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2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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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EBE 그리고 케플러-452b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훈택 교수가 신약 수업 시간에 외계생명체가 있는지 성경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는 가운데 교수님의 답변은 만일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도 선교 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손 들까 망설였는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구나 하고 내심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미확인비행물체’라는 뜻의 ‘유에프오’(UFO, Unidentified Flying Object)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대 미국입니다. 미 공군 조사단장인 에드워드 J. 러펠트(Edward J. Ruppelt)가 그 효시(嚆矢)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47년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웰(Roswell)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추락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특히 그 속에 타고 있었다는 외계의 생명체에 쏠렸습니다. 1982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이티’(E.T., Extra Terrestrial)가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외계의 지적생명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10년 후인 1993년 미국 폭스 TV는 야심찬 기획물 ‘엑스 파일’(X-files)을 내보냅니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과학지식에 의해 쭈글쭈글하고 못생겼던 E.T.는 외계의 생물학적 존재 ‘EBE’(Extraterrestrial Biological Entity)로 명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낯선 방문자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과연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아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천체가 지구 외에 또 존재할까 하는 궁금증으로 발전합니다. 이번에도 영화가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2012년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2014년 ‘인터스텔라(Inter-stella)’가 그러합니다. 전자는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Where are they from)를, 후자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Where are we going to?)라는 문제를 다뤘습니다. 이론적인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2011년 2월 19일 미국항공우주국(NASA) 케플러 우주망원경 프로젝트 책임자인 윌리엄 보루키(William Borucki) 박사는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회의에서 은하계에 500억 개의 행성이 존재하며, 이 중 최소 5억 개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골디록스 존(Goldilocks Zone)’에 해당한다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15년 7월 23일 역시 같은 연구팀은 지구로부터 1,400광년 떨어진 항성 ‘케플러-452’와 그 주변을 공전하는 ‘케플러-452b’를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항성(恒星) 케플러-452는 태양과 비슷한 온도에 10% 더 길고 20% 더 밝으며, 행성(行星) 케플러-452b는 지구보다 1.6배 길지만 공전주기는 368일로 거의 같고 무엇보다도 지구-태양 간 거리와 비슷하게 공전하고 있다 합니다. 문제는 현재 과학기술 수준으로 이 별까지 가는데 2,580만 년이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들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별들을 너무나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특히 욥기와 아모스가 거론하는(욥 9:9, 38:31; 암 5:8) 묘성(昴星)과 삼성(三星)이 그러합니다. 겨울철 남쪽 하늘 황소자리에서 관측되는 7개의 별을 일찍부터 ‘묘성’으로, 역시 겨울철 별자리인 오리온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세쌍둥이 같은 별을 ‘삼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묘성은 실은 수천 개의 별들이 뭉쳐 있는 성단(星團)이요, 삼성은 실은 서로 일직선상에 없는 전혀 무관한 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욥 38:31)라고 표현합니다. 현대과학을 앞서가는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알면 알수록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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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은혜의 말씀] 절반의 감사 (합3:16~19)
