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0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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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의 엇나간 반종교적 주장 광고
    지난 1월 7일자 동아일보에 난데없는 이상한 광고가 실렸다. 그것은 소위 영생교 교주 고 조희성을 추켜세우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에 보면, ‘조희성 님은 온 인류가 고대하던 구세주가 틀림없습니다’ ‘조희성 님은 일개 종교의 교주가 아니라, 온 인류의 구세주입니다’ ‘(조희성이)모든 사람 속에 분신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하시는 전지전능한 능력의 구세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그렇다고 영생교(영생교하나님의성회승리재단)의 아류가 주장하는 바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교의 반사회적, 반종교적 행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교주인 고 조희성은 ‘살아 영생’을 주장했지만, 2004년 72세의 나이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만행은 우리 사회를 경악케 하였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이들은 영생교 탈퇴자를 감금하여 폭행한 사실이 있고, 교주를 연행하려던 경찰관에게 감금 및 폭행을 가하였으며, 영생교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진, 살인 및 유골이 다수 발굴되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법의 엄중한 단죄가 있었고, 언론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1994년 2월 MBC ‘PD 수첩’이 보도하였고, 1994년 3월 KBS ‘추적 60분’이 처음 보도하였고, 이후에도 같은 프로그램에서 1995년에도 보도하였으며, 2003년에는 2부작으로 보도하는 등, 그들의 악마성이 우리 사회에 그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적 공기(公器)이자, 민족 정론지로 자부하는 동아일보가 이런 이단 아류의 주장을 버젓이 신문광고에 낸다는 것은, 동아일보가 언론의 사명을 저버린 것이며, 우리 사회의 병폐를 부추기는 행위와 다름없다. 따라서 동아일보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독자들과 국민들에게 즉시 사과해야 하며, 자체 정화기능을 통하여, 재발방지를 위한 선언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에 빠져 있다 하여도, 국민들을 미혹하고 현혹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세력을 옹호하는 주장을 그대로 게재하는 것은, 언론 스스로의 책무를 저버린 매우 실망스런 행동이다. 아무리 돈을 받고 실어주는 광고라 하여도, 절반의 책임은 언론사에 있으며, 더군다나 과거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한 사이비 종교 집단을 추종하는 세력의 주장의 광고를, 게재한 것에 대한 책임은 벗어날 수 없다.
    • 오피니언
    • 사설
    2017-01-19
  • [목회자 칼럼] 다음 세대를 염려하면서 (2)
    우리 어른(기성)세대는 기독교 신자로서 신앙 생활하기에 정말 좋은 시대를 누려왔다. 자유 민주주의 나라에서 신앙의 자유가 100% 보장되고 타 종교와의 갈등도 전혀 없이 그리스도인 자신이 의지와 열심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 불신자들의 영혼을 사랑하므로 불쌍하게 여겨 얼마든지 ‘전도’ 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전도 할 수 있고 집집을 방문하여 예의를 갖추어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좋은 신앙 서적을 선사하고 전도지를 전해 줄 수 있다. 심지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찬양’을 부르면서 복음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종교적 전망은 밝지가 않다. 염려하면서 기도해야 할 당면 문제 몇 가지를 제시해 볼려고 한다. ○ 동성애 문제와 탈 도덕 탈 윤리주의의 범람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최고의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다. ‘최고의 피조물’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존재〉 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황송하고 과분한 축복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을 ‘남자(아담)와 여자(하와)’로 창조하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남자요 여자는 여자이다. 〈중간 사람〉은 없다. 따라서 때가 되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 夫婦〉가 되어 자녀(子女)를 출산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범죄 하여 마음이 어두워지면서 인간은 ‘엉뚱한 짓’을 끊임없이 연구 해 내었다. 남자와 여자가 때가 되어 서로 사랑을 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키우는 모습은 인간이 땅 위에서 누릴 수 있는 참으로 성스럽고 가장 행복한 모습이다. 그리고 자녀를 출산해야만 가문과 교회와 사회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고 지구를 가꾸고 지킬 수 있다. 〈동성애 同性愛 homosexuality〉 문제가 왜 인류 사회에 나타났을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이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셨고 결혼하여 자녀를 출산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행복하다(시편128편). 그런데 어찌하여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는 말인가?(로마서 1:26,27) 그 원인 제공자는 인간의 〈죄〉다. 〈죄〉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법칙과 질서’를 어기는 것(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1:28은 인간의 ‘죄성’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우리 사회는 〈소수 인권 보호〉 또는 〈성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합법화 하려는 시도와 운동이 끈질기게 시도 되고 있다. 온 세상이 어그러진 길로 나갈찌라도 우리나라 만큼은 ‘바른 길’ ‘인륜지도(人倫之道)’를 걸어가고 지켜야 한다. 한국은 세계의 희망이다. 동성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고 무섭게 진노하신다. 창세기 18:20,21과 창세기 19:4,5,24,25을 보라. 하나님께서 〈소돔 · 고모라〉라고 불리우는 한 도시를 철저히 응징하신다. 하늘로서 유황불이 쏟아져 내려 그 크고 화려한 도시가 〈롯 Lot〉이라는 한 사람의 가족만이 피신하고 모두 멸절되었다. 창조주의 진노를 초래한 결정적인 원인은 〈죄〉 였는데 그 죄는 바로 ‘동성애’ 였다. 이런 탈 도덕적이고 탈 윤리적인 질적으로 아주 사악한 〈동성애〉를 「합법화 하여 소수자에 속하는 그들을 보호해 주고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살 수 있도록 기정사실화 해 주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나라 어느 대도시의 시장과 유력하다는 대선 후보도 여기에 동조를 하고 있다. 법을 제정하여 〈동성애자〉들을 보호해 주어야 하겠노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참으로 고약한 사람들이다. 동성애가 범람하면 우리 사회는 혼돈에 빠지고 〈다음 세대로의 계보 · 계승〉이 심각하게 약화 되고 차질을 빚는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서도 동성애는 엄격히 〈금지〉 되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7-01-19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3 : 닭
