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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플랜 B (본문 창세기 25 : 23)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울 때는 A안이 있고, 그대로 안 될 경우를 대비한 대응책이나 또 다른 계획을 플랜B라고 한다. 잠언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드라마틱하다. 하나님의 스카웃은 길거리 캐스팅이 많다. 주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B급 인생도 가망이 있다. 결핍, 부족, 연약한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B급 인생이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낙망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고아, 과부, 소자, 약한 자, 병든 자, 세리, 창기를 멸시치 않으신다. 성경에서 장자를 중요시 하지만 의외로 차자가 쓰임 받은 경우가 많다. 다윗은 여덟째요, 모세는 셋째요, 아벨은 둘째요, 야곱도 둘째다. 하나님의 뜻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다. 장자인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고 털이 많은 상남자 스타일이다. 거기에 비해 야곱은 조용한 자요, 거의 계집아이 같은 분위기였다. 에서는 따놓은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다가 뺏겼지만 야곱은 일생을 통하여 장자권을 쟁취해 나아갔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웠고(뼛속까지 장자), 형님 발을 붙잡고서라도 지기 싫어했고(이기는 습관),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장자권을 샀고, 얍복 강에서 씨름을 할 때는 포기하지 않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했다(이긴 자). 그래서 이름도 바뀌고, 사기꾼이 사랑꾼이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오지랖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복잡한 집안 구조인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가 되어 야곱의 축복을 이루었다. 대중가요에서 싸이는 B급 감성이라고 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강남스타일’을 불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규격화된 딱딱한 모습이 아니라 먼저 망가져서 무겁지 않고 가볍고 재밌는 모습이 편하고 좋다. 세례 요한의 주제는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하는 것이다. 주께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실 때도 베들레헴 들판의 다윗, 바벨론 포로수용소의 다니엘, 미디안 광야의 모세, 애굽 감옥의 요셉, 갈릴리 바닷가의 베드로를 부르셨다. 모두 중심이 아니라 주변 언저리였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예루살렘 다운타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사마리아에서 선한 사람이 나온다. 당시 최고 양반이라고 자처한 바리새인, 고관대작을 차지한 사두개인, 성경박사인 서기관들이 아니라 역사의 아웃사이더들, 외인부대, OB팀, B급 인생들을 들어 쓰셨다. 하나님께는 외모,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질, 중심을 보신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적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 소박한 데서 대박이 터지고, 평범한 데서 비범함이 나온다. 병든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은 나라에서 데려가고, 돈 많은 자식은 장모가 데려가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이 사역을 잘한다. 고물가 시대에 "못난이"상품, "B급"상품, "못생긴 농산물",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 "못난이 감자", "못난이 수산물"이 인기가 있다. 때깔이 좋은 과일은 농약을 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고, 색깔도 꾀죄죄하고 크기도 모양도 볼품없는 과일이 무농약에 진짜배기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셨다. B는 Best의 약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A급이 아니라, B급 인생이라도 들어 쓰신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누구에게도 소망이 있다. 지치고 상한 채 무기력에 빠지지 말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들어 써주시옵소서 하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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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30
  • [성서연구]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우리나라에 <찔레꽃>이란 같은 이름의 노래가 세 곡이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박태준> 작곡의 동요인 <가을밤>의 곡에 <이원수> 선생이 가사를 붙인 곡입니다. 이 곡은 엄마 생각을 간절하게 합니다. 이 곡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얼마 전 부모님 살던 집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간절히 그리웠습니다. 그때는 거기가 집이었습니다. 체온을 느끼며 함께했습니다. 늙고 연약해지셔도 부모님은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젠 다 안 계십니다. 손자가 태어났을 때도 알려드릴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것에 눈물이 났습니다. 부모님의 부재는 집의 상실로 다가왔습니다. 종종 나중에 어디서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근 삼십여 년 살았던 부산, 강을 좋아하니 북한강이나 남한강변, 산을 좋아하니 공기 좋은 설악산 근처, 아니면 아들이 사는 울산 근처, 혹은 아직 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서울 근처에 살아야 하나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러나 어디도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가지 않는 큰 이유는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생존의 조건으로 의식주를 말합니다. 그중에서 <주>는 단순한 집이 아닙니다. 사람은 흔들리는 나그네입니다. 집은 인생을 붙들어주는 것은 마음 붙일 곳입니다. 그곳은 집 이상입니다. 고대광실이라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인생을 붙들어주지 못합니다. 초가삼간이라도 마음이 가는 곳이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곳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8장 3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여기 <곳>이란 <마콤>이란 히브리어인데,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NIV성경』은 이라 했고, 『쉬운성경』은 <자기 집>으로, 『현대인의성경』은 <자기천막>으로, 『새번역성경』은 <자기가 사는 곳>으로 번역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기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그가 살던 마므레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5킬로 정도 남쪽에 위치한 헤브론 근처로 보입니다. 