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1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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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를 바라보는 두 지역의 온도차
    부산과 경남은 복음률이 낮은 지역이다. 2005년 인구총조사 통계로 보았을때 부산은 10%를 조금 넘었고, 경남은 10%도 되지 않는 전국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경남이 더 나아 보인다. 경남은 호주선교사 기념묘원을 시작으로 곧 있을 주기철 목사 기념관 건립, 손양원 목사 생가 복원 등 순교자 관광벨트가 조성될 정도로 한국교회 성도들의 성지순례 코스로 각광을 받을 전망이다. 하지만 부산은 기독교박물관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기독교 유적지 발굴도 못하고 있다. 대다수 호주선교사들이 부산에서 활동했지만 기념묘원 조성은 경남이 먼저 했다. 그들이 묻혀 있다는 복병산은 현재 선교사들의 흔적조차 없을 정도다. 경남은 큰 사안에 대해 결집하는 모습이 대단하지만 부산은 무관심하다. 시간이 흘러 복음률도 경남이 부산을 앞지르는 시대가 꼭 올 것이라고 교계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말들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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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1-31
  • 목사님의 고추 맛이 참 좋습니다
    부산의 어느 감리교 목사가 목회 간증을 여러 목회자 앞에서 털어 놓았다. 너무 진솔한 내용이어서 여기에 공개하고자 한다.(사례 1) A목사는 부산으로 부임한 지 15년 정도 되었다. 처음 2~3년은 얼마나 목회하기 어려운지 긴장을 바짝 하지 않으면 물러나야 할 것 같았다. 주일날이 되면 스트레스를 받아 소화가 될 일이 없었다. B장로는 “목사님, 주보에 왜 이렇게 오타가 있습니까? 이름도 정확하게 기재해야지요!”라고 했다. 또 주일예배 시간 공중기도를 할 때 “우리 목사님, 하나님께서 어디 더 좋은 목회지로 청빙 받아 갈 수 있도록 어디 빨리 데리고 가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와는 목양이 잘 맞지 않아서 그러니 되도록 빨리 가도록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어느 여집사도 “목사님 넥타이 색깔이 얼굴과 영 맞지 않으니 다음에 내가 하나 사드릴테니 바꾸어 매세요”라는 것 아닌가. 장로한테 얻어맞고 여집사에게 조롱당하니 어찌 병이 안 생길 수 있겠는가. 묵묵히 견디며 하루, 한주를 살얼음 걷는 심정으로 목회를 해갔다. 체격이 좋아도 신경성으로 인한 소화불량으로 음식이 들어가도 탈이나 설사를 안 하면 다행이었다. 어느 날 A목사는 교회 앞마당 옆에 고추 농사를 위해 고추 모종을 사다 30~40포기 심어놓았다. 그런데 그 놈의 고추가 날이 갈수록 잘도 익어 고추농사가 잘 되었다. 몇 포기 따서 넥타이를 사다준 여집사의 집에 포장을 해서 선물을 했다. 그 다음 주일 날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의 고추 맛이 참 좋았습니다”하지 않는가. 그것도 사모가 듣고 있는 자리에서. 사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어 겨우 앞뒤 정황을 설명을 하고나서야 상황을 정리했다. 그 놈의 고추 때문에 목사 가정에 분란이 날 뻔 했으니 고추 심어서 아무에게나 주어서는 큰 일 나겠다고 마음 먹었다나... (사례 2) A교단 총회장에 관한 일이다. A목사는 부총회장 출마를 위해 노심초사 하던 차에 필자한테 전화로 “장로님, 이번 부총회장 출마 시 정견 발표시간이 딱 5분 있는데 어떤 말로 할까 생각이 안 납니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물어와 “목사님, 제가 뭐 웅변가, 달변가도 아니고 고수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요? 그러면 이것 한 번 써 먹어보세요. ‘만장하신 총대 목사, 장로님!’이라는 문장의 첫 서두를 ‘환장하신 총대 여러분!’이라고 한 번 웃겨보세요”라고 말했다.A목사는 그 당시 여지없이 단박에 써먹었다. 그러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고 익살과 유머로 장내 분위기를 꽉 잡아 놓은 뒤에 하고 싶은 내용을 발표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그때 잘 될 것이라는 감이 왔다”면서 당선 된 후 바로 필자에게 당선이 되었다고 전화하지 않는가. 환장하신 독자 여러분,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당선되신 A목사는 지금 총회장으로 잘 나가시는데 아직까지 한턱 쏘지도 않고 말로 때우고 있으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사례 3) 어느 교회 목사가 하늘나라로 돌아갔는데, 장례식장에 문상하러 온 한 장로가 조용히 기도하려는 순간, 주머니에서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노’하고 휴대전화가 울리지 않는가. 