    “2016년 KBS 연기대상에 베스트커플 상을 받은 뒤 연예인 차인표씨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50년을 살면서 깨달은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둘째, 거짓은 결코 참을 이길 수 없다. 셋째, 남편은 결코 부인을 이길 수 없다.’ 저는 여기에 넷째를 하나 더하고자 합니다. ‘목사와 장로는 결코 교회와 교인을 이길 수 없다.’” (최병학 목사) “2017년도 트렌드 키워드 슬로건은 ‘CHICKEN RUN’”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7』) 1. 정유년, 군주민수에서 사필귀정으로 지난해 연말 <교수신문>은 2016년의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 4년간 선정된 <교수신문>의 올해의 사자성어를 보면, 그리고 그 당시 정치권을 강타한 사건들을 곁들여 보면 이렇다. 2013년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공약철회, 국정원 댓글 사건, 2014년 지록위마(指鹿爲馬, 거짓이 진실을 가린다)-세월호 참사, 정윤회 문건 파동, 2015년 혼용무도(昏庸無道, 세상이 어지럽고 무도하다)-메르스 대응 무능, 배신의 정치 찍어내기, 2016년 군주민수-촛불집회, 탄핵 등. 2017년 새해를 맞이하며 2017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누구나 흔히 아는 사자성어인 ‘사필귀정(事必歸正) 곧, “모든 일이 반드시 옳은 길로 돌아가는” 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2. 정유년 각자 도생의 시대, ‘CHICKEN RUN’ 해마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주요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한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는 매년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2017년에는 어떤 트렌드가 한국 사회를 주도할 것인가? 『트렌드 코리아 2017』 (미래의 창)은 2017년의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CHICKEN RUN’으로 선정하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비상의 날개를 펴고 극적으로 울타리를 탈출한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런>(2000)의 주인공들처럼 철조망 울타리에 갇힌 것같이 정체와 혼돈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2017년에는 새롭게 비상하길 기원한 것이다. ¹ 1) C’mon, YOLO! 지금 이 순간, ‘욜로 라이프’ 욜로(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는 의미이다. 카르페 디엄(carpe Diem)이 삶의 태도라면 욜로는 태도이다. 자기지향적이고 현재지향적인 삶의 스타일로 후회없이 즐기고 사랑하고 배우라는 삶의 철학이자 이상향을 향한 실천을 중시하는 태도이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미래를 향한 기대를 접은 젊은이들이 부르짖는 절망의 외침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은 희망의 외침이기도 하다. 2) Heading to ‘B+ Premium’ 새로운 ‘B+ 프리미엄’ 가격 대비 성능이 구매의 핵심 고려요인이 된 가성비의 시대의 상징으로 단순히 가격을 낮춰 가성비를 확보하기보다는 좀 더 프리미엄한 가치를 제공하고 제 각격을 받는 방향으로 가성비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불황의 벽을 넘는 사다리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3) I Am the ‘Pick-me’ Generation 나는 ‘픽미세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췄지만 순위대로 피라미드의 자리가 주어지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선택(pick-me)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 고단한 세대를 잘 말해주고 있다. 4) ‘Calm-Tech’, Felt but not Seen 보이지 않는 배려 기술, ‘캄테크’ 공기가 언제 어디서나 사람과 함께 공존하듯이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지원하는 기기들을 통해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조용한 기술을 말한다. 캄테크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과 사람 사이에 인터랙션이 될 것이다. 보이지 않고 조용한 만큼 그 가능성과 파급력 또한 가늠하기 힘든 이 신기술은 얼마나 인간지향적인 형태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5) Key to Success: Sales 영업의 시대가 온다 인정과 막무가내식 설득에 호소하는 주먹구구식 관계의 영업을 넘어 다양한 매체, 접점, 채널의 과학적 분석을 통한 영업의 과학화가 기업의 핵심역량으로 다가오고 있다. 6) Era of ‘Aloners’ 내멋대로 ‘1코노미’ 철저히 혼자만을 위하면서도 때로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들로, 1인과 이코노미(economy)의 조합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발적으로 혼자인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얼로너(aloners)’라고 한다.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혼자 밥을 먹고 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터치하며 SNS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7) No Give Up, No Live Up 버려야 산다, 바이바이 센세이션 장기불황과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 일본에서는 ‘사토리족’의 버리는 삶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고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소유보다는 향유, 공유의 가치를 전파한다. 