    절반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유태인들이 강한 이유는 절기를 잘 지켜서 그렇다고 봅니다. 절기라고 하는 것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음식을 먹고 한 밥상에 둘러앉아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그때에 가정교육이 이루어지고 만남과 나눔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설날을 맞이해서 가족들이 다 모이고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명절, 절기를 지키면서 문화가 만들어지고 가정의 대화가 풍성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절기를 중심으로 역사가 흘러갑니다. 유태인들의 절기는 특별히 ‘맥추절이다’ ‘유월절이다’ 할 때 그 절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곡식을 추수해서 감사하는 의미가 있고, 두 번째는 역사적인 사건을, 위기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도우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최고의 감사가 있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에 대한 예표를, 미리 앞서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상징하는 것이 절기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 하박국서를 통해서 이 맥추절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주제가 간단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것들이 득세하고, 왜 세상의 불법이 판을 치고 정의로운 사람, 공의로운 사람은 늘 고난을 당하느냐?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고 대적들이 흥왕하는 것을 이렇게 허락하실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할 때 이유 없는 환란 때문에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나쁜 사람들은 잘 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도전 하는 것이 하박국서입니다. 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결론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에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그런 환난의 때,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게 아니고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합3:17) 없으며, 못하며가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무에 열매는 없고, 외양간에 소는 없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18절에 가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절「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오늘 절대감사, 선불감사, 평생감사, 무조건감사, 감사할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사람은 조건적인 사람이고 그리 아니해도 일단감사, 평생 감사하는 사람은 인생이 happy day로 흘러갈 것입니다. 조건 따지고 상황 따져서 하는 사람은 늘 일희일비하고, 마음의 조울증을 겪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의 원천이고 내 최고의 백그라운드, 내 최고의 후원처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같은 시험을 지나고 죽을 것만 같은 순간들을 헤쳐 나가면서 비로소 노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 것입니다. 고민거리가, 기도제목이, 근심거리가, 간증거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맥추절을 지나면서 오히려 절반의 타작도 안 되는, 건더기가 없는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 할 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와도 감당을 하고, 감수하기 때문에 그 삶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님 밑에 있는 자녀들은 행복한 것이고, 이 시대의 고난을 돌파하고 pass of 해서 절반의 감사일지라도 오히려 그때야 말로 내게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나오는 때입니다. 느낌을 아니까, 고통의 맛을 아니까, 쓴맛을 겪어본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맥추절에 일 년의 절반을 지나면서, 성도들의 마인드가, 성도들의 스피릿이, 성도들의 스타일이 새로워져서, 불평과 원망과 짜증의 삶을 청산하고, 환난과 빚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것들을 통과한 후 승승장구해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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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교회법률상식] 총회 유령 위원회가 노회에 하달한 유령 공문
    [질의] 최근 합동 교단 내 언론지인 크리스천포커스 38호 8면에 총회로부터 황해노회장 앞으로 “황해노회 동산교회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기상천외한 공문이 하달되었다는 특집 기사를 보았습니다. 게재된 공문의 내용을 보내드리오니 검토하시고 법적으로 합당한 공문인지 법리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S노회 K장로)(합동 S노회 K장로) [답] 필자에게 알려온 공문의 내용을 검토한 후 총회장과 총회 서기에게 전화상으로 확인한바 권원 없는 유령 위원회가 유령 공문을 노회에 하달한 것 같아 보인다. 공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서번호 본부 제99-1167호(2015.7.9.) 수신 : 황해노회장, 제목: 황해노회 동산교회에 관한 건, 내용: 제99회 총회 특별재판국 보고는 잠재하고 제98회 재판국 판결문 보고대로 처리하기로 결의하였기에 통보하오니 이행하여 주시고 그 결과를 2015년 8월 17일까지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별첨 : 제98회 총회재판국 판결문 사본 1부 끝. 하단 발신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관인) 총회장 백남선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 위원장 박무용”으로 하여 실인은 없고 총회 관인만 찍힌 공문이 황해노회 노회장에게 하달되었다고 한다. 이에 필자는 공문에 기록된 결의 내용과 위원회 조직에 대하여 총회장과 총회 서기에게 직접 전화로 확인한바 총회장 명의로 하달된 결의내용에 대하여 총회장은 “결의한 사실을 모른다”라고 답하였고, 총회 서기는 “그런 위원회를 조직한 일이 없다”는 답을 받고 보니 유령 위원회가 유령 공문을 총회장의 명의를 도용하여 총회 산하의 노회에 하달한 것으로 대명천지에 이런 날벼락과 같은 사건이 또 어디 있겠는가? 1. 