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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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이 글은 제9회 부울경기독교수 선교대회에서 발표된 기조강연입니다.)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1. 머리말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삶의 거의 모든 분야를 결정하는 오늘날 자신의 신앙을 심각하게 취급하는 기독교 지식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기독교적으로 정치하고, 사업하고, 예술창조 활동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기독교적으로 학문하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쉽다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활동보다 오늘날의 학문을 기독교 신앙과 조화시키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학자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고 있다. 자신들의 활동을 신앙과 연결시키는데 어떤 확실한 지침을 기독교 학자들이 제시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학문이란 정신활동이고 신앙과 가장 근접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활동 거의 전부가 지식에 근거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기대를 받고 있는 기독교 학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지식인들의 이런 고민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헬레니즘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했던 초대교회 지식인들도 그들의 신앙을 그 시대의 학문과 연결시키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 당시의 학문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려 했던 Justinus, Clement of Alexandria, Origen, Irenaeus, Eusebius 등과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Tertullianus, 지식을 초월한 신앙을 강조한 Augustinus, Anselm of Canterbury, 그리고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 Thomas Aquinas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었다. 현대에도 Herman Dooyeweerd, Cornelius Van Til, Ravi Zacharias, Francis A. Schaeffer, Gordon Clark, G. K. Chesterton, C. S. Lewis, Carl F. H. Henry, Edward John Carnell, Bernard Ramm, Alvin Plantinga, Nicholas Wolterstorff, Bob Goudzwaard, Mark Noll 등의 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한국 교회도 이제 100여 년의 역사와 인구의 20%에 육박하는 신도를 가지고, 수많은 신학자들과 학자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일어나고 같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2. 현대 학문에 대한 이해 현대 학문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내용은 전혀 없이 형식으로만 이루어지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내용이 거의 전부인 역사학에 이르기까지 현대 학문은 매우 다양하므로 공통되는 특징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모든 학문은 진리발견을 그 목적으로 한다. 사실을 밝혀내고, 주어진 현상을 바로 설명하며, 원리나 법칙을 발견하여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역사학도 단순히 옛날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한, 두 가지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준비하려는 것이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은 단순히 사실을 연대에 따라 기록하는 연대기 혹은 실록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문이란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 논리적 체계 (systematic)가 있어야 한다. 앞의 발언과 뒤의 발언이 서로 모순되어서도 안 되고, 모순되는 명제를 한 글에서 주장해서도 안 된다. 유기체에서 모든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과 정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듯 한 학술논문은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하고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예술과 다르다. (2). 현대 학문에 사용되는 방법론의 기본은 인과론 (causality)이다. 물론 양자물리학에서는 인과법칙이 절대적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인과론이고, 인과관계가 분명해져야 어떤 문제가 설명(explanation)되거나 예측 (prediction)될 수 있다. 물이 어는 것은 온도가 0도 이하로 내려갔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면 날씨가 추워질 때 물이 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과학은 그 이전의 Aristoteles 과학의 목적론과 대조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는 인과론적 설명보다는 공감하는 상상(sympathetic imagination)을 통한 이해(understanding)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실증주의에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사용되는 방법론이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모든 학문은 원칙적으로 객관적 (objective)이라야 한다. 실제로 어떤 것이 객관적이며 그것이 사실 객관적인가에는 항상 논란이 있지만 모든 학문은 객관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개인적인 감정, 감각, 이해관계, 경험 등은 사실을 왜곡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general) 것이라야 보편적 진리란 전제가 깔려 있다. (4). 이론이나 결론은 직관, 경험, 자료에 의하여 실증될 수 있어야 (verifiable) 한다. 현대자연과학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논리적으로 일관성만 있으면 충분히 객관적이라고 믿었다. 모든 인간에 공통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이성의 논리적 판단에 어긋나지 않으면 진리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Galileo 이후의 현대과학에서는 논리학과 수학을 제외하고는 실증될 수 없으면 아무리 논리적이라도 진리로 수용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인문학인 역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5). 한 이론의 대상은 동질성을 가져야 한다 (homogeneity of the objects field). 즉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어야 같은 학문의 범주에 속할 수 있고, 동일한 체계에서 논의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영역으로의 전이 (“stepping into another field” - metabasis eis allo genos)는 허락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달(月)’과 ‘10원’은 동일한 이론체계에서 다루어질 수 없고, 심지어 ‘몸’과 ‘마음’도 동일한 체계 안에서 논의될 수 없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발언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학문적 명제가 될 수 없다. 몸과 마음은 ‘존재’란 지극히 추상적인 공통분모 외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6) 학문은 넓은 의미에서 실용적 (practical) 이라야 한다. 