하필 그 장로는 돌아가신 목사에게 서운하게 한 일이 많았던 터라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야 하는데 ‘잘도 갔구나’라는 느낌을 유족들이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휴대전화 이럴 때 조심해야 한다.(사례 4) 한국교회 목회자들 사이에 ‘이것만은 먹지 말라’는 격언이 생겼다. ‘다른 것은 다 먹어도 회는 절대 먹지 말지어다. 그 회는 바로 고기 횟거리가 아니고 당회라는 회를 먹지도 말고 보지도 말지어다’라는 속어가 생겨날 지경이다. 시무 장로들이여,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이다. 매월 당회가 있는 주일은 소화도 안 되고 먹어도 넘어가지 않는 소위 스트레스에서 헤어나지 못해 속병이 날 지경이면 차라리 당회장직을 내어놓고 장로 없는 개척교회에서 가장 속 편하게 목회할 수가 있다. 목회자가 장로와 동반자적인 동행을 하는 것, 당회의 운영을 잘 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겁을 먹는 것은 당회장이 그만큼 군림하거나 탐욕, 이기심 때문에 그렇게 두려운 것이지 조용히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 목회를 하게 되면 당회는 웃음꽃이 피어날 것이다. 장로들을 칭찬하고 존경하게 되면서 목회자는 그만큼 올라가는, 평범한 진리를 왜 모르는 걸까? 한국교회 목회자님들이여, 당회라는 횟거리를 마음껏 드십시오. 절대 체하거나 소화불량이 되지 않으니 걱정일랑 매어 두십시오. 3000~4000명 이상 되는 대형교회 목회자는 당회운영을 얼마나 잘하는지, 큰 그릇은 큰 그릇대로 작은 그릇은 작은 그릇대로 목회한들 아무이상 없습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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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사설]어린이집 문제, 교회 어린이집이라도 앞장서자
    최근 잇달아 보도되는 어린이집의 아동학대 사건으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사건마다 공개되는 CCTV 영상을 접한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분노하고 있다. 덩치 큰 어른이 약하고 작은 아이들을 때리는 모습은 아무리 여러 번 봐도 충격적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다. 어린이집 아동학대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는 관련 법안 제정에 고민하고,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맡긴 부모들은 불안감에 고민한다. 또 보육교사 및 어린이집 원장들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한다. 내 아이는 안전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부모들의 불안은 증폭되고 있다. 연이은 사건 보도에 어린이집으로, 담임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당부도 하고 화도 낸다. 이런 부모들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교사들도 죽을 맛이다. 최저임금에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일하고, 연장근무는 필수다. 아이들이 놀 때는 청소해야 하고, 아이들에게 배식 후 늦게 식사를 하지만, 아이들보다 먼저 식사를 끝내고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밥을 마시듯이 먹는다. 사무직 여성과 달리 아파도 쉬지 못하고, 계속 몸을 움직이며 일을 해야 한다. 일명 ‘여성 막노동’ 직업이라 불린다. 그러나 아이들이 예쁘고, 커가는 모습을 보람으로 삼고 일하는 직업이기에 이런 고충에도 버텨 온 교사들이지만, 요즘 같이 범죄자 취급에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교사들이 속출하고 있다. 한국교회들을 살펴보면 다수가 교회 부설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교회는 현 시점에서 어린이집 사태를 방관할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부모들의 불안 해소를 위해 고민하고, 교사들의 업무 환경 개선을 위해 고민해야한다. 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CCTV 설치를 어떻게 할지 교사들과 부모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 합의점을 도출해야 한다. 교회 어린이집에서 이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랴? 당회가 먼저 고민하며 시대에 앞장서는 본을 보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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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1-31
  • [사설]위기의 학원선교, 왜 지리산 청학동 프로그램을 선호하는가?