그의 주거 형태는 장막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소돔을 멸망시키러 가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 대접했고,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을 낳을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 후 그들이 소돔성으로 떠날 때 아브라함은 따라가며 전송했습니다. 창세기 18장 16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장마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몇 분 정도 걸어야 할 거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은 어떠했을까요? 그곳에는 아내 사라와 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 하나님께서 계셨을 것입니다. 일찍이 조카 롯이 소돔 방향으로 떠난 후 아브라함은 그대로 빈들에 남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3장 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장막은 불편했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잘 지어진 성읍 안에서 살았으나, 유황불에 멸망했고, 아브라함의 장막은 안전했습니다. 소돔이 멸망하던 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전송하던 곳에서 소돔의 멸망을 바라보았습니다. 창세기 19장 27~2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우리의 <곳>은 어떤 곳인가요? 우리의 <곳>도 하나님을 뵙는 곳이 되길 원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둘러싼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용서하시고 변화시키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녀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겁박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그 전날 분노한 채로 <자기 집>으로 갔고,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곳>이 어떤 곳인가에 따라 장차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까지 결정될 것입니다. 삶의 처소를 하나님 안에서 경건하게 가꾸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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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3
  • [소강석칼럼] 저도 옳고, 그분들도 옳았습니다
    지난 7월 초 강원도 오색그린야드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 반까지 단 한 시간도 안 빠지고 교역자 워크숍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냥 참여만 한 것이 아니고, 모든 강의를 하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보며 워크숍을 인도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 몇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부부 간에 한 주간 동안 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한 분의 목사님이 “역시 소 목사님은 젊고 은혜가 충만하시네요. 오늘 하루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2박 3일 동안 계속합니다.” “예, 그러시군요.” 다음 날 커피숍에서 거기 오신 모든 분들이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응당 가서 인사를 드렸지요. 그중에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 쉬엄쉬엄하세요. 우리가 시간이 남아서 놀러 온 것이 아닙니다. 휴식을 하고 재충전을 하러 온 것입니다. 소 목사님 그러다가 반드시 탈진이 오거나 쓰러집니다.” “예, 그 말씀 유념하겠습니다.” 저는 또 수련회 현장으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식사 후에 또 그분들과 마주했습니다. 오색그린야드라는 공간이 입구는 하나고 좁지 않습니까? “목사님, 우리하고 식사는 함께 못하더라도 차라도 한 잔 마십시다. 우리는 내일 OO호실에서 보이차를 마십니다. 9시 반까지만 오시면 됩니다. 목사님이 한 시간 빠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는 사실 저녁 타임 끝나고 시원한 주전골도 한번 못 걸어봤거든요. 점심 먹고 1km 남짓 걷다 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사실 저녁 타임 끝나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용소폭포까지는 걷다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여라도 제 마음이 해이해지고 나태할까 봐 걷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체인 리액션을 생각하다가 어떻게든지 다음 날을 위해 빨리 잠자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몸이 피곤하고 어깨가 수천 킬로, 수만 킬로처럼 짓눌려도, 이것은 담임목사만이 누리는 특권이자 고통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결국 그 차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지금도 그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신혼부부들을 위한 ‘피어라 봄’을 진행하였고,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여름수련회가 끝나자 저는 탈진이 왔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다행히 재빠르게 이재훈 의료목사님(다건연세내과 원장)이 링거를 놔주셨고, 김용선 장로님(성빈한의원 원장)이 보약을 지어 주셔서, 그나마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피곤을 느낄 때마다 자꾸만 그분들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당시로써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생각도 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이 격언처럼 들렸지만, 저의 행동도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기회가 다시 온다 해도, 저는 저의 생각대로 밀어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한국교회 큰 지도자이신 목사님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나 소 목사는 솔직히 서자 출신 아닌가? 서자가 받은 은혜와 적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받은 은혜는 결이 다르지 않는가. 소 목사나 나나 비록 서자 출신이지만 맨손으로 개척을 해서 교회 부흥을 이룬 사람은 적자하고 결이 다르지 않는가. 우리가 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이네. 나도 목회를 하면서 단 한 해도 안식년을 가져본 적이 없네. 서자에게 무슨 안식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께 울먹이며 죽도록 충성만 할 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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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3