한국의 젊은 유목민적 물질주의자들이 이 버리는 삶에 동참하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자기 집에 비치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나 대여를 통해 그때그때 꺼내쓰는 ‘삶의 클라우드’현상을 만들고 있다. 8) Rebuilding Consumertopia 소비자가 만드는 수요중심시장 소비자가 시장의 권력으로 이동하여 실시간으로 소비자의 수요를 반영한 제품과 서비스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타났다. 9) User Experience Matters 경험 is 뭔들 포켓몬GO 게임을 위해 미국인들이 걸어 다닌 총량이 1,440억 걸음(지구와 달 사이를 143회 왕복하는 길이)으로 집계됐다.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만든 비결은 바로 경험과 재미이다. 물건을 파는 것에서 이제 경험을 파는 것으로 세상이 바뀌었다.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여 체험하거나 오감을 자극하는 경험을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10) No One Backs You Up 각자도생의 시대 전에 없던 심각한 자연재해와 경기침체에 대한 불안은 깊어 가는데, 정부의 문제해결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국민들은 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혼자 모색하고 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은 말 그대로 “스스로 알아서 살길을 도모해야한다.”는 뜻이다. “나는 억울하다”는 승복부재의 감정과 “나는 네가 싫다”는 타자혐오가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키워드는 ‘욜로 라이프’와 ‘각자도생’이다. 어쩌면 이 두 키워드는 동일한 현실 자각을 기반으로 한 트렌드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을 건 나밖에 없는 세상, 국가도 사회도 가족도 나를 보호해줄 수 없고,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절박한 심정이 지극히 현재지향적인 소비의 모습으로 ‘욜로 라이프’로 나타난 것이다. 3. 촛불의 미학 시인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며,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마지막 저서 『촛불의 미학』(문예출판사, 2001)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꽃은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생성을 향해 긴장되어 있는 세계이다. 몽상가는 거기에서 그 자신의 존재와 그 자신의 생성을 보는 것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며, 시간은 출렁거린다. 빛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불의 생성은 모든 생성 가운데 가장 극적이며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불에서 그것을 상상한다면 세계의 걸음은 빠르다. 그리하여 철학자가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는 모든 것을-폭력이나 평화까지도-꿈꿀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의 결합을 시로 메꾸고 시의 결함을 과학으로 메꾸려는 바슐라르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불꽃은 우리들에게 상상할 것을 강요한다. 불꽃 앞에서 꿈꿀 때, 사람이 상상한 것에 견주어 본다면 사람이 인지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꽃은 그 은유와 이마쥬의 가치를 매우 다양한 명상의 영역 안에 두고 있다. 어느 것이라도 삶을 나타내는 동사의 주어로서 불꽃을 취해보라. 촛불은 그 동사에 한층 생기를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은 다른 것과 융합하려고 하는데 반해 촛불은 결코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 그 자체이다. 사실 18세기 말엽 어떤 불꽃의 물리학자가 두 개의 촛불의 불꽃을 합치시키려고 헛되이 시도한적이 있었다. 그는 심지에 심지를 맞대고 촛불을 켰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고독한 불꽃은 다만 더 커지고 상승하는 일에만 취하여 합일되는 것 따위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각각 그 뾰족함의 미묘함을 그 꼭대기에 지키면서 수직성의 에네르기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 물리학자의 실험 속에서 볼 수 있는 서로 힘을 합쳐 불태우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두 개의 정열적인 마음은 얼마나 불행한 상징인가! 적어도 불꽃은 몽상가에 있어서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존재의 상징인 것이다! 불꽃은 생성으로서의 존재, 존재로서의 생성이다. 바슐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급속도로 진보하고, 시대의 흐름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제 희미한 빛이나 타다 남은 촛불의 시대는 지났다. 쓰이게 되지 않게 된 사물에 집착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꿈일 뿐이다. (……) 전등은, 기름으로 빛을 내는 저 살아있는 램프의 몽상을 우리들에게 결코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관리를 받는 빛의 시대에 들어왔다. 우리들의 유일한 역할은 전등의 스위치를 돌리는 일뿐이다. 우리들은 기계적인 동작의 기계적인 주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정당한 긍지를 가지고 점화한다는 동사의 주어가 되기 위하여 그 행위를 이롭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바슐라르여, 걱정 마시라. 대한민국에 다시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생성으로서의 존재가 존재로서의 생성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을 꿀 것이고, 그 촛불은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될 것이다. 4.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러시아가 낳은 최대의 영상 시인이자 현대 러시아의 가장 역량 있는 감독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비어 있는 세계의 지붕 밑에 고독하게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로 연결된 수많은 끈으로 이어진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세계와 인류의 운명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이러한 촛불의 상징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타르코프스키는 “전쟁과 사회적 궁핍, 갖가지 잔인한 고통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며 서로를 발견하는 일은 인간의 성스러운 의무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광화문과 서면 광장에서 촛불을 통해 만난 서로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론』에서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문명의 본질은 여가시간이다. 