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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신 제66회 총회의 화두는 ‘교회개혁’
    부총회장에 김상석 목사, 이계열 장로 ▲ 지난 20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개막한 예장고신 제66회 정기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제66회 총회가 20일 오후 3시 천안고려신학대학원 강당에서 ‘응답하자! 교회개혁’이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첫날 개회예배에서는 총회장 신상현 목사의 인도로 부총회장 배굉호 목사의 말씀이 있었다. 배 목사는 “이 시대 교회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지금 개혁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희망은 없다”면서 “정직하고, 우상을 타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면서 교회 개혁에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사무처리시간에는 총대 504명중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선언이 있었다. 선거관리위원회 보고에서 총회 선거조례 해석 문제로 후보자 탈락 문제가 논란이 되었지만, 선거관리위원장(김만두 목사)의 사과로 이 문제도 일단락 됐다. 금년 66회 총회 임원선거는 단일후보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회장단 소견발표도 생략한 뒤 총회장단 찬반 투표와 유지재단 이사, 학교법인 이사, 세계선교회 이사들만 투표를 실시했다. 나머지 총회 임원진은 무투표로 당선됐다. 총회장 후보 배굉호 목사는 총 유효득표 489표 중 472표, 목사부총회장 김상석 목사는 471표, 장로부총회장 이계열 장로는 451표를 받아 각각 당선됐다. 총회장 배굉호 목사는 “총회를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항상 모든 일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열심을 가지고 섬길 수 있도록 격려와 기도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금년 제66회 총회에서는 각 노회에서 상정된 현안문제 등을 집중 다루었으며, 총회 둘째 날에는 경남(법통)노회 설립 100주년 감사예배 등이 있을 예정이다. 한편, 첫날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총회장 배굉호 목사(동부산노회, 남천교회) △목사부총회장 김상석 목사(남부산노회, 대양교회) △장로부총회장 이계열 장로(동서울노회, 서울성산교회) △서기 권오헌 목사(동서울노회, 서울시민교회) △부서기 김홍석 목사(수도노회, 안양일심교회) △회록서기 정태진 목사(진주노회, 진주성광교회) △부회록서기 최정철 목사(김해노회, 모든민족교회) △회계 우신권 장로(서울노회, 서울보은교회) △부회계 박영호 장로(대구노회, 대구서교회) <유지재단 이사> △목사 이사(득표순) : 유연수(남부산노회, 수영교회), 장영돈(동대구노회, 대구청구교회), 정용달(경북노회, 성동교회) △장로 이사(득표순) : 조대형(경인노회, 참빛교회), 서일권(부산노회, 제5영도교회), 김광웅(서부산노회, 시온성교회) <학교법인 이사> △목사 이사(단독출마) : 옥수석(중부산노회, 거제교회) △장로 이사(득표순) : 전우수(수도남노회, 매일교회), 김형길(제주노회, 제주서광교회), 김상윤(부산노회, 부민교회) <세계선교회 이사> △목사 이사 : 천석길(경서노회, 구미남교회) △장로 이사 : 옥부수(경남남부노회, 염광교회) (20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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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1
  • 예장통합 ‘이단 특별 사면’, 교계 엇갈린 반응
    ▲ 지난 12일 예장통합총회 임원회가 특별사면 선포식을 가졌다.(사진 : 뉴스미션) 지난 1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장 채영남 목사) 총회 임원회가 단행한 ‘특별 사면’ 선포식 후 논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교단 안팎에서 이른바 ‘9.12 특별사면’을 두고 반대여론이 들끓고 있는 한편 일각에서는 총회 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번에 사면 받은 대상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남노회(노회장 이정달 장로)는 ‘이단 특별사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지난 9월 12일 총회장 채영남 목사가 발표한 이단 특별사면을 인정하지 않으며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이단은 사면대상이 아니라 해제대상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번 특별사면이 원천무효임을 선언한다 △이단해제는 반드시 총회 결의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번 특별사면이 총회장의 월권행위임을 주장한다 △제101회기 총회 개회 이전에 총회 임원회가 특별사면 철회를 선언할 것과 이번 특별사면을 주도한 총회장, 특별사면위원장, 사무총장이 공개사과 할 것을 촉구한다 △교단의 정체성을 지키고 지역교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총회 산하 지체들과 함께 특별사면 무효화를 위한 기도와 행동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또 같은 날인 17일 통합측 이단상담사 과정을 수료한 1기생들도 이번 사면 선포는 철회돼야 한다고 성명을 발표했으며, 19일에는 평양남노회 노회장 박영득 목사가 채영남 총회장에게 공개질의서를 전달하고, 20일에는 통합 교단 산하 신학대 교수들과 예장합동, 합신 등 주요 교단 신학대 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에 선포한 ‘특별 사면’이 오는 26일 개막하는 예장통합 제101회 총회의 핫이슈로 떠오르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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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19
  • 기독교대학, 손 잡고 대학교육 혁신 나서
    ▲ 지난 8일(목) 부산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송수건 경성대 총장(오른쪽)과 장제국 동서대 총장(왼쪽)이 악수하고 있다. 부산의 두 기독교 사립대학 경성대(총장 송수건)와 동서대(총장 장제국)가 손을 잡았다. 지금까지 대학 간에 학점을 교류한 적은 있지만, 투자예산을 공동으로 수립하는 등 학교 자산의 인적·물적 공유를 시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성대와 동서대는 지난 8일(목) ‘대학 간 협력시스템 구축 협약식’을 열고 협약서에 공식 서명했다. 두 대학의 주요 보직교수들이 협약식에 참석해 협약 내용을 실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주요 합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특성화 △공동 리버럴아트 칼리지 설립 및 운영 △해외 유학생 유치 등 글로벌 프로젝트 △미래 첨단기술 공동연구센터 구축 △벤처창업 아카데미 운영 △대학원 전공교과 협력 △기독교 공동체 △대학 인프라 공유 등 8개 항목이다. 