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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박물관처럼 미술관처럼 찬미하는 교회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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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 영국 미술매체 ‘아트 뉴스페이퍼’가 2023년 한 해 동안의 전 세계 박물관과 미술관 관람객 수를 조사해 발표한 결과를 보고 다들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886만), 바티칸 박물관(676만), 대영박물관(582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536만), 런던의 테이트 모던 현대미술관(474만)에 이어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6위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418만). 해방과 함께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들어 이렇게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로 자타가 인정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유의 방’입니다. 각각 국보 78호와 83호에 해당했던 반가사유상 두 개를 비교적 널찍한(439m²) 공간에 나란히 배치한 이 방을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탄성이 터집니다. 기념비적인 걸작에 기념비적인 전시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느닷없는 탄생이 아닙니다. 수십 년 간 반가사유상에 천착해 온 박물관장과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았던 몇 번의 과감한 시행착오와 그리고 무엇보다 최 욱이라는 건축가와 신소연이라는 학예연구관의 집념과 창의성이 조합한 결과입니다.
사실 미술이나 조각 같은 예술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갑자기 급등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한국의 필수관광코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정도니 외국인의 방문은 분명히 늘어났는데, 이런 현상에는 BTS(한 멤버가 언급함)나 애니메이션(케이팝 데몬헌터스 관련)도 일조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국내 관람객 수의 증가는 무엇에 기인할까요? 여러 요인 중 하나로 미술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저변을 확대하는데 이바지한 책을 한 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전설적인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의 『서양미술사』(1950)는 아니고, 미술전공자가 아닌 한국인 경영학도 청년이 쓴 『방구석 미술관』(블랙피쉬, 2018)이라는 책입니다. 지금까지 50만 부 가까이 팔렸다는데, 예술서적으로서 이만한 성취가 있었던가요? 더 눈여겨 볼 대목은 이 책이 미친 파급력입니다. “미술관 키워드가 포함된 예술 분야 도서의 출간 총수가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대중이 미술을 접하고 향유하는 접점이 넓어짐에 따라 관련 도서에 관한 열풍은 물론 미술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예스24)
한국에만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작년 말에 앞서 언급했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 10년 간 청소부로 근무했던 패트릭 브링리(Patrick Bringley)라는 사람이 내놓은 뒤 아마존에서 40주 연속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원제: All the Beauty in the World)가 우리나라에서도 잔잔하지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작가는 「뉴요커」에 근무하던 기자였는데, 어느 날 형의 죽음으로 엄청난 상실감에 무너져 내리다가 형과 함께 들렀던 미술관에서 새로운 삶을 택했습니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자리에 지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슬프고 밝은 그림을 찾기 위해 갈라졌다.” 독특한 명성이 자자해서 베스트셀러라는 허명에 쫓기지는 말자는 다짐을 잠시 접고 읽었던 책들입니다. 조원재도 브링리도 그 책 속에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단순히 미술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감정을 그림 속에 이입하고 울분도 따뜻한 시선도 화가들에게서 발견하는 미학적인 노고가 담겼습니다. 그런 공감이 있기에 미(美)에 둔감한 사람들을 미적 여정으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요?