자본주의적 야만은 이 여가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바꾼 것(잉여가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야만을 문명의 길로 돌리는 첫걸음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헬조선, 피로사회, 경제적 절망, 양극화 모두는 여가시간의 부족에서 나왔다. 노동시간이 길수록 경제적 절망도 깊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1,790시간이며 독일은 1,371시간(2015년 기준)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으로 2,100시간이라고 한다. 반기문 전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일등이 되어라, 이등은 패배다.”,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 돌진 때 젊은 시절을 보낸 한국의 노인들이 자식, 순주한테 흔히 하는 조언과 닮았다. ‘앞만 보고 뛰어라’와 ‘여가가 있는 삶’은 늘 항상 대립된다. 그러나 지금 대한한국에 필요한 건 야간 노동과 밤잠을 줄이는 학습인가? 혹은 법이 정한 노동과 적절한 휴식, 짧지만 경쟁적이지 않고 협동을 기르는 창의적 학습 분위기인가? 탄핵 이후의 국면은 대통령 선거로 이어질 것이다. 촛불의 명예혁명이 문명으로 나갈지 야만으로 다시 뒷걸음질 칠지는 시대의식을 올바로 읽는 후보를 국민들이 제대로 뽑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마르크스 다음의 말은 의미있는 말이다. “이론이 민중에게서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는 오로지 이들 민중이 자신들의 필요를 실현시키는 정도에 달려 있다.” 2016년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80인 켄 로치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우리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렇다. 이명박근혜 시대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정유년, 붉은 닭들이여, CHICKEN RUN! 각주1)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악독한 트위디 아줌마가 운영하는 영국의 어느 양계장. 여기 사는 닭들은 언제 트위디의 밥상에 오를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다. 이중 가장 영리한 암탉 진저는 호시탐탐 동료들을 이끌고 탈출할 기회를 엿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고초를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달걀 판 돈으로는 성에 차지 않던 트위디는 거대한 치킨 파이 기계를 들여놓고 닭들을 대량 학살할 음모를 꾸민다. 치킨 파이 기계에 휩쓸려 죽을 뻔한 진저는 탈출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수탉 록키와 함께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탈주 계획을 세운다는 이야기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2017-01-19
  • [교회법률상식] 합동 총회 임시 목사인가 시무 목사인가?(1)
    -임시 목사이면 임시 목사와 위임 목사 모두 정회원-시무 목사이면 시무 목사는 정회원, 위임 목사는 언권 회원 소제목과 같이 시무 목사를 고집하고 시행하는 현실은 법리적으로 개정 전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개정한 결과 노회에서 “시무 목사는 정회원”이 되지만 “위임 목사는 언권 회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각 치리회가 시무 목사나 위임 목사나 정회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필자는 심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된 것을 먼저 밝혀 둔다. 1. 본건의 사실 관계 제95회 총회가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개정하기로 결의하고 각 노회 수의 결과를 제96회 총회에 개정함이 가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제96회 총회장이 당시 정황을 반영하여 헌법 개정 공포를 하지 아니하고 총회를 파회한 결과 법률상으로 노회 수의까지 마친 개정안이 폐기 처분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래서 제96회 총회 이후 제98회 총회 전까지는 임시 목사로 계속 시행하였으나 폐기 처리된 후 2년이 지난 제98회 총회에 7개 노회에서 임시 목사 개정 건을 공포하여 시행할 것을 헌의하였고, 제98회 총회에서 그 헌의 안을 토의하는 중에 “이미 공포할 권한이 있는 제96회 총회장이 공포하지 아니한 결과 자동 폐기 종결되었으므로 공포 시행은 불가하다.”라는 법리적 발언에 대응하여 총대 중 한 분이 “추완(追完) 공포하면 됩니다. 나 법학 박사입니다.”라는 법리에 반하는 억지 발언에 마지못해 제98회 총회장이 “추완 공포합니다.”라고 선언하였다. 제98회 총회가 파회되자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재빨리 헌법 책자를 개정안으로 인쇄하여 서점에 진열되었고 총회 임원회가 시무 목사 시행 지침을 각 노회에 하달하여 현재까지 시무 목사로 시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 개정했다고 한 시무 목사에 관한 법리적 문제점 개정되었다고(이하 개정안) 하는 법조문 내용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노회 허락으로 조직 교회는 1년간 시무 목사로 시무하게 할 수 있고 만기 후에는 다시 노회에서 1년간 더 승낙을 받을 것이요 미조직 교회는 3년간 시무 목사로 시무하게 할 수 있고 만기 후에는 다시 노회에 3년간 더 승낙을 받을 것이요 노회 결의로 당회장 권을 줄 수 있다.”(제98회 총회 결의 및 요람 p.74, 참조)라고 하였다. 본 개정안의 시행에 관하여 여러분들로부터 질의를 받았다. 이는 질의하는 목사나 장로들 역시 법리적 문제점을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 시무 기간이 조직 교회는 2년, 미조직 교회는 6년뿐 시무 목사의 시무 기간에 관련한 문제점에 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 ① “조직 교회는 1년간 시무 목사로 시무하게 할 수 있고 만기 후에는 다시 노회에서 1년간 더 승낙을 받을 것이요”라고 한 내용과 ② “미조직 교회는 3년간 시무 목사로 시무하게 할 수 있고 만기 후에는 다시 노회에 3년간 더 승낙을 받을 것이요”라고 한 내용의 문장이 “조직과 미조직, 1년과 3년”만 다르고 그 외에는 글자 한 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법조문의 문장과 글자 하나까지 다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직 교회의 시무 목사는 공동의회의 결의로 총투표 수 3분의 2이상의 가와 재적 입교인 과반수의 서명을 받아 노회의 허락으로 1년간씩의 시무로 2번만 시무할 수 있고 3번째는 위임 목사로 청빙을 받지 못하면 그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의미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요, 수십 년간 시행해 온 역사이다. 마찬가지로 미조직 교회의 시무 목사도 역시 공동의회의 결의로 총투표 수 3분의 2이상의 가와 재적 입교인 과반수의 서명을 받아 노회의 허락으로 3년간씩의 시무로 2번만 시무할 수 있고 3번째는 당회를 조직하여 위임 목사로 청빙을 받지 못하면 그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조직 교회와 미조직 교회가 글자 한 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은 문장의 시무 목사로서 시무할 수 있는 기간만 2년과 6년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즉 조직 교회가 2년만 시무 목사로 시무한 후에도 계속 시무를 위해서는 위임 목사로 청빙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이 미조직 교회도 역시 6년만 시무할 수 있고 계속 시무를 위해서는 6년 이내에 당회를 조직하여 위임 목사로 청빙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차라리 개정 전 미조직 교회의 임시 목사는 계속 시무 허락만 받으면 몇 십 년이라도 시무할 수 있는 개정 전의 임시 목사의 제도보다 시무 목사의 입지가 더 어렵게 되었다고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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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성공칼럼] 새로 생긴 원함
