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보기
-
-
고신대 2016년도 전기 학위수여식 및 행복기숙사(로뎀관) 준공식
-
-
고신대학교(총장 전광식)는 2016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을 지난 16일(목) 오전 10시 30분 영도캠퍼스 예음관에서 가지고, 이날 오후 2시에는 행복기숙사 로뎀관 준공식을 진행했다.
졸업생과 학부모, 교단 내·외 인사들이 참석한 학위수여식의 수여자는 박사 31명, 석사 113명, 학사 697명, 여자신학원 18명, 전문인선교훈련원 28명이다. 이 중 외국인 학위수여자는 학사 4명, 석사 1명, 박사 1명이다.
송영목 대외협력처장의 사회로 가진 1부 예배는 이사 김형태 목사의 기도하고 예장고신 총회장 배굉호 목사의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라’는 제목의 설교 후 이사 최한주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배 목사는 “오늘 고신대를 떠나는 여러분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서 변화시키고 개혁하며, 바로 세우는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사명 완수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진 2부 학위수여식은 손수경 교무처장의 사회로 조성국 부총장의 학사보고, 전광식 총장의 증서수여 및 시상, 훈사, 강영안 이사장의 격려사,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의 축사, 발전기금 전달, 이성만 장로(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의 파송 기도로 마쳤다.
전광식 총장은 훈사를 통해 “우리의 교정을 떠나는 모든 졸업생에게 먼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찾길 바란다”면서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치열하게 주어진 삶을 살기를 바라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생을 사랑하면서 엄숙하게 살기를 소원한다”고 전했다.
또 강영안 이사장은 “공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며 공부를 하되 평생 공부하라, 평생 공부하되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졸업생이 되길 바란다”며 격려했다.
이날 고신대 발전을 위해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5백만 원, 포도원교회에서 1천만 원, 옥토장학재단(이사장 전성철)에서 1천만 원, 장재갑 대표(글로벌교육원)에서 5백만 원 발전기금을 각각 전달했다.
학위수여식 후 가진 행복기숙사 로뎀관 준공식은 1부 예배와 2부 준공식 순으로 진행됐다. 준공식은 신도현 사무처장의 건축개요보고, 전광식 총장과 김혜천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의 인사, 강영안 이사장의 축사, 감사패와 공로패 전달, 커팅식 및 개관 투어 등이 있었다.
한국사학진흥재단 김혜천 이사장은 “앞으로 행복기숙사를 통해서 고신대 학생들이 행복한 학교생활, 의미 있는 대학생활을 해서 대한민국에 훌륭한 종교인으로서, 훌륭한 의사로서, 훌륭한 전문인으로서 많이 양성되기를 기원한다”며 말했다.
영도캠퍼스의 행복 기숙사 설립으로 전국의 학생은 물론 장애우 및 저소득층의 학생들 주거 환경 개선된다. 행복기숙사는 연면적 약 3000평, 지하 2층, 지상 7층의 규모로, 744명(1인실 4실(장애우), 2인실 66실 132명, 4인실 152실 608명)의 인원수용이 가능하다.
특히 행복기숙사는 부산지역 거주 학생도 입사가능하며 독서실, 체력단련실, 세미나실, 식당과 주방, 매점 등 다양한 시설이 설치됐으며, 송도캠퍼스에 셔틀을 운행해 의대, 간호대 학생도 편리하게 이용 가능하다. 2월 말 입주해 2017년 새 학기부터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
2017-02-17
-
-
고신대복음병원, ‘환우와 함께하는 음악회’ 개최
-
-
고신대학교복음병원(병원장 임학)이 지난 16일(목) 오후 12시 30분 병원 중앙로비에서 ‘BNK부산은행실내악단(이하 BNK실내악단, 악장 박민진)’을 초청해 환우와 함께하는 음악회를 개최했다.
이번 음악회는 고신대복음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격려를 전하고 음악을 통한 완치의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날 BNK실내악단은 모차르트의 심포니 25번, 리베르탱고를 비롯 총 11곡의 곡을 통해 환자 및 보호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BNK실내악단은 지역문화 예술 저변확대와 발전을 목적으로 지난 2010년 9월 창단됐다. 전문음악인으로 구성된 BNK실내악단은 클래식뿐만 아니라 재즈, 대중가요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다문화가정을 찾아가는 음악회를 비롯해 매월 20회 이상 찾아가는 음악회를 실시하고 있다.
임학 병원장은 “병원에서 준비하는 작은 음악회를 통해 환우와 보호자들이 지친 병원생활에 작은 위안이 되기를 희망한다”며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고신대학교복음병원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오랜 시간 입원 치료로 다양한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어렵다는 점에 고려해 환자, 보호자 등 내원객의 정서적 치유를 위해 매월 병원 로비에서 다양한 공연팀을 초청해 음악회 및 문화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2017-02-17
-
-
[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2] 부산에 살았던 첫 서양인 가족은 누구였을까?
