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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100년사 기록한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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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자 내일을 살아갈 교훈을 준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만을 말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예장통합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회장 양명순 권사, 은성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족적을 따라가기 위해 100년사를 출판했다. 지난 9일(화) 부산진교회에서 출판감사예배를 가지고 지난 100년의 역사를 감사하고 새로운 100년을 써나갈 것을 다짐했다.
지난 9일 부산진교회에서 열린 출판감사예배를 가졌다. 사진은 100년사편찬위원장 이홍자 장로가 발간사를 하는 모습
△ 회복과 부흥을 꿈꾸는 여전도회
조선예수교장로회경남부인전도회발기취지서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15년. 부산의 교회여성들은 부산진교회에서 봄 사경회로 모여 부산지역 교회여성 연합활동을 위해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동년(김만일 목사 사모)를 중심으로 의견을 모으고 그 자리에서 백 여원의 기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1918년 9월 7일 부산 영주동예배당에서 경남동편여전도회를 설립 발기회를 조직하고 동년 11월 30일 양산읍예배당에서 경남동편여전도회 제1회 총회를 개회했다. 참석회원 22명, 발기인 19명, 찬성원 90명이었다. 이날 설립 총회에서는 복음전도가 필요한 지역을 정해 여전도인을 파송하고 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을 도와 교회부흥을 모색했다.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100년사 저자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는 “여전도회 연합회 초기 여성들의 형편과 계층이 너무나도 다양한데, 그분들이 모여 여전도회를 시작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1922년 2월 8일 제4회 총회에서 경남 동편과 서편을 통합, 이름을 경남부인전도회로 변경했다. 1928년 경남부인전도회 창립 10주년을 맞은 해에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전신인 조선예수교 부인전도회가 창립됐다. 1934년 일제강점기에서도 일본 나고야에 강성숙 전도사를 파송해 3년 동안 전도하도록 했으며, 이후 경남부인전도회가 설립한 수영, 개평, 고간, 학동, 진교리, 삼랑진 교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선교를 계속해나갔다. 일제강점기 부산은 항일 순교의 땅인 동시에 친일 배교의 땅이었다. 순교로 신앙을 지키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부산에서 활동했지만 대표적인 친일파들이 부산에서 활동했다. 그 시기 부산진일신여학교 삼일운동을 시작으로 부산지역 교회여성들이 항일민족운동은 면면히 이어졌고 경남부인전도회는 신사불참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1940년 부산 항서교회에서 열린 경남부인전도회 임원은 신사불참배를 결의한 여성들로 선임됐고, 이로 인해 투옥되는 등의 고난을 겪기도 했다. 경남부인전도회의 신사불참배 노력은 전국연합회가 신사참배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도록 큰 도전을 줬다. 탁지일 교수는 “기록 정리하면서, 남성들이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신사참배를 하는 동안 여성들은 거리가 멀고 경비가 많이 든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공식적인 총회를 하지 않고 오직 임원들만 모여 고통을 감내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이 한국교회의 중심을 지켰던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경남노회가 경남, 마산, 진주 등 3개 노회로 분할되자 여전도회 연합회에 이에 따라 3개 연합회로 각각 분립됐다. 이후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 그리고 1981년 부산노회와 부산동노회의 분립으로 인해 영향을 받으며 현재의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 희년기념예배
△선교하며 헌신하는 여전도회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는 현재 59지회로 구성돼 있다. 연합회 초창기 때부터 시작된 선교, 교육, 봉사 사역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회원들의 올바른 신앙생활과 건전한 사회의식 함양을 위해 회원 세미나와 임원단 및 권사·장로부인 세미나를 격년제로 개최하고, 1997년 9월부터 보훈병원과 일신기독병원에서 매주 월요일 각 지회 회원들이 병실을 방문해 청소와 함께 환우들을 위로하는 자원봉사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또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프로그램에 적극참여하면서 국내외 선교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67연합회가 아시아 1국가를 담당하는 ‘아시아 미션 6745선교’로 부산여전도회연합회는 캄보디아선교사를 돕고 있다. 부산생명의전화, 부산여성의전화, 부산여성협의회, 부산여교역자회 등에 대한 후원과 부산대학병원, 부산장신대, 서울여자대학교, 부산십대선교회, 미문장애인교회 등의 기관들을 위한 선교지원도 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100주년을 기념하며 지난 3월 28일 동아대학교 다우홀에서 기념음악회를 열었으며, 지난 5월 19일에는 제1회 선교바자회를 개최했다.
▲ 제100회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총회 임원들(2014년)
△‘지혜의 빛’, ‘영원한 별’ 지난 100년을 담다
1898년 평양 널다리골교회에서 처음 여전도회가 조직된 지 117년이 됐다. 이북이 아닌 이남에서 100년의 세월을 보낸 여전도회는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가 유일하다. 지난 6월 9일(화) 부산진교회에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담은 100년사 출판감사예배를 가졌다.이 책은 주기철 목사의 친필편지를 비롯해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가 소장했던 자료들과 사진들,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전달받은 자료 등 책 본문과 부록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책의 표지사진은 1959년 5월 통합과 합동 분열 직전의 경남노회여전도회엽합회의 모습으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 통합과 합동 분열 직전의 경남노회여전도회연합회 제45회 총회(1959년 5월)
책의 영문명은 ‘Centennial HerStory of Presbyterian Women in Busan’이다. 탁지일 교수는 “History는 His(남자의) 역사다. 이 책은 여성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영어단어를 Herstory라고 쓰면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 영문제목을 Herstory라고 짓게 됐다”고 설명했다. 탁 교수는 “조선예수교장로회경남부인총전도회발기취지서에서 다니엘 12장 3절로 문안과 축복을 대신한다.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의 지난 100년은 이날 축복의 말씀처럼 ‘지혜의 빛’ 그리고 ‘영원한 별’과 같았다”고 전했다.