    성공이란 내 원함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어떤 사람은 “나는 돈을 원합니다.”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건축하기를 원합니다.” 등등의 자신의 원함을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전이나 후에도 행복하기를 원하는 행복한 성공을 원합니다.” 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즉 “항상 자유롭고 기쁘고 밝고 당당하고 생로병사를 초월한 본래의 나를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든 원함은 ‘자기중심의 원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은 내가 더 많이 소유하고, 내가 높아지고, 내가 기뻐하고, 내가 자유로운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원함을 이루어주는 것을 자신의 원함으로 삼는 ‘타인 중심의 원함’을 원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기에 상대방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을 그들도 원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원함을 이루어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기업에서 ‘본성리더십’을 강의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업이기에 돈이라고 하자. 돈은 사람들이 모여야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본성 즉 내가 밝고 당당하고 기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런 본성을 유지하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중심에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 목적이 이기적이고 거짓이 있고 악하다면 본성과 관계를 잃고 결국에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의 원함을 이루어주는 것을 원함으로 사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목사는 성도를, 성도는 목사를 위해 온 힘과 정성을 다하는 사랑의 관계가 상대방의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원함을 이루어주는 것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어떤 상황이든, 어떤 역할을 하든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원함’이 있다.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거짓과 악을 행하거나 걱정과 분노가 자리 잡을 여지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예를 들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하자.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원함으로 하면 화내거나 미워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걱정지향, 짜증지향으로 가지 않고 해결지향, 행동지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부부나 기업이나 국가는 처음에는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시작을 한다. 그래서 힘을 얻고 열정을 불태운다. 그 열정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로 인해 조직과 건물이 생기고 물질과 힘이 생긴다. 계속해서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텐데 여기에서 자기 자랑과 자기 소유, 자기 쾌락, 자기지배를 목적으로 함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환경에서든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성공하는 길이며, 이 땅에서 사랑의 세계인 영적인 세계로 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새로 생긴 원함은 먼 후일 죽음 후에 신적인간의 모습이신 예수 나의 주님을 뵙는 것이다. 요한이 만난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은 인자 즉 사람의 아들 같은 주님을 만나고 싶다. 직원이 회장을 만나는 것이나 국민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고 만날 조건을 갖추어야 만날 수 있다. 하물며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조건을 갖추어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성공이란 내 원함을 이루는 것을 시작으로 자기중심, 타인 중심,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원함을 거쳐 주님의 얼굴을 뵙기 원하는 원함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 런지 기대감이 크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행하면서 내 삶을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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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은혜의 말씀] 하나님 나라 (로마서 14장 17절)