유령 위원회의 허상(虛想) 총회 규칙 제27조 단항에 “당석에서 제안하는 안건은 … 개회 후 48시간 내에 제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총회 서기가 작년 제99회 총회 회기 중 “긴급동의안은 법정기한인 수요일 오후 2시까지 제출해 달라”는 광고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동산교회 관련건의 긴급동의안은 법정기한이 이미 지나버린 수요일 오후 4시 20분에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회 마지막 날 파회를 목전에 두고 서기가 “긴급 동의안이 있습니다!”라고 총회장에게 여러 번 제의하였고, 총대 석에서도 “긴급 동의안이요!”라고 항의가 있었으나 회장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서기가 8건의 긴급동의안 서류를 사회하는 총회장에게 올렸는데도 회장은 그 서류를 총회에 상정하지 않고 밀쳐 버림으로 모든 긴급 동의안은 자동으로 폐기된 서류라고 서기는 말했다. 문제는 총회 임원회가 총회를 파회한 후에 법리상으로 총회 회기 중에 이미 폐기된 긴급동의안을 임원회가 위임받은 잔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 법정시간 내에 접수된 “H목사 조사처리의 건”은 기각 결의하고, ? 법정시간이 지나서야 접수된 황해노회 동산교회 관련 건인 “특별재판국 설치 조사처리의 건”은 상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 서기는 “긴급동의안은 폐기된 것이니 취급할 수 없다”고 강력히 항의했으나 총회장과 부총회장이 중심이 되어 밀어붙이기 식으로 상정하여 결국은 “3인을 보내어 화해를 한번 권면해 보라”고 결의한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처음에는 “화해조정위원회”(위원장: 부총회장 박무용 목사, 위원: 부총회장 이호영 장로, 회계 서병호 장로)라는 이름으로 3인 모두가 위원장 서기 회계의 위원회 임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언제부터인가는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 총회 서기의 답변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야말로 가히 유령 위원회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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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성공칼럼] 영원한 결합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삼백 번 가까이 나오고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도 많이 나온다. 이 언약은 구원 즉 하나님과 결합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결합한다는 말이다. 그 외에 가족, 공동체, 하나 됨, 평화로운 사회, 함께 있고 싶다, 좋은 관계 등의 말은 모두가 결합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건물을 지은 후 수 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튼튼하다는 말은 그만큼 결합이 잘 되었다는 말이다. 찬사 중의 찬사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나 건물과의 관계나 그 결합이 오랫동안 혹은 영원하기 위해서는 결합할 수 있는 접착제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혈연 혹은 종교적 신념으로, 돈으로, 학연, 지연으로 결속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결합이 될 수는 없다. 때가 되면 접착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특히 가정에서 자기애, 자기 지배욕, 자기 우선, 걱정, 근심, 분노, 짜증, 무시, 큰 소리, 욕, 도박, 술, 여자, 자기 욕심,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부나 가정의 결합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돈이나 권력, 성공을 추구하는 것도 잠깐 접착력이 있을 뿐이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면서 옳지 않는 일이나 악을 행하면 거짓과 악은 접착제가 아니기에 결국은 깨어지는 것이다.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면 영원한 접착제인 사랑과 진리와 선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부부가 결혼 할 때 상대방의 조건에 끌려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본가 편을 들고 매일 늦게 들어오고 일과 관련된 행사는 다 참여했다. 쉬는 날은 피곤해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자기 취미 생활만 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편이 아닌 것이 불만이었지만 가정 일만 많이 했고 존중받아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 재미를 느껴서 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렇게 25년을 보내다 보니 각 방을 사용한 세월도 오래되고 이 부부 사이에 접착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혼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접착력이 없어 함께 살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이 부부가 다시 함께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부부가 결합할 수 있는 접착제가 있어야 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하자. 그럼 이 사람들이 결합한 것일까? 아니다. 이 권력자에게 모여들어서 무언가 얻으려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권력자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결합이라고 할 수 없다. 내 목표와 돈과 권력을 원하고 있는 한 이들이 결합하는 것은 잠시 동안인 것이다. 