 날 때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자 한 사람의 가치를 알면서도 소자를 외면해 왔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처음 걷던 길에서 벗어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지금 우리는 점점 낭떠러지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5년을 시작하면서 다시 원점에 서길 원합니다. 2천여 년 전 갈릴리로 돌아가 거기서 말씀하시고 병자들을 어루만지시던 예수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덧놓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 그리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흘리시던 그 눈물을 다시 주목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던 그 보혈이 얼마나 붉고 진한 사랑인가를 다시 느껴보길 원합니다. 아울러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생명의 능력을 가진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첫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그 첫 사랑의 원점에 다시 서길 원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던 그 날로, 세례를 받던 그 날로, 직분을 받던 그 날로, 안수를 받고 임직하던 그 날로, 목회지에서 첫 설교를 하던 그 날로 돌아가 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 봅시다. 곁길로 나오라고 유혹하는 사탄을 뿌리치고, 오직 예수님만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6:24)’란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첫 사랑이 변치 않도록 살아봅시다. 2015년,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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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가정칼럼]새해, 행복 습관을 쌓기 위한 원칙
    “습관들을 지배하지 않으면 습관들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Master your habits or your habits will Master you)라는 말이 있다. 버릇은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볍지만 머지않아 밧줄처럼 튼튼해진다. 따라서 습관을 정복하는데 인생의 성공이 있다. 무엇보다 습관은 습관으로만 정복된다. 따라서 나쁜 습관을 근절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나쁜 습관과 경쟁이 되는 새 습관을 기르는 일이다. 여기 새 습관으로 나아가는 좋은 길이 있다. 맥주병 마개와 같이 병뚜껑에 주름이 여러 개 나있는 것을 ‘크라운“(왕관)이라 부른다. 어느 병뚜껑이든 펼쳐진 지름은 32mm이고 6mm마다 홈이 나 있으며 21개의 주름을 갖고 있다. 이는 피라미드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주름이 21개일 때 병마개의 견고함과 밀봉 상태가 가장 우수하기 때문이다. 병뚜껑만일까? 암탉도 딱딱한 달걀을 품고 21일이 지나면 병아리가 되어 나온다. 1. 두려움은 당연하다. 숨기지 마라. 스코트 팩은 말한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뇌 손상의 증거다.” 두려운 곳에 길이 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에는 공기 저항을 받는다. 비행기는 공기 저항이 있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다. ‘체중감량을 하다 쓰러지지 않을까?’ ‘금연을 하다가 친구를 잃지 않을까?’ ‘술을 끊는 일로 사업상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등등. 그러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2. 핑계를 버려라. 가장 먼저 정복해야 할 습관은 ‘탓’이다. 선택과 성공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 존재하지만 실패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변명이 따른다. 습관을 정복하려면 탓을 버려라. ‘친구 탓’ ‘환경 탓’ ‘부모 탓’ ‘날씨 탓’ ‘건강 탓’... 결국 버려야 하는 것은 「탓 증후군」이다. 3. 긍정적 사고로 나아가라. 생각이 해답이다. 습관이란 내가 진리라고 믿는 생각의 결정체다. ‘자살’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하루야마 시게오는 “좋다 될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다「플러스 발상」을 계속하면 뇌에 좋은 호르몬을 분비시켜 사람의 의욕 고취, 인내력과 창의력 강화, 건강증진에 도움이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몸무게를 빼겠다는 목표보다 나의 몸에 안식년을 선포하고 금식보다 몸의 「대청소의 날」이라 선포해 보라. 한결 의미가 있어지고 쉬워진다. 4. 쉬운 것부터 단계를 따라 구체적으로 시도해라. 1Km를 가는 것은 시련이고 1미터를 가는 것은 어렵지만 1센티를 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금연을 위해서라면 점차 개비 수를 줄여 나가는 것은 물론 니코틴 함량이 낮은 담배로 서서히 옮겨가 금단증상을 충분히 극복한 뒤 끊는 것이 지혜롭다. 몸무게를 뺀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번 5월까지 5킬로를 빼겠다는 따위의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일곱 번만 해라. 길게 잡지 마라. 작심 삼일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곱 번만 하면 21일이 된다. 21일이면 계란도 생명으로 부활한다. 모든 병 뚜껑은 주름(크라운)이 21개다. 피라미드의 원리에 따라 가장 견고한 밀봉상태를 가지게 되어서다. 새로 태어난 아이도 세이레가 지나 외출이 허용되었다. 면역체계의 생성 때문이었다. 평생동안 술을 안 마시겠다는 것보다 단지 오늘 하루만 절주하자고 다짐해라. 성공의 열쇠는 오늘 하루에 있다. 6. 그 날 그 날이 첫 날이 되게 하라.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란 어제 죽어갔던 사람들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던 내일이었었다. 그토록 소중한 한 날로 맞이해라. 그래서 매일 매일 새롭게 시작해라. 날마다 새로운 결심으로 다짐한다면 이루지 못할 약속은 없다. 오늘이 새로 시작하는 날이다. 아침운동의 첫날이다. 「5분 행복」의 첫날이다. T.V 안보기 첫날이다. 매일 그렇게 다짐해라. 첫날은 누구에게나 의욕을 가져다 준다. 21일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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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교회법률상식]리폼드 뉴스의 권징 제110조에 관한 왜곡된 해석