  • [시사칼럼] 저출생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의 저출생문제는 주지의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전략이 있겠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인구 수준을 유지하는 전략입니다. 적령기의 미혼남녀에게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은 이런 거시적 전략의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작 당사자들로부터 들려오는 반응은 한결 같습니다. ‘또 아이 낳으라는 얘기야?’ 저출생문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보도나 연구의 결과가 대개 이러한 ‘결혼-출산의 독려’로 끝이 났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또 하나는 인구 감소를 당연시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전략입니다. 전자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존재하니 여기서는 후자를 먼저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지금의 인구도 많으니 앞으로 더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류가 인구적, 경제적으로 축소하는 쪽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인류에게 복음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300여 년간 축소 과정이 파멸적이지 않는 경로를 더듬어 가야하는데,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길이다.” 일본의 월간 <세카이(世界)>의 특집 ‘사피엔스 감소-인류사의 전환점’에 ‘제로성장경제와 자본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오노즈카 도모지(小野塚知二) 도쿄대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교수의 말입니다(한승동, 피렌체의 식탁, 2021. 8. 24). 한국에도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절반세대가 온다』(현암사, 2023)의 저자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절반세대”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출생아 100만 시대(1970년)에서 절반인 49만 대로 떨어진 2002년생과 다시 그 절반(24만)이 되어버린 2022년생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첫 번째 절반세대부터 향후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에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던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최슬기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이들이 군에 입대하고 직장인이 되는 3~5년 뒤 병력 부족과 구인난 등 사회적 충격이 본격화될 것”이라며 “현 인구로는 기존사회를 운영할 수 없는 만큼, (이제) 사회적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진단합니다(절반세대가 온다, 39). 일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절반세대도 그러하다면 그 절반밖에 안 되는 두 번째 절반세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대에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현재 인구의 절반만으로도 운용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족한 인구를 자연출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보충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일이 어쩌면 더 현실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이민’입니다. 사실 이민은 미래의 대안이라기보다 작금의 현실입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없는 마을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경기 포천의 어느 농부의 말) 법무부는 벌써 외국인 근로자 선발 요건 완화와 인원 증가를 위한 숙련기능인력 제도 개선책을 내놓았고(2023년 9월), 외국인 계절근로자의 최대 체류 기간마저 5개월에서 최장 8개월로 늘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연간 11만 명 이상의 인원이 이렇게 끊임없이 한국사회로 유입되지만 때가 되면 그대로 다 빠져나간다는데 있습니다. 필요한 인력자원을 한국사회에서 받아들이려면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이민청’의 신설입니다. 작년 12월 법무부는 출입국·이민관리청 신설 방안을 마련했지만 법제상으로는 아직 답보 상태에 있다 합니다. 사실 법이나 제도를 바꿔서만 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 어느 국가보다도 단일민족의식이 강한 우리 사회의 특성 상 인식과 아비투스(habitus)의 대전환이 일어나야만 ‘이민’이 근본적인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바람직한 대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데려오는 방안입니다. 명승환 인하대 행정학과 교수와 같은 이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 사람이 없다. 재외동포가 한국에 돌아와야 한다.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한국을 사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매일경제, 2024년 9월 6일) 재외동포는 숫자만도 750만 명 가까이 추산할 만큼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종교 등 여타 이유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여기는 다른 민족에 비해 부작용도 적습니다. 작년 6월 ‘재외동포청’이 ‘이민청’에 앞서 출범한 이유도 이런 부분에서 기인합니다. 치열한 유치 경쟁 끝에 재외동포청이 들어선 인천의 경우 벌써 ‘재외동포 지원 조례’를 만들어서 공포하는 빠른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본국의 한인들이 디아스포라 2, 3세대 한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변화가 있어야 하겠고, 이들이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각종 규제나 장벽도 필요하다면 제거해 주어야 하고, 자녀 돌봄이나 교육과 같이 민감한 사안들도 적절하게 조율해야 합니다. 자, 이제 모두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언제나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국난을 발판 삼아 새로운 도약을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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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3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부산경남지방에서의 서양음악3
