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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평화에 이르는 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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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학교 정성철 교수께서 쓰신 ‘국가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해서 로버트 저비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국가는 왜 싸우는가, 사회평론 아카데미) 로버트 저비스에 의하면 나선형 모델(Spiral 모델)과 억제 모델(Deterrence 모델)이 있습니다. 나선형 모델은 안보 딜레마에 기초하여 충돌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두 국가가 모두 자국의 안보를 위해 방어적 행동을 취하지만 이는 상대의 안보 불안을 야기 시킨다고 합니다. 결국 두 국가는 위기의 고조를 막지 못한 채 충돌에 이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모델은 유화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북한 모두 평화를 희망하더라도 오해와 불신으로 상대의 방어적 행위를 공격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경우 남북한은 번갈아 가며 그러한 오해에 따른 대응을 취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충돌로 치닫게 되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비극은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갈 때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억제 모델의 관점에서 평화는 상대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상대의 도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결국 양측은 대규모 분쟁에 휩싸이고 맙니다. 상대방이 군사적 수단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봉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결의에 찬 국가들 사이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죠. 상대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 6.25 전쟁의 발발도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 따른결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한의 공격이 엄청난 피해를 불러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였을 때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왔다는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한반도 평화를 지향해 왔습니다. 하지만 상반된 가정에서 기초한 두 입장의 정책제안은 상이하다고 합니다. 나선형 모델에서 국가는 현상 유지를 희망하는 불안한 행위자이지만, 억제 모델에서 상대국은 불만족으로 현상 변경을 노리는 도전적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정성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북한은 오랜 경제 실패와 외교 고립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국가인가? 이라크 전쟁과 후세인 처형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실패 국가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면서 체제 안정이 위협받을 경우 모험적 도발도 감행할 준비가 된 도전 국가인가? 그것도 아니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외부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며 정권 안보에 사활을 건 공격적 행위자로 볼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의 대북 통일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북한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 안보를 추구하는 불만족 국가인가?” 이에 대한 우리 안에서 열린 토론이 합의에 이를 때 저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대북 통일 정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
다. 다소 전문가적이고 어려운 글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던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6.25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의 번영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6.25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안보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새 길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 교회는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9년째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사들이 거룩한 낙수 효과를 이루며 나비효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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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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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구색만으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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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어려서 자라난 동네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넓게 여겨졌던 길이 지금은 좁은 뒷골목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창 축구가 유행하고 있었고, 주 상대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재 한국 축구는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축구 열기는 꼬마인 우리에게도 퍼져서 뒷골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을 찼습니다. 6학년 동호 형이 중심이었고, 나머지는 5학년과 6학년이 섞여 있었습니다.
한번은 뒷골목 축구에 만족할 수 없어서 한참 떨어진 구로초등학교에 갔습니다. 한쪽에서 공을 차고 있노라니까 유니폼을 멋지게 입은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구로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부러운 눈으로 정식 선수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수들은 운동장 가운데서, 우리는 구석의 남은 운동장에서 공을 찼습니다. 그런데 축구팀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더니, 연습 경기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뒷골목에서 공을 찬 우리가 정식 선수들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축구팀 선생님이 어이가 없었는지, 또 오라고 했고, 그 다음 주 토요일에는 다른 학교 축구팀들까지 와서 토너먼트 경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동호 형에게 축구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정도입니다.
구로초등학교 축구팀은 왜 동네 아이들에게 졌을까요? 유니폼에, 축구화를 멋지게 신고, 코치 선생님도 계시고, 포지션별로 선수도 다 있는데, 왜 졌을까요? 그 이유는 진짜 선수다운 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막아낼 수비 선수가 없고, 골을 넣을 선수가 없습니다. 열한 명이 뛰고 있는데, 모두 있으나 마나입니다. 구색은 갖추었지만, 실력은 없었습니다. 흔히 폼만 잡는다고 하지요.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가르쳤고, 지혜로운 자들은 책략을 베풀었고, 선지자들은 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다 갖추었기에, 더 이상의 선지자는 필요 없다고 여기면서,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18절이 이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당시 유다 백성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타락하여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고, 지혜로운 자들의 책략은 제 눈에 안경이었고, 선지자들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양 포장했습니다. 예레미야만이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시대에 여호사밧과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치는 전쟁을 하러 가기 전에 선지자들에게 묻던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백여 명의 선지자가 승리를 예언했습니다. 그때 <미가야>만 패배와 왕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가야의 예언처럼 아합왕은 부상했고, 결국 죽었습니다.