▲ 출간된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편찬위원장 이홍자 장로(부산진교회)는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그냥 둘 수 없어 연합회의 전 회장님들과 의논한 끝에 100년사를 출간하기로 했다. 선대들의 기록을 보면서 믿음의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회장 양명순 권사는 “임기동안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이며 하나님의 은혜다. 지난 100년동안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후손들에게 자극과 도전이 되고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앞으로도 선배들이 해왔던 선교, 교육, 봉사의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 (왼쪽)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수석부회장 최영선 권사 (가운데)100년사편찬위원장 이홍자 장로 (오른쪽)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회장 양명순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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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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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매혜란ㆍ매혜영 선교사의 비전을 이어가는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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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나환자의 친구라 불리는 호주 선교사 맥켄지. 그의 두 딸 헬렌 맥켄지(매혜란), 캐서린 맥켄지(매혜영)자매는 1952년 6.25 한국전쟁 당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산모와 어린이들을 위해 예수의 사랑정신으로 좌천동에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했다.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일평생을 헌신한 그들의 정신은 (재)한호기독교선교회가 이어가고 있다. 여성전문병원으로서 오랜 노하우를 가지고 1999년 1월 화명일신기독병원을 개원했다. 진료분야를 확대한 화명일신기독병원은 지난 3월 덕천동에 분원인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을 개원했다.
▲ 지난 3월 개원한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
ㆍ일상생활로의 빠른 복귀, One-floor 재활시스템
▲ One-floor 시스템으로 재활치료센터와 병동이 한층에 위치해 있다.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은 국내 우수 재활병원과 일본의 재활병동 운영 시스템을 도입하고 재활의학과, 신경과, 내과, 소아청소년과, 영상의학과의 유기적 협진으로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화명일신기독병원과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 원장직을 겸하고 있는 정재혁 원장은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의 주요 진료과목은 재활의학과와 신경과라고 할 수 있다. 화명일신기독병원이 성장하면서 만성기 환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 장기 입원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한 것이 이 병원이 세워진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 재활치료센터(성인·소아)에서는 환자의 상태에 따른 개별 맞춤 재활서비스와 함께 재활치료센터와 병동이 한 층에 위치한 One-floor 재활시스템으로 재활환자들의 빠른 사회복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정재혁 원장은 환자가 원하는 일상생활의 복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인적으로 5년 전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면서 재활의학에 관심을 가졌다. 내가 허리디스크에 걸릴 줄은 예상도 못했다. 누구나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요즘 수명이 길어지면서 사고나 질환이 생길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래서 재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얼마나 빠르게 회복해 일상으로 복귀하는가가 현대의학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이전과 똑같이 돌아가고싶다는 재활환자는 의외로 많지 많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복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일상으로의 복귀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병원은 환자가 원하는 일상생활의 복귀에 기준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맥켄지일신기독병원이 가진 독특한 구조인 One-floor 재활시스템은 4층 병실 바로 앞에 재활치료실을 두고 환자가 병실을 나온 순간부터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정해진 시간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재활치료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정 원장은 “잠자는 시간을 뺀 하루 종일 물리치료사들과 함께 있게 된다. 이 시스템은 재활을 하고자 하는 환자 본인의 욕구나 의지가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많은 물리치료사들의 감독을 받을 수 있어 낙상 등 환자들의 안전사고 빈도수도 낮다”고 설명했다. 의사나 물리치료사만의 결정이 아닌 환자들이 원하는 일상생활의 복귀에 기준점을 두면서 환자들의 심리적 안정도 더 빠르다. 무엇보다 이러한 시스템의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뿌리 깊게 담겨있다. 정 원장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 모든 일신기독병원의 가장 기본으로, 병원이 세워진 이유라고 말했다.
▲ 소아재활센터
ㆍ자궁근종 비수술적 치료, MRI-HIFU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은 자궁근종 MRI-하이푸센터, ESWT, CT, 초음파, 근전도검사기, 뇌파검사기, TCD 등 첨단 디지털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다. 특히 자궁근종 MRI-하이푸센터에서는 MRI-하이푸 장비를 통해 자궁근종의 비수술적 치료법으로 개복수술이나 단일공 복강경 수술이 아닌 고강도의 집속 초음파로 자궁근종을 태워 없애는 시술을 한다. 실시간 MRI 촬영으로 자궁근종만을 제거하므로 안전하고 절개를 하지 않아 흉터가 남지 않는다. 또 1박 2일이면 퇴원이 가능하다. MRI-하이푸는 고가의 장비로,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과 서울삼성병원, 차병원 3곳이 보유하고 있다. 정재혁 원장은 “처음에는 너무 고가의 장비라 고민을 했지만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돼 선택했다”고 말했다.