부자가 돈과 권력이 없어지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없을 때는 결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은 접착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람을 만나는데 돈보고 만나거나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만난다면 나는 이미 하나님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접착제는 사랑과 진리와 선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것이며, 진리는 사랑과 선을 이루기 위한 길이며, 선은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해주고 유익을 주긴 하는데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닌 상대를 이용하는 자기사랑이기에 언젠가는 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먹을 것과 돈을 주면서 진리 없이 사람들을 이용해 조직을 만들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은 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감정 섞인 충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가르침은 그 속에 선함이 없는 진리이기에 언젠가는 끊어지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이 시작점이다. 이 사랑에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방법, 노하우, 사상, 진리가 나오고 사랑과 선을 증명하는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매 순간의 삶을 살면서 나는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어야 하며, 방법도 옳은 것이어야 하며, 나의 행동은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이며 진정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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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가정칼럼] 아내와 주방! 쿵짝이 맞다
    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경쾌한 리듬의 레게 음악. 저 멀리 자메이카의 전통음악이 대중음악으로 정착하면서 중요한 음악 장르가 된 레게는 뜨거운 햇빛 아래 총총 땋은 헤어스타일, 알록달록 패션까지 갖춘 이들이 쿵짝 쿵짝 리듬에 맞춰 노래하여 경쾌함을 준다. 그래서 레게를 기분 좋아지는 음악이라고 하나 보다. 이 레게 리듬이 경쾌한 이유는 2박자 계열이기 때문에 쿵짝 쿵짝 리듬과 함께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가나 쿵짝이 잘 맞아야 하나보다. 주부들의 전용 공간인 주방에서도 이 쿵짝이 필요하다. 주부들 사이에서 영식님, 일식씨, 이식군, 삼식세끼 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밖에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남편에게는 영식님이라는 존칭을 써주고, 하루 한 끼 먹는 남편에겐 일식씨, 두 끼를 먹을 땐 이식군, 하루 세 끼 집에서 다 챙겨먹는 남편을 향해 삼식 새끼(?)라고 부른다는 것. 그만큼 가사의 부담감을 표현한 이야기일터, 예전의 우리 어머니께서 어찌 된 게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넋두리와도 통한다. 주부들의 평균 노동시간을 따져보면 40대 주부들의 경우 하루 평균 12시간 16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루의 반 이상을 집안일에 사용한다고 했을 때 수면, 식사 시간 등을 빼면 자신만의 시간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뿐인가. 잠을 자면서도 가족들의 출입에 늘 신경을 써야 하고 잠깐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가족들의 호출에 정신이 분산된다. 말하자면 24시간 대기조다. 바로 이런 과도한 가사 노동에 쿵짝이 필요하다. 레게 리듬에서 쿵과 짝은 액센트가 다르다. 쿵을 여리게, 짝을 세게 하는 엇박자가 더욱 리드미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주부들의 가사 노동에 있어서도 집중적으로 노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쿵이 있다면, 노동에서 해방되는 짝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들에게도 출퇴근 시간이 필요하다. 출퇴근은 여러모로 가정을 리드미컬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우선 과도한 가사노동시간을 적정한 선으로 유지할 수 있으며, 출퇴근의 개념을 통해 아내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가사노동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좋지 않은 감정들의 노출을 줄여줄 수 있다. 당연히 가정도 좋아질 것이다. 실제 어떤 주부는 본인 스스로가 출퇴근 시간을 정해서 가족에게 당당하게 동의를 구하고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생각했지만 아내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독한 마음으로 출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아침에 출근해서 보면 밤새 폭탄을 맞을 것 같이 되어있어 울화통이 치민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출퇴근 시간을 지켜가다보니 오히려 근무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등 즐기면서 일할 수 있었고, 퇴근 후 개인 시간에는 취미생활도 시작하여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가장 기분 좋은 변화는 자녀들이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닮고 싶어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아내에게 출퇴근 시간을 준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훌륭한 직장을 선물하는 것과도 같다. 그로 인해 주부의 공간이 리드미컬한 경쾌한 작업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나라 남편들이 선진국 남편들에 비하면 주방일을 도와주는 게 턱도 없이 모자라다는 기사에 고개만 끄덕일 것이 아니라, 우울하게만 바뀌어가는 부엌에 새로운 리듬, 경쾌한 리듬을 불어넣을 선물이 필요하다. 주부에게 가정은 직장이다. 직장에는 근무환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 환경이 열악할수록 자신의 일에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주방이라는 공간은 직장 내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방에서 아내가 마음껏 일하며 마음껏 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주방서재를 마련해 주는 것은 주부를 놀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주방은 정말 다양한 공간이 될 수 있다.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식탁을 조금 밀어내고 아담한 책장을 들여놓으면 될 일이다. 식탁은 책상 대용으로 사용하면 된다. 또한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오디오가 있으면 예술과 문학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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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08-27