    오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천국 시민권자입니다. 성도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성도의 삶의 목표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백성들은 이 땅에서 가난해도 애통해도 슬퍼도 아파도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는 끊임없이 이기적인 무한 경쟁이며 모순과 갈등과 문제투성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부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가난해도 애통해도 슬프고 핍박을 당해도 그 중심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그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서럽게, 의롭게, 왕따를 당하면서도 가슴에 깊은 고요가 있었던 것은 천국이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관심과 선택과 집중입니다.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나라의 풍조를 바라보면 결국은 헛된 일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달라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천국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지 지옥에 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은 썩을 것들을 구하고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그런 것들 중심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관심사항과 중심이 달라야 됩니다. 먹고 마시는 선에서 멈추면 안 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깊은 고요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 뭐라 하든지 흔들리지 않는 세상 풍파에 요동치지 않는 부평초처럼 흔들리지 않고 주님 주신 평강을 가지고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세상이 뒤집어져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외부적인 것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남들이 뭐라 한다고, 세상이 뭐라 한다고 떨지도 쫄지도 말고 우린 주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천국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외부적인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 평화 근심 없는 축복 뒷골 안 땡기는 복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땀 흘림이 없이는 성공이 없고 눈물의 기도가 없이는 응답이 없고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의 나라를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내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중심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삶 하늘이 두 쪽이 나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반열에 서서, 의의 길을 걸어가고 반듯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붙잡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병들고 가난하고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적이 와서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지만 우리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풍성케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며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이 철철 넘치고 희락, 구원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기쁨을 샘솟듯, 은사를 불 일듯, 청춘을 독수리 날개 치는 것 같이 시온의 대로를 활보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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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중독칼럼] 분노조절 장애와 로직에러(1)
    요즘 사회적 문제 중 하나는 분노조절 장애 문제가 늘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운전자들의 보복 운전과 폭력성을 들 수 있다. 왜, 예전에 없던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본인의 입장을 피력하려고 한다. 하나님 편에서 모세를 볼 때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십계명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분노를 참지 못했다. 바울은 많은 일을 한 사도였지만 마가의 일로 바나바와 다투었고, 결국 그 순간만큼은 갈라서야했다. 일반적으로 일중심형 사람들은 결과, 승급에 있어서 항상 관계 중심 형보다 단기과정에서 거의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인정받고 승진도 빠르지만 결국 사람을 얻지 못하는 것을 심심찮게 본다. 물론 결과의 책임을 져야하는 스포츠라면 전혀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 즉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일중심형의 사람들은 결국 관계를 소홀히 함으로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로직에러(Logic Err)란? 로직에러(Logic Err)라는 용어는 본인이 처음으로 창시했다. 스마트폰, 테블릿, 컴퓨터는 모두 로직(Logic)화 되어 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로직화된 문명 속에서 자라고, 자신의 재능, 즉 뇌가 이런 쪽으로 발단된 DNA는 훨씬 더 잘 적응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뇌의 전두엽 조직은 더욱 로직(Logic)에 고착화 되어 간다. 결국 일을 빠르게 처리해 내는 능력은 발달할지는 몰라도 기다리고 절제하고 인내하는 능력의 뇌 조직은 약화되어 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짜증내고 화로 분출하고, 포기하거나, 목표와 꿈을 잃게 되는 원흉으로 본인은 보고 있다. 물론 인간관계 중심의 능력은 더 없어지고 대인 기피증이나 우울증은 더욱 심화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참 게임에 몰두해 있는 남편이나 자식이 있다면 지금 그들의 뇌는 통제 불능 상태에 놓이기 쉬운 상황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한다. 우스갯소리이지만 게임에 몰두해 있는 남편이나 자녀들에 분노하게 만들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어진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라. 왜 우리가 운전할 때 더 욕과 화를 많이 분출하게 되는 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하리라 본다. 단, 관계 중심형의 사람들은 로직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듯 하지만 결국 문화와 삶의 전반에 걸쳐, 수학을 중시하는, 뿌리 내려져 있다. 이 쯤하면 독자들은 이 문제의 해답을 눈치챈 분들이 있을 것이다. 로직에러현상. 줄여서 로에현상, 본인은 노예현상이라고 읽기도 한다. 중독문화에 노예된 현 문화인들을 보며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제시하고 싶다. 성경을 읽으라. 기도하라. 그리고 성령을 체험하라. 과학자들은 믿지 않겠지만 우리의 감정과 뇌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을 맞보게 될 것이다. 이 통로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주셨다. 관계 중심의 교회. 회복되어야할 덕복이다. (중독문화 -분노조절 장애와 로직에러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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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시사칼럼] 정유년을 맞으며