▲ MRI-하이푸
ㆍ정직한 의료가 의료선교다
▲ 정재혁 원장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한 매혜란, 매혜영 선교사의 비전은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환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들을 위로한다.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원목인 홍성신 목사는 그저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하고, 환자 가족과 함께 기도하면서 위로한다. 의료행위를 통해 직접적인 복음전파는 어렵지만 의료진들은 환자의 마음을 살피고, 정직한 진료에 매진하면서 크리스천의 삶을 보이고 있다. 정 원장은 의료선교의 기본은 정직한 의료라면서 “먼저는 의사가 올바르게 서야 한다. 똑바로 진료하겠다는 기본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진료를 위해 병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한 진료가 아닌 올바른 진료를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올바른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또 적절한 수익을 낼 수 있는 시스템과 아이템을 병원이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ㆍ종합의료센터, 토탈케어 의료서비스 정재혁 원장은 "종합의료센터로, 암이 아닌 이상 우리 병원에서 다 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한다. 암은 특화된 대학병원으로 보내진다. 그것 외에는 토탈케어를 하는 정직한 의료를 하자는 것이 전체 의료진의 생각이다. 그래서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이 신경과와 재활의학과가 주력이 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40대인 정 원장은 젊지만 배태랑 경영인이다. 10년째 병원의 행정과 경영을 맡고 있다. 그는 올바른 의료와 병원의 충분한 서포트라는 기본 마인드로 병원을 이끌어 왔고, 병원은 꾸준히 성장했다. 올해 예상 매출액은 그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약 10배의 차이가 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는 “정직하고 올바른 진료라는 생각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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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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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세상과 소통하는 건강한 교회 ‘부산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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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섬기는 교회, 처음부터 지금까지-도심 속 전원교회, 맑은 공기 건강한 교회-“교회가 정치적 책임은 가져야 한다”
▲ 남천동에 위치한 부산중앙교회
▲ 시작부터 특별한 교회
대부분의 교회들이 개척할 당시에는 소규모 인원이 모여 집에서 혹은 작은 공간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부산중앙교회(담임 최현범 목사)의 시작은 특별했다. 1945년 12월 첫 주일 교회 설립 예배를 가졌다. 부산시 중구 대청동에 위치한 번듯한 교회 건물에서 말이다. 1945년 당시 대청동에 위치한 일본감리교회는 8.15광복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이었다. 일본감리교회 목사는 노진현 목사(부산중앙교회 1대 담임)에게 교회 건물을 기증, 이곳에서 부산중앙교회가 시작됐다.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은 우리나라와 역사를 함께한 부산중앙교회는 광복 70주년과 함께 교회 설립 70주년을 맞았다. 교회 인프라가 갖춰진 가운데 시작된 부산중앙교회는 국제시장 인근에 위치, 이후 6.25전쟁으로 부산에 모여든 피난민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임시 정부청사와도 근접해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구제활동이 펼쳐졌다. 또 구국기도회를 비롯한 사회적 역할이 커져가며 민족과 교회를 섬기게 됐다. 교회가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리더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 1960년대 초에는 총회장 배출, 여전도회연합회 활동 등 교계에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교회 내분으로 한차례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77년 6월 12일 부산중앙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분립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교계에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결과적으로는 ‘해피 엔딩’이라고 말한다. 분립된 새중앙교회는 2000년 1월 호산나교회로 명칭을 변경, 부산에서 대형교회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부산중앙교회 역시 분열 이후 내실을 다지며 건강한 교회로 성장, 새로운 남천동 시대를 맞게 된다.
▲ 남천동 시대1995년 12월 첫 주일, 교회 설립 50주년을 맞아 교회가 부산시 수영구 남천동으로 이전했다. 남천동에 위치한 교회는 한마디로 말해 ‘도심 속 전원교회’이다. 교회가 세워진 부지는 자연녹지이지만, 경계선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교회 앞까지는 주택가가 즐비해 있고, 교회 뒤로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다. 지하철에서 도보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부산시내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앞으로는 탁 트인 광안리 바다와 야경이 멋진 광안대교, 뒤로는 황령산의 푸른 숲이 있는 최고의 환경이다.지난 2003년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최현범 목사는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교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경건한 예배를 통한 은혜와 다양한 교육훈련으로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새가족반 운영, 제자훈련, 사역반 훈련 등으로 교회가 건강한 체질로 바뀌고 있다. 특히 부산중앙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강조하며, 사회적 문제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대표적인 행사로 올해 연초 제직세미나에서 원전에 관한 강의를 개최하고, 고리1호기 폐쇄를 위한 서명운동을 펼쳤다. 교인 70~80%가 서명운동에 동참하며 적극적인 관심을 표현했다. 독일에서 수학한 최현범 목사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교회의 지난 과거사를 돌이켜보면 교회가 무책임하게 정치에 참여하거나 정치에 무관심한 잘못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교회가 정치화 되어서는 절대 안 되지만 정치적인 책임은 꼭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최 목사는 “사회적 책임이란 직장 생활 잘하고, 가정생활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과 진보적인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방의 생각과 관점을 이해해주고 수용하는 가운데 자기의 정치적인 자리매김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최현범 목사는 현재 부산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70주년 맞아 풍성한 2015년올해 교회 설립 70주년을 맞은 부산중앙교회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계획 중이다. 지난 4월 11일(토) 교회설립 70주년 주일학교 글과 그림대회를 개최했다. 유치부부터 고등부에 이르기까지 주일학교 학생들이 참여해, 교회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오는 5월 24일(주일) 오후 4시에는 故 김광일 장로 추모세미나를 개최한다. 인권변호사로 시작해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역임한 故 김광일 장로는 생전에 부산중앙교회를 출석했다. 중고교실절 부산중앙교회를 다니며 믿음을 키웠고, 당시 복음적인 신앙을 확립하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배웠다. 이런 그의 믿음이 훗날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게 된 밑거름이 됐다. 부산 인권운동의 대부이자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정치발전을 위해 헌신한 故 김광일 장로의 추모 5주기를 맞았다. 부산중앙교회는 설립 70주년을 맞아 고인의 신앙과 삶을 반추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외에도 6월 20일(토) 바자회 개최,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농어촌 하계봉사, 9월 국내 성지순례, 10월 전교인 체육대회, 12월 설립주일 특별예배 및 선교사 파송, 70주년 기념음악회와 70년사 편찬 발행을 계획 중이다.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 아래서, 세상과 소통할 줄 아는 부산중앙교회. 그래서 내일이 기대된다.