수가 많아도 소용없습니다. 진리가 중요합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면 어리석은 군중은 눈이 어두워서 진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목회자 중에는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분위기와 성도들이 좋아하는 분위기에 맞추어야 하는지, 목회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 해야 하는지를 갈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신앙 양심을 따라 행하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홀로 있더라도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투브 등의 조회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씀이 진리인지가 중요합니다. 조회수에 속지 말고, 진리를 분별하는 <영들 분별하는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진리 위에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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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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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신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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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은 믿음, 소망, 사랑 3가지 면에서 진단해 볼 수 있다.
A. 믿음이 없이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주를 기쁘시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가 없다.
②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믿음이 없으면 진격을 할 수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쁜 것이다.
③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 동행, 연합, 닮음이 불가능하다.
④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찾을 수 없다. 믿음이 있을 때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사모하고 부르짖는다.
⑤ 믿음이 없이는 상을 받을 수가 없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주님을 믿을 때에 목숨을 다하여 충성할 수 있다.
결국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에 믿음이 크도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라고 하셨다. 믿음만큼, 믿음대로, 꿈 꾼 대로, 소원대로, 말한 대로, 심은 대로 되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대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다. 믿음도 자란다. 믿음에도 알통이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근육을 길러서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된다.
B. 소망이 없으면
소망이 없으면 인내할 수가 없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루살이 같이 막가파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 부활소망이 없으면 성도의 노력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천국 소망을 가지고 나그네 세월에 인내하고, 참고, 견디어 낼 수가 있다. 현재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장차 받을 하늘의 상급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다.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기다리며 견디어 낸다. 성도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천국 계단을 묵묵히 올라가야 한다.
C. 사랑이 없으면
①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②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③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④ 사랑의 동기가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충고도 득이 안 되고 독이 될 뿐이다.
믿음이 역사하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이 수고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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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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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주일 예배는 왜 두 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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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는 왜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일까? 최근 한 번만 드리는 교회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두 번 드리는 곳이 훨씬 많다, 일부 교단을 제외하고는 헌법(교회정치, 예배지침)에서 주일 예배를 두 번 드릴 것을 직접 규정하지 않음에도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주일에 예배를 두 번 드려왔다. 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어떤 이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린 구약의 제사에 기원을 찾지만, 이는 억지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에서 주일에 예배를 두 번 드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두 번째 예배 출석은 저조했다.
주일에 두 번째 예배를 드린 전통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개혁 당시 신앙교육을 위해 두 번째 모임이 생겼다. 본래 주일 두 번째 예배는 아이들을 위해 목사가 교리문답(敎理問答, catechism. 성경의 교훈을 요약해서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만든 것)을 해설하는 시간인데 부모도 거기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 공식 예배로 자리 잡았다. 교리문답 전체를 52주일로 구분하여 주일마다 설교해서 일 년에 모두를 해설하도록 했다. 독일의 팔츠 지방은 오후 예배 시간에 교리문답이 설교 되었다. 당시 팔츠 지방은 주일 예배를 보통 오전과 오후에 두 번 모였지만, 도시는 아침 일찍 한 번 더 예배를 드렸다. 주일 예배 외에 주간에도 모였다. 시골은 한 번, 도시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도 예배를 드렸다. 그 외에도 매일 아침과 저녁에 간단한 예배가 있었다. 이 예배는 30분을 넘지 않지만 그래도 성경 본문을 읽고 짧은 설교가 있었다. 당시 교회는 교회 생활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삶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개혁가 칼빈이 목회한 제네바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정오에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네덜란드 교회는 총회(1618-19년)에서 교회정치를 작성할 때, 제68조에서 교리문답 설교를 위해 주일 오후에도 다시 회집할 것을 규정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시 예배위원회는 교리문답교육을 다루고 교리문답을 작성했다. 바로 그 소교리문답을 1907년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교회 신경으로 채택했다. 이를 “성경요리문답”이라고 불렀다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회정치> 제7장(교회예의와 율례)를 보면 주일 공예배에 꼭 들어갈 순서로 찬송, 설교, 성례 등과 함께 ‘성경교육’이 나온다. ‘성경교육’은 1930년 <교회정치>서부터는 ‘성경문답’으로 변경된다. 곽안련 선교사도 ‘성경소요리문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성경요리문답’은 현 예장합동 헌법 <교회정치> 예배 순서에 아직 남아 있다. 예장고신 헌법에도 얼마 전까지 “성경문답”이 있었다.