이런 관점은 이미 Bacon에 의해 시사되었지만 Comte에 의하여 강화되었고, 최근에 와서는 매우 두드러진다. 최근에 과학과 과학기술의 차이가 점점 무시되고 있는 것도 그런 경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진리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진리란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다. 힘 혹은 능력이 있어야 믿을 수 있는데 지식은 힘이다 (Scientia est potentia, Bacon). 진리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Savoir, c'est pour prévoir. Comte),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제공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응할 수 있다. 역사학에도 이런 의의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넓은 의미에서 실용적이다. 논리학, 수학, 천문학, 이론 물리학 같은 순수학문은 아무 실용적 가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기초가 없으면 실용적인 학문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 학문은 직접적으로는 실용적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실용적이고, 실용적인 결과를 위해서 필수 불가결하므로 매우 실용적이다. 3. 경쟁관계에 있는 학문과 종교 예술과 달리 학문은 종교와 경쟁관계에 설 수 밖에 없다. 양자가 다 진리를 주장하고 (truth claim) 있고, 그 진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것이든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안 학문의 발달은 다른 어느 분야의 발달보다 인류에게 더 큰 힘을 제공하여 이익을 끼쳤고 사람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인간이 개발한 다른 어떤 능력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인류는 학문에 대해서는 상당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주장하는 진리와 그 진리가 가능하게 하는 힘 때문에 학문은 종교와 갈등관계에 서게 되었다. 학문과 종교의 갈등은 이미 학문의 생성과 발전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상당히 오랫동안 학문은 종교를 “대체”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종교를 대체 하고 유학은 고대 중국의 무속종교에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 종교를 대체했다면 그 철학은 아직도 종교의 형태로 남아 있는 기독교와 경쟁관계에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초대교회 교부 Tertullianus는 철학의 도시 아테네와 신앙의 도시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고 반문함으로 지식과 신앙의 갈등관계를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안전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의하여 보장받는 것으로 믿는 반면에 그리스 사상에서는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와 법칙에 삶의 안전보장을 위탁한다. 그런데 그 존재와 법칙을 알아야 그것에 순응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진리를 아는 것, 곧 지식이 구원의 길인 것이다. 비록 서양 중세에는 Thomas Aquinas의 사상에 따라 자연의 영역에서는 이성이 그리고 초차연의 은혜 영역에서는 믿음이 지배하도록 영역을 분리함으로 학문과 종교의 불안한 공존이 시도되었지만 만족스런 조화는 이룩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과학적 학문은 역시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적으로 학문한다는 것은 다른 편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경기하는 것과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 물론 현대의 과학적 학문에서는 종교적 요소는 거의 다 제거되었지만 그러나 그 유산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아직도 학문은 종교적 신앙과 경쟁관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은 실용적인 가치 이외에 그 자체로 진리요 다라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는 학문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어떤 형식적인 체계도 그 체계 안에서 그 체계의 타당성이 증명될 수는 없다 (Gödel). 학문에 대한 믿음은 인간 이성을 Archimedes의 거점으로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성격을 갖는다. 학문의 권위가 인간 이성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전제라 할 수 있다. 과학철학자 P. Feyerabend는 자연과학도 하나의 이념 (ideology)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4.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현대 학문 학문과 종교의 관계에는 3 가지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즉 (1)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학문이란 입장과 (2) 성경이 더 권위가 있고, 학문은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입장, 혹은 (3) 학문과 종교의 영역은 서로 다르므로 양자가 병존할 수 있고 상호관련도 상호갈등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학문이란 입장은 대부분의 비기독교 학자들이 취하는 것이다. 학문이 그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미신에 불과하던지 학문이 제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제시하므로 학문과 갈등관계에 설 만큼 권위를 가지지 못하거나 갈등관계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학문의 결과에 더 의존하므로 학문은 그들에게 일종의 종교적 권위를 가진다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종교적’이란 함은 종교를 매우 넓은 의미로 이해해서이다. 상당수의 기독교인인 학자들은 (3)의 입장, 즉 학문과 종교의 영역은 서로 다르므로 양자가 병존할 수 있고 상호관련도 상호갈등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부분적으로는 불신 학자들과 동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손쉬운 타협이다. 상당하게 많은 경우 그런 입장을 견지할 수 있으나, 양자가 주장하는 진리가 상반되는 경우는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대부분은 학문의 편에 서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1)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2)의 입장, 즉 성경이 학문보다 더 권위가 있고, 학문은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의 논리적인 결론이다. 그 입장을 다음과 같이 변호해 볼 수 있다. 1)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는 모든 영역에서 절대주권을 행사하시고, 절대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절대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하나님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청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 논리, 법칙, 이성, 경험 등도 모두 하나님에 의하여 가능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그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학문이 발견한 진리도 그것이 진정한 진리라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물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을 때 가능한 주장이다. 학문의 결과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종교적 전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종교적 전제다. 2) 학문적 지식은 항상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A. 