故 김광일 장로를 추모하며 ㆍ오는 24일, 추모세미나 개최
부산 인권운동의 대부이자 민주화를 이끈 故 김광일 장로(1939-2010년). 세상은 그를 인권변호사, 국회의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기억하지만, 정말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믿음 좋은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기억한다. 김광일 장로는 1939년 일본 도쿄 근교에서 태어났지만, 1945년 가족 모두가 귀국해 선대의 향리인 경남 합천에 정착했다. 그는 경남중고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공부를 위해 부산에 있는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의 신앙은 일찍부터 믿음을 가진 어머니 등 외가의 영향에서 비롯됐다. 부산의 외가에 머물던 중학교 1학년 때 부산중앙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중고교시절 그는 집과 학교, 교회 밖에 없었다. 시간이 나면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고교 시절 고등부 회장을 맡았는데, 당시 기획한 신년 찬양예배는 지금도 교회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학교에서는 기독학생회에 가입해 학원 복음화에 앞장섰다. 1952년 경남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다닌 부산중앙교회를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다녔다. 약 60년간 한 교회만을 섬겼다. 국회의원 당선 이후 서울에 살면서 옥한흠 목사가 담임한 사랑의교회에 출석했으나, 부산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부산중앙교회를 한결같이 섬겼다. 그의 하나님 사랑, 교회 사랑은 깊었다. 주변에서는 지독하다고 할만큼 각별했다. 신앙은 김광일 장로의 평생을 이끈 나침반이었다. 중고교시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앙의 핵심을 배웠다. 이후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이 그의 일생을 규정짓는 삶의 신조가 됐다. 부산중앙교회 담임 최현범 목사는 “믿음과 열정으로 교회를 섬겼던 그는 당대 대부분의 교인들과는 달리 인권운동의 최전선에 서있었다. 서슬 시퍼런 군사독재정권 시절,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몸 사리면서 시국 관련자들의 변호를 기피하던 그 때, 그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죄 없는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왜곡된 국가권력에 항거하면서, 힘없는 자들의 인권을 지키려 했던 그는 자연히 부산 인권운동의 대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런 분이 우리 교회의 장로였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것은 우리 교회만의 자랑이 아니라, 보수교단의 자랑이고, 아니 한국교회의 자랑”이라고 덧붙였다. 최현범 목사는 자신을 청빙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독일로 찾아 온 김광일 장로를 잊지 못했다. 검소하면서도 소탈한 모습에 반했고, 일주일간 함께 지내며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부산중앙교회 5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최 목사는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매일 성경 읽기, 1시간 기도, 독후감 작성, 성경 암송, 큐티, 생활 숙제 등 젊은 사람들도 힘든 과제를 60대 중반을 넘긴 김광일 장로는 충실히 완수했다. 신앙의 선배답게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모습이라고 기억했다. 김광일 장로의 장남 김성완 장로(부산중앙교회)는 어버지를 ‘아주 특별한 친구’로 기억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힘 없는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그는, 만화를 좋아하고 영화감상을 즐겨하며, 사진찍기를 좋아하고, 등산을 즐겨했던 아버지를 추억했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부정과 불의 앞에 침묵하거나 타협하지 않았고 늘 진실 앞에 당당한 모습을 우리 두 아들들에게 보여 주셨다”고 말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표현되고 또 제가 그 사랑을 갚고, 이것이 옆으로 번져가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故 김광일 장로. 부산중앙교회는 교회 설립 70주년을 맞아 故 김광일 장로 추모세미나를 오는 5월 24일(주일) 오후 4시 부산중앙교회에서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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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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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국내 유일 현장을 접목한 복지신학교 국제복지신학ㆍ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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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생 찾아 노후에도 학업에 도전-지성, 영성, 인성을 겸비한 지도자로
#나이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부르심 몇 년전, 90세에 교회를 개척한 일본 히노카게교회 조비 마쓰 목사가 화제였다. 이 할머니 목사는 70세에 신학교 입학, 6년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86세 때 교회 건축의 비전을 품고, 마침내 만90세에 히노카게 마을의 첫 교회를 완공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명을 발견, 학업에 도전하는 이들은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젠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공부하는 할아버지, 공부하는 할머니들을 찾아볼 수 있다. 환갑을 맞아 신학교에 입학, 66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개척한 주포전원복지교회 김복준 목사(71세)를 만났다. 그는 새벽기도 중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성경에 대한 갈망함이 커졌다. 그래서 성경을 더 알고 싶어 그의 나이 60세에 부산기독신학교를 입학했다. 신학교에서 성경 공부만하고 그치려 했으나 우연히 만난 변정섭 목사를 통해 국제복지신학?연구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학업을 하며 소외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수업 시간마다 마음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성경에 기초한 복지, 그리고 목회에 대한 새로운 공부는 시간마다 은혜였다. 즐겁게 공부를 마치고 졸업한 그에게 목사 안수를 앞두고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당시 나이 66세. 주변에서는 목사 안수를 반대했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인데 이제야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할 수 있겠냐며 반대한 것이다. 목사 안수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99세의 아브라함을 만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에 하나님께서 찾아와 생명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읽는 순간 깨달았다. 늙고 가진 것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 사람들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나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은 달랐다. 그래서 목사 안수를 받겠다고 결심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손자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듯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뜨겁게 목회 중이다. 고령화사회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이미 고령화사회로 접어든지 오래고, 2018년이면 고령사회로 접어든다고 예상한다. 사회 곳곳에서는 실버들을 위한 각종 문화 및 일자리 창출이 한창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백발에 일하는 노인들이 낯설었지만, 이젠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평균 수명도 80세를 훌쩍 넘었고, 모두 입을 모아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한다고 말한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도전하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꿈을 찾는 도전에 박수 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곧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것이다.