    -헌법에 “목사가 노회에 이명청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직접규정은 없어 -노회가 이명서를 교부해 주는 직무규정이 곧 이명청원서 제출 근거 규정 리폼드 뉴스가 “신현만 목사의 교회 분쟁상담의 딱한 사정”이라는 당치도 않는 머리기사(2014.11.22.일자 입력)를 보도하면서 권징 제110조의 왜곡된 해석으로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 기사 내용에 혼란을 주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총회가 권징조례 제110조를 근거해서 ‘헌법대로’라고 답변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순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권징조례 제110조는 목사의 이명청원을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한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110조는 A노회 목사가 B노회로 가겠다고 이명증서를 받은 후에 B노회로 가지 아니하고 C노회나 D노회로 가면 안 된다는 규정이다.” 여기에서 리폼드 뉴스는 권징 제110조에 관하여 포괄적인 해석을 피하고 부분적인 해석으로만 일관했다는 점이다. 물론 리폼드 뉴스가 해석한 것처럼 권징 제110조의 규정은 “A노회에서 B노회로 가겠다고 이명증서를 발급 받은 후에 B노회로 가지 아니하고 C노회나 D노회로 가면 안 된다”는 부분적인 해석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리폼드 뉴스가 “A노회에서 B노회로 가겠다고 이명서를 받은 후에”라고 언급한 내용 자체에서도 목사가 A노회에서 B노회로 가겠다는 이명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것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헌법에 근거하여 이명청원서를 제출했다고 동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문맥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징 제110조는 목사의 이명청원을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고 일관하는 것은 왜곡된 헌법 해석에 다름 아니다. 그 이유인즉 장로교회 정치의 대원리에서 하회의 고유한 특권은 상회에 청원권이요, 상회의 고유한 특권은 하회의 청원에 대한 허락권(정치 제10장 제6조 2항)이다. 이와 같은 고유한 특권에 의하여 하회의 청원 없는 상회의 허락은 있을 수 없고, 상회의 허락 없는 하회의 시행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상회는 하회의 치리회에서만 헌의를 받을 수 있도록 헌법은 규정하고 있으나, 고소장(권징 제7조), 소원장(권징 제84조), 상소장(권징 제94조), 이명청원서(권징 제110조), 진정서(제2회 총회록 p.32) 등은 치리회가 아닌 개인도 상회에 청원할 수 있는 특례 규정을 두고 있다. 그 중에 목사의 이명청원서를 노회에 제출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는 권징 제110조에 노회가 “목사, 강도사, 목사 후보생에게 이명서를 교부할 때에 그 지정한 노회의 명칭을 분명히 기입할 것이요”에서 노회가 이명서를 교부하는 근거는 목사가 이명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목사가 가는 노회도 분명히 기입하였기 때문에 “지정한 노회의 명칭을 분명히 기입할 것”이라고 명문화 한 것이다. 따라서 “노회가 이명서를 교부”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권징 제110조 안에는 이명서를 교부받는 자가 본조에 근거하여 이명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노회가 본조에 근거하여 이명서를 교부해 주는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법리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목사, 강도사, 목사 후보생은 다른 노회로 옮기려 할 때 노회에 이명청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라는 직접적인 명문 규정이 헌법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권징 제110조에 목사, 강도사, 목사 후보생의 이명서 교부에 대한 노회의 직무수행 규정과 정치 제10장 제6조 3항에 노회의 목사 이명을 관리하는 직무규정과 권징 제114조에 이명자의 이주기간에 관한 규정이 있을 뿐이다. 헌법이 정한 목사의 이명청원서를 제출하는 법적 근거는 이명을 원하는 목사가 노회로부터 이명서를 교부받는 노회의 직무규정인 권징 제110조와 정치 제10장제6조와 권징 제114의 이주기간의 규정이 곧 이명청원서를 제출하는 법적 근거가 분명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리폼드 뉴스가 권징 제110조는 목사가 이명청원서를 제출하는 법적 근거 규정이 아니라고 고집을 한다면 권징 제110조와 동 제114조와 정치 제10장제6조 외의 헌법 규정으로서 “목사가 이명청원서를 노회에 제출해야 한다.”는 직접적으로 명문화 된 법적 근거를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결론으로 한국 장로교 100년의 역사는 목사와 강도사와 목사 후보생이 노회 소속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권징 제110조와 동 제114조와 정치 제10장 제6조 등에 근거하여 노회에 이명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노회 역시 권징 제110조와 동 제114조와 정치 제10장 제6조 등을 근거하여 청원자에게만 이명증서를 교부해 왔다. 이와 같은 한국 장로교회 100년의 역사가 “목사의 이명청원서는 권징 제110조를 근거로 노회에 제출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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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성경인물탐구]형제들의 시기로 팔려간 요셉(2)
    요셉의 꿈 이야기는 그에 대한 형제들의 분노를 자극시켰고 급기야는 요셉의 생명을 해하려는 모의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형제들이 양을 치러 세겜에 가서 있을 때에 요셉은 아비 야곱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갔습니다.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목격한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그들은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맏형 르우벤은 요셉의 생명을 구하려고 요셉을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의했습니다. 