    최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장 정영택 목사)총회 국내선교부가 한국100주년기념관에서 ‘위기의 청소년, 학원선교의 방안 모색’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오늘날 학원선교가 날로 피폐해 가는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의 계기가 되는 방안이라는데 주목을 받고 있다. 더구나 부산·경남을 비롯한 경상도 안의 미션 중고교 학교가 전체 국내 미션계의 3분지1을 차지할만큼 기독교 정신을 교육이념으로 설립한 학교가 많다는 것이다. 조용선 목사(온누리교회)는 이날 세미나에서 “학원 교육의 영향력이 점점 감소하고 있는 현재 학교는 교회, 가정 등과 협력하여 청소년들의 인성과 성품, 도덕교육을 활성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학원선교는 교목이 도덕과목을 가르치고 채플이 없어진지가 오래이며, 교사들의 신앙지도도 힘든 단계에 왔다. 오늘의 학원 현장은 그야말로 기독교 이념으로 설립한 학교라는 이름이 무색할만큼 기독교교육이 점점 사라지고, 한 귀퉁이로 밀려나는 위기에 서 있다. 내년부터 한 학기 동안 시험 부담없이 진로를 탐색하는 자유학기제가 전 중학교에서 전면 도입될 예정이라고 한다. 외부의 인력 지원이 필요할 것이 예상되어 교회가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교회가 연계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사회봉사 활동과 동아리 구성 등을 통해 교회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고 복음의 힘으로 오늘의 학원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교회보다 오히려 지리산에 있는 청학동의 인성예절교육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현실 교육과 교회 교육이 그 빛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교회는 학원선교를 학생들 양적 성장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지 말고 인성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인재 양성을 목표로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도시 교회 4분지1이 교회교육에 실패 내지 철폐될 단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출구전략은 새로운 컨셉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철저한 교회교육 프로그램의 혁신과 변화된 새 틀을 짜서 교회와 학교가 연결되는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학원선교는 학원대로 교회는 교회학교대로 활성화 될 수 있게 질적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오늘 같이 문명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왜 지리산 청학동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교육을 선호하는가? 청학동 인성교육을 답습하여 좋은 것은 교회 교육으로 삼는 프로그램으로 선용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5-01-31
  • [기고]장로교단의 분열과 형성을 이룬 천명(상)
    ▲ 박병진 목사(총신명예교수 교회헌법) 10년 후에 보자던 호통 왕성 ‘기장’ 현실 되고, 총회장, 임원불신임 선언 ‘통합’총회 터전 되다 1912년에 창설된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일어난 박해 이전에 대원군이 박해하던 천주교회처럼 여기는 처지에서 혹심한 박해를 받아오던 중, 한일합방은 나라만 빼앗긴 것이 아니고, 이른 바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며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 운운하면서 대개 한글자로 된 성에 두글자로 된 이름을 가져온 한국 고유의 전통을 빼앗아 일본인들처럼 두글자 성을 가지게 하였으며, 처녀들을 잡아다가 일본군의 노리개를 삼았으며, 특히 일본귀신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天照大神)라는 태양신의 사당을 지어놓고 강제로 참배케 할 뿐 아니라, 일본의 군왕을 사람으로 나타난 신(現人神)이라며, 천황이 거하는 곳 동방을 향하여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는 동방요배까지 강행케 했었다.그러나 이같은 모질스런 박해에도 굴하지 아니하니 감옥에 처넣어 옥고를 치르게 하거나, 손톱 발톱을 뽑아내고, 귀를 자르고 눈을 뽑는 등 온갖 만행으로 죽임을 당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어찌되었든지 일제침략 시대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가 일본 기독교단처럼 둔갑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꾸준히 하나의 교단을 이루고 있은 것으로 볼 수는 있으려니와, 해방 후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신학을 가르치는 일로 해서 ‘기장측’이 갈리고, 이어서 해방 후 옥중에서 풀려난 산 순교자 같은 주의 종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려신학교에 대하여, 일본 