과학적 학문은 “이런, 저런 양상” (modality)을 대상으로 하고 “이것, 저것 등 개체”(individuality)를 상대하지 않는다. “노란 색”은 학문은 개나리가 가지고 있는 속성 혹은 양상이고 우리 집 뜰에 서 있는 “개나리”는 개체다. 학문은 보편적인 것을 취급해야 하는데, 양상만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집 뜰에 서 있는 개나리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개체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을 취급하는 학문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역사학은 “이순신”의 업적이나 영향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으나, “이순신 학”은 역사학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상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존재하는 여러 개체들에 속해 있는 속성 (property)이다. “노란 꽃” 은 있지만 “노란 색”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하면 칠판에 그려졌거나 종이에 인쇄가 되어 눈에 보이는 3각형은 진정한 3각형이 아니다. 3각형은 세 직선으로 이루어지고 , 직선은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일 뿐 넓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3각형은 이미 하나의 개체이므로 기하학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3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같음을 증명하는데 분도기로 세 각을 제어서 합산하지 않는 것은 분도기로 젤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3각형이 진정한 3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이 H₂O란 것도 비슷하다. 실재하는 물은 H₂O외에도 여러 가지 이물질을 다 포함하고 있다. 순수 H₂O는 3각형과 마찬가지로 이념으로만 존재한다. Max Weber는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하는 것들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형(ideal types)이라고 주장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순수 자본주의 국가나 순수 사회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문이 취급하는 대상은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이념(ideas)들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세계는 모두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노란 색을 보지만 그것은 노란 꽃, 노란 종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학문은 원칙적으로 개체들을 그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면 학문의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만약 요즘 점점 더 인정되고 있는 것과 같이 개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양상들의 합 이상”이라면, 개체를 대상으로 할 수 없는 학문의 세계는 지극히 제한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B. 학문이 상대로 하는 대상은 항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나머지는 동일하다는 전제하에” (“others being alike” = ceteris paribus)는 모든 이론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든 현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 가지만 변하고 다른 것은 모두 그대라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모든 물은 0도에서 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물이 실제적으로 다 0도에서 어는 것은 아니다. 물의 순도, 물이 위치해 있는 장소의 기압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물은 0도에서 언다”는 것은 물의 순도, 기압 등 다른 모든 조건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문적 이론은 Procrustes의 침대가 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Procrustes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침대의 길이보다 키가 큰 손님은 머리나 발을 잘라서 침대에 맞추고 침대보다 짧은 사람은 잡아당겨 침대길이에 맞추었다. 말하자면 유기적이고 지극히 복잡한 현실을 학문적 이론으로 끌어 맞추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Karl Popper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우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현실을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을 이념의 틀에 맞추기 위하여 온갖 강제를 다 동원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학문적 이론의 권위를 과대평가 하므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Procrustes의 침대를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잘라버렸다 할 수 있다. C.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학문이 설명할 수 없다. Max Weber는 학문 (Wissenschaft)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Tolstoy의 주장에 동감을 표시했으며 Wittgenstein은 그의 Tractatus에서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과학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세계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삶의 의미, 사랑, 고통, 존엄성, 자유, 평등, 정의감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다 중요하지만 학문이 그런 것을 전제할 수는 있어도 설명할 수도 없고 그것에 도움을 줄 수도 없다. 이론적으로 사랑을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설명된 사랑이 우리로 사랑하는데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3) 학문도 하나의 게임이다. 게임의 특징은 그것이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동의하는 규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학문이란 게임의 규칙은 앞에서 제시된 학문적 이론의 요구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은 어떤 그 타당성이 우리의 직관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어떤 절대적 권위에 의하여 결정된 것도 없으며 어떤 객관적 근거에 의하여 확실하게 증명된 것들이 아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자명한 것으로 보이지만 후에는 달라질 수 있는 역사적인 것들이다. 현대과학 이전 Aristoteles 물리학에서는 목적론이 자명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인과론이 그렇지 보이고, 인과론도 양자 물리학에서는 절대적이 아니라 한다. 그들 조건은 궁극적으로 학문 공동체의 약속에 불과하다. Th. Kuhn과 M. Polanyi (Personal Knowledge)는 영원불변한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학문공동체(academic community)가 학문과 학문 아닌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Thomas Kuhn에 의하면 한 시대의 과학의 성격은 그 시대의 과학 교과서가 대변한다고 보았다 textbook science). 그리고 학문의 “혁명”에서 혁명 이후의 paradigm이 그 이전의 것보다 더 발전된 것이라 할 수도 없고 그 전의 것을 포함하거나 능가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 책 이름에 “학문의 발전”이란 말 대신 “학문의 혁명”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게임이라 하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Huizinga는 인간의 문화 활동 거의 대부분을 놀이로 취급했다 (Homo ludens). 