두 대학이 협력에 나선 것은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 구조조정 등 경영환경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 된다는 의견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송수건 경성대 총장은 “대학마다 백화점식으로 분야를 갖춰 놓고 운영해갈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다”며 “경성대와 동서대가 각각의 강점만을 조합해 지방대학의 경쟁력을 끌어 올리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장제국 동서대 총장은 “소모적인 무한경쟁에서 탈피해 동서대와 경성대는 발상을 뒤집어 무한협력을 발전전략으로 채택했다”며 “조립형 대학은 불필요한 중복투자를 줄이면서 학생들에게는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새로운 대학교 패러다임”이라고 강조했다. 당장 이번 2학기부터 인프라 공유를 시작한다. 두 대학의 도서관·스포츠시설·공연장·전시실·공동기기센터 등을 두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고 동등한 혜택을 제공받는다. 또한 공동 리버럴아트 칼리지 운영 분야에서 두 대학 스타 교수 강좌를 학생들이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다. 해당 교수는 두 대학을 오가며 똑같은 내용을 강의하고 인터넷 강좌도 공동으로 개발한다. 또 두 대학이 강점을 보이는 영화·연기·미디어·디지털 콘텐츠 등 문화콘텐츠 특성화 분야에서는 교육·연구·제작 기반을 공유해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문화산업을 선도한다. 외국 유학생 유치나 국외 캠퍼스 건설도 공동으로 추진해 효과는 높이고 비용은 절반으로 줄여 나간다는 계획이다. ‘대학 간 협력시스템 구축’ 합의에 따라 두 대학은 8대 과제별 태스크포스를 즉각 구성해 이번 2학기 동안 공동 교양교육 교류와 글로벌 프로젝트 등 각 분야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확정하고 내년 1학기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이 같은 협력이 성과를 내면 참가 대학을 확대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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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19
  • 예장통합 이단특별사면 단행
    ▲ 예장통합 채영남 총회장이 지난 12일 서울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제100회기 특별사면 선포식 및 기자회견'에서 특별사면 대상을 발표했다.(사진 : 뉴스미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장 채영남 목사, 이하 예장통합)이 고 박윤식 목사(평강제일교회), 김기동 목사(성락교회), 변승우 목사(사랑하는교회, 구 큰믿음교회), 이명범 목사(레마선교회) 등 이단으로 규정한 4명을 특별사면한다고 선포했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제2연수실에서 채영남 총회장, 이정환 특별사면위원장, 이홍정 사무총장 등 예장통합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00회기 특별사면 선포식 및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앞서 예장통합 임원회는 지난 9일 이단 규정자들에 대한 사면을 결의한 바 있다. 이날 선포식은 교단 총대와 성도들에게 결의 사항을 설명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번 특별사면 대상자는 권징관련자 16명과 이단관련자 4명, 이단옹호언론 1개 등이다. 이날 특별사면 경위를 설명한 특별사면위원장 이정환 목사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인해 이단 정회를 받은 경우를 1차 사면 대상으로 삼았고, 본질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잘못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이단 규정자들을 포함한 사면 대상자들에 대해 충분한 심사 및 연구 절차를 거친 결과 이들의 특별사면을 결정했다”면서 “앞으로 올바른 목회와 신학을 갖도록 본 교단의 지도와 재교육을 받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공개적으로 한국교회에 사과하겠다는 의지가 있는지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채영남 총회장은 담화문을 통해 “제100회기 희년을 두 번 맞이하는 해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야 할 때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 아닌 한,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라면서 일각에서의 ‘이단을 해제하려 한다’는 비판과 우려에 대해 “이단을 해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단적 주장과 행위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이들을 용서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채 총회장은 “이단 관련자 이명범(레마선교회), 변승우(사랑하는교회), 김기동(김성현 목사와 성락교회), 고 박윤식(이승현 목사와 평강제일교회), 이단 옹호 언론으로 규정된 교회연합신문을 사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맞이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사면이 공포된 이단 관련자들은 향후 2년의 유예기간을 거치게 된다. 이 기간 전문인으로 구성된 특별사면과정행동위원회를 만들어 △신앙 및 신학교육 △교리 체계 재구성 △상담 △이단피해교회 치유와 화해 및 교단과 한국교회 내 공감대 확산 △모니터링 등을 실시하기로 했다. 또 유예기간 중 사면을 받은 대상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사면취소를 결의할 수 있도록 했다. 특별사면 선포식 후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이번 결정에 대해 제101회 총회에서 결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정환 목사는 “100회기 내에 한시적으로 사면하기 위해 특별사면위원회 구성을 청원해 허락을 받았다. 특별사면위에 사면과 관련한 모든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101회 총회에서 특별사면 문제를 제기한다면 총회 결의가 무효가 된다”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법적 자문을 받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금품이 오가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또 특별사면을 하는 것은 이대위와 총회가 잘못 판단한 것이냐는 질문에는 “이대위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판단의 폭이 넓어졌다고 봐 달라”고 말했다. 채영남 총회장은 “우선 풀어주고 지켜보고 안 되면 묶으면 된다. 희년에 우리 형제자매들을 받아들여 잘 선도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안 되면 다시 묶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기회를 주자”며 특별사면 결정을 이해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기자회견 직후인 오후 1시 30분. 특별사면 대상자들이 나와 입장을 밝혔다. 이명범 목사, 변승우 목사, 김기동 목사의 아들 김성현 목사. 박윤식 목사의 후임 이승현 목사가 예장통합과 한국교회에 감사를 표하고 지난날의 신앙적 과오에 대한 사과와 용서를 구한다면서 재교육 등을 충실히 받아 한국교회의 일원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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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14