  • 교회개척의 새로운 패러다임
    교회개척의 새로운 패러다임 최영기 지음 / 요단출판사 / 2015.08.01. / 10,000원 2009년에 국제가정교회 사역원에서 출판한 가정교회를 개척하여 잘 정착시킨 목사님들의「개척교회 사례집」을 증보 수정한 책이다. 교회를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는 목사님들을 위해 좀 더 오늘날의 개척 상황에 맞는 사례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발간하였다. 이 책은 가정교회 개척 사례이지만 일반 교회를 개척하는 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 최영기 목사는 휴스턴 서울교회 원로목사이다. 한국 전쟁 시 순교한 최석모 목사의 손자로서 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했다. 목회자로서 그의 꿈은 '신약적인 가정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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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2015-08-27
  • 신약교회 사관에 의한 중세교회사 1
    신약교회 사관에 의한 중세교회사 1 정수영 지음 / 쿰란출판사 / 2015.08.25. / 23,000원 저자는 중세교회사 1, 2권을 통해 1000년 동안 유럽 세계를 암흑으로 이끌어 간 타락과 부패의 역사를 밝히는데, 기존의 중세교회사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과거를 바라보았다. 1부 교황의 역사, 2부 유럽교회의 역사, 3부 주류교회와 다른 소수 교회 역사를 신약교회 사관에 의해 알아보고 교황들이 과연 신앙에 부합한 무리들이었는지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약 260여 명의 교황 중 그리스도의 종다운 교황은 10명 안팎이었다. 교황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으로도 중세교회사가 한눈에 읽혀지고, 교회와 우리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 문화
    • 도서
    2015-08-27
  •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김승욱 지음/ 규장출판사 / 2015.08.17. / 15,000원 할렐루야교회 김승욱 목사의 깊고 풍성한 사도신경 강해를 담은 『나는 믿습니다』. 성경적이고, 힘이 있는 김승욱 목사의 강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 외우는 것을 그저 예배 순서 중 하나라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얼른 외구고 끝내버린다. 그러나 믿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 자체가 예배이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만 외우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신앙고백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 문화
    • 도서
    2015-08-27
  •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 리 스트로벨 지음 / 두란노서원 / 2015.08.18. / 14,000원 은혜는 종교 언어에 불과한가? 은혜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 은혜가 진정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리 스트로벨 목사가 하나님 은혜의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자신의 신앙 여정을 담은 책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구체적인 은혜 사건들을 통해 은혜의 개념을 정의해 간다. 리 스트로벨은 우리 시대 실재하는 은혜의 현장을 인터뷰하며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를 만났다. 내 인생에 이미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 준다.
    • 문화
    • 도서
    2015-08-27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⑦
    1. 셰프 전성시대바야흐로 셰프 전성시대이다. 요리 강좌에 남성 수강생들이 몰리고, 여성들은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을 이상형 1위로 꼽고 있으며 하다못해 귀신도 셰프를 좋아한다(tvN 16부작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상처 입은 우리들에게 먹을거리 하나로 위로를 베풀고 바쁘고 슬프고 힘겨운 현대인들에게 힐링의 전도사 역할을 하는 셰프야 말로 이 시대 생명의 전도자이다. 예능의 대세도 ‘먹방(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 방송)’에서 ‘쿡방(음식을 조리하는 요리 프로그램)과 셰프테이너(셰프+엔터테이너)’, 곧 먹는 것과 요리사로 바뀌었다. 입고 살 만해졌기 때문에 먹는 것이 중요해졌을까? 먹방은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대리만족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그 먹방의 지루함을 해결한 것이 바로 쿡방이었다. 혼자 밥 먹는 사람들, 혹은 먹고 살기 힘든 우리네 이웃의 일상을 방송 화면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야흐로 셰프 전성시대이다. 요리 강좌에 남성 수강생들이 몰리고, 여성들은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을 이상형 1위로 꼽고 있으며 하다못해 귀신도 셰프를 좋아한다(tvN 16부작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상처 입은 우리들에게 먹을거리 하나로 위로를 베풀고 바쁘고 슬프고 힘겨운 현대인들에게 힐링의 전도사 역할을 하는 셰프야 말로 이 시대 생명의 전도자이다. 