침략시절에 신사참배에 미소끼바라이라는 귀신을 섬기는 의례에까지 앞장섰던, 그리하여 부산, 경남지역에서 교권을 장악했던 김 모 씨가 노회장이 되면서 고려신학교를 몰아내는 사태가 총회에까지 이어지니 고려측이 갈렸으며, 당시 총회가 정회된 후 난데없이 총회장과 총회임원을 불신임한다는 선언에 따라 오늘의 통합측의 터전이 형성되었으며, 1979년 제64회 총회시에는 총신 김학장의 모세 5경에 대한 이설(異說)과 총신의 재단이사회 사유화(私有化), 전권위원 전권정치, 노회에 대한 불법 난도질 등등으로 합동측이 주류와 비주류(당시 총회가 회집된 대구 일간지들은 진보계 인사는 예배당에 들어가서 총회를 진행하고, 보수계 인사는 예배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는 뜻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주류는 합동측의 보수계란 뜻에서 세칭 그대로 합동보수라고 불린다) 로 갈렸고, 합동보수측은 그 후에도 합동개혁이니, 예장이니, 개혁이니, 청담이니 하고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이어지고 있다.이같이 교단이 여러갈래로 나뉘는 과정 속에 교단을 새로 형성하는 선언과 천명(闡明) 등 상징적인 발언을 보면, 보는 이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는 있으려니와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자유주의 신신학의 대부 김재준 교수가 권 제6장 제42조(이단과 교회 불법분리 죄)에 의해 목사면직이 선포된 후, 조선신학교 출신은 강도사나 목사장립을 금하게 되자, 1952년 6월 3일 대구에서 호헌대회를, 그 이듬 해 6월 10일 서울 수유리 한신 강당에서 제38회 총회를 다시 따로 모여 총회장에 김세열을 선임하였고, 그 다음해에 ‘대한기독교 장로회 총회’로 칭호를 바꾸었는데, 당시 총회를 떠나가면서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가 회중을 향해 “10년 후에 보자!”고 하였다는데, 이 말이 ‘기장’형성에 깊은 인상을 준 선언처럼 여겨진다.같은 무렵 8.15 해방과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으로 끌려가서 죽다가 남은 살아 있는 순교자 격인 주의 종들의 생각에는 평양신학교는 일제의 박해로 어용(御用) 신학교가 되는 일을 피해 자진 폐교되었고, 이남의 조선신학교는 조선총독부의 마음에 들어 허용된 자유주의 신신학의 모체가 되었으니 기대할 수가 없고, 그런즉 가장 시급한 것은 개혁주의 보수정통신학과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청순하고 순결한 삶을 표방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양성하는 신학교 설립이라고 생각하고 1946년 9월 20일 부산 금성중고등학교 자리에 임시교사를 마련하고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는데, 교단의 힘을 모아 육성 발전케 하지는 못할망정, 1948년 4월 20일에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4회 총회는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고려신학교 입학 지원자에게는 천서를 주지 않기로 가결하다”(1948년 제34회 총회록 p.23)고 결의하였으며, 그 이듬해 1949년에도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5회 총회는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 신학교로 가결하면서 (동 총회록 p.58), …’고려신학교에도 거년 총회결정대로 노회가 관계를 가지게 되는 일은 총회의 결의에 위반되는 일이매 삼가하심이 마땅하오며…‘라고 결의하였으며, 1950년 대구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6회 총회는 경남노회 총대의 회원권 문제를 보류한채 총회를 개회하였으나, 개회 후에도 양대 세력으로 갈린 경남노회 총대문제로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정회, 혹은 비상정회를 거듭하다가 “금번총회는 9월 첫주일 후 화요일(19일) 오후 7시 30분까지 정회하되, 장소는 대구에서, 회원은 금번 총회원으로, 비용은 각노회 상납금 중에서 지출할 것” 등을 결의하였는데, 이날이 바로 1950년 4월 25일 이었다.그런데 정확히 2개월 후 즉 1950년 6월 25일에 동란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정녕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사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여겨질 때에 우리 민족의 살길은 총회의 정상화와 거족적인 회개에 달린 것은 아니었는가?정회되었던 총회는 6.25로 말미암아 9월 19일에 대구에서 속회되지 못하고 해가 바뀐 1951년 5월 25일에 부산중앙교회당에서 속회되어 마산측, 3분측, 중간측으로 갈린 경남노회 문제(실제로는 목숨을 걸고 신앙절개를 지킨 출옥성도들과 신시참배자들의 대립이 아니었을까?)에 있어서 출옥성도 중심의 경남 법통노회를 배격하고 비고려측 총대를 받아들였는데, 문제는 그 다음해에 터져 버리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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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박 철 목사]신앙인들의 숙제