  • 브니엘 제44회 총회, 지진으로 정회
    ▲ 12일(월) 브니엘교회에서 개최된 예장브니엘 제44회 총회 12일 경북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 브니엘(총회장 서용하 목사) 제44회 정기총회가 정회됐다. 12일(월) 오후 2시 브니엘교회(김도명 목사)에서 130여 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총회는 안건 등 논의가 장시간에 걸쳐 진행됐고, 이날 오후 7시 44분 경북 경주시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정회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 앞서 가진 1부 개회예배는 서기 정영만 목사의 사회로, 부총회장 정영칠 장로가 기도하고 교단설립자 박성기 목사가 ‘위의 것을 찾는 자’(골 3:1~4)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어 부총회장 정길상 목사의 집례로 성찬식이 거행됐으며, 직전총회장 김헌주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이어 각종 보고와 청원 안건을 다뤘다. 헌법 개정위원회에서 청원한 14개 안건 가운데 6개의 안건을 다루고 정회했다. 이날 헌법 2조 2항 ‘교역자 연금적립’과 관련해 ‘상회비 1% 추가로 내어 연금을 실시한다’ 등의 안이 올라왔으나, 지교회 부담 등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와 부결됐다. 또 2조 1항 ‘교회 기본 재산 법인화’에 대해 ‘총회 산하교회들이 30% 동참할 때까지 이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이 부결돼 현행유지하기로 했다. 한편, 속회는 오는 26일 오후 2시 브니엘교회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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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13
  • 이재준 장로 「본향 가는 길」 시집 출판 예배
    이재준 장로(부산영락교회 원로)의 시집 「본향 가는 길」 출판 감사 예배가 9월 10일(토) 오후 5시 중구 라비뷔페(국제빌딩 16층)에서 성대히 개최됐다. 윤성진 목사(부산영락교회 담임)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감사예배는 이송학 원로장로가 기도를, “소리 없는 소리”(시 19:1-4) 말씀을 통해 39년간 교회에서 함께 섬겨온 신앙의 동역자로서 ‘본향 가는 길’ 시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한편 영혼의 소리이자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한편 서평은 박남훈 목사(문학평론가)가, 축사는 임현모 장로(21세기포럼 상임이사)가, 이상규 목사의 축도로 이날을 장식했다. 이재준 장로는 인사를 통해 “이제 남은 인생 세 번째 시집을 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말하고, “이 시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여러 크리스천들이 영혼의 대화를 나누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번 세 번째 시집을 출판했는데 60세 이후에 등단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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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13
  • 청십자사회복지회 창립 40주년 및 산하기관 개관 기념식
    청십자사회복지회(대표이사 박영규)가 창립 40주년 및 산하기관 개관 기념식을 가졌다. 지난 8일 가야동 소재 대도뷔페에서 임직원과 산하시설 운영위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부 기념예배와 2부 기념식, 3부 만찬 순으로 진행됐다. 기념예배는 박영규 대표이사가 ‘새일을 행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그동안 수고한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어 “머지않아 부산의 시대정신이었던 청십자의 재도약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2부 기념식에서는 근속직원(근속15주년 최은희 진료실장) 표창수여식과 각 산하기관 새내기 직원들이 그동안 근무하면서 느낀 장기려 박사의 업적과 청십자정신에 대한 자긍심과 보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축사를 전한 김길구 법인이사(전 YMCA 사무총장)는 “직원들의 청십자정신과 비전 나눔이 매우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동안의 이사장께서 많이 애써왔는데 조만간 귀한 뜻과 힘이 더해져 청십자정신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을 기대한다”며 격려했다. 이날 행사는 법인 직원 상호 간의 친목과 우의를 더욱 굳건히 다지며 뜻깊은 행사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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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13
  • 대구교직자협의회 제23회기 수련회 개최
    대구교직자협의회(대표회장 이승희 목사, 반야월교회)가 지난 9일 오전 10시 반야월교회에서 ‘다시 한번 힘을 냅시다’라는 주제로 제23회 수련회를 개최했다. 회원 350여명이 참석한 이번 수련회는 1부 예배와 2부 특강순으로 진행됐다. 명예회장 박진국 목사(만촌교회)의 사회로 가진 예배는 정시호 장로(북일교회)가 기도하고 이승희 목사가 ‘그때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김형국 목사(하양교회)의 축도로 마쳤다. 이어진 특강에서는 새누리당 이혜훈 의원(새누리)과 백동조 목사(목포사랑의교회)가 강사로 각각 ‘사람을 기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마음으로’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대구교직자협의회는 예장 합동 산하 대구지역 8개 노회 소속 총회 총대 및 노회 임원들로 구성됐다. 대구지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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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12
  • 합동 전국남전련 36회기 회장에 박종화 장로 ‘추대’