일견 작아 보이지만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이런 담론을 소개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가 이제는 미적 관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종교개혁자들은 한 때 미술과 조각과 심지어 음악까지 다 몰아내려 시도한 바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차원을 넘어서 우상처럼 변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이 존재했지요. 하지만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아름다움 자체를 찬미(讚美)하는 관심과 열정까지 시들해져버리지는 않았을까요? 교회 건축이나 성화(聖畫)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선·미의 창조적 조화와 균형을 이제는 한국 교회도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신앙의 진리와 신앙의 바름을 강조하고 추구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아름다움은 어떻습니까? 국립중앙박물관에 올해 상반기에만 벌써 270만 명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신기록이 예상됩니다.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관한 관심이 이렇게 뜨겁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성도도, 신앙도, 다 아름다우면 좋겠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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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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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믿음은 늘 능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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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주일에 영락교회에서 <믿음은 때로 무능합니다>란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게 할 수 있다는 말씀에 고무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고 제자들이 요청했지만, <믿음을 주노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낙심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할 수 있는 전능자이시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능자의 무능함>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뽕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보다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없이, 정말 무능한 자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건 성부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어도 죄인을 구원할 수 없다면, 아무 성과도 없이 예수님만 애매하게 죽는 게 아닐까요?>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내 아버지께서는 보고만 계실 분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이며, 아버지께서는 구약에서 준비하신 대로 나의 고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다. 아버지의 열심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바꾸셨습니다. 그 후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고 의지하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기뻐하셨고, 그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게 하셔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를 바다에 심는 이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가장 무능한 자처럼 말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는데, 그 결과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고난 중에 있던 욥이 버틸 수 있었던 힘도 이런 믿음에 기인했습니다. 욥기 23장 10절에서 그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이 일정하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욥기 23장 13~14절입니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바울 사도께서 빌립보서를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낼 때, 그는 로마 감옥에 계셨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안위에 대해 많이 염려했습니다. 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이유도 바울을 돌보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사울일 때 예정하셨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복음의 빛으로 부르셨고, 이방을 위한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갇힐 때까지 그를 통하여 많은 이를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설령 복음을 위해 살다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은 막히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기에, 이미 시작하신 착한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고난당했는데, 빌립보 성도들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에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만 믿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믿음은 늘 승리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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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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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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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아는 목사님은 나이 서른에 야간 대학을 다녔고, 서른다섯에 신학을 시작하고 불혹의 나이 사십이 되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방에서 대형교회로 성장시키고 목회가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할 즈음에 그 목사님은 그 사역의 폭을 더 넓히고 싶어 일찍 은퇴를 선언하고 전국 방방곡곡 미자립교회를 찾아 자비량집회를 시작했다. 모두가 바보라고 할 때 그는 바보 사도 바울의 흉내라도 내고 싶어 그 고난의 길을 자초했다. 대부분의 동역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긍정적 삶의 교훈을 이야기한다. 시편 18편 1절의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를 들려주고, 고린도전서 15:10절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한다.
하나님이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오직 주님으로 달음질했다. 청년의 때에 먹지 못하고 병들어 쓰러질 때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懷疑)를 느꼈다.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 앞에 통곡을 해야 했던 아픔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절박한 상황에서 어둠을 밀어내는 빛의 말씀이 들려오면서 그는 다시 자기자신의 존재에 대한 기쁨에 몸을 떨면서 감격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43:1)”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된 것,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사실 앞에 그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면서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든 몸은 건강으로 바꾸어졌고 가난한 생활은 마음의 부요에서 삶의 부요로 나아가게 되었다. 행복한 목회를 마무리했고 은퇴 후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한 주일도 쉼 없이 말씀사경회를 인도한다.
그 목사님은 종종 ‘노만 빈센트 필’목사님의 독수리와 닭 이야기를 들려준다. 양계장에서 부화되어 양계장에서 자란 독수리가 자기가 닭이 아니고 독수리임을 깨닫고 날개에 힘을 주어 하늘 높이 날아오른 것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확신할 때 엄청난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내 자신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가치를 깨닫게 되었을 때, 세상 그 무어도 부러울 것 없는 오직 주님으로 삶은 희망과 행복감으로 출렁이게 되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처럼 인간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가능성을 계발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증거되는 것인데 독일의 뇌학자 ‘에코노모'박사는 인간의 대뇌는 무게가 약 1,500g 이며 이는 핑크색 제지와 같은 고체인데 두께가 평균 3mm이고 그 세포 수는 136억 5,300만개가 되며 그 한 개의 세포는 소형 트랜지스터 1개의 성능과 같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노이만‘ 박사는 이 세포와 트랜지스터의 비교 논문에서 뇌세포는 트랜지스터보다 속도가 1만~10만배 빠르다고 발표한바 있다. 이와 같은 뇌를 인간이 평생 얼마나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누구도 1%의 머리를 개발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결론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능성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한다.