    스페인의 화가 고야(Goya, 1746 ~1828)의 그림 중에 ‘이빨 사냥‘이란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한 여인이(교수형을 받은 사내의 이빨에는 마법의 힘이 있다는 그 당시의 미신을 믿고) 시체 곁에서 결사적으로 이빨을 뽑으려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 공포에 떨면서 팔을 뻗어 굳어진 시체의 입 속으로 자기 손을 넣고 있다. 귀중하고 탐나는 목적물을 향하여 움직이는 자기 자신과 비참한 심정으로 자기의 행동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를 고야는 참으로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선거철만 되면 나는 문득 이 ‘이빨 사냥‘이란 고야의 그림을 연상하게 되었다. ‘귀중한 한 표‘를 얻기 위해 말쑥하게 차려입은 국회의원 입후보자가 땅바닥에 엎디어 있고, 그 앞에는 허름한 차림의 농군이 당황한 몸짓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죽은 조상 묘 앞에서라면 모르되 산 사람 앞에서 저렇게까지 땅바닥에 엎디어 머리를 조아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야, 저게 바로 민주주의라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백성을 섬기는 자세로 모든 정치인들이 정치를 했더라면 세상은 지금쯤 많이 달라졌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왠지 씁쓸한 감회에 젖어 들고 마는 것은 사진에 나타난 대조적인 두 사람의 관계가 지극히 형식적이란 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서로 엇갈린 시선이 너무나 멀고 깊은 소외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보장을 위한 비정규직 철폐문제와, 관계노동법 개정 문제, 밀양송전탑 문제, 쌍용노동자 강제해고 사태에 따른 문제, 농수산물 전면개방에 따른 향후 농촌문제, 빚더미 위에 앉은 농민들의 관심과 국회의원 입후보자들의 관심 사이에 작용되는 괴리감이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 풍토가 아닐까.자기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굳어진 시체의 입에서 마법의 이빨을 구하려는 고야의 그림에 나타난 그 여인과 오직 한 표를 얻기 위해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입후보자들, 이 두 사건의 상황은 서로 다르다 해도 전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후자는 자기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바로 이러한 소외 현상이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이러한 현상이 어디 우리나라 정치 풍토뿐이겠는가. 남을 도와 줄 때는 생색을 내서는 안 된다고 입이 닳도록 얘기하고도 교회 안에서 생색이 나야지만 돈을 내놓는 신도들, 그리고 교회당을 시장바닥으로 만들어 놓아야만 남을 도와 줄 수도 있고 교회 건축도 가능한 오늘 우리 교회의 분위기는 또 어떠한가. 그리고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다‘는 성서의 말씀을 곧잘 인용하면서도 조금만 섭섭해도 마음의 상처(?)를 쉽게 받는 목회자, 신도들. 이같이 만연한 소외현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이 문제가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숙제가 아닐는지….부버의 말을 하나 인용해본다. “모든 참된 삶이 ‘만남‘에서 이루어지듯 우리 눈을 가리는 모든 장애물, 그 장애물을 걷어치우고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매개물‘이 무너진 곳에서 진정한 만남과 인간회복이 가능하다“ 참으로 어려운 신앙인들의 숙제이다. 어렵다고 안 해도 되는 숙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숙제이다. 이 땅에서 숙제를 잘 마치고 가야할 텐데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까닭은, 시방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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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01-31
  • [가정칼럼]행복바이블(創福記)
    創福記 1장태초에 하나님이 행복을 창조하시니라. 세상은 혼란하고 공허하며 불행이 깊음 위에 있더라.하나님이 이르시되 기쁨이 있으라 하매 기쁨이 있었고 기쁨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미소와 웃음을 나누사 미소를 기쁨의 꽃이라 부르시고 웃음을 기쁨의 열매라 부르시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하나님이 이르시되 불만 가운데 불평과 감사로 나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불평을 지옥이라 하시고 감사를 마음의 천국이라 하시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하나님이 이르시되 꿈이 있으라 하매 꿈이 있었더라. 꿈이 각양 열매를 맺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하나님이 이르시되 위로가 있으라 하매 위로가 있었더라. 