이같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전통을 따라 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리고, 헌법 예배지침에 ‘성경요리문답’ 순서를 넣었음에도, 정작 두 번째 예배의 기원과 성격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한때 주일 두 번째 예배를 ‘찬양예배’라 불렀다. 일부 교단은 지금도 헌법에서 ‘찬양예배’ 용어를 사용한다.
개신교의 기초를 놓은 종교개혁가들은 왜 두 번째 예배에서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설교했을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바른 교훈 위에 서고, 이로써 교회가 같음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곧 바름과 같음을 위해서다. 진리를 상대화하고 감성을 중시하는 시대에 바름과 같음을 지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주일 예배를 왜 두 번 드리는지 그 이유와 각 예배의 성격에 대해 교회법에서 속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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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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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자녀양육, 혁신적인 통합 이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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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사역을 그렇게 오래 하여도 여전히 이해 안되는 단어가 청소년과 사춘기입니다. 2천년 전의 낙서에도 ‘다음 미래 세대가 버르장머리가 없다’라고 해놓았다는 말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 말은 지금도 늘 사용되고 있는 말이지요.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은(Erik H. Erikson)은 생애 주기별 발달 단계를 나누었는데 맨 마지막 단계를 절망과 통합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녀 양육을 평생 농사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시기 시기마다 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어릴 적 보리농사를 짓는 아버님 얘기가 생각납니다. 보리를 물에 넣어 부드럽게 하여 곱게 갈아놓은 밭에 뿌립니다. 뿌려놓은 보리에 싹이 나서 올라오면 너무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오고 나서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보리를 발로 꾹꾹 밟는 것입니다. 그때 하시는 말씀이 이때는 땅이 얼어서 보리 뿌리가 공기에 노출되면 얼어서 죽기 때문에 땅을 꾹꾹 밟으면 보리도 밟히긴 하지만 오히려 더 잘 살 수 있고, 곡식 열매도 더 많이 열린다고…. 자식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랑을 줄 때와 고집을 꺾어줘야 할 때가 있는데, 자녀 양육에도 각 시기마다 적절한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자녀의 발달 단계를 4단계로 나누었을 때,
첫째, 0세부터 많게는 2-3세까지를 애착 단계라고 합니다.
무조건적 수용과 공감을 해주고 정서를 안정시켜 주는 것입니다. 왕자처럼 공주처럼 모시는 것입니다. 바로 신뢰감을 갖게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1980-2000년까지는 모르고 살다가 2000년 이후에 알려졌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과장되어서 20살까지 이것만 강조하는 부모와 교사가 있기도 하여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둘째, 5세부터 11세까지로 나눕니다.
이때 중요한 부모의 역할 세 가지는 경계선 세우고 경계선 지키기입니다. 경계선을 그어서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시켜 주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친밀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애착에서 신뢰가 되었다면 이 시기의 친밀감은 재미와 흥미,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이의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많이 놀고 자유롭게 뛰게 해서 오감과 신체와 정서와 운동을 모두 활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야구에서 내야의 주루 경계선을 지어주는 1루, 2루, 3루와 홈베이스 각 꼭짓점의 각도는 90도입니다. 하지만 야구에서처럼 자녀 양육에서 부모가 경계선을 지어주는 것을 자신의 틀로 각도를 좁혀서 그 좁은 영역 안에서 아이를 제한하려 하면 자녀의 건강한 성장과 독립을 방해하며 자율성 억압, 정체성 혼란, 폭발하고 튀어버리는 반항적인 행동 등 부모 자녀 관계에 긴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셋째, 12세부터 19세까지, 중·고등학생 사춘기 시기입니다.