    ▲ 박종화 장로 지난 6일(화) 오후 1시 30분, 부산 동원교회(담임목사 서창수)서 예장합동 전국남전도회연합회(이하 전국남전련) 제36회 총회가 열렸다. 이날 박종화 장로(동부산노회 금천교회)가 대표회장으로 추대돼 제36회기 전국남전련을 이끈다. 전국 52개 노회서 419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날 최고 관심사는 새 임원 선출이었다. 지난 8월 전국남전련 임원회에서 신임회장으로 확정된 박 장로는 총대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제36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부총회장 신신우 장로와 기독신문사 이재천 장로 등 총회 각계 인사들도 현장을 찾아 박 장로를 축하했다. 박 장로는 취임인사에서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고, 전국의 회원들과 부울경 회원들에게 감사드린다”며 감사의 운을 뗐다. 이어 “충성을 다해 헌신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심을 다하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또한 36회기 전국남전련의 최우선 과제로 선교와 전도 사역을 꼽았다. 한편 박 장로는 동부산노회 부노회장을 역임했고, 부회장 회록서기 회계 등을 역임하며 지난 22년간 전국남전련을 위해 헌신했다. 지난 7월 29일에 열린 전국남전련 영남지역 위원회에서 차기 회장 후보로 낙점 받았고, 이후 8월 4일에 전국남전련 임원회에서 제36대 회장으로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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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9
  • 토마스 선교사의 입국, 활동 그리고 죽음
    이 글은 2016년 8월 31일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에 위치한 부전교회에서 행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예배 및 심포지엄’에서 행한 강연을 요약한 것임, 이 글에서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쿰란출판사, 200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생명의 말씀사. 2004), 오문환, 『토마스 목사전』(평양, 1928), 프라이스 스텔라,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Korea. com. 2016)와 Hamilton, Moffett, Rhodes 등의 자료를 참고하였으나 각주로 처리 못한점에 대하여 양해를 구한다. 토마스 선교사의 입국, 활동 그리고 죽음 ▲ 이상규(고신대학교, 교회사학) 시작하면서 부산지역의 부전교회를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교회가 연합하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함께 이를 기념하게 된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추진하여 주신 한국기독교사연구소의 박용규 소장님과 이 뜻에 공감하여 기꺼이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부전교회와 박성규 담임목사님, 그리고 당회와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부전교회는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건강하고 건실한 교회이고 박성규 담임목사는 부산의 영적 갱신과 부흥을 위해 헌신하시는 영적 지도자라는 점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오늘 모임에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깊이 연구하신 박용규 교수님이나 토마스 목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하신 고무송 목사님과 같은 학자가 강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양했으나 부산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송구하게 생각한다. 오늘 필자는 토마스 선교사가 걸어갔던 26년의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오늘 우리들과 우리 교회에 주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초상화를 그렸다. 오늘 우리의 ‘기림’(commemorate)도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고, 둘째는 토마스 목사가 걸어갔던 믿음의 길을 기리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선 토마스 목사가 살아갔던 삶의 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과 삶,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출생과 가정 배경, 학교교육 로버트 저마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1810-1884)와 메리 윌리암스(Mary L. Williams, 1817-1895)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는 당시 웨일즈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웨일즈 부흥을 주도한 윌리엄 윌리엄스의 제자인데, 중부 웨일즈에 있는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837년 4월 18일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39년 여름 라야더(Rhayader)의 터바나클 교회 부임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둘째 아들 저마인 토마스가 출생했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강력한 성령의 역사 일어났고 교회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1795년에 창립된 런던선교회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하는데, 후에 그의 아들이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관련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1848년에는 몬머스셔(Monmouthshire)의 하노버교회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저마인 토마스는 8살이었다. 토마스는 이곳 하노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토마스의 교육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초의 공교육이 이루어 진 곳은 란도버리(Landovery) 칼리지에 3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가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은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후 토마스는 오스포드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보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도제식 의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스텔라 프라이스(Stella Price)에 의하며 토마스는 외과의사가 되는 교육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워터만(Waterman) 의사 휘하에서 2년간 의학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왕실의사면허 시험 제도가 있어 공인된 의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2년여 이런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고, 육신의 치료자보다는 영혼의 치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든 중 잉글랜드 노스헴톤 지역 온들(Oundle)에 있는 알프레드 뉴스 학교(Alfred Newth’s school) 보조교사로 부름을 받고 약 1년간 일하게 된다. 