    부산지방에서 서양음악은 초기 설립된 교회를 통해 선교사들의 지도로 찬양대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번에는 북장로교 선교부와 초량교회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부산에 온 첫 북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의 부인 애니(Annie Baird, 1864-1916)는 음악 애호가였다. 캔자스 주의 토피카 출신인 그는 피아노나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고,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예수사랑하심’을 번역했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애니는 다섯 자녀를 출산했는데, 첫째 딸과 넷째 아들을 한국에서 잃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1891년 1월 29일 부산으로 입국하여 서울에 체류하던 중 그해 9월 초 부산으로 이주하여 부산지부를 개척했다. 1892년 7월 5일에는 첫 아이 낸시 로즈(Nancy Rose)를 출산했는데, 1894년 5월 13일 두 돌도 채우지 못하고 뇌막척수염으로 사망했다. 이때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 지금 찬송가 387장에 수록된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며 곤하여”라는 가사이다(그의 넷째 아들 아더 팰리스는 1901년 12월 5일 평양에서 출생했는데 두 돌이 되기 전인 1903년 1월 18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이를 시작으로 애니는 여러 찬송가 가사를 썼다. 애니가 작시하거나 번역한 찬송가가 ‘찬미가’(1895, 1897)에는 10편, ‘찬셩시’(1898)에는 28편이 게재되었고, 1905년판 ‘찬셩시’에는 58편이 게재되었다. 전체 151편 중 38%에 해당한다. 1983년의 통일찬송가에는 30편이 수록되었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두 곡, 고 “나는 갈길 모르니”(375)와 “멀리멀리 갔더니”(387)가 실려 있다. 윌리엄 베어드는 1895년 1월 부산에 한문서당(Chinese School)이라는 남자학교를 열었는데, 학생 수는 25명 정도였다. 애니는 이 학교에서 풍금을 가지고 음악을 가르쳤다. 베어드는 선교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아내 애니가 찬송가를 가르쳐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고. 서양음악은 선교사들을 통해 교회나 기독교 학교 중심으로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부산에서의 첫 피아노는 북장로교 선교사 사보담(William Sidebotham) 부인 에피(Effie)의 것이었다. 그들이 1900년 11월 대구지부에서 부산지부로 이동함에 따라 피아노도 부산의 서양식 악기가 되었고, 부산에서의 서양음악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량교회에서의 예배, 찬양대의 활동은 사실상 서양음악의 보급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호주선교사이자 일신여학교 교장이었던 위대서(Muriel Withers)가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1918년 내한했고, 1923년부터 부산에서 일했는데 자신이 속한 부산진교회 찬양대 운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1930년대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하였다. 당시 초량교회 이약신 목사는 1931년 9월 말 부임하였는데, 그도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성악에 재능있어 공예배에 특송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그는 진주에서 시무할 당시부터 호주 선교사들과 긴밀했다. 이런 관계로 호주 선교부의 위대서 교장이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하게 된 것이다. 1934년 6월 당시 초량교회 찬양대원은 20여명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이, 교회를 통한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서양음악이 소개되었고, 부산지역의 여러 교회에 찬양대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1934년 말에는 60여 명으로 구성된 부산지역 교회연합 찬양대를 구성하였고, 그해 12월 25일에는 부산시청에서 성탄절 기념찬양대회를 개최했다.(사진) 이때 음악회를 주도하고 찬양대를 지휘한 이가 호주선교사 허대시(Daisy Hocking)였다.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가 주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제일영도교회, 수안교회, 항서교회, 대연교회, 초읍교회 등도 동참했을 것이다. 기독교회는 양약 전파의 주된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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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9-13
  • [위드애] 장애(인)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할 때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나는 스무 살 때에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편마비장애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즉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장애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 살아간다고 해서 누구나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러했다. 그러다가 경기도 의정부에 있을 때에 장애인교회를 섬기면서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관련 책들을 통하여 스스로 배웠고, 여전히 책을 통하여 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론 관련 책은 대부분 평균값이기에 이론만을 가지고 현실과 접목시키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최근 몇 달 사이에 내가 알고 있는 장애(인)와 관련된 올바른 지식을 얻고 확인하기 위해서 두 가지 활동에 참여했는데, 하나는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양성과정 수강이었고(현재는 강사로 위촉), 또 하나는 ‘누누서포터즈’ 활동이다. ‘장애인식개선교육’은 내게 있어서 장애 이해에 대한 부족함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으며, 장애인 당사자이면서도 장애인 차별을 뜻하는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서포터즈 활동은 현재진행형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하는 활동인데, 서포터즈로 활동하면서 책에서는 알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이들과 교제를 나누며 알아가고 있고, 발견하고 있고,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이론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는 삶이 더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다. 현재 규모가 있는 교회들은 교회 안에 ‘장애인부’서가 있는데, 그 교회와 부서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장애인부서를 맡고 있고 함께 하는 교역자나 교사들은 그(장애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장애인)들에 대해서 알려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또한 장애인부서를 둔 교회 성도들은 그(장애인)들을 볼 때에 여전히 불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그들을 향한 섣부른 위로로 그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지, 그도 아니면 그들이 교회 안에는 있지만 아예 그들에게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지... 만약 그리하고 있다면 목사이자 장애인 당사자로서 마음이 무거울 것 같다. 