꿀벌이 1파운드의 꿀을 채취하기 위하여 5만6천 송이의 꽃을 찾아다닌다. 가령 클로버 꽃인 경우는 한 송이 안에 60개의 튜브(flower tube)가 있으므로 벌은 336만회의 작업을 거쳐 1파운드의 꿀을 얻는 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과정의 면접 시험 시간에 시험관은 까만 점 하나를 찍은 백지 한 장을 벽에 붙이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응시자는 까만 점이 보인다고 답을 하는 가운데 몇 사람만 백지가 보인다고 답을 하였다. 면접관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왜 이 작은 점 하나만 보는가? 이 큰 백지는 보이지 않는가?”라고 교훈하였다.
실망을 잘 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속을 본다. 인생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과거를 본다. 줄곧 남만 따라 다니는 사람은 흔히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무슨 일을 하다가 중도 하차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눈 한치 앞만 본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흔히 모든 사물을 대강 본다. 좌절하고 절망을 잘 하는 사람을 흔히 보려고 하지 않는다. 보는 것도 훈련이다.
영어 속담에 ‘The parade passes and dogs bark'(행렬은 지나가고 개들은 짓는다.)는 말이 있다. 일하는 사람과 비평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도 되고, 몇몇 말꾼이 시끄럽게 해도 역사의 행진은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 담긴 속담이다. 역사의 키를 잡고 이끌어 가는 사람은 떠버리가 아니라 자기의 길을 조용히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여학생 둘이 소감을 말했다. 한 여학생은 “어쩌면 산이 그렇게 더러워요. 쓰레기는 여기저기 쌓여있고 파리는 왜 그렇게 극성이예요.” 다른 여학생이 말했다. “산에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들국화를 보았어요. 새소리는 마음을 행복하게 했어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어떤 사고(思考)로 보고 느끼는가의 차이다.
‘버클러’ 박사가 신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헬라어 최고점을 받은 학생이 시각 장애자였다고 했다. 그에게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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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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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인생을 연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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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시편을 보면, 대적이 그물을 치고 웅덩이를 파고 함정을 만들어서 억울하게 공격할 때에도 다윗은 곡소리를 내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불렀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 얼굴이 일그러지기 쉬운데 어떤 이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징징거리기 마련인 그 때에 오히려 노래를 흥얼거린다.
다윗은 계속 공격을 당하면서도 마음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확정하고 확정하였다. 마음에서부터 병을 만들지 않고 마음의 쓴 뿌리를 제거하고 마음의 강퍅함을 면하고 마음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마음의 풍금을 연주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하지 말고 네 마음을 튜닝하라.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어라. 주님께 맞춘 채널을 고정하라. 데시벨을 높여라. 파장을 보내라.
무반응, 무대책,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져있지 말고 네 마음을 표현하라. 무엇인가 소리를 내라. 차든지 뜨겁든지 반응하라. 묻든지 따지든지 대화하라. 비전, 도전, 응전하라. 죽네 사네 하지 말고 추임새라도 넣어라. 마음의 풍악을 울려라. 나팔을 불어라. 주님은 우리가 찬송을 하도록 만드셨다. 절대 음감을 깨워라. 나만의 음색처럼, 내 정체성을 찾아서 내 속에 장착된 하나님의 영광을 깨워라. 비파와 수금을 연주함으로 주변에 있는 악기들을 소리 나게 하라. 불협화음을 내지 말고 옆에 있는 가족, 성도들과 동역하며 아름다운 동행을 하라.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타파하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다. 야엘은 마치 아침 해가 힘 있게 솟아오름과 같았다. 어둠의 자식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거지를 하지 마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노래와 연주는 사람의 눈을 열어 선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청음이 능력이다. 득음이 음악의 시작이다. 듣는 귀가 음악적인 재능이다. 경청이 지도자의 조건이다. 사람의 말은 들으면 시험에 들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은혜를 받는다. 세상의 잡다한 소리에 귀를 닫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말씀으로 온다. 사랑하면 들린다.