    정유년(丁酉年) 벽두(劈頭)부터 문득 가덕도(加德島)를 들러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입소문을 타고 살이 바짝 오른 제철 대구처럼 밀려들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의아할 무렵 작년 내린 집중호우 탓에 토사와 바위가 쏟아져 입산금지가 되었다는 팻말이 기도원 진입하는 입구에서 겨울 나그네들을 반겨주었습니다. 등 뒤론 제법 시린 바람이 길을 재촉하는데 앞으로는 코발트빛 겨울바다를 반사경 삼아 내리쬐는 겨울햇살 탓에 선글라스를 준비한 동행의 지혜를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뜻밖의 인적 없는 해안은, 입 대신 눈을 뜬 채로 완벽하게 어우러진 전능자의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찬양하게 만드는 그 자체로 견줄 데 없는 기도길이었습니다. “정유년 그해 초봄, 가덕 방면 전투는 헐거웠다. 적의 전투의지가 내 몸에 전해지지 않았다. 전투라기보다는 부지런히 잡초를 뽑는 농사일 같은 느낌이었다. 가덕 해역으로부터 함대를 철수시켜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김 훈, 『칼의 노래』, 20) 1597년 1월 하순, 조정에서 연이어 벌어진 어전회의에서 선조(宣祖)는 이순신을 군령 위반과 허위 보고를 이유로 치죄하기 위해 체포령을 내렸습니다(선조실록 1. 23, 27).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그렇게 붙잡혀 한양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악의에 찬 모함과 잔인한 고문 그리고 모친상의 비극이 이어지는 사이, 왜적(倭敵)들은 14만 대군을 앞세워 재침을 감행합니다. 또 하나의 전쟁 정유재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한 말은 옳았습니다. 정확하게 일곱 갑자의 시간이 흐르고 난 2017년의 정유년 또한 분별력 없는 위정자들이 토설해 놓은 혼돈을 감당하느라 민초들만 분주(噴走)합니다. 이듬해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임진년 옥포 싸움 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총상을 입은 채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북을 계속 울려라!” 김훈은 정유년을 중심으로 이순신을 묘사하면서 소설의 끝을 이렇게 맺습니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칼의 노래』, 342).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이 존재합니다. 400년 전 가덕도 앞바다에도, 4,000년 전 홍해 앞바다에도, 칼로 벨 수 없는 적들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 싸움에서 이길 장사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이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케이블 tvN <도깨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도깨비는 전래동화처럼 투박한 방망이가 아니라, 커다랗고 신비로운 검을 사용해서 달려오는 차량도 쪼개고 악령도 소멸시키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킵니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난맥(亂脈)을 그 옛날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단칼에 잘라버렸던 알렉산더 같은 이가 나와 해결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해골 언덕에 깊이 박힌 그 십자가야말로 누구도 뽑을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베지 못할 것이 없는 신령한 무기입니다. 정유년을 시작하며 가덕도에서 바라본 하늘과 바다처럼, 사람들 사는 땅 위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검이 만들어내는 화평의 장관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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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소강석 칼럼] 민족적 치킨런을 해야 할 때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 코리아 2016’에서 한국 소비문화의 흐름, 곧 소비트렌드의 키워드를 몽키바스(Monkeybars)로 제시하였다. 몽키바는 어린이 놀이터나 군대 유격장에서 볼 수 있는 구름다리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2016년은 대한민국을 둘러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깊은 골을 이루게 될 것이기에 원숭이가 구름다리를 넘듯 신속하게 건너야 안정된 2017년에 도달한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정치, 경제, 사회적 예견은 크게 볼 때 거의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몽키바를 염두에 두고 아주 신속하고, 현명하게 건넜어야 했는데 위기의식 없이 안일하게 대처하고 독단에 빠졌다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러면 2017년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치킨런이다. 올해는 닭의 해이다. 치킨런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 영국의 어느 양계장의 닭들이 닭장에 갇혀서 알이나 낳으며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욕심 많은 주인아줌마가 알만 가지고는 만족을 못해서 치킨파이를 만드는 기계를 들여온다. 닭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처하면서 어떻게든지 닭장을 탈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때 록키라는 슈퍼 닭이 나타나 닭들이 함께 날 수 있는 제트기를 만들어서 닭장을 탈출한다는 이야기다. 마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닭들이 어떻게든지 닭장을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다 비상의 날개를 펴고 극적으로 울타리를 넘어 탈출 한 것처럼, 2017년에는 한국사회도 위기의 담장을 넘어와 치킨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 이사야서를 보면, 바벨론에 끌려가 종노릇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고토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려면 1500km가 넘는 거칠고 험한 아라비아 광야 길을 걸어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적들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감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비상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광야의 독수리는 솔개나 매와는 다르다.