이제는 논리가 발달하고 자기주장의 소리가 나오는 시기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하고 질문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브루타 교육 방식이 너무 좋은 예시입니다. 이때는 아이들이 예의 없이 말하고 반응하지만, 격한 감정이 사라져간 후에 차근차근 부모와의 대화가 꼭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작은 노동의 경험이 꼭 필요합니다. 작은 머슴이 되어 많이 노동하는 경험이 필수적인데, 한국은 입시 중심의 교육으로 인해 교실 속에서 사고와 암기 위주로만 나아가기에 너무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시기입니다.
넷째, 20세부터 30세까지, 청년 시기입니다.
청소년기본법에서는 19-24세를 후기 청소년이라 하는데, 2000년 이후에 남자는 30세, 여자는 26세까지 전두엽이 발달한다고 발표하였는데(참고하시길‥), 이때는 많은 성취 경험과 실패 경험, 그리고 자립심이 필요합니다. 머리의 이성만으로 살아가는 공부와 이론뿐인 곳에서 삶의 실제 현장으로 나아가는 시기인지라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때로는 좌절도 겪고 온갖 소리를 듣기에 이때 부모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와 조언을 해주는 것이 정말 필요한 시기입니다. 집에서는 큰 머슴처럼 일을 해보는 것입니다. 힘도 있고 도전도 있고 용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 시기에 방콕, 집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려고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때는 싸움 밖에 안되는 상황이지요. 부모님의 멘토링이 정말 필요한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춘기 부모님들이여.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부모와 교사를 자기 아래로 두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는 일부러 권위를 갖고 이야기하는 논리적 멘토링이 필요합니다. 부모는 경제적으로 어떠하든 간에 자녀에게 이야기할 자격과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너무 자녀에게 못해주었다고 미안해하지 마시고 사랑을 준 만큼 당당하게 대하여 사춘기 자녀 멘토링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시면 저는 행복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부모님께 힘내라는 말씀 전해드리며, 오늘도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님 파이팅 한 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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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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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부활절 연합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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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서울에서는 한국교회 71개 교단이 참여하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압구정 광림교회에서 드린다고 한다. 설교자는 한교총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라고 한다. 부산에서는 부산지역 주요 기독교 기관들이 모두 연합하여 4월 20일 주일 오후 3시 부산외국어대학교 중앙광장 특설무대에서 ‘십자가, 십자가 부활 능력일세’라는 주제로 개최된다고 한다.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는 부산기독교총연합회, 부산교회총연합회,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부산교회희망연합이 공동 주최한다고 한다. 설교자는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라고 한다. 부활절이 분열된 한국교회를 연대하고 화합하게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한국 최초의 부활절 연합예배는 서울에서 1947년 4월 부활절에 시작되었다. 해방후 두 번째 맞는 부활절인 4월 6일 새벽 6시 일제 치하에서 조선신궁이 있던 남산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이때의 연합예배는 조선기독교연합회와 주한미군이 공동주최한 행사였는데, 설교자는 한경직 목사였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韓國基督敎敎會協議會)로 발전했는데, 연원을 따진다면 1924년 9월 24일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 연합 구축을 위하여 결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조직을 갖추었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별로 활동하지 못하고 지내던 중 해방 이후인 1946년 재발족한 교회 연합체였다. 