세상은 장애인의 대한 차별적인 용어나 편견을 줄이고 모든 사람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이론교육을 하고 체험교육을 시행한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장애인식개선교육' 의무대상에서 제외되어있으니, 이러한 교육에 대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저 매년 4월 20일을 전후로 장애인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또는 부활주일이나 성탄주일에 물질로 돕는 일을 함으로 교회가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선에서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할 때라 생각한다. 그들에 대해 일반적이고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때에 맞춰 물질로만 돕는 방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 실수를 줄여가고 그들과 함께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지 교회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깊게 생각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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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3
  • [은혜의말씀] 5중 축복 (빌립보서 4:19)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깨달은 5가지 축복이 있다.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혀서 발에 착고를 차고도 한밤중에 인생넋두리를 한 것이 아니라, 찬송을 불렀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새털처럼 자유롭게 주 안에서 기뻐했다. 처자식도 없고 머리 둘 곳 하나 없었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는 담대하게 거침없이 나아갔다. 1. 나의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맞춤형 축복 하나님은 도매도 잘 하시고 소매도 잘 하신다.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지만 작은 아이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병을 치료 할 때 표적치료를 하듯이 나의 아픔을 아시고 맞추어서 치료해 주신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복을 받고 내가 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의 합심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나의 개인적인 기도도 외면치 않으신다. 주께서는 무리를 돌봐주시지만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하지 않으신다. 여러분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하나님! 내 아버지, 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축복 바울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이다.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있었지만 주 안에서 기뻐하였다. 성도는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날개 아래, 손길 안에 있는 것이다. 탐스러운 포도나무의 비밀은 그 가지가 줄기 안에 붙어있어야 되는 것이다. 가지가 줄기를 떠나면 반드시 죽는다. 포도나무 가지가 붙어있을 때 본체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경계선을 지나 주 안에 거하라. 3. 영광 가운데 풍성한 축복 성화의 마지막 단계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천국은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다. 천국의 영광, 복음의 권능, 예배의 감격,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자. 우리 주님은 쩨쩨하신 분이 아니고 풍성하신 분이다. 차고 넘치게 응답하시는 분이다. 기대이상으로 기도응답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선대하시고 후대하시는 분이시다. 4. 나의 모든 쓸 것을 아시고 주시는 복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나의 나 됨을 가장 잘 아신다. 스케일이 있으면서도 디테일이 있는 하나님이시기에, 나의 쓸 것과 필요를 다 아시고 흡족한 은혜를 주신다. 사람들은 누구도 각양의 필요를 맞추어서 다 채워 줄 수가 없다. 주님만이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아시고,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채워주신다. 초대교회가 행복했던 것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기 때문이다. 5. 충만하게 채우시는 복 허기진 내 영혼의 빈 곳을 주께서 채우시기 전에는 방황이 멈추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된다. 나라는 공평과 정의가 세워져야 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은혜가 족하도다. 절박함으로 구하면 주께서 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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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3
  • [목회자칼럼] 성도들이여! 어깨를 활짝 펴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 성도들의 어깨는 내려가고 자신감은 상실되었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주눅 들기 시작했고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감추게 되었다. 어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도 학교나 자신의 공동체에서 신앙적 정체성을 말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한때는 전 국민의 25%가 성도라고 당당하게 자랑했고 자신의 신앙이 기독교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는데 말이다. 불신자들이 말한다. 성경도 좋고, 예수도 좋은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싫다고. 이유인즉, 잘못은 사람에게 하고, 회개는 하나님께 하고, 기도를 마치면 용서받았다고 말하고, 삶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으니까 그런 교리 체계나 신앙의 자세가 싫은 것이다. 성경도 많이 알고,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말도 참 잘하는데, 삶은 평범 그 이하인 모습을 보면서 교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자란 것이다. 그 이미지 위에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 문화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대하고 정죄하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 또한 또 다른 부정적 이미지로 새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과 하나님을 잘 모르면서, 또 그것을 떠나서 그냥 성도들을 싫어한다. 이러한 연유로 성도들이 점점 세상에서 미움과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이 성도들의 자긍심을 떨어뜨렸고, 사회로부터 소외되었고, 스스로의 자랑스러움과 당당함을 잃어버리게 했다. 나아가 소신을 펼치고, 당당하게 말하고,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비굴하게 자신을 숨기게 되었다. 