-
-
부산에 살았던 최초의 서양인은 누구였을까? 많은 이들이 부산에 왔던 호주 혹은 미국인 선교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부산을 일시적으로 방문했던 서양인들도 없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부산에 온 첫 서양인은 1593년 웅천에 왔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a de Cespedes)로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 진해 인근의 웅천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요청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12월 27일 내한한 그는 약 1년간 웅천과 인근 부산지역에서 살았다. 화란인 하멜이 제주도 모슬포에 표착했을 때가 1653년이었으니 하멜보다 60년 앞선다. 그러나 세스페데스는 종군신부였고 가족이 함께 조선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산에 정착했던 첫 서양인 가족은 누구였을까? 그가 바로 1883년 10월부터 1886년 5월까지 2년 7개월 간 부산에 살았던 영국태생 미국인 윌리엄 넬슨 로바트(William Nelson Lovatt, 1838-1904)였다. 영국인인 그는 1883년 10월 단신으로 부산으로 와 초대 부산 해관장으로 근무하던 중 1884년 여름 미국출신의 부인 제니(Jennie)와 막내 딸 마벨(Marbel Elizabeth)이 부산으로 와 정착함으로 부산에 거주한 첫 서양인이 되었다. 로바트에게는 장녀 헬렌 마가렛(Helen Margaret)과 차녀 이다 엘리자벳(Ida Elizabeth), 장남 존 쇼우(John Show)가 있었으나 교육문제로 미국 미네소타 주 레익랜드(Lakeland)에 남겨두고 부인과 4살 된 막내딸만 데리고 부산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부산해관은 1883년 7월 행정업무를 시작하였는데, 당시 본정(本町)으로 불리던 동광동 2가 3번지 소재 일본인 가옥을 빌려 개청했다. 1885년에는 현재의 부산데파트 자리에 목조 2층 청사와 보세창고 1동을 지어 이전하게 된다. 로바트가 내한했을 당시 별도의 사택이 없었음으로 지금의 동광동 1가 입구쪽의 일본인 주택에 기거했는데, 그가 부산에 거주하는 동안 해관업무를 총괄하면서도 해안지대에 해관청사를 건축하고 보세창고를 지었다. 사실 그는 주목 할만한 역사적 인물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역사가들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고, 그의 행적은 주목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일기, 편지 그리고 여러 사진이 발굴되어 조선 후기 격변기에 대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웨인 패터슨(Wayne Patterson)은 로바트에 대한 책 『폐하의 분부를 받들어』(In the Service of his Korean Majesty)를 썼는데, UC버클리의 동남아시아연구소에서 출판되었다. 나는 우연하게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Korea Times)에서 이 책자를 알게 되었고, 급하게 주문하였으나 여러 일로 분주하여 탐독을 미루고 있다. 그는 당시 흔치 않던 사진기를 소지하여 그가 남긴 사진 자료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북장로교의 사이더보텀(Richard Sidebotham)의 사진이 1899년 이후 것이고 엥겔(G. Engel)의 사진이 1900년 11월 이후의 것인 반면에 로바트의 사진은 1883~ 85년 부산 사진이니 그 가치가 높을 수 밖에. 지금의 광복동 롯데백화점에 인접한 해안 사진을 비롯하여 북항과 남항 자칼치 사진, 용두산 송림 아래의 일본 영사관 사진, 광복동 일본인 거리, 부산포 내항 전경, 일본인 거류지 사진, 자성대 성벽이 보이는 부산진 사진 등은 로바트가 남긴 역사의 기록이다.
부산에 거주한 첫 서양인 가족 로바트는 청나라의 압력으로 묄렌돌프가 해임되자 자신도 재신임을 받지 못하고 결국 부산을 떠나게 된다. 복잡하게 얽힌 조청(朝淸)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 탓이었다.
-
2017-02-16
-
-
[안동철 목사] ‘사랑’의 바구니 안에 ‘진리’를 담아야 된다!
-
-
영화나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상을 잘 반영한다. 그래서 필자는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나 책은 보거나 읽으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1997년에 개봉된 ‘라이어 라이어’(Liar Liar)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현대인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 영화는 세계적인 배우인 짐 캐리(Jim Carrey)가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의 감독은 톰 새디악(Tom Shadyac)인데,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진실’의 소중함이다.
영화에서 짐 캐리는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그는 소송에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질 변호사로 등장한다. 그의 거짓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아들인 맥스에게도 완전히 신용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가족들과의 약속을 번번이 어기던 어느 날, 그는 아들 맥스에게 생일만은 축하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날도 불륜에 빠져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기다리던 아빠가 나타나지 않자 맥스는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기 전 아빠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기도는 이루어진다. 이후 짐 캐리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진실만을 말하게 된다. 톰 새디악 감독은 영화를 통해 온갖 거짓에 물든 현대인을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세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까? 에베소서 4장 15절을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 한다. 영어 NIV성경은 이 부분을 “speaking the truth in love”(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라고 번역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말의 내용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은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의 원수 마귀를 향해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6:13).