이 조선 기독교연합회는 해방된 현실에서 거 교회적인 축하행사를 의도하고 미군과 협력하여 연합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연합예배 장소가 조선신궁터였고, 신사의 입구에 세우는 기둥문인 도리(鳥とり)가 그대로 남이 있음을 볼 수 있다(사진 참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모질게 강요하고 박해하던 신사제도의 총본산인 신궁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날 모인 연합 집회에 나온 성도는 1만 5천명에 달했다. 이날 행한 한경직 목사의 설교문은 ‘한경직설교전집’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부산에서는 언제부터 연합예배를 드렸을까? 호주선교사였던 도로시 레가트(Dorothy F. Leggatt, 이혜수)에 의하면 1949년이었다. 1928년 내한하여 통영, 마산, 부산에서 사역하고, 1941년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해방 후 1947년 다시 내한하여 6.25전쟁전까지 부산에서 일했던 도로시는 1949년 5월 27일 자로 쓴 부산에서의 부할절 연합예배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의 신자들은 부활절 새벽예배를 언덕 받이에 모여 드리기를 좋아한다. 부산에서는 교회가 연합하여 일본 시대 신사언덕(Shrine hill)으로 알려진 곳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이곳은 경상남도의 대표적인 일본 신사가 있었던 곳인데, 현재 한국 전역에 신사가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다. 이날 예배는 부활절에 부르는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기다렸네’로 시작되었는데, 600여 명이 참석하였고, 설교자는 권임한 목사였다.” 레가트가 말하는 신사언덕이란 다름 아닌 용두산공원이었고 연합예배를 드린 부활주일이 4월 17일이었다. 서울에서 남산 조선신궁터에서 부활을 기념했듯이 부산에서는 용두산신사가 있던 바로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한 것이다.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십자가를 져야 했던 성도들이 천조대신을 섬기던 불신의 터 위에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했으니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왜정시대를 살았던 당시 성도들에게 있어서 부활절 예배는 더욱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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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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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교회부지 매입 시 고려해야 할 건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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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의 버젼은 부지매입이 완료되는 시점부터 실질적인 과정이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즉 교회의 부지매입은 교회건축과정에서 거의 반을 차지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처럼 교회의 부지매입은 중요한 의사 결정 단계이다.
어떤 교회는 부지매입이 잘못되어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교회건축허가가 나지 않는 부지를 매입하는 경우와 허가는 득할 수 있으나 구모가 제한되는 경우, 부지가격이 싸서 매입했는데 시설의 설치를 위해 소요되는 시간시설의 설치를 완료한 후 소요비용을 계산 해보면 결코 싼 부지가 아닌 경우 등 여러 형태의 경우를 볼 수 있다. 먼저 부지 매입을 하기 전에 반드시 고려할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건축허가가 가능한 곳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건축법에서 교회건축허가가 가능하지 않는 곳은 선택해선 안 되며 건축허가가 가능한 곳이라 할지라도 관계 구청이나 시청 건축과에 문의하고 결정해야 한다.
② 부지가 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수도, 가스, 맨홀, 하수도, 전기, 도로 등의 기간시설이 완비된 곳인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기간시설이 구비되지 않는 부지는 이에 대한 설치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며 결국은 비싼 부지가 되는 것이다.
③ 부지와 접한 도로 조건은 건축허가와 건축규모 산정에 결정적인 조건이므로 도로망의 여건은 철저히 분석해야한다. 구모면에서 건축물의 대지는 너비 6M이상의 도로에 4M이상 접하여야하고, 막다른 도로, 차량통행 불가능도로는 예외이며 원칙적으로 2M이상 접하여야 한다. 또 도로너비가 좁을수록 도로사전제한의 법적 제한을 받는다. 도로너비의 1.5배 이하의 높이로 건축해야 하며 이 경우 도로가 4M라면 4M×1.5=6M이하로 건축해야 한다.
④ 도로와 대지의 여건상 일조권을 적용해야 하므로 북쪽으로 도로가 있는 부지가 일조권이 배제 되므로 건축 계획에 절대유리한 부지이다. 건축법은 북쪽으로부터의 인접대지 경계선에서 건물높이의 1/2를 이격시켜 건축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동서방향으로 긴 장방형의 대지는 일조권을 적용할 때 건축규모가 절때 불리해진다. 가급적 남북방향으로 긴 대지가 일조권 적용에서 유리하다.