다만 그것이 어떤 만고불변의 규칙이나 영원한 직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약속에 의하여 만들어진 규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과 그 규칙에 적용되는 분야에서만 그 타당성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인 생존과 생활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에서 게임의 성격을 갖는다 할 수 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으나 꼭 한국식으로 먹어야 사는 것은 아니다. 먹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한국식으로 먹는 것은 놀이의 성격을 갖는다. 게임이기 때문에 학문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다. 건물의 높이를 측량하는 방법에는 건물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물질이 땅에 닿을 때까지의 시간을 재어서 계산하는 방법, 3각 측량법도 있지만 긴 줄자로 재는 방법도 있다. 한 가지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 할 수 없다. 과학적 설명은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학문을 하나의 놀이로 상대화하면 학문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모든 학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비판적, 상대적 태도이고 그런 태도로 접근할 때 더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창조는 “관념의 유희” (play with ideas)로 이루어진다. 학문을 종교적으로 절대화해 놓으면 비판적인 접근이 불가능하고 창조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기독교인이 더 훌륭하게 학문 활동을 할 수 있다. 5.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명령은 학문 활동에도 적용된다. 진리 발견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기독교적 학문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학문적 진리 발견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만 그것은 가치를 가진다. 만약 진리 발견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라면 학문은 종교의 위치에 서게 되고,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연구를 통해서 발견된 진리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이 될 때 기독교 학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1) 그 진리가 정말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가를 재점검하고, (2) 그것과 모순된다고 생각되는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했는가를 반문해 보며, (3)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았을 때는 당분간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적어도 너무 성급하게 그 어느 쪽을 취할 이유는 없다. 지금의 상황이 절대적이고 그 이상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분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것도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 이외에는 영원불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학문적 연구로 발견된 진리는 얼마든지 바꿔질 수 있다. Ptolemaeus의 물리학은 Newton의 물리학으로 대체되었고, 그것은 다시 Einstein의 물리학으로 수정되었다. 양자 물리학은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한다. 우리는 가끔 과학의 발견을 이용하여 성경의 내용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본다. 그러나 이는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주객이 전도된 방법이다. 지금 진리인 것으로 나타나는 과학적 발견이 항상 진리로 인정받으리라는 보증은 없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과학적 지식을 과대평가하고 성경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즉 과학적 발견은 확실한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은 좀 더 증명되어야 할 만큼 불확실하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성경보다 과학을 더 믿으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과학종교일 것이다. 과학의 주장이 과학보다 더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으면 몰라도 그 자체로 절대적이라 믿으면 종교적 신앙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최근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학문과 기독교 간의 갈등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특히 Richard Dawkins의 전투적이고 도발적인 저서들이 이런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된 3 가지 입장이 잘 구별된다. 창조론을 전혀 부인하고 진화론만이 옳다는 입장, 진화론은 과학적 이론, 창조론은 종교적 신앙의 내용으로 양자를 다 인정하는 입장, 그리고 창조론을 믿고 진화론을 상대화하는 입장 등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입장에는 진화론은 전적으로 부인하는 ‘젊은 지구 이론’ (young earth creationism)과 진화적 창조론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후자는 하나님께서 진화론적 과정을 사용하셔서 생명체를 창조하신다는 입장이다. 그런 주장은 창2:2-4절로 그 주장의 타당성을 성경으로 증명하려 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진화론이나 창조론은 둘 다 과학적으로는 증명될 수 없는 믿음이다. 다만 진화론은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적 전제이지만 그 가설을 실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opper의 주장대로 과학이 성립하려면 반증가능성 (falsifiability)이 있어야 하고, 비록 이제까지는 반증되지 않은 경우라도 반증이 가능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경우로라도 반증이 가능하면 과학적 이론으로서는 그 자격을 상실한다. 진화론 가설에 대해서 창조론자들이 계속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그 가설에 그만큼 약점이 많기 때문이다. 캠브리안 폭발 (Cambrian explosion)을 둘러 싼 논란들은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증거를 둘러싼 문제들 외에도 진화론은 “우연”의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 인간의 자아의식과 언어현상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제시되지 않았다 한다. 물론 좀 더 확대해서 더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진화론이 전제하는 자연의 동일성 원칙(the principle of uniformity of nature)이 과연 영원불변한 것인지, 그리고 과 그것에 근거한 외삽 (外揷=extrapolation)이 과학적으로 합법적인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자연의 동일성 원칙이 영원불변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어길 수도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에 근거한 것이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것도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법칙에 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6. 