제10대 국가인권위원장으로 취임한 안창호 위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로부터 날 선 질문들을 받으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아주 당당했다. 성공 가도에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임명자에게 누를 끼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관에 대해서 너무도 분명한 주관을 가지고 소신있게 대답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둘 다 증명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것이기에, 법칙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 즉 신앙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현 상태의 차별금지법은 분명히 반대한다.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합리적인 비판까지도 법적제재를 가할 수 있는 법안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수의 인권을 압제하는 것은, 법적 타당성을 잃어버린 모순적 법안이다. 현실의 상황과 사실적 현실에 대한 비판의 영역까지 법으로 통제하는 것은,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다. 정치적 이익과 사상적 논리와 진영의 무력에 의해 법적 폭력들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가치를 억압하고 압제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기독 신앙을 가진 성도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반기를 들고 모순의 현상들을 지적한 것이다. 투자의 달인 워런 버핏의 기업 자산이 1조 달러를 넘어섰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의 94번째 생일 잔치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과 특히 먹거리에 대해 아주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다. 의사들이 깜짝 놀랄, 의사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다 했다. 햄버거와 감자 스틱을 자주 먹고 코카콜라는 하루에 5캔을 마신다. 간식으로 사탕과 초콜릿과 체리 시럽을 올린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는다. 스스로 자신의 입맛은 6살 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행복해했고 당당했다. 인간은 완벽하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 진리의 명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 신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사람이 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자보다는 거룩하고 성결하다고. 흉내라도 내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변화의 희망이 있다고. 성도들이여! 우리 모두 서로 부족한 사람들이기에, 어깨를 활짝 펴고, 삶의 자리에서 좀 더 당당하고, 좀 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좀 더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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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3
  • [서임중칼럼] 지도자의 헤드십과 리더십
    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올림픽 역사상 대한민국은 이번 파리대회에서 금메달을 가장 많이 획득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총 33개의 메달을 획득했는데 파리 올림픽에서는 예상을 뛰어넘은 금메달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로 32개의 메달을 땄다. 한마디로 국위선양과 체육인들은 물론 국민 축제다. 폭염과 장마보다 더 짜증나는 정치권 뉴스를 날마다 들으면서 불편했던 국민에게 올림픽 금메달 소식은 얼음냉수를 마시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배드민턴 세계 1위의 안세영 선수의 협회를 향한 작심 발언으로 뒤숭숭한 어두운 면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최고 성적을 내고도 개운하지 않다. 협회와 선수의 갈등이 잘 해결되어 한국 체육 문화가 한 단계 발전되기를 바라면서 이즈음에 훌륭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언제부터인가 양식(良識)있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이 나라 정치지도자에 대해 회의(懷疑)한다. 그 발원지를 대부분 국민은 여의도 1번지를 지목한다. 선량(選良)들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언행을 우리는 날마다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면서 뉴스 시간이면 TV 채널을 돌려 마음이 구겨지지 않는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무엇인가 한참 잘못되어 가는 현상이다. 어디 정치지도자뿐이겠는가 교회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도 옛이야기로 들리는 아픈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Ph. D.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교회 지도자의 지도력에 관한 내용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조사된 바에 의하면 교회 성도들의 공통점 하나가 교회 지도자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懷疑)였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자란 목사와 장로에 국한 시켰고 지도력의 회의(懷疑)란 목사와 장로의 지도력에 대한 이해를 헤드십(headship)으로 인식을 하고 리더십(leadership)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로서 자괴지심(自愧之心)에 아파하면서 보다 더 바람직한 목회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었다.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가 한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목표를 잡고 꿈을 이루기까지 원동력은 제 분노였다.”는 아픈 말을 지도자들은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헤드십을 정해진 의무의 강제적 이행을 구하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며 또한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리더십은 상대방의 진보와 향상을 도모하며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하며 공동체 구성원들이 우리라는 공동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말할 것 없이 이와 같은 리더십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도자들에게서 리더십이 아닌 헤드십이 발휘된다면 이는 참으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의 리더십이 아닌 헤드십을 발휘하는데서 오늘의 교회가 갈등과 무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평안과 부흥은 올바른 리더십에서 가능하며 그로부터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장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지게 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분야의 지도자도 다를 바 없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지도자들의 약점이 무엇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지도자의 지도력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지배자로서의 자기 모순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며 그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도자는 항상 이론과 실제, 그리고 가르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로 고민하게 된다. 