지치고 상한 엘리야는 하늘의 세미한 소리를 듣고 회복이 되었다. 예배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징징거리지 말고 노래를 불러라. 찬송 한 곡을 잘 부르면 가슴에 쓰나미가 밀려오듯이 심금이 울린다. 다윗은 수금을 연주함으로 사울왕의 정신병을 치료한 뮤직 테라피를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였다. 아들 중 막내였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는 대서사시를 만들었다.
솔로가 듀엣이 되고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되고 뮤지컬이 되고 오페라를 연주하게 된다. 손경민 목사님처럼 인생을 작사, 작곡, 노래하라. 네 인생의 지정의를 터치해서 노래하라. 연주하라. 연출하라. 네 인생을 최고의 악기로 만들어라. 별일이 다 있는 인생을 살아가며 우울감에 찌그러져 있지 말고, 자신만의 음색으로 고백하고 온몸으로 연주하라. 그것이 찬양의 멜로디가 되고 인생의 주제가가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찔림과 울림과 설렘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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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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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 8] 주일학교는 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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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교회학교)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조직되었다. 교회 성장과 신앙 전수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저출산 등으로 인해 주일학교가 쇠퇴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교단과 교회마다 여러 방식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일학교에 대해 교회법은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주일학교는 조선예수교장로교회 헌법(1934년)에 언급된다. <예배모범>(7장 주일학교)에 실려 있다. 주일학교는 어떤 순서(절차)로 모이며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교장과 교사의 할 일이 무엇인지 나온다.
우선, 주일학교에서 적용하는 절차는 기도, 찬송, 신경, 교회의 요리(要理)와 헌법 등을 공부하고 전도사업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다.
둘째, 주일학교로 인해 주일 공예배에 출석하는 것과 또한 부모가 직접 자녀 교훈하는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셋째, 항상 당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넷째, 주일학교 교장은 교사 선발, 학생들의 공부와 경건한 자세에 전체 책임을 맡는다.
다섯째, 주일학교교사는 자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준비해야 하며, 아직 믿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권면하고 심방하며, 특별히 아프거나 사고가 있을 때 심방해서 하나님의 복을 빌어야 한다.
근데 이렇게 주일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신경과 요리, 헌법을 공부하며, 전도사업을 위해 헌금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특별히 입교(入敎, 공적 신앙고백)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역시 1934년 헌법 <예배모범>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교회 교우에게서 출생한 자녀로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는 교회의 권고와 치리 하에 있고 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요리문답을 독습하게 하며, 기도하는 것과 죄를 미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며, 성년이 된 다음에는 출생하면서부터 교회의 교우 된 것을 알게 하고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 참여를 청원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와 특권임을 기억케 할지니라”(예배모범. 10장: 입교(入敎)예식)
이로 볼 때 주일학교(교회학교)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즉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가 주일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 성년이 된 다음 입교를 통해 “교회의 교우 된 것을 알게 하고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에 참여하도록”하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포함한 팔츠 영지에 속한 교회들은 <교회법>을 작성했다(1563년). 그런데 그 <교회법> 목차를 보면 주목할 점이 있다: 설교가 제일 먼저 나오고, 둘째로 세례, 셋째 요리문답(要理問答), 넷째 성찬, 다섯째 권징, 여섯째로 구제/기도 등의 순서가 나온다.