맺는말 신앙이 학문적 지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이 신앙에 의하여 결정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신앙에 입각한 지식만이 참 된 지식이다. 지식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많이 고민한 Augustinus나 Anselmus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 이란 결론을 내렸다. 즉 알아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안다는 것이다. 만약 학문적 노력에 의하여 어떤 진리가 확실하게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진리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학문과 이성이 하나님과 독립하여 자율적이 되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의 위치에 서고 만다. 그러므로 학문은 종교적으로 중립적이 될 수 없다. 참고문헌 Conford, F. M., From Religion to Philosophy. New York: Harper & Row, 1957 Feyerabend, P., Against Method, New Left Books, 1975 Gerth, H. H. & C. W. Mills eds. From Max Weber,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8, Holmes, Arthur F., All Truth is God's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77 Kant, Immanuel, Welches sind die wirklichen Fortschritt, die die Metaphysik sein Leibnizens und Wollf's Zeiten in Deutschland gemacht hat? 1804 Kuhn, Thomas,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Polanyi, M., Personal Knowledge: Towards A Post-Critical Philosophy, Chicago: Chicago University, 1974 Popper, Karl, The Poverty of Historicism, London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57 Stevenson, J., ed., A New Eusebius: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history of the church to A.D. 337, London: S.P.C.K., 1957 Wittgenstein, L.,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 Wright, G. H. von, Explanation and Understanding, Ithi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71 (영문 요약) To Do Sciences in Christian Way Christian academicians have been wrestling with the problem ever since Christian faith was introduced to the Hellenistic world. Most academic activities today have scientific character. They have to be systematic (logical), objective, empirical, useful, use the method of causal explanation and have homogeneous object field. Science is not value neutral as many claim; they are more for power than satisfying curiosity. Conflict between Christian faith and science is inevitable for they both claim truth and truth, whatever the kind, is supposed to provide security. Many insist that science has replaced faith, some tried uneasy compromise, some put them opposite to each other, and some tried to explain away Christian faith with science. But the ultimate validity of scientific knowledge cannot be proved scientifically. It itself has a religious presupposition. Both Christian faith and science claim truth and in some their claims collide each other. In principle we must put science under God’s sovereignty. If there is any truth in science, it also is God’s truth. The principles all sciences presuppose, such as the principle of the uniformity of nature, are, should be God’s principles if they are true. Science is limited because it deals only aspects of reality, not the individuals, while the reality is composed of individual objects. Scientific knowledge is inevitably abstract because the method requires them to leave aside those irrelevant aspects (ceteris paribus). Further, science can never explain or solve the most important elements of human life, love, meaning of life, human dignity, freedom, right, etc. Science is also a game. It is exercised according to the rules agreed upon by the contemporary academic communities. Therefore, they are temporal and transitory. If there is any conflict between science and Biblical teachings, (1) we should examine whether the scientific conclusion is truly valid. If is undoubtedly true, (2) we may reflect whether our understanding of the Bible is correct. If the conflict is still not resolved, we should wait patiently until further discoveries are made. Not all the so-called scientific truths have been valid always and our understanding of the Bible is not absolute. science, faith, truth, presupposition, game,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2-17
  • 합신 부산노회, 유진소 목사 ‘영입’ 허락
    ▲ 유진소 목사 예장합신 부산노회가 지난 2월 11일(목) 임시노회를 열고 호산나교회 담임으로 내정된 유진소 목사를 ‘영입’하는데 허락했다. 합신 총회의 경우 타(통합) 교단 출신은 바로 ‘청빙’을 하지 않고, ‘영입’ 이후 ‘청빙’ 과정을 거친다. 유진소 목사 같이 타 교단 출신의 경우 ‘단독목회 7년 이상 경력을 가진 자의 경우 노회의 영입위원회 심사를 거쳐 노회의 결의를 통해 영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 목사는 20년 단독 목회를 해왔기 때문에 영입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하지만 유 목사가 바로 담임목사로 시무할 수는 없다. 합신의 경우 ‘임시목사로 2년 시무한 후 그 교회의 청빙을 받고, 노회의 위임을 받은 자’ 만이 담임목사가 될 수 있다. 유진소 목사가 호산나교회 청빙을 받더라도 2년 동안 임시목사로 시무해야 되며, 2년 후 공동의회를 통해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야 정식으로 담임목사직을 수행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시목사라도 담임목사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게 교단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노회 안에서 임시목사로 분류되지만, 교회 안에서는 실제적으로 당회장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최근 호산나교회는 ‘유진소 목사 청빙 준비 위원회’(위원장 박동호 장로)를 구성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유 목사의 설교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 ‘유진소 목사 모셔오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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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6