며칠 전 모 방송사 뉴스를 통해 ‘가짜뉴스’가 SNS를 통해 급속히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리고 필자에게도 그런 글들이 요즘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유명 단체 어떤 유명인이 말했다고 하는데 거짓된 정보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전 국민이 비탄에 빠져 추모의 의미로 노란리본을 달았을 때 이것을 정령숭배이고, 노란색은 특정 정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해서 비난의 글을 퍼붓기로 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노란색도 하나님의 색이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시민으로 정치적인 의사를 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주장이나 글은 반드시 진리에 기반을 둬야 한다.
덧붙여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 갈등이 심각한 한국 땅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의 바구니에 담길 때에만 가치가 있다. 가슴 아픈 것은 모두 다 핏대를 올리며 주장하기만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모든 갈등과 상처를 보듬고 치료해야 할 교회도 이 갈등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 땅의 것에 영원한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지 않는가?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담대히 말했고, 대적자들은 결국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지 않는가? 혼란한 이 땅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바구니 안에 ‘진리’를 담아야 한다. 이때 거짓과 갈등으로 점철된 이 땅을 아름답게 밝힐 수 있게 될 것이다.
-
2017-02-16
-
-
[목회자칼럼] 같아 보이나 다르다 (1)
-
-
우리 주변에는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확연히 다른 것이 적지 않다. 사람을 생각해 보자. 우리 눈에는 영국, 독일, 네델란드 사람들이 같아 보인다. 도저히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그들 세 나라는 언어와 풍속이 아주 다르다. 마찬가지로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한국, 중국, 일본 이 삼개국 사람이 전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에는 구분이 된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매우 크다.
〈남북한〉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외국 사람들은 South Korea이냐 North Korea이냐 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때 그 때 생각나는대로 “당신은 북한 사람인가? Are you north korean?”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 입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 서양 사람이 얼마나 한심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비슷할 것이다.〉 이렇게 예사로 생각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남북한을 연구하고 공부하였다면 남북한은 비슷한 것이 아니고 엄청난 차이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 이다. 남북한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즘 토요일 저녁마다 광화문 앞과 서울 시청 앞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외치는 촛불 시위대 100여만명과 “대통령을 탄핵하지 말라!”고 외치는 태극기 시위대 100여만명이 불과 500m 거리를 가운데 두고 열심히 외치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만약 평양의 최고 중심거리에서, 최고 통치자가 거주하는 만수대 정문 가까운데서 평양 시민 100만명이 모여 “김정은 퇴진하라!”고 목청껏 외치면서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한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그 결과를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남쪽에는 예의상으로도 참으로 지나친 행동이지만 광화문쪽 시위대에는 대통령 얼굴에 온갖 공격적이고 증오가 담긴 문구를 새긴 사진이나 그림 피켓을 들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짓밟기까지 한다.
그러나 북쪽은 어떠한가? 평양 모란봉 언덕에는 70년간 3대(三代)에 걸쳐 공산 독재를 이끌고 있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父子)의 동상이 20m 높이로 세워져 있고 북한 2300만 주민들은 차례대로 쉴 새 없이 그 곳을 찾아 꽃다발을 바치면서 절 (숭배) 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북한의 가정에는 통치자의 사진이 안 방 벽면에 액자로 만들어 걸려있으며 북한 사람들의 겉옷에는 통치자의 얼굴 사진 뺏지가 부착 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 남한(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지나치리 만큼 넘쳐나고 있다. 경제력도 전 세계 220여 국가들 중에서 거의 10~12위권 톱 클래스(최상위) 권을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외국 사람들의 눈에 남과 북은 너무도 비슷해 보이겠지만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난다.
이런 현상은 종교 또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오해나 착각이 수시로 일어난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군복무를 〈군종 장교 : 군목〉 로 수행하였다.
신학대학 재학 중 국방부의 〈군종 장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을 하고, 7년의 대학과 신학대학원 과정을 다 마친 후 입대하여 상무대 보병 학교에서 만 4개월 동안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이수하고서 육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강원도 최전방 부대로 배치를 받아 군종 장교로서의 임무를 시작하는데 목회자로서 첫 번째 직면해야 하는 문제가 〈신입 병사 · 新入兵士)들 「종교 선택 카드 작성」 문제 였다.
이 문제는 특이하면서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목회자로서는 참으로 우려스럽고 슬픈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 이었다.
-
2017-02-16
-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4 : 레짐
-
-
“천국에 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옥에 가는 길을 숙지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
1. 앙시앵 레짐: 적의 계보학과 꼰대의 등장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 Lacan)의 상징계(the Symbolic)처럼 우리는 태어나면서 언어와 사회 질서, 혹은 체제(regime)에 속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인 것이다. 불교 문화권에 태어난 사람은 불교 문화를 자연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유교 문화를 상징계로 접한 사람은 유교의 이상을 자연스럽게 그의 가치관이나 사상에 반영할 것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팔레스틴 땅, 식민지 이스라엘과 주변 강대국의 문화와 영향은 예수의 말씀에 녹녹히 녹아있다. 예수의 비유가 그러하며 그의 날선 생명의 말씀이 그러하다.