남을 위해 흐르는 눈물을 공감이라 부르고 자신을 위해 흐르는 눈물을 애통이라 하였으니 성장의 동력이 되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하나님이 두 손이 있으라 하매 돌봄이 있었더라. 자신을 위해 쓰는 손을 아름다움이라 하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한 손을 선행이라 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주시며 행복하고 또 행복하라고 이르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셨으나 행복하지 아니한 인간을 보시고 좋지 않게 여기시니라. 이에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 차리는 것"이라 하시고 행복을 사람의 눈앞에 두시고 사람의 가슴에 새겨 주셨더라.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創福記 2장행복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행복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므로 안식에서 행복을 완성하시고 가정은 곧 안식처가 되었더라.여호와 하나님이 행복을 창조하신 때에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열 명의 남자친구가 아닌 한 명의 아내를 허락하셨더라. 한 명의 아내에게서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은 열 명의 남자친구에게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음이라.여호와 하나님이 한 명의 아내를 인도했을 때 기쁨의 시가 터져 나왔더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배우자에 대한 고백이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되었더라. 그러므로 아내를 슬프게 하는 자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자라.모든 사람이 결혼을 통해 행복에 이르게 하였더라. 이러므로 모든 육체가 부모의 그늘과 상처와 역기능, 쓴 뿌리로 부터 벗어나 '치유'를 경험케 하시고 그 아내와 하나 되어 '지지'받으며 둘이 한 몸이 되는 신비를 경험케 하셨더라. 그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럼 없는 친밀감으로 '상호성장'과 함께 행복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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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교회법률상식]헌법을 짓밟고 장로회 정치를 포기한 합동총회(1)
    -노회 탈퇴는 곧 교단탈퇴라는 것이 장로회 총회의 헌법 규정-동일 교단노회 탈퇴한 교회, 동일 교단노회로 이적가입 불가 제99회 총회 결의 및 요람(2014) p.86에 “전남제일노회장 나종갑 씨가 헌의한 광주중앙교회 일부 교인과 채규현, 진수금, 이병욱, 김혁 씨의 타 노회 불법 가입 철회 조치의 건은 광주중앙교회가 이적절차 없이 남광주노회로 간 것도 불법이고, 전남제일노회가 원인무효 된 채규현 목사를 재판한 것도 불법이므로 행정사항은 잠재하고 광주중앙교회를 남광주노회로 이적하는 것만 허락하고 양측이 원만히 화해하도록 가결하다.”로 되어 있다. 이것이 과연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가 의결한 총회회의결의란 말인가? 초등학교 어린이 회의에서 어린 초등학생들조차도 이렇게 회의하고 이런 식으로 결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1. 교단 관할을 배척하고 탈퇴한 자를 두둔하는 총회 거두절미하고 필자가 알고 있는 바 채규현 씨는 전남제일노회를 탈퇴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공동의회에서 탈퇴 결의”를 한 후 언론에 공고까지 하였으니 총회 헌법 정치 제8장 제2조 2항의 규정에 의하면 노회 탈퇴는 곧 교단 탈퇴이므로 노회와 총회의 관할을 배척하고 이미 합동교단을 떠난 자이다. 그런데 총회는 왜? 교단을 배척하고 떠난 죄를 물어 노회가 책벌하여 세례교인에 불과한 최규현 씨를 “남광주노회로 이적하는 것을 허락”하는 결의까지 하고 두호하며 끼고 도는지 묻고 싶다. 채규현 씨는 교단 관할을 배척하고 전남제일노회를 탈퇴했으니 결코 남광주노회에 가입할 수는 없고 오직 합동교단 외에 타 교단 노회에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을 총회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정치 제8장 제2조(치리회의 관할과 성질) 2항에 “각 치리회는 각립한 개체가 아니요 서로 연합한 것이니 어떤 회에서 어떤 일을 처결하든지 그 결정은 법대로 대표된 치리회로 행사하게 하는 것인즉 전국 교회의 결정이 된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문의 의미는 전국 지교회의 당회, 노회, 총회는 각립한 개체가 아니라 서로가 연계된 하나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어떤 노회가 A씨를 목사로 임직하면 전국의 교회와 노회와 총회도 A씨를 자기가 임직한 것처럼 여기어 A씨를 목사로 인정하고, 또 어떤 노회가 B목사를 면직 시벌하면 그 노회에서만 면직된 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교회와 노회와 총회 역시도 자기가 시벌한 것으로 여기어 B씨를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국문학적으로도 법조문의 문맥이 그렇게 의미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 100년 역사의 정치 현장에서도 한결같이 그렇게 시행해 온 전통이다. 