이 순서를 잘 보면 <교회법>의 목적은 말씀이 온 회중에게 전해지고 가르쳐지기 위함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설교가 나온다. 그런데 설교가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언약의 표인 세례가 나온다. 이를 위해 주일학교에서 요리문답으로 교육한다. 그리고 입교를 통해 성찬에 참여하게 한다. 여기서도 주일학교(교회학교) 교육의 목적이 분명히 나온다. 즉, 주일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것을 배우고, 또 성경과 신경과 요리문답, 헌법을 공부해서 마침내 입교를 통해 자신이 교회의 교인된 것을 알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교회법>은 직분과 치리회의 질서를 넘어, 신앙교육을 위한 질서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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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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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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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여름사역이 시작된다. 성경학교와 수련회와 단기선교와 아웃리치의 현장들이다. 성경학교와 수련회는 신앙훈련과 체험이 중심이고, 단기선교와 아웃리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대상들에게 접근해서 지원하는 활동이 중심이다. 예외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름사역의 봉사자들 대부분은 삶의 여유와 은혜의 고백과 은사의 달란트를 가진 자들이 감사와 사명과 의무라는 신앙의 관점에서 자원하고 헌신한다. 이러한 연고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봉사자들은 동행자가 아니라 시혜자의 관점에서 대상자들에게 접근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도적 사역과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 시혜자적 위치와 능력, 헌신자적 마음과 신체를 가진 자들이 봉사자가 되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지나친 자신감과 자기중심적 행동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현지의 상황과 일체화 되지 못하는 문제를 파생할 뿐만 아니라 차라리 지원, 봉사하지 아니하는 것보다 못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풀러신학교 총장이었던 리차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 진리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타 종교와 일반사회공동체에 자행한 기독교의 비예의적인 일들을 비판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라면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시대와 지역과 공동체를 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이란,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면서도 무례하게 행하지 않고, 다른 신앙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충돌하지 말고, 정중하고 친절한 관용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반인들이 가지지 아니한 ‘비일상적인 정중함’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양과 예절을 말하는 것이다. 타 종교와 사회공동체에 기독교적 교양과 예의를 가지라는 것이 성경의 진리를 포기하거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구원의 역사에 선하다고 말하는 다원주의적 성향이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수준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적 진리에 대한 용인이 아니다.
주객이 전도된 십자군 전쟁의 당위성과 우월의식, 종교암흑기였던 중세시대의 진리독점과 권력탐욕이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포위하고 박해하였을 때 자행된 잔인함과 거만함의 치욕스런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 지역과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 개인과 개인의 혐오 그 기저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종교적 지배성, 우월성, 배타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가 시행하는 여름사역의 현장에도 십자군 전쟁의 교만함과 중세시대의 잔인함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단기선교 현장에서 믿음과 신앙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실천하는 땅 밟기-타종교의 전당에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건물에 십자가를 그리고, 봉헌함에 전도지를 삽입하는 행위-는 타종교와 타종교인에 대한 무례와 교만이다. 교회 마당에서 타종교인들이 함께 주문을 외우고, 교회 건물에 부적을 그리고, 헌금함에 탱화나 코란을 넣는다고 생각해보라. 또 아웃리치 현장에서 시행되는 도시교회 프로그램의 강제적 주입, 맘몬주의와 번영신학의 자랑, 지역의식과 토속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는 정복주의적 우월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무례함과 거만함이다. 종교를 포괄적 의미로 정의하면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통해 학습되고 축척되어진 문화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가 문화보다 우위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종교가 문화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오히려 하위개념을 가지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면 종교는 단지 한 부류의 집단들이 그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문화현상일 뿐이다. 또 문화에는 하급문화, 상급문화가 없다. 다름의 문화가 있을 뿐이다.
일반인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불친절하고, 거만하고 차별하고, 폄하하고, 혐오하는 자들을 향해 무례한 자들이라고 낙인찍는데, 하물며 절대적 사랑과 주도적 희생과 순교적 용서를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비성경적 무례함을 가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모든 사역자들이 다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가짐으로 이번 여름사역의 현장에는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기독교적 예절과 교양을 가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과 삶을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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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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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 전쟁의 기적: 기적으로 살아남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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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3년1개월 2일, 곧 1,129일 간의 전쟁은 민족적 시련이자 국가적 재난이었다. 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건물, 도로, 철도, 교량, 항만 시설 등 국가 기간산업은 파괴되었다. 주택, 교육·의료시설, 종교시설, 문화재도 파괴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인명 피해였다. 한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등 군인 270만여 명과 민간인 250만여 명(남한 99만968명, 북한 150만)이 죽거나 다쳤고, 남편을 잃은 과부는 30만 명, 이들에게 딸린 자녀들은 약 51만7천 명에 달했다. 10만 명의 고아가 생겨났고, 이산가족은 1천만 명에 달했다.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를 복구하는 데 최소한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한국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대국으로 우뚝섰다. 기적이었다.