이토록 레짐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본질적 상황이다. 그리고 이 레짐은 완결되지 않았고 완전하지도 않다. 보수는 기존 체제를 지키려 하고 진보는 그 체제를 변화시키려 한다. 여기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적의 개념을 상정하고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과 ‘누보 레짐(nouveau regime, 혁명 이후의 신체제)’이 체제수호와 변화의 변증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앙시앵 레짐을 풍자한 그림
가상의 복제물이 실체를 가리고 대신한다고 말하는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적의 계보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敵)은 최초 단계에서 ‘늑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다음 단계에는 ‘쥐’(제발, 특정인을 연상하지 마시라!)의 형태, 그리고 ‘기생충’의 모습으로 다가오다가 마지막에는 ‘바이러스’의 형태로 나타난다.” 늑대는 울타리 밖에 선명한 적으로 존재하니, 비록 그 공포와 폭력의 서슬은 시퍼렇되, 전선이 분명한 만큼 대적하기도 단순하고 쉽다고 한다. 그러나 쥐는 야음을 틈타 은밀히 우리를 갉아먹는다. 지하벙커 같은 음습한 어둠을 좋아하며, 울타리를 아무리 견고하게 둘러쳐도 끈질기게 집안 깊숙이 들어온다. 따라서 우리들의 허술하고 지저분한 비위생성이야말로 쥐에겐 좋은 서식처가 된다.
쥐의 단계를 넘어선 적은 이제 기생충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부지불식간에 내 몸 안에 들어와 기생과 숙주의 관계로 진화한다. 숙주로 하여금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대게 하거나,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긴다. 따라서 내 몸속의 적은 나의 탐욕을 조장하여 나 자신을 살찌운다. 숙주인 나는 날로 허허로워 치열하게 탐욕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생충만 살찌울 뿐이다. 그러나 이 단계까지 적은 나와 구별되는 타자성을 극복하지 못한고 있다. 따라서 그만큼 대적하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 적이 바이러스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어진다. 적이 나인지, 내가 적인지 헷갈린다. 적의 낯선 타자성이 사라지고 어느덧 내 안에 내재화된다. 심지어 적은 나로 하여금 나를 타자화하여 주체를 전복시킨다. 소외와 일탈이라는 비정상성이 일상화되어 정상성으로 둔갑한다. 일종의 착란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실 2017년 2월의 대한민국은 지금 체제와 사람 모두 착란상태에 빠져있다.
상징계의 이러한 착란상태에 항상 라캉의 상상계(The Imaginary, 타자를 자신으로 오인하는 허구적인 주체의 단계)로 퇴보하며 상징계를 뒤덮는 꼰대가 등장한다. 꼰대는 기성세대나 선생님을 뜻하는 은어로도 쓰였던 말인데, 프랑스 단어 ‘콩테(comte, 백작)’에서 유래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부터 백작, 공작, 후작 등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이 스스로를 콩테라고 자랑하고 다녔는데, 이를 비웃던 백성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꼰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꼰대는 심리학적으로 ‘자기만 옳다고 느끼는 경향(sense of self rightness)’, ‘스스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경향(sense of self entitlement)’을 말한다. 기본적인 상식과 통념을 부정하면서 전문가의 권위만을 내세운다. 자기만 옳고 똑똑하며, 돈과 명예까지 가졌으니 대접받아야 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주변에 이러한 꼰대는 널려있다. 나이, 성별과 무관하게 계급장을 내세우고, 대접받고 싶어 한다면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가장 대표적인 꼰대인 굉꼰(굉장한 꼰대), 젊꼰(젊은 꼰대). 여꼰(여자 꼰대) 등. 따라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를 대화의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 가르쳐야 한다고 여기면 꼰대가 되어간다는 위험신호라고 할 수 있다.¹ 그러나 문제는 이 꼰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로, 곧 레짐으로 확장될 때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분열증적 자본주의의 폭력 사회 체제 속에서 우리는 개인의 ‘힐링(마음 치유)’을 넘어 ‘권력의 미시적 짜임’을 날카롭게 들춰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2. 분열증 자본주의와 디스토피아 들뢰즈/가타리(G. Deleuze/F. Gautari)는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에서 “초점은 장군이 아니라 하급 장교들, 하사관들, 내 안에 있는 병사, 심술궂은 자이며, 이들 각각은 나름대로 성향들, 극들, 갈등들, 힘의 관계를 갖고 있다 … 억압당하는 자가 억압의 체계 속에서 항상 능동적인 자리를 취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마조히즘이 아니라 바로 이 미시적 짜임이다.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제3세계에 대한 착취, 독재자들의 무장, 대기 오염에 능동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좀-나무, 탈영토화-재영토화, 무리-군중, 사본-지도, 분자-그램분자, 소수-다수, 유목성-정주성, 전쟁 기계-국가 장치, 매끈한 판-홈이 팬 판’과 같은 무수한 이항 대립의 쌍을 변주하며, 사유의 방식, 기능, 양태들에 대해 설명하는(여기에는 무수한 자의적 개념이 춤추고 있다. 