이 학교 교장 알프레드 뉴스는 중국선교를 준비했던 사람으로 로버트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배운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알프레드 뉴스를 통해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토마스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캐를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였다. 토마스는 주일에는 온들 회중교회에 다녔는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중 존 갓프리의 외동딸 캐를라인 갓프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여성은 토마스보다 2살 연상으로 후일 아내가 된다. 일 년 간의 교사생활을 마감한 토마스는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고, 이때 아버지 청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히브리서 13장 8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본문의 설교였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1857년에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온들에 있을 때 교장이었던 알프레드 뉴스의 친형인 새무엘 뉴스가 당시 학장이었다. 이곳에서 2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3년간 최고의 금액인 밀스장학금을 받았다. 이 시기가 웨일즈의 영적 부흥기였는데 토마스는 교수드르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 년 간 휴학했는데, 휴학기간동안 지역교회에서 설교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복학한 그는 중국선교에 대한 조바심으로 학교에 조기 졸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가 선교의 이상을 갖게 된 데는 귀츨라프의 영향 또한 없지 않았다. 토마스는 1832년 충청남도 보령시의 고대도와 조선 해안을 방문했던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성경을 보급했듯이 후일 토마스도 동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1859년 10월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록하르트(Lockhart) 선교사의 설교 듣고 큰 감명을 받는데, 그의 설교 또한 선교사의 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록하르트는 1861년에는 영국공사관의 공의로 베이징에서 활동하게 된다. 2. 선교사로의 길 토마스는 1863년 5월 뉴칼리지 졸업했다, 휴학기간을 포함하여 6년이 소요되었다. 졸업 후인 5월 29일에는 런던의 회중교회에서 온들에서 만난 캐롤라인 갓프리와 결혼했다. 이때 토미스는 23세, 아내는 25세였다. 결혼 6일 후인 6월 4일에는 목사안수 및 선교사 파송식이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7주 후인 7월 21일 토마스 부부는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항구 떠나 상해로 출발했다. 그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은 몇 가지 연쇄적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중궁은 인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선교지였고, 가장 많은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이었다. 토마스는 영국을 떠난지 4개월 만인 1863년 12월 첫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런던선교회 상하이 지부장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의 충심의 영접을 받았으나 두 사람 간의 친밀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2개월 후인 1864년 2월 4일 자로 부모님께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서에는 당시 정황을 헤아리게 해 주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도착 4개월 후인 1864년 3월 11일 런던선교회의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한커우(漢口)로 갔는데 그 기간동안 임신 중이던 부인은 유산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864년 3월 24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마스는 타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 일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사별의 아픔이치유되기도 전에 토마스는 또 다른 고뇌에 빠졌는데, 상하이지부장 무어헤드와의 갈등이었다. 선교관의 차이에서 유래한 갈등은 토마스에게는 심각한 현실이었다. 상하이에 주제하는 영국인을 위해 목회했던 무어헤드는 상하이가 선교 중심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토마스는 자국민보다 중국인 선교가 우선해야 된다고 보았고, 한커우로 가고 싶어 했다. 토마스에게 신설되는 학교 교장직 요청을 받았으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이 사역은 그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결국 토마스는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1864년 12월 7일이었다. 곧 이 일을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후회하게 되지만 토마스에게는 성급함과 무모함이 없지 않았다. 고무송 박사는 토마스에게는 모험정신, 강한 의무감, 무모함, 성급함, 엘리트 의식 등 몇 가지 기질 혹은 특징이 있다고 보았는데,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런던 선교회를 사임한 그는 현제 엔타이(煙臺)라고 불리는 지푸(Chefoo)로 이동하여 이곳 세관의 통역 및 감독관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1865년 8월 31일까지 약 8, 9개월간 일했다. 3. 제1차 조선 방문 지푸는 산동성 북부의 해안도시로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당시로 볼 때 외국과의 무역을 허용한 유일한 항구였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두 사람의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두 한국인을 만나게 되는데, 김양선에 의하며 그 두 조선사람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이라고 한다. 