따라서 C교회가 자기의 소속 노회를 탈퇴하면 전국 노회들도 자기 노회를 탈퇴한 것으로 여기고, 총회 역시도 C교회가 총회를 탈퇴한 것으로 여기어 C교회는 그 교단 소속 교회가 아니라고 인정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노회와 교단의 관할을 배척하고 본 교단을 탈퇴한 채규현 씨는 전남제일노회가 제명출교로 책벌한 자로서, 스스로 탈퇴했으니 이미 본 교단을 떠난 자이고, 출교된 자이니 교인도 아닌데, 총회는 왜? 그를 여전히 합동교단의 목사인 것처럼 붙잡고 두둔하면서 총회와 노회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총회여! 교단을 탈퇴한 채규현 씨는 따르는 교인들이 3분의2가 되지 못하므로 대법원 판례에 의하여 재산은 한 푼도 요구하지 못하고 교회당에서 퇴거해야 함을 정녕 모르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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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성경인물탐구]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감옥생활을 한 요셉(3)
    요셉은 젊고 용모가 준수한 자였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 역할을 열심히 감당하던 중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흑심을 품고 그를 유혹한 사건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처가 동침하기를 청할 때 하나님 앞에 득죄할 수 없다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집요하게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하자 요셉은 그녀와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동침하기를 요구하자 요셉은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 대한 괘씸한 생각에서 요셉이 자신을 겁간코자 했다고 말하며 그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요셉은 젊은 나이에 타지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으므로 유혹에 넘어갈 소지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여인의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의 경건 의식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은밀히 행한 범죄는 세상에서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디발 아내의 요구에 응하면 생활이 더 편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신실한 신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어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시며 어려움 중에서도 구원하여 승리케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의 경건한 신앙은 모든 성도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무기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인하여 오히려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죄를 피하다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법은 공의를 거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핍박받는 것이 비일비재한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악인으로서 세상에서 안일하게 사는 것보다는 의인으로서 옥에 갇히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 더불어 범죄 하였더라면 옥에 갇히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는 징벌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은 징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었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백주에 다윗의 첩들이 압살롬에게 강간당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선을 택할 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는 자로서 천국이 저의 소유가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선을 따라 삶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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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성공칼럼]근원은 내가 아니다