가령 리좀, 동물-되기, 소수-되기, 영토화와 탈영토화, 포획, 탈주선, 지층과 지층화, 기관 없는 신체, 얼굴성, 추상기계, 배치,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팬 공간, 공리계의 접합접속 등등) 들뢰즈&가타리는 ‘차이의 철학’, 혹은 ‘욕망의 미시정치학’에 대해 말하기 위해 생물학과 언어학과 음악학과 경제학과 정치학을 가로지르며 다양체가 의식과 무의식, 자연과 역사,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미쳐 날뛰는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자본주의는 그 본질에서 분열증 자체이다. 주기적으로 위기는 돌아오고 증식하고 소멸하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환투기와 주식 투매의 미친 바람이 불고, 자본은 이익이 있는 곳으로 순간 휘몰아쳤다가 자양분을 빨아먹고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자본의 유동적 흐름은 포식자처럼 취약한 외환시장과 주식 거래를 삼켜버린 뒤 소화할 수 없는 뼈들만 뱉어낸다. 전 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라는 정글에 방목된 사자들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운용되는 토끼들을 사냥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사자들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서두에 인용했듯이 ‘지옥에 가는 길을 숙지’하면 되는 것인가?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말한다. “점유하고, 거주하며, 보존하는 영토에서 끊임없이 달아나라! 늑대 한 마리가 아니라 늑대 무리로 달아나라! 무리로 달아나야만 하나의 도주로가 아니라 천 개의 도주로를 만들 수 있다. 하나는 붙잡히지만 천 개는 붙잡히지 않는다. 경로를 따르지 말고 그것을 자주 이탈하라! 내가 어디로 움직일지 그들이 알 수 없게 하라! 정주민들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머리둘 곳 없는 방랑자 예수와 그와 함께한 세리와 죄인들의 모습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따라서 『천 개의 고원』은 화폐와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기계’의 포획에서 도망가도록 부추긴다. 국가-기계는 수많은 금기의 거미줄을 만든다. 제도들과 정책, 법과 치안의 그물로 국민을 포획하고 국가라는 지층에 편입시킨다. 따라서 조세와 병역 의무를 지우는 국가의 다양한 포획 장치로부터, 자본주의의 기계들(이를테면 정부, 한국은행, 군대, 나아가 학교, 종교단체 등)로부터 도망가라. 그때 구원의 문이 열릴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마태 2:3)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말이다.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므로, 디스토피아는 ‘어두운 미래 또는 현실’이 된다. 커지는 빈부격차와 취업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해법이 보이지 않는 교육·부동산 문제 등을 배경으로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와 담론에서 디스토피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어려웠지만 앞날에 대해선 낙관적이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역동감 있는 문화 콘텐츠와 상반되는 문화적 흐름이었는데, 이는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에 더 급진적 디스토피아로 전락했다.
디스토피아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체제 디스토피아, 인간 디스토피아, 문명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체제 디스토피아는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억압적인 체제’와 관련된다. 국가와 거대자본은 물론이고, 실생활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분야가 그 대상이 된다. 인간 디스토피아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환멸로 인한 디스토피아이다. 미시적이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문명 디스토피아는 현대 문명의 비관적인 전망과 연관되어 있다.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새 전염병, 외계인의 습격 등이 단골 소재가 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개신교는 물론 대한민국은 지금 ‘체제 디스토피아’의 최전성기가 무너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과 이후 해경·청와대·경찰·검찰·정치권 등 각 체제가 보여준 모습은 ‘체제 디스토피아의 완결판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김기춘-황교안-우병우 라인은 그 마지막 보루이다. 또한 ‘인간 디스토피아’는 그 정점을 찍었다. 청문회에 등장한 기득권층 인사와 고위 관료 등의 일그러진 모습을 통해 더 이상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긍정 할 수 있는 인간 유토피아를 상실했다. 다만, ‘문명 디스토피아’를 통해 다중들이 조용히 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과 시의 세상을 누보 레짐으로 열 것이다.