▲ 국제복지신학ㆍ연구원 전경
#목회·복지·인간에 대한 전문성 늦게 시작한 학업이지만, 그래서 더 열정적인 학교가 있다.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에 위치한 국제복지신학ㆍ연구원이다. 수업 시작 2~3시간 전부터 학교에 도착해 공부하며, 땀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즐거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향한다. 국제복지신학ㆍ연구원은 독립교회 연합총회의 직영학교로서 국내 유일에 현장을 접목한 복지신학교이다. 대학부 4년, 신학원 2년, 목회대학원 2년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 복음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시작한 국제복지신학ㆍ연구원은 진리를 선포하고 복지 실천으로 사회에 봉사할 것을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다. 특히 ‘진리ㆍ복지ㆍ봉사’라는 신학교훈 아래 목회전문성, 복지전문성, 인간전문성을 교육하고 있다. 학교 설립자인 재단이사장 변정섭 박사는 “우리 신학교는 이런 사명자로 키워 나간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보다 넘어져도 일어나는 방법을 아는 사명자로 키워 나간다. 복음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능력 있는 사명자로 키워 나간다. 지성과 영성 그리고 인성을 겸비한 지도자로 키워 나간다. 말씀 속에서 철저히 검증하고 뚜렷한 특성이 있는 사명자로 키워 나간다”고 말했다. 이곳이 바로 국제복지신학ㆍ연구원이다.
▲ 재단이사장 변정섭 목사
#신뢰를 주는 교수 실명제 간혹 신학교를 보다 보면 유명 교수 몇 명만 소개하고 다른 교수진들은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국제복지신학ㆍ연구원은 교수진 전체를 공개한 교수 실명제로 운영하고 있다. 재단이사장 변정섭 박사(국제독립교회 연합총회장)를 위시해 상임이사 강복남 박사(미국 센트럴대학 사회복지학 박사), 학장 김성천 박사(예장고신 증경총회장), 대학원장 이은삼 박사(장선종합복지공동체 이사), 학감 우상희 박사(독립), 학생처장 이도필 박사(고신), 교목실장 박서근 박사(통합), 행정처장 한달용 박사(합동), 교수에 김윤형 박사(독립), 허상구 박사(침신), 전하리 박사(독립), 김병수 박사(고신), 김광호 목사(브니엘), 김성원 장로(통합)이다. 전교생에게 장학 혜택을 지원하며, 주 3회(월, 화, 목) 야간 집중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교회음악, 찬양 특별지도를 하며 장로, 권사 등 교회 중직자들을 우대한다. 총회 소속교회 전도사로 사역이 가능하며, 특히 미국소재 대학교와 학술 교류 협정을 통해 학사, 석사, 박사, 명예박사 학위 취득이 가능하도록 돕고 있다.
▲ 지난 1월 국제복지신학ㆍ목회 대학원 졸업식을 가졌다. 사진은 학장 김성천 박사(위)와 목회대학원 원장 이은삼 박사(아래)
#실무형 복지 인재 양성교육 성경의 주요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대부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개인적 신앙생활은 잘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 신앙에는 힘들어한다. 목회현장에서도 이웃을 향해 어떤 섬김을 펼쳐야 하는지 고민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현대사회에서 복지는 사람과 뗄레야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교회의 ‘봉사’가 강조되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복지에 관심을 가졌다.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물론 지역아동센터, 노인대학, 반찬나누기 등 대부분의 교회들이 지역봉사활동 사업을 펼치고 있다. 봉사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복지’란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국제복지신학 학장 김성천 목사(엄궁교회 원로)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적으로 교회들이 세워지는데 신학과 복지분야의 사역자들이 많이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 신학대학들이 이론교육에 치중해 실무교육이 약한 것을 지적하면서 “현장에 투입되었다가 다시 교육을 해야 하는 이중적인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본 대학과 연구원은 사회복지분야의 전문가와 신학전문가들이 교수진으로 포진해 사회복지를 실무위주로 교육시키며, 실무형 복지 인재 양성교육을 실천하는 대학”이라고 말했다. 국제복지신학ㆍ연구원은 실제로 책상에서 배우는 복지가 아닌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고 있다. 쌀, 생필품, 장학금 전달은 물론 거리 껌떼기, 쓰레기 수거 등 각종 자원봉사활동을 펼치며 환우들을 위한 병원 자원봉사, 목욕봉사활동 등을 실천하고 있다. 외에도 베트남 롱안세계로병원을 방문하는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봉상활동을 실천하며 현장에서 직접 배우고 있다. 옛 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학생들은 ‘복지’를 글로, 머리로 배우지 않고 경험으로, 가슴으로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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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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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동산교회, 십일조 선교로 인도에 교회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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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복개도로에 위치한 32년 된 교회
부산 괴정동 복개도로에 위치한 동산교회(이상걸 목사). 지난 1984년 3월 1일 설립예배를 가지며 시작한 교회는 22명의 성도가 모여 개척한 곳이다.
년 6월 지금의 담임목사인 이상걸 목사가 부임해 왔다. 부임 당시 교회당이 없고 교회 내 분란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교회는 교회당 건축에 대한 비전이 없었고 재정도 부족했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이상걸 목사는 교회 건축 비전을 가지고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하자고 선포했다. 그렇게 3년간 기도했다. 어느 날, 교회로 연락이 왔다. “인근 타 교회 성도가 연락이 왔다. 남편과 사별하고 그 집을 팔려고 한다면서 교회에서 구입하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그러나 당장 응할 수 없어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서 다시 그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꼭 교회에서 사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 이상걸 목사는 사실 따뜻한 양지에 조용한 주택가라서 마음에 두고 있던 곳이었다고 말했다.