  • [인터뷰] 21세기포럼 이사장 강판녕 장로
    Q. 이사장에 선출된 소감을 밝혀 주십시오. A. 10여 년 동안 부이사장으로 봉사해 왔기 때문에 이사장으로 추대를 해 주신 것 같은데, 장성만 이사장께서 기반을 잘 세우시며 훌륭하게 운영해 오셨기 때문에 ‘그 동안 해 오신대로 해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신 분의 뒤를 이어 가야된다는 것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Q. 지난 10년 동안 故 장성만 목사님과 함께 21세기포럼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21세기포럼에 대한 지난 10년을 평가해 주십시오. A. 자기가 자신을 평가한다는 것은 자화자찬이 되기 쉽지만,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과거 부산에 월요회라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기관, 단체장을 지낸 분 등 10여명이 매월 마지막 월요일에 주제 없이 모여 점심을 먹고 친교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그 때 장 목사님께서 "우리 밥 만 먹고 헤어지지 말고 보람 있는 일도 좀 합시다"라고 말씀을 하셔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임현모 장로에게 실무를 맡겨서 세 사람이 준비하게 되었지요. 초창기 조직 할 때 이사영입에 참 많이 신경을 썼어요. 그래서 좋은 분들로 구성이 되어 1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거금을 모아 빌딩도 마련하고,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전국적으로도 소수의 기독교인이 짧은 기간에 이만큼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고 봉사하는 단체는 없을 것입니다. 자랑 할 만하지요. Q. 장 목사님과 친구처럼 편하게 대화하고, 웃으시던 모습들이 기억납니다. 이사장님이 생각하시는 故 장성만 목사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A. 많은 사람들이 장 목사님과 나를 ‘바늘과 실’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부산이라고 하는 이 지역에서 50 여년을 교제하고 지냈으니 그렇게 비춰질 수 있지요. 어디 가서 좋은 음식이 있으면 서로 생각이 나서 모시고 가고 참 친하게 지냈습니다. 장 목사님은 훌륭하고 성공한 교육자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성공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장 목사님이 집권여당 정책위 의장을 하실 때 ‘의료보험제 전면 실시’, ‘최저 임금제 실시’를 시행했습니다. 우리가 장 목사님의 이런 업적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장 목사님은 참으로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사람을 키우고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눈물이 있는 목회자였습니다. 한 10년은 더 같이 포럼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아쉽습니다. Q. 지난 10년 동안 21세기포럼이 많은 사업들을 해 오셨습니다. 기존 문화대상과 포럼 이외에 이사장님이 생각하시는 새로운 사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A. 특별히 새로운 사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포럼 이사님들의 결속을 다지는 친교 모임을 좀 많이 했으면 합니다. 최근에는 장 목사님이 건강이 좋지 못해 자주 모이지를 못했습니다. 앞으로 자주 모일 생각입니다. Q. 기독문화대상 지원자가 초창기보다 많이 줄었다는 지적들이 있습니다. 문화대상 영역(문화, 교육, 봉사)이나, 방식을 새롭게 바꾸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A. 우리 이사님들하고 의논해 봐야 하겠습니다만 문화대상 수상자는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찾아보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 내도록 하겠습니다. Q. 기독문화대상의 초창기 취지가 ‘기독교인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하여 기독교인이 존경받는 사회를 조성하고, 기독교계 숨은 봉사자를 발굴하여 귀감이 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건설을 위해 이 상을 제정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 수상자를 살펴보면 숨은 인재발굴이 아니라, 기존 인재에게 상을 줬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사장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A. 참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 포럼에서도 열심히 찾겠습니다만 우리 교계 기자 여러분들이 발굴을 하셔서 추천을 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Q. 끝으로 지역교계에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A. 개인이나 단체나 개별적이면 약합니다. 그러나 모이면 든든합니다. 성경에도 있듯이 삼겹 줄이면 강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는 모두 힘을 모아야 합니다. 문제는 누가 어떤 모양으로 힘을 모으느냐가 문제이지요. 자기 개인 욕심이나 자기 단체의 이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자세로 연합운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 포럼은 정관에도 교계연합에 동참해서 잘 해 나가도록 돼 있습니다. 앞으로 은혜롭고 건전한 교계 연합사업에 동참하고 봉사 할 것입니다. 21세기포럼을 위해 많은 기도와 관심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인물
    • 인터뷰
    2016-02-16
  • 한국기독신문과 부산기윤실이 함께 하는 4.13 총선 캠페인(1)
    <본보는 부산기윤실과 함께 4.13 총선 공정선거운동 캠페인을 펼칩니다. 선거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와 후보자에 선택에 대한 바람직한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캠페인은 총 4회에 걸쳐 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 담임, 부산기윤실 공동대표)와 주광순 교수(부산대 철학과, 부산 기윤실 공동대표), 김진영 교수(부산대 정외과, 부산기윤실 실행위원), 가정호 목사(부산 기윤실 사무처장)의 글이 게제 될 예정입니다.> 국회의원 선거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 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 아주 오래전에 부목사로 사역할 때의 일이 생각난다. 이미 소천하신 담임목사님은 누구보다도 개혁적이고 건강한 목회로 교계의 존경을 받는 분이셨지만, 당시 대부분의 목회자들처럼 사회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무관심했고 정치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으셨다. 마침 국회의원선거가 있었는데, 큰 교회이다 보니 지금처럼 그 지역에 출마자들이 너도나도 목사님을 방문했다. 그는 한 후보자를 꽤 마음에 들어 하면서, 이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 후보에 대한 편애를 직간접으로 드러냈다. 구역장모임에서 그의 인격과 성실함을 은근히 칭찬했고, 그 후보자의 운동원들은 매주일 교회 정문에서 선거유세를 마음껏 하게 했다. 어느 날은 아예 교회 마당까지 들어와 유세를 해서, 젊은 부목사들이 이건 아니라고 건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지금의 선거법 아래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의식이 없었다. 이러한 일들이 목사님을 존경하는 교인들의 표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그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낙선자와는 아주 근소한 표차여서 목사님이 이 후보를 당선시킨 격이 되고 말았다. 또 다시 선거철을 맞이하면서 그 일이 회상되는 것은, 아직 우리교회들이 이러한 문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국교회사에서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돌아보면, 교회는 3.1 독립운동의 실패이후, 철저한 정교분리의 가르침으로 돌아섰다. 