3. 누보 레짐: 음악과 시의 시대로
음악은 도레미파솔라시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음악의 음들에 관해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음악의 음들은 저마다 우주, 혹은 천문학적 공간 속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어떤 것과 상응한다.”라고 말한다. 가령 레는 ‘레지나 아스트리스(별들의 여왕인 달)’, 미는 ‘믹스투스 오르비스(선과 악이 섞여 있는 장소인 지구)’, 파는 ‘파툼(운명)’, 솔은 ‘솔라리스(태앙)’, 라는 ‘락테우스 오르비스(은하수)’, 시는 ‘시데루에스 오르비스(별이 총총한 하늘)’, 도는 ‘도미누스(신)’. 따라서 ‘달-지구-운명-태양-은하수-하늘-신’의 단계로 상승하는 음계를 통해 영적 지식의 향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달과 지구에 국한된 인간의 운명은 태양과 은하수, 하늘에 속한 신의 레짐으로 귀속될 때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은 그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시 해설집 『홀림 떨림 울림』 (나남, 2013)에서 이영광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좋은 시는 먼저 읽는 이에게서 생각이란 걸 빼앗아 갔다가는, 천천히 되돌려주는 것 같다. 그 찌릿찌릿한 수용과정은 ‘홀림-떨림-울림’으로 진행된다.” 시도 그렇지만, 2017년은 타자의 아픔에 홀려 가슴이 떨리고, 몸 전체에 큰 울림으로 남아 울림이 홀림이 되어 더 큰 떨림이 되기를 바란다. 이영광 시인도 “지상의 영화를 찬양하는 종교가 없듯이 현세의 복락을 지지하는 시도 근본적으로는 없고, … 어떤 종교는 고통 그것도 허망이라고 가르치지만, 모든 시는 허망을 고통이라 느끼는 곳에서부터 말을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결국 타자의 아픔에 홀려, 자신을 그 고통 가운데 내어주었고, 그 숭고한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큰 떨림을 주었고, 이제 시대를 넘어 큰 울림으로 변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홀림은 계이름 ‘레’로부터 시작하여 ‘도’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목하, 음악과 시의 시대가 이 앙시앵 레짐의 시대, 곧 적의 계보학과 꼰대들의 시대에 새 희망을 주는 것이다.
-------------------------------------------------------------------------------------------------------------
(각주)
1)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지침’ 5가지에 관해 북키닷컴 개발자인 이준행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나이를 먼저 묻지 마라. 한국 사회에서 버젓이 나이를 묻는 것은 상대방과 위아래를 겨루자는 의미이다. 자신이 나이가 더 많음을 상대에게 주지시키고,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둘째, 함부로 호구조사를 하거나 삶에 참견하지 마라. 차라리 좋아하는 음식이나 동물을 물어보라. 셋째, 자랑을 늘어놓지 마라. 당신의 인생 자랑은 ‘노잼’이다. 당신이 살아온 시절에 대한 자랑은 당신에게만 유효하다. 당신의 인맥 자랑은 당신에게 잘 보이라는 알량한 호소임을 상대방은 너무나도 잘 알아챈다. 어느 것으로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 넷째, ‘딸 같아서 조언하는데’ 같은 수사는 붙이지 마라. 인생 선배로서 조언한다는 이야기도 먼저 꺼내지 마라. 당신이 걸어온 길이 매력적이라면 상대가 알아서 물어올 것이다. 다섯째, 나이나 지위로 대우받으려 하지 마라. 나이나 지위가 없어도 타인에게 대우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이들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섯째, 스스로가 언제든 꼰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라. 나이로 서열을 매기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꼰대성이란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이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쉽게 꺼내는 내 안의 괴물과도 같다. 그 괴물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꼰대 탈출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상대와 내가 살아온 시간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괴물을 늘 경계하라. 그러면 당신은 꼰대가 아닌 어른에 가까워질 것이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2017-02-16
-
-
[중독칼럼] 분노조절 장애와 로직에러(2)
-
-
본인은 로에현상과 일중심형을 비슷한 인격으로 구분한다. 일중심형의 사람들은 대체로 대인관계가 썩 좋지 않다. 아무래도 일중심이다 보면, 결과론적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그 과정은 깡그리 무시한 채 상대방을 힘들게 한다. 본인은 이들을 일중독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독에는 게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론 설교자 가운데도 모든 것을 열매 위주로 설교하시는 분들도 봐왔다. 안타깝다. 결국 우리는 한 영화의 ‘뭣이 중헌디?’ 유행어처럼 삶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지면상 내 감정부터 쓴다.)
앞 칼럼11에서 로직에러(Logic Err, 로에) 현상의 대한 용어를 정의한 바와 같이, 우리는 컴퓨터, 스마트폰, 그 외 사회 조직 등이 수와 관련된 Logic의 체계가 더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우리의 뇌는 여기에 고착화되기 쉬운 환경에 놓여있다. 그래서 부부, 가정생활도 이러한 개념 속에서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범위 내에 관계가 형성되어진다. 교회도 마찬가지 인듯하다. 목사가 성도의 삶을 눈치 보며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라고 말한다. ‘뭣이 중한가?’ 이것을 놓치게 되면 결국 인본주의적 중심으로 합리화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본질, 법, ruler, 말씀, 진리, 율법,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런 단어들의 공통점 즉 우리에게 주는 핵심은 인간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중독, 즉 과의존 된 또 다른 기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다. 중독과 여가는 한 끗 차이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본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 삶의 향방뿐 아니라 삶의 질까지 결정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새법을 주셨다. 용납하고 용서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접하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법을 주셨다. 이것은 일 중심형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영혼 중심의 삶을 뜻한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가 logic적인 삶의 방식에만 매여 - 본인은 합리적인 사고 방식도 이에 포함한다. - 예배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살피며 보이는 것만 쫓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는 안목이 있을 때, 성령의 간섭으로 인해 이 모든 타락한 문화를 대적할 능력이 생김을 확신한다.