년간 건축했던 교회는 2003년 입당예배를 가졌다. “교회 건축 후에도 영적으로 묶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도에 전념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날부터 교회에서 자면서 기도했다”. 이상걸 목사는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집이 아닌 교회에서 잠을 잤다. 기도를 하면서 그간 앓았던 신경성 위염의 통증도 사라졌다. “집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계속 교회에서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영성과 건강을 회복하게 하셨다”고 간증했다.
▲ 이상걸 담임목사
ㆍ인도선교에 대한 비전
이상걸 목사가 2006년 부산노회 회록서기를 맡았을 때 노회 임원들이 인도로 선교여행을 갔다. “사실 인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었다. 인구가 많고 계급사회에 힌두교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 놀랐던 것은 ‘달릿’이라고 불리는 인도의 최하층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무그늘 밑이나 담벼락 등에 천을 걸치고 모여 있었던 것이다”는 이 목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곳에 교회를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 12월, 또 한 번 인도로 선교여행을 가게 됐다. “형평상 어려워 안 가려고 했다. 당시 노회장이셨던 성유환 목사님이 나를 꼭 집어서 같이 가자고 했다. 고민하고 있던 중 친구 목사에게 연락이 왔다. 그 교회의 성도가 선교에 써달라고 헌금을 했는데 그 헌금을 인도선교에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을 내서 2번째로 인도에 갔다”고 설명했다.
인도 현지에서는 교회를 한창 짓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상걸 목사는 교회 건축을 서원했다. “방문한 곳에 교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마당이 넓은 꼭 헛간같이 생긴 곳이 예배당이었다. ‘이 사람들이 이곳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오는 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아끼시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예배당을 먼저 짓고 예배를 드리는데 이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마당에 모이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때 서원했다. “이들을 위한 교회 건축에 힘을 쓰겠다”라고 말했다.
이상걸 목사는 동행했던 목사님들께 그곳에 100개의 교회당을 짓자고 제안했다. 이 목사는 “당시 확신이 있었다. 지금은 은퇴하신 다대중앙교회 박은성 목사님께서 ‘이상걸 목사, 믿음 좋네. 어디 한번 해보자’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인도선교회가 발족됐다”면서 Korea와 India의 앞 글자를 딴 고린도선교회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교회당 건축은 현지 교단인 남인도총회의 추천으로 진행되고 있다. 2007년부터 활동해온 선교회는 2009년 100개의 교회당을 세웠다.
이상걸 목사는 “인도에서도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외국 교회에서 인도의 시골에 교회를 그렇게까지 지었던 적이 없다”며 “남인도총회를 통해 이제 430여 교회가 세워졌다”면서 그사이 금융 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상걸 목사는 만나면 인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됐다.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가운데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국에서 노동자를 위해 사역하던 인도인 목사와의 만남으로 그가 인도로 돌아가자 현지 협력자로 함께 사역해 오고 있다. 이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으로 일하니 잘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인도에서 사역을 하면서 기적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인도는 물이 귀하다.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물을 사먹지만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오염된 물을 마셔야 한다. 현지 목사님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신데 교회 마당에 우물을 주시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두고 함께 모여 기도했다. 시에서 허가를 받고 우물을 팠다. 인도는 30m를 파도 물이 안 나온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교회 마당에서 1급수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기적의 물이라고 했다. 교회 우물은 이제 그 지역의 주요상수원이 됐다”고 말했다.
▲ 2003년 부산 괴정동 복개로에 교회를 건축하고 가진 입당예배
ㆍ십일조 선교하는 교회
년부터 동산교회는 십일조 선교를 시작했다. 십일조 선교는 교회 재정의 10분의 1을 선교에 사용하는 것으로 동산교회의 인도 선교를 위한 선교헌금인 것이다.
이상걸 목사는 “십일조 선교하는 교회로 선포했다. 교회가 형편이 좋지 않아 재정적 여유가 있을 때 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2007년 연말 결산을 했을 때 교회 재정의 32%를 축복해주셨다. 십일조를 해도 교회가 넉넉하도록 하신 것이다”면서 “십일조 선교를 시작하고 교회의 부채를 갚아 나갈 수 있게 해주셨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2007년 한 해 동안 인도에 8개 교회를 세웠다.
십일조 선교 외에도 성도들은 인도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이 결혼 자금의 일부를 선교헌금으로 드렸다. 또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손주들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선교헌금을 드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도에 전념하자 목회의 방향이 전환됐다는 이상걸 목사는 교회가 선교회 비전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십일조 선교에 모든 교회들이 동참하길 바란다는 그는 “여유가 생기면 선교에 동참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도 결국 하지 않는다. 선교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어려워도 선교에 나설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어렵다”면서 동산교회가 그 증거라고 설명했다.