6.25는 처음부터 불리한 전쟁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비안정적인 상태였다. 해방 후 좌우익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20일에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게릴라전을 포함한 정치적 대립으로 약 10만 명이 희생자가 생겨났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나고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전체 의석 210석 중에서 이승만의 집권 세력은 겨우 30여 석을 얻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126명이 당선되었다. 정치적 불안정의 반영이었다.
군사적으로 남한은 열세였다. 북한군 병력은 201,050명이었으나 남한은 그 절반인 103,827명에 불과했고, 북한의 항공기는 226대였으나 우리는 22대, 북한의 함정은 110척이었으나 우리는 겨우 36척에 불과했다. 북한의 화포는 2,492문에 달했으나 우리는 절반인 1,051문뿐이었다. 북한은 242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전쟁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였다. 6.25 직전 전방 지휘관들은 대거 교체되어 지휘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2사단장 유준홍 준장이 의정부 7사단장으로, 1연대장 김종오 대령이 원주 6사단장으로, 16연대장 이성가 대령이 강릉 8사단장으로, 국방부 1국장 이종찬 대령이 서울수도사단장으로, 8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대전 2사단장으로, 7사단장 이준식 소장이 육사교장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도사단 소속이었던 2연대가 춘천 6사단으로 예속되어 병력이 서울에서 홍천으로 이동하던 중 전쟁을 맞았다. 의정부 7사단의 예비연대인 25연대도 부대이동명령을 받고 온양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의정부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전쟁 준비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 먼 후방에서 게릴라소탕전을 벌이고 있어서 남침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더 심각한 현실은 농활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장병들은 주말에 대대적인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국외적으로 볼 때, 남한은 무방비 상태였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군을 시작하여 1949년 6월 말에는 군사고문단 495명 외에는 완전히 철수했다. 그해 8월에는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그해 10월에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김일성 정권에 힘을 부여하였고, 한반도에서 패권을 노리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다. 국제적으로나 국외 사정으로 볼 때도 불리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25는 패배가 예견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일곱가지만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 미국의 신속한 참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조리 주에 있는 사저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런데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고 이틀 후인 6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참전과 파병을 결정했다. 그때에는 애치슨 라인이 유효했고, 한미 간에 방위조약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참전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참전 결정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 공군의 한국전에 대한 작전 명령을 허락했고, 이틀 후 미육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도록 허락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1주일도 않되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공군과 육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고, 전쟁기간 중 파견된 미군은 40만 명이 넘었다. 트루먼의 신속히 결정 배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간절한 호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면 5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찬들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호소가 트루먼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 지도부의 김두봉과 홍명희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이 소련 문서에서 드러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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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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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 장래증축과 확장성을 고려한 건축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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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이 완성되고 입당 후 약 2~3년 정도가 지나면, 한국교회는 크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주차장의 부족현상이며 둘째는 교육공간의 부족 현상이다. 주차장의 부족 현상은 현재 주차장법이지방 조례마다 차이는 있으나 보통 100㎡마다 당 1대의 주차를 설치하게 되어있다. 가령 1000평 구모의 교회라면 약 1000석 규모가 되는데 이 경우 33대의 법적인 주차대수가 확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현실상 겨우 법적주차대수정도밖에는 설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1대의 주차장을 설치하기 위해서 약 7.6평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00석 규모교회에 33대의 주차장을 설치하므로 현실적으로는 맞지 않는 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주일예배시 주변이 항상 주차장으로 혼잡스러운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차장의 확보는 현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장래성에 대비한 주차장의 계획은 교회부지에서 직선끼리 300M이내에 주차장 부지가 있으면 건축허가가 가능하다. 주차장으로 전용가능한 공간의 확보도 장래성에 주요한 수단이다. 또한 기계식 주차장도 고려해 볼만 하다. 기계식 주차장은 적은 공간에 수납식으로 많은 주차를 수용하므로 공간의 효율성에서는 유리하다.