에베소서 6장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2017-02-16
-
-
[교회법률상식] 총회 기소위원회, 정치부 상설화 어불성설(1)
-
-
- 기소 위원은 범죄 예상 아닌 범죄 발현 후 치리회가 선정해야
- 총회의 기소 위원 정치부 상설화 결의 위헌적 결의로 시행 불가
[질의] 합동 제101회 총회가 총회 기소위원회와 정치부의 상설화를 결의하여 기소위원회는 해당 회기에 총회 결의를 이행하지 않는 자를 기소하게 하고, 정치부는 총회를 파회한 후에도 계속 존속하여 총회가 위탁하지도 않은 새로운 차기 총회의 업무를 심의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는 교회 헌법과 상충되는 것이므로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총회 결의로는 시행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법리적 답변을 바랍니다. (P목사)
[답] 질의자의 질의 내용 안에 답이 정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보다 더 상세히 정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본건에 대한 사실 관계
합동 제101회 총회가 총회 기소위원회와 총회 정치부를 상설화한다고 하면서 기소위원은 총회를 파한 후 새로운 사건을 기소케 하고, 정치부는 총회를 파한 후에도 계속 존속하여 정치적인 안건이 접수되는 대로 심의케 한다는 잠꼬대 같은 기상천외한 불법 결의를 하여 합동 교단에 먹칠을 하고 있다.
그 실상의 내역은 2016년 10월 11일자 기독신문 제2076호 4면에 “제101회 총회 헌의 안 처리 결과 기구 개편 및 신설”이라는 머리기사의 소제목으로 “총회 기소위원회(상시) 신설의 건”의 내용으로 “해당 회기 총회 결의를 이행하지 않는 자에 한하여 권징 조례 제2장 제7조에 의거 기소 위원을 두어 기소토록 하되 해 기소 위원이 기소한 건은 본 총회가 원고로 기소한 것으로 하며 기소 위원 선정은 매회 때마다 총회 파회 전 임원회가 3인을 선임하여 본 회의 허락을 받는다.”라는 보도에 이어 2016년 12월 13일자 기독신문 제2084호 2면에 “제101회기 총회 특별위원 명단, 총회 상설 기소위원회 : 서○○, 이○○, 김○○”이라고 기소 위원의 명단을 보도하였으니 이미 시행 단계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2016년 10월 4일자 기독신문 제2075호 2면에는 “정치부 상설화하고 실행위원회 역할 강화”라는 머리기사 내용으로 “제101회 총회의 … 가장 주목할 만한 결의는 정치부 상설화와 총회 실행 위원회 역할 강화다.”라고 보도하였다. 이는 총회 정치권의 일부가 불법을 자행하면서 마치 혁신 개혁이나 하는 것처럼 의시대면서 총회를 불법 탈법으로 난장판을 만들려 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2. 총회는 비상설체 조직
정치 제12장 제7조(개폐회 의식)에 “총회가 기도로 개회하고 폐회하되 폐회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회장이 선언하기를 「교회가 나에게 위탁한 권세로 지금 총회는 파(罷)함이 가한 줄로 알며 이 총회 같이 조직한 총회가 다시 아무 날 아무 곳에서 회집함을 요하노라.」 한 후에 기도함과 감사함과 축도로 산회(散會)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지금 총회는 파함이 가한 줄로 알며 이 총회 같이 조직한 총회가 다시 … 회집함을 요하노라”라는 파회 선언의 의미는 총회야 말로 비상설체 조직으로서 파회를 선언함과 동시에 총회도 없어지고 총대권도 종결되었으니 차기 총회가 회집될 때까지 파회된 총회의 모든 조직이 절대로 상설 존재할 수 없으므로 총회 파회 후의 새로운 모든 사건과 안건에 대하여 차기 총회 외에는 어느 누구도 어떤 사건도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101회 총회가 어떤 미지의 범죄 사건을 미리 예상이라도 하듯 교회 헌법이 금하고 있는 기소 위원을 상설 조직화하기로 결의하여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기소 위원이 즉시 기소하여 총회의 원고 노릇을 하게 했다. 거기에다 총회 파회 후에 접수된 일반 행정 서류는 정치부를 상설 조직화하기로 결의하여 정치부에 초헌법적 특권을 부여하여 심의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설 기소 위원이 기소한 사건이나 상설 정치부가 심의한 그 일반 행정 안건들은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의하여 예비 심의에 불과하고 차기 총회의 본 심에서 종결하는 것이 법리이거늘 비상설체인 총회 조직을 상설화로 결의하여 시행하려는 것은 헌법을 짓밟고 헌법과 상충되는 내용을 치리회의 결의로 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부당만부당한 불법 범죄 행위이다.
-
2017-02-16
-
-
[교회학교를 살린다] “신앙의 집에 시간을 확보하라.”