▲ 이상걸 목사는 20여 차례 인도를 방문하면서 교회를 세웠다. 이번(3월 초)에 방문때 현지 교회 입당예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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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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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110년 전, 항구 서쪽에 복음으로 세워진 부산 항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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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용동에 위치한 항서교회(나재천 목사)가 지난 1일(주일), 설립 110주년 기념예배를 가졌다. 이날 기념비 제막식과 임직 및 취임, 은퇴예식도 함께 진행됐다. 앞으로의 100년을 기대하면서 역경의 바람이 불어도 뿌리 깊은 역사로 이겨내길 소망하는 항서교회를 찾았다.암울한 시대에 세워진 교회을사조약이 체결됐던 1905년, 항구도시의 서쪽 어귀에 말씀의 씨앗이 싹을 틔어 세워진 자갈치교회. 지금의 항서교회다. 나재천 목사는 “1900년대 초반에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암울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에 부산에서 교회들이 많이 세워졌다. 가장 힘든 시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항서교회가 세워진 1905년 당시 부산에는 이미 부산진교회, 영선현교회(초량교회), 영선동교회(제일영도교회) 등이 호주와 미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져 있었다. 항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견된 사이드보덤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김성우, 김공원, 박인서, 이치선 등이 모여 가정에서 첫 예배를 가진 이후 자갈치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 나재천 목사는 “항서교회는 항구도시의 서쪽에 처음 세워진 교회다. 1905년 2월 첫 주에 첫 예배를 드렸다. 금년 110주년이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일, 2월 첫 주에 110주년 기념예배와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고 말했다.
▲ 1935년도 항서교회 교우들
어려울 때 함께 했던 교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항서교회는 교회 건물을 피난민 거주지로 선뜻 내줬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피난민들을 위해 예배당까지 그들의 숙소로 내주게 됐다. 당시 인근 학교 건물이 군대 막사로 사용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장소가 없었다. 이를 알게 된 항서교회는 아이들을 위한 임시 교실로 교회를 제공했다.“교회 건물이며 마당까지, 피난민들을 위해 최대한 다 내어줬다. 당시에는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는 나 목사는 “당시 교회에서 도움을 받았던 분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도 교회를 기억했다. 작년 6월 서울에서 권사님 한 분이 피난시절 고마웠던 마음에 교회에 연락을 하고 감사헌금을 하셨다. 또 가수 윤형주 장로의 모친 또한 늘 피난시절 도움을 받았던 우리교회에 대해 아들에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전도 잔치 때 윤형주 장로가 선뜻 초청에 응했고 은혜를 나누고 돌아간 일이 있다”고 말했다.
▲ 아미동에서 부용동으로 이전, 건립한 교회(성전)모습
‘학사교회’라는 별명을 가지다항서교회를 설명하면서 김길창 목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1932년 항서교회에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36년간 시무했던 김길창 목사는 1968년 원로 목사로 추대됐다. 김길창 목사가 시무하는 기간 교회 개척이 많이 이뤄졌다. 1936년 항남교회의 개척 설립이후 1938년 감천교회를 설립했다. 해방이후에도 개척 교회 사업은 계속 전개됐다. 1951년 신광교회와 신성교회, 1952년 신암교회 등 8개 교회를 개척했다. 나재천 목사는 “분쟁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다. 지난 1966년 9월 경남노회 창립 50주년 기념 예배에서 특별 표창을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길창 목사는 교육 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영생유치원(현 놀이아유치원), 남성여자중학교, 대동중학교, 부산신학교, 남성여자고등학교, 대동고등학교, 광성공업고등학교, 계성여자중학교,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 거제중학교, 남성초등학교, 경성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여자초급대학 등을 설립했다. 나 목사는 “당시 학교 교직원들이 교회에 많이 출석했다. 정규 대학을 거친 이들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항서교회가 수준이 높은 교회로 알려졌고 그러면서 학사교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설명하면서도 “사실 그것이 조금은 전도에 걸림돌이 된 것 같다. 소위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쉽게 올 수 없는 교회가 되어 문턱이 높은 교회가 됐던 것 같다”면서 부임 후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데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회복과 전도에 집중하며 성장2008년, 현재 항서교회의 담임인 나재천 목사가 제11대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항서교회는 교회 안의 문제로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나재천 목사는 “부임 당시 교회가 아픔을 겪고 있었고 교우들의 마음이 흩어져 있었다. 사실 교회의 이러한 상황들을 전혀 모르고 부임했었다. 그래서 처음 와서 목회의 방향과 비전을 위해 기도하는 중 아픔과 상처 치유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부임 후 2년 동안은 교우들이 하나가 되고 상처를 치유하는데 초점을 뒀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2년 동안 치유의 시간을 가진 항서교회는 결속력을 가지게 됐고, 지역을 돌아보게 됐다는 나 목사는 “서울에서 목회 훈련을 받았다. 한 교회에서만 전임전도사, 부목사로 사역했었다. 강남 대치동에 있던 교회에 있었고, 당시 서울은 기독교인 비율이 높았다. 처음 부임했을 때 교회 인근 지역은 공가도 많고 노인 비율이 높았다. 사역에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부산을 선교지라고 생각하고 사역하라는 조언을 듣게 됐다. 처음 2년을 교우들에게 집중했다면 2010년부터는 모든 목회방향을 전도로 잡고 교회체질도 전도체질로 바꾸었다. 당회에서 중심이 되어 줘 그때부터 교회가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낸 것은 교회가 가진 역사성에 있는 것 같다. 내 아버지가 다닌 교회, 내 할아버지가 다닌 교회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뿌리 깊은 교회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지난 1일(주일), 110주년 기념예배 때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지역에 파고드는 교회나재천 목사가 부임하기 전부터 항서교회는 경로대학을 운영하면서 지역 어르신들을 섬겨 오고 있다. 나 목사가 부임한 해부터는 ‘사랑의 쌀’을 나누고 있다. 성도들의 헌금으로 준비된 사랑의쌀은 동사무소와 협력해서 지역주민들에게 전달한다. “110년동안 이 지역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교회와 지역은 서로 동떨어지면 안 된다. 지역에 파고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다”는 나재천 목사는 교회 안의 결속력, 복음의 능력과 섬김이 지역에 펼쳐나가야 한다면서 교회안의 담, 지역사회와의 담을 무너뜨리고 지역에 필요한 것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한 8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교회 부설 유치원은 지역 아이들에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명품 유치원으로, 최근 어린이집 문제로 걱정하는 부모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교육기관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항서교회의 장기적인 비전은 어린이 도서관과 장학관 설립이다. 