    최근에 생긴 일이다. 내가 자동차에 다가가면 자동차가 반가운 소리를 내면서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그러나 다른 가족이 다가가면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내가 같이 가서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면 문은 열리지만 당신이 가면 문을 열리지 않는다!”면서 의기양양했다. 그런데 자동차 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내 주머니 속 ‘리모컨’ 덕분이었다. 문을 여는 해결책이 주머니에 숨어겨있어서 보이지 않은 것뿐이었다. 우리는 내 능력의 비결이 딴 곳에 있는데 그것을 내가 한 것인 양, 내 것인 양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모습은 삶에서 경계해야 하는 성품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법칙 중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 후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모양대로 만드시고 자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사람에게 주셨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최고의 선물과 자유를 주셔서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이 자신이 지닌 생명을 유지하고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만 잊으면 그 때부터 죽음인 것이다. 내가 받은 것은 내 속에 들어와 생명이 되어 있지만 그것을 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나 됨은 누군가의 덕분인데 내가 잘 나서 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신의 속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집에서 아내가 명절이 되어서 며칠을 고생해서 소불고기, 닭 매운찜, 자연산 회, 신선한 샐러드 등의 산해진미로 상을 차려 놓았다 하자. 그리고 아버지가 상에 둘러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 모든 음식을 누가 만들었지?” 아이들은 모두 “엄마가 했어요!” 그 대답을 하는 순간 아이들의 마음에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일어난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했다. 내가 내 돈으로, 내 실력으로, 허리가 아프면서도 며칠을 고생해서 내가 한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 순간 아내는 ‘생명의 근원’을 잊은 것이 된다. 아내의 말이 맞는 말이다. 아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수고와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한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내(음식을 만든 사람) 자신이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리석음과 두려움이 그 중심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는 그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할 때 어리석음은 무엇인가를 의존하고 숭배하게 만든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자연을 숭배하게 되고 심지어는 동물이나 돌과 그림, 부적을 만들어 숭배한다. 어떤 이는 귀신을 숭배하며 힘 있는 모든 것은 다 숭배한다. 결국 마지막에는 돈을 숭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근원을 아는 존재는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어떤 존재로부터도 숭배 받는 것을 거절한다. 누군가 천사의 능력 때문에 천사를 숭배하려고 하면 그 천사는 거절할 것이다. 왜냐면 내 능력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창조주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와 동물과 자연의 모든 만물이 그렇다. 자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닌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드러내며 사람이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좋아하고 부축이고 강요한다. 도리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자신을 알아달라고 투정하고 심지어는 위협하고 죽이려고도 한다. 그 속에 근본적으로 근원을 무시하는 사단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을 살면서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기꺼이 수고하고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공과 자유의 근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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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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