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광야에 돌아다니는 산양이나 염소, 심지어 늑대까지도 낚아채서 잡아먹는다. 얼마나 날갯죽지에 힘이 강하면 그 무거운 수십 킬로 되는 짐승을 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겠는가.지금 우리 사회는 독수리의 날갯짓처럼 비상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4차원의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이뤄야 한다. 기존의 매뉴얼이나 안일한 사고로는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치킨런의 닭들처럼 4차원적 상상력을 통하여 위기와 불가능의 닭장을 넘어 비상해야 한다. 아주 오래된, 낡은 일반 엔진으로는 적폐에 갇혀버린 어두운 맨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제트기 엔진이나 헬리콥터 프로펠러 같은 창조적 상상력과 역사의식으로 날아야 한다. 2017년은 위기의 해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새해는 결단의 해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국가 전체의 공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정파나 진영, 이념 논리를 초극해서 함께 손잡고 날갯짓을 해야 할 때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 민족이 비상하고 이륙할 것인가. 4차원의 창조적 마인드와 필사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제 2017년은 민족적 치킨런을 하자. 절망과 갈등의 담장을 넘어 날자. 모두 함께 힘을 모아 내일의 푸른 하늘로 솟구치며 비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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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17-01-19
  • [성서연구] 대세가 아니라, 옳음을 따르라!(대상 12장 1-7절)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시는 방법 중에는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올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다윗을 도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들입니다. 이미 아시는 대로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 왕 자신이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사람들은 사울 왕의 동족들입니다. 1~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그들은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화살도 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대세를 따르지 않고 옳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대세가 아닌 옳음을 따르는 모습을 보십시오. 첫째, 대세를 따랐다면 자신들의 혈족인 사울을 지지하고 다윗을 적대시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둘째, 당시에 다윗의 형편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블레셋의 시글락에 망명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블레셋이 어디입니까?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경험은 적들 중 가장 강력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은 늘 블레셋의 속국처럼 살았습니다. 더구나 블레셋도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인 일과 다윗이 장군이 된 후로 블레셋을 힘들게 했기에 다윗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블레셋이 지금은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지키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이런 상황은 다윗의 처지가 이스라엘 안에서 얼마나 위태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다윗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셋째, 아직도 엄연히 사울이 왕이었으므로, 다윗을 돕는 것은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본문의 베냐민 사람들은 왜 다윗을 도왔을까요? 그것은 다윗을 돕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내정한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지금은 다윗이 어렵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실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의 권력인 사울보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들은 대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또 이들은 사울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다윗은 골리앗을 이겨 사울을 위기에서 건졌고,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사울의 사위이기도 했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도운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도 혼란합니다.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무엇이 옳은지 알기 힘들 정도로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현안들에 대해 이미 결정이 난 것처럼 어느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느낌도 받습니다. 국민들은 정치적 입장이나 지연과 학연, 혹은 어떤 설에 자극받고 있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대세나, 이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즉 옳음을 따라, 진리와 정의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인데, 우리까지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무엇이 옳은지 깨닫게 해 주시길 기도하고, 그 옳음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세가 아니라 옳음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결국엔 진리가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 편에 서는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주여, 이 땅의 백성으로 하여금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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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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