지역 아이들에게 양질의 도서를 제공하고, 원거리에 있는 젊은 청년들을 돕고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나재천 목사는 교회가 나누고 베풀며, 갑이 아닌 을의 자세로 섬기는 것을 늘 강조한다. “예수님은 갑에서 을로 오셨다. 내려놓음이 없어 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다. 내 생각, 내 주장만 한다면 교회도 혼란을 겪는다. 섬기는 자세로 낮아질 때 세상 가운데 존경을 받는다”면서 “앞으로 110년의 역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책임 있는 행동으로 나타내는, 감동을 주는 삶이 항서교회 교인들의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 110주년이 되는 지난 2월 첮 주 임직 및 취임, 은퇴 예배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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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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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서 있는 브니엘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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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인 1990년, 브니엘신학교가 설립됐다. 이사장 박성기 목사가 1958년 미국 재단법인 중아선교회(VOCA)의 미국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것으로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시대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던 고국으로 돌아와 선교와 구제 사역을 전개했다. 전도를 통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이게 됐고 그 중에 소명을 가진 자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브니엘 총회가 설립됐고, 이후 총회는 브니엘학원(브니엘고등학교, 브니엘여자고등학교, 브니엘예술중·고등학교, 브니엘유치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1990년, 교단 목회자를 양성하는 브니엘신학교를 설립했다. ‘소명’을 가진 목회자 양성기관브니엘신학교는 초교파 목회자 양성기관이다. ‘소명’(召命)이라는 교훈에 대해 박성기 이사장은 “부름 받아 나선 자들, 하나님이 원하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믿음과 결심을 가진 자들을 훈련시킵니다. 존귀와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고, 멸시와 천대와 십자가는 자신이 지고 가겠다는 각오를 가진 복음전도자들을 훈련시킵니다”고 설명했다. 학교의 목표는 소명의식에 투철한 사역자, 개혁주의신학체계를 확립한 사역자,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 충만한 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브니엘신학교 총장 최덕성 목사는 “기본적으로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공교회적 특성을 살리고자 하는 학교입니다. 올해 정초 저명한 월스트리트저널은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는 영국, 독일, 네덜란드 교회들의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유령이 나오는 술집으로 바뀐 예배당, 서커스단 학교, 상가, 어린이 오락실로 바뀐 교회당들 사진과 함께 소개했습니다. 세계교회가 이런 상황에서 복음 없는 기독교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잃어버린다면 한국교회는 거미줄이 쳐진 유럽 교회들처럼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브니엘신학교는 역사적 기독교에 충실하게 복음적 신학을 가르쳐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에 매진하는 리더들을 세우는 일에 소명을 다하고자 합니다”라면서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신학교의 길이라고 덧붙였다. 성령 충만을 체험하는 배움터브니엘신학교는 지금까지 약 1,300명의 학생들을 배출했으며, 평균 2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다. 목사후보생을 위한 신학대학원 과정 중심의 학교이지만, 성경연구와 전도사 양성과정인 학부도 개설했다. 이 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은 아시아신학연맹(ATA)이 인준한 M.Div., M.A., B.A.를 받는다. 또 전문인선교사를 필요로 하는 현재, 브니엘신학교는 2년 과정으로 전문인선교사후보생을 모집하고 있다. 최덕성 총장은 “전문인선교사후보생은 전공대로 사역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농업, 목축업, 미용 등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전문인이 됩니다. 그들에게 성경과 선교에 대해 가르쳐 선교지에서 선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입니다”고 말했다.브니엘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브니엘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 여학생들은 지금까지 독립교회연합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나 지금부터는 중아선교회를 통해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브니엘신학교의 교수들은 미국, 영국, 호주, 남아공, 한국 등의 유명 학교에서 철저한 학문적 훈련을 받는 학자들이자 목사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의 강의 내용은 십자가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덕성 총장은 “교수들에게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의 규칙이라고 믿어야 하며, 성경의 무오성, 완전 영감성, 유기적 유감성을 인정한다고 서약하도록 합니다. 성경적 기독교만이 영혼구원, 부흥,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브니엘신학교 교수들은 이 성경관과 개혁주의 교리체계에 상반되거나 어긋나는 어떤 것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암시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넌지시 말하거나 묘한 관심을 갖도록 하지 않으며, 냉소적으로 소개하거나 언급하지 않도록 서약합니다”고 설명했다. 역사적 신앙에 선 학교브니엘신학교는 사도적 직무(고후 5:17~20)에 성실하고 탁월성을 발휘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훈련시킨다는 최덕성 총장은 “학교의 지금까지를 챕터(Chapter)1로써 신학의 방향을 잡고 교회 개척에 전념했다면 지금부터는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복음과 영성으로 훈련된, 선명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인 복음에 매진하고 사회와 지역에도 헌신할 수 있는 신학도를 키우는 신학교의 길을 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성기 이사장은 “학문적으로, 영적으로 최고 수준의 신학교로서 맞춤형 목회자 양성기관”이라고 설명하면서 “예컨대, 모든 목사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면 농촌교회 목사는 없어질 것입니다. 농촌교회에서 봉사하는 사역자와 신학교에서 교수를 할 수 있는 최고학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 브니엘신학교가 나아갈 방향입니다”라고 덧붙였다.
▲ 브니엘신학교 수업시간
▲ 브니엘신학교 졸업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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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