⑤ 지목이 대지가 아닌 전, 답, 임야의 대지는 건축허가 전에 개발행위허가를 사전에 득해야 하므로 이 부분의 허가가 가능한 곳인지를 사전에 군청에 확인하여 매입해야 한다. 이 경우 대부분의 도시 계획이 비도시 지역이므로 도로구조와 상수도, 하수도, 전기, 가스, 전화 등의 기간시설이 구비된 곳인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⑥ 대지가 경사부지일 경우 잘 활용하면 건축법의 용적율 제한이나, 지하층 산정 등에 유리하게 건축 할 수 있다. 지하층은 정면에서 1층과 같은 조건이되며 용적율 산정에서도 제외되므로 경사부지도 잘 고려 해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교회의 부지 매입은 매입 전에 충분히 법적이 내용을 분석하고 매입해야 하며 건축사나 관계 공무원의 자문을 받고 기도 속에서 선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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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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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사랑의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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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 복음병원에 교목으로 근무하면서 故장기려 박사님과 함께 성경공부도 하고 가까이서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분은 말주변도 없이 조용한 분이셨지만 한국의 슈바이처요, 사랑의 사도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이셨다. 그분의 어록 중에서 복음간호 전문대학 복도에 붙어있는 “사랑의 동기가 아니고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글이 기억에 남는다.
왜 사람들은 장기려 박사님을 사랑의 사도라 할까?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북한에 남겨둔 아내 때문에 월남을 해서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셨다. 이북에서 김일성 주치의까지 했던 명망 있는 의료인이었는데 6.25전쟁 이후 부산에서 무료진료기관이었던 복음병원을 설립했고, 이후 청십자 의료보험을 만들어 가난한 환자도 수술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수많은 환자들에게 사랑의 인술을 베풀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사랑도 실력이고 기술이고 예술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지면 누구라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도 배우고 연습해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 사랑은 달달한 꽃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인생을 안다. 가슴 짠한 사랑, 속 터지는 사랑,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마음, 은총, 헤세드, 측은지심이다. 사랑은 유약하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불사르고 희생하는 것이다. 엄마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해를 보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러브스토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증거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주신 것이다(요3:16).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의 값인 사망,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고난의 잔을 날 위해 다 마셨나이다. 죄인 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라고 부를 가치조차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정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말이 많은 세상에서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손주 사랑은 오면 좋고 가면 더 좋고, 그냥 다 좋은 것이다. 스바냐를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랑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사랑으로 이길 수 있다. 사랑의 힘은 강하다. 미움과 분노가 있을 때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다. 사랑하며 섬길 때 새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마다 사랑이 아니고는 십자가를 이해 할 수가 없다. 오매불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감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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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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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무엇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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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발생한 ‘산청산불’은 장장 213시간 34분 만에 불길이 겨우 잡혔습니다. 2022년 3월의 ‘울진산불’에 이어 두 번째 긴 시간이라고 합니다. 대형 산불이 최근 들어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환경위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산불보다 더 무서운 무언가가 우리를 삼키려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마지막 장에서 ‘세계를 태울 만큼 큰 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에크피로시스(ecpyrosis)”를 사용하여 “지나친 믿음이 지옥을 불러들인다”라고 썼습니다. 미국의 역사·경제학자 닐 하우는 『제4의 대전환』(한국경제신문, 2024)에서 바로 이 개념을 차용하여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이 일종의 “에크피로시스”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시민 행동이 최고조에 달하고, 외부공격자로 판단되는 모든 세력에 맞서 전면적인 투쟁이 일어날 위험이 가장 크며, 내부적 정치 혁명이나 내전이 일어날 위험 역시 가장 크다.”(357 p.)