사실 미국의 독립이념이 된 정교분리는,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려고 하는 취지에서 시작 된 것이다. 오랜 세월 기독교사회였던 유럽은 국가와 교회가 밀착된 가운데 국교제도가 있었다. 국교제도 하에서 국교가 되지 못한 다른 종교들은 차별대우나 심지어는 박해를 받았다. 미국은 독립하면서 정교분리를 기초로 해서 국교제도를 없애고 국가가 종교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전혀 배경이 다른 우리나라에 와서 이것은 오히려 교회가 국가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는 여하한 국가의 일이나 정치적인 문제는 세상일로 치부하고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정교분리를 앞세운 한국교회는, 내면적으로는 위에 소개한 교회의 예처럼 알게 모르게 정치와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우선 정치적인 무관심은 교인들이나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서 무지하게 했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게 했다. 정치에 대한 무지는 정치에 대해서 그 복잡성을 간과한 채 너무 나이브하게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오히려 다양한 모양으로 정치에 오염되게 했다. 국가권력 또한 교회를 정치와 무관한 청정지역으로 놔두지 않았다. 일제식민지정권부터 군사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권력자들은 교계지도자들을 앞세워 그들 정권과 정책의 정당성을 지지하게 했고, 이로 인해 교회가 정의롭지 못한 권력의 후견인 역할을 하며 정치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이 자신이 출마하는 지역의 교회를 찾아다니며 암묵적인 유세를 했고, 담임목사는 그를 회중에게 인사시키면서 은근히 교인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심지어 우리의 정치현실이 지역주의에 고착되다보니 교회들도 지역병에 물들어 버렸다. 교계 모임에는 그 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의 정치인이 버젓이 초대되고, 그것이 당연시 되곤 했다. 이처럼 교회는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정치화되어 간 것이다. 이런 정치화는 두 번의 진보정권을 거치면서 더욱 노골화 되었다. 그동안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은밀하게 정교분리라는 휘장 속에서 지향했던 정치적인 방향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다른 정치가 펼쳐지자 교회는 아예 휘장을 걷어내고 안팎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노골적으로 정치세력화하기도 했다. 이런 정치화의 모습을 우려하면서 다시 정교분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가 돌아가야 할 주소는 또 다시 정교분리가 아니다. 국가와 교회는 분명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될 수도 없다. 이 세상에 단 1Cm도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다. 이것이 하나님 주권사상을 기반으로 한 개혁주의신학이다. 개혁주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정치는 선한 일이고, 위정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종이라고 가르치면서, 정치 영역이 믿음과 무관하다는 생각을 사탄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권력자는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바르게 정치해야하고, 올바른 신앙인은 정치적인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불의한 정치지도자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하였다. 기독교강요가 시민불복종의 권한으로 끝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러므로 E. 트뢸취, 한스 숄등은 서구의 정치적인 발전은 개혁주의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정교분리를 넘어서서 개혁주의신앙 속에서 국가와 교회의 건강한 관계를 찾아가야 한다. 올해 4월 국회의원선거철이 돌아오면서 교회는 또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교회가 다시금 정치화의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특정 정당의 선거운동을 하는 목회자들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제라도 우리는 교인들에게 국가정치의 중요성과 정치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가르치자. 칼빈은 렘 22:3이야말로 세상국가가 지향해야할 바른 정치원리라고 했다. 그 핵심은 정의이고, 그 정의는 정직하고 공정한 재판이면서 동시에 그 사회의 가난한 자, 약자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이다. 사실 이것만 제대로 지킨다고 해도 그 나라는 공의로운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우리 그리스도들은 이 하나님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정치인으로 세울 책임이 있다. 자기 지역출신이거나 지역에 기반을 둔 당이라고 무조건 표를 주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뽑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할 사람을 세워야 한다.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정치적인 안목과 책임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번 총선이 그런 것들이 실현되는 선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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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2016-02-16
  • 2016년 부산지역 부활절 연합예배 일정 확정
    부산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성구 목사)가 주최하는 2016년 부산부활절연합예배 일정이 확정됐다. 3월 27일(주일) 오후 2시 30분 사직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되는 부산부활절연합예배는 ‘부산이여 일어나라’(부제 : 부활, 생명, 사랑)는 주제로 개최된다. 이날 강사로는 부기총 34회기 대표회장을 지낸 바 있고, 감리교 삼남연회 감독 출신인 정양희 목사(해운대온누리교회)로 결정됐다. 준비위원장 박성호 목사는 “전국에 유명한 목사님이 많으시지만, 우리지역에서 현재 시무중이고, 부기총을 섬긴 경험이 있는 인물을 찾았다”며 정양희 목사를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한편, 부활절연합예배와 때를 맞춰 다양한 축제들이 함께 개최된다. 대표회장 이성구 목사는 “부활절이 기독교 최대 명절인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부활절연합예배를 연합축제 형식으로 개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3월 2일 발대식을 시작으로 ‘사랑의 헌혈 캠페인’과 ‘1 DAY 거리전도’ 등이 펼쳐진다. ‘사랑의 헌혈 캠페인’은 헌혈운동에 동참교회를 신청 받아 헌혈기관이 주일 교회를 방문해 헌혈을 실시하는 연중무휴 캠페인이다. 부기총 사무총장 박은수 목사는 “교회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캠페인을 찾아본 결과 헌혈운동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재 혈액이 많이 부족하다. 혈액은 한 번에 몰리는 것 보다, 연중 꾸준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반짝 행사가 아닌, 연중무휴로 캠페인을 진행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 DAY 거리전도’는 부산복음화운동본부(총본부장 윤종남 목사)와 함께 부산의 번화가인 부산역, 광복동, 서면거리에서 거리전도운동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이후 세 곳에서 전도하는 팀이 부산역에 모여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통일광장기도회에 동참하는 일정을 가질 예정이다. 또 3월 21일 부산진역에서 노숙자 짜장나눔축제를 가질 예정이며, 작년처럼 부활절 행사 당일 날 ‘다음세대 청소년 집회’도 함께 가질 예정이다. 특히 부기총이 추진하는 행사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활절 메시지 통일’이다. 부기총에서 부활절 관련 공동말씀(종려주일설교문, 부활주일설교문 각 2편)과 부활절 축제를 준비하는 공동기도문을 배부해 부활절 당일 전까지 부산의 전 교회에 사용을 요청토록 할 계획이다. 이성구 목사는 “금년 부산부활절연합예배는 부산교계의 연합과 공교회 의식을 강화하고, 대사회적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준비한다”며 지역 교회의 많은 동참과 기도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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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5