르우벤의 제의에 따라 요셉은 옷이 벗겨진 채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형제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은 이십 개에 그를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은 형제들의 악행은 천인공노할 일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계획과 뜻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후에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창 50:20)다고 말함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길을 선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정직히 행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갔지만 그 곳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성실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보디발 가정의 총무로서 신실히 행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미디안사람 상인들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갔을 때 바로의 신하 시위 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사서 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케 되었습니다. 요셉의 주인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의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행사는 이방 사람이 보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억울하게 종이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신실한 모습을 주인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신임하게 되었고 그를 자기 집의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습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하나님을 항상 가까이하고 사랑함의 결과였습니다. 다윗이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행사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같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노래한 것과 같이, 요셉은 하나님과 늘 동행함으로써 모든 행사가 형통하는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는 세상 사람에게도 인정과 칭찬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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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은혜의 말씀]한계의 축복(열왕기상 19:9~12)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율법의 대표 모세,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를 듭니다. 오늘 말씀은 엘리야에 대한 말씀이며 그의 일생 중에서 가장 어려웠고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때입니다. 엘리아는 영성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말씀을 보면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 거짓 선지자 850명을 감당하였고 혼자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렸다 닫혔다하여 아합의 마차를 맨발로 달려 앞질렀던 자였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엘리야가 19장에 이세벨의 서신 한통에 낙심하여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19:4)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호렙산 동굴 속에 숨습니다. 그는 그의 상황을 5가지를 말하는데 그것이 전형적인 우울증 증세였습니다. 첫째는 엘리야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해서 슈퍼맨 콤플렉스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엄청나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위대한 만군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굉장히 세밀하신 분이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고 위대하게만 생각하여 ‘내 삶의 초라한 것은 하나님이 아시겠냐’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밀하시고 알뜰하신 생활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내 삶의 전 영역에서 구원해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합니다. 둘째는 ‘열심히 유별하오니’라고 합니다. 열심히 활동을 하는 사람이 공항장애가 옵니다. 열심의 한계가 오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한계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말이 되고 한해가 저물어가면서 여러 분야에서 한계를 느낍니다. 체력에 한계를 느끼고 사업에 한계를 느끼고, 부부관계, 자식농사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러나 한계가 축복입니다. 빨리 한계를 느껴야 합니다. 한계를 못 느끼고 내 힘으로, 내 돈으로, 내 열심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어느 순간 한계점에 다다라서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할 때가 옵니다. 이때 한계를 느낄 때는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내려놓음의 축복, 포기의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갈 때는 내 모습 이대로 나가면 됩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라고 하며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꼴 보기 싫은 겁니다. 배우자가 싫은 겁니다. 자식이 미운 겁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원망과 분노가 우울증의 증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넷째는 ‘오직 나만 남았거늘’ 세상에 아무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으며 나만 힘이 든 겁니다. 착각입니다. 7천이나 남아있었습니다. 다섯째는 ‘그들이 내 생명을 빼앗으려하나이다’입니다. 가만두어도 죽을 것 같다는 겁니다. 이 5가지 증상이 엘리야의 컨디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엘리아의 5중적인 문제에 당면했을 때 보통사람들은 위기이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위기의 때가 기회가 됩니다. 한계의 축복입니다. 그때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가면 주님께서 그대로 나를 맞아주십니다. 우리성도님들도 엘리아와 같이 거듭나서 주님 손잡는 아름다운 동행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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