교회장래성과 확장성에서 고려해야 할 내용 중 부족한 교육공간의 확보 문제이다. 한국 교회의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은 한국교회 공간의 분포가 예배홀(본당)위주로 건축되어지기 때문이다. 즉 100평 교회를 건축한다면 본당이 50평을 차지한다. 전체 연면적에서 본당이 차지하는 비율이 보통 45%에서 50%평을 점유한다. 또 공유시설(계단, 홀, 화장실, 복도)를 제외하면 순수 교육공간의 분포는 17%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처럼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을 극복하기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옥상공간의 활용이다. 옥상공간은 건축법상 바닥 면적에 산입되지 않으므로 교회에서 부족한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옥상의 외벽난간을 2.5M정도 설치하고 지붕에 경량식 구조로 덮개를 설치하면 내부실로 사용할 수 있다. 또 옥상공간은 야외 청소년 체육 공간 카페, 노천극장, 기도처소 등의 다양한 기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대부분 교회지붕이 경사 지붕구조로 되어 있어서 활용할 수 없게 되어있다. 무의미한 교회 형태는 오히려 획일적이 형태만을 양산시킨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 현실에서 작은 짜투리 공감 하나도 아쉬운 여건임을 감안할 때 옥상공간의 활용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 건축시 에는 항시 향후 10년 앞을 보고 장래성을 대비해서 계획해야 한다. 불과 2~3년 후에 다시 증축하거나 리모델링 해야만 하는 교회가 많다. 10년 후를 보고 건축하기위해서는 2~3개 층을 현재 건물에서 증축 가능하게 기둥의 크기나 인프라시설을 여유 있게 고려해서 장래에 증축 시에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증축의 방향성은 도심지 교회는 부지가 협소한 관계로 수직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천원교회는 부지가 넓으므로 수령방향으로 증축이 이루어짐을 교려하여 이에 따른 동선과 공간의 배치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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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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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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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아 부산에 있는 나를, 서울에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오후예배 설교자로 초청해주셨다. 나를 초청해주신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사랑(장애인)부를 담당하고 계신다.
서울 근교인 의정부에서 40여 년간 살았지만,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기에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그래서 설교 당일에 올라가 헤매지 말자는 마음과 사랑부 성도들과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 전인 토요일에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초청해주신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사랑부 예배 때에도 설교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순간, 망설였다. 나는 나를 초청해주신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사랑부 예배와 설교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서 참여할 생각이었는데 설교라니, 그리고 나 보다 더 심한 장애로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 앞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님과 통화를 하여 몇 가지를 물었다. 일단 사랑부 예배시간을 물었고, 예배에 참석하는 장애유형과 나잇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이 교회에서 오후에 설교를 하는데 사랑부 성도들도 참석여부를 물었다.