  • 소양보육원 설립자 지득용 장로 소천
    소양보육원 설립자인 지득용 장로가 지난 6일 향년 95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리운 지득용 장로는 1946년 강원도 춘천에 아동복리시설 소양보육원을 설립했다. 6.25전쟁 중 3번의 피난을 거치면서 지금의 보육원이 위치한 가덕도에 보육원을 세웠다. 지득용 장로는 예장고신 제42회 부총회장, 전국원로장로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통령 공익포장, 국민훈장 석류장, 제15대 호암상 등을 받았다. 빈소는 고신대학교복음병원 장례식장 특302호이며, 발인은 12일 오전 6시 30분, 장례예배는 12일 오후 1시 소양무지개동산에서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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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1
  • 신천지대책위, ‘이단대책위’로 이름 바꿔 존속
    ▲ 부산신천지대책위원회가 '부산이단대책위원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존속키로 했다. 신천지 본부건물 이전 건축을 저지하기 위해 구성된 부산신천지대책위원회(상임위원장 최홍준 목사)가 ‘부산이단대책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존속하게 됐다. 지난 1월 28일 신천지 안드레지파가 연제구청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을 취하함으로써, 이전을 추진하던 연산동 이마트 옆 부지(연제구 연산동 822-123)를 사실상 포기했다. 때문에 부산신천지대책위원회의 처음 구성목적이 사라짐으로써 해체수순을 밟을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지난 2월 4일(목) 대책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신천지’를 ‘이단’으로 이름을 변경해 계속 존속키로 했다. 이 자리에서 위원들은 “신천지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교회, 구원파박옥수 등 부산지역에 이단문제가 심각하다”, “신천지 안드레지파와 야고보지파가 이전을 완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계속 이전을 추진 중에 있다”는 의견 등에 공감하며 위원회를 존속키로 한 것이다. 안드레지파 본부건물 이전 문제로 작년 5월 구성된 부산신천지대책위원회는 그동안 부산지역 교회들을 대상으로 서명날인과 전단지 제작, 법무팀 구성, 기자회견, 반대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본부건물 이전을 반대해 왔고, 그 결실을 얻었다. 상임위원장 최홍준 목사는 “부산지역 이단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이단대책위를 존속키로 했다. 대책위가 이단 문제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부산교계의 관심과 기도를 당부 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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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5
  • 고신대복음병원 임학 원장, 고신대에 1천만 원 전달
    고신대학교복음병원 임학 병원장 고신대학교(총장 전광식)가 임학 고신대학교복음병원장이 2월 1일(월), 개교70주년을 맞이하는 고신대학교(총장 전광식)에 1천만 원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임학 원장은 고신의 정신을 회복하며 한국교회의 영적 무장의 산실이 됐던 무척산기도원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에 참여하며 후원금을 전달했다. 임학 병원장은 “70년 전, 일제 치하 이후 한국교회의 영적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기도의 처소가 향후 100년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고신대학교와 병원, 그리고 한국교회의 부흥과 영적 갱신을 위해 이 작은 후원이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신대 의과대학 김우미 학장 또한 지난 1월 28일(목) 무척산기도원 컨소시엄에 참여하며 매월 1백만 원씩, 10개월간(총1천만 원) 후원을 약정했다. 김우미 학장은 “무릎으로 기도하며,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귀한 사역에 함께 조력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학교가 말씀 안에 더욱 강건해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학으로 가일층 성장하는 일에 지속적으로 조력할 것”을 약속했다. 지난 1월 22일(금)에는 벧엘의료선교회(이사장 최광진)가 고신대의 비전에 동참하며 1천만 원을 전달했으며, 1월 26일에는 사랑의교회(담임목사 오정현)가 3천만 원을 전달했다. 또 1월 27일(수)에는 삼일교회가 고신대를 방문해 1천만 원을 전달했다. 삼일교회를 대표해 기부금을 전달한 강성철 장로와 양승훈 장로는 “고신대학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며, 학생들의 영적훈련을 위해 기도의 처소를 인수하는 귀한 사역에 조력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로 조력할 것”을 약속했다. 같은 날 김진섭 목사(백석대학교회)도 고신대의 비전에 동참하며 2백만 원을 전달했다. 전광식 총장은 “무척산기도원을 영적 산실로 삼아 말씀을 회복하며 기도운동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학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전 구성원들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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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5
  • 부산장신대 졸업예배 및 학위수여식
    부산장신대학교가 지난 4일(목) 오전 11시 학교 대강당에서 졸업예배 및 학위수여식을 개최했다. 제62회 대학, 제13회(통합109기) 신학대학원, 제9회 대학원 학위수여식과 제10회 평신도대학원 수료식이 진행된 이날 총회장 채영남 목사를 비롯해 부산, 경남, 울산지역 노회장과 졸업생과 학부모 등 6백여 명이 참석했다. 부산장신대는 이날 156명의 졸업생과 평신도대학원 23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총장 김용관 목사의 사회로 열린 졸업예배는 이사 이종삼 목사가 기도하고 이사 김근호 목사가 성경봉독한 뒤 총회장 채영남 목사의 ‘너는 복이 될지라’는 설교에 이어 전총장 신동작 목사의 축도로 1부 순서를 마쳤다. 2부 학위수여식에서는 총장상, 총회장상 등 각종 시상과 함께 이사장 민영란 목사의 격려사와 총회 신학교육부장 곽충환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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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5
  • 청십자 신협 제39차 정기총회
    청십자 신협이 4일(목) 오전 10시 부산 KT범일타워 6층 대강당에서 제39차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회의에 앞서 가진 기념식에서 땅끝교회 김운성 목사가 기도하고 부이사장 조운옥 장로가 연혁보고 했다. 상임이사장 이대길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지난 해 만만치 않은 금융환경 속에서 당기순이익 9억 6천만 원을 시현했다”면서 조합원에게 3%의 배당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475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회의에서는 의사일정 확정과 감사·결산보고서, 2016년 사업계획 및 예산 승인의 건, 2016년 상임이사장 보수 결정의 건, 정관 및 정관부속서임원선거규약 일부개정의 건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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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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