-
-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수작이다. 소설에서 처음에 아이들은 모모를 중심으로 마을 공터에 모여서 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 것도 없어도 그저 상상의 나래만으로도 배를 만들고, 파도를 헤치며 행복하게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시간을 도둑질해가는 회색 신사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마수에 넘어간 부모들은 너도나도 공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탁아시설에 맡겨버린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시설 속에 갇히고, 어른들은 돈 버는 일에만 매진하며 매일 기계처럼 살아간다. 잘 먹고 잘 사는 가정을 만들자고 시간을 아끼며 아등바등 살았건만, 정작 가정에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적어지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시간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44년 전에 나온 이 소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녀노소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교회도 다음세대를 만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일주일 168시간 중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단 1시간뿐이다. 교회에서 아이들은 예배 30분, 성경공부 30분을 바쁘게 마치고는 서둘러 학원과 집으로 향한다. 이러한 시간적 환경은 아이들에게 신앙의 가치관을 전혀 심어줄 수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중요한 과목일수록 수업 시간이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며 생활한다. 그런데 일주일에 단 한 시간을 신앙교육에 투자한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교회가 아이들의 신앙을 품고 자라게 하는 신앙의 집으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들이 오래 머물고 생활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신앙의 집을 짓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민교회에서는 올해부터 가정예배 드리기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가족 구성원간에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가정은 부모님이 밤 10시에 퇴근해서 청소년 자녀와의 고군분투한 가정예배현장의 인증샷을 찍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각자 너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그 금쪽같은 시간을 신앙교육에 투자하는 것도 참 힘든 세상이 되었다.
올해 초,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부모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은 한 설문조사에서 아이들의 52.8%가 선택한 1등은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응답이었다. 용돈이나 선물이라고 응답한 아이들 보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원한다고 응답한 아이들이 두 배 이상 많았다. 우리는 때로 시간이 부족하면 그 적은 시간이라도 질을 높여서 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함께함의 질은 함께함의 양에서 비롯된다.”는 한 상담전문가의 말이 떠오른다. 함께하는 절대 시간이 부족하면 함께함의 질도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먼저 함께함의 양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뛰어 놀고, 함께 말씀을 나누는 절대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육부서의 예배시간을 점검해서 아이들이 오기 편한 시간대인지, 예배 마치고 식탁공동체를 가질 수 있는지, 오후에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여유 있게 제공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자.
이해인님은 ‘사랑과 시간’이라는 수필에서 ‘시간이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곧 ‘사랑이 없다’는 말이라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사랑을 채워 보자. 올 한해 교회마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북적이는 행복한 모습을 꿈꿔본다.
-
2017-02-16
-
-
[시사칼럼] 해방정국의 재림
-
-
‘국정농단사태’로 촉발된 ‘탄핵정국’은 결국 대한민국사회에 촛불세력과 맞불세력, 탄핵찬성세력과 탄핵반대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반갑지 않은 부산물을 낳았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한쪽은 범상치 않은 정치적 내상(內傷)을 입을 터이고, 원치 않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더 큰 혼란이 초래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교회는 어느 한 편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분열과 대립이 더 이상 격화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작금의 상황이 7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마치 해방정국의 재림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1945년 해방 후 이 땅은 찬탁과 반탁, 남북협상, 한국문제의 유엔이관, 단정수립여부를 두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지지하는 세력, 김구와 한독당을 지지하는 세력, 김규식 등의 중도파,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와 시대의 격류(激流) 속에서 중지를 모으고 힘을 합쳐도 시원찮을 판에 민족과 사회가 다중으로 분열된 대가를 우리는 결국 몇 차례의 내전과 같은 상황들과 마침내 6.25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치러야 했던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3차 산업혁명』을,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시대입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다가오는 시대의 특징으로 에너지 혁명, 사물인터넷(IoT)의 혁신,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넘어선 대체현실(alternative reality), 나노 혁명(nano revolution)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국가의 역량을 총집결해서 전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좌우논쟁으로 해방정국의 속편을 닮은 소용돌이 속에 빠져있으니, ‘개탄(慨歎)’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남겨둔 말 같습니다. 하루 빨리 정쟁을 종식하고 마음을 합하여 21세기 신(新) 성장 플랫폼(platform)을 구축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대립과 분열을 봉합하고 화해와 화합을 이루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루시 스톤(Lucy Stone)이 시작한 미국 여성참정권 운동은 또 다른 여성 지도자들과의 반목과 대립으로 말미암아 그 결실이 이루어질 때까지 반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때로는 친구가 가장 큰 적일 수도 있다는(親敵, frenemy) 아이러니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밖에도 수많은 사회적 장벽으로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남녀와 세대와 빈부와 이념의 차이 등으로 인해 양산된 그 모든 차별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서로 틀린 것이 아닙니다. 누군들 나라가 평화롭고 번성하고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각자 생각하는 방식과 표현하는 수단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 절대적인 급선무는 상호 이해와 존중과 관용의 정신입니다. 또한 사랑입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지체들이 한 몸 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비가시적인 담벼락을 쪼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이신 주님께서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신 까닭입니다. 그것도 보통 사랑입니까?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해주는 그런 사랑입니다(눅 6:27-29). 이를 통해 분열과 대립을 넘어서 하나 됨의 역사가 먼저는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
2017-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