윌리암슨은 이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토마스도 함께 초대되었고, 이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듣게 뙨다. 즉 한국의 로마가톨릭 신자는 5만명이 이르고, 11명의 신부들이 비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런 접촉을 통해 토마스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되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자격으로 1865년 9월 4일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조선방문인데, 윌리암슨으로부터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 받았고 또 약간의 경비 지원도 받았다. 이대 김자평이 동행했고, 중국인 우웬타이가 항해를 맡았다. 그 달 13일에는 황해도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황해도 옹진 자라리(紫羅里) 근포(近浦)였다. 이곳에서 성경을 나누어 주며 전도했고 한양까지 가려했으나 배가 파선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떠난 그는 만주의 피쯔워 항구를 거쳐 도보와 말을 타고 여행하여1866년 1월 4일 혹은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지푸를 떠난지 4개월 만이었다. 조선에 체류한 기간은 2달 반 정도였고, 체류한 곳은 서해안, 곧 황해도나 평안도에 속한 도서지방이었다. 김양선 교수의 지적처럼 토마스를 인도했던 김자평이 황해도의 ‘육도’였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지역으로 안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성경책과 기독교 문서를 배포했다. 이점은 토마스가 두 번째 조선으로 향하기 일주일 전에 런던선교회 지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재가입 되었고 근무지는 베이징 지부로 결정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즉 재가입된 것은 1865년 9월에서 11월 사이로 판단되는데 이 점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을 방문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토마스가 런던 선교회 티드만 회장에게 보낸 조선방문 보고는 당시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스텔라, 100). 4. 제2차 조선 방문 고종 3년인 1866년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있었던 해였고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압했을 뿐 아니라 약 8천명의 천주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하여 9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참수되었다.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으로 감시했고 해안은 봉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두 번째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토마스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행을 시도했다. 그러든 중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으로부터 통역관으로 조선으로의 동행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베이징의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는데,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소식, 특히 프랑스인의 처형 소식 알려주었다. 벨로네는 로즈에게 조선 진격을 요구했고, 약간의 조선어를 알고 있는 토마스에게 로즈 제독의 통역관으로 조선 동행을 요청한 것이다.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서 텬진에서 로즈 제독과 합류하여 지푸를 거쳐 조선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즈 제독은 베트남 사이공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그리로 가게 됨으로 원래 계획이 취소되었다.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길을 찾기 위해 일단 지푸로 갔다. 여기서 필요한 경비도 마련할 계획이었다. 여기서 다시 윌리암슨과 한국인 김자평을 만났는데 이들을 통해 조선방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든 중 1884년 7월 29일 지푸에 커다란 선박이 나타났다. 그것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원래 이 배는 1861년 영국에서 건조한 범선으로 ‘프린세스 로얄’호로 불렸으나 1863년 1월 미국으로 넘겨져 미 해군에서 사용하였고, 1865년에는 경매에 넘겨져 상선으로 개조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위력을 떨친 남군의 장군 셔먼으로 이름을 따 제너럴 셔먼으로 개칭되었으나 더 이상 해군 함정이 아니라 영국의 메도우 사(Meadows Company) 소속 상선이었다. 이 배는 조선에서 팔릴만한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을 싣고 텬진항을 거쳐 지푸로 온 선박이었다. 토마스가 어떻게 이 배에 승선하게 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행을 의도했던 토마스에게는 조선행의 호기였다. 그 배가 어떤 성격의 배인지, 조선 방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베이징을 떠난지 26일 만인 1866년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고, 이날 셔먼호는 조선으로 향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양의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공급받았다. 제너럴 셔먼 호는 무장한 상선으로 승선인은 선주 미국인 프레스턴(W. Preston)을 비롯하여 항해사 윌슨(Wilson), 선장 페이지(Page), 화물관리인 영국인 호가스(G. Hogarth), 토마스 선교사, 두 사람의 중국인 이팔행 등 항해안내원, 그리고 중국인과 말레시아인 선원 등 24명으로 파악된다. 후의 일이지만 고종실록에는 프레스톤을 보래돈(普來敦)으로, 페이지를 파사(巴使)로, 호가스를 하갈특(何噶特)으로, 토마스를 최란헌(崔蘭軒)으로 표기했다. 물론 최란헌이라는 표기가 토마스를 표기한 것이 맞느냐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다. 지푸를 떠난 제너럴 셔먼호의 첫 경유지는 백령도의 두무진 항이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성경을 나눠주었고, 이때 제너럴 셔먼호를 목격했던 한 조선인의 목격담이 스텔라 프라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124쪽). 곧 백령도를 떠나 돛섬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중국인 선장 우웬타이(Yu-Wen-Tai) 만나게 된다. 그는 여러 차례 조선의 해안을 왕래하며 장사했던 중국인이었다. 다시 배는 대동강 안쪽으로 행진했다. 외국선박의 입항이나 접촉을 금지했던 조선의 사정을 알고 있던 선원들은 안전을 위해 더 이상 진출 우려했으나 선장과 선주는 우웬타이의 경고를 무시했다. 