정치나 사회교육이나 종교 등, 모든 분야의 공동체는 지도자의 행동철학을 보고 싶어 한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말이다.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이나 탁구의 경우 지도자의 헤드십이 아닌 리더십을 언론은 조명한 것을 공감한다.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은 긍휼이었고 겸손이었고 섬김이었다. 그것이 훌륭한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던 것이다. 좁쌀만 한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명예와 권력을 가지게 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가 아니라 ‘내가 있기에 네가 있다.’는 자가당착의 병리적 현상에 젖어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대한배드민턴협회 국가대표 운영지침에 ‘선수들은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와 ‘담당 지도자의 허락없이는 훈련에 불참하거나 훈련장을 이탈할 수 없다’는 조항이 대한양궁협회 국가대표 운영지침과 비교되고 언론에 조명되는 이유는 헤드십과 리더십을 통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파리 올림픽 경기에서 배드민턴 선수와 양궁 선수의 결과를 통해서 확인되면서 훌륭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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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 [성서연구] 큰 일과 중요한 일
    예레미야서 후반부 35장 이후를 읽노라면 마치 기울어가는 타이타닉호를 보는 듯합니다. 배가 기울 때 사람들이 극도의 혼란 중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처럼, 바벨론 군대의 포위 아래 놓인 예루살렘이 그러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때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와중에서도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유다의 멸망 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레미야는 사랑하는 나라의 멸망을 바라보며 극도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눈물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와 함께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었는데, 예레미야의 서기인 <바룩>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했습니다. 45장 1절을 보면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예레미야가 갇혀 있을 때, 그를 대신하여 왕과 방백들 앞에서 기록한 예언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바룩도 당시 상황에서 예레미야 못지않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45장 3절을 보면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말씀대로 살길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받습니다. 반면에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5장 5절 앞부분을 보면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바룩이 추구할 수 있는 큰일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우선 살길을 찾는 것일 수 있었습니다. 또 국가적으로 유다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는 길을 찾는 것도 큰일일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유다가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를 도모할 동지라도 규합하는 것도 큰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큰일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바룩에게 주신 말씀에서 말기적 혼란기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배우게 됩니다. 큰일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뜻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아 유다를 징벌하여 멸망하게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일관되게 외친 메시지도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5장 5절에서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동기로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도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45장 4절입니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의 역사를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셋째, 바룩 자신이 큰일을 도모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룩에 대한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45장 5절 후반부를 보면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룩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했습니다.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붙잡고,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하루하루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한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종종 이루지도 못할 일, 이룬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위해 애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대단한 삶을 사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역사의 물줄기를 절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묵묵히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말씀에 순종하며 주어진 상황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여러 영역에 지나친 미련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초연하길 기원합니다. 큰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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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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