그런데 닐 하우가 진단한 미국의 상황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대체로 미국의 블루존(민주당 지역)은 더 부유하고 더 건강하며, 교육 수준이 더 높고 전문직이 많고 이동성이 더 크며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하고 인종이 더 다양하다. 미국의 레드존(공화당 지역)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많고 이웃과 더 친밀하며 자선 모임이 더 많고 더 가족 중심적이며 이동성이 적고 더 폭력적이고 덜 관료적이며 세금을 덜 낸다. 블루존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창의적이고 첨단기술에 뛰어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고, 레드존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345 p.) 여기 나타난 블루(blue)와 레드(red)는 현재 한국의 상황에도 아주 잘 맞습니다. 대체로 진보는 파랑을, 보수는 빨강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두 가지 색상이 지금 이 나라를 온통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표방하는 정치색이 사람을 비롯한 방송과 모든 영역들을 집어삼키는 일종의 “에크피로시스”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문제는 앞서 인용한 에코가 제기한 ‘지나친 믿음’ 곧 ‘광신(狂信)’입니다. 이는 기존 종교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믿음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이미 언론인 강철주는 1966년부터 10년 동안 중국 대륙을 삼켜버렸던 ‘문화대혁명’ 역시 “지나친 믿음이 불러들인 지옥” 곧 ‘광란의 에크피로시스’의 일종이 아닐까 하고 질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시사저널 2004. 7. 6). 홍위병들의 극좌주의적 광신으로 말미암아 혁명은 “한 밤중에 각목을 들고 들이닥친 제자들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어서 “학대와 억압 그리고 고문과 낙인”으로 사람들을 삼켰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민주주의 헌정 질서 파괴, 그리고 브레이크 없는 전쟁과 학살!”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최근 이스라엘 정권을 바라보며 종교적 광신과 결합한 극우 세력이 국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이라면서 제시한 칼럼 제목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던 자들이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미국국회의사당에 난입하던 몇 년 전 장면도 유사하지요. 당시 사상 초유의 행동 바탕에도 종교적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권이 출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인 이념이 우리를 집어삼키지는 않을까 근심하는 시선들이 있습니다. 광신적 사상이 많은 이들을 집어삼키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전쟁의 화마(火魔)가 문자 그대로 이 나라를 집어삼키지는 않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범세계적인 경제 전쟁이 우리를 통째로 삼켜버리지는 않을까, 가슴앓이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라면 신적 섭리와 경륜의 신뢰 안에서 그래도 희망을 품고 희망을 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헬무트 틸리케의 『하나님의 침묵』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해를 힘차게 맞이하자. 우리는 미래형 인간이다. 우리가 지나갈 음침한 골짜기마다 산이 우뚝 솟아 있어 우리의 도움은 거기서 온다. 이미 산꼭대기는 장차 임할 영광으로 벌겋게 물들어 있다. 벼락은 번쩍이고 소리만 요란할 뿐 결코 우리를 때리지(삼키지) 못한다. 우리가 밟을 길은 이미 평평하게 다져져 있다. 바람과 폭풍의 행로를 정하시는 그분이 길을 닦아 두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놀라게 하실 일이 어디서나 기다리고 있다. 보리라 약속된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6장, ‘불투명한 미래의 문턱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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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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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나무는 원래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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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란하고 살기 힘듭니다.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들이 여전합니다. 길이 막힌 것처럼 보일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삭개오는 여리고성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집단 거주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성지에서 여리고는 예로부터 매우 큰 성읍이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틴 해방기구의 수도가 여리고에 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 업무 책임자로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겉보기 성공과 달리 속사정은 달랐습니다. 그는 여리고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직업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벌레 보듯 했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창녀와 같은 수준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심지어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은 던져버리던 때였습니다. 삭개오는 돈은 있었으나, 외로웠습니다. 그의 가슴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소문은 놀라웠습니다. 그분은 소외된 사람, 버려진 사람들의 친구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 중에는 자신처럼 세리였던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율법적이고 살벌한 유대 사회에 세리까지 끌어안으시는 그런 분이 있다니!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더욱 흥분시켰던 것은 바로 그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는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급하게 뛰어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뵈옵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본문 3절은 그의 좌절감을 말해줍니다. 길에 나갔을 때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를 가로막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의 키가 작다는 것과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 문제는 삭개오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키가 작은 것도 생래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사람이 많은 것도 그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삭개오처럼 우리도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목표를 가졌지만, 가로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세상을 원망합니다. 신세타령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태도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탄식만 하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삭개오의 선택에 유념해야 합니다. 그는 키가 작은 것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것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 순간 키가 작은 문제와 사람이 많은 문제가 동시에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돌무화과나무 패러다임입니다. 자신의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제3의 길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나무가 본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돋아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있었고, 삭개오는 그것을 발견하여 올라갔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찾아보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나무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과 발견해도 그 위에 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발견하는 눈과 그 위에 오르는 용기를 갖기를 원합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나무일까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이 돌무화과나무처럼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분은 본래부터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힘들 때나 기쁠 때나 늘 곁에 계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위에 오르십시오. 그 순간 모든 장애가 극복될 것이고, 목표에 도달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올라가면 부러질 나무에는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늘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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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