조선 사정이 밝은 우웬타이는 더 이상 안내할 수 없다며 지푸로 돌아갔다. 그러나 셔먼호는 자만했다. 5. 대치상황과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 8월 16일에는 용강면 다미면 주용포항에, 8월 17일 금요일에는 황주 송산에 정박했다. 예상되는 바이지만 강둑에는 이양선을 보기 위해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조선관리는 긴급 회합하여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입항을 고집했다. 고종 3년, 곧 1866년 음력 7월 15일자 고종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배는 더 진행하여 8월 20일에는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서양 선막은 구경꺼리였다.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다. 오문환에 의하면 홍신길이라는 소년도 작은 배로 셔먼호 근처로 접근했고, 토마스는 갑판에서 그를 맞이하여 방으로 데리고 기독교 문서를 주고 그에게 케이크를 맛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감자를 보았다고 한다. 또 그날 밤에는 인근 쑥개마을에서 장인국 지달수 지달체 지택구 지택붕 지택주 장용국 지달해 표명보 등 아홉 사람이 토마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들 중 장용국 외에는 천주교 신자들인데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해 줄 프랑스 선박을 기다리고 있던 중 셔먼호로 찾아간 것이다. 토마스는 자기는 천주교 신자도 프랑스 함대도 아니라고 말하고 개신교 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성경과 기독교 문서, 그리고 빅토링여왕 얼굴이 새겨진 동전까지 주었는데, 천주교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상으로로 오인했다고 한다. 오문환 장로 기록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인과의 접촉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얼마 후 지달수와 지달해는 서양인 접촉했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조선관리가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 셔먼호는 교역을 원한다며 비단, 유리, 망원경, 자명종을 조선의 쌀, 인삼, 종이, 호랑이 가죽 등과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교역을 금하는 정책에 따라 이를 거절했다. 거듭된 경고를 무시한 것은 제너널 셔먼호의 오만이었고 신중치 못한 처신이었다. 대치상황은 약 2주일간 계속되었다. 조선 관리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행을 고집하고 8월 21일에는 평양 신장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구경꾼들이 몰려오았고, 토마스는 성경책 나눠주었다. 토마스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경 받은 김영섭은 후에 기독교신앙을 받아드렸고, 두 아들 김종권과 김성집은 후일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조선 관리 김낙수는 선박의 도래경위를 조사하고 철수를 요구했다. 8월 22일 셔먼호는 평양 만경대의 작은 선 두로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 이곳에서 100권의 성경 배포했다고 한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경대를 둘러싸는 방어선 구축 지시했다. 그럼에도 셔먼호 대동강으로 계속 진입했다. 8월 27일에는 보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셔먼호 승무원들이 순시대장 중군(中軍) 이현익을 억류한 것이다. 조선에 무단 침입했을 뿐 아니라 퇴거를 거부하고 조선관리를 억류한 일은 심각한 일이었다. 셔먼호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혹은 물이나 식량, 연료를 공급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없지 않으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선원 중 한 사람은 이현익의 관원 명찰을 빼앗은 일을 더욱 그러했다. 이현익의 억류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셔먼호에 돌을 던졌고, 석방을 요구했다. 관군은 사격을 가했다. 셔먼호 측에서도 발포했다. 이런 와중에서 박춘권(朴春權)이 혼자 배를 저어 가 이현익을 구출했다고 한다. 오문환에 의하면 그가 후에 평양의 장로교회 첫 인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셔먼호가 수세에 몰리자 더욱 낙폭하게 대응했다. 8월 28일 발포를 시작했고, 8월 31일에는 조선인 7명 사살되고 5사람 중경상을 입었다. 사태는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고종의 허락에 따라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 공격을 지시했다. 9월 3일이었다.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방론자였으나 셔먼호의 무단접근은 용인될 수 없었다. 곧 강 수위는 낳아졌고 배는 좌초되었다. 9월 4일 달빛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결국 선원은 쑥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작은 거룻배에 나무를 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로 접근시켜 셔먼 호 불태웠다. 선원들 불길을 피해 강밖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강변에 정렬해 있는 군인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주임을 당했다. 토마스 목사도 남은 성경책을 안고 배에서 띄어 내렸다. 강가로 끌려나온 그는 모래사장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성경을 관군에게 내밀었다. 관군의 칼은 토마스의 가슴을 내리쳤고 토마스는 9월 5일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토마스의 시신은 대동강변에 묻혔다. 6. 토마스의 순교 이후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할 때 토마스는 뱃머리에서 홀로 야소(耶蘇)를 외치고 남은 성경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한석진 목사는 토마수가 순교한지 26년이 지난 1892년 당시 목격자로부터 제널 셔먼호가 불탈 때 토마스가 성경을 던지며 ‘야소’를 외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겨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백기를 흔들며 목숨을 외국인도 한 두명 있었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이 토마스였을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을 균형 있게 판단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토마스의 죽음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제너럴 셔먼을 구경하라 갔던 소년 최치량(崔致良, 1854-1930)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는 12살 때 숙부와 함께 1866년 9월 3일 토마스 순교장면을 목격하였고, 토마스 목사가 뿌린 한문성경 3권을 주었다고 한다. 