나의 물음에 목사님께서 답을 해주셨는데, 사랑부 예배는 장년부 예배시간과 같은 11시며, 자녀들이 사랑부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부모들은 장년부 예배를 드린다. 그렇게 각자 예배를 드린 후, 부모들이 사랑부 예배실로 와서 점심을 함께 먹고, 소모임을 잠시 하고 귀가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보니 4시에 있는 오후예배까지 사랑부 성도들이 교회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듣고, 부산에서 나를 서울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더 있으신지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랑부 예배 설교를 수락했다. 무명(無名)인 나를 부산에서 서울까지 부르신 것은 장년부에게 장애인식전환교육도 중요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서 장를 가진 성도들을 만나 교재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께서 날 부르신 뜻에 더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주일 오전, 사랑부 예배시간 전 보다 일찍 도착하여 초청해주신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고 기도회를 함께하고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이날 나의 설교제목은 "약함을 자랑하라"였다. 나를 포함하여 장애를 가진 자들이 열 명 남짓이었는데 예배드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고,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 후, 한 형제는 나보고 다음 주에 또 올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건 아마 하나남의 자녀라는 것과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공통점이 처음 만난 우리의 사이를 허물어준 것 같아서 사랑부 예배에 참석한 것이 내겐 기쁨으로 기억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의정부에서 장애인교회를 7년 섬겼던 경험과 부산에서 3년 사는 동안 여러 장애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경험들이 이날 참으로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고, 세상 관심사에서 멀어진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고 장애를 가진 내가 목사로 부름 받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신체는 갈수록 연약해진다 하여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나의 약함을 자랑할 생각이다. 나의 약함을 하나님은 강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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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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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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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터진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충돌을 포함해서 도처에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들과,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는 환경적 재앙들, 빈발하는 범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와 만연하는 우울증과 불안증세 그리고 늘어만 가는 과잉행동결핍장애와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병리적 현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관적 시각을 가진 이들은 지금 우리가 절망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최근 등장한 “절망사”(絶望死, Deaths of Despair)는 ‘절망사회’의 인상적인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Stewart Deaton)이 제기한 개념인데, 경제를 넘어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양극화와 이로 인한 박탈감과 자괴감과 소외감으로 말미암아 자살이나 약물 및 알콜 중독에 따른 사망이 급증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국가 차원의 절망사 연구가 있었습니다(2022년 6월,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보고서). 이런 지경이라면 우리에게 아니 인류에게 희망이란 존재하는 걸까요?
절망은 현대에 비로소 등장한 신조어가 아닙니다. 고비마다 사람들은 절망을 외쳤습니다. 중세의 흑사병은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절망이라는 더욱 치명적인 질병을 안겼습니다. 151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로마를 방문했던 루터는 당시 실상을 목격하고 얼마나 절망했던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란 말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인적·물적피해와 함께 끔찍한 참호전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을 혹자는 “절망의 전쟁”이라 불렀습니다(존 엘리스, 자크 타르디, 반철진). 75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많은 이들을 그야말로 절대 절망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를 ‘희망’이라 불렀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아서 더 절망적인 상황이 무수한 성경에는 절망 대신 소망이란 단어가 들꽃처럼 피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자 한병철은 희망이란 세계내부 사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정신의 상태 혹은 영혼의 차원이라 정의합니다(『생각의 음조』(2024), 142). “무엇보다 이 희망은 비록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이 외적 조건이 절망적일지라도 살아갈 힘을 주고 항상 새로이 시도할 힘을 주는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이 감옥에 있을 때 쓴 서신(Briefe an Olga)에 나오는 말인데, 역시 감금상태에 있던 바울이 남겼던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빌 1:20)라는 표현과 내용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하면 희망을 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림이라는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희망을 역설적이라고 보았습니다. “희망은 아무런 활동 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이뤄내려는 비현실적인 갈망도 아니다. 희망은 도약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를 위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와 같다.”(『희망의 혁명』(1968))
희망하면 흔히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와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희망의 철학자요 기독교적 실존주의자인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 일컬었는데 ‘걷는 인간, 길 위의 인간, 여행하는 인간’이란 의미로서 희망의 여정을 걸어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희망하다’는 “현실에 신용을 부여하는,” 즉 “현실에 믿음을 거는, 그럼으로써 현실이 미래의 약속이 되게 하는” 행위입니다(한병철, 139). 그렇지만 현실에 기대를 걸 수 없는 상황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희망의 신학자’라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1926-2024)이 그랬지요. 17세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나갔다가 전쟁포로가 되어 3년을 수용소에서 지냈습니다. 신용을 줄래야 줄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누군가 그를 찾아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찾은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찾았습니다.” 그를 찾은 존재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이 희망과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를 믿습니까? 부활을 믿습니까? 영생의 약속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안심하세요. 당신에게는 절대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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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