예능의 대세도 ‘먹방(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 방송)’에서 ‘쿡방(음식을 조리하는 요리 프로그램)과 셰프테이너(셰프+엔터테이너)’, 곧 먹는 것과 요리사로 바뀌었다. 입고 살 만해졌기 때문에 먹는 것이 중요해졌을까? 먹방은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대리만족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그 먹방의 지루함을 해결한 것이 바로 쿡방이었다. 혼자 밥 먹는 사람들, 혹은 먹고 살기 힘든 우리네 이웃의 일상을 방송 화면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야훼의 마지막 날 잔치모든 종교는 의식(예배 혹은 제사)과 먹는 것(밥)이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에게 바치는 제물은 곡식, 떡, 양, 염소, 소, 비둘기 등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번제와 희생제, 감사제와 요제를 드리게 된다. 그리고 제사 이후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서 함께 제사 음식을 먹는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출18:12).”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고 나서도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 이스라엘의 축제일인 유월절, 무교절, 추수절, 초막절 역시 모두 먹는 것과 관련이 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애굽의 종살이에게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축일로 제물고기와 누룩 없는 떡을 먹었으며 추수절과 초막절은 밭 곡식과 포도의 추수에 관련된 축일로 가난한 이들(노비,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까지도 함께 즐겨야 했다(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신16:14).이사야가 선포하는 야훼의 마지막 날의 모습도 먹고 마시는 잔치이다. 시온 산에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씻어 주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고 모든 민족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25:6)”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먹는 잔치로 묘사된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초대 교회 공동체는 어떤가?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그려준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행2:44-47).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러한 밥상 공동체가 깨어졌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고전11:20-21)”고 전한다. 곧 부자들은 취하도록 배불리 먹고 가난한 자들은 굶주린 상태에서 에배와 성찬에 참여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해결책으로 공동식사인 애찬과 성찬을 분리시켰고 결국은 성찬만 남게 되었다(“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고전11:34a). 사실 사회적 신분(주인과 노예)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를 그대로 두고 교회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예수의 밥상 공동체의 본질적인 모습은 아닌 것이다. 이후 요한복음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예수의 삶으로 이끌고자 종교적 의식 행위에서 오늘의 현실 속에 예수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6:56).”이를 구현한 이가 교회사에 등장한다. 지난 2015년 7월 6일은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의 화형 6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후스는 성찬식을 개혁했는데, 성찬식은 실제로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는 밥상공동체 운동이다. 이러한 후스의 개혁운동을 더욱 확산시켰던 후스파 운동은 ‘이종성찬(빵과 잔 둘 다 허용)’을 진행했는데, 이는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만들었다. 당시 성찬 집례시 잔은 사제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나 후스파는 평신도들에게까지 잔을 베풂으로 평등 공동체를 구현했다. 성찬을 통해 사제계급의 특권을 파괴한 것이며 성찬을 공동식사(애찬)로 바꾸어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잔치가 되었다. 3. ‘멋, 맛, 못’의 말씀 요리사인 설교자설교자는 말씀의 셰프이다. 최현석 셰프와 같이 요리하는데 멋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하기에 대행자로서 멋이 있어야 한다. 개그맨이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 맛이 있어야 한다. 백주부(백종원 셰프)의 솜씨와 같이 지식인이든 어린 아이든, 여자든 남자든 누구나 할 것 없이 맛있게 먹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감칠 나게 요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자의 설교에는 못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의 손맛과 같은 그리움이 있어야 한다. 찔림이 있어야 한다. 본향에 대한 그리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첫사랑에 대한 찔림, 미래의 희망에 대한 저 내면 깊숙한 곳에서의 외침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거든 요리를 배워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함께 더불어 먹기라도 해야 한다. 부활한 예수도 이념이나 정신 속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말씀 요리와 밥을 나눠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24:28-35).”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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