책 소지자에 체포 명령이 내려 대부분 성경을 소각하거나 강변에 버렸다. 최지량도 이 성경을 집으로 가져 오지 못하고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고 한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가져와 찢어 벽지로 사용했다. 오랜 후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물상객주(物商客主)가 되어 평양 대동문 안에 집을 사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전 주인이 박영식이었다. 최치량은 이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고 또 한석진의 전도로 회심하였고, 평양에서 최초로 마펫에게 세례를 받고 평양지역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널다리골의 홍종대(洪鐘大)의 집을 사서 예배처소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평양장대현교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서구와의 불행한 접촉이었으나 그 이후 역사는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미국간의 외교문제로 발전하였고, 널리 알려진 바처럼 이 일이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6)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대결과 접촉이 후일에는 조미 양국 간의 통상조약(1882)으로 발전하여 외국인의 조선 거주를 보장 받게 된다. 결국 1884년에는 알렌이 입국하게 되는데, 토마스 순교 18년 후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용규 교수는 토마스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자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고 했다. 7. 남은 문제: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침략자인가? 토마스 목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60년이 지난 1926년 평양의 오문환 장로는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것이 토마스의 생애와 조선 기독교사의 분수령이 되는 양란(洋亂)에 대한 기록이었다. 1927년에는 토마스 기념회가 조직되었고, 1927년 5월 8일 토마스 목사가 묻힌 쑥섬에서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이때 1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1932년 9월 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마스기념예배당을 건립했는데, 1933년 10월 14일 봉헌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10여년 이래로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그 의 죽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감리교의 존스(G. H. Jones) 이래로 초기 선교사들은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이정해 왔고, 설사 게일의 경우처럼 순교자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복음을 위한 그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 있고, 그를 정치적 희생자라든가 침략자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거나 심지어는 침략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토마스는 무장상선을 타고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 와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그가 죽은 이유가 기독교 복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제너럴 셔먼호의 부당한 처신과 횡포에 기인하는 정치적인 죽임이라고 주장하다. 일견 고려할 점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1860년대 상황에서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토마스가 복음의 열정, 곧 조선 선교의 이상을 가진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로는 조선 입국 방법이나 경로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설사 무장상선이라 할찌라도 셔먼호 승선이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신중치 못한 점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셔먼호로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선교사가 내한 한 이후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1863년 이래로 선교사 신분이었고, 이미 조선을 방문하바 있고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내한 즉시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의 죽음이 복음전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도 고려할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가 금압된 당시 상황에서 서양인의 죽음, 특히 서양선교사의 죽음을 비종교적 행동으로만 취급할 수 없다. 1866년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죽음은 정치적 성격이 강했고,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 누구도 프랑스 신부의 죽음을 순교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선교사의 현존’ 자제가 정치적 행위일 수 있고, 정치적 침략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셔먼호로 입국한 일이나 셔먼호의 부당한 혹은 불법적인 행위는 지탄받을 수 있지만 토마스 목사는 조선인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한 의지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가 죽임을 당한 후 초기 선교사들을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간주하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기념해 왔다. 1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토마 목사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우리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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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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